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26-01)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한 바울
사도행전 26장 1-12절
성경 주석가인 보너 박사(Dr. Boner)가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당신의 열심을 저울에 달아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열심을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당신의 열심을 달아보니 100근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무척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곧이어 열심의 내용을 분석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열심은 100근인데 그 중에 50근은 이기적인 열심이고, 25근은 당파를 짓는데 사용한 열심이고, 22근은 자기의 명예를 위해 노력한 열심이었고, 3근만이 진정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열심에도 나쁜 열심이 있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열심은 좋은 열매를 맺지만, 잘못된 방향인데도 열정적인 것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킵니다.
- 사도행전 26장은 21-25장 전체를 요약합니다. 이제 바울은 많은 고관들 앞에서 담대하게 특히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을 변호합니다. 자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어릴 적부터 엄격한 유대 교육을 받은 성장한 유대인임을 강조합니다. 그 때문에 과거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그 열심 때문에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소개합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1-3)
신앙 생활하다가 새로운 진리를 깨달으면, 지나온 시간을 허비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불필요한 시간은 단 일 초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는 기회며 성장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모든 시간들이 유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1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2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3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나이다(1-3)
사도행전 25장 마지막에서 총독 베스도는 자기 부인 베니게와 아그립바 왕 그리고 고위 관료들과 함께 바울을 재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고소했지만, 총독 베스도는 그 동안 바울을 심문해본 결과 죄목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미 바울이 로마 가이사 황제에게 재판을 받겠다고 상소했기 때문에 죄목을 찾아 같이 송달해야 했습니다.
이에 총독 베스도는 아그립바 왕에게 바울을 심문할 기회를 줍니다. 사실 바울의 변론은 법정에서 변론이 아니라 일종의 청문회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을 고소했던 유대인 지도자들이 배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었고, 자신이 살아온 지난 삶을 회고하면서 고난의 길을 가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자리를 자기 변호하는 자리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하는 자리로 만들었습니다.
(1) 변호할 기회를 준 아그립바 왕(1)
바울의 연설은 25장의 마지막 부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행 25:23-27). 총독 베스도에 이어 아그립바 왕은 바울에게 변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총독 역시 바울을 로마로 보내기 전에 그에 관한 고소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해야 했기에 이런 자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은 유대인의 문제에 대한 최고 권위자였으므로 총독이 그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먼저 총독은 왕과 최고 관리들에게 바울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가 한 보고의 핵심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서 아주 심각한 고소를 당했으나 자신이 조사한 결과 그에게 중형을 내릴 만한 범죄 사실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아그립바 왕은 바울에게 변론한 기회를 주었습니다(1).
(2) 변호 기회에 감사한 바울 (2-3)
바울은 감사함으로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을 시작합니다. 그는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2)라고 시작합니다. 바울은 계속적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한 것을 ‘다행히’라고 표현하겠습니까? 아그립바 왕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유대의 종교, 문화 그리고 풍습을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왕 앞에 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뜻은 예수님께서 처음 만나는 순간에 사도행전 9:15에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계속적으로 재판 받고 있는 것이 귀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 가운데 있음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난 2년 동안 이런 기회를 얻기를 많이 기대해 왔습니다.
기소에 대한 바울의 변론(4-12)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성장합니다. 육신만이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자랍니다. 그것을 변화라고 해도 좋습니다. 더 다양한 세계관과 더 많은 기회들, 더 새로운 것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계속 변합니다. 문제는 영적인 변화의 방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인가 그렇지 않는 방향인가입니다.
4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과 더불어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황을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5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6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 8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9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10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11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12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4-12)
바울 자신의 회심에 대한 거론은 세 번째입니다. 이번에는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부름 받았다는 소명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소명을 받들기 위해 복음을 전했고, 이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1) 유대교에서 성장한 자신을 변호(4-7)
바울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는 아그립바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손을 들어 올리면서 연설을 시작했습니다(1). 이는 재판관(베스도)와 배심원들(아그립바, 베니게, 천부장들 그리고 고위관들) 앞에서 변증 주제를 실제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전재들을 진술합니다. 이 진술은 전체 연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첫째는 청년 시절(4-8), 둘째는 박해자로 활동(9-11),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 회심, 소명(12-18) 등으로 나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도 기독교를 열심히 핍박하는 자였다는 것을 밝힙니다. 자신은 기독교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렇게 급작스러운 태도의 변화가 생긴 것은 그만큼 기독교에 대해 확실한 신념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얼마나 철저한 삶을 살아 왔는지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4). 자신이 바리새인으로 살았던 것을 인정할 것이라고 말합니다(5). 이 사실은 앞에서도 여러 차례 이 사실을 밝힌 바 있습니다(행 22:3; 23:1,6; 24:14-15). 변론 때마다 자신이 경건하고 신실한 유대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 변론에서도 그는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5b)고 증거합니다. 바울은 유대교 안에 여러 분파가 있는데, 자신이 속해 있던 바리새파가 가장 엄한 분파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유대교를 가리켜 “우리 종교”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그가 여전히 유대교의 종파 안에 소속되어 있음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속감은 “내 민족”(4), “우리 조상”(6), “우리 열두 지파”(7)란 표현에도 잘 나타납니다.
바울은 이어서 자신이 심문을 받는 것은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니이다”(7)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조상에게 주신 약속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여기서 ‘약속’이란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약속입니다(8). 바울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은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소망, 곧 죽은 자들의 부활과 관련해 재판을 받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행 23:6; 24:15), 유대인 열두 지파는 하나님을 밤낮으로 섬기는 가운데 이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렸습니다(7). 비록 사두개인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눅 20:27; 행 23:8) 이스라엘 백성 대다수는 죽은 자의 부활을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행 23:8). 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의 소망이 성취되기를 아직도 기다렸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부활에 대한 소망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선교지에서 계속 가르친 내용이었습니다(행 13:32-33).
(2) 믿음을 촉구하는 바울(8)
바울은 앞서 베스도가 아그립바에게 말한 것을 입증하듯이 죽은 자의 부활을 중심으로 설교합니다. 바울은 더 담대하게 아그립바를 향해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8)라고 대답 대신 반문합니다. 이 질문은 지연된 소망의 내용을 밝힙니다. 곧 죽은 자들의 부활입니다. 여기서 부활은 일반적인 부활을 말하고 있지만, 바울의 의도는 예수님의 부활을 염두해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진술을 다음 단계로 이끕니다. 즉, 바울의 논리는 하나님께서 죽인 자들을 살리실 수 있다면, 첫 사람으로 살리신 예수님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3) 복음의 핍박자였던 바울(9-12)
계속해서 과거에 바울은 자신이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을 대적하며 박해했던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이 성도들에게 가한 모든 박해가 곧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을 대적하는 행동이라고 여겼습니다(9). “나사렛 사람 예수”란 호칭은 십자가에 처형되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과 관련해 사용되어 왔습니다(행 2:38; 3:6,16; 4:10,12,17-18,30; 5:28, 40-41; 8:12,16), 청중의 불신앙이 당연하다고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그랬기 때문입니다(9). 유대인들의 눈에 이 분파는 지상에서 지워 버려야 할 ‘이단’으로 보였습니다(참조, 22:22).
그러므로 개종 전 바울은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는 행위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신성한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9). 예수의 이름을 대적해 많은 일을 행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는 데 일종의 의분을 갖고 행했습니다. 바울도 누구보다 더 분명하게 그렇게 믿었던 사람입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대적’이요 ‘박해자’로서 그는 기독교인들의 사형 선고에 찬성하고 그들을 감금하고 고문하고 모독했습니다.
바울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노를 품은 채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습니다(10). 그리고 이들이 사형에 처해질 때 찬성표를 던졌습니다(10).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을 뿐 아니라(행 8:1) 그 외 많은 신자들을 죽이는 일에도 가담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유대인의 모든 회당에서 성도들을 징벌할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기도 했습니다(11). 이러한 그의 박해 활동은 예루살렘에만 국한되지 않고 외국 도시에까지 확대되었습니다(11).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했다’고 말합니다(11). 이 단어는 ‘누군가에게 몹시 큰 증오심을 품다’라는 뜻으로, 광기로 가득찬 증오를 가리킵니다. 헤롯이 죽기 직전 이러한 광기와 증오를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철저한 광기와 증오를 품었던 바울은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갔던 과거 일을 이야기합니다(12).
만남이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만남’이 있을 때 인격적인 진동과 경련이 일어나고 시각이 변하고 사고의 지평이 넓어집니다. 바울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의 전 인격과 삶과 생각을 변화시킨 격변적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당신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44 사도행전(완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69) - 사도행전 26장 24-32절 - 미쳤다고 호통친 아그립바 왕을 대한 바울 (1) | 2024.01.09 |
---|---|
사도행전(68) - 사도행전 26장 13-23절 - 아그립바 왕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바울 (1) | 2024.01.09 |
사도행전(66) - 사도행전 25장 13-27절 - 거듭된 바울의 재판에 하나님의 섭리 (1) | 2024.01.08 |
사도행전(65) - 사도행전 24장 24절 - 25장 12절 - 후임 총독 베스도에게 재판 받은 바울 (3) | 2024.01.08 |
사도행전(64) - 사도행전 24장 10-23절 - 총독 벨릭스 앞에서 변호하는 바울 (1) | 2024.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