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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9-01)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

시편 49편 1-20절


 

물질만능주의에 젖어 있는 세상은 성공과 실패의 기준이 물질이라고 말합니다. 물질이 많아야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물질이 많아야 성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질이 절대적인 신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마저 물질에 흔들립니다.

 

 

  • 이 시는 구약의 지혜서처럼 삶의 진실과 진리를 노래한 이른바 지혜시입니다. 무엇보다 보편적 인간의 죽을 운명과 재산 축적과 부를 향한 집착의 허망함, 삶의 오묘함을 악기로 연주하며 노래로 전합니다. 시인은 사람이 존귀하나 수수께끼 같은 삶의 오묘한 진실을 깨닫지 못하면 짐승과 같을 뿐이라고 노래합니다. 마치 낭만을 옷으로 입는 저항시인처럼 말입니다.

 

서문: 들어라, 뭇 백성들아(1-4)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깨닫고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지혜의 교훈을 무시하면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 지혜의 말씀은 인생에 깊은 통찰력을 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인생의 분명한 길을 보여줍니다. 지혜의 말씀을 사랑합시다.

 

1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2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3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4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1-4)

 

‘이것을 들어라, 뭇 백성들아’(1a). 첫마디가 잠언에 등장하는 지혜 교사의 부름 같습니다(잠 1:6,8). 둘째 소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어라, 세상의 모든 거주민들아’(1b). 시인은 지혜 교사가 학생들을 부르듯 모든 백성과 세상 거주민들에게 듣기를 청합니다. 귀천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으라고 합니다(2). 귀한 사람이건 천한 사람이건 ‘하나 되어’(야하드) 들어야 합니다. 시인은 높고 낮거나 가난하거나 부하거나를 막론하고 일심동체가 되어 평등하게 지혜 교훈을 듣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언어는 간단하고 함축적입니다. ‘내 입이 지혜를 말하겠고/내 마음의 묵상은 명철이라’(3). ‘입’은 ‘마음의 묵상’을 밖으로 말로 분출시키는 신체 기관입니다. 복수명사 ‘지혜들’(호크모트)과 ‘명철들’(테부노트)이 평행관계로 배열되어 동의어나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총명함과 관계된 말로, 분별력이나 깨달음, 삶의 기술이나 예술적인 능력까지 관련됩니다. 때문에 지혜와 명철은 잠언에서 자주 한 쌍으로 언급됩니다(잠 2:2,6; 3:13,19; 5:1;8:1; 10:23; 21:30; 24:3). 특히 지혜는 삶에서 경험의 총체를 반영하기에 사전적인 의미를 넘어섭니다. 시인은 삶의 깊은 지혜를 말하려고 자기 자신도 ‘비유’(마샬)에 귀를 기울일 것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겠다(4)고 합니다. ‘비유’(마샬)는 지혜서의 대표인 잠언의 제목과 같습니다. 실제로 잠언은 많은 비유의 말들로 넘쳐납니다. 이때 비유는 해석하기 까다로운 ‘수수께끼’(삿 4:12)와 난제(왕상 10:1)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지혜 교사처럼 삶의 난제들을 악기를 연주하며 풀어준다고 하니 삶의 낭만과 난제가 교차하는 흥미로운 광경입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짐승 같은 존재(5-12)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떠받들어 숭배합니다. 하나님보다 돈과 물질을 좇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에게 지배를 당하며 살아갑니다.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돈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재물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유가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인생 최대의 오산입니다.

 

5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6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7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8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9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10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11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12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5-12)

 

시인은 생명을 속량하는 값은 너무나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구상의 모든 재물을 다 소유했다고 해도 단 하나의 생명도 속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생명의 속전을 영원히 마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당에 오신 것입니다.

 

(1) 대체 불가능한 생명(5-8)

 

시인은 노래합니다. ‘어찌 내가 환난의 날들을 두려워할까/악이 내 뒤꿈치를 에워쌀 때’(5). 매우 모호한 시적 표현입니다. 질문 형식이지만, 이는 온갖 악이 발끝 가까이 집요하게 에워싸는 불의한 세상살이에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시인은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6). 재물의 불필요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물질적 풍요가 지닌 힘, 곧 권력을 의지하는 욕망과 자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힘과 많은 재산을 가졌어도 생명을 구할 수 없는 무능함을 강조합니다(6-8). 사람은 누구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 몸값을 치르는 대가를 지불한다 해도 한 생명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위한 목숨(생명)값을 하나님께 드리지도 못합니다(7). 목숨 값은 너무 귀중하여 그 값은 영원히 마련될 수 없습니다(8). 이는 돈과 권력의 정점을 찍은 사람조차 자기 생명 값을 치르고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시인은 인간의 무능함을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2)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9-12)

 

시인은 인간의 필연적인 운명을 노래합니다. 사람이 영원히 살면서 죽음을 피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9). 지혜자들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똑같이 망하고, 그들의 재물은 다른 사람들에게 남기고 갈 뿐입니다(10).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이 똑같이 존재합니다. 죽음은 모든 차이와 불평등을 없애는 수평 장치입니다. 그리고 부자들은 속으로 자기들의 집이 영원할 것이라고, 자기들의 거처는 세대를 거듭하며 영원히 있을 것처럼 자기들 땅에 자기 이름을 붙여 부릅니다(11). 이는 자기 토지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입니다. 부자들은 세대를 거듭하여 토지에 이름이 새겨지듯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는 열망을 가졌지만, 시인은 결정적인 한마디로 소유의 무상성과 허망함을 꼬집어 노래합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이요/짐승들과 똑같이 소멸될 것이라’(12). 인류를 뜻하는 ‘아담’, 곧 사람은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존재입니다(창 1:27). 그러나 사람은 다시 땅의 먼지로 돌아갈 운명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창 3:19). 인류는 도축될 짐승처럼 죽음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언제 소멸될지도 모르는 지독히 허무한 존재입니다(참조. 전 3:19).

 

깨달음 없는 사람의 짐승 같은 운명(13-20)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들의 소유한 재물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도 역시 부하게 되는 것을 바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재물은 죽음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13○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셀라) 14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15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셀라) 16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17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18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19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13-20)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믿고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 대상은 바로 ‘돈’입니다.

 

(1) 어리석은 자의 운명(13-15)

 

시인에게 보편적인 인류의 운명이나 어리석은 자의 길들이 다를 게 없습니다(13a). ‘어리석음’(케쎌)은 아둔함이지만, 동시에 지나친 자기 확신을 뜻합니다. 어리석음은 곧 지나친 자기 확신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을 뒤따르며 그들의 말을 즐기는 것도(13b)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어리석은 자의 길들이 마치 스올로 향하는 양 무리처럼(14a), ‘사망이 그들의 목자’라고 합니다(14b). 목자가 양 떼를 돌봄이 마땅한데 죽음이 어리석은 자들을 돌봅니다. 충격적입니다. 더군다나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린다 해도(14c), 그들의 아름다움은 시들어버리고(14d),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됩니다(14e). 그러니까 정직한 자들이 고통의 밤을 지나 희망을 기대할 아침이 찾아와도, 죽은 자들이 거처하는 ‘지하세계’(스올)는 어리석은 자의 마지막 종착지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운명은 악인과 다릅니다. ‘실로 하나님이 나의 생명을 속량할 것이라/스올의 땅으로부터 참으로 그가 나를 건져내실 것이라’(15). ‘영접하시리니’는 ‘속량하다’(파다)라는 말인데 몸값을 치르고 자유롭게 함을 뜻합니다. 시인은 사람이 아무도 생명을 속량할 수 없음을, 생명은 너무 귀중하여 값을 매길 수 없다는 점을 다시 반복합니다(7-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들의 세계’(스올)에서 생명을 구해주실 뿐만 아니라 꼭 붙드실 것을 믿습니다.

 

(2) 영광에서 분리되는 죽을 운명(16-20)

 

시인의 첫마디는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어 그 집의 영광이 장엄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16). 일반적으로 우리는 재산가들을 부러워합니다. 부러움이 지나치면 부자에게 이용당하거나 고용되거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부자라도 죽으면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고 그 영광을 무덤까지 가져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17; 참조. 전 5:15). 아무리 갑부라도 사는 동안 자축하며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을지언정(18) 영원히 빛을 볼 수 없는 곳에 묻힌 조상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19).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부자든 빈자든 누구나 맞이해야 할 운명, 죽음을 누가 거스를 수 있습니까? 따라서 시인은 다시 강조합니다. 12절 시행을 살짝 변형시킨 반복입니다. ‘사람이 존귀하나 깨달음이 없으면/죽게 될 짐승들과 똑같다’(20). 시인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죽게 될 공동운명체라고 말하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음을 봅니다. 사람과 짐승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은 같지만, 인간에게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깊이 생각하고 이해하고 상상하고 질문하고 자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깨달음 없는 사람은 짐승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재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물질은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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