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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41-01)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

시편 41편 1-13절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그 마음에 깊게 담아두시고 자기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보시는 분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복 받기를 원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주시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한 번 더 사랑을 증거하려고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 시는 가난한 자를 돕는 이의 행복을 기원하며 시작됩니다. 악인을 따르지 않는 자의 행복을 노래하는 시편 1편의 자매 시편 같습니다. 41편은 질병으로부터 치료되기를 바라는 기도와 외로움과 원수로 인한 탄식이 어울려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의 패배를 믿으먀 하나님 임재의 기뿜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자고 초청하는 시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이의 행복(1-3)

현시대에 우리도 다윗처럼 악을 만나는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이웃을 존중하는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듯이, 하나님처럼 성도들도 가난한 자의 필요를 적극적으로 돌아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1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2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4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1-4)

 

이 단락은 시편 41편의 핵심적인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지금 고난 중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결국 은헤를 입게 될 것이라는 믿음의 선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1-3)

 

41편 첫 절의 첫마디는 ‘행복하다’(아쉬레)입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시 1:1) 것처럼,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는 자는 행복합니다(1). 악인들의 꾀와 그들의 길을 따르지 않음은 가난한 사람을 보살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시인은 ‘가난한 자를 돌보라’고 직접 명령하지 않고 우회합니다. 가난한 자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입장에서, 그들보다 낮은 데서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안내합니다. 구약의 지혜 교훈은 명령보다는 묘사를 통해 독자의 선택을 유도합니다. 재앙의 날에 여호와가 그를 건지실 것입니다(1b). ‘가난한 자’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뿐 아니라 무력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헌신하는 사람을 여호와가 모른 척하실 리 없습니다. 시인은 여호와가 그를 보호하시고 지키시며 이 땅에서 복 받게 하시며, 그를 원수들에게 넘기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2). 1절의 ‘행복하다’와 2절의 ‘행복하게 되다’(웃샤르)가 서로 연결됩니다. 이는 물질적인 풍요의 복이나 소유가 아니라 존재로서의 행복입니다. 이와 같은 말은 보통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말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인은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사람을 여호와가 병상에서 붙드실 것이라(3a) 말한 후 여호와께로 대상을 바꿔 말합니다. ‘당신은 그의 병으로 인한 모든 병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3b).

시인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보살피는 자가 병에 걸렸을 때 그 병상을 ‘뒤짚어 엎으신다’고 말할 만큼 완전한 치료의 경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완벽한 치료뿐 아니라 타인을 보살피는 친절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까지 둘 다를 선포한 것입니다.

 

(2)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4)

 

가난한 자들을 보살폈던 자가 마치 시인 자신인 듯 경험과 믿음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청합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 내가 당신께 범죄했으니 내 생명을 치료하소서.’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베푸시길 바라는 은혜는 병 고침입니다. 시인은 자기 질병의 원인이 범죄 때문이라고 공적으로 고백합니다. ‘범죄했다’는 말은 매우 광범위합니다. 마땅히 할 일을 놓쳤거나 흠 잡힐 만한 무엇이 있거나,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말 못한 일에 대한 고백입니다. 사람의 질병과 죄의 인과관계가 결코 기계적이지 않지만, 고대인들은 질병과 죄를 연결시키곤 했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어떤 특정한 죄를 말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내재된 죄의 성향에 대한 철저한 자기 점검의 고백입니다.

 

원수들의 악담과 친구들의 배신(5-10)

성도들은 ‘복수’의 사람이 아니라 ‘용서’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거짓 고소와 악한 비방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쓰러져 버려서는 안 되기에 우리도 다윗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은 온통 거짓이고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기 위해서도 성도들이 쓰러져 버려서는 안 됩니다.

 

5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6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7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9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10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5-10)

 

다윗이 병들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를 위로하고 돌보기보다는 악담하고 저주했습니다. 병과 고통 자체도 물론 견디기 힘든 일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며 성처에 소금을 붓는 식으로 조롱하는 자들의 말 한 마디는 화살처럼 다윗의 가슴 깊숙이 박혔을 것입니다.

 

(1) 악한 자들의 행동(5-9)

 

시인은 혹시 범죄한 것이 있을까 염려하고 죄를 고백합니다. 그가 돌연 자기 원수가 ‘나에게 악이 있다’(5a)라고 악담한 것을 인용하며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가 언제 죽을까, 그의 이름이 언제 사라질까?”(5b) 원수가 내뱉은 악의적인 말에서 강한 적대감이 느껴집니다. ‘그의 이름’이라고 할 때 ‘이름’은 명성과 평판을 가리킵니다. 시인의 명성이 죽음과 함께 끝나길 바랄 만큼 적대적인 원수가 곁에 있습니다. 더군다나 원수가 자기를 보러 와서 거짓말하고, 마음에 거짓된 온갖 정보들을 모아서 거리에 나가 떠들어댈 것이라고 호소합니다(6). 시인의 고통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시인의 탄식 어린 호소는 더 거세집니다. 시인은 나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이 연합하여 수군거리며 그들이 내게 해를 입히려고 궁리한다고 호소합니다(7). 그들의 비방을 직접 들은 것처럼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가 나쁜 병에 걸렸으니 그가 누우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거야’(8). 시인은 더 기막힌 상황을 호소합니다. 자기가 신뢰했고 완벽한 관계를 자부했던 친구들, 그와 함께 음식을 먹었던 자들이 배반한 것입니다(9). ‘가까운 친구’(9)로 번역된 말은 직역하면 ‘나의 평화의 사람’입니다(렘 20:10). 나와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샬롬’은 허물없이 아주 가깝게 지내는 친구나 언약관계를 함축한 말이며, 생명을 나눌 정도의 우정을 약속한 동반자처럼 가까운 사이를 가리킵니다(참조. 삼상 18:3). 그런데 그 신성한 연대감이 깨지고 배신만 남은 상태입니다.

 

(2)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10)

 

시인은 다시 하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그러하니 당신 여호와여,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나를 일으키시고 내가 그들에게 되갚아주게 하소서.’ 자신을 위해서 은혜롭게 대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원수들과 배신한 친구의 행위를 그대로 되갚아주시길 간청합니다. 대체로 번역 성서들이 시행 맨 첫 글자 접속사 ‘바브’를 반의 접속사(‘그러하오나’)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이전 시행들에서 시인은 원수들의 음모와 우정을 약속한 친구의 배신을 호소했기에 ‘그러하니’, ‘단연코’ 내가 보복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청의 기도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 이처럼 강력하게 하나님께 보복을 간청해도 괜찮습니까?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배치되지 않습니까? 본문의 ‘되갚아주다’에 해당하는 기본형 동사 ‘샬람’의 강조능동형의 뜻은 ‘끝내다’, ‘완결하다’, ‘회복하다’라는 뜻을 포함합니다. 이 때문에 ‘되갚아주다’라는 표현은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모두 포함한 중의적인 말입니다. 따라서 이는 시인이 악에 대한 보복을 선으로 갚겠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물론 시인이 어떤 방식을 원하는지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자기 억울함을 끝내고 완결시키길 바라는 간절함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길(11-13)

성도들은 인간의 삶과 긴밀히 함께하시는 하나님꼐서는 영원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악인들에게 시달리는 왕중에도 믿음의 시야가 좁아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또렷한 분별력과 뿌리 깊은 신앙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를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11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2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13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11-13)

 

원수 갚음을 탄원했던 시인은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당당합니다. ‘이것으로 나는 당신이 나를 기뻐하심을 알았습니다/왜냐하면 나를 향해 내 원수가 승리를 외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1). 시인은 하나님 기꺼이 자기를 받아들이셨음을 확신이 합니다. 더군다나 병상의 시인을 비방하고 거짓을 유포했던 원수는 물론 가까웠던 사람에게 배신을 경험한 시인의 고통과 호소를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이것이 전제되었기에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음을 압니다. 또한 원수 갚음이 어떤 방식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기꺼이 수용하시고 기뻐하셨다면 보복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방식이었을 것입니다. 억울함에 몸서리치면서도 선을 행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습니까. 시인의 이어지는 말에서 그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질병의 고통보다 더 처절한 조롱과 배신의 아픔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이제 나의 온전함 중에 당신이 나를 붙드셨고/당신 앞에서 내가 영원히 서게 되었습니다’(12). 시인은 당당하게 ‘나의 온전함 중에’라고 말할 만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온전함’은 신앙적인 고결함과 마음의 깨끗함을 뜻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든든한 후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의 온전함 중에 당신이 나를 붙드셨습니다.’ 이 말, ‘베툼미타마흐타’에는 비슷한 자음 글자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언어유희가 활용되었습니다. 시인은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넘어 온전히 하나님 임재 앞에 사는 현실의 감격을 고백한 것입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해 선포합니다. 시인의 마지막 외침은 아멘, 곧 ‘틀림없이!’입니다(참조, 시 106:48). 41편이 1권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마무리하는 후대의 편집적인 의도가 엿보이는 시행입니다. 이 마지막 외침은 질병과 배신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믿음으로 견뎌내고 하나님과 회중 앞에서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며 찬미하는 모든 신앙인의 외침입니다.


그동안 삶에 있어서 숱한 이기와 적대를 물리치고 주께서 어떠한 환대와 은혜를 베푸셨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환대와 은혜가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 주께서도 흡족하실 마지막 복된 발자취를 남겨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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