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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3-01)

 


절망의 골짜기에서 부르는 노래

시편 43편 1-5절


 

환난을 만날 때 우리는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절망은 환난을 극복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절망의 골짜기가 깊어질수록 더욱 슬퍼질 뿐입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 성도가 해야 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 시편 42편과 하나처럼 이어지는 43편은 억울함을 항변하기 위해 법정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하나님께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기를 간청하고 호소하는 시입니다. 생명의 물을 찾는 사슴처럼 간절했고, 혼돈과 죽음의 물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시인은 하나님의 빛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 다짐합니다.

 

하나님 나를 변호해주소서(1)

하나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맡길 때 불경건한 자들의 핍박과 조롱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불의한 자들의 자의적인 판단과 비방에 낙담하지 맙시다. 침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고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1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에 대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1)

 

시인의 첫마디는 간결하지만 강력합니다. ‘나를 판단해주소서, 하나님’(1a). 시인은 자신의 생명을 건 내적 목마름(42:1-2)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42:3,10) 조롱하는 원수들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스스로에게 왜 낙심하는지 집요하게 질문하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42:5,11). 이제 시인은 자신과의 내적 몸부림을 끝내고 결심한 듯 하나님을 향해 판결을 구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문제 때문에 판결 받고 싶은 것입니까? 시인의 이어지는 말에서 분명해집니다. ‘경건하지 않은 나라에 대한 내 송사를 변호해주소서/간사하고 불의한 사람에게서 나를 건지소서’(1bc) 시인의 말을 문자 그대로 읽고 해석하면, 그는 소송에 얽혀 법적 투쟁 중입니다. 거짓되고 사악한 사람과의 개인적인 송사와 경건하지 않은 ‘나라’와 얽힌 국가적인 소송 문제에 연루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법적 투쟁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공정한 재판관이면서도 자기의 변호를 맡아주시길 간청합니다. 여기서 ‘나라’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이방 사람들을 언급한 것일 수 있지만(출 34:24; 겔 5:6-8; 시 44:3), 본문의 맥락을 넓혀 시인이 국가 지도자로서 왕이라면 이웃 나라들과 맺은 계약 파기 같은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건하지 않은 나라? 표현이 다소 어색합니다. 왜냐하면 형용사 ‘경건하다’는 주로 하나님께 신실하게 헌신된 자들, 곧 ‘성도’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경건하지 않은 나라’는 시인 주변의 특정한 사람들을 집합적으로 일컫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더군다나 셋째 소절, ‘간사하고 불의한 사람’과의 평행관계를 고려하면 ‘경건하지 않은 나라’보다는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적절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거짓되고 불의한 자들, 곧 경건하지 않은 이들에게 휘말린 법적 공방에서 하나님의 변호가 절실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 편 되어주시는 것, 그것이 불의한 자들로부터 구원받는 길이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2)

빛은 어두움 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등불입니다. 아무리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의 약속이 곧 진리입니다. 빛과 진리의 말씀만이 흑암을 밝혀 구원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2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억압으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2)

 

하나님께서 재판관으로서, 시인의 변호인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지 않으셔서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호소합니다. ‘참으로 당신은 나의 하나님 나의 산성이십니다’(2a). 시인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가 아니라, 신들 중의 가장 위대한 신, 완전한 신을 언급하는 명칭, ‘엘로힘’에 1인칭 소유격을 덧붙여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누구도 침략할 수 없는 ‘나의 산성’, 곧 나의 피난처임을 고백합니다. 그러고서 시인은 부르짖으며 호소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어찌하여 내가 비탄에 빠져 다녀야 합니까?/원수의 압제 때문에요’(2bcd). 시인은 왜 아직도 여전히 상복을 입은 사람의 비통한 심정처럼 슬퍼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싶습니다. ‘어찌하여’를 반복하며 거절당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하나님을 향해 탄원합니다. 탄식의 본질은 분명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잊힌 존재 같아 고통스럽습니다. 그렇다고 침묵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억압하는 원수로부터의 구원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믿습니다. 따라서 원수를 향한 증오심에서 허우적대며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열망하는 목소리를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친 부르짖음은 믿음 없이 불가능합니다.

 

빛과 진리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소서(3-4)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자에게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알 수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원수들의 핍박과 조롱을 압도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경한 자들의 공격에 연연하지 않고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소망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3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3-4)

 

시인은 다시 간구합니다. ‘당신의 빛과 당신의 진리를 보내소서’(3a). 매우 독특한 간청입니다. 히브리 시인들은 보통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과 신실하심, 곧 ‘인자와 진리’를 구합니다. 그런데 ‘빛과 진리’가 한 쌍입니다. 슬픔의 어둠을 헤매는 사람처럼 다녔던 시인(2)이 빛을 구하고, 불의한 자들의 거짓으로부터로 악기를 연주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진리’(진실)를 구합니다. 시인은 빛과 진리로 자기를 인도해주시길 청한다(3b). 시인은 체계적이고 단계적으로 요청합니다. ‘빛과 진리가 나를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데려가게 하소서’(3c)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계신 거룩한 산에 오르기까지 빛과 진리의 안내를 받고 싶습니다.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빛이고, 빛은 곧 생명입니다(참조, 미 7:8). 시인은 어둠과 죽음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빛과 생명의 활력이 넘치는 안전한 공간으로 인도받고 싶습니다. 그곳을 시인이 ‘당신의 거룩한 산’으로, ‘당신의 장막’으로 부릅니다(3). 시편에서 거룩한 산은 시온산이며(시 2:6; 15:1), 주님이 거하시는 곳, ‘장막’도 시온을 가리킵니다(46:4; 84:1; 132:5,7). 시인이 빛과 진리의 안내를 받아 궁극적으로 가고 싶은 곳은 하나님 임재의 처소입니다. 시인은 한때 많은 무리와 동행하며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발하며 ‘하나님의 집’, 곧 성전으로 올라갔을 때를 회상하며 슬픔에 젖기도 했었습니다(42:4). 이곳은 낭만적인 추억의 장소가 아닙니다. 시인은 현실에서 다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희망을 다짐하듯 말합니다. ‘그때 내가 하나님의 제단으로 나아갈 것입니다/내 기쁨의 극치이신 하나님을 향해’(4ab). 하나님의 ‘제단’은 제물을 드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떤 제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것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하나님을 향해 가는가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시인은 ‘내 기쁨의 극치이신 하나님’, 곧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개역개정)을 향해 갑니다. 그는 기쁨의 극치이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더 이상 슬프지 않습니다. 이전처럼 부재의 하나님께서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환호하는 시인의 모습이 상상이 됩니까? 시인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수금으로 당신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여’(4cd). 탄식의 언어는 사라지고 기쁨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편 2권을 시작하는 42편과 43편에 유달리 하나님의 완전성을 표시하는 명칭, ‘엘로힘’이 반복되는 것은 주로 언약의 이름 ‘여호와’가 많았던 1권(1-41편)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왜입니까? 포로의 땅에서 온갖 이방 신들에 둘러싸여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시인은 신들 중의 최고이며 완전한 신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복수 형태 ‘엘로힘’을 자주 사용한 것 아닙니까?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을 찬양하리라(5)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나아가기를 갈망합니다. 원수들의 송사를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고 빛과 진리를 간구해야 합니다. 예배의 감격이 그의 절망적인 상황을 압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시련도 이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42편 마지막 절(11) 시행과 똑같습니다. 시인은 이미했던 말을 반복하지만, 이전과 다릅니다. 마음이 용해되어 사라질 정도의 고통스러움을 입으로 쏟아냈지만(42:5,11), 탄식의 목소리를 터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제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시인이 장차 하나님의 산과 하나님의 장막에 이르러 기쁨과 찬양의 제사를 드릴 것이라 확신하며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42, 43편의 아름다움은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탄식과 희망의 절묘한 어울림에 있습니다. 유리하고 방황하는 인생을 이보다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까? 세 차례 반복하는 말의 절정은 43:5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5ab) 탄식하고 탄원하고 질문하며 답을 찾아가는 집요함 자체는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라, 진실로 여전히 내가 그를 찬양하리라, 나의 구원 나의 하나님을’(5cde). 절망과 불안이 엄습하는 골짜기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기다리며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이 곧 믿음입니다. 절망의 복판에 섰던 시인의 긴긴 기다림은 절망하며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큰 위로입니다. 영혼의 깊은 강을 건너며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43편은 삶의 슬픔과 기쁨의 비밀이 교차하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인생을 사는 동에는 고난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환난의 순간마다 우리가 절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절망의 골짜기만 깊어질 뿐입니다. 절망의 골짜기에 빠진 사람은 환난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절망의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지시고, 힘을 주시며, 바른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니 환난을 당하는 순간에도 다윗처럼 주님을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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