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사도행전(26-03)


미쳤다고 호통친 아그립바 왕을 대한 바울

사도행전 26장 24-32절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것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성을 절대화하고 거기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참된 자유인은 이성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참된 자유인은 성경에 근거한 믿음으로 사고하고 행동합니다.

 

  • 바울의 간증을 듣고 있던 총독 베스도이 자신더러 ‘미쳤다’하는 말을 듭니다. 그리고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한다고 밝힙니다. 아그립바 왕이 바울이 적은 말로 자신을 그리스도 인되게 권한다고 하자, 바울은 결박된 것 외에는 모두가 자신처럼 되길 바란다 말합니다. 왕은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않았다면 석방될 뻔했다고 말합니다.

 

베스도의 반응(24-25)

 

우리는 하나님께서 누구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굳은 마음을 녹이셔서 복음에 마음을 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 모두가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전도자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24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24-25)

 

바울이 자신의 회심과 소명에 대해 변론하자 총독 베스도는 갑자기 크게 외치며 변론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리고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글들이 너를 뒤집어서 광기로 이끈다”(24)라고 외쳤습니다. 베스도의 외침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긍정적인 면은 베스도가 바울의 학문을 대단한 것으로 평가한다는 점입니다. 그가 말하는 학문은 아마도 구약성경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긍정적인 면보다 훨씬 강하게 드러나는 부정적인 면은 바울이 미쳤다고 평가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구 차례에 걸쳐 바울에게 ‘미쳤다’는 표현을 썼습니다(24).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로마인과 헬라인은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해 분명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베스도의 외침은 경이와 이해의 결핍이 결합된 결과입니다. 총독 베스도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할 때 끼어들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할 때, 철학자들이 보인 반응과 유사합니다(참조, 17:32), 그리스 철학자와 로마 총독은 많은 글들과 지식이 죽은 자의 부활과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서 나타나 말했다는 것은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비합리적인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의 말을 점찮게 받아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어구에는 두 가지 표현법이 동원되었습니다. 하나는 중언법(헨디아뒤이온)입니다. 진리와 맑은 정신은 동의어가 아닌데, 여기서는 모두 ‘광기’의 반대말로 쓰였습니다. 바울은 단어들의 개념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맑은 정신으로 말하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다른 하나는 히브리적 소유격입니다. 소유격 명사들이 뒤의 명사 ‘말들’을 형용사처럼 꾸며 줍니다. 따라서 ‘맑은 정신으로 말하는 사실의 말들’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오해, 오류,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진술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그는 자신이 ‘참되고 온전한 말’, 즉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비스도가 자신의 연설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변론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진리의 말씀임을 강조하고 신중한 생각으로 받아줄 것을 촉구했습니다.

 

아그립바의 반응(26-29)

첨가된 정보 하나로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마저 ‘사람은 안 변한다’는 말을 예사로 합니다. 목회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때는 절망감마저 듭니다. 정말 그런 것입니까? 복음 앞에서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단호하게 축구해야 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선언해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논리로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그의 삶을 변화시킨 진리였습니다.

 

26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26-29)

 

바울은 다시 심문을 관장하고 있는 아그립바 왕에게 자신의 말이 사실에 입각한 진실이라는 증거를 제시합니다(26).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울 시대의] 현대사입니다. “어떤 것도 [세상의] 한쪽 귀퉁이[끝 지점]에서 일어난 것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뿐 아니라 탄생부터 지상 생애까지 모든 사실이 유대인들이나 로마 정부에 잘 알려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에 사는 타키투스가 이를 알았다면, 아그립바도 알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아그립바(AD 27/28~100년)는 로마에서 클라우디우스와 친구로 지내며 교육을 받았으며, 젊은 시절 대제사장 의복 문제를 중재하기도 했습니다(Josephus, Ant, XX 10). 그는 성전 통치권, 헌금관리권, 대제사장 임명권 등을 가지고 있었고, 유대 전쟁이 발발하기 전유대인들에게 긴 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Josephus, Bell.II 344~407), 그는 로마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정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그립바가 이 일들 중 어떤 것도 모르는 것이 없다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26).

 

다른 하나는 과거의 소리입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들을 믿으시나이까?”(27). 이 질문에 아그립바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믿는다’고 대답하면 바울의 변증에 동의하는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한 것 외에는 전한 것이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선지자들을 믿는다고 하다면, 모세와 선지자들이 전한 메시지의 요체, 곧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참조, 눅 24:46~47)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그립바가 만일 ‘믿지 않는다’고 대답하면 위증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 일에 관하여 잘 알기’ 때문입니다(26; 참조, 3; 25:22,26). 그러므로 “선지자들을 믿으시나이까?”라는 질문은 아그립바에게 굉장한 압력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러자 아그립바와 바울 사이에 신경전이 이어집니다. 아그립바 왕은 “네가 작은 것으로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 하느냐?”라고 대답했습니다. 바울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나는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작은 것으로’가 말에 대한 것인지, 시간에 대한 것인지 논란이 있습니다. 전자가 더 타당해 보입니다. 만일 시간을 뜻한다면 바울의 대답 가운데 ‘큰 것으로’를 ‘많은 시간을 들여’라고 이해해야 하는데, 그렇게 읽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ποιησαι’포이에사이(만들려 하다)도 이를 지지합니다. 이 부정과거 부정사는 ‘몇 마디 말’로 인한 설득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을 일련의 사건으로 표현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네가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게 하는 것, 법정에서 바울을 지지하고 보호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있고, 아그립바가 진지함과 비꼼의 중간 정도의 뜻을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바울의 대답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바울은 천부장들, 가이사랴의 고위 관료들, 버니게뿐 아니라 총독과 왕까지 모두 복음아래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배심원의 판단(30-32)

우리는 세상에 미치든지, 세상에 미치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오직 복음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의 역사는 삶의 변화시킵니다. 이런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복음의 반대자들 앞에서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환영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적지는 로마였습니다, 그곳에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30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30-32)

 

본문은 바울의 변론이 공식적으로 끝난 후에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과 버니게가 고위 관료들과 함께 사석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소개합니다. 아그립바 왕은 재판에 대해 아무런 말 없이 일어납니다. 왕이 일어나자 모든 배심원들이 함께 일어났습니다(30). 재판이 끝난 것입니다. 공개적 선고는 없었으나 배심원들의 의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강당을 떠난 다음 자기들끼리 바울에 관한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31). 그리고 그들은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32).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그립바가 ‘바울을 석방할 수 있을 뻔했다’라고 말하지 않고, “이 사람이 석방될 수 있을 뻔했다”라고 말한 점입니다. 만일 바울이 황제 법정에 상소하지 않았다면, 베스도는 바울에게 무죄를 선언하고 풀어 줄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바울의 무혐의에 대한 4중주가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는 바울을 로마로 보내 그곳에서 주님을 증거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섭리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심문하는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바울만 결박당한 채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만 홀로 돋보입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 참 자유를 주는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어떤 처지나 형편에서도 참된 자유를 누리며 당당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구독과 아래 [광고베너]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