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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52-02)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심령

시편 52편 10-19절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죄인인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사(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릴 때에, 짐승을 죽이거나 곡식을 곱게 갈아서 제물로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 짐승과 곡식은 우리를 대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제물인 짐승처럼 죽어야 하고, 곡식처럼 갈아지는 존재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 제사였습니다.

 

  • 통렬하게 자기 죄를 인정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했던 시인(1-9)은 이제 다시는 죄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과 영을 새롭게 창조해달라고 청하며 주의 영을 자신에게서 거두지 말고 예전에 누렸던 구원의 기쁨을 회복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죄의 경험을 선포하며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주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회개를 하고 있으니 용서해 달라는 간구로 마칩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10-15)

물질이 많아져도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고 형편이 나아진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은 물질과 큰 상관이 없습니다. 물질이 없어도 정신이 풍요로운 사람도 많습니다. 또한 건강을 잃고 오히려 깊은 행복을 되찾는 사람도 많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과 사랑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물질이 마음이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물질보다 정직한 마음과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0-15)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하고서 느낀 감정은 하나님께 쫓겨난 기분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외면을 당해도 속이 상하고, 짓눌림을 받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이겠습니까? 또한 구약시대에는 성령은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때만 임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섬겼던 사울왕에게서 주의 성령이 떠나고 났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 주의 영으로 내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소서(10-12)

 

이제 시인은 용서를 간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위한 방안을 간구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새롭게 창조해주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주의 영이 지배하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은 지, 정, 의를 다 포함한 한 인격의 본질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마음이 정결하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새 마음을 주시도록 간구합니다. 특히 ‘창조하다’라는 하나님만의 창조를 표현하는 단어를 쓴 것 역시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뒤에 나온 “새롭게 하다”와 병행을 이룹니다. 시인은 정결하고 견고한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기를 소원합니다. 5절에서 날 때부터 죄의 영향권 아래 놓인 자신을 고백했는데, 새로운 출발은 첫 창조를 하신 하나님께서 새 창조 해주실 때만 가능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시인은 이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라는 것은 내 죄를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끊지 말아 달라는 요청입니다. 여기서 ‘나를’은 직역하면 ‘나의 얼굴을’이며 이것은 인격을 가리키는 제유법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쫓겨나는 것은 친밀한 교제를 잃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말라”고 바꿔 표현합니다. 사울에게서 떠난 영이 자신에게서는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의 내주만이 범죄의 길로 다시 들어서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12절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돌아섭니다. 시인은 죄를 짓기 전에 하나님과 누렸던 구원의 즐거움이 회복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 자원하는 심령을 주셔서 자신이 넘어지지 않도록 버팀목이 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자원하는 영은 이제 하나님 주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영이며, 이것은 죄의 용서를 통해 정결해 진영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말씀에 매임으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유를 누리는 역설적 존재입니다. 시인은 그 자유를 오용하는 것이 얼마나 노예된 삶이었는지를 경험적으로안 것입니다.

 

(2) 주를 가르치고 찬양하며 선포하리이다(13-15)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시고 회복해주시면 어떻게 살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서원 형태로 아룁니다. 13절에서는 자신과 같은 범죄자들에게 주의 도, 주의 길을 가르쳐서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게 하겠다고 서원합니다. 자신의 체험담을 통해 용서와 회복의 기쁨을 그들이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회개의 길잡이가 될 수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시인은 자신이 흘리게 만든 ‘피’가 가져올 처벌에서 구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14a). 그러면 자신의 혀로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겠다고 다짐합니다(14b). 이 의는 언약에 충실한 것을 가리킵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헤세드의 사랑으로 깨어져야 마땅한 언약을 이어주신 하나님의 참다운 ‘의’를 노래하겠다는 것입니다.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셔서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 죄인들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의’를 바울이 찬양했듯이 말입니다. 15절에서는 이것을 다시 입술을 열어 주를 찬송하며 전파하겠다는 서원으로 바꾸어 표현합니다. 이 찬양은 감사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찬양입니다. 따라서 모든 찬양은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주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겠나이다(16-19)

어떤 사람은 몸은 불편하지만 마음은 자유를 만끽하며 삽니다. 몸의 자유보다 마음의 자유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원하는 심령이 중요합니다. 좋은 일도 억지로 하면 불행한 일이 됩니다. 강요된 상태에서 일하는 노예는 힘들게 노동하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땀은 많이 흘리지만 즐거움이 없습니다. 일은 이루지만 보람과 행복은 없습니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봉사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때 깊은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주어집니다.

 

16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18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16-19)

 

다윗이 밧세바 사건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만들라고 하면 만들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인간이 하나님께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상한 심령,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16-17)

 

여기서 시인은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자신을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다른 방식으로 고백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자신은 비록 죄로 인한 통증으로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아파하고 주님 뵈올 면목이 없지만, 그래서 감히 제사의 자리로 나아가봐야 소용없을 만큼 가망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주께서 정말 원하시는 제사는 제물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바로 그 참회하는 마음으로 주를 찾는 것임을 알기에 소망을 갖고 나아간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주께서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는 곡언법 수사학으로 ‘크게 진노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제사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처럼 들리기에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부정하는 것은 제사제도 자체가 아니라 마음의 진심을 담지 않은 형식적 제사를 의미합니다. 죄라는 것이 제물 제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시인이 이미 드렸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으로 자기 마음을 위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근본적인 관계에 변화를 줄 수 없음을 시인은 부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제사의 양도 아니고 종류도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구절을 암시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12:1)라고 그 의도를 간파하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제를 보시는 대신에 사람 자체를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보기 전에 내 본질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것을 ‘상한 심령(루아흐)’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렙)”으로 표현합니다.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보다 자기 죄로 인하여 깨어지고 부서지고 상한 마음을 먼저 보신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10절에서 시인이 간구했던 “정한 마음(랩)”과 “정직한 영(루아흐)”이 창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한 (니쉬바르)은 ‘깨다’(샤바르) 동사에서 나온 말로, 우상이나 뭔가 소중한 것을 깨뜨릴 때 쓰입니다. 하나님 대신 소중하게 여긴 것이 남김없이 깨어질 때 찾아온 겸손한 상태가 ‘상한 심령’입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가슴을 치며 나에게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기도한 세리의 마음입니다. 여기 ‘마음’은 일부로 전체를 대표하는 제유법으로 자아 전체, 시인 자신을 가리킵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도 시인은 주께서 업신여기지 않고 받아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기뻐하고 수용해주시리라 믿었습니다.

 

(2) 시온을 위한 간구(18-19)

 

시편 51편에서 1-17절은 하나님과 내가 맺는 관계를, 18-19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는 관계를 보여줍니다. 나의 죄악을 씻기시고, 정결한 마음을 내 안에 창조하시는 하나님께서 시온과 예루살렘에도 은총을 베푸십니다. 내가 받은 은총(1)이 증폭되어 믿음의 공동체(18)를 덮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고(13)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외치고(14), 하나님을 찬양한(15) 결과입니다. 시인은 주의 은택, 즉 주의 기쁨, 내키심, 호의 선의로 시온에 선을 행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는 시온을 잘 보살펴달라는 뜻입니다. 또 예루살렘 성을 쌓아달라고 합니다. 이는 무너진 성벽을 다시 견고하게 세워달라는 부탁입니다. 시인은 쇠락한 이스라엘의 한 왕일지 모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어짐과 나라의 죄와 허물어짐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회복만이 아니라 국가의 회복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기뻐하시는 ‘의로운 제사’와 ‘온전한 제사’를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본질에 충실한 제사, 마음을 먼저 드리는 제사를 드리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기회를 주시면 올바른 영과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내가 지은 죄를 후회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게 그 죄의 책임이 있음을 철저히 인정하되 내 안에는 어떠한 선한 것도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이 유일한 소망임을 고백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또한 회개는 내 마음 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회개입니다. 또한 회개는 내 마음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안에는 어떤 죄가 있는지 돌아보고, 나의 회개를 통해 공동체가 회복되는 역사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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