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046-01)
완전한 피난처이신 하나님
시편 46편 1-11절
현대인들은 늘 분주하고 복잡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도 피할 곳조차 없이 힘겹게 살아갑니다. 환난의 바람이 불고, 고난의 비바람이 몰아칠 때 피할 곳이 없는 많은 사람이 지쳐 쓰러지고 무너집니다. 우리에게는 온전한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 이 시편의 핵심은 창조 이전의 무질서와 혼돈을 제압하시고 질서와 안전을 수립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에 있습니다. 피난처이며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인은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의 위엄뿐만 아니라 언약 백성을 위한 위대한 용사로서 만군의 여호와가 행하신 일을 노래합니다. 곧 이 시는 전쟁을 멈추고 궁극적인 평화와 안전의 피난처 되신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1-3)
고난이나 어려움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과 어려운 일들은 결코 우리를 피해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이기는 길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는 환난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도움을 구하곤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완전한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1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셀라)(1-3)
시인은 하나님께서 피난처, 힘, 큰 도움이라고 선언하며 시를 시작합니다. 세 가지 유사한 단어를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정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친다 해도 하나님게 피하면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 큰 도움이라(1)
이 시의 주제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1,7,11)라는 고백적인 선언 반복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피난처와 힘이시라/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 참조. 61:3; 71:7; 62:7). 자연적인 재해든지 인생에 갑자기 불어닥치는 폭풍 같은 위기, 곧 가난이나 불행에 봉착 했을 때에도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몸을 숨길 수 있는 피난처 곧 은신처요 요새이시며, 힘이십니다. ‘힘’은 안전하고 견고한 요새와 동의어처럼 쓰였습니다(참조, 시 59:17). ‘피난처’와 ‘힘’, 두 어휘의 결합을 통해 하나님보다 더 강력한 은신처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의 때에 도움이 되십니다. ‘도움’은 돕는 자(helper), 지원하고 지지해주는 조력자로서의 하나님을 담아냅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환난의 때, 그 곁을 지키며 지지해주시는 하나님보다 더 견고한 피난처와 조력자는 없슨비다.
(2)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2-3)
첫마디가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2). 두렵지 않다. 나 홀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으로 한 목소리를 내는 공동체적인 의지가 표명되었습니다. 개역개정은 히브리어 본문 순서와 달리 2절의 첫 소절을 3절 끝에 배치했습니다. 의미의 차이는 없지만 강조의 차이는 있습니다. 시인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분명히 하려고 네 가지 잠정적인 상황을 덧붙여 구체화합니다. ‘땅이 흔들리고/산들이 바다의 심장에 빠질지라도(2)/바닷물이 으르렁거리며 격노할지라도/그 맹렬함으로 산들이 흔들릴지라도(3)’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2a). ‘환난’이(1) 혼돈의 바다와 격노한 파도 같습니다. 땅이 흔들릴 정도의 지진이 발생한 상황에 빗댄 환난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산들이 바다 중심으로 무너져 내리고 바다의 격랑과 파도가 산들을 뒤흔듭니다. 땅이 흔들리고 산이 붕괴되는 혼돈의 세력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고백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혼돈을 제압하신 것처럼(창 1:1-2), 혼돈의 물을 통제하셨던 것처럼(출 15:5,8) 시인이 위대한 일들을 눈으로 목격한 듯 현재의 환난을 태곳적 혼돈처럼 재현하여 믿음으로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4-7)
어려울 때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고난의 길을 갈 때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누군가 우리와 함께해 주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함께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 간다는 것입니다.
4○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6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매 땅이 녹았도다 7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4-7)
여기서 시인은 보호받는 직접적인 안전한 장소인 하나님의 성을 찬미합니다. 이곳은 위협적인 혼돈의 바다가 아니라 흐르는 시내가 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이 있어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하며/가장 높으신 이의 거룩한 성막을 기쁘게 하도다’ (4). 숲과 숲에 사는 모든 생물들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시냇물의 이미지, 하나님의 성, 거룩한 성막이 한데 어우러집니다. 태곳적 혼돈의 위협을 제거하고 만드신 에덴동산을 연상시킵니다(창 2:10-14). 하나님의 안전한 돌봄을 이보다 더 간결하고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하나님의 성’과 ‘성소’에 계신 ‘지존하신 이’를 기쁘시게 하는 생명의 물은 안전과 평화와 위로와 은총의 표시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 곧 시온을 가리킵니다. 이때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 성에 계셔서 그 성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새벽에 그 성을 도우실 것이라(5) 믿습니다. 땅과 산이 흔들릴 수 있으나(2), 하나님의 성이 흔들려 무너지지 않는 것은 그 성에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내산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순간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인은 갑작스런 군사적 위협이 예측되는 새벽에도 하나님께서 성을 지키시며 보호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왕국들을 침략하기 위해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는 나라들로 인해 흔들렸지만, 하나님께서 목소리를 발하시자 땅이 녹았다(6)고 합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는 ‘천둥소리’로 묘사되곤 하는데(욥 37:4; 시 18:13; 29:3-9), 그 목소리로 지축이 흔들려 땅도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일 만큼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이 그 백성과 함께하셨습니다. 시인은 만군의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계시고,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 되심을(8) 다시 반복합니다(참조. 1). 수많은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지만, ‘만군의 여호와’는 조상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피난처’, 곧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바위 성벽 같은 든든한 ‘요새’가 되셨습니다. 이는 창조 세계의 혼돈을 제압하신 것처럼 역사 속에서 열방을 굴복시키는 하나님 왕권에 대한 찬양입니다.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8-11)
세은 영적 전쟁터와 같습니다. 죄의 유혹과 악한 영들의 끊임없는 공격은 그리스도인들을 지치게 합니다. 영적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 세상 권세와 악한 영들의 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께서는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9그가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도다 10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9-11)
시인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공동체를 향해 외칩니다. ‘와서 보라, 여호와의 행적을/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신 것을’(8). 언약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직접 보라고 합니다. 여호와가 하신 일, 곧 땅을 황무지로 만드신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황무지’(샴모트)는 여호와 심판의 파괴적인 힘을 드러내는 말이며(참조. 왕하 22:19, ‘빈 터’; 렘 25:18, ‘멸망'), 전쟁으로 인한 황폐함을 뜻합니다(시 73:19; 사 5:9; 렘 2:15).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파괴적인 힘이 어디까지 미치는지 보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시고,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는 분입니다(9).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위해 파괴적인 힘을 발휘하시지만, 그 반대의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전쟁을 그치게도 하십니다. 시인에게 하나님께서는 호전적인 나라와 민족들의 무기를 쓸모없게 하셔서 전쟁을 그치게 하시는 분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무기를 농기구로 만들어 나라들 사이에 전쟁이 그치는 환상을 보기도 했습니다(사 2:4; 참조. 겔 39:9-10).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전쟁의 특징은 살상과 땅의 황무함에 있지 않고 궁극적인 평화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전쟁을 ‘쉬게 하신다’(마슈비트)는 것은 단순한 멈춤이 아니라 땅의 안식처럼(레 26:34) 모든 억압의 굴레에서 풀려나고 해방되어 자유롭게 쉬는 것입니다. 인간의 제국은 스스로의 탐욕 때문에 호전성을 버리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전쟁 무기를 파괴하시는 힘은 영구적인 평화와 안식이 됩니다. ‘와서 보라’는 초대 후에 시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소개합니다. 그 목소리는 한때 전쟁상황에서 언약 백성에게 들려주셨던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내가 뭇 나라들 가운데 높임을 받으리라/내가 이 땅에서 높임을받으리라’(10). ‘가만히 있으라’(하르푸)는 명령은 홀로 있는 것이요,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이요, 손에 든 것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긴장을 풀고 편히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옛 이스라엘 후손들은 홍해를 건너기 전 모세가 한 말을 들었다(출 14:14; 참조, 대하 20:17).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위해 직접 싸울 것이니 백성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그의 구원하시는 행위를 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주신 신탁입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모세에게서 시작된 ‘바다의 노래’(출 15:1-18)가 면면히 회자되고 전승되어 공동체 안에 이미 공유된 믿음의 노래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언약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 나라들로부터 높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후렴구처럼 이미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하시니/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11,7,1). 이 시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는 고백적인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창조세계 이전의 혼돈을 제압하시고(13), 인간 역사의 폭력적인 모든 상황으로부터(4-7,8-11) 구원하시는 하나님만이 가장 완전한 쉼과 완전한 평화의 주체라는 깨우침에서 나옵니다.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힘과 권세도, 그 어떤 사람도 우리의 완전한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맞아 주시고, 완전한 쉼을 주시며, 새롭게 하십니다. 완전한 피난처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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