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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26-02)


아그립바 왕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바울

사도행전 26장 13-23절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만난 간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할 메시지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앞에 당신이 만나 예수님을, 당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라고 사랑과 격려와 간증을 나누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지금까지 신실하게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말을 다 들은 베스도는 바울이 미쳤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참말을 한다고 말하며 아그립바 왕에게 호소합니다. 모인 자들이 바울의 무죄를 인정하지만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했으므로 그는 로마로 보내지게 됩니다.

 

다메섹에서 만난 주님(13-18)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십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어두움에 권세에서 빛의 자녀로 삶이 변합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변화의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변화되길 원해 그리스도 앞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13왕이여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14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13-15)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통해서 그는 다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간증을 합니다. 누구보다 더 기독교의 반대자였고, 핍박자였던 자신이 어떻게 가장 적극적인 복음의 옹호자가 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된 사실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변론 진행은 간략한 확증(confirmatio)과 반박(refutatio)에 이어 결론(perortio)을 제시합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 내용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또 다시 간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반복적인 변론에 신경질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쁘게 변론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주신 사명에 대한 충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통해 주셨던 바울의 사명은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9:15)이였습니다. 지금은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임금들 앞에 복음을 전할 기회라는 것을 깨닫고 전한 것입니다. 이런 기회가 없으면, 총독이나 왕들에게 복음 전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메섹 사건을 언급한 내용은 이미 9장과 22장에서 언급되었습니다. 9장은 3인칭 시점에서 기록된 내용이고, 22장은 바울이 직접 증언한 내용입니다. 이제 26장 역시 바울이 증언한 내용인데, 앞의 두 기록과 몇 가지 차이를 드러냅니다. 먼저 바울이 경험한 빛을 여기서 가장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13). 9장에서는 ‘빛’(2), 22장에서는 ‘큰 빛’(6)인데, 여기서는 ‘해보다 더 밝은 빛’(13)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임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바울이 빛의 밝기를 강조한 것은,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빛을 전하는 사명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습니다(18).

 

다시 그 사건으로 들어가면,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서 정오의 햇볕보다 더 밝은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간증을 합니다. 그 빛 앞에서 바울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땅에 엎드러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분명하게 그 빛 속에서 히브리 음성으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주님’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 소리’가 말했다고 밝힙니다. 이는 그 빛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이었음을 증명합니다(딤전 6:16). 그 음성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에서 “가시채를 뒤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시채를 뒤발질한다’는 것은 수레를 끌거나 짐을 지고 가는 짐승이 반항하는 모습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짐승이 가려고 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바울이 주인의 뜻에 따르는 것을 싫어하고 반항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바울은 그때까지 하나님을 섬긴다고 확신하며 살아왔습니다. 그 앞에 나타난 이 빛과 음성은 무엇입니까? 바울의 행보를 막아선 존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 존재는 바울에게 다른 길로 가도록 촉구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쉽게 발걸음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이제껏 걸어온 인생길에 마음과 목숨과 힘을 모두 쏟아 부었는데, 어떻게 몸만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돌이키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버티고 뒷발질하면 짐승의 주인은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매질을 합니다. ‘가시’나 ‘쇠로 된 침’으로 고통스럽게 해서 바른 길을 가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뒷발질을 하면 할수록 그렇게 행동한 짐승은 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찾아오신 음성에 대해 “주여 뉘시니이까?”(15)라고 묻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15)라고 응답하십니다. 바울은 매우 놀랐습니다. 분명히 예수는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무덤에 장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죽었던 예수를 살아나셨다고 주장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그런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넣었던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진짜 살아나셨고, 그 분이 자신의 행동을 보고 계셨습니다. 이때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사실이란 것에 자신의 모든 존재가 파산을 맞고 온몸에 힘이 빠지고 죽은 시체처럼 땅에 엎드려져 죽음을 경험합니다(14). 이 순간에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통해 기독교를 자신의 종교로 새롭게 받아 들렸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회심자는 바울입니다. 핍박자였고 박해자였던 바울이 가장 적극적인 복음 전도자로 변화된 것은, 그는 부인할 수 없는 부인할 수 없는 체험과 간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보여주신 진리를 통해 변화된 것입니다.

 

사명을 주신 하나님(16-18)

빅토로 위고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이마에 써 놓으신 말은 ‘희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잘못된 방법으로 가는 자녀를 본 부모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길로 가는 자녀를 보면서 가슴을 치는 부모의 심정으로 바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바울의 영적은 무지에 대해 동정과 긍휼의 마음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잘못된 길로 가느라 더 이상 힘겹게 살지 말고 구원의 길로 오라고 부르셨습니다.

 

16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16-18)

 

바울은 이어서 자신이 이 사명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 왔음을 증거 합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온몸에 힘이 빠지고 죽은 시체처럼 땅에 엎드려졌습니다(14). 쓸러져 있는 바울에게 주님께서는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고 명령하셨습니다(15). 그리고 그에게 할 일을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 표현은 에스겔에게 하신 말씀과 유사합니다.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보좌 환상을 보았을 때, 에스겔을 찾아오신 여호와께서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겔 2:1)고 하시고, 그를 패역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종과 증인’을 임명하십니다. 바울은 예레미야처럼 ‘그들에게서 구원을 받을 것이고’(렘 1:8,19), 여호와의 종의 일, 곧 ‘눈을 뜨게 하며 광명한 대로 이끄는 일’(사 42:7,16)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독특한 표현이 추가되었습니다. ‘죄 사함’과 ‘기업’을 얻게 하는 일을 증거 하는 임무입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열두 사도에게 주신 임무였습니다(눅 24:44-48).

그러므로 바울을 찾아오신 주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서 그에게 사도 임명 선언이요, 그 이후의 말씀은 바울의 사도적 임무를 부여하십니다. 이후에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심’과 자신의 사도직 임무를 연결하십니다. 그의 사명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에게 가서 들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하며,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주님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지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하고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주님을 핍박하던 바울에게 영광스러운 사명을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그릇에 담긴 물건에 따라 그릇의 용도와 가치가 결정되듯 질그릇 같은 바울에게 고귀한 복음이 담겨져 귀한 일에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애틋하고 강렬한 주님의 사랑을 맛보았기에 핍박이 아무리 거세도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명은 주님의 ‘사환과 증인’이 되어 사람들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은 주님이 주신 사명의 길에서 결코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19-23)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긴급하게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전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일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감당하는 일꾼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간절히 드려야 합니다.

 

19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20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21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22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23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19-23)

 

바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해 논제를 확증하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그는 하늘 비전에 순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라고 표현하면서, 자신의 삶이 다메섹 도상에서 자신에게 임한 하늘의 거룩한 뜻을 따르는 삶이었다고 지적합니다(19). 사실상 이 말에는 예수님께서 신적인 존재하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과 지금까지 삶의 일치성을 강조합니다.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고 선포했음을 고백합니다(20). 그들에게 선포한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하라는 것’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18절의 ‘나를 믿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구체화됩니다.

 

사도행전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떠난 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표현된 회개가 참된 것임을 보여 주는 열매를 말합니다. 이 표현은 이미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도 등장한 바 있습니다(마 3:8; 눅 3:8).

 

바울은 자신이 받은 소명을 자신의 고소 상황과 연결합니다. 이러한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자신을 성전에서 잡아 죽이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21). 표준새번역에서는 원문의 의미를 잘 살려 ‘이런 일들 때문에’라는 문구로 21절을 시작합니다. 바울이 성전에서 체포된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자행된 유대인들의 폭력에 대한 비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결론으로 다다르고 있습니다. 22-23절에서 ‘그러므로 도움을 받아’라는 표현으로 시작해서 자신의 변론에 대해 결론을 맺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회개를 선포할 때 주장한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예언한 내용과 완전히 일치합니다(22). 다시 말해 그가 선포하는 복음은 선지자들과 모세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의 사역 속에 성경의 모든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눅 4:21; 7:21-22;10:23-24; 16:16; 24:25-27, 44-48). 그의 사도들 역시 동일한 사실을 증거 했습니다(행 2:22-28,38-39; 3:17-25; 8:34-35). 바울 역시 이 사실을 분명히 선포해 왔습니다(행 13:26-41; 17:3). 둘째, 성경에서 반드시 되리라고 예언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입니다(23). 셋째, 구약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신실한 증인들을 통해 이와 같은 사역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사도들과 바울은 예수님의 신실한 증인으로서 구원의 복음을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파해 왔습니다.

 

결국 바울은 구약성경의 핵심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이며, 구약의 예언은 예수님의 구원 사건으로 성취되었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러한 성취에 근거한 구원의 소식이 바로 복음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성경의 모든 예언과 약속이 결정적으로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메시지는 유대교의 신앙에서 이탈하거나 빗나가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연설을 들은 사람은 누구든지 그가 유대인을 대적해 살아 왔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유대교의 핵심적인 신앙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영적 열심’은 진리를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생명력이 있기에 진정한 복음을 소유한 사람은 생에 대한 정열을 갖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 선교를 위해 쓰임을 받았듯이 당신도 가정과 직장, 그리고 학교에서 복음을 위해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힘과 지혜로 담대히 복음을 전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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