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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6-01)


인위적인 결정으로 이스라엘을 출생한 아브람

창세기 16장 1-16절


신앙은 자신의 한계를 보는 일입니다. 진심으로 보는 일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는 일입니다. 긍정적인 사고만도 위험하고 부정적인 사고만도 위험합니다. 아브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데려다주었습니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람의 믿음이 늘 한결같았던 것은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째가 되었습니다(3). 아브람의 나이는 80대로 접어들었습니다(창세기 16:16). 아브람의 믿음은 다시 흔들렸습니다. 이러한 언약한 모습은 하나님 백성의 보편적 특성이기도 합니다. 아내 사래가 오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아내와 상의하여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얻기로 합니다.

 

하갈이 아브람의 첩이 됨(1-3)

아브람은 아담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 아내 사래의 말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침묵에 자신들만의 대책으로 응수합니다. 당대의 관습으로는 합법적인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순종이 아니면 결코 복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실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1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1-3)

이 이야기는 족장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겪은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때때로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그의 신앙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째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씨에 대한 약속을 재확증하신 후 몇 년이 지났지만, 아브람 부부는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인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이때 아브람의 나이는 85세, 사래는 75세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참조. 창세기 17:1,17). 이미 여성으로서 오래 전에 가임기가 끝나고 갱년기에 접어들었을 것입니다.

사래에게는 하갈이라는 여종이 있었습니다. 하갈이 애굽 이름인 것으로 볼 때, 아마 그녀의 고향인 애굽에서 얻은 몸종입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자신의 몸종과 동침하여 자녀를 얻을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그녀의 말을 받아들여 하갈과 동침합니다. 대리모 관행은 주전 삼천 년부터 천년까지 메포소타미아뿐 아니라 애굽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증거 됩니다. 사래는 자신의 계획을 따라 씨의 약속을 실현하려 합니다.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내가 세워질 수 있다’는 뜻으로 자신이 아브람의 가문이 이어갈 수 있게 할 것이란 장담입니다. 여기서 아브람의 믿음은 순간 실종되고 맙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온 지 십년 째이므로 아브람은 땅에 대한 약속이 점점 구체화되어가는 시점에 이런 불신행위를 하고 맙니다.

 

두 아내의 갈등과 하갈의 도피(4-6)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순종할 때 인간 사이의 신뢰 관계는 무너집니다. 여종 하갈은 자신의 임신한 사실만으로 거만해져서 자신의 형편을 모르고 여주인 사래를 저주합니다. 아브람의 부부는 아담과 하와처럼 서로에게 자신의 실수를 전가합니다. 사래는 아브람에게 전가하고 아브람은 아내에게 전가합니다. 이번에는 사래의 말대로 아브람은 하갈을 광야로 내쫓습니다.

4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4-6)

아브람과의 잠자리 후 하갈이 아이를 가졌습니다. 임신 후 그녀는 여주인 사래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하갈이 그녀를 별것 아닌 여자로 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고대로부터 아내들 간의 경쟁심과 질투심은 인간 본성의 문제였기에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이 이 문제에 대한 법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우르남무(Ur-Nammu) 법이나 함무라비 법은 이런 상황에서 본 부인을 보호하는 법적 규제를 마련합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의하면 여주인은 건방진 대리모인 여종을 팔아넘길 수는 없지만 더 낮은 노예 신분으로 전락시켜 질서를 잡게 했습니다. 하갈이 사래를 무시했지만, 사래 입장에서 이것은 단순히 무시당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수모를 ‘하마스’로 표현하는데, 이건 폭력과 횡포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사래는 하갈의 행위에서 상당한 타격을 받은 것입니다(잠언 30:21-23). 사래는 이 일에 대해 아브람에게 강력히 항의하며, 하나님의 정당한 판결에 호소합니다. 아브람은 일 처리의 전권을 사래에게 위임합니다. 사래는 하갈에게 그대로 갚아주며 복수합니다. 하갈을 ‘학대’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하갈에게 자신이 받았다고 생각한 하갈의 폭력적 행위(하마스)를 갚아주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학대라는 단어 ‘아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백성에게 당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사래의 하갈에 대한 횡포가 몇 배로 심했다는 것은 하갈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갈은 아마 살기를 느꼈거나 무엇보다 임신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도주했을 것입니다. 두 여인 모두 잘못이 큽니다. 주인을 멸시한 하갈도, 또한 자신이 받은 수모를 몇 배로 갚은 사래도 그러합니다.

 

하갈을 위로하시는 하나님(7-12)

하나님께서는 임신한 몸으로 애굽으로 돌아가던 하갈의 고통을 보시고 만나주십니다. 하갈은 사래 탓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갈과 태중의 아이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하갈에게 사래에게 복종하는 수고를 요구하십니다. 그녀에게 회개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게 순종하였을 때 이스마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7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7-12)

하갈이 도피한 곳은 지도상의 직선거리로도 매우 먼 곳입니다. 그녀는 술로 가는 도중(술 길)의 어떤 우물까지 갔습니다. 그곳은 네겜 광야 최남단의 가데스(바네아)와 베렛 사이에 있었습니다(14). 헤브론의 아브람 거주지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는 약 97km의 거리입니다.

하갈은 임신한 몸으로 매우 먼 곳까지 도망갔는데, 이는 그녀가 이집트 출신이기에 분명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났습니다. 천사라는 존재가 구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흥미롭게도 구약의 많은 곳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또한 여호와 자신으로 정체를 드러낸다. 현재의 사건에서도 하갈은 마지막에 자신이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고 고백합니다(13-15).

많은 학자들이 강하게 반대하지만, 여호와를 자처하는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의 성육신된 하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견해가 옳다면, 우리는 사자의 임재와 활동을 통해 구약 시대 속에서 선재적 성육신(pre-incarnation)을 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을 부릅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8) 여호와의 사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질문은 만남과 더불어 대화를 시작하기 위한 인사와 같은 질문입니다.

하갈은 여기서 사래를 ‘여주인’으로 칭하면서 그녀의 횡포를 고발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주인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고 말할 뿐인데, 슬픈 도망자가 된 하갈의 낮아진 마음을 잘 보여줍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확인하는 장면이 생략되어 있음이 분명한데, 이는 이미 하갈이 그 정체불명의 남자가 누구인지 아는 상황에서 대화기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주인 사래에게 돌아가 그녀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9). 흥미롭게도 ‘복종하라’는 동사는 ‘자발적으로/스스로를 낮추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사래의 지위와 두 사람의 관계를 확인시켜줍니다. 이 서열을 하갈은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하갈을 위한 엄청난 축복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에게 후손의 번성을 약속합니다(10).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보장하신 약속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이 낳을 아들에게 ‘이스마엘’이란 이름을 부여합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엘)이 들으신다(샤마)’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이 이름을 부여한 배경도 하갈에게 설명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러나 하갈의 후손의 미래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는 ‘들나귀 같이 될 것이다.’ 들나귀에 견주는 것은 호의적이지 않고 오히려 다소 경멸적입니다. 들나귀가 야생에서 떠돌며 사는 것처럼, 이스마엘의 후손도 그렇게 떠돌며 살 것입니다. 이것은 유목민의 생활 방식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스마엘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고 모든 사람이 이스마엘을 친다는 예언도 그의 후손이 전투적으로 사람들과 부딧히며 살 것을 예언합니다. 마지막의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산다’는 말은 웬함의 말대로 이중적 뉘앙스를 내포합니다. 웬함은 이것을 ‘opposite’로 옮기긴 하나 일차적으로 생활 방식의 적대 관계를 가리키는 ‘apart from’의 의미로 이해합니다. 말하자면, 그의 형제들은 정착민이 될 것이나 하갈의 아들은 그들과 동떨어진 유목민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그저 그런 관례적인 생활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적개심을 품을 것입니다.

 

하갈의 찬양과 이스마엘의 탄생(13-16)

신앙의 길을 포기하고 인간적인 판단을 선택했을 때, 아브람은 앞으로 수년 동안 그를 괴롭힐 인과율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성경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일개 이방인 여종에 지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보호와 격려가 필요한 한 인간으로 대우하셨습니다. 또한 아브람을 신실하게 섬긴 사람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12:3).

13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13-16) 

여기서 하갈이 이미 자신의 대화 상대가 여호와의 사자였음을 알고 있었음이 드러납니다. 하갈은 나아가 그를 여호와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그의 이름을 ‘엘로이’, 곧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으로 칭합니다.

이어지는 히브리어 문장은 의문문이지만 감탄문으로 해석해야 하는 뉘앙스를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여기서 내가 나를 살피시는 분을 내가 뵈었다’로 번역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곳 샘의 이름도 붙입니다. 원래 그 샘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나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분의 우물’이란 뜻의 ‘브엘라해로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거기에 부여된 것입니다. 이 우물의 위치는 가데스와 베렛 사이인데, 가데스는 오늘날 니차네이 사이나이(Nitzanei Sinai)라는 이름으로, 혹은 성경 이름 그대로를 간직한 가데스 바네아로 불리는 마을입니다. 이곳은 네겝 남단의 오아시스가 있는 지역입니다. 하갈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여호와의 사자의 지시대로 ‘이스마엘’이라고 지었고 그때 아브람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의 말을 청종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음성과 세상의 소리 중에 어느 쪽이 잘 들리고 있습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은 희미하게 들리고 아내의 현실적인 대안이 크게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집안에 큰 싸움의 소리를 만들었고, 하갈의 원망의 소리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그를 살렸고 새 생명을 낳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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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5-01)


아브람과 언약하신 하나님

창세기 15장 1-21절


두려움과 불안이 떠나갈 때가 언재입니까?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그것이 더는 우리로 불신앙적인 선택이나 불의한 길을 가게 하지 못하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듭 자손과 땅의 약속을 주심으로써 아브람의 마음을 지키십니다. 어떻게 약속하셨겠습니까?

  

전쟁이 끝난 후 시간이 흘렸습니다. 1절의 ‘이 후에’의 문자적 의미는 구약의 서사에서 흐름이 전환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때 사용되는 관용구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용기를 북돋우며 ‘네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볼 때, 전쟁 직후의 장면인 것으로 추론됩니다. 가나안의 큰 전쟁을 통해 아브람은 점점 그 왕의 소유권자의 위상을 구축해 가지만, 정작 그에겐 아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후손에 대한 약속(1-6)

수고한 대가를 제때 누리지 못하거나 당장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자원이 없으면, 걱정되고 불안해합니다. 불안함을 느끼면 사람들은 더 힘이 될 만한 것을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항상 방패와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께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 연합군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아브람에게 친히 방패와 큰 상급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1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2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4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5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6)

아브람이 전쟁에서 롯을 구출하고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후, 하나님께서는 공식적으로 아브람과 언약을 체결하심으로써 주어진 약속(12:2-3)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랜 기간 동안 속박이 있을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15:13).

(1) 언약 체결 이전에 주어진 약속(1-3)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체결하시기 전에 확신의 말씀으로 아브람의 두려움과 의심을 제거하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어느 날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주신 위로와 용기의 말씀을 볼 때 아마 시점은 전쟁 직후로 보입니다.

특히 ‘나는 네 방패요 상급이니라’라는 말씀하십니다. 이는 전쟁에서 승리와 보호를 계속 보장하고, 아브람이 받을 정당한 보상을 자신이 직접 지급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분명히 전쟁 후에 그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막대한 전리품 중 하나도 취하지 않고 모두 소돔 왕과 동료들에게 돌린 것을 염두에 둔 말씀일 것입니다. 여호와는 이러한 아브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여호와는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십니다(출애굽기 14:13-14; 민수기 21:34; 여호수아 1:9; 8:1). 흔히 칼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무기인 반면에, 방패는 하나님의 보호를 상징했습니다(신명기 33:29; 사무엘하 22:3,31; 시편 3:3; 5:12; 18:2,30).

하나님께서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분이 모든 것을 공급하실 것이라는 보증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권리인 전리품을 포기했는데, 하나님 자신이 그의 몫을 직접 챙겨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충분한 물질의 보상을 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절박한 것은 그의 씨, 즉 후손이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직접 간구합니다. 자기는 소유가 충분하니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겠다면 자식을 달라고 합니다. 그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자신의 종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당시 자녀 없음은 하나님의 저주에 의한 징계로 간주되었습니다(레위기 20:20,21; 예레미야 22:30).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축복을 받은 아브람은 다른 면에서는 저주를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보장된 복과 후손에 대한 약속에 비추어볼 때, 대단히 모순된 상황입니다.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2)라고 자신의 충직한 종 엘리에셀이 그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많은 학자들은 종이 상속자가 될 수 있는 근거를 고대 근동의 문헌들에서 찾습니다. 만일 종이 양자로 입양된다면, 그는 상속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아브람은 현재 하나님만을 상급으로 믿는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지만, 그의 입장과 하나님을 향한 이 요청-엘리에셀을 인정해달라는 요청-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입양된 상속자를 통해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흔들리는 그에게 약속을 재 확증 하십니다. 입양된 아들이 아닌 그의 친아들이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 밤중에 그를 밖으로 이끌어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게 하신 후 별처럼 수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생생하게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후손의 번성이 별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애초에 인류에게 복을 주어 자손을 번성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아브람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셔서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하십니다. 

(2) 아브람과 언약을 맺어지신 하나님(4-6)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믿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 창세기 15:6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할례 전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칭의를 얻었다는 이신칭의 교리를 설파한 근거 구절로 유명합니다(로마서 4:1-3; 갈라디아서 3:6-14).

앞서 7:1에서 이미 노아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의’는 ‘옳은 것’,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하나님과의 ‘바른’ 언약 관계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의 믿음과 언약 체결식(7-11)

무로부터 하늘의 별을 만드신 이가 다 죽은 듯한 아브람의 몸에서 별 같이 많은 자손을 내실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이 보아야 할 것은 자기 몸이나 양자(養子)감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의로 여기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아브람의 의로운 믿음의 후손이 됩니다.

7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8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9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10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11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7-11)

아브람은 마치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인 아브람에게 놀라운 격려의 말씀과 하나님의 유업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고 더 나아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1)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7)

자손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확고한 약속을 여기서 재확증됩니다. 아브람은 셀 수 없는 후손과 더불어 가나안 땅을 얻을 것입니다.

 (2) 약속을 위한 증거를 요구한 아브람(8)

그러나 아브람은 여기서 하나님께 증거를 요구합니다. 이것을 불신앙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그의 믿음은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그는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아브람의 후손인 모세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을 보내셨다는 증거, 즉 백성들이 믿을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한 적이 있습니다(출애굽기 3:1-22). 또한 모세는 자신은 말 재주가 없어서 백성을 인도할 수 없으니 대안을 달라고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요구를 따라서 아론을 붙여주셨습니다(출애굽기 7:1-4). 하나님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 무조건 불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식(9-12)

여호와께서는 언약 예식을 위해 많은 짐승을 가져오라고 명하십니다. 아무런 제단이 준비되지 않고 짐승들이 땅에서 도살되며, 또 제사법에서는 주로 수컷이 바쳐지는데(레위기 1장), 여기서는 암컷이 요구되는 것을 보면 이것들은 제사의 제물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3년생 짐승은 충분히 다 자라 상품 가치가 가장 높은 것들입니다. 이 짐승들이 도살되는 방식도 제사와 약간 다릅니다. 제사법에 의하면 짐승은 여러 조각으로 각을 뜨지만, 여기서는 중간을 쪼개 둘로 나눕니다. 새들은 쪼개지 않는데, 이것은 제사법과 동일합니다. 쪼개진 짐승이 의미하는 바는 만약 언약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쪼개질 것,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놀라운 것은 아브람이 이 약속을 목숨 걸고 지켜야한다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키시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걸고 그 약속을 지켜주셨습니다.

솔개가 그 널브러진 짐승들의 사체 위로 날아들자 아브람이 쫓아냈습니다. 솔개의 출현은 분명히 부정적 징조와 암시를 내비칩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후손이 애굽 땅에서 솔개와 같은 바로로부터 암울한 고통을 받을 것을 예고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내쫓긴 솔개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아브람에게 보장된 약속들이 보존된다는 것을 암시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에 대한 약속(12-21)

선지자 아브람(20:7)에게 상징적인 사건을 통해 장차 있을 일을 보이소(7-11) 이를 설명하십니다(12-16). 땅의 후속은 후손들이 이방의 객으로 섬기다가 가나안 아모리 족속의 죄가 관영해지는 4대만에 돌아온 후에 이뤄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의 형태로 쪼갠 제물 사이로 지나가심으로써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언약을 체결하십니다.

12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13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12-21)

바로 그때 갑작스러운 두려움이 아브람을 엄습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불결한 새들(솔개)이 제물로 바친 동물들을 습격하는 안 좋은 징조 때문입니다. 불안한 아브람에게 현현하시고 임재하셔서 ㅁ든 약속에 대한 확증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의 현현과 예언(12-16)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깊은 잠(타르데마)에 빠지게 하셨습니다. 밤중이 아닌 ‘해 질 때’이므로 이것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일입니다. 꿈속에서 흑암이 몰려오자 그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이 겪을 400여 년간의(정확히는 430년) 고난의 시기를 예고하십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지배하던 나라를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고, 아브람의 후손은 큰 재물을 얻은 뒤 그 나라에서 나올 것입니다(14; 출애굽기 12:35-36에서 성취).

아브람은 평안히 장수를 누리다가 조상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열조의 무덤에 묻힌다는 약속입니다. 아브람의 후손들이 돌아오는 시기는 4대가 지난 후일 것입니다. 이런 오랜 기간이 필요한 이유는 ‘아모리 족속의 죄가 아직 가득 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는 죄의 임계량이 있다는 암시입니다. 그 임계점을 넘으면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아모리 족속은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훗날 그들의 죄는 임계점을 넘어 홍수나 유황불이 아닌 이스라엘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얻는 것은 약속의 선물을 받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땅에 대한 심판의 실행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임재와 약속(17-21)

날이 컴컴해지자 아브람의 눈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면서 불타는 횃불이 쪼개진 짐승들 사이를 지나갔습니다. 이것은 그 짐승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초자연적인 현상의 불로 태우셨음을 시사 합니다. 아마 짐승들이 모두 삽시간에 소각되었을 것입니다. ‘연기 나는 화로’는 하나님 임재의 현상인 불기둥을 감싸고 있는 구름 기둥을 암시합니다(출애굽기 40:38).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언약 파기에 따른 저주를 암시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 불은 언약을 어기면 이 짐승들처럼 될 것임을 확증하는 증표입니다. 그러나 레위기 9장과 비교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언약 인준의 표시일 수도 있습니다. 짐승을 두 쪽 낸 것 자체가 이미 언약 위반의 저주에 대한 경고이므로, 이 불사름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거기서 갓 위임받은 아론과 제사장들이(8장) 1-7장에서 제정된 제사법을 따라 최초의 제사들을 집행합니다. 많은 짐승들이 번제단에 올라갔는데, 타고 있던 제물 위에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 순식간에 태워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이 언약 예물들을 순식간에 소각한 것은 언약의 최종적 확증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18절의 ‘언약을 세웠다’는 진술을 통해 뒷받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다시 한 번 그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범위는 ‘애굽 강에서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입니다. ‘애굽 강’, 혹은 ‘애굽 시내’는 가나안 땅과 시내 반도를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는데, 오늘날의 와디 엘 아리쉬(Wadi El-Arish)로 추정됩니다. 가데스 바네아 서쪽에서 지중해로 흐르는 이 하천은 계절 천(wadi)으로 우기 때만 흐릅니다. 또한 가나안 땅에 사는 여러 종족들 이름을 나열하시면서 그들로부터 그 땅을 빼앗아 아브람 후손에게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현실인 만큼 두려움도 현실입니다. 우리는 저주 손에 잡힐 듯 한 대안으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당신의 약속을 제시하십니다. 그 약속이,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우리에게서 두려움과 염려를 거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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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6-01)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엘라

열왕기상 15장 25절-16장 14절


자녀를 양육하다보면 자녀에게 경고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가 성장하면서 좋아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 중에 사탕과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무조건적으로 많이 공급해 주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너무 많이 먹으면 치아가 상하기 때문에 많이 줄 수 없습니다. 자녀가 계속 요구할 때, ‘사탕과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으면 치아가 상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자녀가 부모의 경고를 받아들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한다면 언젠가를 혹독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제2대 왕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이 걸었던 죄악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이 바아사와 그 가문에도 전달되었습니다. 후에 아들 엘라가 왕위에 오르나, 병거 지휘관인 시므리에게 암살당합니다. 시므리가 바아사와 관련된 모든 이를 진멸함으로써 바아사 왕조는 막을 내립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이처럼 계속 성취됩니다.

 

이스라엘 왕 바아사(15:33-16:7)

 

 

33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디르사에서 모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십사 년 동안 다스리니라 34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7:1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에게 임하여 바아사를 꾸짖어 이르시되 2내가 너를 티끌에서 들어 내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하여 그들의 죄로 나를 노엽게 하였은즉 3내가 너 바아사와 네 집을 쓸어버려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 같이 되게 하리니 4바아사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그에게 속한 자가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 하셨더라 5○바아사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권세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6바아사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디르사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엘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7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에게도 임하사 바아사와 그의 집을 꾸짖으심은 그가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 그의 손의 행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음이며 또 그의 집을 쳤음이더라(15:33-16:7)

새로운 왕조를 열어 북 이스라엘을 다스린 바아사는 여로보암과 나답의 최후를 보고 교훈을 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아사도 여로보암의 길을 따르는 어리석은 왕에 불과했습니다.

(1) 이스라엘 왕 바아사(15:33-16:7)

유다 왕 아사 제3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바아사(주전 908-886년)도 이전 왕들처럼 악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잇사갈 족속인 그는 북이스라엘의 강력한 에브라임 지파의 여로보암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았습니다(15:27-28). 당시 남유다는 하나님으로부터 견고함을 보장받은 다윗 왕조와 유다 중심의 두 지파로 형성되었으나, 북이스라엘은 열 지파에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지파가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사시대처럼 지파 간의 경쟁과 갈등이 여전했습니다. 그렇다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두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북이스라엘도 모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14:7; 16:2), 왕들도 다 그의 보살핌 아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부암을 첫 왕으로 세우며, 다윗처럼 순종하면 다윗에게 지어준 견고한 왕국을 그에게도 줄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11:38). 따라서 여로보암이 순종했다면 북왕국도 견고함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수차례의 경고에도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왕조는 파멸했고(15:29-30), 약속된 견고한 나라는 현실화되지 못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바아사를 왕으로 삼아 그와 그의 지파와 나머지 백성에게 다시 순종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아사를 특히 티끌에서 높여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습니다. “티끌”(16:2)은 ‘흙’, ‘먼저’의 뜻으로, 미천한 신분이나 가문을 가리킵니다. “주권자”는 앞서 사울, 다윗, 여로부암에게 적용된 칭호로(삼상 9:16; 삼하 7:8; 왕상 14:7), 바아사의 승격된 지위와 하나님의 호의를 부각합니다. 왕이 된 바아사는 다르사에서 24년(실제는 23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디르사가 왕의 통치 성읍과 매잘지로 소개된 것(15:33;16:6)은 수도가 세겜에서 디르사로 공식 이전됐음을 뜻합니다. 여로보암 가문을 전멸시키고 새 왕조를 시작한 바아사는 여로보암처럼 장기간 통치하는 특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신도 여로보암의 죄의 길을 따랐고, 백성을 우상숭배로 이끌어 죄를 더했습니다. 아람의 벤하닷과 동맹을 맺은 일(15:19) 또한 열방을 신뢰한 그의 죄를 고발합니다. 이로써 바아사의 이름은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한 왕’의 명단에 올랐습니다. 결국 바아사의 죄에 진노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그에게 선언되었습니다.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과 가문에 대한 심판을 전하셨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를 보내셨습니다. 바아사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왕이 됐지만, 여로보암을 따라 자신과 백성을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죄의 고발은 심판의 정당성을 확인시켜줍니다. 그에게 임할 심판(16:3-4)은 여로보암에게 선포되고 성취된 징벌(14:10-11)과 동일합니다. 이는 또한 바아사가 여로보암 집에 저지른 행악이기도 합니다(15:29). 바아사에게 속한 모든 남자가 죽임당하고, 그들의 시신은 오물 같이 성읍과 들에 버려져 개와 새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 대의단절과 시신의 유기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심판임을 암시합니다(신 28:26). 바아사의 남은 행적과 권세는 역대지략에 따로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와 그에게 임할 심판은 한 번 더 기록됩니다(16:7). 이는 그에게 임할 심판이 정당하며, 그 심판이 확실히 임할 것을 재확증합니다. 그의 죄는 첫째, 여호와의 눈에 행한 모든 죄입니다. 원문은 이 악행을 ‘손의 행실로 하나님을 노엽게 한 일’과 ‘여로보암 집 같이 된 일’과 연결시킵니다. 이는 바아사 개인이 여로보암이 세운 잘못된 예배를 따르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백성까지 같은 죄로 인도한 점을 가리킵니다. 둘째, 그가 여로보암의 집안을 몰살한 죄입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을 암살하고, 여로보암과 관련된 모든 생명을 다 제거한 일(15:27-29)은 그가 책임져야 할 죄입니다.

(2) 이스라엘 왕 엘라(16:8-14)

엘라(주전 886-885년)로 이어진 바아사 왕조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로보암 왕조와 똑같은 종국을 맞습니다. 실제 두 왕조의 파국은 유사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엘라는 유다의 아사 왕 제26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디르사에서 2년(실제는 1년)을 다스렸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과도 같습니다. 엘라의 통치 내력으로는 그가 시므리에게 암살당한 사건만 나옵니다. 그날 엘라는 왕궁 책임자인 아르사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습니다. 왕이 신하와 술자리를 갖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술자리를 빌미로 정국을 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에 3:1-4). 그러나 엘라가 수도 디르사에 남아 유흥에 취했을 때, 군대지휘관 오므리와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깁브돈에서 진 치고 있었습니다(15). 깁브돈 공격 시 나답이 암살당한 것처럼(15:27-28) 엘라의 죽음도 깁브돈과 연결성을 지닙니다. 군대가 출정해 있는 동안 왕이 수도에 머무는 데는 왕 개인과 나라의 안전을 꾀하거나, 군사 전략을 계획하고 조정하는 등 군사, 정치, 행정적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엘라가 남아서 과음하고 취한 상태라는 것은 왕으로서 불성실하고 부적절한 행동임을 폭로합니다. 마치 요압과 온 군대가 암몬과 전쟁 중이었을 때 다윗 왕이 저녁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일과 이후 밧세바와 간음한 일(삼하 11:1-2), 에스더 당시 유다인 진멸 조서가 발행된 날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과 연회를 벌인 일에 3:15)과 유사합니다. 엘라가 술에 취했다는 것은 그가 무방비 상태임도 귀띔합니다. 따라서 시므리가 그를 쉽사리 진압하고 암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므리는 엘라의 신하로서 병거 절반을 맡은 지휘관이었습니다. 오므리와 군대가 전장에 나갔으므로, 시므리와 병거 부대는 왕궁을 수비했을 것입니다. 시므리는 직임 외에 혈통이 소개되지 않아, 바아사보다 더 미천한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로보암(11:29-39)이나 바아사(16:1-2)와 달리 선지자를 통한 여호와의 승인도 기록에 없습니다. 왕가의 세습이 아닌, 왕의 신하가 왕좌를 차지한 것은 솔로몬의 노역 감독관 여로보암(11:26)이나 나답의 군인이었던 바아사(15:27)와 같습니다. 특히 암살과 숙청을 자행한 바아사의 등극 행태와 유사합니다. 또한 같은 때에 오므리(16:16)와 디브니(16:21)도 백성의 지지로 왕이 됩니다(16:21). 이처럼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정은 몹시 불안정하고 위태했습니다. 한편 시므리는 엘라만 아니라 바아사 가문 전체를 몰살했습니다. 바아사가 여로보암 집안에 행한 대로 시므리도 바사아에게 속한 남자(‘벽에 오줌을 누는 자’)를 다 없앴습니다. 친구까지 죽임으로써 후환을 없애는 데 바아사(15:29)보다 더 치밀했습니다. 예후의 예언처럼 바아사와 관련된 자들의 시신은 여로보암 가문 사람들처럼 매장되지 못하고 성읍의 개나 들의 새의 먹이가 되었을 것입니다(16:3-4). 이로써 예후를 통해 바아사에게 선언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바아사 왕조의 파국은 여로보암 왕조처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바아사의 모든 죄”, “엘라의 죄”, “그들이 범죄하고”(16:13) 같은 어구가 이를 부각합니다. 이들 죄에 대한 언급은 바아사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합당했음을 함축합니다. 특히 이들이 이스라엘을 “헛된 것들”로 이끈 일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사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헛된 것들”(하발림)은 ‘우상들’을 가리킵니다. 원래 ‘입김’, ‘수증기’ 등의 뜻으로 공허함, 허무함, 일시적임, 무가치함을 비유적으로 함축한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신명기 32:21에서 “허무한 것”으로 번역되어, 우상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이스라엘이 숭배했던 신들이 ‘가증한 것’, ‘귀신’, ‘그들이 알지 못하는 신’, ‘새로운 신’, ‘그들의 선조들이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임을 상기시키셨습니다(신 32:16-18). 하나님의 백성이 헛된 것들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 즉 지각없는 열방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를 격발하여 자기 백성을 멸하겠다고 하셨습니다(신 32:21-22). 우상숭배가 이스라엘에 계속되는 한 이스라엘은 점점 더 멸망에 가까워질 뿐입니다.


성경과 역사에서 보고 베운 교훈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겠습니다. 교만한 왕 나답과 엘라의 집은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진토에 묻히지 못할 만큼 비참한 자리로 떨어집니다. 오늘 귀하게 쓰임 받는 내가 내일도 그 충성된 자리에 가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추억하며 살지 말고 오늘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찬미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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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5-03)


이스라엘의 나답 왕

열왕기상 15장 25-32절


개혁은 옷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본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말씀의 권위가 회복되게 하는 일입니다. 편하고 익숙한 것이 때로 본질을 왜곡하는 가장 위험한 장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존의 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일입니다. 교회 안에 뿌리내린 고질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회자와 성도가 함과 지혜를 모아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여로보암과 그의 왕조에 선포된 여호와의 말씀이 나답 대에 성취됨으로써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다시 증명됩니다. 여호보암의 아들 나답은 부친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도 부친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습니다. 나답 자신도 죄를 지었고 백성을 죄로 이끌었습니다. 결국 그는 잇사갈 족속의 바아사에게 암살당하고 맙니다. 바아사가 나답만 아니라 여로보암과 관련된 모두를 죽임으로써 여로보암에게 예고된 여호와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집니다.

 

이스라엘 왕 나답(25-32)

공동체에 뿌리내린 악은 쉽게 하라지지 않고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우리 삶에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입니다. 우리 각 개인, 가정, 학교, 사회에서 교묘하게 이루어지는 우상숭배는 빨리 해결해야 할 생각한 문제입니다. 우상숭배를 조장한 선대의 정책을 조금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심판에서 조금도 배운 바가 없습니다.

25유다의 아사 왕 둘째 해에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26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한지라 27이에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그를 모반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속한 깁브돈에서 그를 죽였으니 이는 나답과 온 이스라엘이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음이더라 28유다의 아사 왕 셋째 해에 바아사가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고 29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의 종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으니 30이는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로 말미암음이며 또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엽게 한 일 때문이었더라 31나답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2아사와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25-32)

여로보암의 아들 나다이 대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그의 통치는 불과 2년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치세 기간 동안에도 그는 아버지의 실수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경고를 새겨듣지 않고 자기도 범죄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도 범죄하게 하는 길을 따랐습니다.

(1) 나답의 통치와 평가(25-26)

유다의 아사 제2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된 나답(주전 909-908년)은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한 자’로 평가됩니다. 그의 통치 기간 2년은 실상 1년 이내입니다(15:18). ‘여호와의 눈에 악’은 ‘여호와의 눈에 정직함’(11:33; 15:11)과 반대되는 행동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 사는 것을 뜻합니다. 특히 나답의 악은 부친 여로보암의 죄를 따른 데서 더 부각됩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길로 걸었고,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그 죄 중에 행했습니다. 유다 왕들에게 ‘다윗’이 선한 왕의 기준이 되었듯, 이스라엘 왕들에게는 ‘여로보암’이 악한 왕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도 다윗의 모범을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여로보암에게 왕권을 약속하시며, 이스라엘의 분열 원인으로 솔로몬이 다윗의 길로 걷지 않았기 때문임을 하나님은 확실히 언급하셨습니다(11:33). 덧붙여 그에게 다윗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길로 걷고, 하나님의 눈에 정직한 일을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11:38). 그가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세운 것 같은 견고한 왕조를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11:38). 그러나 여로보암은 다윗의 길을 버렸고, 도리어 이전 모든 이보다 악을 더 행했습니다(14:8-9). 그렇다면 나답이 따른 ‘여로보암의 길’, ‘이스라엘을 죄짓게 한 죄’(26)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여로보암은 그동안 이스라엘 역사에 계속되던 하나님을 향한 예배, 이와 관련된 규례들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 마음대로 바꾸고 변질시켰습니다(12:25-33; 13:33). 북이스라엘 백성이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도록 여로보암은 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께서는 소의 형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금송아지들이 ‘이스라엘 조상을 애굽에서 올라오게 한 신들’이라며 그것들을 마치 하나님의 형상인 것처럼 포장하여, 백성들을 유혹했습니다(12:28). 이는 아론이 출애굽 백성의 소요를 막기 위해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그들을 혼란에 빠뜨린 것과 유사합니다(출 32:1-6).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지적하셨듯이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는 자기들을 위해 부어 만든 소 형상이며, 만든 행위는 하나님의 길에서 떠난 부패한 행동이었습니다(출 32:7-8). 여로보암이 만든 두 금송아지의 실체 또한 ‘다른 신’이며 ‘부어 만든 우상’이었습니다(14:9). 이 두 사건은 소 형상을 만든 동기와 논리가 결코 용납되지 못하며, 금송아지가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확실히 정리해줍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들을 벧엘과 단에 놓아 예배의 장소로 지정했고, 여러 산당을 지었습니다. 이 장소들로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과 성전을 대체했습니다. 또한 레위 지파의 아론 자손에게 주어진 제사장 직분을 아무 백성에게나 줌으로써 하나님의 규례를 변질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절기와 날짜를 마음대로 바꿔 자신의 신을 섬기는 날로 제정했습니다. 여로보암은 자기가 변경한 이 모든 것을 본인이 나서서 지켜 행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까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서 떠나 우상숭배와 죄악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여로보암의 죄를 언급할 때마다 그의 죄만 아니라 백성을 죄짓게 한 죄를 덧붙입니다(26,30; 16:19,26). 그가 악영향을 끼친 대상에는 자신의 아들들도 포함되었습니다. 나답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죄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악영향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선을 품은 아비야가 있었습니다(14:13). 이는 누구든 자신의 악행을 부모나 지도자의 죄 탓으로 돌릴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여호와의 눈에 선과 악의 길을 가는 것은 각자 본인의 선택이며, 이에 대한 책임이 뒤따릅니다.

(2) 바아사에게 암살된 나답(27-30)

나답은 바아사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죄에 대한 심판을 받습니다. 당시 나답은 자신의 군사들과 함께 블레셋에 속한 깁브돈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원래 단 지파의 땅으로, 레위 지파의 그핫 자손에게 분배된 성읍이었습니다(수 19:44; 21:20-23). 그러나 당시 블레셋 수중에 있었으므로 나답이 이곳을 도로 뺏고자 했습니다. 깁브돈은 디르사에서 남서쪽 80킬로미터 정도로 추정되며, 예루살렘 서쪽으로 32킬로미터, 제셀에서 서쪽 5킬로미터에 위치했습니다. 게셀은 솔로몬이 이집트인 아내에게서 결혼 예물로 받은 곳을 요새화한 성읍입니다(9:16-17). 이곳은 블레셋 및 애굽, 아람 등의 침입로였습니다. 깁브돈이 이 게셀에 가까이 위치했고 약 25년 후 엘라 왕 때도 깁브돈을 재탈환하려 한 점을 참작하면, 이곳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국경을 경계하고 감시할 수 있는 요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깁브돈에서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나답을 암살했습니다. 그는 깁브돈을 포위했던 “온 이스라엘”(27), 즉 나답의 군사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부친 아히야는 에브라임 실로 출신의 아히야 선지자(29: 11:29; 14:2)와 동명이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아사를 ‘티끌에서 높인 자’로 부른 점(16:2), 시므리(16:9)나 오므리(16:16)와 달리 군사적 직임이 소개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출신이 낮은 자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잇사갈 족속에는 사사 돌라가 있었으며(삿 10:1-2), 그 외에는 크게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없었습니다. 바아사는 나답 왕이 군사들과 함께 있을 때 반역을 일으켰고, 다른 경쟁 세력이나 군대의 반격 없이 왕좌에 오릅니다. 그는 유다 아사 왕 제3년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24년 동안 다스렸습니다(15:33). 아사와 종종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습니다(15:16-21). 이런 점들을 종합해보면, 바아사는 군사력과 지도력을 소유한 인물로 유추됩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승인을 얻은 자였으므로(16:2) 백성의 지지를 얻었을 것입니다.

왕좌에 오른 바아사가 여로보암 가문을 진멸함으로써 하나님의 종 아히야 선지자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선언된 심판의 말씀(14:10-11)이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수 차례 경고를 통해 죄의 심판이 있을 것을 알려, 그가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죄를 지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도록 이끌었습니다. 결국 그의 죄는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의 심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쳤고, 모든 생명을 진멸했다는 기록(29)은 여로보암 가문의 남자가 성읍이나 들에서 다 거름처럼 쓸어버림을 당하여 개와 새의 먹이가 되었음을 암시합니다. 병으로 죽은 아비야가 백성의 애도 속에, 적정하게 장사된 것은 하나님께 품은 그의 선함과 하나님이 베푼 호의 덕분이었음이 마침내 증명됩니다(14:13). 한편 왕이 암살되고 새 왕조가 들어서는 상황은 바아사 이래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되풀이됩니다. 345년의 역사를 가진 유다에는 다윗 가문의 한 왕조만 존재했습니다. 반면 약 210년의 짧은 역사를 지닌 이스라엘에는 서로 다른 9왕조가 생겨났고, 19명(디브니 제외)의 왕 중 7명이 반역으로 암살당하며 왕좌를 잃게 됩니다. 이런 결과는 유다의 왕 19명 중 8명이 선한 왕으로 평가받은 반면 이스라엘의 19명은 모두 악한 왕으로 평가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선한 왕으로 인정받은 유다의 왕들도 모두 죄나 실책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정직과 선이 왕조의 존속을 이루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유다에도 반역과 음모가 있었고 앞으로도 있으나, 그럼에도 다윗 왕조가 존속되는 것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인함입니다.

(3) 나답의 통치 종결부(31-32)

나답의 통치 종결부는 공식처럼 소개되며, 각각 유다와 이스라엘 제3대 왕인 아사와 바아사 사이에 전쟁이 지속되었음이 부가적으로 언급되었습니다(15:16-21; 대하 16:1-6).


나답, 그는 선대로부터도 배우지 못했고, 하나님 말씀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머뭇거림을 온 가문과 나라는 회개할 기회를 잃었습니다. 심판의 말씀은 결국 성취되었고, 말씀의 권능을 입증해 보였던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의 집에 단 한 명의 생명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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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4-02)

 


하나님만 의지해 승리한 아브람

창세기 14장 13-24절


우리 개인은 물론이고 교회는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생명을 세상에 전하여 모든 족속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도록 보름 받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복을 세상에게 흘려보내며 살아야 하는지를 오늘 아브람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마므레 상수리나무들 근처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제단을 세운 장소이며 헤브론 일대에 있습니다. 그 지역에서 마므레라는 인물이 맹주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형제는 에스골과 아넬이었습니다.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아마 당시 불안했던 국제 정세로 인해 토호 세력들이 강력한 이주민 세력인 아브람과 동맹을 맺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람이 롯을 구출(13-16)

애굽에서 세상 권력을 두려워하여 아내를 누이라 속였던 아브람이 더는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 지체를 향한 사랑이 그가 롯에게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13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14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16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13-16)

패주한 서방 동맹군 중 한 명이 탈출해서 아브람에게 소식을 전했습니다. 특이하게 아브람에게 ‘히브리 사람’(이브리)이라는 호칭이 붙습니다. 창세기 저자가 창세기에서 아브람에게 히브리인 호칭을 붙인 곳은 이곳이 유일한데, 분명히 의도가 있어 보입니다. 보수적인 학자들은 이브리가 고대 근동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하비루(Habiru; 혹은 아피루[Apiru]로 칭함) 집단과 일치하는 명칭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와 발음이 비슷하고 사회의 비주류 세력으로 떠돌이였으며, 도적질을 일삼거나 종종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하비루가 히브리인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반면에 많은 학자들은 이브리와 하비루 사이에 언어학적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나그네 신분과 그가 군대를 이끄는 모습은 하비루의 특징에 어느 것도 부합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브람은 마므레 상수리나무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토호 세력인 헤브론의 세 맹주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구출 작전에 나섭니다(4). 여기서 흥미롭게도 그의 주요 관심은 조카 롯이었으며, 다른 것들은 부수적이었습니다. 조카는 원문으로 ‘그의 형제’인데, 여기서 다시 한 번 아브람이 예의 없는 롯을 친동생처럼 마음에 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에게는 훈련된 종들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의 사병 부대가 있었습니다. 318명의 군대를 소집하여 동방 연합군을 추격합니다. 아브람 군대의 숫자 318명은 이미 아브람이 굉장한 부자이며, 군사로 활용 가능한 많은 종을 거느린 막강한 세력의 지도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렇더라도 이 숫자만으로는 동방 군대를 대항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아브람은 단까지 동방 군대를 추격합니다. ‘단’은 분명 단 지파가 정복했던 지역을 가리킵니다. 그곳의 원래 이름은 라이스였습니다(사사기 18:29). 따라서 여기서 단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것은 명백히 연대기에 맞지 않는데, 이것 역시 우리가 앞에서 살핀 대로 후대의 계시의 추가 부분이며, 오경의 최종 편성자가 당대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지리적으로 익숙한 장소를 구체적으로 적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 지파가 새로 개척한 이 지역은 헤르몬 산 아래쪽에 위치했습니다. 약속의 땅의 남쪽 경계는 브엘세바, 북쪽 경계는 단입니다(사사기 20:1; 사무엘상 3:20; 사무엘하 3:10; 17:11). 따라서 아브람은 자신도 모르게 섭리 가운데 약속의 땅 끝까지 다녀온 셈입니다. 그와 그의 군사들은 군대를 나누었습니다.

14절의 더 나은 번역은 이렇습니다: ‘밤에 그는 그들을 향해 자신과 그의 종들을(군사들을) 나누어 그들을 쳤다’. 이것은 아브람의 전술이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사방에서 공격한 야간 공습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적은 병력으로 적들을 효율적으로 격파한 기드온의 전술과 흡사합니다(사사기 7:19-23).

아브람의 군사는 멀리 다메섹 근처의 호바까지 그들을 추격해서 결국 빼앗긴 모든 포로와 전리품을 되찾아왔습니다. 300여명의 아브람의 군대가 어떻게 동방의 막강한 군대를 쳐부수었습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합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동방 군대의 침략은 전면전이 아닌 약탈을 위한 소규모 침공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쩌면 그 도시 국가의 왕들이 직접 출정하지 않고 대장들과 소규모 군대를 파견해서 작전을 수행하도록 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침략자는 여전히 왕들로 기록됩니다. 두 번째로 24절의 아브람의 군대는 318명만이 아니었음이 드러납니다. 헤브론의 동맹체인 위에 언급한 세 명의 맹주들이 합세했습니다. 아브람의 군대는 이보다 몇 배 큰 규모였을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17-20)

승리한 아브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자신에게 복을 비는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로 화답합니다. 승리가 자신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전적으로 시인한 것입니다. 내 것이 없고 모두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 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복을 나누십니다.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17-20)

아브람은 의기양양하게 가나안 땅으로 돌아옵니다. 이때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이 그를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왔습니다. 여기서 소돔 왕의 이름은 거명되지 않습니다. 아마 그는 2절에서 소개되어 동방의 세력에게 패주했던 베라였을 것입니다. 이름을 생략한 것은 분명 그를 폄하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람을 영접한 곳은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인데,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살렘은 예루살렘을 의미하기에(시편 76:2), 그곳은 살렘 왕 멜기세덱의 관할 구역으로 보입니다.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들고 마중 나왔습니다. 포도주는 당시에 주로 잔치에서 사용되었으므로, 이것은 그를 위해 왕실 연회와 같은 큰 식탁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됩니다(사무엘하 17:27-29). 그러나 정작 가장 큰 수혜자인 소돔 왕은 빈손으로 아브람을 맞았습니다.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멜기세덱의 처신과 크게 대조됩니다.

멜기세덱은 왕이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히브리어는 ‘엘 엘욘’으로 이 자체로 하나님의 별칭으로 사용됩니다. 혹자는 엘이 가나안의 최고신이었기에 멜기세덱의 엘에게서 가나안 종교의 흔적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는 엘 엘욘을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으로 호칭하는데(20), 이것은 같은 대화에서 아브람이 사용한 표현과 동일합니다(22). 두 사람이 섬긴 엘은 같은 하나님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제한적으로 참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되어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스 땅에 살던 욥이 그러했고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그러했습니다. 제사장이란 말이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멜기세덱은 정교 분리가 되지 않은 고대 근동의 관행대로 왕이자 제사장을 겸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위해 하나님께 축복 기도를 하고, 아브람은 그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당시 십일조는 고대 근동의 보편적 제도였는데, 국세이자 종교세 개념으로 왕-제사장에게 바쳤습니다. 이 경우 아브람은 분명히 왕이 아닌 자신을 축복한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종교적 십일조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돌라오멜이 받던 조공이 이제 여호와께 십일조로 바쳐진다’. 훗날 이것이 표본이 되어 율법은 십일조를 왕이 아닌 하나님께 바칠 것을 규정합니다(레위기 27:32; 민수기 18:21 이하; 신명기 12:6 등).

 

재물을 탐하지 않는 아브람(21-24)

아브람은 자기 이해관계에 관심이 있는 소돔 왕의 도움을 거절합니다. 소돔 왕이 주는 것은 실오라기 하나라도 받지 않겠다고 거절합니다. 그는 이 승리가 하나님의 승리이며, 하나님만이 자신의 참 분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을 참 분깃이라고 여기는 자가 복의 통로가 됩니다.

21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22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젊은이들이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가질 것이니라(21-24)

소돔 왕은 멜기세덱과 전혀 상반된 태도를 보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빈손으로 나온 그는 무례하며 태도는 더욱 뻔뻔합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포로들만 주고 다른 전리품은 모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소돔 왕은 이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당시 관행상 전리품은 부하가 아니라면 직접 목숨을 걸고 전투를 수행한 사람의 못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브람에게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자신이 마치 승자이자 아브람의 상전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아브람은 그의 치졸한 제안을 두고 논쟁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롯에게 기꺼이 좋은 땅을 양보했던 것처럼 소돔 왕에게 모든 전리품을 돌려줍니다. 그는 하나님께 맹세하며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소돔 왕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아브람의 당찬 믿음이 엿보입니다. 다만 전쟁에 출정했던 군사들이 먹었던 식량은 변제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그와 연합 작전을 펼친 세 명의 동지의 몫은 떼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재산인 군사들에게 넉넉한 수고비를 지불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로써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점점 다른 민족들의 복의 통로요 중재자가 됩니다. 그러나 소돔 왕은 아브람을 멸시했습니다. 이것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는 말씀이 성취될 것을 예고합니다. 앞서 12:3에서 아브람을 멸시하는 자가 저주를 받는다는 설명을 한 바 있는데, 소돔은 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람을 멸시한 결과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을 축복했던 멜기세덱은 복을 받습니다. 멜기세덱은 시편에서, 신약의 히브리서에서 영원한 제사장 반차로 추앙받았으며 그리스도의 그림자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었습니다.


무엇이 복의 근원, 복의 통로가 되는 길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내 것을 주장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태도이며, 이웃과 자신을 별개로 나누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살아갈 때 천국의 힘하고 생명이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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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4-01)


동방을 선택한 롯의 결과

창세기 14장 1-12절


 온 세상이 전쟁입니다. 총칼을 들어야만 전쟁입니까? 언론도 전쟁이고 정당도 전쟁입니다. 지역도 동서와 남복으로 갈렸습니다. 나라들마다 강력한 리더십을 세워서 국제 관계에서도 평화를 지우고 있습니다. 오직 자극의 이익뿐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은 어떤 곳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까?

 

창세기 14장은 격동하는 세계의 상황을 그립니다. 동서로 나뉜 고대의 세계 대전이 발생했습니다. 동쪽의 세력은 시날(바벨론)과 그돌라오멜을 중심으로 다섯 나라와 왕이 연합군을 결성했고, 서쪽은 소돔과 고모라를 중심으로 네 명의 왕이 규합하여 이에 맞섰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적 사건은 아브라함을 주인공으로 세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무대에 불과하지 않았습니다.

 

고대의 세계 전쟁 발발(1-4)

가나안은 비옥한 땅이고 주요 무역로가 지나가는 요충지입니다. 강대국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격전지가 될 수 있는 위태한 땅입니다. 자신에게도 좋은 땅은 남에게도 욕망의 땅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좋은 나라이며, 공유와 공존의 나라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나라입니다.

1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4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1-4)

세상이 나라와 민족별로 나뉘어 분산된 후 격동의 시기를 보냅니다. 세상이 동서로 나뉘어 쌍방 간의 연합군이 격돌한 고대의 세계 전쟁이 발발한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문헌에 흔적이 없다 해서 결코 이 전쟁을 허구(fiction)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 전쟁은 운명을 건 전면전이 아닌 제국이 약탈을 위해 침략한 평범한 사건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도시 국가들 입장에서는 남서쪽의 시리아-팔레스타인 공략은 무시해도 될 만한 역사였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이 사건은 침략과 통치기를 포함하여 15년 안팎의 짧은 기간에 일어난 사건에 불과합니다. 강력한 동방 세력의 침공에 시리아-팔레스타인 세력이 무기력하게 점령되면서 재산을 약탈당하고 주민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장면이 연출됩니다(4-12). 이는 제국의 세력 확장의 한 부분에 국한하기에 일반 역사에서는 무시해도 될 만한 사소한 전쟁이었을 수 있지만, 성경은 그것을 세상이 동서로 양분되어 벌인 세계 대전 급 사건으로 조명합니다. 이것이 세속사와 구원사의 역사관 차이입니다.

동편 연합군은 넷입니다. 시날(바벨) 왕 아므라벨이 가장 먼저 소개되지만 연합군의 리더는 엘람 왕 그돌라오멜입니다. 이 전쟁에서 아므라벨이 아닌 그돌라오멜이 연합군 총사령관 역할을 하는데, 이런 상황은 대제국의 왕인 함무라비의 위상과 맞지 않기에, 그를 함무라비와 동일시하는 시도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엘라살 왕 아리옥도 참전합니다. 엘라살 제국의 위치에 대해 몇 가지 제안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카르케미시(Carchemish 구약의 ‘갈그미스’)와 하란 사이에 존재했던 일란주라(1lanzura) 나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 근처라고 제안합니다. 엘라살왕 아리옥은 고대 후리족의 이름인데, 이것이 이 전쟁 기사의 역사적 신빙성을 더해줍니다. 혹자는 마리의 왕 아리우크(Ariwuku)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참전합니다. 엘람 제국은 10:22에서 언급된 바 있는데, 매우 초기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강력한 제국입니다. 그돌라오멜은 성경 외의 문헌에서는 발견되지 않지만, 여기서는 다섯 연합군을 이끈 막강한 권력자로 등장합니다. 네 번째 나오는 왕은 고임 왕 디달입니다. 고임은 ‘민족들’을 뜻하므로 이는 국가명이 아니라 국가 연맹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고임 왕 디달의 이름이 히타이트 식의 이름이므로, 아마 고임은 히타이트와 인근 나라의 동맹군이었을 것입니다.

2절에서 다섯 개의 도시 국가로 구성된 서편 연합군이 등장합니다. 총사령관은 소돔 왕 베라입니다. 구약에서는 대부분 소돔과 고모라가 짝을 이루며 언급되는데, 고모라 왕은 비르사입니다. 이들 이름의 원래 어원으로 베라에 대해서는 ‘정복하다’라는 뜻의 아랍어 바라아(bara‘a)가, 비르사에 대해서는 ‘싫음’을 뜻하는 비르쉬(birshi)가 제안되나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왕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입니다. 시납과 세메벨 또한 이 전쟁 기사의 역사성을 엿보게 하는 고대 이름의 흔적이 있습니다. 서편의 다섯번째 왕은 벨라, 곧 소알 왕입니다. 소알은 지명이 분명합니다(창세기 13:10).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경우 소알 성 왕의 이름만 누락되기에 벨라를 왕의 이름으로 해석하자고 제안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소알 왕 벨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히브리어 어구는 그러한 해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 다섯 도시 국가의 위치는 오늘날의 사해 일대입니다(5). 그러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소돔과 고모라, 소알의 위치를 중심으로 논쟁 중입니다. 일반적으로 소돔과 고모라는 사해 남단으로 추정하는데, 그곳에는 소금이 굳은 암석들로 가득차 있고 다량의 유황이 새어나옵니다. 싯딤 계곡은 사해 남동쪽에 위치하며 역청이 생산됩니다. 이 서방의 다섯 왕은 세를 규합하여 동방의 네 왕 연합군의 침략에 맞섰습니다. 양측은 염해, 곧 오늘날 사해의 싯딤 골짜기에서 격돌했습니다. 전쟁의 결과가 4절에서 간단하게 보고됩니다. 서방 연합군은 패하여 12년간 동방의 맹주 그돌라오멜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러나 13년째에 서방 세력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영주들에게 더는 공물을 바치지 않고 독립을 꾀했을 것입니다.

 

그돌라오멜 동맹군의 침공(5-7)

욕망이 들 끊는 곳에는 전쟁이 일어나곤 합니다. 가나안 땅은 풍요로운 땅이기 때문에 전쟁과 갈등의 끊임없는 땅입니다. 지배와 반란이 반복되는 땅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는 한 마음이었습니다.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서 죽이는 추악한 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지배가 없는 곳에 힘의 지배만 있고. 생명이 아니 죽음만 있습니다.

5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5-7)

고대의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식민 국가들을 제압하기 위해 동방 세력은 다시 4개 연합군을 결성하여 침략합니다. 이번에는 전쟁의 국면이 나름대로 상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진격해 오면서 요단 동편의 성들을 차례로 점령합니다. 먼저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임 족속(‘르바 족’은 오류)을 격파했습니다. 요단 동편에 있는 그 성은 훗날 아모리 족속인 옥이 통치하는 바산 제국의 수도였습니다(신명기 1:4; 9:10). 인근의 가르나임과 가깝다는 이유로 아스드롯 가르나임으로 불린 듯합니다. ‘르바임’은 거인을 뜻하므로 르바임 족속은 골격이 매우 큰 종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모압 족속은 에밈으로, 암몬 족속은 삼숨밈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르바임이란 말이 때로는 덩치가 큰 무서운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의미로도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신명기 3:11에서 바산 왕 옥이 르바임의 마지막 남은 자로 평가되지만, 그는 아모리 족속의 왕이었기에 이 경우 르바임은 ‘거인’을 가리킨다고 봐야 합니다. 함이란 성도 함락됩니다. 그곳에는 수스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마 이들은 암몬 족속의 방언으로 일컬어진 삼숨밈과 동일한 종족일 것입니다(신명기 2:20). 삼숨밈은 르바임에 대한 암몬 식 이름입니다. 사웨 기랴다임에서는 엠 족속이 격파됩니다. 이 성은 함 인근에 위치했을 것인데, 역시 그곳에 있던 엠 족속이 제압되었습니다. 엠 족속(에임)은 신명기 2:10-11에서 거인 족속인 ‘에빔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에밈은 르바임에 대한 모압 방언입니다. 결국 르바임은 암몬에서는 삼숨밈, 모압에서는 에밈으로 불렸습니다. 동방 연합군은 강력한 골격을 지닌 르바임 세력을 모두 쳐부순 것입니다. 동방 연합군은 계속 남하하여 세일 산 일대를 공략했습니다. 그곳은 사해 남쪽의 높은 산악 지대로 훗날 에돔 족속의 영토가 됩니다. 그전에는 그 일대가 호리 족속의 거주지였습니다(신명기 2:12,22). 호리 족속은 주전 제 2천년기의 고대 중동 문헌들에서 발견되는 후리 족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창세기 26:2의 ‘히위 족속’과 동일한 민족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더욱 남하하여 엘바란에 이릅니다. 이곳은 바란 광야로 이네겝(남방) 남쪽의 넓은 광야 지대입니다. 시내 반도 북쪽 지역인데 바란 광야와 네갭 지역의 경계선에 가데스바네아가 위치해 있습니다. 이들의 침략 경로를 종합하면, 홋날 암몬 땅과 모압 땅, 에돔 땅을 모두 점령했으며,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 남쪽의 네집 지역까지 장악했습니다.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세력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궤멸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흥미롭게도 아브람이 거주하는 요단 서편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침략당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은 보존되고 그 경계선 밖의 모든 영역이 장악된 것입니다.

 

소돔 동맹군의 패배와 잡혀간 롯(8-12)

성도들이 자녀들을 향해 소돔의 실상과 같은 재물을 전해주지 않은 채, 물질적 혜택만을 기대하게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아브람이 약속의 땅을 공유하고 살자는 제안(13:9)을 거부하고 물질적인 풍요로운 곳만 찾아서 동쪽으로 이동했던 록도 국제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무기력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녀들을 롯이 점점 동쪽으로 가다가 결국 요단강을 건너서 모압과 암몬이 되어버린 세상의 길로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8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9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10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8-12)

그들의 비참한 패배가 간략히 보고됩니다. 소돔과 고모라 왕은 황급히 피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싯딤 골짜기로 쫓기더니 역청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소돔 왕은 살아남은 것을 볼 때(17) 이것은 역청 구덩이에 빠져 궤멸된 그 군대의 처참한 패배를 의미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남은 군대는 모두 산으로 도망하였습니다. 동방의 네 왕은 그들의 성에서 모든 것을 전리품으로 거두어 갔습니다. 재물과 양식에는 식량과 가축, 귀중품, 귀금속은 물론이고 포로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소돔에 거주하던 아브람의 조카 롯도 잡혀갔으며 그의 모든 재산도 빼앗겼습니다. 그는 가장 좋은 모든 것을 차지하려 했지만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롯은 탐욕스런 국제 전쟁의 예매한 피해자만은 아닙니다. 풍요와 안락만을 좇아 힘을 숭상하는 큰 죄인들의 세계(13:13)를 선택한 롯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저 소돔의 실상을 전해주지 않은 채 그곳의 물질적 혜택만을 기대하게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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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3-01)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온 아브람

창세기 13장 1-18절


사람들은 대게보고 싶은 대로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치관이 되고, 그 가치관을 따라서 우리는 욕망하며, 그 욕망을 따라 우리의 시간과 돈과 관계가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람과 룻의 차이를 만든 것은 무엇입니까?

  

애굽의 바로와 고별한 후 아브람은 네게브로 ‘올라와’ 가나안으로 복귀합니다. 그의 복귀 시점은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가나안의 기근이 해결된 후였을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복귀한 후 땅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으며, 이 일을 계기로 아브람과 롯은 결별하게 됩니다.

 

가나안으로 복귀한 아브람(1-4)

모든 사람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일곱 번을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생각에 의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이제 실패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1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2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3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1-4)

아브람은 애굽에서 ‘복의 근원’이 아니라 ‘재앙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가 약속의 땅을 두고 애굽으로 내려간 일, 애굽에서 아내 사래를 누이로 속이는 일 등, 모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친히 개입하여 구원하여 다시 가나안 땅으로 복귀하도록 하십니다. 이전보다 더 큰 부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1)가 함께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바로가 아브람을 떠나보낼 때 썼던 표현과 동일합니다. 다만 여기에는 롯이 추가되어 있는데, 이것은 곧 일어날 롯과 관련된 사건을 예고합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잃은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해주며, 오히려 ‘모든 소유’라는 표현에는 그가 넉넉하게 복을 받고 돌아 왔다는 인상을 남깁니다. 귀환 대열의 목록에 롯이 마지막에 나열된 것은 아브람과 롯 사이에 벌어질 거리를 예고하는 듯합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아브람에게는 가축뿐 아니라 금과 은도 풍부했습니다. 문자적으로 하면 그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심히 무거웠다’입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표현할 때는 ‘라브’가 많이 쓰이는데, 대신 ‘카베드’를 쓴 것은 앞서 기근이 매우 ‘심했다’(카베드)는 표현과 대조하기 위한 의도일 것입니다. 여기서 은과 금이 처음으로 재산 목록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애굽에서 사래와 관련한 사건으로 바로에게서 많은 가축을 받았지만, 거기에서 귀금속을 얻었다는 말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량의 은과 금은 그가 애굽에서 여호와의 복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기 직전에 애굽 사람들에게서 은과 금을 받은 사건과 비교됩니다(출애굽기 12:35-36). 아브람의 애굽 이탈과 가나안 복귀는 출애굽 사건을 예고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아브람은 정확히 역순으로 가나안 땅에 복귀합니다.

가나안에 들어온 그들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이르는데, 이곳은 애굽으로 가기 전에 거처로 삼았던 곳입니다. 거기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제사했는데, 애굽에서 올라와서 다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4)고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애굽에는 아브람이 예배를 드렸다는 표현이 한 곳도 없습니다.

 

아브람과 롯의 결별(5-13)

세상은 피를 말리는 경쟁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경쟁을 요구하는 현실 속에서라도 삶의 성패는 경쟁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먼저 배려할 줄 알고 나누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람은 가나안과 브리스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골육’끼리 다를 수 없어 롯에게 거할 땅을 먼저 선택하게 합니다.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7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5-13)

아브람이 복을 받을 때, 조카 롯도 하나님의 복을 누렸습니다. 그는 조카 롯에게도 복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근이 재앙이 아니듯이, 많은 재물이 자동적으로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흘러 아브람과 롯 모두 더 부강해졌기 때문에 좁은 땅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롯에게 거주할 땅을 먼저 선택하라고 했고, 롯은 요단 계곡 근처를 선택합니다.

(1) 목초지를 둘러싼 분쟁(5-9)

롯도 아브람의 복의 수혜자로서 심히 많은 가축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이미 복의 통로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축이 많아서 그곳의 목초지는 아브람과 함께 목축을 하기 에는 매우 협소하였습니다(6). 때로 축복이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아브람과 조카 롯은 반-유목민입니다. 따라서 이제 그들은 잠시 거류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정착할 곳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반-유목민은 유목민처럼 목초지를 찾아 계속 이동하지 않으며, 한 곳에 영구적 거주지를 마련한 뒤 목초지가 있는 주변 지역을 제한적으로 돌아다닙니다. 이때 우물은 생존을 위해 대단히 중요한 자산이 되며, 우물을 중심으로 거점을 마련합니다. 세력이 커지면 자주 목초지와 우물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곤 했습니다(창세기 26:12-22; 36:6-7). 아브람과 롯 사이에서도 각자의 목자들 간에 목초지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그들 곁에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7)는 말이 첨가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기록한 이유는 그 땅이 더는 여유가 없었음을 시사하며, 아마 아브람과 롯이 정착을 다투던 지역에는 이 두 종족이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형제 의식을 강조하면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는 조카 롯에게 통 큰 제안을 내놓습니다. 롯에게 그가 원하는 땅을 먼저 선택하라고 합니다. 당시 관례대로 하면 아버지가 없었던 롯은 아브람에게 입양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롯의 후견인이면서도 그에게 권리를 양보하고 있습니다. 분쟁을 피하기 위한 결정이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롯과 대조되는 아브람의 도량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서 나온 결단일 것입니다.

(2) 아브람을 떠난 롯(10-13)

롯은 아브람의 제안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할 땅을 찾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눈에 가장 좋아 보이는 요단강 유역의 땅을 선택했습니다. 수자원이 풍부하고 초원이 드넓게 펼쳐진 그 땅은 목축에 가장 적합한 땅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요단강 남쪽 계곡에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만일 소알과 소돔이 많은 학자들 견해대로 사해 서쪽에 위치한다면, 롯이 본 범위는 요단강 남단에서 더 남쪽으로 사해의 서쪽 분지를 포함할 것입니다. 롯에게 그 땅은 여호와의 동산, 즉 에덴동산 같았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애굽 땅은 끝없이 펼쳐진 비옥한 토지인 나일강 삼각주 일대를 말합니다. 롯이 관찰한 요단 계곡과 사해 서편에는 샘들이 많아 여리고, 엔게디, 더 남쪽으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여러 도시들에 사람이 몰려 살았습니다. 창세기는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기 전에는 그곳이 매우 기름지고 물이 넉넉한 땅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아브람이 차지한 땅은 서쪽의 반대편으로 고지대로 강과 하천이 없고 샘도 많지 않아 물이 부족했으며, 항상 비를 기다려야 하는 지역입니다. 아브람은 물이 넉넉하지 않았던 벧엘 근처의 가나안 땅에 여전히 머물게 됩니다.

롯은 동쪽으로 이동합니다(11). 그가 선택한 땅은 요단강 남단 유역과 사해 서쪽 지역입니다. 이곳은 약속의 땅 동쪽 경계선에 위치해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곳은 약속의 땅의 변두리이며, 훗날 롯의 후손은 거기서 동쪽으로 더 나아가 요단강 동편에서 모압과 암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롯은 여전히 약속의 땅의 일부에 남아 있으나 그곳은 변두리이며, 더 동쪽으로 진출할 때는 약속의 땅을 등지게 되는 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동쪽’ 모티프가 나타납니다. 롯은 ‘동쪽으로’ 이동합니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보고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창세기는 인간이 죄를 지은 후 하나님과 멀어질 때 동쪽으로 떠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3:24; 4;16; 11:2). 롯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따른 선택은 에덴동산에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던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탐욕이 재현된 일입니다. 롯이 동쪽으로 이동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는 소돔에서 멈추며 거기에 거주합니다(창 14:12). 그러나 소돔은 죄악의 범죄 도시였습니다(13). 결국 그가 선택한 땅은 심판을 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인 모압과 암몬은 약속의 땅 경계선을 넘습니다.

 

이 땅을 네게 주리라(14-18)

아브람은 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롯에게 먼저 거할 땅을 선택할 권리를 양보한 결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믿음을 인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눈을 들어 사방을 바라보라고 권하십니다. 아브람이 바라본 동서남북은 롯이 선택하고 차지한 땅까지 포함합니다.

14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8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4-18)

롯이 떠난 후 아브람의 심정은 단지 좋은 지역을 놓쳤다는 서운함보다도 롯을 떠나보낸 허전함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람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벧엘의 위치로 알려진 현대의 베이틴 시 일대는 높은 고지대입니다. 노트(M. Noth)에 의하면, 그곳에 가나안 땅 동서남북이 모두 보이는 봉우리가 있습니다. 서쪽으로 지중해가 보이고 동쪽으로 요단강 건너의 산들, 북쪽으로 헤르몬 산, 남쪽으로 사해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땅과 후손의 약속을 확증하십니다.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 ‘네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번성케 하리라’. ‘땅’과 ‘후손’은 아브라함 언약의 두 가지 핵심 요소이며, 앞으로 오경과 이후의 성경의 역사는 이 두 가지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 사방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니라고 명령하십니다. 이것은 그 땅의 사방 전체가 아브람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아브람은 이미 그 땅을 북에서 남으로, 다시 남에서 북으로 이동을 거듭했으며, 이후의 삶에서도 이 땅 전역에서 많은 사건들에 연루되며, 활동 범위는 북쪽의 단 지역까지 이릅니다(창세기 14:14).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헤브론으로 이동함으로써 실제로 그 땅을 두루 다닙니다. 그곳은 벧엘에서 남쪽으로 약 46km에 위치합니다. 헤브론 또한 이후 역사에서 벧엘 못지않게 정치적, 종교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중심지가 됩니다. 헤브론 인근의 ‘마므레’라는 곳에도 세겜 땅의 모레처럼 상수리나무들이 있었습니다. 벧엘과 헤브론의 중간 지점에 예루살렘이 소재합니다.

아브람은 여기서도 아마도 이방인들의 제의 장소로 추정되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새롭게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분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데로, 언약하시고 지켜주시는 참 신실한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자신이 보고 좋은 데로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눈을 들어 보라하신 것을 보았을 때, 복의 통로로 쓰임 받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실에 감사하면서 아브람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다시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람은 새로운 눈이 열렸습니다.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애굽으로 내려갔고, 자신이 고안해낸 계획으로 안전을 도모하려 했던 그가 이제 하나님께서는 보라고 하실 때까지는 스스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신 약속을 믿음의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어떤 눈을 갖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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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2-01)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창세기 11장 31절-12장 9절


우리들은 항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안고 살아갑니다. 삶을 살다보면 답이 안 나오는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럴 때 보통 삶을 지탱해줄 우리가 가진 ‘어떤 것’들로부터 답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저축해둔 돈일수도 있고, 안정적인 직업이나 원만한 인간관계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믿음으로 살려면 그런 것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창세기 12장은 큰 전환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심과 더불어 아브람이 역사의 무대 전면에 등장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구원사뿐 아니라 세속사에서도 중요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따라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후에 아브람의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이 창세기의 핵심적인 관심사입니다.

 

데라 가족이 우르를 떠남(31-32)

바벨탑은 하나님을 떠난 아담적 인간의 반역의 절정입니다. 스스로 ‘큰’ 성과 대를 쌓았고, 스스로 자기 이름을 드날리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주와 불명예로 끝났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가야 할 사람과 땅을 정하시고, 그분의 통치하시는 나라를 시작하십니다.

31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32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31-32)

데라는 이방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였습니다(여호수아 24:2). 그는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이사합니다. 그의 이사에는 아들 아브람과 그의 아내 사래, 하란의 아들인 손자 롯과 그의 아내만 동행한 것으로 언급됩니다. 그러나 이후의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증거 되는 바로는 당시 나홀과 밀가도 동행했음이 명백합니다(창세기 22:20-24; 24:10 이하). 롯이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로 표현되는 것은 죽은 하란의 자리를 롯이 현재 대신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는 데라가 죽은 후에는 아브람의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데라는 애초에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떠나려 했던 것이 드러납니다. 대조적으로 12:1-4에서는 데라가 하란에서 죽은 다음 아브람에게 이 지시가 내려진 것으로 이야기됩니다(창세기 12:1-4).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이 지시를 그 이전에 우르에서 이미 받았다고 설교합니다(사도행전 7:2-4). 아마 아브람은 이미 우르에서 환상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데라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리고 그를 설득하였으며, 데라는 아브람의 말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과 그의 아버지 데라는 가족과 더불어 도중에 하란(인명 하란과 히브리어가 다름)에 도착하여 거기에 일단 정착했습니다. 거기서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확정적 계시를 전달하고자 재차 나타나시어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떠날 것을 명령하신 것으로 보입니다(창세기 12:1-4).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에 죽습니다(32). 그가 205세에 죽을 때 아브람은 75세였는데(창세기 12:4), 이러한 나이들은 계산이 들어맞지 않기에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됩니다. 사도행전 7:4에서 스데반은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사망한 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여행했다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 창세기와 내용상 모순이 발생합니다. 11:26에서 데라의 나이 70세에 아브람이 출생합니다. 32절에서 데라가 205세에 죽는다고 보고합니다. 그리고 12:4에서 아브람은 75세에 하란을 떠납니다. 이걸 계산하면, 아브람이 75세에 하란을 떠날 때 데라의 나이는 70+75=145세가 됩니다. 이 경우 아브람은 데라가 살아 있을 때 하란을 떠났으며, 데라는 하란에서 60년을 더 생존한 뒤 205세에 죽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웬함은 이 셈법을 따라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육신의 아버지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떠나기로 결단한 아브람의 순종은 더욱 값어치가 있다고 주석합니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스데반의 설교와 전혀 들어맞지 않으며 창세기 자체 내에서도 모순을 일으킵니다. 만일 11:26의 세 아들의 순서가 출생 순서가 아니라면, 그리고 만일 아브람이 막내였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됩니다. 정황을 보건대, 출생 순서는 하란, 나홀, 아브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란이 조기 사망했는데, 하란의 딸이 나홀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나홀이 아브람보다 형이라는 것을 시사 합니다. 결국 데라가 70세였을 때 태어난 장남은 하란입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이 맨 선두에 배치된 이유는 하란이 사망한 뒤 장자권이 차남 나홀이 아닌 아브람에게 넘어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람이 막내였다면, 앞서 계산대로 그는 데라가 130세에 낳은 아들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205세에 하란에서 죽고 아브람이 당시 나이 75세에 하란을 떠났다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아브람을 부르심(12:1-4)

하나님의 목적은 ‘떠나라’와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안전한 조건을 버리고 불확실성과 마지의 세계를 향해 말씀만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 당신이 열어 가시는 나라를 만나게 됩니다. 이는 기존의 세계관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결단에서 시작합니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1-4)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으로 떠날 것을 지시하시고 몇 가지 약속을 보장하십니다. 이어지는 7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직접 나타나셨다고 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아마 환상이나 꿈으로 그에게 지시를 내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스데반은 그가 하란에 있기 전에 이미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4절을 볼 때, 그가 이 지시를 받은 것은 하란에서입니다. 현재의 지시는 하란에서의 지시와 달리 매우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확정적 계시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가나안 땅으로 떠날 것을 말씀하시면서 땅을 포함해 크게 네 가지 약속을 주십니다. ① 큰 민족(후손); ② 복; ③ 큰 이름; ④ 복의 통로 등 입니다.

먼저, 큰 민족을 이룬다는 것은 씨에 대한 약속으로 해석해야 합니다(창세기 22:17; 32:12). 두 번째 약속은 복인데, 아마 여기에는 이미 전제된 땅의 선물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 약속은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한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그의 후손을 통해 아닌 아브람의 명성이 널리 알려질 것임을 뜻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높이시는 큰 이름(셈)은 ‘우리가 우리 이름을 내자’며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것과 대조됩니다. 결국 사람이 높이려 한 명성은 실패했으나 셈의 후손의 명성은 하나님에 의해 높아집니다. 네 번째의 ‘너는 복이 될지어다’는 난해합니다. 이것은 ‘너는 복의 구현자가 된다’는 뜻으로 단순히 복을 받는다는 의미이거나, ‘너는 복의 근원이 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앞서 이미 복이 선언되었기에 복의 근원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3)라는 부연 설명에서 뒷받침됩니다. 따라서 ‘너는 복이 되라’는 말은 그가 열국의 복의 통로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3절은 이러한 약속된 복을 강조하기 위한 부차적 설명으로 보입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지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고, 롯이 그와 동행했습니다. 아브람의 나이 75세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도착한 아브람(12:5-6)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복덩리라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의식을 잃어버리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느냐? 세상 사람들하고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동일한 말을 하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가문을 기독교 명가문으로 만들겠다는 이 약속은 교회를 세우고 나라를 세우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5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5-6)

아브람은 하란에서 모은 모든 재산을 모아 짐을 꾸리고 가나안으로 이사했습니다. 그의 이동 경로는 가나안 북쪽에서 남쪽 방향입니다. 그는 세겜 땅의 모레 상수리나무에 여장을 풉니다. 세겜은 가나안의 중앙에 위치하는 고대로부터 매우 중요한 중심 도시였습니다. 거기 모레라는 곳에 특별한 상수리나무가 있었는데, 당시 그런 큰 나무 아래에서 주술을 행하고 신탁을 받는 등 중요한 제의적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신에게 신탁을 받던 이곳을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통해 성스럽게 만드시며(7), 거기에서 모종의 진정한 신탁을 주실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이미 거주하고 있다는 말은 암시를 위한 의도적인 첨언입니다. 이것은 그 땅에서 아브람의 정착이 쉽지 않을 것을 예고합니다.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12:7-9)

하나님 나라는 복의 나라입니다. 생명의 나라입니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로 처음부터 한정되지 않고 생명의 하나님께 반응하는 이는 누구든 차별없이 누리는 생명입니다. 축복은 축복으로, 저주(사망)는 저주로 돌려받는 나라입니다. ‘나’를 떠난 ‘우리’가 되는 나라입니다.

7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7-9)

하나님께서는 상수리나무 아래서 아브람에게 나타난 그 땅을 그의 후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추정컨대, 표면적으로는 이 장면이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최초의 신현이지만, 우르에서 이미 그에게 나타났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브람은 그곳에서 가나안에서의 첫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는 가나안의 제단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제사를 바치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8절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제사는 자연히 수반되었을 것입니다. 이 첫 제사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뒤 바친 첫 제사를 연상시킵니다. 노아가 새로운 땅에서 제사와 더불어 새 출발하였듯이, 아브람 또한 새로운 땅에서 제사와 더불어 새 출발을 합니다. 아브람은 거기서 벧엘을 향해 옮긴 뒤 벧엘 동쪽 산에 장막을 칩니다. 벧엘과 아이의 중간 지점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는 벧엘 동쪽으로 약 3km 정도에 위치합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다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고는 남쪽의 네겜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가나안 북부에서 중부, 남부까지 모두 여행합니다. 아브람의 이런 여정은 분명히 섭리적입니다. 장차 그의 후손은 그가 최초로 여행했던 가나안의 모든 지역을 차지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나라는 복읨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서로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나입니다. 상대방의 저주를 통해 나만 서려는 이가 들어설 수 없는 나라입니다. 나를 버리고 주께 순종할 때 참여할 수 있는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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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1-02)


은혜와 구원과 소망의 족보

창세기 11장 10-30절


바벨탑 사건 이후 흩어졌던 민족들 중에 ‘아브람’까지 이어지는 셈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는 하나님의 언약이 노아와 셈을 거쳐 어떻게 ‘아브람’까지 이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반역의 세계에서 자멸의 길을 가는 인간들에게 보이시는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줍니다.

 

새로운 족보와 더불어 서사의 무대가 바뀝니다. 이것은 택자의 계열인 셈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의 등장을 소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12장에서 등장할 아브람의 뿌리를 직전에서 추적합니다. 셈의 후손들은 많은 자녀를 낳았지만, 비택자의 후손들은 모두 쳐지고 하나의 선택된 계열만이 이어집니다. 마지막에 데라의 등장과 더불어 셈의 족보는 마무리됩니다.

 

셈에서 아르박삿까지(10-15)

셈의 족보는 단순한 아브라함의 가계도가 아니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보여줍니다. 섬과 탑을 쌓아 인간의 힘을 결집하려 시도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심판 중에도 구원의 약속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죄인이던 우리가 하나님 백성으로 살 수 있습니다.

10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11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2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13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15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10-15)

셈의 족보가 여기에 등장하는 이유는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등장을 준비하기 위한 무대이자 혈통적 배경입니다. 셈은 100세 되던 해, 곧 홍수 후 제2년에 아르박삿을 낳았습니다. 아르박삿이 태어난 해에 대한 언급은 앞선 창세기의 기록과 모순되어 보입니다. 5:32에서 노아는 500세였을 때, 셈과 함, 야벳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7:6에서 홍수가 왔을 때 그가 600세였습니다. 그때 셈의 나이는 100세입니다. 여기서는 100세 되던 해가 홍수 후 2년째라고 언급하기에 모순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야벳이 장남이었으며 그가 노아 500세에 태어났다고 추론합니다.

10:21의 ‘야벳의 형’이라는 히브리어 어구는 ‘형인 야벳’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경우 5:32에서 노아 500세에 낳은 아들들의 실제 출생 순서는 야벳, 셈, 함일 것입니다. 야벳과 셈의 나이가 두 살 터울이라면 이 문제가 깨끗이 해결됩니다.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았으며 셀라는 에벨을 낳습니다. 에벨은 매우 중요한데, 앞서 말한 대로, 히브리인 명칭의 기원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5장에서 인간 수명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사실입니다. 5장에서 장남 출산 시의 평균 나이는 156세, 장례 시의 나이는 858세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은 각각 36세와 300세로 급격히 줄어듭니다. 특히 그들이 첫 아들을 낳는 나이는 30대로 일반적인 관례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날이 120년이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되고 있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120년을 홍수 때까지 남은 기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홍수 심판과 더불어 이후의 수명 심판이 선고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실제로 인간의 수명은 11장 내에서도 점점 급속도로 줄어갑니다. 평균을 따지자면, 아르박삿부터 에벨까지 수명은 약 450년, 벨렉부터 스룩까지 수명은 약 250년으로 무려 200년이나 줄어듭니다. 셈은 600세에 죽지만, 족보의 마지막 인물 데라의 사망 연령은 205세에 불과했습니다. 이 연령은 뒤로 갈수록 줄면서 오경의 마지막 인물 모세가 예고된 인간의 수명인 120세에 죽습니다. 모세 이후 모든 인물의 연령은 120세 이하입니다.

 

에벨에서 데라까지(16-26)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세 아들들 가운데 셈을 선택하시고, 에벨의 아들들 가운데 벨렉을 선택하십니다. 욕단은 바벨의 아들들 가운데 벨렉을 선택하십니다. 욕단은 바벨의 길을 가지만, 벨렉은 하나님 경외의 길을 갑니다. 아담의 열째 후손으로 노아가 나온 것처럼, 셈의 열째 후손으로 아브람이 나옵니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 주권의 역사입니다.

16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17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8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고 19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고 21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2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고 23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4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25데라를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16-26)

앞서 말한 대로 연속되는 택자의 계보에서 에벨은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벨렉을 낳습니다. ‘분리, 나눔’을 뜻하는 그의 이름은 10:25에서 진술된 대로 세상의 나누어짐을 반영한 이름입니다. 이것은 벨렉의 탄생과 더불어 택자와 비택자가 나뉘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벨렉은 선택된 계보를 이어가고 그의 동생 욕단은 선택되지 못한 계보를 이어갑니다. 벨렉은 르우를 낳았는데, 르우는 성경 전체에서 여기에서만 언급되는 감춰진 인물입니다. 르우는 스룩을 낳았습니다. 이 인물 역시 하란 지역에서 비슷한 지명은 발견되었으나 역사적 실체를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스룩이 낳은 나홀이란 인물의 이름은 중요합니다(22). 그는 아브람의 할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브람의 친형제 중 하나 역시 그 이름이 나홀입니다(26). 나홀은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를 낳았습니다. 데라라는 이름 또한 그것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셈족인 아모리식 이름이라는 사실이 어느 정도 확인되었으며, 비슷한 이름을 가진 유적지도 발견되었습니다. 셈의 족보와 더불어 아브람이 등장하기 전 인류의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태고의 인간 역사는 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아브람의 등장이 필요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다음은 월키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용서의 패턴을 정리한 도표를 새로 각색한 것입니다.

 

데라의 족보(27-30)

데라의 후손을 기술하며 다음 이야기에 등장할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특히 사래가 임신하지 못해 자식이 없었다는 기술은 데라의 열째 가족을 채우실 하나님을 기대하게 합니다. 사망 아래 있는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람과 사래를 통해 이어질 것을 보여줍니다.

27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28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29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30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27-30)

여기서 셈의 족보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족보가 시작됩니다. 이번에는 데라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는 11:27-25:11에 절친 긴 아브라함 이야기를 포괄합니다. 이 새로운 톨레도트 단위의 주인공이 아브라함이기에 이 이야기가 ‘아브라함의 족보’라는 제목으로 도입되지 않는 것은 난제입니다. 그러나 웬함은 데라가 70세에 아브람을 낳은 후 135년을 더 살다 205세에 죽기 때문에 아브라함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까지 생존한 인물로서 이 죽보의 주인공이 될 사격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사실상 창세기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이 족보의 제목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수수께끼입니다. 데라는 세 아들인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습니다. 이것은 출생 순서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아브람’의 이름 뜻은 ‘높으신 아버지’ 혹은 ‘아버지는 높으시다’란 뜻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가리킬 수 있으나, 단순히 위대한 아버지나 조상 혹은 귀족 집안을 뜻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약간 개명된 그의 이름 ‘아브라함’에 ‘많은 자(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특이하게 하란에게서 롯이 태어난 것이 언급됩니다. 하란은 우르에서 일찍 죽는데(28), 그 후 아버지를 잃은 롯이 고인이 된 아버지 하란를 대신하여 데라 아래 있다가 데라가 죽은 후 아브람에게 입양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롯이 아브람과 계속 동행하는 이유이며, 여기에 특별하게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란이 죽은 고향 우르의 위치를 둘러싼 논쟁이 매우 치열했지만, 이 우르가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우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갈대아의 우르는 주전 삼천 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의 유명한 도시 국가가 분명합니다. 우르는 하란과 더불어 달의 신인 신(Sin)을 숭배하는 중심 도시였는데, 아마 데라의 가족들 또한 이 우상을 섬겼을 것으로 추론됩니다(여호수아 24:2,15). 그들이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데라의 후손 라반의 집에서 드라빔을 숭배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창세기 31:30-32).

참고로 이곳의 ‘갈대아’라는 명칭은 아브라함 시대에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갈대아인들은 주전 천 년경에 바벨론 지역에 등장했으며, 그 이후에 그 땅이 갈대아로 불리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세오경을 전수받은 후대의 어떤 사람이 오경을 읽는 후대의 독자들이 지리적 배경을 이해하도록 추가 설명을 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추가적인 계시에 의한 성경 본문의 보완은 구약의 정경이 최종적으로 완성되기 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 아브람 이야기에서 등장할 ‘단’이라는 지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하는데, 사래는 그의 의붓 누이였습니다. 두 사람의 아버지는 데라지만 배다른 남매였던 것입니다. 나홀은 밀가와 결혼하는데, 그의 형제 하란의 딸입니다. 즉, 나홀은 조카와 결혼한 것입니다. 하란은 밀가와 더불어 여기서만 등장하는 다른 딸 이스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웬함은 레위기에서(18:8; 20:17) 친누이나 반누이와의 결혼은 금지되지만 조카와는 가능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레위기 법은 삼촌 관계인 이모와 고모와의 결혼을 금지하는데, 여기에는 역시 삼촌 관계인 조카와의 혼인 금지가 포함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만 레위기 법 이전 구약의 족장 시대에는 레위기에서 금지된 관계의 결혼들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나홀은 여덟 명의 아들을 낳는데, 그중 한 명이 라반과 리브가의 아버지인 브두엘입니다. 라반과 리브가는 나홀의 손자와 손녀입니다. 사래가 임신을 하지 못했다는 보고와 더불어 11장이 마무리됩니다. 모든 후손들이 자녀를 낳았다고 보고하고 있는 가운데 사래의 불임에 대한 보고는 눈에 띕니다. 이 불임 소식은 다음에 전개될 아브람 이야기에 긴장감을 더합니다.


바벨탑 시간 이후 민족과라가 나뉘고 혼잡한 세상이 되었어도, 하나님의 약속은 줄기차게 이어져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위험과 위기와 거센 도전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 역사는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를 믿으며 신앙의 계보를 이어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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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1-01)

 


바벨탑 이후 분산된 인류

창세기 11장 1-9절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욕망은 어디서 멈출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시도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입니까? 자기 생존의 기반을 구축하려는 망상은 얼마나 지속된 것입니까? 본문은 인류 역사가 추구해온 배반과 반역의 역사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타락으로 인해 이미 죄성이 유전되는 인간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려는 의지를 가졌습니다. 특히 홍수 후에 인간이 다시 번성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또 다시 그 교만성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이때까지 온 땅의 많은 종족들이 갈라져서 살았으나 아직은 구음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는 야심과 흩어짐을 면하려는 계획으로 바벨탑을 건설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여 하나님께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시날 평지로 이동한 인류(1-2) 

인류는 시날 평지를 만나 큰 도시국가와 같은 성을 쌓고 거대한 탑을 건설합니다. 심판에 대한 저항이며,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주 되심을 부정하고, 복 주심을 욕망의 도구로 삼는 인간의 교만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벨 성의 균열을 위해서는 세상을 배신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1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1-2)

창세기 11장은 시간적으로 인류가 흩어지는 것을 보고하는 10장에 앞서 발생한 사건으로 보여 집니다.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을 부르는 12장을 준비하기 위해 12장의 무대로 11장을 여기에 배치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과학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리든지 당시 온 인류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사실 언어학적으로도 인류의 6천여 개의 언어는 결국 한 뿌리, 즉 단일 기원을 가진다는 견해가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는 표현에 대해 해밀턴은 당시 언어는 세계 공용어(언어)와 통상어(말)로 구분 되었기에 둘은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민족들은 고유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당시 언어가 하나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중복어법일 뿐입니다.

인류는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에 정착했습니다. 구약에서 언제나 ‘아무개가 자리 잡았다/거류했다’는 표현이 나올 때는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징조입니다. ‘동방’은 단순한 방향 지시만은 아닌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의 움직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시날 땅은 구약에서 부와 권세를 상징하는 땅이었습니다. 예컨대, 여호수아 7:21에서는 여리고 성의 헤렘으로 바쳐진 모든 물건들에서 아간이 훔친 장물 목록에 시날에서 생산된(시날 산) 옷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바벨 지역이 높은 수준의 산업과 문화를 지녔음을 엿보게 합니다.

 

바벨탑 건축과 인류의 결집(3-5)

반역을 꾀할 수 없는 원인이 한 언어에 있음을 아시고 언어를 섞어놓으십니다. 언어의 혼란은 힘을 분산시켜 악의 응집력을 약화시켰고, 국가 단위로 견제와 경쟁을 유발시켜 통합된 거대 제국의 출현을 막았습니다. 잘못된 도모에 대한 심판이자 세상을 보존하시려는 온혜로운 조치입니다.

3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3-5)

시날 평지에 집결한 인류는 거대한 성을 쌓아 강력한 제국을 구축하길 꿈꿨습니다. 대규모 도시 건축 공사가 시작됩니다. 그들은 돌을 대신해서 단단한 벽돌을 구웠으며 진흙 대신 역청을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진흙이 아닌 역청으로 벽돌을 구웠다고 이해해선 안 됩니다. 진흙으로 번역된 ‘호메르’는 진흙뿐 아니라 회반죽을 의미합니다. 역청은 원유가 분출되는 지역에서 채취한 현대의 콜타르나 아스팔트로 보입니다. 이것을 벽돌 사이에 발라 단단히 붙게 만듭니다. 벽돌 건물에서는 회반죽보다 역청이 훨씬 더 건물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산이 거의 없이 광활한 평지가 펼쳐져 건물도 대부분 돌이 아닌 벽돌로 지었습니다. 반면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신전을 비롯한 건축물에 돌을 사용하면서 돌들 사이와 벽면에 회반죽을 발랐습니다. 역청을 바르며 벽돌로 올린 건물은 대단히 견고하여 오늘날에도 그런 건물 유적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도록 올리려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지지 말자’고 뭉쳤습니다. 이것은 대도시 건축입니다. ‘탑’은 아마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지구라트라는 신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신에게 올라가 신이 그 신전에 내려오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이름을 내자’고 선언합니다. 문자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해 이름을 만들자’는 뜻입니다. 이름의 히브리어 ‘셈’은 노아의 선택된 계열의 아들 셈과 동일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업적을 이루어 자신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의 선택된 계열의 이름을 셈으로 지어놓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계보를 통해 그들의 이름을 높이는 위대한 일을 할 것임을 시사 합니다.

또한 인간은 ‘흩어짐을 면하자’고 말하며 뭉칩니다. 인간은 흩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흩어짐은 힘의 분산을 의미하며 소통과 문명의 구축에 효과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육과 번성을 통해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규례와 명령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행위입니다.

 

언어의 혼잡과 인류의 분산(6-9)

바벨은 음행의 포도주로 유혹하는 음녀의 도성이요, 인간 정신과 문명이 집결되는 곳이자 유례없는 번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은 무너질 것이고 세상의 왕들과 상인들은 울게 될 것입니다. 음녀의 미혹에 취하지 말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기 바랍니다.

7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7-9)

하나님께서 지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인동형론적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내려다보셨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내려오심’이라는 표현에는 인간의 시도에 대한 비아냥이 엿보입니다. 인간들은 엄청난 노력으로 탑을 높이 쌓았으나 정작 하늘에서는 그 탑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에 하나님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한 업적은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내려온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비웃습니다.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하늘에 계신 이가 옷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편 2:1,4). 인간은 하늘에서 볼 때 메뚜기 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이사야 40:22).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헛된 망상과 도전을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혈통의 분산이 아닌 보존을 추구하며 단일 대오를 형성하려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강제로 흩기로 결정하십니다. 이들의 행동은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만일 이대로 두면, 인간은 통제 불가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무한히 정당화될 수 없으며 제약되어야 합니다. 계획과 행동에 제약이 없으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인간에게는 선악과의 제재가 필요하고 율법과 계명의 규제가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제재를 가하시어 인간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없게 하는 것처럼 하늘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내려가서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자’고 말씀하십니다. 혹자는 5절에서 이미 내려오신 하나님이 여기서 다시 내려온다고 말하는 것을 모순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이것은 신인동형론적 표현의 문학적 기법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상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계시고 그것을 통제하며 간섭하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자(천사)를 지상에 보내어 모든 것을 통제하십니다. 지상도 하늘 왕이신 하나님의 창조의 제국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우리가’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천사들과의 천상 어전회의의 언어 형식을 사용하나 이것은 천사들과의 협의에 의한 결정이 아닌 하나님의 자기 결정권의 행사입니다. ‘우리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는 표현은 분명히 ‘우리가 벽돌을 굽자’는 것과 대조됩니다. 인간은 벽돌을 구워 흩어짐을 면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갑작스런 언어의 혼잡으로 그들은 더 이상 단합하면서 건축 공사를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언어의 분산은 힘의 분산입니다. 이로써 흩어짐을 면하고자 했던 자들이 흩어집니다. 그들이 가장 원치 않았던 결과가 발생했습니다. 여태까지 추방과 멀어짐은 언제나 죄의 결과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고 가인이 또한 그러했으며, 이제 시날 땅의 인류가 그러합니다. 여기서 도시 건설의 중단만 언급되고 탑에 대해 침묵하는데, 탑보다는 분산을 거부한 거대한 도시의 건축 자체가 하늘을 향한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영원한 제국을 만들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 했습니다. 시날 땅의 이름이 바벨로 명명되었습니다. 이 이름의 기원이 언어 혼잡 때문이었다는 원인론적 설명이 덧붙여집니다. 여기서 ‘바벨’에 ‘혼동’, ‘섞임’이란 의미가 부여되었으나, 원래 이 이름은 아카드어 ‘밥일루(Bab-ilu)’에서 기원했습니다. 일루(ilu)는 무슬림의 신 알라의 정확한 이름 하일라(‘그 신’)에서 보듯이 ‘신’이란 뜻입니다. 밥일루는 ‘신의 문’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기자는 바벨이란 이름과 ‘뒤섞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발랄’을 연결시켜 거기에 ‘혼동’, ‘혼란’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바벨의 언어 분산이 일시적으로 원 상태로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사도행전 9장). 천하 각국에서 온 예루살렘 방문객들은 마가 다락방에서 터져 나온 소리를 마치 한 언어로 소통하는 것처럼 모두 자기 지역의 언어로 들었습니다. 복음이 한 언어로 전파되었습니다. 이로써 인간 나라의 건축이 좌절되도록 언어가 분산되었으나, 하나님 나라 건축을 위해 언어의 장벽이 사라졌습니다.


높으신 하나님을 묵상하지 않을 때 인간의 성취는 높아 보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할 때 인간의 문명은 크고 위대해 보입니다. 하지만 창조와 구원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인간 역사의 크기는 바르게 보이고, 인간의 망상이 다다르게 되는 결과를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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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10-01)


노아 아들들의 족보

창세기 10장 1-32절


창세기는 열 개의 족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족보 기록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특정적인 점, 반복되는 강조점, 배열의 순서, 기록된 인원의 숫자, 구성 방식 등을 세심히 따져 보아야 합니다. 노아 후손의 이름과 그들이 거한 곳, 성향들을 볼 때, 족보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서사는 새로운 족보로 전환됩니다.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입니다. ‘홍수 후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명령대로 노아의 후손들이 세계로 번성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32절에서 다시 언급되면서 이 후손의 번식이 홍수 후의 축복의 결과임을 말해줍니다. 노아의 아들들은 홍수 이후에도 셋만 등장하며, 이 세 아들을 통해 온 민족들이 기원했습니다.

 

야벳의 족보(1-5)

야벳의 아들 마대는 메데를, 야완은 헬라를, 달시스는 서반아 남방 가리킵니다. 함의아들로 구스는 에티오피아를, 마즈라임은 이집트를, 가나안은 팔레스타인을 많고, 니므롯이 특징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셈의 아들들은 아라비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거주합니다.

1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2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3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4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5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1-5)

노아의 세 아들인 셈, 함, 야벳의 족보가 설명됩니다. 2절에 야벳의 일곱 아들들이 나열됩니다. 그는 손자도 일곱입니다. 첫 아들 고멜은 에스겔 38:6에서 바사와 구스와 함께 곡의 연합군을 형성한 민족으로 언급되는데, 이들은 러시아 남부에서 살았던 키메르족(Cimmerian)이며 인도 유럽 계통의 민족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주전 7-8세기경에 아시리아에 상당한 압박을 가하다 소아시아의 갑바도기아에 정착했습니다. 마곡에 대해 요세푸스는 이들을 시키티안족(Scythian)과 동일시하나 분명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은 리디아와 관련시킵니다. 마대는 아시리아 본문에 나타나는 인도 유럽 계통의 민족으로 후대에 이란 북서부에 거주한 메대 사람들입니다. 야완은 이오니아의 그리스인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입니다(에스겔 27:13; 이사야 66:19; 다니엘 8:21;10:20). 두발과 메섹은 에스겔에서 여러 번, 나란히 언급됩니다(에스겔 27:13; 32:26; 38:2-3; 39:1). 이들은 중앙과 동부의 아나톨리아에서 거주했는데, 그들을 티바레노이 (Tibarenoi=Tiberia)와 모스코이(Moschoi)로 불렀습니다. 디라스(대상 1:5)는 아마 에게 해 지역에서 온 해양 민족인 투르크샤족(Turcsha)일 수 있습니다. 3절에서 고멜의 세 아들이 소개됩니다. 아스그나스(역대상 1:6; 예레미야 51:27)는 남부 러시아에서 온 스키티아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리밧은 몇몇 추정된 민족이 있으나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도갈마(에스겔 27:13-14; 38:3-6)는 시리아 북쪽의 카르케미쉬(갈그미스) 지역에 거주했던 아르메니 안족으로 보입니다. 야완의 아들들은 넷입니다. 엘리사는 헬라족의 한 혈족인 엘리스족으로 추정됩니다. 해양 민족인 그들은 사이프러스 섬 지역에 거주했습니다(역대상 1:7; 에스겔 27).

달시스는 요나서에서 다시스로 번역되었습니다(요나 1:3; 4:2). 오늘날 스페인 지역입니다. 깃딤은 사이프러스(구브로) 섬으로 간주됩니다(이사야 23:1, 12; 예레미야 2:10). 이 섬은 사도행전에서 자주 등장한다(사도행전 4:36; 11:19; 13:4; 21:16). 도다님은 두로 북쪽의 거주민인 다누나족(Danuna)일 수 있습니다. 야벳의 후손은 여러 민족으로 나뉘어서 나라를 구성했습니다(5). 야벳의 후손은 주로 바닷가 땅에 자리를 잡았는데, 히브리어 이는 섬뿐만 아니라 해변과 연안 지역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들은 무역에 능한 해양 세력을 구축했으나 야벳 후손의 분포 지역은 이보다 훨씬 넓었습니다. 한편, 이렇게 여러 민족들과 나라로 나뉜 상황은 바벨탑 사건이 이미 발생했음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10장은 바벨탑 사건 이후의 세계와 민족의 상황으로 보아야 합니다. 서사의 시간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함의 족보(6-20)

70명 숫자는 완성될 인류를 대표합니다. 노아를 통해 옛 인류를 완성하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새 인류를 짓길 원하셨습니다. 70인 전도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백성으로 온 땅을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새 인류 창조의 역사에 참여해야 합니다.

6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13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4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더라) 15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16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17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18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19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20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6-20)

 족보 중간에 함의 자손 가운데 니므롯의 업적과 그의 성을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이는 그가 시날 땅 바벨 성의 주인이며 다른 주변 지역들에 영향을 미친 자로서 바벨탑 사건(11:2)과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 구스의 후손(6-12)

함의 네 아들이 소개됩니다. 구스는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지역 종족입니다. 구스는 흑인들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예레미야 13:23). 미스라임(미츠라임)은 이집트를 뜻하는데 쌍수인 이유는 그 지역이 나일강 하류의 상이집트와 상류의 하이집트로 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붓은 리비아족으로 추정됩니다(나훔 3:9). 가나안은 가나안 지역에 넓게 분포한 인종인데 주로 지중해 연안 쪽에 거주했습니다. 가나안은 여러 종족으로 나뉘었습니다(15). 구스의 아들들은 모두 남부 아라비아 일대에 자리 잡았습니다. 하월라가 2:11의 에덴 근처의 그곳과 동일한 지명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곳이 남서부 아라비아의 어느 장소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창세기 25:18; 사무엘상 15:7). 8절에서 독자들의 주목을 끄는 인상적인 진술이 나타납니다. 구스에게서 니므롯이란 고대의 영웅이 태어났습니다. 니므롯이 그가 ‘첫 용사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용사로 군림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는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으로 유명했습니다. 문자적으로 ‘사냥의 용사’ 인데 강조점은 ‘용사’를 뜻하는 ‘기보르’에 있습니다. 그 용사이며 사냥에도 매우 능숙합니다. 사냥은 그의 호전적인 성향을 잘 드러냅니다. ‘여호와 앞에서’는 그가 여호와의 인정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 아래 용감한 사람’과 같이 최상급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는 시날 땅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병합해서 대제국을 이루었습니다. 시날은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 지역을 가리키는 관행적 용어입니다(창세기 11:2; 14:1,9; 여호수아 7:21; 이사야 11:11; 다니엘 1:2; 스가랴 5:11). 시날 땅의 그의 제국은 바벨, 에렉, 악갓(아카드), 갈레로 구성되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남쪽의 시날(바벨론)에서 북쪽의 앗수르(아시리아) 지역으로 진출했습니다. 앗수르에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 레센을 건설했습니다. ‘이는 큰 성읍’이라는 수식어는 히브리어 문장으로 볼 때 앞의 성들 중 어느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레센일 수도 있으나 니느웨의 위상과 이 성에 대한 요나서의 인상적인 묘사를 볼 때 니느웨로 볼 수도 있습니다.

(2) 미스라임과 가나안의 후손(13-20)

미스라임의 여러 후손들이 나열됩니다. 이들은 주로 이집트에 자리 잡았으며, 그 외 지중해 섬들과 해안 지역에 널리 분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슬루힘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으나 갑도림 (갑돌)은 크레타 섬에 거주하는 크레타 인을 가리킵니다. 후대에 아모스 9:7에서는 블레셋이 갑돌에서 나왔다고 말하며, 그들은 갑돌 섬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예레미야 47:4). 가슬루힘과 갑도림(갑돌)이 나란히 배치된 것으로 보아 둘 다 타당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은 주로 페니키아 연안의 해안 지역에 거주했습니다. 장자 시돈은 두로와 더불어 페니키아(베니게)의 핵심 도시국가였습니다. 헷은 거대한 히타이트 제국을 이룬 히타이트 족과 다른 종족일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족장 시대에 가나안의 주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창세기 23장 외). 여부스 족은 유명한데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에 거주했습니다. 그 외 가나안의 아들들은 나중에 가나안의 여러 종족들을 구성합니다. 그들의 경계는 주로 가나안 땅 서편의 지중해 연안과 소돔과 고모라 일대입니다.

 

셈의 족보(21-32)

큰 성읍들을 건설했다는 표현은 힘과 잔악함을 노래했던 라멕을 연상하게 합니다. 가인의 후손에게 역사했던 어둠의 세력이 새 인류 가운데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시날 땅, 바벨의 정신으로 구축되는 세상에서 주를 따라 십자가 승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니므롯을 세상의 첫 용사로 언급합니다. 

21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22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23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24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25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26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하살마웨ㅅ)과 예라와 27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30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31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32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21-32)

맨 마지막으로 셈의 후손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셈의 첫 번째 아들 엘람의 후손인 엘람 족속은 바벨론의 동쪽에 있는 산지에 거했습니다. 앗수르는 앗수르 지역과 그곳의 거민들을 칭하는 이름인데, 함족인 니므롯은 앗수르에서 여러 성읍들을 건설한 적이 있습니다.

(1) 아람과 아르박삿의 후손(21-24)

가장 중요한 택함을 받은 자 계열인 셈의 후손이 나열됩니다. 그러나 셈의 후예 중에서도 택자의 계보는 아르박삿과 에벨, 그리고 벨렉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특히 서두에서 이미 야벳의 형제 셈이 그의 손자인 에벨의 조상으로 소개됩니다(21). 참고로, ‘야벳의 형’이란 표현은 '형인 야벳'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하게도 에벨은 히브리인을 뜻하는 말의 어원입니다. 셈은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엘람, 앗수르, 아람은 고대 중동의 막강한 제국을 이룩한 민족들입니다. 에벨로 이어지는 셋째 아들 아르박삿에 대해서는 11:10을 보시길 바랍니다.

(2) 에벨의 후손(25-32)

히브리인의 조상이자 그 이름의 어원이 된 에벨은 벨렉과 욕단을 낳습니다. 벨렉의 이름 ‘펠레그’는 ‘분리하다’를 뜻하는 팔라그에서 파생한 이름으로 ‘분리’, ‘나눔’을 뜻합니다. 이때 세상이 나뉘었다는 것은 분명 바벨탑 사건을 가리킬 것입니다. 벨렉의 후손은 11:18 이하에 나열되며 그 계보를 통해 아브라함이 출생합니다. 여기서 셈의 계보는 선택되지 못한 자들(예. 욕단에서 요밥까지, 10:26-30)과 선택된 자들(예. 벨렉에서 아브라함까지, 11:18-26)로 나뉩니다. 욕단을 통한 셈의 비택자 계보는 바벨탑 사건으로 이어지고 벨렉을 통한 택자인 셈의 후손들은 별도의 족보로 편성됩니다. 욕단(요크탄)의 이름 뜻은 분명하지 않으나 ‘작다’라는 뜻의 카탄과 관련되어 ‘작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욕단의 아들들은 남부 아라비아 부족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중요한 거주지인 오빌과 하월라는 금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열왕기상 9:28; 10:11; 22:48; 역대상 29:4; 욥기 22:24).


여러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가 사라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이는 이름을 잇고, 그러지 못한 이는 족보 기록을 끝으로 역사에서 퇴장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이는 주인공으로 부각되지만, 불의한 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당신은 어떤 족보에 이름을 남기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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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9-02)


 가나안에 대한 저주

창세기 9장 18-29절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복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인간은 존재의 무의미를 느끼는 순간 절망하기에, 존재의 충만한 가운데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는 의미 있는 생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후회 속에 생을 마치지 않고 만족할 만한 인생이 되지 위해 필한 것은 무엇입니까?

 

세 아들로부터 인류가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불과 여덟이었지만,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사방에 퍼졌다는 것은 번성의 축복과 명령의 성취입니다. 세 아들에게 어쩌면 각자 어린 자녀들이 있었는데, 승선 명단에서 무시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이 모두 연루된 커다란 사건입니다.

 

포도주에 취한 노아(18-21)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 비난하는 데 함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의롭다 칭함 받은 노아와 그 자녀들의 삶은 인간에게는 어떠한 소망도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 줍니다. 우리의 본성적 죄악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주님의 덮어 주시는 은혜만을 간구하게 합니다.

18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18-21)

방주에서 나온 사람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함이 가나안의 아버지라는 점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온 세상의 백성들이 생겨납니다. 셈의 자손들은 아브라함의 본적인 셈족입니다.

노아의 세 아들 이름은 앞서 반복적으로 소개되었습니다(5:32; 6:10; 7:13). 여기서 그들의 이름 뜻을 살펴보는 것은 그들의 미래와 관련하여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함’에 대한 별도의 논평을 주목해야 합니다.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로 소개됩니다. 이것은 의미 없는 논평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 아들에게서 이제 인류가 퍼집니다. 이것은 노아에게 주신 축복과 명령의 성취입니다.

노아는 최초로 포도 농사를 시작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20). 그가 포도 농사를 시작했다는 것은 포도 열매의 제조도 그가 시작했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먹거리를 위한 단순한 농사가 아닌 삶의 즐거움을 주는 기호식품을 재배하기 시작합니다. 원문에 따르면, ‘땅의 사람 노아가’인데 노아에게 ‘땅의 사람’이라는 특이한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노아가 땅의 저주로부터 사람을 위로하기를 기대했던 아버지 라멕의 바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노아의 포도 수확은 3장의 땅의 저주가 풀릴 것이라는 8:21의 성취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8:21에서 설명한 대로, 그 ‘저주’는 3장의 땅의 저주가 아니라 홍수 심판에 의한 생명의 멸절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저주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3장의 땅의 저주는 풀리지 않았으며 여전히 유효합니다. 노아는 최초의 포도 재배자이면서 포도주 제조 기술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막사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한 채 벌거벗고 잠들었습니다. 언뜻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아가 포도주를 마셨지만 취하지 않은 채 잠들었을 뿐이라고 해석하지만, 본문은 명백하게 ‘노아가 술에서 깼다’고 진술합니다(9:24). 범죄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명백히 노아의 술주정이며 하체를 드러낸 행위는 구약 전반에서 비난을 받습니다. 풍성한 포도주는 축복이 분명했지만(창세기 19:31-35; 27:28; 49:11; 신명기 14:23; 사사기 9:13; 시편 104:15; 전도서 10:19; 요엘 3:18) 과음으로 인한 술 취함은 중대한 범죄였습니다(사무엘상 1:14; 잠언 20:1; 23:31; 이사야 28:7). 노아의 만취는 그저 노아 역시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드러냅니다. 노아는 새로운 인류지만 여전히 아담의 후손입니다. 따라서 노아의 당혹스러운 방종과 만취를 이상하게 볼 것은 아닙니다.

  

함의 범죄와 셈과 야벳의 선행(22-23)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며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했을 삶이었을 텐데도, 먹고 마시며 깨닫지 못했던 홍수 전 사람들의 모습으로 점점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무서운 심판과 큰 은혜를 경험하고도 인간은 이렇게 늘 깨어 있기가 어렵니다.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망각한 채 세상일에만 취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입혀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성령에 취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22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22-23)

함은 만취한 채 벌거벗고 잠든 아버지의 하체를 목격했습니다. 여기서도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 함’으로 언급됩니다. 본문은 왜 노아가 술에 취해 하체를 노출하며 수면을 취하게 되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노아의 방종보다는 함의 행동에 있습니다.

술 취함과 하체 노출은 노아의 실수일 수 있지만, 함의 행동은 실수로 볼 수 없는 큰 범죄입니다. 부모 공경은 자녀의 의무이며 십계명의 제4계명에도 명시될 만큼 중요합니다. 어떤 우가릿 문헌에 의하면, 아버지가 술 취했을 때 아들은 아버지를 부축해서 데려가 잘 쉬도록 편한 곳에 모셔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감추어주어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함의 행동은 정말 패륜적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하체(‘벌거벗음’)를 보았습니다. ‘벌거벗음’은 성기 노출에 대한 완곡어법입니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본 것을 두고 과도한 추론적 해석이 난무했습니다. 어떤 랍비들과 해석가들은 여기서 함이 아버지와 동성의 근친상간을 시도했다는 지나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반면에 월키는 함의 일차적인 문제가 ‘그가 보았다’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범죄의 본질은 ‘호색적 관음증’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히브리어 ‘라아’는 단순한 목격이 아닌 관찰 행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 본문의 간략한 보고에서 지나친 추론으로 사건을 재구성한 결과로 보입니다. 본문은 아주 단순하게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우연히 목격한 뒤 그 막사에 형제들을 구경꾼으로 데리고 오려 했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자체만으로도 함의 행동은 중대한 범죄입니다. 이것은 셈과 야벳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는 신중한 행동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 둘은 덮고 잘 수 있는 겉옷을 준비해서 어깨에 멘 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매우 조심스럽게 뒷걸음쳐서 아버지의 막사에 들어갑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24-29)

당신은 누군가의 험담을 듣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소문을 확인하려는 호기심보다 당사자의 명예와 영혼을 더 걱정해 주고 있습니까? 셈과 애벳은 옷을 가져다가 아비의 수치를 가려줍니다. 뒷걸음쳐 들어감으로써 자신들부터 그 수치를 보지 않고 있습니다.

24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24-29)

노아는 술에서 깬 뒤 어떤 이유로 작은 아들(아마 막내 아들)이 저지른 행동을 알게 되었습니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합니다. 여기서 왜 함의 잘못으로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세 아들에 대한 축복과 저주는 결국 그들의 후손들에 대한 것이기에 함 대신 그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함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는데(10:6) 함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그들 중에서 유독 가나안에게 그 저주가 선언되는 것은 분명 불공평해 보이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필자의 견해로 볼 때는 함에게 붙은 특이한 수식어 ‘가나안의 아버지 (함)’에 모종의 암시가 깃들어 있는 듯합니다. 유독 아들 가나안이 함에게 수식어로 붙어 다니는 것을 볼 때, 가나안은 이미 배은망덕한 패륜적 행동을 일삼는 아들이었지 않을까 추론해봅니다. 이러한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는 뱀에 대한 저주(3:14) 및 가인에 대한 저주(4:11)와 연결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게 내려진 저주의 내용은 그가 ‘그의 형제들의 가장 낮은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단수 ‘형제’가 아닌 복수 ‘형제들’이므로 여기에는 셈과 야벳 둘 다 해당합니다. 26절 마지막의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역시 수정되어야 합니다. 이것의 원문도 ‘가나안은 그들에게 종이 되고’입니다. 이것은 27b절에서 세 번째로 확인되는데, ‘가나안은 그의 중에 되기를’도 마찬가지로 수정이 요구됩니다. ‘가나안은 그들의 종이 되기를’, 결국 가나안은 심지 야벳 둘 다의 종이 될 운명으로 전락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26절에서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여기서 선택된 계열인 셈이 재차 확인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셈의 계보를 선택하시고 뱀을 짓밝으신다는 최초의 암시입니다(창세기 3:15; 4:26). 27절의 해석은 난해합니다. 우선 야벳의 창대함은 물질적 풍요보다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인구가 크게 번성한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야벳의 후손은 주로 아나톨리아와 그리스에서 확산했습니다(창 10:2-5을 보라).

이어지는 어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는 오역이므로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합니다. ‘그는 셈의 장막들에 거할지어다’. 문제는 여기서 ‘그’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는 야벳일 수도 있고 하나님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유대 문헌과 해석가들은(예. Kaizer)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역본들과 학자들은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들은 그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셈과 야벳의 후손들이 동거했던 역사적 사례들을 찾아내려 애를 썼으며 다양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제안된 그 어떤 사례도 타당성을 갖지 못합니다. 필자는 첫 번째 견해를 따라 하나님이 주어인 것으로 봅니다. 이 경우 언제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였는지 방대한 역사적 추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성막/성전을 통해 셈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임재하셔서 그들의 장막에 함께하셨습니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아 셈과 야벳의 종으로 전락하는데, 이것을 근거로 과거 흑인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흑인 저주론은 전적인 신학적 왜곡입니다. 함의 네 아들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중에 아프리카 민족은 구스와 미스라임, 붓에 해당될 뿐, 가나안과 흑인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가나안이 셈의 노예가 된 것은 구약 역사 속에서 성취되었습니다(여호수아 15:63; 17:13; 열왕기상 9:21).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우리 생은 하나님 앞에 복됩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과 부르심을 따라 자기 생을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나와 주변 세계를 현상이 아닌 믿음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복 주는 자이며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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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9-01)


노아와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

창세기 9장 1-17절


하나님 말씀이 생명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대로 행하시며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삶을 구성하고, 질서를 만들어내며, 삶을 규정하고 창조하는 능력 자체입니다. 언약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책임에 귀속하시는 위대한 은혜입니다. 언약 백성인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홍수 후의 세계는 재창조된 세계이고 노아는 새로운 아담입니다. 아담에게 부여된 명령이 이제 노아에게 부여됩니다. 이것은 땅을 쟁기질해서 뒤엎은 뒤 새로운 씨앗을 심는 것에 비견될 수 있습니다. 홍수가 물러가고 질서 잡힌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으며, 그 밭에 노아와 생존한 생명의 씨앗들이 심깁니다. 그들의 생육과 번성을 통해 다시 지구는 생명으로 채워질 것이며 새로운 생태계가 조성될 것입니다.

 

인간의 재 번성 명령(1-3)

하나님께서는 끝없는 은혜로 죄를 이기시고 악을 다스리십니다. 악한 세상을 이기는 길은 하나님처럼 행하는 것뿐입니다. 인간은 또 실패하겠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노아를 선택하시고 그와 함께 다시 은혜 언약을 맺으십니다. 인류는 하나님께 두 번째 기회를 받은 것입니다.

1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2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3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1-3)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에게도 다시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1-7절은 창세기 1:28-29의 반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인간에게 복을 주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재차 내리십니다. 이러한 명령은 노아 홍수의 심판을 통해 부패한 세상이 전면적으로 뒤집히고 하나님의 둘째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육식이 공식적으로 허용되고 피 섭취가 금지되며 피의 살육을 한 당사자는 그 피값을 치르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생태계의 변화와 함께 육식이 암묵적으로 허용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목축을 전문적으로 시작하고 제사를 드렸으며, 정-부정 동물이 노아 이전에 이미 구분되고 있었다는 것은 또한 먹을 수 있는 짐승이 원시적 규범으로 나뉘어 있었음을 시사 합니다. 짐승들은 인간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2). 타락 전에 동물은 인간의 통제 하에, 서로 완벽한 교감 속에 공존했습니다. 인간과 짐승 모두에게 채식만이 허용되었기에 약육강식의 세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도,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인간과 동물과 자연의 관계도 깨졌습니다. 특히 짐승은 이때부터 만물의 지배권을 지닌 인간을 두려워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2절의 진술은 홍수 이전에는 인간과 짐승이 평화로운 공존을 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아마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죄가 우주에 들어와 창조 세계에 문제가 생겼고, 아마 동식물의 유전적 변화도 발생하여 육식 동물이 활개를 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때 여전히 인간은 짐승보다 우월했기에 난폭한 짐승마저 통제할 수 있었으며, 짐승은 인간을 언제나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홍수 이후에는 이러한 생태계 질서가 더욱 확고해집니다. 노아의 후손인 새로운 인류는 더욱 강하게 자연계와 동물계를 통제하는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합니다. 육식은 공식화됩니다(3). ‘동물’로 번역된 ‘레메쉬’은 호흡을 하며 움직이는 생물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육식의 허락은, 훗날 율법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되는 바와 같이(레위기 7:15; 신명기 14:21; 에스겔 4:14), 자연사나 물어 뜯겨 죽은 짐승처럼 이미 죽은 짐승의 사체는 먹어선 안 된다는 것을 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도살해서 죽인 짐승은 문제가 없습니다. 육식의 허용이 ‘동물’로 총괄되므로 정-부정 짐승의 구분이 없습니다. 이것은 온 인류를 위한 보편적 육식의 허용일 수 있습니다. 노아의 후손인 인류는 아무 짐승이나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황상 선택된 계열로 이어지는 노아의 가계는 노아 이전의 택자의 가계가 그랬던 것처럼 정결한 짐승을 먹었을 것입니다.

 

피 섭취 금지와 피 흘림에 대한 징벌(4-7)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사랑해야하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 앞에 민감하게 살아야겠습니다. 세상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언약으로 그리고 무지개로 확인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4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5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7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4-7)

노아의 새로운 시작과 함께 언약이 채결되었습니다. 이제 인류에게 여러 가지 의무들을 포함한 언약과 하나님의 약속이 필요했습니다. 인간의 육식에 제한이 가해집니다. 그것은 짐승의 피를 섭취해선 안 된다는 명령입니다. 피 자체를 마시는 경우는 없으며 다만 고기를 먹을 때 피를 함께 섭취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동물의 피를 완전히 빼낸 다음 고기를 먹으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분명히 육식의 허용이 야만적 도살을 허락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목을 따서 피를 안 뺀 짐승이나 피가 덜 빠진 짐승의 고기를 먹으면 피를 먹는 셈입니다. 여기서 레위기에서 여러 차례 반복된 피 섭취의 금지가 최초로 언명됩니다(레위기 3:17; 7:26-27; 17:10-14).

첫째 창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가 금단의 열매로 허용되지 않은 것처럼, 둘째 창조에서는 노아와 가족에게 피가 생명을 상징하면서 금지됩니다. 이 피 금지는 노아와 가족에게 명령한 것이므로 택자 계열은 물론 비택자 계열에게도 유효합니다. 따라서 노아 이후 모든 인류는 원칙적으로 짐승을 피째 먹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노아 이후 비택자인 모든 민족들은 피 섭취에서 자유로웠습니다. 밀그롬에 의하면, 고대 근동 지역의 어떤 민족과 종교에서도 피 금지가 법령화된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피 금지는 이스라엘만의 특유의 율법입니다. 구약 시대에 피 섭취는 분명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관행과 풍속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피는 이미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 이후, 피의 의미와 기능은 모두 성취되었기에 더 이상 피에 그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결정된 우상의 제물과 목매어 죽은 짐승과 피의 섭취 금지는 당시 유대인들을 포교하기 위한 임시적이며 전략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과 바울의 선언대로 신약 시대에는 어떤 것도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으며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지금 우리가 우상의 제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며 자유함 가운데 먹을 수 있고, 목매어 죽인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피마저도 이제 음식으로 가합니다. 생명이 위독하면 헌혈을 통해 몸이 피를 흡수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일 인간의 생명을 누군가가 해하면, 그 살해자가 자신의 생명으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5).

인간 살인자가 되었든 동물 살육자가 되었든 마찬가지입니다. 짐승도 예외가 아닌데, 바로 이런 이유로 후대의 율법은 사람을 들이받은 소는 죽이라고 명령합니다(출애굽기 2:28-29). 동물의 피를 흘릴 수 있으나 피 섭취가 금지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피는 흘리는 것 자체가 금지됩니다.

6절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라는 본문이 해석의 난제가 있지만, 다음과 같이 번역되는 것이 합당합니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그 사람에 의해 그의 피가 흘려져야 한다.’ 이것은 사람의 생명은 그 생명을 해한 사람의 피로 갚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동해동형법처럼 생명에는 생명입니다. 7절에서 다시 한 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노아와 맺은 언약(8-17)

하나님께서는 이제 홍수와 대비되는 최후의 심판이 있기까지(베드로후서 3:1-7) 창조의 갱신을 통해 자연뿐 아니라 인간마저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 약속을 따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오래 참고 기다리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기를 바라십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혈기 있는 모든 생물을 보존하시려는 자신의 의지를 구름 속에 둔 무지개를 통해 드러내십니다.

8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9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10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11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12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13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14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15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16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17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8-17)

이 언약이 우주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표징으로 주신 무지개를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무지개가 수평선 위에 드리우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 사역에 대한 신실하심을 증거 하는 포괄적인 표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표징들은 언약에 참여한 자들에게 언약 규정들을 지켜야 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통해 영원토록 약속하실 것입니다.

(1) 노아 언약의 대상(8-11)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수립하십니다. 하나님과 노아는 최초의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짐승이 언약의 수혜자가 됩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가축을 부리지 말라는 계명에서 가축도 안식일 법의 통제를 받는 것에 비견됩니다. 율법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과 땅, 자연의 영역까지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질서가 실현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2) 언약의 증표 무지개(12-17)

노아 언약은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살아남은 생물과 맺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노아 언약의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무지개입니다. 히브리어 ‘케쉐트’는 ‘활’을 뜻합니다. 여호와는 활을 들고 계십니다.

고대 근동에서 활을 든 신의 모습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신들은 활을 들고 전쟁을 수행하는 용감한 전사입니다. 무지개는 활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활입니다. 여호와는 활을 하늘에 걸어두십니다. 이것은 종전과 평화의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더 이상 활시위를 당기지 않으신다는 표시입니다. 무지개가 활이라면 폭풍우는 화살이었으며 그분은 화살인 폭풍우를 땅을 향해 날려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는 수단으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영원히 노아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어 이제 홍수로 생명들을 멸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노아 홍수 후에 전 지구적 기후 변화가 발생했을 가능성은 큽니다. 그러나 홍수가 그친 후 출현한 무지개를 지구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무지개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노아 홍수 전에도 시간 주기의 기준이 된 태양과 달은 떴습니다. 햇살이 비치는 한 물보라 속에는 어디서나 무지개가 보입니다. 따라서 이 무지개와 관련된 하나님의 약속은 무지개의 새로운 출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무지개를 재해석한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또한 노아 홍수 전에 궁창의 물 층의 존재로 지구가 온화했으나, 그것이 다 쏟아져 태양의 자외선 과다 노출로 인간 수명이 크게 줄었다는 주장 역시 신빙성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순간마다 꺼내 보는 빛나는 보석과 같습니다. 불확실성과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언약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날마다 그 안에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언약의 말씀을 가진 자만이 세상을 이기고 확신 가운데 이 땅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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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8-01)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희생 제사

창세기 8장 1-22절


대홍수 사건은 여러 소설과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지구 멸망이라는 재앙 앞에 인간의 한계와 가족 간의 사랑, 재난 속 희망을 다뤘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인공이시며, 인간 존립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음을 밝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새 세계를 지으십니까?

 

홍수의 기세가 꺾이면서 물이 점점 빠지고 방주가 아라랏 산에 정박합니다. 장대비가 그치고 솟구치던 심연의 샘의 분출도 멈췄습니다. 점차 물이 빠지면서 무질서한 세상이 정돈되기 시작합니다. 호흡을 가진 세상의 모든 생명이 멸절하고 방주에 있는 생명은 살아남았습니다. 노아는 혁신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새들을 보내 지면의 상태를 신중히 살핍니다. 마침내 하선한 노아와 가족들은 먼저 번제를 올립니다.

 

홍수가 멈추고 방주의 정박(1-5)

구원은 하나님의 기억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죄인을 향한 긍휼히 여기심이며 자기 언약을 지키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견디고 있는 백성의 간절함을 잊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혼돈 한가운데 있다면 그분의 사랑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에 있는 노아 가족과 동물들을 기억하시고 물이 빠지게 하십니다.

1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2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3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4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5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1-5)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방주에 탄 모든 사람과 짐승을 ‘기억’하셨습니다. ‘기억하다’는 하나님께서 파괴적인 물의 힘을 되돌려 생명이 거주하기에 적당하도록 땅을 되찾기 위해 개입하신다는 뜻입니다.

폭우는 40일 동안 계속되었고(7:4,12) 물은 110일 동안이나 넘쳤습니다. ‘물이 백오십일을 땅에 넘쳤더라’(7:24). 40일은 때때로 가랑비가 내린 듯한 150일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홍수가 그치고 물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자연적으로 빠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자 물이 물러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빼시는 이유는 방주 안에 탄 노아와 그의 가족 및 모든 생물들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랜 홍수 속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과 모든 생명들을 결코 잊지 않으셨으며, 그들을 소중히 여기시어 홍수가 멈춘 뒤 물이 물러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일으킨 ‘바람’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피조물인 물이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복종합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신들이 홍수를 일으켜놓고 통제를 하지 못한 채 홍수의 위력 앞에서 쩔쩔맵니다. 이 바람을 뜻하는 ‘루아흐’는 분명 창조 사역을 했던 하나님의 ‘영’(루아흐)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이 물러가게 하는 이 바람의 작용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의 재창조 작업임을 암시합니다. 이러한 바람의 작용은 또한 출애굽기에서 홍해가 갈라질 때도 나타납니다(출애굽기 14:26-28, ‘동풍’이 불었다). 따라서 홍해가 갈라진 기적에서도 물을 제압하고 백성을 물로부터 구원한다는 동일한 모티프가 암시되어 있습니다(참조. 여호수아 4:23).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면서 비가 그칩니다(2). 이것은 7:11의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물은 150일 동안 유지되다가 서서히 줄기 시작합니다. 물이 물러가는 것은 물의 세력이 점점 약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물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우주의 질서가 정돈되기 시작합니다. 방주는 아라랏 산들에 정박합니다. 원문은 ‘아라랏 산들’이지만 방주가 정박한 산은 아라랏 산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물이 점차 줄면서 ‘산들의 봉우리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10월 1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노아 홍수가 국지적이었는지 전체적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아라랏 산이 세계 최고봉은 아닙니다. 혹자는 지각 변동으로 지구의 지형이 모두 달라져 현재의 에베레스트 산을 비롯한 고산들이 노아 홍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그들은 그랜드 캐니언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지형적 증거를 내밀면서 홍수는 전 지구적 홍수였다고 주장합니다.

  

물이 걷히고 땅이 마름(6-14)

주님의 부활은 의와 생명의 세계를 보여주는 약속이자, 죽음을 이기는 새로운 생명의 징표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노아보다 더 커야 합니다. 주께서 온전하게 보호하셨기에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첫 창조 때처럼 물의 혼돈을 극복하십니다. 하늘을 드러내 까마귀와 비둘기가 날게 하시며(1:8), 물을 한 곳에 모아 뭍이 드러나게 하십니다(1:9).

6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13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14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6-14)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6)라고, 다시 40일이 지났습니다. 이 날은 600년 11월 10일이며, 웬함의 계산에 따르면, 이날은 주일, 곧 안식일 후 첫날입니다.

노아는 지면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물이 얼마나 물러갔는지 확인하기 위해 까마귀를 보냅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이러 저리 날아다니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까마귀가 왕래했다는 것은 그것이 방주로 돌아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까마귀는 사체를 먹기 때문에 아직 나무가 자라지 않은 환경에서 서식이 가능합니다. 사체를 먹는 습성으로 인해 레위기 11장에서 까마귀는 부정한 새로 취급됩니다.

이어서 노아는 비둘기를 보냅니다. 이것은 집비둘기(요나)를 뜻하는데, 비둘기는 자기 둥지로 돌아오는 회귀성이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노아가 당시 비둘기를 사육했을지는 의문입니다. 짐승들이 노아에게 찾아왔는데, 이 비둘기 또한 사육되지 않은 야생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세 번째 보낸 비둘기는 마침내 돌아오지 않고 새로운 둥지를 틀기 때문입니다. 아마 10절에 비추어 볼 때, 까마귀를 보낸 지 7일 후에 첫 번째 비둘기를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로 노아의 이름과 비슷한 비둘기는 노아의 역할을 대신하는데, 비둘기가 방주를 떠난 뒤 노아 역시 방주를 떠납니다. 과거에 해항하는 함선들이 도착할 육지의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첫 번째 비둘기는 그냥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물이 아직 빠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7일 후, 노아는 두 번째 비둘기를 보냅니다. 그때 비둘기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아마 이것은 나뭇가지로 둥지를 만들려는 비둘기의 본능적 행위였을 것입니다. 나무에서 싹이 덮지만, 둥지를 틀만한 곳은 아직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7일 후에 세 번째 비둘기를 보냈을 때,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둥지를 틀 곳을 찾은 것입니다. 육지의 물이 다 빠진 날은 600년 1월 1일이었으며, 노아는 방주 뚜껑을 젖히고 그것을 확인했습니다(13). 그리고 다시 한 달쯤 지나 육지는 완전히 말랐습니다.

 

방주로부터의 하선(15-19)

하나님께서는 소망 없는 인생을 기억하시고 적절한 은혜를 부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출입을 끝까지 지키실 것입니다. 참혹한 홍수 심판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기억할 것을 요구합니다. 어려움 증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헤를 경험한 것이있을 것입니다.

15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17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18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19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15-19)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방주에 탄 모든 승객들의 하선을 명령하셨습니다. 노아는 땅의 상태를 신중히 살폈지만, 자신의 판단으로 하선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선을 명령하시고 노아는 순종합니다. 노아의 이러한 순종의 모습은 방주를 지으라고 할 때나 방주에 승선하라 할 때도 잘 나타났습니다. 배 안에서 오래 시달렸겠지만 인내하고 순종하며 조급함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주의 승객들이 모두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다시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노아가 번제를 드림(20-22)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노아는 오직 명령을 듣고 따랐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기억하시고 구원하신 것처럼, 훗날 고통 중에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족장들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20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20-22)

하선한 노아는 가장 먼저 여호와께 번제를 바칩니다. 그는 제단을 쌓은 뒤 승선했던 정결한 짐승들과 새들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바쳤습니다. 네 발 달린 짐승들은 소, 양, 염소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 최초의 제단 축조에 대한 언급입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최초 행동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였습니다. 이 번제가 인간의 죄에 대한 속죄의 제물인지, 아니면 홍수를 모면한 노아와 가족의 감사의 제물인지 견해가 양분되지만, 후자가 더 타당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이미 홍수로 심판하셨기에 다른 대속물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제물의 ‘향기를 받으셨다’는 것을 인간의 죄를 용서하겠다는 반응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 반응으로 물로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보는 것은 오류입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제물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흠향하셨으나, 그것과 별개로 노아에 대한 언약의 약속은 홍수 이후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통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1). 혹자는 이것을 3장의 범죄로 인한 땅의 저주가 풀린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시는 이런 방식으로 땅을 저주하여 멸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이후에도 인간의 본성이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작정하십니다. 그리하여 홍수로 생물을 멸절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땅에는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계속될 것입니다. 심음과 거둠은 팔레스타인 기준으로 우기(파종기-추위-겨울)와 건기(추수기-더위-여름)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전 지구적 기후 변화를 의미할 것입니다.


노아의 제물을 흠향하신 하나님께서는 새 창조를 이루시기까지 세계를 보존하기로 다짐하십니다. 노아의 번제가 만물 보존의 초석이 된 것처럼, 갈보리 산에서 언약의 제물로 드려진 예수님은 새 창조의 확고한 기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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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7-01)

 


홍수 심판 중에 보이신 은혜

창세기 7장 1-24절


방주가 준비되자 홍수를 통한 심판이 시작됩니다. 홍수는 4-일 동안 지속되어 온 세상을 물로 뒤덮습니다. 노아의 가족과 방주에 탄 생물만 생명을 보존합니다. 심판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큰 자비를 베푸십니다. 홍수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어떤 분으로 드러내십니까?

 

노아의 나이 600세에 대홍수가 시작됩니다. 이 홍수는 일반적인 물난리가 아니며, 주로 신화적 배경에서 언급되는 압도적인 대홍수를 의미합니다. 비가 내리기 7일 전에 노아와 가족은 방주 안으로 들어갑니다. 모든 육상 동물들이 암수 쌍으로 노아에게 모여들었습니다. 노아는 가족들과 더불어 모든 짐승을 배에 태웠습니다. 7일 후에 홍수가 시작되었습니다.

 

노아 가족과 짐승들의 승선(1-5)

불의한 세계는 항상 의로운 삶을 조롱하지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심판의 날,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의로움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폭력과 야만이 가득한 세대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산 의로운 삶을 인정하시고, 그를 새로운 시대의 파트너로 삼으셨습니다.

1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2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3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4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5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1-5)

여호와께서는 노아와 가족에게 승선 명령을 내립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직접 노아에 대해 인물평을 하십니다. 그는 의로운(차디크)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츠다카)는 ‘반듯한 것’, ‘옳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공평한 것’을 의미하는 미쉬파트와 비교됩니다. ‘츠다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것을 표현합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여 그분과의 관계가 반듯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 쌍,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두 쌍을 이끌어 오라고 하십니다(2). 이 짐승들은 하나님에 의해 노아에게 나아오며, 노아는 이들을 방주에 태울 뿐입니다(창세기 7:9). 그 짐승들이 홍수 후에 다시 번성하여 지구를 채울 것입니다. 여기서 레위기 11장(신명기 14장)에서 구분되는 정-부정 짐승들이 이미 구분되고 있습니다. 비평학자들은 이것을 단순히 후대에 편집된 자료의 문제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계시의 발전을 받아들이는 공시적 입장에서는 다른 성경신학적 답변이 요구됩니다.

우선 창세기 1-11장은 원시적 형태의 제의 체계를 넌지시 보여줍니다. 성전의 원형으로서의 에덴 성전이 그려지고 최초의 회생제 장면이 펼쳐집니다(창세기 4장). 노아 홍수의 시간표는 안식일이 준수되었음을 암시합니다. 여기서는 정-부정 동물 구분의 원형적 체계가 제시됩니다. 이것은 오경의 율법이 정립되기 이전에, 특히 레위기에서 제의적 체계가 표준화 및 규격화되기 전에 다양한 율법들과 제의적 관행들이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이미 실행되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창세기 4장; 8:20; 15:9-11; 31:34-35,54). 특히 라헬이 생리를 핑계로 말안장에서 내려오지 않고 드라빔 수색을 거부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여자의 생리로 인해 여자의 몸이 부정하게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창세기 31:34-35). 따라서 현재의 정-부정 짐승의 구분은 레위기 11장의 정-부정 동물 구분의 원시적 형태, 즉 기록된 모세 율법 이전의 파편적인 구전 율법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정-부정 동물의 구분은 단순히 종교적 교훈을 위한 상징적인 구분일 뿐이지 동물들이 내재적으로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짐승들은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씩 구출됩니다. 어떤 비평학자들은 여기서 암수 일곱 쌍은 앞서 6:19-20의 한 쌍과 모순이라면서 두 자료의 편집의 증거를 찾아냅니다. 일곱 쌍은 J자료, 한 쌍은 P자료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한 쌍을 집합명사로 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정결한 짐승을 일곱 쌍씩 실으라 한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땅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비둘기를 거듭 날려 보낸 것과 하선 후에 정결한 짐승으로 제사를 드린 것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일부 정결한 짐승에 불과합니다. 아마 대체로 부정한 짐승은 육식 동물이 주를 이루고 정결한 짐승은 초식 동물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것은 먹이 사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차이로 보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생물들의 승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하는 것은 불필요한데, 아마 배에 오른 짐승들 중에는 곤충류가 제외되었을 수 있습니다. 이는 곤충류의 유충은 물에서도 보존되어 홍수 후에도 다시 번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7일 후에 비가 40주야를 내릴 것이며, 지상의 모든 동물들은 쓸려갈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노아는 말씀대로 모든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앞서 방주를 짓고 승선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노아가 그대로 준행했다는 6:22의 진술에 이어 다시 한 번 노아의 절대 순종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노아가 배를 건조했다는 말 외에는 어떠한 설명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노아의 배에 대한 지식, 선박 건조 과정과 방법, 동물학에 대한 지식 등에 대해서는 일절 침묵합니다. 단순히 그가 명령을 완수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고 그것이 초점입니다.

 

홍수가 시작되다(6-16)

하나님을 거절하는 곳에는 평안이나 안식이 사라지고, 혼돈과 전쟁이 판칩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옛 세계를 정결케 하시고, 의가 거하는 새로운 세계를 짓고자 합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역사적 과정이자 만물을 영광스럽게 완성하기는 통로입니다. 40일 동안 땅과 하늘이 없어지는 이 심판으로, 땅과 하늘의 모든 숨 쉬는 것들은 다 죽었습니다.

6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7노아는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8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은 9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며 10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11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12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13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14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15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16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6-16)

홍수가 시작된 날짜가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7일로 명확히 적시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정확한 날짜가 명시된 최초의 기록입니다. 이후 홍수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계속 날짜가 언급되므로 구체적인 날짜를 확인하면서 홍수의 추이를 살필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아래 정돈된 도표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방주에 오른 승선자 명단이 소개됩니다. 이것은 13-16절에서 반복됩니다. 노아와 그의 세 아들 셈, 함, 야벳 및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모두 승선했습니다. 모든 승객들이 승선을 마치자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십니다. 참고로 길가메시 서사시에서는 영웅 아투나피쉬팀이 직접 방주의 문을 닫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홍수 기사에서는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문을 닫아주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문을 닫으심으로써 그분이 노아와 방주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음은 홍수가 진행된 일정표입니다. 이것은 웬함이 계산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구약에 기록된 날짜는 모두 태음력인 반면, 홍수 일정의 날짜는 유일하게 태양력을 따랐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다만이 날짜 계산은 유대 문헌인 희년서(Jubilee)의 달력 체계에 근거하고 있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추정된 요일 또한 그러합니다. *표로 표시된 날짜가 홍수 기사에 적시된 날짜들이며 다른 날짜들은 이로부터 정확히 계산되어 산출됩니다. 8번은 웬함의 도표에 필자가 새로 넣었습니다.

 

  사건의 진행 날 짜 요일(추정) 일주일
1 홍수 통보(7:4) 600년 2월 10일 주일 제1일
2 홍수 시작(7:11) 600년 2월 17일* 주일 제1일
3 홍수 지속(40일)과 끝(7:12) 600년 3월 27일 금요일 제6일
4 물이 150일간(14+110) 유지됨(8:4) 600년 7월 17일* 금요일 제6일
5 산봉우리가 드러남(8:5) 600년 1월 10일* 수요일 제4일
6 까마귀를 보냄(40일 후, 8:6) 600년 11월 10일 주일 제1일
7 비둘기를 첫 번째 보냄(8:8) 600년 11월 17일 주일 제1일
8 비둘기를 둘 번째 보냄(8:10) 600년 11월 24일 주일 제1일
9 비둘기를 세 번째 보냄(8:12) 600년 12월 1일 주일 제1일
10 물이 걷힘(8:13) 601년 1월 1일* 수요일 제4일
11 노아의 하선(8:14) 601년 2월 27일* 수요일 제4일

만일 이 날짜 계산이 맞다면, 홍수 시작일은 창조의 첫날(주일)과 같습니다. 홍수가 끝난 날과 물의 창궐이 끝난 날은 창조 작업을 마친 제6일(금요일)과 같습니다. 새들을 보낸 날은 다시 창조의 첫날(주일)에 해당합니다. 홍수가 주일에 시작한 것은 창조 작업의 첫날에 부합하며, 금요일에 끝난 것은 창조 작업이 마무리된 제6일에 부합합니다. 이것은 노아 홍수가 재창조 작업이었음을 시사 합니다. 다만 이것은 1년을 364일로 산정한 희년서의 월력 체계에 따를 때 들어맞습니다.

  

홍수에 의한 멸망(17-24)

구원은 시효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선택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힌 것은 누군가에게는 심판이지만, 노아와 그 가족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을 닫으셨지만, 실은 인간이 스스로 기회의 문을 닫은 것이기도 합니다.

17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18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19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20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21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23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24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17-24)

홍수가 40일 동안 지속됩니다. 물이 창궐하자 방주가 물에 떴고 점점 불어난 물로 인해 방주가 떠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물은 더욱 불어나 급기야 높은 산이 모두 잠겼으며 수위는 가장 높은 산보다 15규빗(약 7m) 정도 높았습니다. 방주 높이의 절반인데 이것은 배가 파도에 급격히 쓸려도 바닥이 닿지 않을 만큼 수위가 높았음을 의미합니다. 물이 ‘넘치다’라는 동사는 군사적인 승리를 표현합니다. 여기서는 물이 승승장구하며 창궐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방주는 그 물 위를 타고 다니며 세차게 휘몰아치는 홍수를 제압하고 있습니다. 방주안에 있는 생물들을 제외하고 모든 생물이 죽었습니다.

특히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이 다 죽었다는 표현은 분명히 창세기 2:7을 되울립니다. 하나님께서 불어넣어주신 생명의 숨을 하나님께서 다시 거두어 가십니다. 홍수로 불어난 물은 150일 동안 빠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죄로 인한 홍수 심판은 하나님의 창조 이전의 상태로의 회귀이며 창조의 뒤집기입니다.

완전했던 아름다운 창조 세계가 아직 하나님께서 순서대로 질서를 잡지 않으셨던 혼돈과 공허, 무질서의 상태로 복귀합니다. 인간과 생물들도 처음 창조된 ‘종류대로’ 배에 승선하여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을 준비합니다. 따라서 최초의 창조가 무에서의 창조였다면, 재창조는 보존을 통한 새로운 창조입니다.


노아의 가족과 짐승들이 살아남은 것은 노아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그 시대의 구원자로 세워 숱한 생명들을 구원하는 통로로 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가고 오는 모든 시대의 구원자로 세우시고 그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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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6-01)

 


인류의 타락과 노아의 계보

창세기 6장 1-22절


번성한 인간은 만연한 죄악으로 세상을 더럽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시며 노아에게 방주를 예비하게 하십니다. 그분의 단호한 ㅍ쳥가와 심판의 결심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지점을 보여줍니다. 심판의 경고를 통해 오늘 들어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6장은 3장에서 시작된 인간의 죄가 최고조에 이른 시대적 상황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부패와 타락은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불렀습니다. 폭력과 성적 일탈로 얼룩졌으며 폭압적인 통치자들뿐 아니라 모든 육체가 부패하였습니다. 5장의 택자 계열의 족보에 이어 6장은 타락한 계열이 지배한 무질서한 세상을 묘사합니다.

 

인류의 타락(1-5)

세상은 부패하고 포악이 가득했습니다. 여자를 폭력적으로 취하였고, 네피림이라는 호전적인 영웅을 중심으로 결집하였습니다. 힘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타락한 희망 없는 세상을 하나님께서는 침판하려 하십니다. 성이 상품화되고, 돈이 숭배되는 시대에 의로움을 지켜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성’하는 복을 주셨지만, 인간은 여전히 자기 좋아하는 대로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사는 일에만 여념이 없었습니다.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1-4)

하나님께서 번성의 복을 주셔서 인류는 죄악 가운데서도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1절에서 ‘(사람의) 딸들이 나니’라고 언급한 특별한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2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힌트를 제고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히브리어 ‘브네 엘로힘’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신들의 아들들’로 둘 다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어구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왔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들’은 택자인 셋 계열의 경건한 남자들을 말하며, ‘사람의 딸들’은 비택자인 가인 계열의 불경건한 여자들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1절에서 사람이 번성하면서 낳은 ‘사람의 딸들’이 단지 가인 계열로 제한된다는 모순을 내포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들의 아들들’로 번역되어야 하며, 이 경우 이들은 타락한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들은 영물이며, 인간 여성들과 음란하게 성적 관계를 맺어 후손을 퍼트렸습니다(4). 이 견해는 초기부터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 견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이 천상의 존재를 가리킨다는 것을 근거로 듭니다(시편 29:1; 욥기 1:6). 이것은 여전히 일부 해석가의 지지를 받지만, 천사와 같은 영물은 인간과 성적 결합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거부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다고 확증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20; 마가복음 12:25). 셋째 견해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당시 폭력을 휘두르며 신처럼 군림한 폭군 왕들로 간주합니다. 이 경우 이 표현은 요즘 유행하는 소위 ‘신의 아들’이라할 수 있습니다. ‘엘로힘’은 실제로 왕 같이 높은 지위에 있는 권력가나 영웅에게 붙는 수식어이기도 합니다(사무엘하 7:14; 역대상 17:13; 시편 82:6; 참조. 출 21:6; 22:8,9,28의 ‘재판관’으로 번역된 엘로힘). 고대 가나안 지역의 왕들 또한 ‘신의 아들’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습니다. 이 폭압적인 독재자들이 ‘사람의 딸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취하여 성적 일탈을 일삼으며 자녀를 낳았습니다. 이 해석은 4절의 네피림 및 폭군이었던 고대의 용사에 대한 진술과 잘 어울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으리라’고 선언하십니다. ‘나의 영’은 창조 시에 혼돈의 수면 위에 임재하여 세계를 정돈하며 창조를 완성한 하나님의 성령을 연상시킵니다. 또한 ‘루아흐’는 ‘생명의 기운’(life-giving power)을 뜻하기도 하므로(창세기 6:17; 7:15; 에스겔 37:3-9; 참조, 창세기 2:7) 이것은 인간으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거두어 가신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 기한이 120년으로 한정되며, 이것은 ‘그들이 육체가 되었다’는 진술과 잘 부합합니다. 인간의 날이 120년이 된다는 견해는 둘로 팽팽히 나뉩니다. 첫째는 120년 후에 홍수가 임할 것이라는 암시로 이해됩니다. 이것은 실제로 6장이 독자들에게 홍수가 임박했다는 조짐을 알리고 있기에 일리가 있습니다. 또한 노아는 이때부터 120년간 방주를 지었다고 해석되곤 합니다. 다른 견해에 의하면, 이것은 급격히 짧아진 인간의 기대 수명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홍수 이후에 노아를(아마 가족 포함) 제외하고는 인간들의 수명이 급격히 짧아지므로 더욱 받아들일 만합니다. 물론 홍수 이후에도 120세 이상을 산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고, 야곱은 147세, 아론은 123세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수명도 결국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모세의 형 아론이 120세를 넘긴 마지막 인물입니다. 모세가 120세까지 살고 오경이 막을 내리고 이후에는 모두 120세 미만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예고된 기대수명을 채운 표준적 인물임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그의 수명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된 매우 의도적인 수명으로 보입니다.

당시에 네피림이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네피림에 대한 언급은 이어지는 고대의 폭군들을 묘사하는 설명구임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이 다시 언급되는데, 그들 사이에서 고대의 유명한 ‘용사들’이 태어납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모두 폭압적인 통치자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으며, 아들만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네피림으로 규정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심판의 선고와 은혜를 입은 노아(5-8)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보시고 한탄하십니다. 하나님의 후회와 탄식은 심판의 결심으로 이어져 멸망을 선언하십니다. 우리 사회는 근심이 아닌 기쁨과 희망을 드립니까? 한탄하실 만한 모습이 있다면 바로잡고, 우리로 인해 세상이 보존될 수 있도록 의와 경건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5-8)

하나님께서는 죄로 가득 찬 세상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신다.’ 이것은 언뜻 신학적으로 난감할 수 있으나 구약은 빈번히 신인동형론적 기법으로 하나님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지의 불변성이 절대적이라고 오해해선 곤란합니다. 인간의 태도에 따라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언제든 변경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분의 최종적 목적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더불어 지상의 모든 생물들을 홍수로 쓸어내실 계획입니다. 수중 생물들은 홍수의 참사에서 제외되는데 그들이 물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의 은혜를 입습니다.

 

노아의 족보와 부패한 땅(9-13)

모두가 부패할 때, 노아는 홀로 의의 삶을 지키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방주를 예비하라는 명령에 말없이 순종했습니다. 노아의 의로움은 말씀하신 바를 순종하여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믿음 곧 순종으로 하나님과 동행해야겠습니다.

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10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11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3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9-13)

간략한 노아의 족보(톨레도트)와 더불어 서사는 다시 전환점을 이룹니다. 노아에 대한 인물 평가가 이어집니다. 그는 그 시대의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늘 동행하던 자였습니다. ‘완전한 자’란 ‘흠 없는 자’(타밈)란 뜻으로 이 표현은 흠 없는 짐승에 사용됩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에녹의 삶과 병행을 이룹니다. 에녹처럼 노아도 홍수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노아는 세 아들, 곧 셈, 함, 야벳을 낳습니다. 노아의 시대에 세상은 극도로 부패하고 포악해졌습니다. ‘모든 육체’란 모든 사람을 말하는데, 이것은 온 세상의 타락과 부패가 권력자와 같은 특정 집단의 문제가 아닌 전체의 문제임을 명확히 적시합니다. 인간은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는 자신이 설정해두신 죄의 임계량이 있습니다.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죄의 임계점(eritical point)을 넘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실행됩니다. 홍수 심판의 이유는 인간의 부패와 타락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메소포타미아 홍수 신화에서는 하늘의 신들이 지상의 인구 번성으로 그들의 소음이 하늘에까지 올라오자 불면증에 시달리고, 견디지 못한 신들은 회의를 열어 인구를 솎아내기 위해 홍수를 일으킵니다. 즉, 인간의 죄가 홍수의 원인이 아닙니다.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14-17)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는 죽은 자들과 방불합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이 처음에 잠깐 녹색을 띠지만 시간이 지나면 색 바랜 죽은 낙엽이 되는 것처럼, 낙엽은 나무에서 떨어진 순간부터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예수와 관련 없는 사람들은 죽은 자들과 같습니다. 죽음을 통과하는 순간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영혼은 영원한 감옥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의 불신자들처럼 이 땅에 살았던 모든 불신자들의 운명입니다.

14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15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6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17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14-17)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고페르 나무로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십니다. 이 나무는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삼나무 종류로 추정됩니다. 배의 안팎으로 역청을 칠해야 합니다. 방주의 크기가 지시됩니다. 가로 300규빗(150m), 세로 150규빗(75m), 높이 50규빗(25m)입니다(1규빗을 약 50cm로 정함). 실제로 선박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 비율은 대형 선박이 커다란 파도를 견딜 수 있게 할 만큼 과학적으로 대단히 안정적인 비율이라 합니다. 참고로 길가메시 서사시의 방주는 120규빗(60m)의 정방체로 대단히 불안정합니다. 위에는 창을 내고 문은 옆으로 내며 방주는 3층으로 나뉩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일으켜 모든 생물을 멸절하리라고 예고합니다.

 

노아 가족과 생물의 보존(18-22)

어두운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탄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할 것입니다. 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말씀과 기도 생활을 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각오로 주의 말씀과 기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생명을 바칠 심정을 가지고 철저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노아의 믿음이었습니다.

18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19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21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22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18-22)

하나님께서 노아와는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언약은 홍수 후에 체결됩니다(창세기 9:9 이하).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을 보존하십니다. 노아에게는 지상의 모든 생물들을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라는 임무가 주어집니다. 모든 짐승들이 그 종류대로 ‘네게로 나아올 것입니다’(20). 노아는 자신의 가족과 모든 짐승을 위한 식량도 준비해야 합니다(21).


노아와 언약을 맺고 짐승들을 싣도록 하신 것은 심판 중에도 생명을 보존하시려는 은혜로운 조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존하심으로 새 창조의 희망을 쓰시며, 은혜의 씨앗을 남기심으로 미래의 소망을 이어가십니다. 우리를 세상의 남기신 것도 희망을 이어가시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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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5-01)


아담의 후손들에게 대한 족보

창세기 5장 1-32절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족보가 소개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은 아담의 계보에서 제외된 반면, 셋을 통해 이어지는 하나님 백성의 족보는 노아에 이르게 됩니다. 아담의 족보에 등장하는 인문들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에 따른 우리 삶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합니까?

 

5장에서 서사의 흐름은 전환점을 이룹니다. 그 표지는 2:4에 이어 여기서 다시 나타나는 톨레도트한 단어입니다. 2:4에서는 우주의 내력에 그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이곳을 비롯하여 앞으로는 이것이 모두 사람의 내력, 즉 ‘족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1절의 세페르 톨레도트는 여기서만 사용되는 어구인데, 이후로는 단지 톨레도트만 사용됩니다. 톨레도트는 인명의 목록만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사가 함께 담긴 족보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들 셋(1-5)

성경에는 어떤 스토리가 재미있게 이렇게 기록된 것도 있지만, 어떤 곳은 아무 스토리도 없고 그냥 족보만 쭉 나오는 그런 곳이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거의 이야기는 별로 없고 아담서부터 노아까지 몇 살에 첫 아들을 낳았으며 몇 살에 죽었는지 그런 것만 써 놓았습니다. 조보 이야기 외에는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5장에서는 아담 이후 후손들에게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1-5)

5장의 계보는 ‘수직적인’ 목록으로서 아담에서 셋을 거쳐 노아에 이르기까지의 가계를 보여줍니다. 4장에 있는 가인 자손의 계보는 일곱 세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아담의 계보(톨레도트)인데 아벨을 대신해서 태어난 셋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이 계보는 4:17-25의 가인의 계보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해 여기서는 자카르와 네케바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동물의 암수에도 사용되는 용어들이며, 인간의 생식 기능 및 생육과 번성의 능력에 초점을 맞춘 용어 선택입니다. 인간의 생육과 번성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라는 말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로 창조된 인간을 아담이라 부릅니다(2). 여기서 아담은 보통명사 ‘사람’입니다. 그러나 3절의 아담은 다시 인명인 고유명사 ‘아담’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아담은 130세에 아들을 낳는데 이름을 셋이라 짓습니다. 앞서 아담은 가인과 아벨을 낳았습니다. 따라서 셋이 첫 아들은 아닙니다. 여기서 셋의 출생에 대한 언급은 중요한데, 그것은 아담에서 셋으로 이어지는 택함을 받은 자의 계보를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3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담이 ‘자기의 형상대로’ 아들을 낳았다는 언급입니다. 누차 말한 대로, ‘자기의 모양’과 ‘자기의 형상’은 별 차이가 없는 동의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은 이제 ‘자신의 형상’을 가진 자녀를 낳습니다. 아담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또한 셋의 후손은 택자의 계보이지만, 그들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오염된 아담의 형상입니다. 이 오염된 형상을 지닌 후손이 후대를 이어갑니다. 아담은 셋을 나은 후 800년을 더 지내다 930세에 죽습니다.

 

셋에서 야렛까지(6-18)

하나님과 동행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하나님 나라 역사에 ㅁ편입되지만, 하나님 밖에서 이룬 인간의 성취는 제 아무리 위대하게 보이더라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싸우는 문명의 성취보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성품의 성취를 더 원하시는 것입니다. 가인의 5대손 라멕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 복수를 다짐했지만 결국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6-18)

셋의 아들은 그가 105세에 낳은 에노스입니다. 에노스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4:45-46에서 언급된 바 있습니다. 셋은 가인에게 살해당한 아벨을 대신해서 준 씨앗이며, 그가 아들 에노스를 낳음으로써 택자의 계보를 이어갑니다.

두 계보에서 비슷한 이름들이 나타납니다. 이랏과 야렛/ 므후야엘과 마할렐렐/ 므드사엘과 므두셀라. 동일한 이름이 나타납니다. 에녹/라멕. 둘 다 인상 깊고 중요한 이름입니다. 가인 계열의 에녹은 가인이 추방된 후 낳은 첫 아들이고, 셋 계열의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다 365세에 하늘로 올라간 인물입니다. 가인 계열의 라멕은 포악한 폭군이고, 셋 계열의 라멕은 노아를 낳은 인물입니다. 두 족보에서 모두 마지막 인물과 더불어 수직적 족보가 수평적 족보로 바뀝니다. 가인의 수직적 족보는 7대손 라멕에서 멈추며 거기서 수평적 족보로 전환되면서 네 자녀가 소개됩니다. 셋의 수직적 족보는 10대를 이어가다가 노아에서 끝나며 거기서 수평적 족보로 바뀌면서 세 아들이 나열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가인 계열의 인물들은 전혀 수명이 적시되지 않았지만, 셋의 계열의 인물들은 장수했다는 기록이 첨부됩니다. 모든 인물들이 천 살을 넘기지는 않은 채 평균 수명은 800-900세에 이르며, 므두셀라가 969세로 최장수를 누립니다. 이 연령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선 이 인물들의 연령은 마소라 사본 외에 사마리아 오경과 70인역에서 전혀 일치하지 않습니다. 마소라 본문의 권위를 인정한다 해도 차이가 나타납니다. 우선 현대 과학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명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한 달, 혹은 두 달을 한 살로 계산한 결과라 해석하면서 현대의 인간 수명과 맞추려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비평학자들은 고대 근동의 신화적 배경을 끌고 와서 이긴 수명을 문학적-신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별히 수메르 신화의 왕명록은 몇 가지 면에서 비슷한 특징을 보이며, 창세기 5장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수만 년에 이르는 수메르의 신화적 왕들의 통치 기간을 대폭 줄여 비신화화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 긴 수명은 성경의 다른 숫자들이 흔히 그렇듯 단지 신학적 과장일 뿐입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많은 사람들이 이 숫자에서 신학적 의미를 탐색하는가 하면 수비학(數秘學)의 숫자 놀이를 찾으려 애를 썼습니다. 예컨대, 학자들은 라멕의 777세를 목성과 토성의 주기의 합산과 일치하는 것에 주목하는가 하면, 바벨론의 60진법을 동원해서 숫자풀이를 시도했으나 숫자를 억지로 맞춘 흔적이 역력합니다. 어떤 사람은 연령의 숫자들이 5의 배수들이며, 때로 거기에 7이 더해진다는 견해를 내놓았으나, 여러 연령들이 여기에 들어맞지 않습니다. 마소라 본문이 신뢰할 만한지 여부를 떠나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태고의 인간의 긴 연령을 문자적으로 믿습니다. 고대 근동의 비슷한 체계의 왕명록이나 족보는 앞서 말한 대로, 인류가 태고에 대한 공통의 기억을 희미하게 간직한 결과로 간주합니다. 한편, 이 족보와 연령에서 아담의 탄생 시기와 창조의 시기를 계산하려는 시도는 전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창세기 5장을 비롯한 성경의 족보는 언제나 중요한 인물들만을 수록하는 신학적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족보에 나열된 인물들 사이에 몇 대가 빠진 경우가 흔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족보도 인물과 인물 사이에 여러 세대가 누락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에녹의 영생(19-24)

성도들의 삶은 악한 세상의 방해가 기다릴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의 심령으로 주와 동행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녹의 삶은 의인의 심령으로 시대를 거스르며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았습니다.

19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5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19-24)

야렛이 낳은 아들 에녹이 5장의 주인공입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으며, 그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는데, 이후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셔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365세를 살았습니다. 그는 5장에서 유일하게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5장에는 아담 후손의 죽음이 반복됩니다. 이것은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확증하는 반복입니다. 따라서 5장은 창세기 3장에서 ‘너희가 반드시 죽는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이고, ‘너희가 죽지 않으리라’한 사탄의 말은 거짓임을 명백하게 증명합니다.

하지만 5장은 동시에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영생의 길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생명나무의 길은 그룹들에 의해 막혔지만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 그 길이 열립니다. 이 점에서 에녹은 5장의 죽음의 배경 속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입니다. 마소라 사본의 연령을 따라 계산하면 므두셀라는 홍수가 일어난 그 해에 죽었습니다. 에녹은 동시에 노아를 미리 예고하는 인물입니다. 그가 노아의 전조라는 사실은 노아 또한 홍수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생명을 얻었으며, 또한 둘 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동일한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창세기 6:9).

 

므두셀라에서 노아까지(25-32)

죄와 폭력적인 질서를 강화했던 라멕과 달리 아담의 후손 라멕은 죄에 지친 인간을 위로하고픈 소망에 아들의 이름을 ‘안식’이라 짓습니다. 라멕의 신앙은 노아에게 이어져 새로운 시대를 옙하는 산파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세상의 쉼과 평화를 위해 아담의 후손 라멕의 정신을 잃지 말라야 합니다.

28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28-32)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고 최장수를 누렸으며, 라멕은 180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노아의 이름은 그 뜻에서 보듯이 특별했습니다. ‘쉬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한 이 이름은 여호와의 저주 속에서 노동하는 인간이 훗날 노아를 통해 쉼을 얻을 것을 예고합니다. 라멕은 777세에 사망했으며 노아는 500세가 되었을 때, 셈, 함, 야벳을 낳았습니다. 777세는 완전수 7의 반복이며, 500은 천의 절반이라는 점에서 이 연령들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에녹은 짧은 생을 살았지만,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의 안식에 드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에게서 죽음을 넘어선 희망에 대한 약속을 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시대의 불경건과 심판을 증언했던 에녹처럼, 죄에 물들지 말고 의와 경건함 가운데 주와 동행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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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4-01)

 


에덴의 동편으로 쫓겨난 사람들

창세기 4장 1-26절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에 속하여 처참한 살인마저 주저치 않습니다. 번영은 구가하지만 결국 잔인한 호전성과 탐욕, 음란으로 귀결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경건한 자를 남기시고 의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가인과 셋의 후손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하와는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가인의 이름은 동사 카나()와 관련되어 있어 보이고, 아벨()은 아마도 동일한 명사 헤벨의 의미인 ‘증기, 입김, 허무’와 관련 있어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와가 그런 부정적인 의미의 이름을 작명할 리가 없다고 말하지만 성경의 인물들의 이름은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출생과 직업(1-2)

경건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형통하고 더 편안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조금 늦어도 부요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비록 가인은 세상에서 기술과 문명의 발전을 이루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그 삶은 여전히 하나님을 떠난 삶이며 안식하지 못하는 방황하는 삶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1-2)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에덴의 동편으로 쫓겨납니다. 아담은 아내와 동침한 후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자이고 가인은 농사짓는 자입니다. 당시의 목축은 가죽과 털, 우유를 조달하기 위한 것일 뿐 육식은 노아 홍수 이후에 허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이후 자연의 변화와 생물의 생태적 변화가 발생했다고 보고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이후 피를 흘리는 동물 제사가 시작되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따라서 노아 홍수 전에 이미 인간의 동물의 육식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아벨의 목축도 고기 조달이 주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열납된 재물과 거부된 제물(3-7)

죄악은 다스리지 않으면 점차적으로 확산이 되어갑니다. 불경건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경건한 자들을 파멸시키려고 하며, 더 나가서 자신의 죄악에 대한 책임과 유죄성을 부인합니다. 그 결과는 불경건한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채 세상에서 죄악의 문화를 확장시키면서 살아갑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3-7)

세월이 지난 후 두 사람이 각각 소산물을 바칠 시기가 되었습니다. 농사꾼 가인은 땅의 소산, 즉 곡식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아벨도 자신의 기른 영/염소의 첫 새끼를 골라 기름과 함께 바쳤습니다. ‘첫 새끼와 그것의 기름’에서 기름은 복부의 내장 기름 덩어리를 말합니다. 기름은 짐승의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부위로서 제단에 태워야 했습니다(레위기 1:8; 3:3-4; 4:8-9). 기름과 고기를 다 태우고 남은 고기는 젲사장 몫으로 돌았습니다(출애굽기 13:2; 레위기 27:26; 민수기 18:15,17; 신명기 12:6). 많은 해석가들이 제물에 피가 있는지 여부에 의해 하나님의 반응이 결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폰 라드(von Rad)는 피의 희생이 여호와께 더 기쁜 제물이었기에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소제물을 폄하하신 적이 전혀 없으며, 곡식 제사는 다른 동물 제사와 동일한 가치를 지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를 ‘네가 선을 행하지 않았다’(7)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상세히 관찰하면 두 사람의 제사 태도에서 차이가 발견됩니다. 가인은 단순히 ‘소산물의 일부’를 가져옵니다(개역개정, ‘땅의 소산’으로). 여기에는 이것이 첫 소산물이거나 최상품인지에 대한 단서가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첫 새끼’와 그 최상의 부위, 곧 기름을 가져옵니다. 가인은 마지못해 허례허식(tokenism)의 제사를 집행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특히 그의 마음가짐은 제물이 거절당했을 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가인은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문자적으로 ‘얼굴을 떨어트렸다’). 이것은 부끄러워서 면목이 없어서 보이는 반응이 아니라 분을 참지 못해 고개를 숙인 것이며, 굴욕감을 느끼고 고개를 들지 못한 행동일 것입니다. 그는 선한 예배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제사의 거부가 그의 탓이라고 꾸짖습니다. 그는 낮을 들 수 있는 선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이것은 죄가 언제나 뱀처럼 숨어 있다가 기습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죄가 가인을 원한다는 말씀도 죄가 간절히 그를 노린다는 뜻입니다. 죄는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런 죄를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인의 징계와 보호의 약속(8-15)

죄는 하나님은 물론이고 이웃을 향한 책임을 외면하는 태도입니다. 더나가서 죄악은 무서울 정도로 들불처럼 확산되어 갑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배격하는 행동까지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은 자신을 대적하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동쪽으로 추방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자비를 구하는 그에게 보호를 약속하십니다.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8-15)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개하기는커녕 분한 마음을 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분노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향한 시기심과 살의를 아시고 그에게 경고하십니다.

가인은 아벨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러나 말의 내용이 안 나옵니다. 70인역(LXX)과 사마리아 오경, 시리아 역, 벌게이트(Vulgate), 중세의 몇몇 히브리어 사본들에는 ‘말했다’는 표현 다음에 ‘우리 들로 나가자’가 추가되어 있습니다(공동 번역; 표준 새번역; NIV; RSV; NJB).

형제간의 투쟁이 시작되고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죄는 아버지 아담의 세대보다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처럼, 하나님은 살인자 가인을 찾으시고 문책하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는 심문은 사실상 질책입니다.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항변합니다. 죄에 대한 변명 또한 아담보다 더 시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호소한다고 하십니다(10). 무고하게 흘린 피가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이 의인화된 표현은 신적 재판관을 향한 사법적 탄원입니다. 가인에게 유죄 판결과 더불어 중형이 선고됩니다. 그는 그가 흘린 피값을 치를 것입니다. 가인에게 하나님에 의한 직접적인 저주가 선언됩니다. 이미 아담의 죄로 땅은 엉망이 되었지만, 가인의 죄로 땅의 상황이 더 악화되면서 그는 가중처벌을 받습니다.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땅은 아무런 효력도 없을 것이며, 그는 땅을 배회할 것입니다. 농사꾼이었던 그에게 이것은 파산을 의미합니다. 가인은 자신에게 가해진 형벌이 너무 과중하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멀어질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가인에게, 또한 모든 인간에게 사실 가장 무겁고 두려운 형벌입니다(14).

이에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보호하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안전을 보장하십니다.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게 될 것입니다. 완전수 ‘칠’이 암시하는 대로, 이것은 혹독한 징벌을 의미합니다(창세기 4:24; 레위기 26:24,28; 시편 12:6; 79:12; 잠언 6:31; 다니엘 3:19). 추가로 그에게 보호의 증표로 ‘표’를 줍니다. 이 증표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가인이 받은 ‘표’는 그에게 부여된 자기 방어를 위한 어떤 비상한 능력이었을 수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들(16-24)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모습은 유리하며 방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방랑자는 규모 있고 질서정연한 삶을 살기보다는 무질서와 방탕한 삶을 살기 쉽습니다. 그리고 죄악은 대부분 어두운 곳에서 자행됩니다. 밝은 곳에서 행동하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들의 죄악된 모습이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인의 후손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16-24)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가인의 계보를 계속 추적합니다. 그는 ‘놋’은 ‘방랑’, ‘배회’라는 의미하고, 그곳에서 거주합니다. 이 지역명은 다시 한 번 가인의 운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놋의 위치는 에덴동산의 동쪽으로 하나님과 멀어진 곳이라고 언급합니다. 놋은 하나님에게서 피신한 사람들의 땅이었습니다.

가인은 아내를 만나 에녹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의 아내는 누구입니까? 아담과 하와는 두 아들 외에도 많은 자녀를 낳았고(창세기 5:4), 그들이 분산되고 상당히 세월이 흘러 인구가 늘어났을 것입니다. 가인은 에녹을 낳고 곧이어 도성을 건축했는데, 그 성의 이름 또한 ‘에녹’이라고 짓습니다. 역설적으로 가인은 성을 쌓음으로써 방랑하고 유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그의 운명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가인의 계보인 에녹의 후손들이 7대까지 열거됩니다. 아담으로부터 가인을 거친 일곱 번째의 자식은 ‘라멕’이었습니다. 가인의 가계에서 일부일처제가 최초로 무너지는 사례가 나타납니다. 또한 가인의 계보에서 목축과 예술, 문명이 유래됩니다. 아다의 첫아들 야발은 셈의 생계형 목축과 달리 전문 목축업의 원조가 됩니다. 야발의 동생 유발은 현악기(수금)와 관악기(퉁소)를 다루는 조상이 되었습니다. 씰라의 첫 아들 두발가인은 금속 제련사로서 금속 기술의 원조가 된 인물로 소개됩니다. 그의 여동생 나아마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목록에 오릅니다. 가인의 계열에서 인류의 산업과 기술, 예술과 문명이 기원되었다는 것은 구원의 문제와 별개로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공헌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가인의 5대손 라멕은 복수의 화신이자 폭군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상해를 두려워했으나, 라멕은 적극적인 공격과 복수로 잔인한 자기 방어력을 갖춥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젊은 전사를 죽였으며 어떤한 복수에서든 가인에게 임한 관대함보다 더 큰 관대함을 요구했습니다(24). 그는 살인을 자랑했으며, 이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행위에도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는 가인을 해친 자에게는 7배의 벌이 주어지지만, 자신을 해친 자는 벌이 77배가 될 것이라고 하여 공포심을 조장합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과 그의 법에 대항하면서 쾌락과 방종을 추구하는 풍요한 사회의 한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교회는 바로 이러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제사장 나라로 나서야만 했습니다.

 

아벨을 대신한 셋과 그의 아들 에노스(25-26)

불경건한 사람은 인간의 힘과 번성, 자랑하며 심지어는 하나님을 조롱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항상 겸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아갑니다. 물길을 거슬릴 수 없습니다. 경건을 통해 갈려진 사람들은 자신의 심령대로 행동하게 경건과 불경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가인의 후손들이 성장한 것처럼, 또 다른 경건한 자들을 인도하십니다.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5-26)

이러한 불경건한 사회의 정반대 편에는 의로운 자들이 있었습니다. 셋의 계보에서 신앙이 있었습니다. 아담에게서 아벨을 대신하는 아들이 태어납니다. 이름은 ‘셋’인데, 그 이름 뜻인 ‘대신한 자’는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셨다(쉬트)는 의미일 것입니다. 셋 자신이 바로 하와의 신앙고백에 따른 하나님의 예비하신 은총이었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부릅니다. ‘에노스’의 어원을 추적하면 아담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뜻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흔히 신적 존재와 다른 ‘연약하고 유한한 인간’을 의미할 것입니다.

에노스의 시대에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향한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인간의 깨달음은 에노스라는 이름에 의해 상징되는 인간의 약함을 인식할 때 더욱 강화된다.’


 하나님께서는 예배하는 자의 마음과 삶을 보시고 그를 받으십니다. 우리는 합당한 예배를 위해 죄가 지배하지 못하도록 다스리고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가인이 간 길이 아닌 경건한 의인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할 때, 우리를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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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3-01)

 


 죄의 결과와 회복의 소망

창세기 3장 1-24절


사람이 뱀의 유혹에 빠짐으로 창조 질서에 저주가 임하고 관계가 어긋났습니다. 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은 생명의 소망에서 점차 멀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깨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고, 죄의 권세에서 건지셨습니다. 죄의 결과와 아들을 통해 이루신 일은 무엇입니까?

 

갑자기 뱀이 등장합니다. 이 뱀은 들짐승 중 가장 간교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간교함과 벌거벗음의 히브리어는 비슷한 단어로 말놀이가 만들어지는데 교묘하게 인간의 운명을 예고합니다. ‘인간은 영민하게 되길 추구했으나 벌거벗게 된다.’(Wenham) 이 뱀의 정체는 사탄입니다. 사악한 존재로 인간보다 지혜롭고 그들을 지배하려 합니다.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1-7)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명령이 아니라 의견으로 전락했고, 순종이 아니라 고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피조물이 자기 욕망의 눈에 ‘보기 좋은’ 것을 탐하다가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 결 기쁨 대신 두려움이 찾아왔고,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알았지만 눈이 밝아져 자기가 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1-7)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록했으나, 이제는 뱀이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질서를 가져 왔지만, 뱀의 말은 혼돈과 죽음을 자져왔습니다. 진실은 거짓 이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탄의 거짓말보다 먼저 있었던 것입니다.

뱀이 여자를 유혹합니다. 뱀의 질문인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는 하나님 말씀의 교묘한 왜곡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나무를 제외하고 동사의 모든 나무 열매를 먹으라 하셨습니다. 여자가 뱀에게 부정적으로 답변하지만, 그녀의 말 역시 하나님의 맘씀을 왜곡하거나 순화합니다. 동산 중앙의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씀에 ‘만지지도 말라’하셨다고 덧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경고하셨는데, 그녀는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고 왜곡합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경고를 순화함으로써 유혹자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 뱀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너희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극적인 공세를 취합니다. 뱀은 나아가 죽음은커녕 오히려 인간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합니다. 여자가 금단의 열매가 맺힌 나무를 보았을 때, 그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여자는 결국 유혹을 못 이기고 그 열매 따 먹었으며, 더 나아가 남편에게도 권하여 먹게 했습니다. 인간은 인내심이 요구되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대신에 당장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선악과를 선택했습니다. ‘인간이 가장 먼저 추구하는 것은 생명이 아닌 힘이다’(Waltke).

선악과를 먹은 직후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눈이 밝아진다는 것은 일종의 자각에 의한 인식 변화입니다. 최초의 부부는 한 몸의 일체성으로 인해 둘 사이에 아무런 장벽과 거리낌이 없었으며, 벌거벗음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둘은 부부라도 죄가 개입하자 죄 묻은 자기 본 모습과 치부를 감추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죄책감으로 인해 하나님에게서도 스스로를 숨기려 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 수치의 본질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을 숨깁니다. 그들은 부끄러움 때문에 무화과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치부를 덮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추궁(8-13)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는 이웃과의 관계 파괴를 낳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떠나자 그들은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두려움을 모면하려고 합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것은 여자를 창조한 하나님, 뱀을 창조한 하나님을 향한 비난일 뿐입니다. 뱀을 의지한 인류는 이제 뱀이 창조한 세상에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8-13)

‘그 날 바람이 불 때’ 아담과 하와는 동산의 숲속에 숨습니다. ‘바람’을 뜻하는 ‘루아흐’는 단순히 자연풍이 아닌 자주 신적 바람, 즉 바람과 같은 성령의 임재, 혹은 성령의 기운을 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바람을 동반하여 아담과 그의 아내를 찾아오셨다는 암시가 엿보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낮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인 이 우주 공간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은 아담과 하와가 숨은 곳을 모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그를 불러내는 재판관의 소환 명령일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숨바꼭질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담은 ‘내가 벗어서 두려워서 숨었다’고 말할 뿐 자신이 숨은 본질적인 이유를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Cassuto). 그런 이유로 하나님의 심문이 이어집니다. 그것은 사실상 꾸짖음입니다. 아담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죄를 아내 탓으로 여깁니다. 여기서 죄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장 친한 동료와 심지어 배우자에게마저 적대적이게 합니다. 하와는 자신의 죄가 뱀의 유혹 때문이었다고 변명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14-21)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는 또한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땅으로부터도 거절을 당하는 신세로 이어집니다.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당했을 뿐만 아니라 땅의 저항으로 인해 이제 노동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는 대신에 좌절과 수고를 거친 후에야 그 대가를 먹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실하게 수고의 대가를 먹으며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새 질서를 찾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과는 물론 자연과도 회복된 관계를 누릴 수 있습니다.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14-21)

심문을 마치신 하나님의 판결이 선고됩니다. 판결 순서는 이제 심문 순서의 역순인 뱀, 여자, 남자 순입니다. 먼저 뱀이 저주를 받습니다. 여기서 뱀이 다른 짐승들보다 ‘더욱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 다른 짐승들도 저주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습니다. 이는 뱀이 1절에서 ‘다른 들짐승들보다 더욱 간교했다’는 진술이 다른 짐승들도 간교했다는 뜻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필자는 이 뱀은 실제 뱀이 아닐 것으로 해석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옛 뱀’의 심판을 언급합니다(요한계시록 12:9; 20:2). 그 뱀은 용이라고도 칭하는데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다’라고 규정짓습니다. 이 옛 뱀은 분명히 창세기 3장에 등장한 그 뱀일 것입니다. 따라서 하와에게 나타난 그 뱀은 사탄입니다. 결국 이 뱀은 실제적인 뱀이 아닌 하와의 환상 중에 나타난 뱀일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과 자연이 소원해지기 전에 최초의 인간은 에덴에서 친히 이름을 지어주었던 동물들과도 완벽한 교감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이때 사탄은 하와에게 환상 가운데 피조물 중에서 호기심을 자아내는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 그녀를 유혹했을 것입니다.

이일 후에 뱀은 사탄의 상징이 되었으며, 그것의 기는 특징에는 저주의 상징이 새롭게 부여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조물로서의 뱀 자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한편, 뱀이 흙을 먹는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문자적으로 이해해선 안 됩니다. 이것은 뱀이 비참하고 굴욕적인 신세로 전락한 것을 의미합니다(시편 72:9; 미가서 7:17). 뱀에 대한 심판 선고인 3:15은 유명한 구절로 소위 ‘원시 복음’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뱀은 여자와 원수가 되고 이 관계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에게서 계속됩니다. 결국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에 치명상을 입히나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합니다. 또한 뱀의 후손은 비택자의 계열을, 여자의 후손은 택자인 이스라엘을 예고하는 예언일 수 있습니다. 양자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가벼운 상처를 입지만 적들은 치명상을 입고 패할 것입니다. 아마 이 예언은 이런 중의적 목적을 지닌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의 심판은 임신의 고통입니다. 여자는 남편을 갈망하나 남편은 여자를 다스리게 됩니다. 여러 학자들은 이것을 여자의 남편에 대한 지배욕을 뜻한다고 해석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4:7에서 ‘죄가 너를 원한다’(문자적으로 ‘죄의 소원이 너를 향한다’)는 말에서 뒷받침됩니다.

죄는 가인을 지배하길 원하나 가인은 오히려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이렇듯 여자는 남편을 지배하길 원하나 첫작 남편이 그녀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최초의 두 남녀는 동등한 관계였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담에게는 힘든 노동의 수고를 해야 소산물을 먹게 되는 심판이 주어집니다. 또 인간의 죽음과 더불어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담은 그의 아내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줍니다. 이름 뜻 그대로 그녀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 즉 인류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임시적인 잎사귀 옷 대신 오래 견디는 가죽옷을 입혀주십니다. 그들의 죄로 인한 수치를 덮기 위해 구약에서 최초로 짐승이 희생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직접 이 일을 실행하셨습니다.

 

에덴에서 추방된 인간(22-24)

하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 대신에 가죽욧을 지어 인간에게 입히셨습니다. 훗날 동쪽으로 문이 난 성막을 통해, 더 나아가 친히 성전이 되어 자신의 죽음으로 휘장을 찢으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함’ 나아가 영생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영생을 누릴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22-24)

인간들에 대한 심판 선고는 에덴 동산으로부터의 추방으로 이어집니다. 앞서 선악과의 나무 열매가 금지될 때 생명나무 열매에 대한 금지는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학자들은 선악과만 금지되었지 생명나무 열매는 금지되지 않았으며,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먹으며 풍성한 생명을 누렸을 것이라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먹으면 효과가 ‘영생’이었다는 사실과 아담이 생명나무마저 먹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을 볼 때(3:22)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먹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생명나무 열매는 아담이 선악과의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면 때가 되어 그에게 영생을 허락하기 위해 준비된 특별한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선악과의 금지와 더불어 생명나무도 잠정적으로 금지된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악과 금지가 최초의 계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계명을 믿음으로 잘 지키면 생명나무의 영생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하여 내쫓긴 인간은 에덴에서와 달리 에덴 밖에서는 땅을 개간하고 직접 수고를 하며 수확을 얻어야 합니다. 그가 내쫓긴 쪽은 에덴의 동쪽입니다. 이 방향 묘사는 성막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약에서 드러난 생명나무 열매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 하신 말씀은 이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 안에 두려움과 수치심, 책임 전가라는 비겁함을 낳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나누고, 사람의 관계도 파괴합니다. 잘못을 했다면, 책임 회피와 전가, 원망 대신 솔직한 인정과 고백으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 살지 않도록 힘써 자신을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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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2-02)

  


 인간의 존재와 사명

창세기 2장 4-25절


사람을 중심으로 복보 형식을 발려 첫 창조를 정리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특권과 흙으로 지어진 존재하는 한계를 동시에 갖습니다. 창조질서를 유지할 책임과 더불어 다스릴 권한도 부여받습니다. 특권과 한계, 권한과 책임 사이에 선 인간은 무엇입니까?

 

2:4을 절반으로 나누어 전반적의 ‘… 땅의 내력이니’를 1장의 마무리로, 후반절을 2장의 새로운 창조 이야기에 대한 서언으로 봅니다. 그러나 창세기 구조를 나누는 기준인 핵심 단어 톨레드트가 서언이 아닌 결언에 나타나는 경우는 없으므로, 4절 전체를 2장의 서언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처음 나타나는 톨레드트는 모두 인간의 복보와 관련하여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유일하게 세상의 기원 및 역사와 관련하여 사용됩니다.

  

인간 창조의 서막(4-6)

흙으로 지어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고 그분을 통해서만 존귀케 될 수 있습니다. 떠나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 형상이라는 특권과 흙이라는 한계 사이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을 때 존엄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숨결 따라 살 때, 영원의 땅에 이르게 됩니다.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4-6)

2장 4절부터는 분명히 별개의 창조 기사로 인간 창조에 초점을 맞춥니다. 5절은 땅을 갈 사람이 없어 채소와 식물류가 창조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5절은 1장의 창조 순서와 모순되어 보이나 2장의 창조 기사는 인간 창조를 주제로 삼고 있기에 1장처럼 창조의 순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대지에 아직 비가 내리지 않고 안개만 땅에서 올라오는 상황입니다(6).

‘안개’에 대해 대체로 주석가들은 다른 번역을 내놓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에 대해 메소포타미아의 거대한 두 강물이 지하로 스며든 뒤 주변의 대지에 솟구쳐 흘러 적시는 현상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인간의 창조와 에덴 동산의 창설(7-9)

에덴은 놀고 먹는 것이 아니라 경작하고 가꾸어야 하는 세계입니다. 인간의 노동은 잠재된 가능성과 감춰진 영광을 개발하여 드러내도록 의도 되었습니다. 범죄로 인해 가혹한 것이 되었으나 노동 자체는 신성한 것입니다. 노동이 세상을 충만케 하는 축복이 되기 위해 변화시켜야 할 사회적 과제는 무엇입니까?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7-9)

하나님의 창조는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려이니’라는 내용으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써 그는 살아 있는 존재로 변화했습니다. 인간은 땅의 흙으로 빚어집니다(야차르). 사람(아담)과 땅(아다마)이란 단어의 기원이 무엇이든 어근의 공유는 인간의 존재가 땅을 근원으로 한다는 사상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흙으로 빚어진 인간에게 하나님은 생기(‘생명의 호흡’)를 그 코에 불어넣으십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생기는 동물적 호흡이 아닌 영혼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잠언 20:27; 참고 에스겔 37:3-9).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인간은 ‘생령’(네페쉬 하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신 뒤 인간을 그곳에 두십니다. 흔히 ‘에덴’의 어원은 ‘들판, 평원’(plain, steppe)으로 메소포타미아의 두 큰 강 사이의 비옥한 농토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풍요로움을 뜻하는 아람어 어근 아단(adan)에서 기원을 찾거나 ‘기쁨’이라는 뜻의 동음이어 히브리어인 에덴(דן󰘠)과 관련짓습니다.

한편, 많은 사람들이 ‘에덴에 동산을’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동산’(정원)이 에덴 안의 일부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곳에서 ‘에덴 동산’이 일괄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비추어 볼 때(창세기 2:15; 3:23,24; 에스겔 36:35; 요엘 2:3), 에덴 전체가 특별한 정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아름답고 탐스런 열매가 맺히는 각종 나무가 나게 하셨습니다. 동산 가운데에는 특별한 두 나무인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소위 ‘선악과’)를 두셨습니다.

 

 에덴에서 흐르는 네 개의 강(10-14)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기쁨의 동산 에덴을 다스리고 경작하게 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에게 노동은 공동 운명체인 자연을 가꾸고 관리하기 위해 주신 신성한 책임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그 노동 본연의 가치와 노동에서 오는 기쁨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땀 흘리는 노동은 인간의 본질이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과정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실하게 일하고 정직한 땀의 대가를 양식으로 취하며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존재입니다.

10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10-14)

에덴은 네 강의 발원지(로쉬 שׁרא 머리)입니다. 비손 강과 기혼 강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월라와 에티오피아 지역인(이사야 20:3; 예레미야 46:9) 구스 온 땅을 흐른다는 언급에 근거하여 이 두 강을 나일강의 두 줄기 상류인 청나일과 백나일로 추론합니다. 그러나 나일강은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과 지리적으로 너무 멉니다. 또한 구약에서 구스로 지칭되는 지역은 의외로 다양합니다(창세기 19:7-12에서는 구스가 바벨론, 하바국 3:7에서는 미디안 땅으로 나타난다).

가장 합리적인 이해로 비손 강과 기혼 강은 힛데겔(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유프라테스) 강의 한 지류일 수 있으나 더 이상의 추적은 어렵습니다. 베델리엄과 호마노는 확인이 어려운 보석 종류들입니다. 호마노는 성막 건설 시 대제사장 복장의 장식에 사용되었습니다(출애굽기 25:7; 28:9,20). 순금 또한 은금과 더불어 성막에 사용된 금속류 중에서 가장 비쌌습니다. 에덴과 관련된 이러한 보석류와 순금의 언급은 마찬가지로 에덴이 성막의 원형임을 암시하며,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천상낙원의 모형임을 암시합니다(요한계시록 4:3; 21:11,19,20).

 

아담에게 부여된 직무와 금지(15-17)

인간은 영생하는 생명나무를 비롯한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견줄 수 없는 존재지만 자유를 갖고 책임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사람에게 이 금지명령은 ‘올무’나 ‘함정’이 아니라, 자유의 한계를 정하여 참 생명을 누리도록 돕는 이정표입니다.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15-17)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경작하며(아바드 עבד 노동하다, 섬기다) 지키는(샤마르 מרשׁ) 직무가 부여됩니다. 아담은 에덴에서 무노동 고임금의 삶을 산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에덴에서 노동을 합니다. 히브리어 아바드는 ‘예배하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므로 에덴의 노동은 일종의 예배 행위였습니다. 그에게 모든 나무열매를 먹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금지됩니다. 여기에 생명나무 열매가 금지되었다는 언급이 없는데, 그 이유는 3장에서 설명하기로 합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분명 하나님께만 독점되어 있는 지식입니다. 그것은 결코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열매의 섭취는 인간이 신적 지혜를 추구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그것을 얻었음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인간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스스로 자율권을 획득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처럼 자기만의 기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할 능력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독립 선언이며, 이러한 자기주장이 죄의 본질입니다.

 

아담의 배필 하와의 창조(18-2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나뉘면서 그들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남녀는 동등한 가치를 갖지만 동시에 상호 보완적이고 의존적인 관계로만 존재합니다. 결혼이든 무엇이든 타인을 인정할 때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18-25)

하나님께서는 독처하는 아담을 위해 돕는 배필을 마련하십니다. ‘돕는 배필’은 여자가 단순히 남자의 도우미로서 열등한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돕는 자가 도움을 받는 자보다 더 우월한 것도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는 상보적 존재로서 짝을 이룸으로 완전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짐승도 흙으로 창조하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이름을 짓게 하십니다. 여기서도 인간 창조 후 동물이 창조되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름을 지어주는 사람은 권위를 지닌 자입니다. 아담이 짐승들의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가 생물들에 대한 통치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와를 창조하신 방법과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우선 아담을 깊은 잠(타르데마 תרדמה)에 빠지게 하십니다. 구약 대부분의 사례에서 이 잠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발생한 영적 현상으로서의 깊은 수면 상태를 가리킵니다(창세기 2:21; 15:12; 사무엘상 26:12; 욥기 4:13; 33:15; 이사야 29:10).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여 그것으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갈비뼈로 아담의 짝을 만든 사건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와를 아담 위에 군림하도록 머리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에게 짓밟히도록 발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와 동등하도록 그의 팔 아래 보호를 받도록 그의 옆구리로 만들었고, 그의 사랑을 받도록 그의 심장 곁에서 만드셨다’(Mattew Henry). 아담은 하와를 본 순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소리칩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인간의 발언인데, 어떤 측면에서 인류 최초의 사랑 고백입니다. 이 표현 역시 남자와 여자의 본질의 동등성을 가리킵니다. 24절은 소위 창조의 결혼 규례입니다. 남자는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근동에서 결혼을 통해 새 가정을 꾸리더라도 대가족의 일원으로 족장의 통제 하에 함께 거주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물리적 의미의 떠남이 아니라 관계적 의미의 떠남입니다. 남자의 우선순위는 이제 더는 부모가 아니라 아내입니다. 둘이 합한다는 동사 다바크(ק󰔨󰕏)는 부부의 강한 결속을 잘 표현합니다.

부부의 결합은 이처럼 견고하며 따라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마태복음 19:6). 이 창조 시의 결혼 규례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 곧 일부일처제가 하나님의 의도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들의 벌거벗음이 부끄럽지 않았다는 것은 단지 육체적 측면으로만 이해되어선 안 됩니다. 이것은 최초의 부부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나 장벽이 없으며(Hamilton) 서로에게 열린 마음과 신뢰감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죄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의 완전했던 부부 관계가 어긋났으며,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치부를 부끄러워하며 감춰야 했습니다.


여자를 만들어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과업을 수행하도록 하십니다. 남녀는 존중과 이해, 대화와 타협으로 서로 돕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상태를 통해 사랑을 배우며, 폭넓은 인간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남녀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보여야 할 모범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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