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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39-01)


가식 없는 진솔한 기도

시편 39편 1-13절


 

우리는 기도가 무조건 거룩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습니다. 물론 기도는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거룩함은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담은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진솔한 대화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이미 다 아시는 주님이 우리의 필요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술의 고백을 통해 응답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솔한 마음의 고백을 원하십니다.이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진솔한 고백에서 인생의 나약함을주님 앞에 내려놓는 기도를 볼수 있습니다.

 

 

  • 하나님 앞에서 아예 그 존재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짧고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에게 하나님만이 소망이 되십니다. 시인은 죄악과 근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끊고 침묵하려 애썼지만 울분을 삭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열고 하소연하며 그분의 조언과 응답을 구합니다.

 

시인의 침묵과 근심(1-3)

우리가 걸어야 할 길,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 좁은 길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참아야 하고, 섬겨야 하고, 말도 조심해야 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심지어 가진 것을 남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복음을 열심히 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충성스럽게 이루었다 해도 칭찬받는 것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에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1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2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3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1-3)

 

시인은 혀를 잘못 놀려 죄를 짓지 않기로 다짐하고 자신의 행위에 주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원수가 그의 앞에 있더라도 자기의 입에 재갈을 물려 자신의 말을 통제하겠다고 진술합니다. ‘원수가 그 앞에 있다’는 말은 원수와의 대립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짐승을 부리기 위해서 입에 망이나 재갈을 씌우거나 코를 뚫는 것처럼 시인은 자신의 입을 통제하여 필요 없는 일에 휘말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선한 말조차도 아끼고 잠잠히 있었지만, 시인의 마음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울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 울화의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1절에서 악인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악인과의 관계와 상관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할 말이 가득하지만, 그것을 누르고 침묵하므로 시인의 내면에서 고통의 열기가 점점 뜨거워졌고,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4-6)

우리의 연약함도 솔직하게 주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면서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고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가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라는 진솔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함을 향한 우리의 노력이 어떤 때는 교만, 어떤 때는 외식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자포자기 넘어짐, 쓰러짐의 결과를 맞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인생무상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약함을 주님께 그대로 고백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무능력.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4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6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4-6)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침묵을 깬 시인은 사람을 향해 쓸데없는 말을 내뱉거나 화를 표출하지 않고 지혜롭게 하나님을 향하여 입을 엽니다. 그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조언을 구합니다. 침묵을 깨고 시인이 하나님께 아뢰는 첫마디는 자기 인생의 끝이 언제인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문자적으로 시인의 죽을 때가 얼마나 남았느냐는 물음이 아니라 이 짧은 삶을 살아가는 목적에 대한 물음입니다. 시인은 이 물음에 덧붙여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 계속 언급합니다. 사람이 일백 년을 산다 한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세월이 한뼘 길이밖에 안 되고, 아예 그 존재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떤 이의 삶이 평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날은 한낱 입김과 같아 허무할 뿐입니다. 사람이 소란을 떨고 야단법석을 피우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쌓아가지만, 그 모든 일이 그림자 같이 지나가고, 게다가 그 결과를 누가 가져갈지도 모르니 이 모든 것이 다 헛될 뿐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이 헛된 삶 속에서 사는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죄 용서 간구(7-11)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성, 연약함과 한우리는 모두가 빠져 있는 착각 중 하나가 ‘인생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몇 년 후, 몇십 년 후에도 살아 있을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당연히 여기는 우리는 얼마나 우매합니까? 로마의 개선장군 환영 행사 때에는 개선장군 옆에서 노예 한 사람이 ‘죽음을 잊지 말라’고 속삭였다 합니다. 우리는 유한하고 연약한 인생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달아야 합니다.

 

7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8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9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10주의 징벌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11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7-11)

 

“그러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시인은 화살처럼 빨리 흘러가 덧없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운명에 대해 숙고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외칩니다. 시인의 물음은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전환의 신호입니다. ‘바란다’라는 단어에는 열망과 간절함으로 기다린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기대 속의 기다림에는 긴장감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나의 소망, 그것은 바로 당신께 있나이다!” 시인이 헛된 인생 속에서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는 대상은 그 어느 것도 누구도 아닌 하나님입니다. 인생의 허망함을 한탄하며 좌절하는 것으로 삶을 끝낸다면 얼마나 더 삶이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까? 시인은 유한하고 제한된 인간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하면서 이런 현실에 절망하여 주저앉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이 덧없는 세상에서 소망을 둘 대상이 있음을 고백하며 그의 소망이 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의 목적이며 의미가 아닙니까!

시인이 여기서 말하는 인생의 허무함은 단순히 삶의 짧음과 삶의 예측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한 슬픔과 고통으로 인한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과 그로 인한 결과로 모든 것을 잃고 가중되는 고통과 함께 지내야 하는 처지를 한탄한 데서도 비롯되었습니다(4-6,9–11).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죄를 사하시고 우매자로부터 수치를 당치 않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시인은 자신의 소망이 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죄에서부터 건질 수 있는 분이며 자신이 처한 현재의 고난에서 완전히 구원하실 능력의 신이심을 압니다. 그러므로 먼저 죄의 용서를 간청하고, 자신의 죄와 실수가 우매하고 악한 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기를 간청합니다. 덧붙여, 시인은 자신이 악인 앞에서 말을 꾹 참고 침묵한(1-2) 이유가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징벌하셨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운 재판장과 같아 죄인을 징계하십니다. 이로 인해 죄인이 즐기고 누린 모든 영화는 좀이 옷을 갉아 구멍을 내고 옷 자체를 망가뜨리듯 소멸하고야 맙니다. 이처럼 시인은 5,6절에서와 마찬가지로 11절에서도 인생의 무상함과 헛됨을 줄곧 반복하는데, 그 의도는 하나님께 인생의 연약함과 덧없음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신속한 응답과 구원을 내리시기를 촉구하는 데 있습니다.

 

응답과 회복을 소망(12-13)

인생은 짧고 허무합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떠도는 나그네의 삶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안식처도 아니고 종착지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소망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썩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것에 가치를 주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12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13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12-13)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헛된 존재임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긴 시인은 그래도 다시 자신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분의 응답을 간청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는 침묵하였지만, 하나님께는 부르짖으며 눈물로 하소연합니다. 울분이 쌓여 사람들에게 실언을 하거나 화를 쏟아 죄를 짓기보다는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놓고 울부짖는 편이 지혜롭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께 울부짖는 것처럼 하나님도 자기에게 잠잠하지 말고 응답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나그네’와 ‘거류민’으로 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합니다. ‘나그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아와 과부와 함께 관심을 갖고 돌보라고 명령한 대상입니다(출 23:9; 신 10:17-19) 나그네는 자국인이든 타국인이든 고아나 과부처럼 의지할 곳이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특히 자신을 ‘당신과 함께 있는 나그네’라고 칭하며 자신을 보호하고 긍휼히 여겨줄 분이 하나님께서 심을 강조합니다. 반면, ‘거류민’은 타국인으로서 ‘떠도는 지’를 지칭합니다. 시인은 자신을 특별히 ‘나의 모든 조상과 같은 거류민’으로 소개합니다.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아 그곳에 와서 정착했지만, 땅은 여전히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이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거류민으로 사는 셈입니다. 시인은 세상에 사는 삶이 나그네와 거류민의 삶과 같이 일시적이며,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하나님께 상기시킵니다. 그리하여 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언약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그의 자손인 자기를 긍휼히 여기고 돌봐주시며 축복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헛되고 짧은 인생을 사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 되뇌며, 시인은 그의 기도를 마치기 전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다시 한번 간구합니다. “주는 나를 용서하소서”는 문자적으로 “눈길을 저에게서 돌리소서”로 번역됩니다. 다른 시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외면하여 얼굴을 가렸다고 느낄 때 하나님의 눈이 자기를 향하기를 구하였습니다(17:2). 그러나 여기에서 시인은 욥처럼 하나님의 응시를 감시와 징벌로 느껴 하나님께서 그 눈길을 거두시기를 구합니다(욥 7:17-21). 시인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생명을 부지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곧 세상에서 없어질 존재임을 하나님께 상기시키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다시금 웃고 즐거워해달라고 간구하며 기도를 마칩니다.


진솔한 기도는 마치 절망에 빠진 사람의 마지막 탄식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우울하기 짝이 없는 진정한 회개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이듯, 진솔한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소망임을 깨닫고 더 간절히 주님을 의지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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