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로마서(12-01)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

로마서 12장 1-6절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을 헬라어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카리스마’의 본래 뜻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잘 섬기라고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은혜의 선물을 각 사람에게 알맞게 주셨습니다. 각자 받은 선물은 다양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선물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또한 이 선물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차이를 인정하고 공동체로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마서 12장부턴 새로운 부분이 전개됩니다. 로마서 1장부터 11장까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이라면, 12장부터 마지막까지는 ‘구원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하는 실천적인 부분을 다룹니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의 대원리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라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1-2)

모든 성도들은 예배하길 원합니다. 예배처럼 흥분과 감동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배해야 합니까?’ ‘어떤 방법과 태도로 예배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삶의 예배 현장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

바울은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라고 찬양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12장부터 하나님의 찬양하는 성도들은 찬양이 그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도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께 기뻐하신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삶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⑴ 살아있는 예배의 성격(1)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영적 예배’는 직영하면 ‘이치에 맞는 예배’입니다. 그가 말하는 예배의 성격을 3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① 예배는 믿음으로 드린 것

예배는 분명한 자신의 신앙고백 위에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고, 자신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거듭날 수 있음을,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신앙고백 위에 드려지는 것이 예배입니다.

② 예배는 몸으로 드린 것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몸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더 강조하면 예배는 피를 요구합니다. 구약 시대의 예배(제사)는 제단에서 속죄양을 잡고 각을 뜨고 제단 불 위에 태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생애를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죄악된 행위까지도 하나님 앞에 산 제사로 드린 것이 예배입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도록 하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의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준비가 아닙니다. 주일날 거룩하게 몸으로 드려진 예배를 위해서 6일 동안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정성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늦지 않도록 나가서 정성껏 몸으로 준비하는 것이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③ 예배는 영으로 드린 것

예배는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몸으로 드려지긴 하지만 영과 영이 통하는 곳입니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이 영이 열려서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을 호흡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들이마시고 인간의 죄악을 내품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영과 영이 교통하여 드리는 것이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예배는 반응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에 사람들은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을 만나면서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반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⑵ 예배를 위한 삶(2)

바울은 무엇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산 제물인지 부연 설명합니다. 이렇게 하면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다음과 같은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①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곳에서 말하는 ‘이 세대’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본능에 의해 지배된 세대입니다. 타락한 본성으로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 중심의 시대, 본능에 지배된 시대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타락한 본성으로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즐기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바쁘긴 하지만 방향이 없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본받지 않는 삶을 살 때,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② ‘마음으로 새롭게 변화’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을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그 삶을 통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시달려서 강퍅해진 마음을 말씀으로 쟁기질을 해야 합니다. 부드러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영혼을 방치하면 묵은 땅이 되어 집니다.

③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고

세상 사람들처럼 방향이 없어서 바쁘긴 하지만 열매가 없는 사람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선악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한 분별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몸은 산 채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기에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당신이 새롭게 변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살아있는 예배의 축복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각 사람에게 주신 선물(3-6)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룬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부르셔서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십니다. 성도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시고 각 은사들이 지혜롭게 발휘됨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도록 하십니다.

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4-8)

교회도 다양한 은사를 지닌 성도들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가 서로 존중하며 협력할 때 교회 공동체는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어떤 자세로 예배의 삶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⑴ 자만심을 품지 말라(3)

먼저 ‘자만심을 갖지 말라’고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3) 권고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없었다면, 아무도 그 말씀을 전할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예수를 잡아 죽었던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처한 문제의 해결의 원리는 제시하는데, ‘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3b)라고 두 가지를 권고합니다. 첫째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은사에 대해 생각할 때, 자신의 은사가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이것은 ‘믿음의 기준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고, 이방인도 유대인보다 뛰어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11장까지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무엇이 ‘믿음’은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죽을 자임을 아는 태도입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지음 받은 피조물이고, 하나님 없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자신의 것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니 자신 스스로 미래를 보장할 수 없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만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 주실 있다고 믿는 것이 참 믿음이고 이것이 다름 아닌 지혜입니다. 믿음이 있어 하나님을 가장 의지하는 삶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자신이 생각할 만큼만, 마음이 품을 만큼만 품어야 합니다. 자신의 범위를 넘어선 것들은 지나치게 간섭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사람이 범죄한 사실을 간섭하다 보면 자신도 동일한 범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역은 하나님께 맡기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라는 것입니다.

⑵ 서로 협력한 공동체(4-5)

바울은 이 원리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4-5)고 로마 교회 공동체에 구체적으로 적용합니다.

바울은 교회를 설명할 때, 항상 몸으로 비유하여 설명했습니다(에베소서 4:1-16).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 몸입니다.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다양한 여러 기관이 있는 것처럼 교회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를 이룹니다. 각 기관들은 다른 기관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서로의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각 기관들이 서로 도와서 온전한 하모니를 이루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그래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각 지체가 하나를 이루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한 색깔만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체주의이며, 공산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주로 한 지도자에 의해서 주도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지도자의 영향을 받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지도자 자신의 스타일만을 성도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건강한 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지나치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하나인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모두 중요합니다. 하잖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사용될 가치가 있도록 존귀한 존재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지체도 소월이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⑶ 다양성으로 섬기는 공동체(6-8)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 그 각 사람에게 주신 많은 기능들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가 필요합니까? 바울은 그 직분을 ‘은사’라고 표현합니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고 그 지체마다 직분이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다양한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고, 구성원은 각자 다른 은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능 없는 몸의 지체가 없듯이 어떤 지체도 덜 중요하고, 더 중요한 지체가 없듯이 교회도 마찬가지란 것입니다.

몸의 한 지체가 전체 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하라고 하면, 의학적으로 이것을 ‘병(病)’이라고 규정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6a)라고 말합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제 왜 바울은 자신이 은혜로 전한다고 말하는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자신이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은혜이듯이, 성도들에게 주신 여러 가지 모든 은사도 다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원리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도 자신이 노력하거나 받을 자격이 있어서 얻은 것이 아닌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각자 받은 은사를 서로 비교해서도 안 됩니다. 사도로서 말씀을 전하는 자신의 은사마저도 로마 교회 성도들의 다른 은사보다 더 우월하여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6-8)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섬기고 구제하는 것도 은사입니다. 다양한 은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은 축복입니다. 다 각자 다르고 똑같을 수 없습니다. 달란트는 각자가 다른 것입니다. 각자 역할과 특성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여러 부서와 역할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일반적인 일을 할 순 없습니다. 각자의 달란트를 따라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자신의 달란트를 따라서 섬김으로 모두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예배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섬깁니다. 어떤 부서가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영적인 예배를 위해서 쓰임 받는 지체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선물(은사)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저마다 다른 은혜의 선물을 주셔서 하나님의 공동체와 사람들을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인 은사를 기억해 합니다. 그리고 그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은사를 통해 섬기는 것은 다양하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자신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로 다른 사람들을 잘 섬기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2023/06/21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인생을 만들어 가는 일상

김민정 목사(좋은목회연구소)


“지금까지의 오랜 결혼생활 동안 아내가 차려준 식사는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중 너무나 훌륭한 나머지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음식들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내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수많은 끼니들이 지금까지 내 생명을 지탱해줬습니다.”

어느 노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살다보면 기억에 두고두고 남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개학 첫날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새 교실의 문을 살며시 열던 때라든지,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져 종일 울기만 하던 시절이라든지,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던 순간 같은 것말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나’라는 사람을 다듬고 빚어온 재료는 우리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평범한 일상과 소소한 순간들일지도 모릅니다.

우린 무언가 특별하고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그래야만 내 삶이 의미 있고 특별해질 것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내가 평범하게 흘려보내는 하루하루, 순간순간들은 내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고르고 골라 허락하신 특별한 선물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에게는 버릴 수 없는 소중한 퍼즐의 조각들입니다. 그것들이 맞춰질 때 내 삶의 큰 그림이 아름답고도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김민정 목사(좋은목회연구소)

<겨자씨/국민일보>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2023/06/20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날아가는 목각 새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나무로 원앙새를 잘 새기는 장인(匠人)이 있었습니다. 목각새를 주문한 사람들은 그의 솜씨를 경탄해마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각새를 사가는 사람이 장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틀림없이 날아가는 목각새를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후부터 장인은 날아가는 목각새를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1년, 2년이 지나가도 날아가는 목각새는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고, 사람들은 그가 이상해졌다고 했습니다.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장인은 낙심과 좌절에 가득차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작은 새가 날개를 다쳐 몸부림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는 “저 새도 나처럼 날개가 꺾였구나”라고 탄식하며 그 새를 정성껏 치료해줬습니다. 며칠이 지나서 작은 새는 푸드덕하며 하늘을 날아갔습니다. 장인은 홀연히 깨달았습니다. “저 작은 새처럼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돌봐줬더라면, 날아가는 목각새를 만드는 헛수고를 하지 않았을 것을….”

예수님께서는 소년의 오병이어로 남자만 5000명이 먹는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엘리사는 기름 한 병을 통해서 선지생도의 아내가 빚을 갚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줬습니다. 내게 있는 작은 것으로 기도하며 사랑을 실천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글=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출처/겨자씨] <겨자씨/국민일보>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11-03)


비밀스런 경륜을 가지신 하나님

로마서 11장 25-32절


 

집안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정말 가치 있는 것들이 있고, 가치 없는 물건도 있습니다. 또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될 귀한 물건도 있고, 될 수 만 있으면 빨리 버려야 할 물건이 있습니다. 과연 그런 물건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버려야할 물건들을 담는 것이 ‘쓰레기통’입니다. 집안에 버릴 것을 제때 버려야 새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온갖 더러운 것, 먼지 나는 것을 모두 버려야만 새로운 물건을 구입해서 새롭게 리모델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똑같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도 과거의 쓰레기와 같은 것들은 모두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쓰레기통에 담아야할 것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버려야할 것들을 소개합니다.

 

온 이스라엘의 구원(25-27)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권고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 구원 백성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과거의 기존 틀을 깨고, 옛 잘못된 생활과 신앙을 버리고, 잘못된 생각과 습관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25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26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25-27)

사도 바울은 일관되게 이스라엘이 믿지 아니하므로 구원에 이르지 못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완전히 제외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⑴ 유대인들의 영적인 교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은 최고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멋있게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은 자신들이 생각한 기준에서 일뿐이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훌륭한 신앙이 아니라 가장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이 바로 영적인 교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교만을 깨뜨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직선적으로 말하면 유대인들 당신들은 의롭거나 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행위로 완벽하고 율법을 다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빨리 버려야할 것들을 쓰레기통에 넣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⑵ 이방인들의 구원의 역사

이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이방인들은 겸손이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구원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을 보면서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25절). 즉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경건치 않은 자들을 돌이키시는 사건이요, 그들의 죄를 없이 하시는 은혜의 행위인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언약을 이루시는 사건입니다. 이 구원의 비밀을 이루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은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⑶ 구원에 대한 생각을 변화

과거의 구약 시대 때에 주셨던 율법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급작스럽게 주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방법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율법 방법을 따라 노력을 해보았지만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그 약속을 따라서 구원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 방법으로 믿음 생활한 것이 구원을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 맞는 하나님의 신앙을 붙잡고 나가야 한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모세가 시내산 광야에서 하나님과 영적이 교제하는 장소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聖幕)입니다. 성스러운 텐트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이동하기 때문에 성막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고 왕들이 세워졌습니다. 그 왕 중에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이제는 성전이 건축된 뒤에는 성막을 고집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구약에는 율법을 통한 구원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방법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성전이 건축되었는데도 성막을 고집하듯이 그런 영적인 방법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런 과거의 생각을 버리고 시대에 맞는 신앙을 붙잡아야 합니다.

⑷ 새로운 구원의 방법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방법을 주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대인들이 붙잡고 있는 율법과 할례의식 등이 아니라 새롭게 그리스도를 오셨습니다. 이제는 책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과 계명 그리고 살아있는 율법인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가 차매 아들을 보내셨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때가 올 때, 그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 나갔던 방법이 이제는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지성소의 문이 활짝 열려서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의 산 제사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께 나와야 합니다.

비극 중에 비극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줄 아는데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면서 씩씩거리고 있다는 얼마나 어리석겠습니까! 집안에 쓰레기가 가득한데도 버리지 못하고 쓰레기 속에 살아간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외형적인 건물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쓰레기로 가득한다면 쓰레기장에 불과할 뿐입니다.

특히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고집합니다. 바꾸어야할 때를 놓칩니다. 시기를 놓치면 모든 것을 다 놓칠 수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지금이 기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쓰레기 같이 버려야할 것들이 있다면 버리시길 바랍니다. 포기할 것들이 있다면 포기하시길 바랍니다. 안되는 것을 집착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제는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28-29)

자신의 생각과 고집에 집착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바른 길을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는 전혀 반대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 원수가 되어버렸습니다.

28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8-29)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모름으로 원수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유대인들과 똑같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감옥에 넣고 경우에 따라서는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3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사도행전 9:3-5)

유대인들은 바울의 고집으로 하나님의 뜻에 전혀 다른 방법으로 나갔고, 더 나가서 하나님을 핍박하므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로 흘려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실수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이 정확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복음 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과거의 영적 쓰레기들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사정에 따라서 변경되거나 수정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은 이중적인 입장에 있었습니다. 복음의 측면에서는 복음을 거부하였기에 원수된 자들입니다.

 

구원의 경륜에 참여한 자(30-32)

이제는 사도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새로움을 사람들이 어떻게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아야할 지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30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2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0-32)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버리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으로 열렸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혜택을 입어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율법 밖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먼저 믿은 유대인들이 문을 꼭 닫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복음의 문을 이방인들에게 활짝 여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제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의 중요한 원칙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순종치 아니함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베푸시는 긍휼은 사망 가운데 있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방인을 통해서 다시 이스라엘 선민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하니깐, 이방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다시 이방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한 번 선택한 민족이나 사람은 끝까지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놀라운 구원의 계획,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소유함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주셔서 마지막 때에 이방인들로 하여금이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물과 같이 흘러넘칩니다. 먼저 받은 사람들이 넘치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어집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은 복음의 전파자가 됩니다. 그래서 구원의 그러므로 이제는 이방인들이 구원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열방을 향하여 이스라엘이 복음화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Back to the Jerusalem’이라는 운동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러한 선교의 도구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유대인들을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면 내국에게는 전도, 외국에는 선교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은혜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살아있는 생생한 복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복음과 은혜의 통로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크나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받은 사람들을 통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길 원하십니다. 작은 헌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힘있게 전달할 것입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2023/06/19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웃는 자에게 건강이 옵니다

김성태 목사(삼척 큰빛교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건강에 대한 축복이기도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건강의 축복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건강한 육신으로 천국 가는 그날까지 쓰임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장수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욕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욕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일상생활 가운데 자족하며 사는 것이 건강의 지름길입니다.

둘째, 건강 축복의 지름길은 웃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웃는 자에게 건강의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왜 웃음이 건강을 가져다줄까요. 웃을 때 신기하게도 우리 몸 안에 있는 불필요한 독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건강해진다고 합니다. 건강은 저항력이 결정합니다. 저항력이 강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고 저항력이 약하면 병에 걸립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뻐하면 우리는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건강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많이 웃으시길 바랍니다. 날마다 웃으십시다. 하나님은 웃는 자에게 건강의 축복을 주십니다.

김성태 목사(삼척 큰빛교회)

 

[출처/겨자씨] <겨자씨/국민일보>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11-02)


끝까지 백성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

로마서 11장 13-24절


어린 시절에 들이나 산에는 ‘야생배나무’, 또는 ‘아그배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사과나무과’에 속하지만 작은 구술만한 배처럼 생긴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야생배나무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종종 이 나무에 배나무를 접붙이면 큰 배를 수확할지 궁금했습니다. 이렇게 작은 배에게 큰 배를 접붙임으로 큰 배를 수확한다면, 그 배나무는 야생배나무가 아니라 훌륭한 배나무로 변할 것입니다. 그냥 작은 ‘아그배’를 열리면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들의 장난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나무에서 큰 배가 열리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따라서 열심히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들에게 교마함 마음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간절한 소망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도 율법이라는 모든 껍질을 버리고 진실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오길 간절히 원합니다.

 

이방인을 위한 바울(13-17)

복음이 이방인에게 열렸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민족 유대인들을 바라보면, 이방인들에게 당부합니다.

13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그들을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13-15)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방인의 선교를 위해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습니다. 한편에서는 그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방인들이 이렇게 많이 돌아오는데,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방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돕는 공생(共生)의 길임을 말씀합니다. 이제 이방인들에게 대한 구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먼저 자신의 직분에 대해 다시 언급합니다. 그는 ‘항상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이 어떤 직임을 받은 사람인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확인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것을 그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부르심을 받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5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사도행전 9:15)

이러한 자신의 사명에 대한 확인은 성도들도 중요합니다. 이 질문은 ‘자신이 누구인가?’, ‘자신이 어떤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직분은 중요합니다. 그 직분은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당신이 맡은 자리가 사람들의 이목에 끌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하나님의 사역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자리와 직분 그리고 역할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그 자리에 세우셨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내 자리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어느 곳에서도 요셉처럼 충성할 수 있습니다. 그곳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항상 어떤 자리이든지 빛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평범한데 그 사람만 가면 그 자리를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가지고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이방인의 선교는 바울이 했기 때문에 그 자리가 빛날 수 있었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자리가 바울처럼 빛나게 하는 자리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 자리에 놀라운 간증과 기적과 축복이 풍성하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자신은 유대인이지만 이방인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재확인시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위한 일을 한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틈만 날 때마다 자신의 직분과 사도성을 확인하였습니다. 자신의 직분에 대해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 직분은 사람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수고를 통해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의 반열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동참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은 이렇게 축복 받은 이방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그것을 보고 있던 유대인들이 시기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들이 돌아오길 원하는 마음으로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을 더 열심히 감당하길 원했던 것입니다.

 

감람나무를 통한 비유(16-18)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 접붙임을 통해 비유합니다. 이곳에서 의미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16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또 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18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16-18)

사도 바울은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를 통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의 구원관계에 대해 설명 합니다. 그가 말하는 돌감람나무는 이방인이고, 참감람나무는 유대인입니다. 그는 이방인들의 모습을 ‘꺾인 돌감람나무’로 표현합니다. 돌감람나무도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꺾인 돌감람나무 가지는 얼마나 더 가치가 없겠습니까! 누구에게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꺾인 가지는 그대로 두면 말라서 비틀어져 죽게 될 것입니다. 아무런 쓸모없이 다만 불에 던져 넣을 뿐입니다. 영적으로 살펴보면, 이방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아무런 가치 없고 볼품없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돌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버림임을 받을 수밖에 없던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붙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이 바꾸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돌감람나무 가지가 참감람나무 가지가 되어서 뿌리의 모든 공급과 자원과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돌감람나무 가지에서 ‘새로운 참감람의 열매’가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근본적인 본질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과일나무는 항상 열매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무의 열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어떤 결과를 맺습니까?

42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3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4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누가복음 6:43-45)

돌감람나무는 열매를 맺어도 사람들에게 필요한 열매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런 쓸모없는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그것도 꺾인 가지로 사람들에게 밟힐 뿐입니다. 이방인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서 훌륭한 감람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참감람나무였던 유대인들은 돌감람나무가 되었습니다. 열매가 과거에 이방인들처럼 형편없는 열매였습니다. 그라나 바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지만, 너무 자긍하면서 교만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접붙임을 위한 사역자(19)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19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19) 이방인인 돌감람나무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참감람나무로 접붙이는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바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자랑스럽게 소개합니다. 그 사역을 매우 귀중하게 여깁니다. 바울은 항상 자신의 자리와 자신의 사역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그 일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자리라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기쁘게 감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당신도 바울처럼 주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원대한 구원을 이루실 하나님(20-24)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 대한 원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뜻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나 멸망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20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20-24)

⑴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20-22)

돌감람나무 가지일지라도 접붙임이 되고, 참감람나무의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받아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기틀이 된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취해야 할 두 가지 태도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에 대해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20a). 유대인은 원 가지(뿌리)이고 이방인은 접붙인 지류(가지)인데,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 꺾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접붙여진 이방인이 유대인에게 약속된 특권을 대신해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이방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이 구원 받은 사실이 다른 사람에게 특히 유대인들에게 자랑이 될 순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에 대해 교만하거나 우월감을 가져선 안 됩니다. 둘째는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높은 마음을 품거나 방자하게 행치 말라는 것입니다(20b). 만일 그렇게 처신한다면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얼마든지 꺾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도구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낮추고 감사하는 근거가 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믿음의 사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다면 두려워해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높으신 뜻을 기억하면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외(敬畏)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칙은 외예가 없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서는 참감람나무 가지이든지 돌감람나무 가지이든지 외형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원칙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22).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낌없이 구원의 은혜로 베풀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있지만 준엄(峻嚴)하심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준엄한 기준을 적용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는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위나 혈통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다 꺾기우고 심판을 하시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엄위를 구별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아도, 즉 믿음으로 살지 않아도 구원 받을 것이라고 어물쩍 넘어가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 대한 실수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은 충분이 이해하십니다. 그러나 구원만은 예외가 없습니다. 구원에 대한 기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혜의 기준을 따라 살지 않으면 그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이 없는 자는 결코 구원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니고 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심판과 진노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인자가 있습니다.

⑵ 유대인에 대한 구원(23-24)

이제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한 구원에 대해 언급합니다. 참감람나무가 원뿌리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다면 하나님께서 하셨던 사역들에게 대해 믿어야 합니다. 참감람나무 임에도 믿지 않는 것은 꺾인 가지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외형적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의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던지 간에 믿음이 없다면 참감람나무 가지일지라도 꺾인 가지이기 때문에 죽은 신앙인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성경에서 나오는 이름이나 지명들이 모두 생소하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었습니다. 하물며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이 익숙한 문화와 환경들, 그리고 자신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는 얼마나 쉽겠습니까! 그들이 믿기 시작하면 더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믿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믿었다고 유대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뿌리에 접붙이지 않으면 그가 참감람나무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원리, 인자의 원리, 은혜의 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하실만한 능력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만 강조하고 준엄하심을 간과하는 것은 반쪽짜리 복음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강조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생명력 넘치는 관계로 나아가야 하며, 복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요건입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2023/06/18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행복은 평안 속에 핀다

양병희 목사(영안교회)


두 마리의 쥐를 실험해 보았다고 한다. 똑같은 환경에서 먹이를 줬다. 그러나 한 마리 쥐에는 먹이를 줄 때마다 평안하게 음악을 들려줬다. 6개월 후 이 쥐는 털이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나는 쥐로 성장했다. 다른 한 마리는 먹이를 주면서 머리를 톡톡 때렸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란 쥐는 털이 빠지고 온몸에 암 세포가 퍼졌다고 한다.

미물의 짐승도 환경이 평안하지 못하면 온몸에 암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물며 이성과 인격을 가진 인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도 평안과 기쁨을 잃으면 온몸에 저항력이 떨어져 병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평안을 원한다. 평안한 곳이 천국이고 불안과 근심, 절망이 있는 곳이 지옥이다. 악마와 천사의 모습은 ‘마음에 평안이 있는가?’ ‘근심이 있는가?’에서 나타난다.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마음에 평안이 있는 사람이다. 주님이 함께하는 곳, 성령님이 함께하는 곳,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에 참된 평안이 있다(요 14:27).

양병희 목사(영안교회)

 

[출처]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2023/06/17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버려진 돌의 부활

오연택 목사(대구제일성결교회)


한 여인이 물에 떠 있는 둥근 바위 같은 곳에 앉아 있습니다. 여인의 눈은 흰 천으로 가려졌고 몸은 한 줄밖에 남지 않은 수금 같은 악기에 간신히 기대고 있습니다.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금방이라도 뒤집힐 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앞을 전혀 볼 수 없으니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아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이 무엇일까요. 영국의 화가 조지 프레더릭 와츠(1817~1904)의 ‘희망(Hope)’입니다.

희망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밝고 따뜻하고 행복한 곳에서 희망은 결코 자라지 않습니다. 희망은 절망 속에서 고통과 슬픔을 먹고 자라는 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이 없으면 희망도 없습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 118:22) 혹시 여러분의 신세가 버려진 돌같이 느껴집니까.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되기만 하면 쓸모없이 버려진 돌도 하나님 나라의 모퉁이돌이 될 수 있습니다. 버려진 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워지는 부활을 기다립니다.

오연택 목사(대구제일성결교회)

[출처] https://m.kmib.co.kr/view.asp?arcid=0924072936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11-01)


백성을 버리지 않는 하나님

로마서 11장 1-12절


지난번 뉴스에 ‘과자들의 과대포장’이란 제목으로 된 기사를 보았습니다. 포장은 큼지막한 데, 외형적인 부피에 막상 10%도 안 되는 내용물을 담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겉포장은 분명히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래서 포장은 튼튼하고 아름답게 꾸며야 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용물입니다. 포장이 아무리 화려해도 내용물이 변변치 않으면 가치가 없어진 것입니다. 사람들도 살아가면서 같은 법칙이 적용됩니다. 삶에는 형식과 본질이 있습니다. 형식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인 것이 더 중요합니다.

 

본문에서 구원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에 대해 설명합니다. 선민 민족이었던 유대 민족들이 전반적으로 구원에 길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기 때문이라고 핑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림을 받게 된 동기가 하나님께서 버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신들의 악한 결정에 의해 된 것이라고 증명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유대인들이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변명할 수 없는 이스라엘(1-5)

종종 잘못된 자녀들 중에는 자신이 잘못된 것을 부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장성해서 하는 말이 ‘왜 어릴 때에 나를 잡아주지 않았냐?’고 적반하장(賊反荷杖)을 주장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적반하장으로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의 반열로 돌아오길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로마서 10:21). 지금도 2000년 동안 한결같이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에서 배제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예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2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3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1-5)

사도 바울은 앞 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의 반열에 동참하지 못했던 이유로 그들의 불신앙을 지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취하지 않고 율법이라는 껍데기만 취했던 결과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⑴ 자신을 통한 증명(1)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에서 포기하지 않았음을 사도 바울은 자신을 통해 설명합니다. 자신도 혈통적으로 정통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반열에 동참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바울은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구원의 반열에 동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깊이 묵상합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디모데전서 1:15)고 고백합니다. 자신같이 부족한 사람도 구원의 백성으로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거듭나기 전에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똑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본질은 버리고 껍데기인 율법에 메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살기가 등등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갔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사도행전 9:1-2)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인격적인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다른 사람들처럼 율법이라는 껍데기를 취하던 자신의 아주 어리석은 삶을 발견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껍질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본질에 대한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리석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 본질을 구하는 삶으로 변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본질을 추구하도록 소개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구원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살펴보면서, 가망성이 조금도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인생을 바꾸신 것입니다. 기적적으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알곡을 위한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과 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할 때 안타깝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알고 나니깐, 과일을 깎아서 알맹이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껍질만 먹고 있는 어리석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신 것을 소개한 것입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이스라엘 가운데 구원받은 백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⑵ 역사를 통한 증명(2-5)

다음으로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가장 암흑과 같은 시기에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부르고 계셨던 것을 설명합니다. 그 시기가 바로 엘리야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를 통해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엘리야 당시는 이스라엘의 상황이 영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시대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7대 왕인 아합은 이방 시돈(Sidon)사람 여인 이세벨과 결혼하였습니다. 그 왕비 이세벨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매우 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북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하도록 장려하고 이방 종교의 부도덕한 생활을 유행시키고 베니게(Phoenicia)에서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바알 선지자 450명을 불러드렸습니다(열왕기상 16:31-33). 그리고 하나님의 제단을 헐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북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을 따르는 백성들이 하나도 없어보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비참함을 토로하면서 “나만 남았나이다”(왕상 19:10)라고 기도합니다. 엘리야의 생각에는 모두 죽고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자신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에서 혼자 싸워간다는 것처럼 어렵고 힘든 것이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8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열왕기상 19:18)

엘리야에게는 뜻밖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 칠천 명을 감추어 두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거부한 것 같지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이사야 6:13)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절할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사랑한 백성들 섣불리 심판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지 않으면 편견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본질은 버리고 껍데기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더욱 폐쇄적인 삶으로 갇혀 살아갑니다. 새로운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가 그런 이기주의와 편견적인 결과인 실수였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생각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이루어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하나님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고, 하나님의 마음 따라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 다음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들어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남겨두신 성도’입니다. 오늘날 점점 어두움이 찾아오는 저녁처럼, 영적으로 세상이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당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겨두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중요한 본질은 버리고 껍데기만 가지고 만족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그러한 사람으로 남아있길 원치 않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7000명을 남겨두신 것처럼, 초대교회에 사도 바울을 만나주셨던 것처럼, 우리를 남겨주신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이 있어서 우리를 남겨 두신 것입니다. 당신이 남아있는 것은 우리 가족과 이 시대와 이 지역을 향한 구원 역사를 강력하게 이루어가길 원하신 것입니다.

 

버림 받게 되었던 이스라엘(6-10)

사람들은 자신의 인간관계를 좋게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어도 상대방이 거절하면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어떠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까가 매우 궁금합니다. 사도 바울의 통찰력은 위대합니다. 그는 시대와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알곡은 버리고 껍데기만 가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지에 대해 살피고 있습니다.

6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7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8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 9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10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6-1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조인 아브라함을 먼저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 후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먼저 세워져서 모든 열방을 위한 구원의 도구가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잠시 하나님을 거절했다고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마음이 작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위해 손을 벌리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기다리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모든 관계는 쌍방적인 역할로 된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불순종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향해 손을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대체로 잘못 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계속 베푸셔서 참 순종하는 자를 남겨 놓으셨습니다. 사람이 율법이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족시킬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신 전반적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5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5)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들을 본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일을 잘 깎아가지고 알맹이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껍질만 챙기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욕심에 가리워져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분별력과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의 욕심으로 잘못된 판단력을 가진 것입니다.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껍질인 율법만 가지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기다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은혜로 일어난 사건이지 율법을 따라 행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제깨나 오늘이나 한결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11-12)

세상에서도 잘못된 관계를 지속할 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해서 넘어진 것을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1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11-12)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의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의 대상에서 제거된다는 것은 가장 무서운 공포요, 진노입니다. 다행인 것은 아직도 구원의 역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것을 ‘넘어졌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어짐’에 결과가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첫째는 유대인들이 받아야할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흘러가버렸습니다.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복음을 거부한 결과, 이방인의 세계에 복음이 흘러갔기 때문에 이방에서 복음이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됨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도 회복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회복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넘어졌다고 해서 일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오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순종하였다면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온전케 되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믿는 것보다 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12)라고 말씀하십니다. 한국 성경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됩니다. 영어 성경 ESV에서 “If their failure means riches for the Getiles, how much more will their full inclusion mean!”(만약 그들의 실패로 이방인들이 부유해졌다면, 얼마나 많은 것을 그들의 전체에게 있겠는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풍성이 주셨던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풍성하게 주실 것입니다. 영적인 자녀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순종한다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뜨겁게 하려는 데는 방해가 많습니다. 사람들과 환경을 통해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라엘처럼 넘어집니다. 그러면 당신이 받아야 누려야할 축복을 타인에게로 가버립니다. 여호수아처럼 믿음으로 살고 철저하게 순종하는 생활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릴 축복의 자리에 함께 서 있을 것입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10-03)


핑계할 수 없는 이스라엘

로마서 10장 14-21절


광주광역시 양림동 언덕 위에는 선교사 묘지가 있습니다. 전라도에서 선교하시다가 돌아가신 23명의 선교사들과 가족들도 잠들어 있습니다. 100여 년 전에 좋지 않은 미개국인 와서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들의 희생과 순교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아직까지 복음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선교사님들에게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들입니다. 그들의 사명을 기억하면서 그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왔고, 지금도 많은 분들이 주님의 사명을 기억하면서 열악한 곳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 자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세우시고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의 메시지가 전달되었지만, 듣고도 모른척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복음을 거부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거부당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전 세계에 전파됨으로 많은 이방 사람들이 깨달고 돌아왔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도 부릅니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겠습니까?

 

복음 전파의 과정(14-17)

복음 전파는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자신에게 기회 있을 때 충성해야 합니다. ‘기회’는 항상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하는 일에 대해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4-17)

복음 전도자들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에 가까워진다는 뜻입니다. 주의 ‘말씀’은 육화되었고 우리가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돌판이 아니라 마음에 말씀이 새겨져 있고,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입과 마음에 있어 실천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⑴ 복음 전파의 과정(14-15a)

바울은 본문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부터 받는 사람까지 설명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받았던 사람으로부터 전파한 사람까지 역순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파는 믿음에 이르게 하는 길이라고 소개합니다. 한 영혼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복음 증거 과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어떻게’를 사용한 네 개의 질문을 통해 다섯 단계로 복음 증거와 그에 대한 반응을 소개합니다. 각 질문은 원인과 결과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각 질문은 이전 질문과 꼬리물기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전 질문의 원인 과정을 다음 질문의 결과로 사용하는 형태입니다. 전체적으로 (1) 어떻게 그들이 그를 부름(결과) - 그들이 그를 믿지 않음(원인) → (2) 어떻게 그들이 믿음(결과) - 그들이 듣지 못함(원인) → (3) 어떻게 그들이 들음(결과) - 선포가 없음(원인) → (4) 어떻게 그들이 선포함(결과) - 보내심을 받지 못함 (원인)의 구조입니다. 바울은 꼬리 물기 설명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복음이 사람들에게 들려질려면 누군가는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전하는 사람은 누군가에 의해 보내심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음 전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 영혼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에 하나님을 믿게 된 것도 누군가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제 하나님의 복음을 가지고 전파하는 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멀리 나가서 전파할 순 없지만, 가까운 곳에서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함으로 복음이 전파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믿음 이전에 말씀을 들어야 하며 듣기 이전에 선포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이전에 보냄을 받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하는데, 이것이 믿음의 가장 근원이 되는 기본입니다. 믿음이란 기본을 듣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되기에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듣지 않고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신은 한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할지 모르지만, 당신의 수고를 통해 믿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전하고, 또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면, 점점 세상 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⑵ 복음 전하는 사람(15b-17)

복음 전하는 사람들은 아주 중요한 일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귀한 사람들인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해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로 표현합니다.

7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이사야 52:7)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선포하던 그 순간을 떠올렸습니다(사 52:7).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때를 떠올리며 감격스러워했습니다. 누군가 70년간의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소식을 전할 때 그 발이 얼마나 복된 발걸음이 되었겠습니까! 과거에 우리나라는 일본의 지배를 35년 동안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으로부터 해방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기쁜 발걸음이 되었겠습니까! 기쁨의 소식을 가져다주는 발은 복된 발걸음일 것입니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는 것만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죄와 죽음에서 있던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로 이끄는 소식은 말할 수 없이 좋은 소식입니다. 이것은 사형수에게 감형을 얻고 출옥하는 것보다 좋은 소식입니다. 이것은 복음 전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귀한 사람들인지를 말합니다. 당신이 말씀을 전파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보다 더 복되고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새로운 선교지에 선교사님이 부임하길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것은 네가 가장 적격이다.’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는 한국에서의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을 정말 재미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앙이 안일함에 빠질까봐 명하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떠나기로 했습니다. 때로는 일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삶이 무기력해지고 안일한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무기력한 삶을 깨고 힘 있는 삶을 살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영적인 전투를 해나갈 때, 그리스도인으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무기력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봉사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명으로 알고 수고할 때, 당신의 수고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며, 그들도 당신을 통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사역을 감당하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 수고하는 발길은 얼마나 아름다운 발길이겠습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일에 당신이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복음을 무시하는 이스라엘(18-21)

복음 전파를 위해 수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봉사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봉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라고 소개합니다.

18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9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21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18-21)

유대인이 계속해서 복음을 거부했지만, 오히려 이방인이 하나님 나라에 진입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이 새로운 백성으로 편입하는 이방인의 모습을 봄으로써 시기와 질투를 느끼게 되고, 결국 그들도 구원 대열에 합류하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⑴ 부정적인 이스라엘의 반응(18-20)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냉담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곳에서 사도 바울이 질문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들었는데도 복음을 믿지 않느냐?’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시편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은 이미 전파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편 19:4)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온 세상에 말씀을 전했습니다. 심지어 온 땅에,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못들었다고 변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점은 자신의 것만 최고로 생각하는 집착(執着)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이론을 들어보지 않고 무조건 반대하는 형상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떤 문제에 집착하면, 주변에서 아무리 무슨 말을 해도 흘러버리고 들리지 않습니다. 사랑에 빠진 여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외에 다른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눈에 콩깍지 썼다.’고 말합니다. 종종 고집을 부리다가 나중에 현실로 돌아와서 후회하는 경우를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온 땅에 전파되는 복음을 통해서 이방인들조차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사도 바울의 안타까움이 배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이사야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21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신명기 32:21)

또한 이사야는

1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이사야 65:1)

이방인들은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었고, 그의 복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깨닫지 못했습니다. 더 나가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불순종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되지만, 무슨 이유로든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의를 거슬릴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⑵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21)

불순종과 거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많은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다고 변명할 여지를 완전히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으로 돌아오길 기다린 하나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믿지 못한 것은 그들이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한 것은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순종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서 의도적으로 주님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거부한 불순종한 그들에게 아직까지도 손을 벌리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듣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많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2000년이 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시면서 수많은 영혼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포기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구원 열정은 식을 줄 모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세상이자 절절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일은 영광스럽고 복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사랑의 열정을 본받아 기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2023/06/16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감사 열등생 스트레스

조주희 목사(성암교회)


어떤 분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자란 그분은 가난을 대물림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신앙생활도 착실히 하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결과 상당한 재력가가 됐습니다. 그런데 한 사건으로 그동안 쌓았던 재물이 순식간에 다 날아갔습니다. 절망과 분노는 그의 인생을 망가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재기할 수 있게 된 건 감사를 발견한 덕분이었습니다. 놀라운 힘을 지닌 감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결과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의 무게가 사람마다 각각 다르지만 어떤 분은 해결할 수 없는 일 앞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그래도 감사하라” “감사하면 이길 수 있다”고 충고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놓인 분에게 ‘그래도 감사해야 한다’고 권하면 고통스러운 현실, 거기에 더해 감사하지 못하는 비신앙적인 자신을 알게 되는 또 하나의 짐을 지게 만드는 꼴이 됩니다. ‘감사의 열등생’으로 만들지 말고 고통에서 감사의 탈출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버팀목이 돼 주는 게 더 지혜로울 겁니다.

조주희 목사(성암교회)

[출처]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306933&code=23111512&sid1=fai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애가(12)

 


마지막 회복의 기도하는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5장 11-22절


대부분 사람들은 법정에서 재판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의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재판에서는 피해자이든 피의자이든지 간에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변론해야만 불이익이 적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를 고용합니다. 법정에서 변호사가 판사에게 의사를 밝혀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변론(辯論)’이라고 합니다. 피고인이 죄가 없다는 것이나 어쩔 수 없이 죄를 질 수 밖에 없는 사실을 설명해서, 판사로 하여금 형량을 안 받거나 낮게 받으려고 변론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선지자는 최후의 변론하듯 다시 한 번 간곡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레미야애가의 마지막 부분에 들어섰습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고난당한 상황을 이어갑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여인들과 처녀들이 짓밟히고, 지도자들과 장로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천대를 받습니다. 그리고 젊은이와 아이들은 포로와 노예가 되었습니다. 즐거움이 사라지고 노래와 춤은 슬픔과 통곡으로 바뀝니다. 예루살렘 성은 사람들이 살지 않아 거칠어져 여우들만 득실거리는 성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는 변호인처럼 하나님께 진노를 풀어달라고 간구합니다.

 

비참한 상황에 대한 탄식(11-16)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왕이십니다. 비록 지상에 있는 나라들은 망할지라도 하나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나갈 때 소망이 있습니다. 영원히 다스리시며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가서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11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12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 장로들의 얼굴도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13청년들이 맷돌을 지며 아이들이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14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15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16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11-16)

예레미야애가의 첫 단락에서부터 예루살렘 성의 곡소리와 탄식으로 시작했던 것처럼, 마지막 단락도 예루살렘 성내 백성들이 지금 당하는 고난에 대해 소개하면서 탄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영적 순결을 지키기 거절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에게 치욕을 당한 것을 소개합니다. 11-14절에서 모두 주어가 맨 앞에 나오는 동일한 형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각양각색의 모든 사람들이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⑴ 능욕을 당하는 부녀자들(11)

멸망당해 바벨론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은 이방 사람들에 의해 능욕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멸망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후 바벨론 군사들이 약탈하고 부녀들을 겁탈했습니다. 고대 전쟁에서는 이긴 자들이 재물을 물론 여자들까지도 노략의 대상으로 삼아 겁탈을 일삼았습니다. 본문에 ‘욕보이다’는 ‘강제로 성폭행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성안에서’를 강조하는 이유는 원래 성안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안전한 장소입니다. 성폭행의 위험이 있을 때는 소리를 지르면 도움을 받기 좋은 장소입니다(신명기 22:23-24). 하지만 여기서 성안에서 성폭행이 벌어졌다는 것은 이 여성들이 소리치며 도움을 구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의 부녀들이 이런 끔찍한 폭력의 상황에 놓였다고 선지자는 한탄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정조를 저버리고 이방의 우상들에게 스스로 치마를 걷어 올렸던 이스라엘은 이제 강제적으로 침략자들에 의해 치마 올려지고 겁탈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⑵ 존경을 잃은 지도자들(12)

선지자는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서 존경을 받던 지도자들이 겪는 고통을 소개합니다. ‘매달렸다’는 것은 지도자들이 바벨론의 점령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바벨론 군사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어 감히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 잔혹한 짓을 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장로들은 사람들로부터 전혀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장로들은 업신여김을 당했습니다. 이들도 정복자들에 의해 모욕당했기 때문입니다.

⑶ 노역에 시달린 젊은 남자를(13)

예루살렘을 정복한 바벨론 군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했습니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에 살아남은 유다 백성들은 대적들의 압제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먼저 젊은 남자들은 힘든 노역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맷돌을 지고 운반하거나 그것을 돌려 곡식을 빻는 일은 노예가 하는 힘든 일로서 노예처럼 혹사당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부모에게 보호를 받아야할 아이들까지도 나뭇짐을 지어야 했고, 그 짐이 힘겨워서 넘어지곤 했습니다. 이처럼 바벨론 정복자들에 의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함부로 다루어지고 모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1절의 상황과 연결되어 모든 전쟁 포로가 된 젊은 남녀의 비참한 상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⑷ 존경이 사라진 장로들(14)

선지자는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노인과 청년들을 묘사하며 대조시킵니다. 노인들은 성문에 앉아서 존경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문에 앉지도 못했습니다. 고대 성문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로서, 이곳에서 재판이나 매매, 계약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런 일들은 주로 성에서 존경 받은 장로들에 의해 집행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인들은 조언하고 판단하는 권위와 명예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정복된 이후로 더 이상 그런 명예와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원수들에 의해 성문이 폐쇄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재판도 받지 못하고 바벨론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의해 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제멋대로 결정되는 판단에 아무 말 없이 굴복해야만 했습니다. 더 나가서 하나님께 찬양하고 즐거워하던 예루살렘에서 청년들은 축제나 여러 행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고 춤추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라지고 축제도 행사도 없어졌습니다.

⑸ 패망한 예루살렘의 심정(15-16)

멸망한 이스라엘은 모든 즐거움과 기쁨이 사라지고 짓누르는 듯한 절망과 고통만이 뒤덮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이방인들에 의해 압제를 받고 있던 당시 아무런 기쁨이나 소망이 없이 절망과 고통의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살아갔던 삶의 질서는 파괴되었습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상황에 처한 예루살렘 사람들의 생각과 슬픔을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라고 표현합니다. ‘슬픔’은 ‘애곡’, ‘통곡’이라는 뜻으로 기쁨의 춤이 죽음을 애도하는 곡으로 바뀌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면류관이 떨어졌다’고 소개합니다. ‘면류관’은 왕과 같은 고귀함을 나타냅니다.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다는 것은 유다 백성의 고귀함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유다 백성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함락으로 그 명성과 자부심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선지자는 16절 하반절에서 탄식을 하며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선지자는 현실을 직시하였으며, 그 원인이 된 죄에 대해서도 회피하지 않고 인정합니다. 죄에 대한 인정이 비록 가슴 아프고 수치스럽지만, 결코 회피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현실과 죄를 직시할 수 있는 힘이 있었기에, 19절 이하에서 하나님께 돌이켜 달라고 간곡히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고난과 수치는 자신들의 죄에 따른 결과로서 하나님께 공의의 심판을 내리신 것은 정당하다고 고백합니다.

 

완전히 황폐해진 예루살렘의 상황(17-18)

‘견물생심(見物生心)’은 ‘어떤 물건을 실제로 보면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김’이란 뜻입니다. 죄악도 잘못된 것들을 봄으로 시작합니다. 죄악은 눈을 어둡게 할 뿐 아니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기쁨을 빼앗고 삶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좋은 영적 시력을 갖기 위해서 보지 말아야 할 것과 보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7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18시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17-18)

계속해서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그 죄로 인해 겪게 되는 수욕과 고통, 그리고 황폐함을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자 자랑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의 몰락이야말로 선지자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입니다.

⑴ 심하게 피곤해진 이스라엘(17)

비참한 상황 때문에 선지자 예레미야는 마음이 피곤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또한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얼마나 더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할지, 하나님께서 이 심판을 언제 어떻게 멈추실 것인지, 자신들을 괴롭히던 악인들을 심판하실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철저하게 무기력했다. 또한 예루살렘은 정의와 기쁨이 사라진 성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이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죄 때문입니다. 폐허로 변한 시온 산에 여우들만 어슬렁거리는 모습은 그들의 현실을 잘 보여줍니다. 또한 본문에서 ‘우리들의 눈이 어두워졌다’를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너무 울어서(예레미야애가 1:16; 2:11,18; 3:48,49) 눈이 상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재난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해졌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마음이 무기력하다는 말과 연결되어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는 무력하고 절망적인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해석을 취하든지 현재 매우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⑵ 완전히 황폐해진 예루살렘(18)

성읍 이스라엘도 황폐하게 되어 더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여우와 같은 들짐승들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번성하던 아름다운 성읍이 이제는 황폐해져 들짐승을 왕래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매우 비참했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신과 철저한 무기력과 황폐함을 고백하면서 여호와께로 나아갑니다. 여호와만이 오직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상황이 발행하였기 때문에 이제 희망도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레미야애가가 우리 한국교회에서도 필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랬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행한 일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값싼 위로는 버리고 하나님께 나가서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만 소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한 선지자(19-22)

아무리 어려운 환경 중에도 먹구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고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아직까지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옛날처럼 하나님과 교제하는 행복한 날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19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20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21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22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19-22)

몰락한 이스라엘의 참상을 묘사하고 그 원인이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복한 예레미야는 이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을 기억하면서 여호와께 회복을 간절히 호소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근거는 두 가지었습니다.

⑴ 영원하신 하나님의 권능(19-20)

먼저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하여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을 간구했습니다. 이것은 하늘 보좌에 좌정하셔서 모든 피조물을 세세토록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영원성과 주권에 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주권에 대한 이런 고백은 이방인들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고 압제를 당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일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가 여기서 호소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기억하시고 회복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압제와 고통이 70년 동안 지속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렘 25:11-12). 그래서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영원히 계시다는 것과 그의 보좌에 계속해서 여호와가 앉아 계신다는 것을 송축합니다. 이것이 그가 믿고 의지하는 희망의 보루이며 신앙입니다. ‘잊다’와 ‘버리다’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잊히거나 버림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여호와의 보좌가 무너진 것처럼 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멸망해도 여호와는 살아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영원히 있으며, 여전히 왕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믿음은 결국 이 세상의 역사가 여호와의 손 안에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백성에게 닥친 재앙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⑵ 영원하신 하나님의 언약(21-22)

둘째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지해 구언과 회복을 간구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불순종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잊거나 파기하지 않으실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인도해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인도에 전적으로 순종한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자신들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심에 의지하여 자신들도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전처럼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이 표현은 철저히 하나님의 자비를 먼저 구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가 있어야 그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갈 수 있고 회복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전적으로 용서를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있습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부정적인 상황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21절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봅니다.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면’, ‘진노하심이 매우 크시지 않다면’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희망을 품으려 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위한 예레미야처럼 성도들도 본받아야 합니다. 멸망한 조국을 부여잡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당한 고난 속에서도 인내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에도 꼭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성취되어 감을 믿고 하나님의 신뢰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애가를 부른 선지자의 처절한 고통의 울부짖음이 오늘 우리에게 큰 위로와 희망이 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 침공으로 멸망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은 화평과 기쁨으로만 오지 않음을 묵상케 하는 좋은 말씀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로 기쁨은 슬픔으로 바뀌고, 면류관이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어려운 일이 겹치고 고난이 있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도들은 예레미야처럼 나라와 교회 공동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같은 당신의 기도를 통해 우리나라가 바르게 세워지고, 무너진 교회의 권위가 회복되길 기대합니다. -임마누엘-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2023/06/15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일어나서 걸어가거라

서재경 목사(수원 한민교회)


딱새가 우체통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쳤습니다. 꼬물꼬물 예쁜 새끼가 다섯 마리나 됩니다. 어미는 새끼들을 먹이고 배설물을 치우느라 쉴 틈이 없습니다. 육아는 새들에게도 극한의 직업이지요. 그런데 갑자기 어미가 둥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새끼들이 파닥거리며 아우성을 쳐도 멀찌감치 떨어져 딴청만 피웁니다. 이거 무슨 일일까요. 어미가 지쳐서 파업이라도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어미는 지금 새끼들이 스스로 둥지 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야 푸른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베데스다 못 가 주랑에 중풍 병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서른여덟 해나 거기 누워 있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이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 손을 잡고 벌떡 일으켜 줘야 할까요. 베데스다 못의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그 물에 넣어주면 될까요.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 들고 걸어가라.”(요 5:8) 믿음은 스스로 일어서서 걸어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서재경 목사(수원 한민교회)

[출처] https://m.kmib.co.kr/view.asp?arcid=0924306557&code=23111512&sid1=fai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애가(11)


이스라엘의 치욕을 돌아본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5장 1-10절


미국 역사에 기적과 같은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 중에 미네소타 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874년부터 1877년까지 3년간 심한 가뭄과 메뚜기 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더 나가서 미국 경제는 대공황에 빠졌습니다. 1877년 4월 27일 주지사 필스베리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실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기도가 하늘을 덮었습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은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은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을 시도하였지만 결론은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여기저기서 탄식소리가 가득합니다. 그 탄식소리 중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4장에서 예루살렘의 극심한 기근과 굶주림에 대해 말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책임이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밝혔습니다. 이제 5장에서는 하나님께 자신들의 형편을 보고 기억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기억해달라고 요청하는 선지자(1)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귀함을 지켜야 합니다. 금과 보석처럼 귀하게 취급받던 유다 백성들은 죄악으로 인해 존귀함을 잃어버리고 질그릇처럼 업신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존귀함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1)
예루살렘의 참상을 하나님께서 전달한 선지자는 그 책임이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악으로부터 시작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들을 죽인 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종교지도자들을 외면과 멸시당하고 쫓겨 다니는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멸망을 도왔던 에돔의 멸망을 언급하시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작은 희망의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읽습니다. 그리고서는 다시 여호와께 이스라엘을 다시 기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먼저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라고 간구합니다. 이제부터 이어질 기도의 목적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유다가 겪은 고난과 수욕을 기억하고 감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은 여호와께서 현재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자세히 살펴주시고, 그 상황에 개입하셔서 회복시켜 달라는 의미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19에서처럼 또 다시 여호와께 기억해달라고 간구로 시작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어려운 현재의 상황에 개입하고 구원하시는 처음 단계입니다. 하나님께는 ‘백성이 있었고’, ‘약속이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보냈던 사랑의 시간’에 대한 기도합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혹독한 노예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보내 구원하기로 하신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2:25). 다음으로 선지자는 ‘치욕을 살펴 봐 달라!’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봐 달라’고 요청하는데, ‘주목하여 보소서’라는 뜻의 단어 ‘하베트(טיבה)’를 첨가하여 봐달라는 것을 반복하면서, 자세히 그 고통을 보시고 들으셔서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즉, 치욕적으로 나라를 이방인에게 빼앗겼으니 살펴서 다시 회복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선지자는 혼자서 기도했지만, 4장 마지막 부분과 마찬가지로 ‘우리’라는 표현으로 기도합니다. 이렇게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들도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함께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다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함께 간구해야 합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백성들(2-5)

하나님께서는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빼앗기도 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기업을 주셨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자 주셨던 것을 빼앗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선물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보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온갖 좋은 것은 모두 하나님께 있습니다.
2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3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오며 우리의 어머니는 과부들 같으니 4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나무들을 가져오며 5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기진하여 쉴 수 없나이다(2-5)
본문에서 선지자는 철저하게 멸망당한 유다의 회복을 구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치욕적이고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가 하나님을 향해 이스라엘의 참상을 다시 아뢴 것은 진노를 거두시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의 한 사람이 되어, 그들의 죄를 자신이 행한 것처럼 회개하며 하나님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⑴ 기업을 빼앗긴 이스라엘(2)
이스라엘이 당한 치욕 가운데 가장 큰 치욕은 기업을 빼앗긴 것입니다. 선지자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 아뢴 것은 이방인들에게 기업을 빼앗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업’은 조상 때부터 상속되어 오는 재산이나 소유물로서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말씀합니다. 일반적으로 땅이 자녀에게 상속될 때, 상속 받은 자녀는 그 땅을 매매할 수 있는 소유권까지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업’은 매매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소유권은 이스라엘 각 개인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기업’은 소유하고 상속할 수 있지만, 소유권을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에 매매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언약의 땅, 약속의 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 삶의 터전인 기업의 땅을 이방인인 바벨론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 기업과 재산을 이방인에게 넘어갔다고 호소합니다. 이 기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파별로 나누어주신 땅입니다. 이 땅은 사고팔아서는 안 되고, 남에게 넘겨주거나 빼앗겨서, 남의 것을 빼앗아도 안 되는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이 이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땅뿐만이 아니라 집까지도 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삶의 터전을 완전히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신명기 28장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심판 목록 중 하나입니다. 신명기 28:30에 따르면, ‘…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며’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모두 이방인들에게 빼앗긴 상황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업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긴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심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범죄함으로 ‘약속의 땅’, ‘언약의 땅’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름다운 땅을 주시겠지만,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여호와를 잊어버리면 반드시 망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현재 이스라엘이 기업을 빼앗긴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신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잊었기에 멸망당했지만, 이제 다시 여호와께 자신들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하면서 자신들의 어려움을 깊게 토로합니다. 완전히 멸망당하는 고통을 겪기 전에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는 것이 지혜입니다.
⑵ 고아와 과부 같은 이스라엘(3)
두 번째로 선지자는 현재 이스라엘의 형편을 부모를 잃은 고아처럼, 남편을 잃은 과부처럼 비유합니다. 이곳에서 언급된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에서 기업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경제·사회적으로 가장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 해당합니다. 이제 상황이 이방인 바벨론에게 땅과 집을 빼앗기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업 없는 이방인처럼 살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게 기업을 물려줄 아버지도 없는 고아와 남편 잃은 과부처럼 의지할 때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바벨론에 의해 무참한 살육으로 이스라엘에 고아와 과부가 많이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업이자 아버지이자 남편인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어머니는 시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애가 1:1에서 ‘시온이 과부같이 되었다’라고 하는 말과 평행을 이룹니다.
⑶ 물과 땔감을 구입해야할 이스라엘(4)
선지자는 고아와 과부 같은 이스라엘은 이제 물과 나무를 돈을 지불하고 구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무와 물은 생필품으로 당시 자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물과 나무는 공동 우물이나 산이나 들에서 값없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마을과 산과 모든 곳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 해도 돈을 내야했고, 산이나 들에게 땔감을 취하려 해도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만큼 자유가 없이 통제되고 억압된 상황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물 한 모금을 구하기 위해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⑷ 억눌리고 평안 없는 이스라엘(5)
선지자는 자유와 번영을 누리던 이스라엘에서 억눌리고 평안이 없는 삶으로 변했음을 묘사합니다. 기본적인 권리와 공의를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목을 짓누르는 듯한 압제자들의 학대에 계속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추적을 당했다는 것처럼 정복자들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거칠게 몰아붙였습니다. 이렇게 심한 괴롭힘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피곤하지만 한순간도 쉴 수 없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즉 ‘평화의 도시’에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이 무거운 멍에를 멘 짐승과 같이 압제자들에게 무력하게 학대와 압제를 당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신들이 시온에서 겪는 심각한 상황을 토로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억하고 돌아보시길 기원합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바벨론이 이스라엘보다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역사상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에 비해서 강한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망했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대적한 그들은 이제 그 강퍅함의 대가로 이방인들에 의해 목이 짓눌리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도움을 줄 자 없는 이스라엘(6-8)

성도들이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치욕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배고픔의 연속이며 자유와 휴식은 사라집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항상 예수님께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 만족케 하시며, 참된 쉼과 자유를 허락해 주십니다. 그 주님을 찬양합니다.
6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7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8종들이 우리를 지배함이여 그들의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6-8)
선지자는 다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보다 주변 강대국을 의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이 자신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시험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고난이 멈춥니다. 하나님의 시험이라면 그 시험이 지날 때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잠잠히 견디는 것의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⑴ 이방을 의지한 이스라엘(6)
선지자는 4장에서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였는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범죄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들이 환란을 당한 것은 자이스라엘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주변 강대국을 의지한 것입니다.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내내 앗수르의 속국으로 살면서 그들을 의지했습니다. 앗수르가 멸망한 후에는 앗수르를 멸망시킨 애굽의 속국이 되어 다시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애굽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 애굽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애굽은 이스라엘에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 이사야와 예레미야를 통해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계속 경고하였습니다(이사야 19장; 30:2-7; 31:1-3; 예레미야 42:14-19). 하지만 그들은 예언자들을 통한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양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간구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애굽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지만(신명기 8:9-10),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 나라를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위대한 정체성을 빵 한 조각에 저버렸던 것입니다.
⑵ 변명으로 일관한 이스라엘(7)
선지자는 이스라엘은 조상 때부터 거역하고 이방 나라들을 의지하는 배역의 죄를 지었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범죄한 조상들이 모두 죽어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의 죗값을 현재 후손들이 그 죄를 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말한 것과 달리 자식들이 조상들의 죗값을 대신한다고 합니다. 자신들이 무죄하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보듯이 오로지 조상들의 죗값으로 고통을 겪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후손들이 고통을 겪은 것은 그들 역시 조상들의 죄를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환란은 조상 때부터 저지른 죄와 자신들의 죄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한편으로는 몇 세대에 걸친 죄의 무게가 매우 무겁다는 뜻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참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이 참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⑶ 종과 같은 비참한 이스라엘(8)
조상으로부터 가중된 죄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주 미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그들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수치스럽게 이전에 자신들의 종이었던 바벨론에게 종이었던 자들에게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서 ‘종’은 실제적으로는 바벨론의 관리를 나타내지만 여기서는 상황의 역전을 효과적으로 나타냅니다. 어욱 절망스러운 것은 그런 수치스러운 지배에서 벗어날 길이 도무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다시 일어날 능력을 완전히 살실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멸망당한 이유는 자신들의 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기근으로 죽게 된 이스라엘(9-10)

우리는 세상에 화려함과 부요함에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부요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순식간에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화려한 옷을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9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10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9-10)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시며 주인이실 때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많은 축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 땅의 주인이 되려는 욕심을 가지자 하나님을 버리고 주변 나라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는 이방인들의 종이 되어 그들의 통치를 받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다시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묘사로 돌아옵니다.
⑴ 양식을 얻기 어려운 이스라엘(9)
참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 하나는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굶주림이 심해지자 광야에 나가 먹을 것을 구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양식’이 아니라 ‘칼’인 거친 유목 민족의 공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기본적인 양식까지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점점 양식을 구할 수 없어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린 자들도 있습니다. 선지자는 굶어 죽는 것보다 칼에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정도로 백성들은 배고픔에 시달렸습니다. 백성들은 너무 굶주린 나머지 자기 자식을 먹기까지 했습니다.
⑵ 영양실조로 위기된 이스라엘(10)
극도의 굶주림은 강렬한 불길처럼 그들의 뼈와 살과 내장을 태웠습니다. 그래서 아름답고 윤택했던 지도자들의 얼굴이 아궁이 숯보다 검은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랫동안 먹지 못해 살가죽이 달라붙어 막대기 같은 몰골이 되었습니다. 피부가 검은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영양실조로 수척한 모습을 표현합니다. 선지자는 다시 어려움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고대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허기진 모습인 외형적인 몰골을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를 돌아볼 때, 영적인 영양실조에 걸려서 수척해져 가고 있습니다. 영적 양식인 말씀을 어디서 제대로 먹을 수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배워보겠다고 열심을 내었지만, 이단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기독교 방송에서 유명한 설교가들의 설교들이 모두가 제대로 된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유명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설교들을 잘 분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영혼이 허기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일용할 양식으로 항상 채워야 합니다.


예레미야애가 시대의 상황과 현재 한국 교회의 상황이 별반 다르진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간절히 외쳤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와 영적 지도자들을 위해 함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처럼 간절함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실을 믿고 간구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를 회복시켜달라고, 지도자들에게 말씀의 영이 충만하고, 성도들이 말씀으로 충만해지도록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예레미야애가(10)

 


시온과 에돔에 심판하신 하나님

예레미야애가 4장 11-22절


선거철이 되면 후보자들이 최고 적임자라고 선거 운동합니다. 때로는 막상 당선되고 나면, 자신을 지지해주었던 사람들조차 무시하고 자기만 위하며, 권력에만 집중하여 부정적인 일들을 행사해서 실망을 안기는 것을 봅니다. 어떤 지도자들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지지자들의 삶과 인생을 행복하게 바꿀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영향력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흘러갑니다. 학생은 좋은 선생님, 직장에서 좋은 상사, 국민은 좋은 대통령 그리고 성도는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좋은 지도자는 탁월하고 좋은 영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것처럼 복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과거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예루살렘의 모습과 멸망 이후의 참상을 비교하였던 선지자는 이제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황, 특히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시온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선지자는 갓난아이들과 아이들, 어른들, 부귀한 자들과 부녀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비참한 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11-22절에서 선지자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을 밝히며 다시 여호와께 탄원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타락(11-12)

지도자가 조직에 매우 중요합니다.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들로서 공동체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직접적인 계기도 바로 지도자들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는 무엇보다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당신이 지도자가 된다면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11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노다 12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의 모든 왕들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11-12) 

바벨론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진 예루살렘에 능력 있는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것도 비참한데, 예루살렘에 기근까지 찾아왔습니다. 남아 있은 사람들은 생명을 유지하기까지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죽은 사람들을 보면서 불쌍하게 생각해야할 사람들이 기근으로 배고파서 전쟁에 죽은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⑴ 기초까지 태운 심판(11)

선지자는 영광스럽고 ‘평화의 도시’라고 불리던 예루살렘이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말해줍니다. 예루살렘은 낙공불락의 요새와 같아서 견고함은 이미 정평이 나있었습니다. 결코 함락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고 불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돌보지 않으신 결과입니다. 예루살렘이 지은 죄의 심각성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 터를 사르셨노다’(11)는 표현을 주목해 보면, 일반적으로 어떤 건물에 불이 났을 때, 지상에 있는 건물의 지붕이나 기둥 그리고 벽제들이 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닥과 기초 그리고 토대까지 타버린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은 그 터의 기초까지 완전히 불살라 없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의 죄가 깊고 심각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⑵ 멸망을 믿지 못할 열방(12)

계속해서 예루살렘에 내린 멸망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실제적으로는 바벨론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파괴했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선지자는 대적과 원수들이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을 세상의 모든 왕들과 백성들이 믿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모든 왕들’, ‘모든 땅에 거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은 결코 함락되지 않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나 성전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방패이시고 도움이시고 전사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그 누구도 절대 침입할 수 없습니다(시편 115:11). 이것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신앙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속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철저한 파괴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그들의 죄가 원인 있었던 것입니다. 흔히 세상 풍조와 다른 종교 그리고 불신자들이 공격해 옴으로 교회가 약화되고 망할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의 사신 곳입니다. 성도들이 신앙을 지키며 말씀대로만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반드시 지키십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걱정해야 할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교회 안의 불의와 불신앙입니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외친 이유도 바로 이스라엘의 죄악과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예레미야 7:14; 26:6,9).

 

종교 지도자들에게 임할 재앙(13-16)

지도자는 운전사와 같습니다. 운전사에 따라서 주행이 안전하고 순조롭지만, 미숙한 운전사는 불편하게 운항합니다. 공동체도 지도자에 따라서 순조롭게 성장하고 부흥할 수 있지만, 때로는 큰 어려움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미숙한 운전사와 같았습니다.

13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4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그들이 만질 수 없도다 15바람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기를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그들이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16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다시는 돌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13-16)

오늘날은 개인주의적인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지도자들을 위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합니다. 특히,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건강하고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수종 들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⑴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13)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징계에 놓이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지도자 때문이라고 진술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이유는 종교지도자들의 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성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한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함과 계교로 악을 행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장로들의 죄에 분노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재판에 관여했기 때문에 부정한 판결을 내려 의인을 악인으로 만드는 데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아닌 거짓 예언과 거짓 평안을 전하였습니다.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들이 거짓 평안을 전하고 악한 일을 하고 그리고 의로운 자들을 죽이는 데 앞장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은 무시하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결국 그들로 인해 예루살렘은 멸망당하고 그들은 백성들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게 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 하나냐를 비롯한 여러 거짓 선지자들과 싸웠고, 제사장 바스훌에게 매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파수꾼인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고 지키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죄를 가장 심각한 것으로 보셨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일반 사람들의 영적인 안목을 흐리게 하였고, 하나님의 재앙을 직면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물론 종교 지도자들 외에 백성들에 죄에 대한 책임이 면죄되는 것은 아니지만, 본문에서 지도자들의 타락이 그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다시 한 번 깊이 각성해야 합니다.

⑵ 종교지도자들에게 임할 징벌(14-15)

선지자는 피로 자신을 더럽힌 사람들, 곧 부정하게 된 사람들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피’는 13절과 연결해서 해석할 때, 의인들의 죽음으로 흘린 피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무고한 피를 흘렸고 이로 인해 제의적으로 부정해졌습니다. 제의적으로 부정해지는 원인은 두 가지입니다. 제의적으로 부정하다고 규정된 것을 만졌을 경우와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여기서는 의인을 죽인 죄로 인해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해졌습니다. 종교지도자, 특히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결인데, 이 사람들이 의인을 죽이면서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더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내릴 징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소경 같이 방황할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자신의 죄를 드러낸 채 길거리를 소경처럼 방황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부정한 상태를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제사를 드리고 거짓 예언하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특권만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정결하게 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오히려 더럽히고 망하게 한 그들은 이제 불결한 모습으로 길거리를 헤매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징벌은 문둥병자처럼 쫓겨날 것입니다. 그들을 문둥병자 취급하며 ‘부정하다 돌아가라 돌아가라 자신을 만지지 말라’라고 멀리 내쫓고 피할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부정한 문둥병자처럼 되어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 되고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타락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자기 백성들은 물론 이방인들에게서조차 버림을 받고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⑶ 종교지도자들이 징벌 받은 결과(16)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잘못 인도하여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드린 죄악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내리신 징벌이었습니다. 그런 징벌의 결과는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존경은커녕 비난과 멸시를 받는 존재들이 되고 말합니다. 그 징벌은 여호와께서 내리셨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흩으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직접 흩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얼굴은 자신의 백성을 돌보기 위해 오시는 여호와의 임지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반대로 심판하기 위해 여호와가 오신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사장의 얼굴과 대비되는데, 여호와가 제사장에게서 자신의 얼굴을 돌리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사장의 얼굴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의 어려움 앞에서 시대적 것과 외부적인 탓을 합니다. 하지만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일차적인 책임은 언제나 교회지도자들에게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바로 서지 못할 때 교회는 쇠퇴하게 되고, 조롱거리가 되며 배척을 당하는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 대신 세상을 의지함(17-20)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을 의지할 때는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세상을 의지할 때, 세상으로부터 오는 힘이 다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해 두십니다. 성도들은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만 의지할 때, 성도들의 삶이 항상 능력이 발휘됩니다.

17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18그들이 우리의 걸음을 엿보니 우리가 거리마다 다 다닐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들이 다하였으며 우리의 종말이 이르렀도다 19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하늘의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산꼭대기 까지도 뒤쫓으며 광야에서도 우리를 잡으려고 매복하였도다 20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17-20)

예루살렘이 비참하게 몰락하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세상의 헛된 것을 의한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이 사실을 두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⑴ 헛된 도움을 기다렸던 이스라엘(17)

이제 선지자는 ‘우리’라는 표현으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를 동일시하여, 어려움에 대해 깊이 탄식합니다. 이스라엘이 헛된 도움을 계속해서 바라보느라 눈이 상했다고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은 망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주변 나라들과 동맹을 맺으며 그들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그들로부터 구원에 대한 희망이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득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주변 나라를 의지하지 말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특히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바벨론 군대에게 항복하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예언의 말씀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귀담아 들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변 나라들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고 이스라엘의 기대는 헛되이 끝나버린 것입니다.

⑵ 도움을 받을 수 없었던 이스라엘(18)

이스라엘 상황은 애굽 군대가 퇴각하고 바벨론 군대가 다시 예루살렘 성읍을 포위하게 되자 예루살렘 백성들은 성 안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었던 애굽도 자신들을 돕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예루살렘 백성들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공포와 기근 속에 마지막 날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적들이 자신의 걸음을 엿보기 때문에 길을 다닐 수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사냥꾼이 짐승을 잡기 위해 추적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엿보다’는 ‘사냥하다’라는 뜻입니다. 적들로부터 언제 공격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마음 놓고 길을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위협적인 상황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8절 하반절에서 ‘끝’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선지자는 망할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⑶ 멸망당하며 쫓기는 이스라엘(19-20)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능력이 전혀 없는 왕을 의지했습니다. 선지자는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가 권력을 가진 정치 지도자들의 문제도 함께 거론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20)라는 말씀은 당시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미는 ‘한 사람의 호흡이 곧 생명을 상징하는 것처럼, 한 국가의 왕은 나라와 민족에게 호흡, 생명과 같은 중요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물론 예레미야의 이 말은 시드기야를 선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유다가 참 왕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애굽을 포함한 주변국 왕들을 의지하며 살아온 결과에 대해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수사적 진술입니다. 시드기야도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그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생명과 같은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가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자 백성들은 독수리와 같은 맹수 바벨론에 먹잇감으로 전락했고, 어디로 도망해도 생명을 보전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런 적들의 추적에 우리의 콧김, 즉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도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고 합니다(20). 우리의 콧김은 우리의 생명의 숨결이란 의미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자라는 뜻입니다. 적들이 여호와의 왕국을 완전히 무너지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대신 왕과 외세를 의지하던 이스라엘은 철저히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왕권을 충분히 대리할 때만 백성과 나라에 생명과 같이 중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에돔에 대한 심판으로 멸망(21-22)

하나님 대신 세상을 의지하게 되면 세상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상황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어려움에 처할 때 가장 먼저 무엇을, 또 누구를 의지합니까? 혹시 하나님보다 당신이 더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습니까?

21우스 땅에 사는 딸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라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22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 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21-22)

타락하여 악을 행하며 어려움을 당해 하나님 대신 헛된 것을 의지한 유다는 그 어리석은 대가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이었습니다. 선지자는 언약에 실실하신 하나님께서 결코 자기 백성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에서 소망의 빛을 발견합니다.

⑴ 예루살렘 멸망을 기뻐하던 주변 나라(21-22)

유다의 소망은 그들의 멸망을 기뻐하던 대적들이 멸망당함으로써 시작될 것입니다. 에돔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즐거워하고 기뻐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도망하는 사람들을 받아주지 않고 배척했고, 이들의 이런 태도는 멸망당한 유다에게 큰 슬픔과 절망이 되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다음으로 에돔도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선지자는 에돔에게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에돔에 대한 비꼬는 말이었습니다. 곧 너희에게도 멸망이 임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취하여 벌거벗으리라’는 에돔이 무력하게 수치를 겪게 될 젓이라는 뜻입니다. 시온에 내린 징벌이 끝날 때 에돔이 징벌을 받게 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여기서 에돔은 선지자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에돔은 그들을 돕지 않고 오히려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⑵ 예루살렘이 회복(22)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던 대적들의 멸망은 예루살렘에 대한 회복의 시작될 것입니다. 그 죄에 대한 형벌을 다 맏은 후에 예루살렘은 다시 회복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할 때부터 다시 회복할 날이 있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현실로 인해 탄식의 애가를 부르면서 동시에 회복에 대한 소망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선포한 심판이 이루어졌듯이 형벌의 기간이 끝나면 다시 구속하실 것이라는 말씀 역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네 죄악의 형벌이 다 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라고 한 것입니다. 비록 유다가 죄로 인해 형벌을 당했고 포로로 끌려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을 바라보면, 교회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들의 책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책임은 예레미야의 말씀처럼 막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무관심하게 남의 일보듯 하면 안 됩니다. 항상 큰 관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바른 지도자들이 되도록 지켜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땅에 있는 교회들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민족에게 좋은 지도자 세워주시길 기도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통해 하실 일들이 기대하고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이 종교지도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오늘날 나라와 교회에도 좋은 지도자가 그리운 시절입니다. 훌륭한 인격과 실력 있는 지도자 간절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귀한 영적 지도자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주의 은혜로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귀한 사람이 되길 소망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와 나라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좋은 지도자를 세워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10-02)


변하지 않는 구원 법칙

로마서 10장 5-13절


아주 오래전에 서울대학교를 일반대학도 입학할 수 없는 점수로 합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큰 뉴스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2학기를 버티지 못하고 학업을 그만두었습니다. 학생들이라고 한다면 일류대에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보다 실력이 월등해야 합니다. 잠을 줄이고 더욱 많은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헌신해야만 일류대에 들어갈 실력이 되고 입시를 통과해서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습니다. 가령 구원을 얻는 방법이 이렇게 어렵다면 어떻겠습니까?

 

바울의 간절한 소망은 유대인들의 구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를 내세우려고 헛된 노력을 다했습니다. 구원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율법은 의와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의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주로 시인하며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믿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율법에서 난 의(5)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율법의 계명을 어기면 연약한 죄, 죄인 된 죄, 하나님과 원수 된 죄를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어떤 사람도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된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5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5)

바울은 9:30-10:4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담긴 새 언약 약속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음에도 유대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옛 언약을 고집하여 그분 선택의 긍정 결과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여기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조를 통해 그들 문제를 부연하는데, 특별히 ‘의’를 얻는 방법에 집중합니다. 그는 먼저 옛 언약이 말한 내용 소개로 시작합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난 의에 대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에서 난 의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추구하는 유대인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결과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음을 진단하지만, 율법 추구 자체가 문제라는 식의 논증은 없습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담담하게 레위기 18:5을 인용해 율법에서 난 의를 모세의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 가르침의 기원이 하나님이었기에, 의에 대한 가르침도 언약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율법에서 난 의의 원리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율법에서 난 의는 무엇입니까? 이 개념은 언약 관계를 배경으로 하나님을 향한 언약 백성의 의무 이행과 관련 있습니다. 언약 관계에는 상호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을 사랑하고 관계에 신실해야 하며(시 25:10), 백성은 올법이 제시한 하나님의 뜻을 성실하게 이행함으로 관계에 충실해야 합니다(신 4:40). 법에서 난 의는 언약 백성이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언약 백성다운 상태로 인정받는 것을 뜻합니다(신 6:25). 이런 의의 상태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함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며 살게 합니다. 그렇기에 율법에서 난 의는 모든 언약 백성이 반드시 추구해야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통해 새 언약 백성이 된 신자도 율법을 통한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모세 율법의 모든 조항을 문자적으로 다 따를 필요는 없지만,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의 핵심 정신인 하나님 사랑/사람 사랑을 반드시 삶으로 표현하며 살아야 합니다(13:10; 참조, 갈 5:14; 요일 3:23).

 

믿음에서 난 의(6-13)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살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율법(행위)을 통해 의롭게 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믿음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6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6-13)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부르는 자를 차별 없이 구원해 주십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로 믿고 주님으로 고백합니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십니다.

(1) 메시아(메시아)에 대해(6-7)

‘그러나’로 율법에서 난 의와 대조되는 ‘믿음에서 난 의’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의 설명을 살펴보기 전에 몇 가지를 짚고 가야 합니다. 첫째, 5절과의 대조점은 모세와 예수님이 아니라, 의를 얻는 방법, 곧 율법과 믿음입니다. 둘째, 믿음에서 난 의의 개념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상호 작용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시작한 것에 대한 사람의 긍정 반응이고, ‘의’는 사람의 반응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결과입니다. 그렇기에 상호 작용 과정 설명에서 이 의는 사람이 구원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고, 두 영역 설명에서는 죄와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나 하나님 통치 영역 안으로 옮겨져 새 언약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율법에서 난 의와의 관계입니다. 이 두 개념을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향한 구원 방식 차이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즉, 유대인은 율법으로, 비유대인은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둘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로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은 언약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데, 사람의 응답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도 함께 계시합니다. 순종에는 복과 생명이 있지만, 불순종에는 정죄와 심판이 있습니다(신 28장). 문제는 언약 백성이 이것을 다 알고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근원적 죄와 파생 죄악들을 중단하지 않은 유대인의 역사는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계속 신실했고 새 언약을 약속했습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인 대신 예수님을 심판하심으로 죄인에 대한 율법의 저주를 끝냈고, 그의 부활로 구속 과정이 성공했음을 확증했습니다(4:25). 이제는 옛 언약 안에 있는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죄인이 하나님의 그 주권적 일하심에 믿음으로 응답하면, 죄 용서와 함께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습니다. 이런 면에서 여기서 바울이 말한 의와 관련한 대조는 (1) 구원의 새 언약에 참여하는 과정과 관련 있으며, (2) 믿음에서 난 의는 율법에서 난 의를 얻지 못한 자에게 새롭고 완전한 기회를 주는 하나님 은혜의 표현입니다. 바울이 믿음에서 난 의에 대해 설명합니다(6b-13). 몇몇 요소를 차례로 소개하는 과정으로 진행합니다. 첫 단계는 믿음의 내용인 메시아에 대해서입니다(6-7). 바울은 ‘너’의 마음속에서 하늘에 올라가겠다거나 땅 밑 무저갱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올라가겠다는 것은 이미 성육신한 메시아를 모셔 내리는 것이고, 내려가겠다는 것은 부활한 메시아를 다시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30:12-13을 변형한 형태이며, 핵심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성육신해서 십자가와 부활로 구속 사역을 완수했으니 새 언약 성취를 위해 다른 메시아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2) 복음의 내용에 대해(8-10)

‘그러나 무엇을 말하느냐?’ 표현으로 믿음에서 난 의에 대한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를 소개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복음 증거 과정입니다. 바울은 신명기 30:14을 인용해 말씀이 ‘너’에게 가까워 ‘너’의 입과 마음에 있다고 하고는, 그 말씀을 복음 전도자(우리)가 전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합니다(8). 복음 안에는 이 땅에 와서 구속 사역을 끝낸 메시아에 대한 증거가 있기에, 유대인은 다른 곳에서 메시아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복음에 대해 바른 반응을 하면 됩니다. 이것이 세 번째 단계인 믿음의 반응입니다. 만일 ‘너’가 입으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것을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 구원에 이릅니다(9-10). 두 가지 관찰 거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a) 입으로 시인 - (b) 마음으로 믿음(구원받음) - (b) 마음으로 믿음- (a) 입으로 시인(구원받음) 형태의 구조입니다. 이 구조는 입으로 시인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는 것의 경중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마음이 인간 인격의 중심이고 입이 마음의 표현 통로이기에, 이 둘은 안에서의 믿음을 밖으로 표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믿음과 시인의 내용입니다. 모두 예수님에 대해서입니다.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것이지만, 이는 십자가 사역을 포함한 구속 사역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구원의 상호 작용 과정 중 하나님께서 하신 첫 단계입니다. 시인하는 내용은 예수님께서 주라는 것입니다. 두 영역을 배경으로 구원의 영역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는 또한 창조주 대신 자신을 사고 체계의 중심에 세운 것과 반대이기에 근원적 죄에 대한 완전한 회개를 전제로 합니다.

(3) 복음을 통한 공평한 구원(11-13)

믿음에서 난 의의 또 다른 요소를 다룹니다. 이번에는 구원의 차별 없는 개방성입니다. 성경이 메시아를 믿는 자는 결코 부끄러움 당하지 않는다(11; 참조.사 28:16; 롬 9:33)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 과정은 유대인이나 비유대인 모두에게 차별 없이 열려 있습니다(12; 참조. 1:16; 3:22). 그렇기에 9-10절처럼 믿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성도의 주가 되시고, 그들은 구원 과정에 참여해 예수님께서 주는 풍성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에 의하면 믿음에서 난 의는 (1) 옛 언약의 한계 위에 약속된 새 언약 구원의 성취로서 (2)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역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3) 복음 전파자의 증거로 전해져 (4) 유대인/비유대인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5) 오직 마음의 믿음을 입으로 시인한 자만 구원 과정에 참여하게 됩니다. 바울이 이렇게 율법에서 난 의와 믿음에서 난 의를 대조한 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도 은혜의 기회를 열어 주셨음에도 그들이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아 지금의 상태가 되었음을 분명히 지적하려는 의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목적을 성취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율법 돌판을 소유한 자나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자가 구원을 받습니다. 마음과 입에 둔 율법의 목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말합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2023/06/13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바위도 좋고 흙도 좋으니


 
 
바위는 단단하고 흙은 연약합니다. 바위가 좋다고 하는 것은, 코끼리는 코가 길어 귀족이고 돼지는 코가 짧아서 천하다고 하는 것은, 말은 빨리 달려 유용하고 달팽이는 느리기에 쓸모없다고 하는 것은, 엘리사는 많은 기적을 일으켰기에 유능한 선지자이고, 세례 요한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며 무능한 선지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흙은 생명을 키워내고 돼지는 고마운 고기를 제공하며 달팽이는 생태계의 환경미화원 역할을 합니다. 세례 요한에게는 기적보다 더 큰 진실의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께서 주신 각자의 사명을 갖고 이 땅에 보내진 존재입니다. 그 사명은 옳고 아름다우며 선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잣대로 좋고 나쁨을 평가할 수 없는 주님의 걸작품입니다.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요 10:41)

한재욱 목사(강남비전교회)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디도서(03-02)


진리 안에서 인간관계

디도서 3장 8-15절


불조심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한 번 실수해서 불이 나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부탁한 말 역시 그러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 번 부탁한 것을 잘 가르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가르침(2:10-3:7)을 요약합니다. 선한 일에 힘써야하는 교훈에 대해서는 굳세게 말해야 하지만,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변론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단호하게 멀리하고, 믿음의 식구들 간에는 진실한 사랑의 교제를 이어가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권면의 강조(8-11)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마지막 권면과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의 복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선한 일을 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 합니다. 선한 일은 아름답고 유익하지만, 무익한 것들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8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9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11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8-11)

올바른 것을 강조해 성도들이 바르고 선한 길로 가도록 돕는 것은 좋고 유익합니다. 그 무익한 일들 중에 ‘어리석은 논쟁’과 ‘쓸데없는 족보 이야기’, ‘모세의 율법’에 대한 말다툼을 피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단들은 무익한 논쟁을 좋아합니다. 가령 ‘어리석은 논쟁’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생각해 본다면, 중세시대에는 ‘바늘 끝에 천사가 몇이나 앉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 크게 논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쉽게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가령 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성도들의 신앙 성장에 무슨 유익을 주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쓸모없는 것일 뿐 아니라 교회에 혼란과 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은 근본에 충실해야 합니다. 무익한 것에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지 말고 아름답게 유익한 것에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반대자들에게 대한 최종적인 지침을 디도에게 제시합니다. 훈계나 경고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헛된 가르침을 베풀면서 공동체의 분열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디도에게 이런 사람들에게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11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10-11)고 가르칩니다.

원래 이단들은 기독교의 교리적인 부분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타락한 자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삶의 열매가 타락의 열매인 육신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교회 안에서 용납하면, 연약한 성도들을 유혹하고, 또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모르기 때문에 미혹됩니다.

그 이단들에게 회개할 가능을 생각하여 한 두 번은 타이르며 경고하지만, 계속해서 논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면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회개할 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회개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잘못된 이단의 결과 무엇인지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단을 관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 밖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선한 일과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힘쓸 때 선한 습관을 기르게 됩니다. 선한 습관은 우리 인생을 아릅다고 유익하게 만들어 줍니다. 선한 습관을 기르기 위해 당신은 매일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맺음말(12-15)

성도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교회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사회의 시민으로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권력에 대한 건강한 관심을 가지고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에 공의를 세워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사랑으로 서로를 세우고 예비시키는 교회들의 아름다운 연합과 지원은, 지금도 복음 전파에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12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 13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 14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15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12-15)

마지막으로 바울은 앞으로 자신의 계획을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12)고 알립니다.

그 동안 디도에게 맡겼던 일들을 마감하고, 그 대신 데마와 두기고를 그레데로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율법사 세나와 아볼로를 먼저 보내고, 그들이 선교 여행하는데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부탁합니다. 이렇게 여러 동역자들이 합력해서 사역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디도에게도 니고볼리로 오라고 요청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악한 사람들과는 반대로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14)고 권고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선한 일에 본보기가 되라고 권합니다. 성도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당부합니다. 오늘날도 지도자가 먼저 다른 사람을 잘 섬기는 일을 하면, 사람들이 그 일을 본을 받아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는 선행에 힘쓸 것입니다.

함께 있는 사람들의 안부를 전합니다. 바울과 동역자들 간의 협력과 성도들 간의 사랑의 인사는 진리에 기초한 성도의 교제의 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15)라고 문안하면서 마무리합니다. 그레데 성도들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빌며 편지를 마칩니다. 주 은혜의 말씀에 동료들을 부탁하는 믿음을 봅니다.

무익하고 헛된 일을 피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어리석은 논쟁이나 쓸데없는 말다툼을 피하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신앙생활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믿음의 성장을 피해야할 일들은 무엇입니까?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피해할 일들을 피하고 힘써야 할 일들을 힘써야 합니다. 성도들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선한 습관들을 기르며, 헛된 일로부터 벗어나서 유익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삶에 은총의 열매로 풍성해야 합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10-01)


참된 구원의 지식

로마서 9장 30절 -10장 4절


훌륭한 의사일수록 질병을 섣불리 단정하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질병을 진단하고 노력합니다. 환자를 다양한 방법으로 살펴보면서 여러 가지 원인을 찾습니다. 원인을 찾아내야 정확한 진단이 나옵니다. 그 질병에 대한 처방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지 못한 원인과 그것에 대한 처방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 주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른 개념을 설명했던 바울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와 회복의 문제를 다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했던 원인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의로움에 이르지 못한 이스라엘(30-33)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있습니다. 율법은 그 기능과 목적을 오해했습니다. 율법 자체에 대한 열심이 오히려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행위를 의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우리의 한결같은 반응은 ‘믿음’뿐입니다.

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0-33)

의로운 행위를 위한 그들의 열심은 이해하기만, 그것을 의지하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구약에서도 분명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한 자들은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였습니다.

(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에 이른 이방인(30-31)

30-31절에서 바울은 구속사의 절정에서 일어난 역설적인 상황을 설명합니다. 의로움을 추구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은 의로움을 얻었으나, 의로움을 추구하였던 유대인들은 의로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얻은 그 의로움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이라고 부연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4:3). 바로 그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약속을 상속받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4:16).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믿음을 보인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30절은 바울이 지금까지 설명한 ‘믿음’과 ‘의로움’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준 셈입니다.

(2) 율법 행위에 의지하여 의로움에 이르지 못한 이스라엘(31-32)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32절에서 바울은 이를 ‘그들이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했다’라고 표현합니다. 32절의 ‘행위’는 31절에서 두 번이나 등장하는 ‘율법의 준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추구한 이유는 율법을 통해서 의로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31절의 ‘의로움의 율법’이라는 표현에 담긴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율법 준수를 통해 반응함으로써 의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31절이 말하듯이, 율법이 의로움을 줄 수 있다고 여기고, 그 율법을 따라간 유대인들은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는 표현은 ‘율법의 진정한 목적에 이르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이 수행한 구속사적 역할과 한계에 대해서 선명하게 제시했습니다. 로마서 5:20; 7:13 등이 말해주는 대로, 율법은 죄를 심히 죄 되게 하여 그 결과인 사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붓는 예상치 못한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에게 진정한 의로움과 생명을 가져오시도록 돕는 보조적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율법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처음부터 그리스도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이전에 주어진 율법의 제한된 영광에 붙잡혀 정작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3) 걸림돌과 구원의 반석이 된 예수 그리스도(32)

32b-33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서의 두 구절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인용하여 이를 기독론적으로 사용합니다. 이사야 8:14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걸림들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사야 28:16 칠십인역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한 돌, 곧 시험한 돌,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을 두어 기초를 삼으시는데, 그를(혹은 그것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사야 8:14의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이사야 28:16의 ‘돌’에 관한 언급들과 교체하였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돌들에 관한 말씀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사용하여,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는 분명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였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다’는 신명기 21:22-23 말씀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에서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28:16에 등장하는 돌들에 관한 원래의 묘사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로서, 시온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기초가 되는 돌입니다. 이사야 28:16의 원래 구절들을 불러올 수 있는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의미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1:18, 24이 말하듯이, ‘십자가의 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은 이스라엘(10:1-4)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울은 살았습니다. 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 유대들에게 핍박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길 원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간절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4)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근심을 쏟아내던 바울은(9:1-5) 이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구원을 열망합니다(1). 그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와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그 의를 따라감으로 구원받길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1) 이스라엘의 구원을 염원하는 바울(1)

바울은 이스라엘 동족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1).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2) 하나님의 의로움을 알지 못한 그릇된 이스라엘의 열심(2-3)

그러나 그 열심은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2). 바울은 3절에서 곧바로 이를 구체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알지 못했다’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17에서 하나님 아들의 이야기인 ‘복음에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났다’고 선포했습니다. 3:25-26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셨다고 선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따르지 않았던 ‘지식’이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관한 지식을 말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9:31-32에서 바울이 밝혔듯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을 따르지 않고 율법의 준수를 통해 얻는 의로움을 고집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유대인들이 세우려는 ‘자기 의로움’은, 3절 하반절에서 부연하듯이, ‘하나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는 것’자체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선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는 그릇된 노력’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의로움을 계시하신 방식을 수용하지 못하는 우둔함과 교만함입니다.

(3) 율법의 목적과 완성이 되신 그리스도(4)

바울은 4절을 ‘그리스도는 율법의 텔로스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텔로스’는 ‘목적’을 의미합니까? 아니면 ‘마침/끝’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이전 단락의 논의들에서 율법이 그리스도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논증했습니다. 즉,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는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죄를 심히 죄 되게 하여 사망을 퍼붓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다메섹 체험 이후, 바울은 이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율법에게 부여하신 숨겨진 기능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과 그리스도는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을 주기 위해 경쟁하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율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그의 십자가 사역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로마 교회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예상치 못한 놀라운 성취가 있었지만, 역시 연속성 속에서 설명해낼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텔로스’에서 ‘마침’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합니까?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바울은 이미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6:15),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7:4) 등과 같이 말하면서 율법을 이 세대에 속한 것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오셔서 종지부를 찍은 이 세대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율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비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이 악하거나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가지는 애초의 구속사적 기능을 다 수행하였기 때문에 이제 그 유효 기간이 다한 셈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0:4의 ‘텔로스’라는 한 단어 속에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의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목적과 마침이 되신 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로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원문에서는 ‘판티’ 곧 ‘모든’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9-11장 단락에서 이 단어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보았듯이, 육신 아래서 죄의 노예로 살면서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먼저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다’(1:16).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았음을 감사합니다. 항상 말씀에 붙들려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단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단이 무서워한 것은 말씀들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순종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말씀에 능력 있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로마서(09-02)


하나님의 뜻을 대적할 수 없음

로마서 9장 19-29절


독수리는 새끼들이 날아야할 시기가 지나서 날지 않으면, 새끼를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고 합니다. 넓은 창공을 날아오른 새로운 세상으로 날아올라야 위엄있는 독수리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중년이 되면 변화를 두려워하여, 과거의 습관이나 전례에 따라 안전하게만 행동하려고 하지, 새로운 경험을 시도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처럼 오랫동안 새로움을 꾀하지 않고 굳어진 습성을 ‘타성에 젖다.’라고 합니다. 타성에 젖는 이유 중에 변화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타성의 보호막을 깨고 나와야만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변화를 통해 새로운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과 책망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바울은 토기장이 그릇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진흙을 사용해서 어떤 그릇을 만들든 그 권한이 토기장이에게 있듯이 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이 창조주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자유(19-23)

구원은 물론이고 최후의 심판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은 역사합니다. 진노의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들어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순종을 심판하려 하셨다 가도 멸하시기로 된 진노의 그릇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자유로운 주권에 따라서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에게는 영광을 풍성함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19-23)
긍휼히 여길 자와 심판할 자를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정한다면 인간에게는 무슨 책임이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꼐서는 공평하지 않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한 항의(19)
19절은 9:6-18, 특히 18절에 대해 예상 가능한 반박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긍휼히 여길 자와 완악하게 할 자를 스스로 결정하셨다면, ‘왜 하나님께서 (완악한 자들을) 여전히 허물하시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뒤에는 ‘왜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시느냐?’는 질문도 전제되어 있다.) ‘누가 그 뜻을 대적(하여 성공)하였느냐?’, 즉 하나님의 뜻대로 완악하게 할 자를 완악하게 하셨는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완악한 자들을 허물하시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된다. 17-18절에서도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강퍅케 하여 하나님께 저항하였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은 역사 속에서 항상 동시에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을 대적하였다면, 그는 심판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1:18-32에서 바울이 애초에 강조한 바다. 19절의 이 가상의 질문자는 마치 인간이 아무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반박한다.)
(2)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결정의 자유(20-21)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20-23절에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과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주권과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20절에서 사용된 동사 ‘플라쏘’는 창세기 2:7-8, 15에서도 사용된 동사로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21절에서는 ‘만들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진흙덩이로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행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그 생김에 대해서 항변할 수 없고, 진흙으로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을 만드는 것은 토기장이의 자유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천한 그릇’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우선 그것은 구속사 속에서 언약의 범위 밖에 있었던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9-11장의 전체 문맥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현재 새 언약의 백성 범위에서 제외 되어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킬 가능성 또한 없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떠한 구속사적인 특권을 누려왔다 하더라도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획 속에서 ‘천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것과 흡사합니다(17-18).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한 것은 유대인들 자신입니다(롬 3:3). 그러나 만약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신비로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들을 그러한 ‘천한 그릇’으로 계획하셨다 한들 누가 이에 대해서 반문할 수 있겠습니까(20a)? 하나님께서 어떤 민족에게 ‘천한 그릇’의 역할을 맡기든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22-23)
그럼에도 그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성품이 긍휼히 여기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22-23절은 최후 심판의 문맥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다시 설명합니다. ‘진노’의 심판 날에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순종에 진노로 심판하려 하셨다가도, 멸하기로 준비된 그 진노의 그곳에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22). 또 그분의 자유로운 주권을 따라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에게는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십니다(23).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이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에 해당 될 수 있습니다. 결국 22-23절은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모두를 선대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3:21-26; 5:1-11; 8:31-39에서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들에게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그들과의 화해를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선포하였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스스로 부르시는 하나님(24-29)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들이 출현한 현재까지, 하나님의 백성 아니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음을 받았지만, 유대인들은 극히 소수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24-29)
은혜로 회복하시기로 한 그릇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남은 자들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만이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 적다고 항의할 일이 아닙니다.
(1)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부르신 하나님(24)
바울은 24절에서 이미 그 하나님의 관용의 대상이 되어 긍휼함을 받은 이들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바로 바울과 로마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9:6-13에 의하면, 모든 유대인들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해 긍휼함을 받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로마 교회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이 이들에 해당합니다. 1:18-32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은 이들입니다.
(2) 백성 아닌 자들을 백성으로 부르신 하나님(25-26)
25-29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호세아와 이사야 선지자의 글들을 인용합니다. 호세아 2:23의 인용을 통해 바울은 백성 될 수 없는 자들을 백성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표현합니다(25). 호세아가 말한 백성이 누구였든지 간에,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름 받는 새 언약 백성들을 일컫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3) 남은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27-29)
본문이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25-26절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받지 못한 자’를 ‘사랑 받는 자’로 부른다는 표현은 사랑받을 자격 없는 자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 로마서 3:21-26; 5:1-11, 8:31-39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호세아 2:23에 이어 호세아 1:10의 인용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26)이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8:14-17에서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들이 상속자로서 물려받을 영광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 개역개정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단수로 번역했지만, 원문의 복수 의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8:29에 등장하는 ‘맏아들’ 예수 안에서 그와 함께 상속자들이 된 많은 아들들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이 호세아 1:10을 통해서 의도한 것은, 호세아 말씀의 궁극적인 성취에 해당하는 것으로, ‘맏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의 유업을 상속할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27-29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 가운데 ‘긍휼의 그릇’(24)으로 부름 받은 이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은 이사야 10:22을 인용하여 ‘남은 자’라는 단어를 도입합니다. 이미 앞 단락인 9:6-13에서 모든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만 약속과 긍휼을 받는다는 점을 창세기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한 바울은, 이제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미가를 비롯한 예언서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남은 자’ 사상을 불러와 하나님 백성의 범위를 더 좁힙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27). 28절에서 곧이어 인용된 이사야 10:23의 의미도 로마서 문맥 안에서 예사롭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완전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시행하실 것이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굳이 추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만 새 언약 백성으로 진입하는 일이 철저하게 진행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11장에서 다룰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이 어떻게 전개 될 지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29절에서 인용된 이사야 1:9 말씀은 그마나 주께서 남은 자를 남겨두셨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전멸하는 것을 면했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구약 인용을 통해 현재 이스라엘의 상황을 설명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들이 출현한 현재까지, 백성 아니었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칭함을 받았으나,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남은 자’라는 개념을 불러와야 할 만큼 소수만이 하나님 백성의 범위에 들어와 있는 기막힌 구속사적 현실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을 온전히 이루시고 시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남은 자를 구원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갚으셨다면, 그들은 모두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었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은혜를 오늘도 감사와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