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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6-01)


야곱과 에서의 자녀들

창세기 35장 23절 – 36장 8절


야곱과 에서의 삶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철저히 지키시는 분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모두 많은 자녀를 얻고, 이 땅에서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됩니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들은 마음을 모으고, 예전의 앙금을 완전히 털어 냅니다. 비록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에서도 신실하게 돌보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줄 믿고 있습니까?

  

야곱이 20년 동안 밧단아람에 살고 있을 때, 가나안의 남은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본문은 공백으로 남깁니다. 35:27에 와서야 이삭이 브엘세바에서 기럇아르바의 마므레, 곧 헤브론으로 거처를 옮겼음이 확인됩니다. 야곱이 에서와 상봉한 장면으로부터 35장까지 서사의 시간 흐름은 우리에게 상당한 어려움을 안깁니다. 분명한 것은 창세기 서사의 흐름은 가끔 시간이 이탈되면서 주제에 맞추어 본문이 배치되는 경우도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중간 총론 

앞서 미뤄놓은 문제로 현재 이삭은 어디에 있으며, 왜 야곱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후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삭의 흔적이 마지막으로 발견되고 야곱이 그를 찾아간다는 언급이 나오는 곳은 35장입니다. 방문에 대한 언급 직후 그가 180세에 사망하는 보고가 이어집니다(35:27-28). 그러나 35:27에서 야곱이 헤브론의 이삭을 방문한 이야기는 야곱의 삶에 대한 요약적 진술에서 언급되기에 실제 방문 시기는 야곱의 가나안 입성 초기일 가능성이 남아 있습니다.

부자상봉의 이야기가 빠진 이유로 한 가지 가능성은 성경의 서사는 많은 경우 크고 많은 공백을 남긴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야곱과 이삭은 이미 20년 만의 극적인 부자 상봉을 했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서사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거나 서사의 흐름을 깨트린다면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공백으로 남길 수 있습니다.

이삭이 매우 나이든 노인으로 현재 생존해 있더라도(창세기 35:29), 이미 그는 서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인물입니다. 현재는 야곱 이야기가 진행되며 등장인물들은 주인공 야곱을 중심으로 중대한 사건들의 무대에서 등장합니다. 따라서 별다른 목적이 없는 이삭의 재등장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서사에서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연속적 시간의 흐름은 무시되면서 주변적 사건들은 모두 생략됩니다. 따라서 20년 만의 부자상봉이 한 편의 인간 드라마로는 큰 감동을 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추적하는 서사의 드라마에서는, 예컨대 이스라엘의 미래 운명을 가르는 에서와의 상봉이나 세겜 사건과 달리 관심 밖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례로 라헬이 가져온 드라빔은 그녀가 성공적으로 숨겨왔다는 보고 이후에는(창세기 31:19, 34-35) 전면에서 사라집니다. 이 또한 독자들의 상상에 맡깁니다. 다만 드라빔이 결국 35장의 종교개혁에서 정리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족보와 이삭의 죽음(23-26)

야곱은 오랜만에 고향 헤브론으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이삭은 가족 무덤이 있는 마므레 근처에서 지내며 고요히 삶을 정리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리브가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하나님만을 독대하며 말입니다. 이젠 형처럼 분장하고 목소리를 변조해 아버지 앞에 설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23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23-26)

베냐민의 탄생과 더불어 비로소 야곱의 아들들은 열두 명으로 구성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아들들의 명부가 제시되는 것은 적절합니다. 소개되는 서열은 야곱이 결혼한 순서입니다. 레아 라헬 빌하(라헬 여종)-실바(레아여종), 그리고 각 아내의 아들들은 태어난 순서입니다. 이것을 도표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모친 지파 출생순서 12지파 번호
레아 르우벤 1 르우벤 1
시므온 2 시므온 2
레위 3 -  
유다 4 유다 3
잇사갈 9 잇사갈 4
스불론 10 스불론 5
다나(딸) -    
빌하
(라헬의 종)
5 6
납달리 6 납달리 7
실바
(레아의 종)
7 8
아셀 8 아셀 9
라헬 요셉 에브라임 11 에브라임 10
므낫세 므낫세 11
베냐민 12 베냐민 12
*12지파에서 레위는 빠짐 * 딸 디나는 제외

장차 요셉에게서 태어날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나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함께 수록합니다. 도표는 결혼한 순서가 아닌 각 아내들이 첫 번째 자녀를 갖게 된 순서에 따른 것입니다. 열한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 곧 디나가 밧단아람에서 태어났습니다. 앞서 세계 사람들과의 협상에서 나온 대화를 통해 추론했듯이, 야곱에게는 디나 외에 다른 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아들들을 낳았기 때문에 비슷한 숫자의 딸들이 있었을 개연성이 큽니다.

 

이삭의 죽음(27-29)

이삭은 나이 180세의 나이로 조상들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던 이삭은 야곱이 떠난 후로도 80년을 살았습니다. 어쩌면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80년을 살아낸 건지도 모릅니다. 야곱이 형과 화해할 때까지, 어엿한 언약의 후계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27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27-29)

무대에서 사라졌던 이식이 그의 죽음에 대한 보고와 더불어 다시 등장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여기서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만나러 가는 장면을 드디어 처음으로 접합니다(27).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 짧은 상봉에 대한 기사가 시간의 순서대로 배치되었는지 의문입니다. 현재 서사의 흐름은 열두 아들의 완성과 더불어 이삭의 죽음을 보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따라서 이 위치에서 저자는 야곱이 사실은 이미 아버지를 만났다는 것을 독자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저자는 그동안 그 일을 곁가지로 취급하고 큰 공백으로 남겨두었을 것입니다. 아마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가나안 입성 초기에 만났을 것입니다. 20년 세월 동안 아버지 이삭의 거주지도 브엘세바에서 헤브론(기럇아르바의 마므레)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삭의 죽음과 장례가 보고됩니다. 그는 향년 180세의 나이였으며 부모인 아브라함과 사라와 함께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창세기 49:29-32). 장수한 이삭의 존재가 오래도록 서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것은 그가 족장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명 기간 전체가 이삭의 족보로 묶였습니다. 이제 이삭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족보가 막을 내리고 이어서 에서의 족보로 바뀝니다.

 

에서의 족보와 야곱과의 분리(36:1-8)

형과 함께 이삭을 막벨라 굴에 안장하던 날, 야곱은 아비저의 유언대로 언약을 이어가기로 다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형제에게 자손의 축복을 주셨고, 가축과 짐승, 재물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에서는 넓은 곳을 찾아 세일로 떠났지만, 야곱은 힘겹게 이른 가나안에 머뭅니다.

1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2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3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4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5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 6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7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1-8)

이삭의 죽음에 대한 기사에(35:27-29) 이어 내러티브는 그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마엘 약속하신 직계 상속자에서 제외된 아들의 족보가 약속의 상속자인 아들의 족보보다 먼저 등장합니다.

(1) 에서의 족보(1-5)

에서의 족보(톨레도트)는 다시 구조의 전환점입니다. 앞서 28:9에서 말한 대로 에서의 아내들은 우리에게 난제를 던져줍니다. 그의 아내들의 이름과 출신이 28:9의 명부와 현재의 명부에서 서로 어긋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두 본문을 비교한 도표입니다.

창세기 26:34; 28:9 창세기 36:2-3
26:34 28:9
헷 여인 헷 여인 이스마엘 딸 헷 여인 히위 여인 이스마엘 딸
브에라의 딸
유딧
엘론의 딸
바스맛
느바욧의 누이
마할랏
엘론의 딸
아다
시브온의 손녀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세 가지 방안이 제시됩니다. 1) 족보들이 전수 과정에서 훼손되어 자료의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2) 어떤 이름들은 예명입니다; 3) 에서는 세 명 이상의 아내를 얻었습니다.

첫 번째는 대부분의 비평학자의 견해입니다. 그러나 최종 본문을 고도의 문학적 기법으로 완성한 저자가 이런 명백한 차이를 보이는 두 자료를 아무렇게나 삽입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두 번째 대안처럼 아마 야곱/이스라엘, 베노니/베냐민, 그리고 에돔/에서와 같이, 같은 인물에 대한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다만 헷 족속 브에리의 딸과 다른 종족으로 소개되는 히위 족속 시브온의 손녀 오홀리바마는 등치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혹시 유딧은 아버지(브에리) 계열로 소개되고 오홀리바마는 어머니 (아나) 계열로 소개되고 있는 것에 어떤 해답이 있는지 모릅니다.

(헷) 브에리의 딸: 유딧 = (히위) 시브온 손녀 오홀
리바마(?)
(헷) 엘론의 딸: 바스맛 = (헷) 엘론의 딸 아다
이스마엘의 딸: 마할랏 = 이스마엘의 딸 바스맛

 (2) 야곱과의 분리(6-8)

6-8절은 다시 한 번 앞서 공백으로 남긴 부분을 어느 정도 채웁니다. 에서는 세일 산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가 야곱을 마중 나왔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본문은 에서의 활동 범위가 훨씬 넓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에서의 주요 거점 지역은 여전히 아버지가 계시는 마므레 헤브론 지역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거기서 세일 산 일대로 진출하여 그곳을 점유해가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야곱의 도착 소식을 듣고 달려 나갔던 것으로 추론됩니다. 본 거점지인 헤브론은 야곱의 세력이 합세하여 갈수록 비좁은 상태가 되었습니다(7). 더 이상 동생 야곱과의 공동 거주가 불가능해지자 에서는 세일 산 일대로의 대이동을 단행합니다(6,8). 그리하여 에서가 야곱과 결별함으로써 두 종족이 분리되었습니다.


한 세대가 끝나고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가려면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제대로 깨달을 때까지, 나그네 삶에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속이는 자에서 이스라엘이 될 때까지 말입니다. 당신과 자녀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이어가야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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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5-01)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

창세기 35장 1-22절


새 길을 가려면 낡은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벧엘의 하나님을 잊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벧엘에서 새 길을 가라 말씀하십니다. 떠나기 위해 챙길 것과 버릴 것을 정리하다 보면 신앙의 민낯도 드러납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외에 다른 걸 품고 살았는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세겜에서 디나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거기 거하라 명령하라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할 때 그에게 임재하셨던 그 장소에 제단을 쌓으라 명하십니다(1). 이것은 분명 앞서 세겜 사건에서 살펴봤듯이 야곱의 심각한 영적 침체로 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벧엘은 세겜에서 남쪽으로 30km의 여행길이며 벧엘의 고도가 300m 더 높습니다. 벧엘은 야곱 인생의 대사건이 발생한 곳입니다(창세기 28:10-22).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지시(1-5)

세겜 성읍에는 살육과 애통의 흔적이 코를 찌르고, 야곱 가정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이젠 끝났다고 포기할 무렵,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야곱에게 벧엘이라는 비상구 하나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언제나 우리의 출발이 되어주십니다.

1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1-5)

이제 무대는 세겜에서 벧엘로 바뀝니다. 여기서 잠시 왜 야곱은 가나안에 들어온 직후 아버지를 뵈러 가지 않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 문제는 지면상 다음 본문에서 다루기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엘은 야곱의 인생이 바뀐 곳입니다. 그는 하란으로 도피하는 도중 벧엘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그때 야곱은 자신이 베고 잔 돌베개를 세워 기념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을 드립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면, 그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자신은 십일조를 바치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가 서원을 성취하도록 벧엘로 올라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벧엘 순례를 앞두고 야곱의 부흥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종교개혁입니다(2). 야곱은 집안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지시합니다. (1) 간직하고 있는 모든 개인우상들을 버리라; (2) 자신을 정결케 하라; (3) 옷을 갈아입으라(2). 아마 야곱의 아내와 자녀, 그리고 집안의 모든 일꾼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여전히 우상에 심취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우상은 아마 라헬이 가져온 드라빔과 같은 메소포타미아 우상들 및 세겜 성에서 약탈 후 입수했거나 다른 방식으로 획득한 가나안 우상을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은 여전히 영적 역기능 가정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더럽혀진 몸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목욕과 옷 세탁이 요구됩니다(레위기 12-15장). 야곱의 지시를 받은 모든 집안사람들이 자신들의 각종 신상들을 가져오고 귀고리를 빼서 야곱에게 건넸습니다.

귀고리를 모은 이유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귀고리가 종종 우상의 형상물을 제조하는 원료로 모아지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32:2-4; 사사기 8:24-27). 이방인 성에서 약탈한 합법적인 전리품의 사용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매장하는 것에서 옷은 제외되고 우상들과 귀고리들뿐이므로 이 둘은 분명히 우상숭배와 관련 있습니다. 옷을 갈아입는 것은 깨끗한 옷을 입으라는 명령으로 옷 세탁과 같은 의미로 보입니다. 야곱은 우상들과 귀고리들을 모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습니다(4). 이곳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창세기 12:6). 이 매장식은 우상과의 철저한 결별을 선언하는 상징적 행위로 보입니다. 이러한 준비는 마치 시내산에 도착 후 강림하실 하나님을 맞을 백성에게 지시한 명령과 비슷합니다(출애굽기 19:10). 야곱의 가족들도 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를 정결케 해야 합니다.

집안의 전면적 영적 쇄신을 이룬 후, 야곱은 모든 구성원들을 데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3). 야곱은 그동안 자신을 지키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것입니다. 야곱의 진영 모든 사람들이 벧엘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변 모든 고을들은 아마도 세겜 성 학살 사실을 전해들은 후 야곱과 그의 가족을 두려워하여 누구도 건들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가나안 종족들의 공포심은 행진해오는 여호수아 군대의 소식을 듣고 심장이 녹아내린 여리고 성과 가나안 사람들의 공포심을 예고합니다(여호수아 2:9,24; 14:8).

 

벧엘에서의 예배와 하나님의 임재(6-15)

드디어 도착한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 야곱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엘벧엘’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에서의 얼굴을 피해 떠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주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제야말로 진정 밧담아람에서 돌아왔다고 인정되자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르시며 복을 약속하십니다.

6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8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9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14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6-15)

야곱과 그의 사람들은 루스라 불리는 벧엘에 도착하여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장소를 ‘엘벧엘’이라 불렀습니다. 그 뜻은 ‘벧엘의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집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 이름에 야곱이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는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이 즈음 사망했습니다. 야곱은 그녀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지낸 후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칭했습니다. 이것은 ‘눈물의 상수리나무’라는 뜻을 갖습니다. 왜 갑자기 리브가가 아닌 그녀 유모의 사망 소식이 여기에 등장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리브가의 장례 소식은 창세기 마지마에 가서야 보고됩니다(창세기 49:31). 어쩌면 창세기 저자는 리브가가 사실상 야곱의 사기극의 주동자였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문책을 하는지 모릅니다.

9-15절은 드보라의 죽음이 방해를 하지만 아마 위의 벧엘에서 예배를 드린 뒤 거기서 두 번째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건을 별도로 기록한 부분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땅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후 다시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맹세했던 약속을 그에게도 상세히 전달하십니다.

요약하자면,

(1) 야곱은 이제 이스라엘로 칭한다;

(2) 생육하고 번성하여 너에게서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나오리라;

(3)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4) 너와 네 후손에게 땅을 주리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구입니다(11). ‘한 백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백성들의 총회’는 열국의 연합체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대로 열국의 아비가 된다는 의미라면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해서는 더 이상 이방 민족이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일차적으로 현재 야곱의 후손의 번성을 명령하고 축복하는 것이므로 애굽에서 형성될 거대한 민족을 내다보는 예언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가 ‘한 백성’을 이룰 것인데 그들이 각 지파마다 번성하여 민족과 같이 거대해짐으로써 ‘백성들의 연합체’와 같은 한 백성이 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고이’가 ‘지파’를 가리키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 약점입니다. 다른 견해로, 더 그럴듯하게는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에게 장차 다른 민족들이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 연합하여 민족들의 연합체를 이룬다는 예언일 수 있습니다(참조. 출애굽기 12:38; 신명기 23:1-8). 한편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는 약속은 후에 이스라엘이 왕정 체제가 되면서 실현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그 자리에 다시 돌기둥을 세웁니다. 이것은 예전에 세운 돌베개 삼았던 기둥과 별개의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20년 동안 방치되어 폐허가 된 벧엘 성소를(창세기 28:22) 복원하는 작업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파괴되고 폐허가 된 성소의 재건축과 복원은 당대에 흔한 일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기둥에 전제의 제물을 붓고 기름을 부은 뒤 다시 전과 같이 ‘벧엘’이라 칭했습니다. 이것은 복원되어 갱신된 벧엘의 이름입니다. 이로써 ‘벧엘’은 ‘엘벧엘’과더불어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되나 갱신된 이름 벧엘이 공식적으로 사용됩니다.

 

라헬의 죽음과 장례(16-22)

벧엘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 전, 야곱은 산고 끝에 라헬을 잃고 베냐민을 얻습니다. 만삭인 아내 때문에 세겜에서 짐을 푼 건진 알 수 없지만, 가장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야곱 가정의 사건사고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16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16-22)

야곱의 나그네 여정은 계속됩니다. 이제 그는 벧엘을 떠나 에브랏에 도착합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다른 이름입니다(19). 에브랏 근처에서 라헬이 출산을 하고 그녀는 사망합니다. 그녀는 사망 직전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습니다(18). 그러나 남편 야곱은 그 이름의 뜻이 부적절해서인지 아기의 이름을 베냐민으로 불렀습니다. 라헬은 에브랏(베들레헴) 근처에 매장되었고 야곱은 그녀를 위해 묘비를 세웠습니다(20).

야곱의 개명된 이름 이스라엘이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그는 에브랏을 떠나 에델 망대에 머물렀습니다(21). ‘양떼 망대’라는 이름을 지닌 이곳은 아마 베들레헴 북쪽 8km 지점 예루살렘 근처의 한 장소로 보입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집안이 풍비박산하는 사건이 터집니다.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을 했고 이스라엘이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22). 갱신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집안에 다시 음울한 기운이 감돕니다. 아마도 르우벤의 범행은 다분히 정치적이었을 것입니다. 라헬의 여종 빌하를 더럽혀서 라헬이 죽은 뒤 그녀가 라헬 대신 본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습니다. 그는 장자권을 박탈당하고 요셉이 그것을 이어 받습니다(역대상 5:1). 야곱은 마지막 유언에서 그는 ‘끓는 물과 같고 탁월치 못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창세기 49:4). 이것은 장자권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더 두려워해야 할 때는 사면초가의 위험에 빠져있는 상황이 아니라 헤쳐 나갈 의지도, 기도할 용기도 다 증발해버린 때일 것입니다. 다시 시작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벧엘에서 맞이할 새 길을 준비하시고 초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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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4-02)


이웃에게 악취가 된 하나님의 백성

창세기 34장 18-31절


사람들은 누구나 검 한 자루를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그 검이 품을 잘못된 목적에 사용될 때, 칼자루가 향하는 곳이나 칼끝이 향하는 곳 모두 위험해집니다. 광기가 제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야곱의 아들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18). 협상 결과에 크게 마조 협상안을 실천에 옮겼습니다. 이것은 그가 솔선수범하여 할례를 먼저 받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이 집이 아닌 세겜으로 돌아간 후일 것입니다. 그의 신속한 행동 또한 디나에 대한 그의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19). 특히 세겜은 하몰의 총애를 받는 아들이었기에 하면 역시 디나에 집착했을 것입니다.

 

할례 요구를 실행한 세겜과 주민들(18-24)

야곱의 아들들이 제시한 협상안을 전격적으로 수용합니다. 하몰 부자는 할례만 받으면 친목 도모는 물론이고 경제효과를 거둘 수 있다며 실의에 무게를 두고 여론몰이를 했습니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지도자가 자기 패를 숨긴 채 섬겨야 할 사람들을 상대로 위험한 베팅을 합니까!

18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19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존귀하였더라 20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이 그들의 성읍 문에 이르러 그들의 성읍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21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데려오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22그러나 우리 중의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음 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23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 24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18-24)

협상을 마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크게 만족했습니다. 세겜은 지체 없이 합의 사항을 준수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즉시 할례를 시행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협의 사항 전반을 말합니다. 세겜은 무엇보다 디나를 사랑했지만 하몰에게는 그 이상의 야욕이 있었습니다.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그들의 ‘성읍 문’에 도착해서 긴급회의를 소집한 후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여기서 세겜이 성벽과 성문을 가진 ‘성읍’(이르)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하몰과 세겜은 자신들의 원래 목적을 감추고 경제적 교류의 측면에서만 이 협약의 중요성을 주민들에게 설득합니다. 그들의 능숙한 언변과 효과적인 설득은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거대한 세력으로 다가온 야곱 가족과의 관계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랄 사람들처럼 무력으로 그들의 경제적 활동을 방해하지 않았으나 근본적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하몰과 세겜은 그들과의 공동거주가 가져다줄 매력적인 경제적 이익을 부각했습니다(21). 자신들의 땅은 넓으니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득합니다. 세겜 지역은 그리심 산과 에발 산이 나란히 서 있는 현대의 나블루스(Nablus) 시 일대로 고원의 넓은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들이 내놓은 제안은 야곱 가족들이 자신들 가까이 살게 하면서 상호 교역을 하자는 것입니다. 앞서 하몰과 세겜은 야곱의 아들들 앞에서는 ‘기업(땅)을 얻으라’는 조건도 달았었습니다(10). 이것은 토지매매의 허용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의도적으로 그 협상안은 제외하고 있습니다. 한번 토지가 매각되면 영원히 소유권이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세겜 주민들은 야곱 가족이 땅 없이 나그네(게르)의 신분으로 그들과 공동 거주하는 것을 희망했을 것입니다. 하몰과 세겜은 더 매력적인 협상 결과를 내놓습니다. 바로 통혼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그들의 발언에서 그들의 야욕과 더불어 세겜 성읍 주민들의 야욕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통혼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문화적 경제적 흡수입니다(23). 그들은 힘주어 말합니다. 만일 그들과 통혼을 시작하면 이제 피가 섞임으로써 그들과 야곱 가족은 진정한 ‘한 민족’이 될 것이며, 그 결과 야곱 가족은 세력이 더 큰 세겜에 흡수되어 야곱의 세겜화(Shechemization)가 이루어질 것입니다(23). 결국 그들의 모든 재산과 자산은 세겜의 것이 됩니다. 하몰과 세겜은 지금 통혼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통혼은 반드시 그들이 말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세겜과 하몰은 이 거대한 야욕을 드러내면서, 더불어 세겜의 사랑까지 성취하는 일석이조의 결과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겜 사람들을 향해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기꺼이 할례를 감행하자고 설득합니다. 할례는 돈보다 강하지 않았습니다. 하몰과 세겜 사람들은 돈을 위해 기꺼이 할례를 받아들입니다. 그들에겐 할례의 종교적 의미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세속화한 할례를 악용하여 복수극의 목적을 이루려 하고, 세겜 사람들 또한 세속화된 할례를 이용해서 경제적 목적을 이루려 합니다. ‘성읍 전체가 이스라엘을 이용해 먹으려는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Waltke). 그리하여 세겜의 모든 남자들, 곧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성인 남자들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할례 행사가 바로 성문에서 이루어졌음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학살극(25-29)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 구출 작전의 비밀요원으로 분하여 기습 공격을 펼친 끝에 성내 모든 남자와 하몰 부자를 몰사하고 디나를 구출해냅니다. 형제의 분노는 다른 형제들에게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심판의 칼을 휘둘렀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불의로 마치고 있습니다.

26칼로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27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읍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 까닭이라 28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읍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29그들의 모든 재물을 빼앗으며 그들의 자녀와 그들의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26-29)

할례를 받은 후 통상적으로 상처가 아물기 위해서는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사흘째 되었을 때는 여전히 큰 통증을 느끼며 거동하기 쉽지 않습니다. 성읍의 건장한 남자들이 모두 집단으로 누워 있거나 거동을 잘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야곱의 아들들의 공습이 감행되었습니다. 디나의 오빠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서 세겜을 급습했습니다(25). 아마 그들은 집안 종들을 무장시켜 동원했을 것입니다. 시므온과 레이는 어머니 레아에게서 태어난 디나의 친오빠들입니다. 그들이 디나의 복수극을 위해 가장 크게 분노하며 앞장선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통제되지 않은 분노는 비참한 대량 학살극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할례 후유증으로 누워 있거나 거동이 불편한 모든 성인 남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찾아 응징한 뒤 디나를 세겜의 집으로부터 구했습니다(26). 이어서 야곱의 다른 형제들이 사체가 즐비한(원문은 ‘사체들 위로 갔다’) 세겜 성으로 들어가 성안의 모든 물품들을 노략했습니다(바자즈). 동사 ‘바자즈’의 사용은 이것이 승전한 군대가 정당하게 챙기는 전리품이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성안의 모든 가축과 들판의 가축을, 그리고 모든 재물과 각 집안의 물건들을 탈취하고, 그들의 자녀와 아내들을 포로로 잡아왔습니다(29). 이런 학살극과 약탈극의 명분이 짧게 서술됩니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누이를 더럽힌(티메) 까닭이라’. 하몰과 세겜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신부 값을 치렀습니다. 앞서 출애굽기 언약법전의 내용대로 처녀를 유혹하거나 처녀의 동의 없이 강제로 잠자리를 가진 경우 아버지는 그 딸의 신부 값(처녀성을 잃은 대가)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딸을 그 범인에게 내어주지 않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 법을 기준으로 볼 때, 하몰과 세겜은 너무 비싼 신부 값을 치른 셈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를 책망하는 야곱(30-31)

오랜 침묵을 깨고 열린 야곱의 말문은 온통 자기뿐이었습니다. 디나의 안위를 묻지도 않고, 잘못을 시인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 큰 비극의 중심에 야곱 자신이 서 있었음에도 아들들만 책망합니다. 후일 야곱의 역사에, 하나님의 역사에 큰 부끄러움으로 남을 것입니다.

30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31그들이 이르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30-31)

잠잠해 있던 야곱이 분노하고 시므온과 레위를 불러 책망합니다. 하지만 그는 피해자인 디나에게 여전히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두 아들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문젯거리를 만들었다고 꾸짖습니다(30). 야곱은 자신은 약자이기에 가나안 족속들이 모두 결집해 세겜의 학살극을 복수한다면, 이제 ‘나와 내 집이 멸망할 것’이라고 걱정합니다. 여기서 그가 왜 디나가 일을 당한 후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암시됩니다. 그는 영적으로 둔감해졌으며, 또한 가나안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들과 갈등을 빚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의 발언 수위는 그가 얼마나 영적으로 깊은 바닥까지 내려갔는지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은 굳게 선다. 그 집은 영원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야곱은 자신의 집의 멸망을 걱정하는 중입니다. 아들들은 오히려 아버지에게 따집니다. 큰 수치를 당해놓고 침묵한 아버지는 정당했는지 묻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누이를 창녀같이 대한 세겜 사람들에 대한 응징은 정당했다고 주장합니다.

학살극의 후유증은 컸습니다. 특히 주동자 시므온과 레위는 이 일로 인해 후손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훗날 아버지 야곱의 유언에서 그들에게 저주가 선언됩니다. 시므온은 장남 르우벤에 이은 차남입니다. 아마 이 학살극을 시므온이 주동한 것으로 추론됩니다. 야곱의 유언적 예언에서 이로 인한 시므온을 향한 가혹한 저주가 선언됩니다(창세기 49:5-7). 시므온의 미래는 야곱의 예언 기도에 이미 암시된 대로 ‘야곱 중에서 나뉘고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질 것이다.’ 실제로 역사가 진행되면서 시므온 지파는 땅을 얻되 유다에게 종속되어 더부살이를 하게 됩니다. 이후 시므온 지파는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집니다. 더구나 이상하게 시므온은 훗날 모세의 예언에서는 아예 축복의 대상에서 누락되어 있습니다(신명기 33장). 아마 이 사건에서 그가 과도한 폭력을 행사한 대가였을 것입니다. 레위에게도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야곱의 입에서 징벌적 예언이 선언됩니다(창세기 49:5-7). 잔혹한 행위에 대한 대가로 역시 땅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실제로 훗날 레위 지파는 땅을 별도로 얻지 못하고 48개의 레위 도성에 흩어져서 더부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금송아지 사건의 활약으로 저주의 운명이 축복으로 반전되는 은혜를 얻습니다(출애굽기 32-34장). 레위 도성에 살아야 하는 저주는 유효하되 성막지기라는 거룩한 직무를 수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의 유언에서 레위 지파의 미래를 예언하면서 이 사실을 확정짓습니다(신명기 33장).


우리는 모두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얼굴의 괴리가 커질 때가 하나님의 형상에서 멀어지는 때입니다. 우리가 내세우는 명분은 아름답습니다. 한껏 우아합니다. 그러나 그 속도, 그 뒷모습도 그러한지는 자신만 압니다. 뒤돌아선 그 뒤태도 우아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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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4-01)

 


세겜에게 겁탈 당한 디나

창세기 34장 1-17절


우리는 세상이 주는 안정과 평안에 물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벧엘로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서원한 야곱이 세겜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생긴 일입니다. 세겜에 살면서 동화되기 시작했고, 결국엔 세겜의 폭력적인 문화에 디나가 희생당한 것입니다. 야곱이 있어야 할 장소는 세겜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서 있는 곳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입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사명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야곱은 얍복 강 근처 숙곳에 잠시 머물고 난 후 세겜으로 옮겨왔습니다. 숙곳과 세겜 땅에 거주한다는 것은 그가 그 땅의 소유자로서 거기에 뿌리내리기 시작했음을 알립니다. 세겜 땅도 그의 영속적 정착지는 아닙니다. 이후 그는 계속 거점을 옮겨 다닙니다. 이삭은 그랄 땅에서 브엘세바로 옮겼고(창세기 26:23), 야곱은 20년 전 브엘세바에서 이삭과 이별한 뒤 하란 땅으로 떠났습니다(창세기 28:10).

 

 겁탈 당하는 디나(1-4)

디나는 이사 온 곳에 또래 여자 친구들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디나가 동성 친구를 발견하기도 전, 한 이성의 눈에 발견되어 순결을 잃습니다. 족장의 아들이라는 우월한 지위에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포장한 사랑이란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범죄행위였습니다.

1레아가 야곱에게 낳은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더니 2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의 추장 세겜이 그를 보고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하고 3그 마음이 깊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며 그 소녀를 사랑하여 그의 마음을 말로 위로하고 4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청하여 이르되 이 소녀를 내 아내로 얻게 하여 주소서 하였더라(1-4)

 얼마 후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 소규모현재의 사건은 야곱의 가족이 세겜 땅으로 옮겨온 후 발생합니다. 세겜은 그리심 산과 그발 산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현대의 나블루스(Nablus) 시입니다. 참고로 우리는 왜 야곱이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가지 않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삭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이 문제는 나중에 상세히 다루기로 합니다. 디나는 야곱의 열두 자녀 중 유일한 딸로서 레아가 마지막으로 낳은 아이입니다(창세기 30:21), 아직 라헬의 막내 베냐민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디나가 세겜 땅의 여자들을 만나러 외출을 했습니다. 참고로 세겜 땅의 이름은 그 땅의 추장 세겜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습니다. 세겜은 하몰이라는 인물의 아들입니다(2). 현대인의 관점에서 불편한 설명이며 불합리한 일로 보이겠지만, 처녀가 당시 혼자 다른 혈족의 성읍이나 마을을 방문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혈족으로 구성된 지역에서 여자들이 홀로 우물에 물 길으러 다니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가족들이 그들 문화에 위험하게 흡수되고 있음을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나중에 야곱 가족이 세겜 가족에게 비록 위장 전술이긴 했지만 할례를 받는 조건으로 사돈을 맺자는 제의에 세겜 가족이 쉽게 동의했던 점에서도 확인됩니다. 통혼과 문화적 소통은 종교적 소통으로 이어집니다. 세겜을 포함한 가나안의 딸들은 아브라함 후손의 혼인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신붓감을 멀리 밧단아람에서 구해왔으며, 에서의 첫 여인들과의 결혼은 이삭과 리브가를 근심하게 만들었습니다. 디나가 만나러 간 여자들을 굳이 ‘그 땅의 딸들’로 표현하는 이유는 이러한 부적절성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세겜 땅 주민은 히위 족속이었습니다. 히위는 함의 후손인 가나안으로부터 분파되어 나온 종족입니다(창세기 10:15-18). 말하자면, 히위 족속은 가나안의 여러 종족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비가나안 족속인 블레셋 종족을 제외하고 가나안 종족 중에서 할례를 받지 않은 유일한 종족이었습니다. 이렇듯 야곱의 가족이 그들과 거리를 두고 소통해야 했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하몰의 아들 세겜은 세겜 마을의 성주였습니다. 그는 디나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를 끌어들여 겁탈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그가 그녀를 취해 그녀와 잠을 잤으며, 그리고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세겜이 처음에는 디나를 유혹해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고 이후 디나를 성적으로, 혹은 물리적이나 인격적으로 능욕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와 역본들은 세겜이 디나를 겁탈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네피림 폭군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상대가 권력자인 경우 단순히 ‘취하다’라는 동사만으로 강제력이 표현되기 때문입니다(창세기 6:2).

그러나 세겜은 디나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3). ‘그 마음이 깊이 디나에게 연연했다’는 문자적으로 (그의 혼(네페쉬)이 디나에게 ‘밀착되었다(다바크)’입니다. 그는 디나의 마음을 달랬습니다. 하지만 세겜은 그녀에게는 물론 디나의 가족에게 아무런 잘못도 빌지 않습니다. 세겜은 아버지 하몰에게 그녀를 야곱에게서 데려와 자신의 아내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합니다(4). 훗날 출애굽기의 시내산 언약 법전과 신명기의 율법은 이 상황에 대해 상세한 규정을 마련합니다(출애굽기 22:16-17; 신명기 22:28-29). 출애굽기 22:16-17에 의하면,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유혹해 동침하면, 그는 상실된 처녀성을 대가로 납폐금(신부 값)을 물고 그녀를 아내로 삼아야 합니다. 아마 이것은 처녀 강간의 경우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처녀의 아버지가 그 남자를 맘에 안 들어 한다면, 신부 값만 받아내고 딸은 주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처녀에게 큰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라도 남자의 책임이 무거웠습니다(참조. 신명기 22:23-27, 이 법은 사례가 약간 다르다). 이 법에 따른다면, 피해자인 딸의 아버지가 강간범에게 큰 벌금을 받아내고 그녀를 아내로 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현재 세겜은 디나를 강간한 후 오히려 협상을 요구하며 야곱 식구들을 압박하는 형국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아들들을 분개하게 만들었습니다.

 

사건 수습을 위한 하몰의 청혼(5-12)

배제된 피해자 두 가족이 협상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하몰은 합법적인 거주권을, 세겜은 제한 없는 신부 값을,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제안했습니다. 조건만 놓고 보면 하몰과 세겜의 제안이 실로 파격적입니다. 하지만 야곱의 아들들은 그들의 제안에 휘둘리지 않고 협상의 주도권을 확보합니다.

5야곱이 그 딸 디나를 그가 더럽혔다 함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들에서 목축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까지 잠잠하였고 6세겜의 아버지 하몰은 야곱에게 말하러 왔으며 7야곱의 아들들은 들에서 이를 듣고 돌아와서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음이더라 8하몰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 세겜이 마음으로 너희 딸을 연연하여 하니 원하건대 그를 세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라 9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여 너희 딸을 우리에게 주며 우리 딸을 너희가 데려가고 10너희가 우리와 함께 거주하되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여기 머물러 매매하며 여기서 기업을 얻으라 하고 11세겜도 디나의 아버지와 그의 남자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로 너희에게 은혜를 입게 하라 너희가 내게 말하는 것은 내가 다 주리니 12이 소녀만 내게 주어 아내가 되게 하라 아무리 큰 혼수와 예물을 청할지라도 너희가 내게 말한 대로 주리라(5-12)

야곱은 자신의 딸 디나가 세겜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말을 들었으나 즉시 행동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목축을 하고 있는 들판에 즉시 사람을 보내 아들들을 소집하지 않고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잠잠했다’(하라쉬)는 말은 야곱의 무감각 내지는 무책임성을 잘 드러냅니다.

이때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세겜과 함께 문제의 수습과 청혼을 위해 야곱을 방문했습니다. 본문은 왜 그가 세겜에게 즉각 대응하지 않고 수동적 태도를 취했는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본문은 아들들의 극도의 분노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수동적 태도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얍복 강 씨름장의 챔피언 야곱이, 에서 앞에서 목을 내놓았던 그가 갑자기 무기력해진 모습에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겜 땅에 살면서 그들과 소통하며 느슨해진 야곱의 영적 상태를 암시하는지 모릅니다. 30절에 비추어 볼 때, 어쩌면 그는 그 땅의 사람들을 자극하거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이를 뒷받침하는 듯이, 이 사건 후 35장에서 하나님은 야곱과 그의 모든 집안사람들의 영적 갱신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들판에서 이 소식을 듣고 즉시 돌아왔습니다. 그들의 격앙된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근심하고 심히 노하였습니다. 막사에서 잠잠히 진행되던 협상의 판이 깨졌습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네발라)이었습니다(7). 여기서 민족명 혹은 국가명 ‘이스라엘’이 느닷없이 사용됩니다. 이것 역시 모세 이후 오경의 추가적 계시와 더불어 정경을 편성한 자가 당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추가한 설명일 것입니다. 이것은 당대의 이스라엘 독자에게 큰 공감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협상의 주도권은 야곱에게서 그의 아들들에게로 넘어왔습니다. 하몰은 그들에게 세겜의 진심 어린 사랑을 전달하며 디나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의 청혼은 매력적인 통혼과 공동 거주의 제안으로 이어집니다(9-10). 통혼은 아브라함 가문에서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몰은 이 사건을 그들과의 연합의 기회로 삼으려 애씁니다. 상호매매를 통한 경제적인 이득도 보장해주었을 것입니다(10). 참고로 하몰이 야곱에게 ‘너희 딸들을 우리에게 주며’라고 하는 말에서 야곱의 서사에 등장하지 않는 다른 딸들이 있을 가능성을 내비칩니다(9). 하몰의 아들 세겜도 그들을 설득합니다. 그는 야곱의 가족들의 요구 사항을 다 들어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디나를 주면 넉넉한 신부 값과 더불어 추가적인 예물을 감당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자체로는 실제로 세겜이 디나를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디나의 마음을 얻지 못한 사랑이며 그의 욕망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더구나 세겜과 하몰은 현재 디나를 볼모로 잡아놓고 협상 중입니다.

 

속임수를 꾸미는 야곱의 아들들(13-17)

타향살이의 버거움을 체험한 야곱이었기에 하몰의 제안에 흔들렸을지 모릅니다. 갓 이주한 소수정착민으로서 권력자의 제안을 거절하는 게 두려웠을 것입니다. 본문은 딸에 대한 야곱의 사랑이 세겜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고 고발하는 듯합니다. 어디에도 아버지 역할은 없었습니다.

13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 이는 세겜이 그 누이 디나를 더럽혔음이라 14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치가 됨이니라 15그런즉 이같이 하면 너희에게 허락하리라 만일 너희 중 남자가 다 할례를 받고 우리 같이 되면 16우리 딸을 너희에게 주며 너희 딸을 우리가 데려오며 너희와 함께 거주하여 한 민족이 되려니와 17너희가 만일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곧 우리 딸을 데리고 가리라(13-17)

야곱의 피가 아들들에게도 흐릅니다. 그들은 과거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세겜과 하몰을 속여 복수하기로 사전에 음모를 꾸민 것으로 보입니다(13). ‘속임수로 대답했다’는 말에서 익숙한 단어 ‘속임수’(미르마)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인물 평가에 따라다닌 수식어였습니다(창세기 27:35). 이 음모에는 아버지 야곱이 동참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참조. 창세기 49:6).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과 하몰에게 ‘할례’를 명분 삼아 디나를 줄 수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할례를 통해 그들이 동일한 정체성을 확보하고 통혼을 통해 한 민족으로 합해질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통혼이 금지된 그들이 통혼이라는 미끼를 사기극에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세겜과 하몰은 그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의 말이 자신의 가치관을 대변한다면, 우리의 침묵이 누군가를 살게도 죽게도 한다면, 입을 열고 다무는 데 좀 더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앉게 될 테이블에 오늘도 수많은 이야기가 오갑니다. 탐심을 자극하기보다 인간애로 깊이 다가가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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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3-01)

 

 


형 에서와 화해하는 야곱

창세기 33장 1-20절


 사이가 멀어진 두 형제가 만났습니다. 둘이 충돌하여 형은 전복되었고 동생은 우회하였습니다. 형제애는 사라지고 빼앗긴 자와 빼앗은 자로 날을 세웠습니다. 두 형제에게 다른 시차가 존재합니다. 형에게는 세겜의 시간이, 동생에게는 하란의 시간이, 여전히 야곱은 자기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마하나임의 환상과 얍복 강변의 씨름에서 연거푸 하나님의 사자들과 하나님(하나님의 사자)을 만난 야곱은 만반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곁에 계셨습니다. 야곱은 ‘눈을 들어’ 멀리서 에서가 400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대에 다시 긴장감이 돕니다. 야곱은 가족들과 함께 에서를 영접하기 위해 가족들을 분리했습니다. 현재 그는 비상사태를 대비해 모든 대열을 두 진영으로 나누어놓은 상태입니다. 이번에는 가족들을 나누어 에서를 맞을 준비를 합니다.

 

야곱과 에서의 상봉(1-4)

형은 야곱에게 달려오고, 야곱은 일곱 번 절하며 나아갑니다. 형은 야곱을 동생이라 부르며 반가움을 표하지만, 야곱은 형을 주라 부르며 장정 400명을 경계합니다. 한사코 마다하는 형에게 예물을 강권하기 바쁩니다. 야곱은 형과 만났지만 아직 마음을 열지 못했습니다.

1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3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4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1-4)

야곱은 멀리서 에서가 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가족과 더불어 그를 맞을 준비를 합니다. 그는 가족들의 조를 짰습니다. 먼저 모든 자녀들을 각자의 어머니에게로 가게 했습니다(1). 라헬과 레아, 그리고 그녀들을 섬기는 두 여종입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순서로 줄을 세웠습니다. 에서를 기준으로 역순으로 배치했습니다. 제일 앞에 두 여종과 그들의 자식들을 배치했습니다. 둘째 줄에 레아와 그녀의 자식들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맨 뒤에 라헬과 요셉이 서게 했습니다. 이러한 배치는 명백히 에서의 만일의 공격에 대비해서 가장 아끼는 가족을 가장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한 번 그가 라헬을 얼마나 아끼는지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그의 이러한 노골적 편애가 불러올 비극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가 가장 아끼던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가장의 자격으로 맨 앞에 나가 에서를 영접했습니다. 그는 몸이 땅바닥에 닿을 만큼 정성껏 절을 올리며 그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일곱 차례 계속된 이 절은 코와 이마가 땅에 닿을 만큼 큰 절이었습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따라서 일곱 번의 절은 완전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이러한 예법은 제국의 왕을 방문하는 속국의 왕이나 신하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야곱의 예법은 왕을 알현하는 신하의 것입니다. 일곱 번 절을 하며 천천히 다가오는 야곱을 본 에서는 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종주국의 왕은 결코 속국의 봉신에게 달려가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종으로 여기고 있으나 에서는 그를 형제로 맞이하고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에게 달려와 그를 껴안았습니다.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함께 울었습니다.

에서가 이토록 야곱을 격하게 환영한 이유는 분명히 그가 야곱에게서 받은 막대한 양의 진심 어린 선물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분명 에서에게는 선물이 아니더라도 과거의 앙금이 말끔히 사라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20년 만의 가족 상봉을 기대하며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령들의 소식을 접한 즉시 400명의 장정을 이끌고 그에게 달려온 것입니다. 무장한 400명의 장정은 군대 급이었는데 그것은 야곱 일행의 안전한 귀향을 위해 그들을 호위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는 도중에 야곱이 보낸 연거푸 세 차레의 막대한 선물을 보고 필시 그는 뜨거운 마음이 벅차오르며 감격했을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에서의 환대(5-12)

형이 먼저 손 내밀며 앞장서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라반이 그러했듯(창세기 31:52) 돌기둥에 돌무더기라도 쌓아 불가침 조약이라도 맺고 싶은 심정입니다. 야곱이 에서와 만난 그 자리는 경계석만 없을 뿐, 서로 발을 섞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갈르엣(창세기 31:47-49)이었습니다.

5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6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7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8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9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10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11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12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5-12)

환대를 하러 나간 야곱이 오히려 환대를 받고 있습니다. 에서의 환대는 야곱의 가족들에게로 확대됩니다. 에서는 야곱의 식구들로 보이는 여자들과 자식들을 보고 그들이 누구냐고 신분을 확인합니다. 야곱은 ‘주(에서) 의 종’인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라고 답합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에서의 종으로 칭합니다. 야곱이 여기서 하나님에 대해 사용한 ‘은혜’라는 단어는 곧이어 에서에 대해서도 사용됩니다. 여기서 야곱은 아내들을 언급하지 않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간단히 자식들만 언급해도 아내들은 자동적으로 신분이 확인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은 그 자녀들을 얻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들과 아내들 간의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이 있었음에도 그 모든 자녀를 하나님의 ‘은혜’로 얻었다고 고백합니다(5). 야곱의 소개가 끝나자 가족들이 차례로 에서에게 나아와 절을 올렸습니다. 먼저 맨 앞줄의 두 여종인 빌하와 실바가 그들의 자식들과 함께 절을 했습니다(6). 이어서 레아와 그녀의 자식들이 절을 하고 마지막에 라헬과 요셉이 다가와서 절을 올렸습니다(7).

에서는 이어서 야곱이 사전에 보낸 가축 떼에 대해 물었습니다(8). 야곱은 다시 한 번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앞서 하나님께 사용했던 ‘은혜’가 이제 에서에게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야곱이 이제 에서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야곱은 정직하게 형의 용서와 자비를 요청합니다. 에서는 은혜를 베풉니다. 그는 동생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에서의 모습에서 먼지 은혜를 베풀고, 특별히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그는 동생 야곱을 위해 그의 선물을 사양합니다. 에서는 야곱을 ‘내 동생’이라 부릅니다. 야곱은 계속해서 형을 ‘주’라 부르며 자신은 ‘종’으로 불러 낮추고, 에서는 계속해서 그를 동생으로 맞아들이며 동생으로 호칭합니다. 에서의 은혜입니다. 에서도 막대한 가축을 거느린 거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에서는 야곱을 배려해서 그 가축 떼를 야곱이 그대로 간직하라고 권합니다(9). 여기서 우리는 에서가 베푸는 ‘은혜’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을 대신하여 야곱에게 ‘은혜’를 베풀고 있는 셈입니다.

선물을 둘러 싼 두 사람의 씨름이 잠시 진행됩니다. 야곱은 다시 한 번 그 선물(민하)을 받아달라고 요청합니다(10). 이미 야곱은 에서의 ‘은혜’를 받은 셈입니다. 이제 은혜를 받은 자로서 그는 감사의 예물로 그것을 에서에게 선물하고 싶어 합니다. 조건 없는 용서와 은혜를 베푼 에서는 마치 야곱에게 하나님과 같은 인물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표현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브네 엘로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얍복 강의 씨름장에서 뵈었던 하나님의 얼굴과 에서의 얼굴이 겹칩니다. 에서의 얼굴은 브니엘(프니엘,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이어지는 야곱의 말 또한 놀라운 의미를 내포합니다.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동사 ‘라차’는 ‘기쁘게 받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을 표현하는 동사입니다. 야곱은 다시 그 ‘선물’(베라카)을 받아 들라고 강권합니다. 마치 에서는 야곱의 하나님과 같이 그와 그의 예물을 기뻐합니다. 야곱의 거듭된 간청을 못 이겨 에서는 야곱의 예물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위의 10절에서는 선물이 ‘민하’로 표현되나 11절에서는 그것이 ‘베라카’로 표현됩니다. ‘베라카’는 ‘복’을 뜻합니다. 월키의 통찰은 놀랍습니다. ‘선물’(선물)로부터 예물로의 의도적이고 중대한 변화가 관찰됩니다. 이 히브리어는 27:35-36에서 야곱이 처음에 훔쳤던 ‘복’을 가리키는 단어와 동일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에서에게서 취했던 그 ‘복’을 대신해서 어떤 ‘복’(개역개정, ‘예물’)바침으로써 절묘하게 배상을 합니다.

에서는 동생에게 이제 길을 떠나자고 말합니다.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내가 너의 맞은편에서 걸으리라’입니다. 의역하면 ‘내가 너와 나란히 걸으리라’입니다. 이것은 에서가 자신의 군사들과 더불어 야곱의 여행길을 지켜주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에서는 하나님과 같은 인물로 역할합니다. 형을 피해 도망가던 벧엘에서, 떠나오던 밧단아람에서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인도와 보호를 약속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대화를 통해 에서는 야곱과 동행하여 그를 보호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대신 성취하려 합니다.

 

야곱의 정착과 정착 기념물들(13-20)

20여년만의 계획은 서로의 간격만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야곱은 레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물만 건넬 뿐 마음은 건네지 않았습니다. 또한 라반에게 그랬던 것처럼 예우를 갖추되 선을 그었습니다. 결국 에서는 세일에서 왔다가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하란에서 왔다가 숙곳에 머뭅니다.

13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5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6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17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8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13-20)

야곱은 에서의 에스코트 제안을 정중히 거절합니다. 광야를 누비는 사람들의 속도를 목축하는 자신들이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하면서 에서를 먼저 떠나보냅니다(13). 야곱이 뒤따라간 뒤 나중에 세일로 가서 에서를 뵙겠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또 다른 속임수인지를 놓고 주석가들의 토론이 진행됩니다. 이로써 두 사람은 분리되었습니다. 에서는 세일로 돌아갔고 야곱은 ‘숙곳’으로 갔습니다. 애초에 아마 이름이 없던 그곳에 야곱이 거처할 ‘집들’(수코트, 움막들)과 가축 우리를 지으며 잠시 거주하면서 ‘숙곳’이란 지명을 붙였습니다. ‘숙곳’은 ‘초막들’, ‘움막들’이란 뜻입니다. ‘숙곳’은 아마 얍복강 근처에 위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야곱은 세겜으로 이동하여 거기에 장막을 쳤습니다. 야곱은 세겜이란 인물의 아버지인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자신이 장막을 친 땅을 백 크시타에 샀습니다. 그는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습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 이를 때만 해도 한 번이었는데, 브니엘을 지날 때에 아침을 보게 됩니다. 눈부신 해가 비출 때에 그토록 두려웠던 아침이 더는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맞은 브니엘의 아침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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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2-02)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난 야곱

창세기 32장 13-32절


우리는 세상과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야곱은 평생 머리를 굴리며 소유하기 위해 수고하고 노력해 왔습니다. 장자권도, 아버지의 축복도, 삼촌 집에서의 새로운 가정생활도 모두 전투 같았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과 다투고 도망치는 삶이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남은 삶을 이 세상과 사람들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을 상대하여 살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에 쌓여 있었습니다. 역시 모사꾼답게 자신의 재산을 여러 떼로 나누어 형을 위해 먼저 보내고, 가족들까지도 자신보다 먼저 얍복강을 건너게 합니다. 혼자 남은 야곱은 얍복 강에서 갑자기 나타난 어떤 씨름꾼과 밤새 씨름을 합니다. 이 씨름꾼은 나중에 ‘하나님’(엘로힘)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호세아 12:4은 야곱이 씨름한 상대가 천사였다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자의 모호심이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에서의 공격에 대비하는 야곱(13-20)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늘어뜨리고 있습니까! 말로 돈으로 힘으로 살 수 있는 게 사람의 환심이라면 너무 값싼 마음 압니까! 야곱은 에서와의 대면을 앞두고 그의 마음을 녹일 물량공세를 준비합니다. 다섯 떼에 이르는 긴 행렬은 야곱의 두려움의 길이를 보여줍니다.

13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14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16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13-20)

에서는 150km 떨어진 세일 산에서 오는 중이므로 그가 도착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날 야곱은 거기서 밤을 보냈습니다(13). 아마 이튿날 아침 그는 자신의 가축 떼 중에서 에서를 달랠 예물(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야곱은 일단 최소한의 생존 전략으로 대열을 두 진영으로 나누어 분리한 뒤, 마지막 카드로 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을 보내려 합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야곱이 거느린 가축 떼의 규모가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그가 준비한 선물은 규모만으로도 엄청났습니다(14-15).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어미 낙타 30마리와 새끼들,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 나귀 10마리. 이 중에서 낙타와 황소는 가장 비싼 가축들인데 80마리의 규모입니다. 총 550마리이며 새끼를 낳고 젖을 짜는 암컷들이 더 비쌌는데 압도적으로 암컷들로 구성된 선물 보따리입니다.

야곱은 역시 뛰어난 전략가였습니다. 그는 심리전에도 유능합니다. 그는 선물을 세 떼로 나누어서 차례로 보내는 전략을 구사합니다(16). 야곱은 각 떼를 맡은 책임자들을 보내면서 각 떼의 거리를 충분히 두게 했습니다. 이는 에서가 예상치 못한 선물을 연달아 받으면서 마음의 응어리가 차례로 풀리도록 하기 위한 전략입니다. 야곱은 각각의 떼를 맡은 종들이 에서에게 해야 할 말까지 미리 일러두었습니다. 대화술까지 사전에 준비하는 철저함을 보입니다. 첫째 떼를 이끈 종이 에서를 만났을 때 에서가 그 종의 신분과 출신, 그리고 가축에 대해 묻는다면, 그 종은 그것이 에서를 위한 선물 꾸러미라고 말해야 합니다. 덧붙여 그는 자신의 주인 야곱이 그 선물 뒤에서 에서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에서로 하여금 야곱이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느끼게 할 것입니다. 야곱은 둘째와 셋째 떼도 간격을 두고 차례로 에서를 향해 갈 것을 지시하면서, 역시 약속된 대화를 일러둡니다. 거의 200마리에 이르는 한 떼의 선물 규모도 압도적인데, 그것이 세 차례 반복해서 주어지면 누구나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야곱은 세 종에게 매번 ‘주인님의 종이신 야곱이 우리 뒤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을 강조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야곱은 에서를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은 그의 종으로 전락합니다. 월키는 이에 대해 야곱이 지금 하나님께 장자 신분의 처분을 다시 맡기고 그것을 에서에게 되돌려줄 의향까지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야곱은 이런 정중한 선물이 형의 감정을 풀어주기를 희망합니다. ‘감정을 풀다’로 번역된 동사 ‘키페르’는 피해자에게 배상물을 지불하여 그의 마음을 누그러트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야곱은 이 선물로 만일 그의 마음이 진정되면, 형이 자신을 용서할 것을 기대합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야곱(21-29)

모든 행렬을 앞세워 보낸 후 얍복강을 사이에 두고 혼자 밤을 새는 야곱, 그 밤에 정적을 깨고 나타난 한 사람의 난데없는 공격에 밤새도록 씨름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야곱은 그가 천사인 걸 알아챈 순간 축복을 요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 이름으로 정체성을 찾게 해주십니다.

21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21-29)

야곱은 이 막대한 선물을 준비하는 데 하루를 모두 보냈습니다. 세 떼로 나뉜 예물 사절단을 차례로 보낸 뒤, 밤이 되자 그는 진영 가운데서 수면을 취했습니다(21).

그는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밤에 가족들을 데리고 얍복 강을 건너기 위해서였습니다. 어쩌면 에서가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가족들이 그를 맞을 준비를 미리하기 위함이었는지 모릅니다. 야곱은 두 아내와 그녀들의 두 몸종, 그리고 열한 명의 아들을 데리고 그 밤에 얍복 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소유물도 함께 보냈습니다(23). 아직 완성되지 않은(한 아들이 더 태어난다) 미래의 열두 지파가 그 땅을 향해 강을 건넜습니다. 야곱은 다시 강 건너로 돌아와 홀로 남았습니다(24).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깊은 고독의 순간과 맞닥뜨립니다. 그러나 정적이 흐를 것 같은 장면이 갑자기 씨름판으로 바뀝니다(24). 저자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어떤 씨름꾼한 명을 무대에 등장시켰습니다. 그는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많은 경우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자의 경계선이 모호합니다. 여기서 이 씨름꾼은 하나님으로 소개되며(28) 그 경험을 기념한 장소의 이름인 브니엘의 이름 뜻도 ‘하나님의 얼굴’입니다(30). 그러나 호세아 12:4은 이 씨름꾼을 하나님의 대행자인 ‘천사’였다고 설명합니다.

야곱은 낯선 씨름꾼과 밤새 씨름을 했습니다. 왜 그가 지칠 때까지 낯선 이와 씨름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에서가 접근해오는 긴박한 순간에 아마 이 수상한 사람을 무력으로 제지하려 했습니까? 그러나 26절을 볼 때, 야곱은 이미 그가 인간 존재가 아닌 하나님이심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그의 하나님과의 씨름은 축복과 안전을 얻어내려는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그는 승리해야만 그것들이 보장될 것이라는 절박감으로 날이 새도록 씨름을 멈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혹은 하나님의 사자)은 끈질긴 야곱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쳤고 그것이 어긋나면서 씨름이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힘의 원동력인 골반 뼈를 내리치셔서 그를 굴복시키셨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씨름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씨름이 아닌 육체적 타격도 가능했던 몸싸움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하나님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날이 밝아왔습니다. 낯선 씨름꾼은 그곳을 떠나려 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를 보내지 않았습니다(26). 아직 씨름이 끝나지 않은 상황입니다. 몸 싸움이 끝났지만 이제 말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은 그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말싸움은 기싸움으로 바뀝니다.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않으면 결코 보내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26). 야곱은 몸싸움은 졌지만 기싸움에선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축복을 받아낼 때까지 보낼 수 없다는 야곱의 끈질김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씨름꾼은 두 손을 들었습니다. 벧엘에서의 임재의 체험이후 다시 한 번 이 순간 그의 인생이 결정적으로 변합니다. 그 사람은 야곱의 이름을 물은 뒤,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습니다(27-28). 그는 여기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며 그 이름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이는 네가 하나님(엘로힘) 및 사람들과 겨루었기 때문이다.’ 개역개정은 ‘겨루어 이겼다’고 의역하지만, 원문을 따라 단순히 ‘겨루었다’로 해석해야 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속임수’, ‘발목을 잡는 자’라는 뜻의 야곱과 더불어 그의 과거가 청산되고 이제 ‘하나님이 이기신다’는 뜻의 새로운 이름과 더불어 그의 미래가 열립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재주로 사람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영적 싸움으로 하나님을 이기고 또한 사람을 이깁니다. 야곱은 그분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야곱이 자신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대면한 것임을 확증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흔히 하나님과 조우한 경건한 인물들은 그분의 이름과 정체를 물어 확인하곤 했습니다(사사기 13:17-18). 그는 대답 대신 야곱을 축복합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관례적인 작별 인사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야곱이 간청한 축복을 베푸는 순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더불어 이 축복의 행위 자체가 그가 복을 주관하는 최종적 권위자임을 야곱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지명 브니엘의 기원(30-32)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고도 죽지 않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에서와의 만남을 앞에 두고 칠흑 같이 어둡고 불안하던 야곱의 마음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동터 오는 태양처럼 환하고 밝아져, 이제는 담대하게 형 에서를 만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절뚝거리는 야곱은 영광스런 패배자였습니다.

30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30-32)

축복을 받은 뒤 그가 떠나고 나서 야곱은 진정으로 자신이 하나님을 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브니엘’이란 지명을 붙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이 만들어진 사연이 부가적으로 설명됩니다. ‘내가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었지만 죽지 않았다!’ 그가 브니엘로 명명된 그곳을 지날 때 비로소 해가 돋았습니다. 그는 골반이 부러졌기에 다리를 절면서 강 건너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부상병이었으나 위대한 전투에서 승리한 후 기쁨으로 돌아오는 영웅이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유래되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후대의 유대교 문헌에서도 발견된 대로 허벅지 관절 부의 힘줄을 먹지 않는 관행이 생겼습니다.


야곱이 얍복 나루에 이를 때만 해도 한 번이었는데, 브니엘을 지날 때에 아침을 보게 됩니다. 눈부신 해가 비출 때에 그토록 두려웠던 아침이 더는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맞은 브니엘의 아침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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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2-01)

 


에서를 만날 준비하는 야곱

창세기 32장 1-12절


 20년의 세월은 형 에서의 존재를 더 무겁고 두려운 존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형의 낯빛이 떠오를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렸습니다. 생각으로는 벌써 몇 백 번이고 세일 땅을 오갔습니다. 상상으로도 몇 백 번 형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올 때 하나님을 만난 마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멀리 세일 땅 에돔 들판에 사는 형 에서에게 전령들을 보내 자신의 귀향 소식을 알립니다. 세일 산이 있는 세일 땅은 에돔 족속의 거점 지역을 일컫는 총칭으로 사해 남쪽 지역의 고산 지대를 말합니다. 에돔이 그곳을 점유하기 전에 호리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에돔 지역에는 그 산지를 중심으로 인근에 아라바 광야라 일컫는 꽤 넓은 평원도 존재했습니다. 압복 강 근처에서 세일 땅까지는 약 150km의 거리였습니다.

 

야곱이 만난 하나님의 사자들(1-2)

형 에서와의 재회를 앞두고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던 야곱에게는 온통 두려움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인생에서 위기 때마다 찾아와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인생에서 위기 때마다 찾아와주셨습니다. 고향을 떠나던 길에도, 20년이 지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길에도 두려움에 휩싸인 그에게 나타나셔서 동행의 증표를 쥐여주셨습니다.

1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2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였더라(1-2)

야곱은 귀향길에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의 등장은 언제나 중대한 사건과 전환점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족장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기 위해 반복해서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동사 ‘파가’는 공격적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입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사자들은 아마 집단으로 출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로 칭한 것에서 드러납니다. 또한 이 동사는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자와의 씨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왜 그 사자들이 야곱에게 나타났는지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습니다. 사자들이 야곱을 만났고, 야곱은 기이한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행렬을 목격한 뒤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 칭하고 거기에 ‘마하나임’이라는 지명을 부여했을 뿐입니다(2). 출현한 사자(들)의 침묵과 역할의 부재는 매우 이례적입니다. 사자들의 출현 목적은 이중적입니다. 곧 닥칠 에서와의 만남에 대비한 보호와 인도를 위함이면서 야곱의 긴장감을 유발하고 그를 무장시키기 위함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천사들은 무리 지어 군사적 대열을 이루며 나타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라 칭했습니다. ‘마하네 엘로힘’은 ‘큰 군대’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큰 무리의 행렬을 목격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여기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군대’로 해석되는 것이 무난해 보입니다. 야곱은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습니다. 쌍수 형태의 ‘마하나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호합니다. 야곱은 ‘두 개의 군대(진영)’를 말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 두 무리로 나뉜 군대들은 무엇입니까? 어쩌면 단순히 야곱이 목격한 천사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행진했기 때문에 그가 ‘두 개의 군대’라고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분명히 암시적입니다. 그 두 진영의 군대는 야곱의 진영과 에서의 진영의 만남을 미리 예고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에서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그를 만나러 올 때 야곱은 자신의 무리를 둘로 쪼갭니다. ‘두 떼’로 만듭니다. 이때 ‘마하네’의 복수형이 사용되면서 분립된 두 진영이 ‘두 개의 마하노트’로 표현됩니다. 하늘 군사들의 출현은 야곱에게 어떤 징조를 느끼게 하면서 그로 하여금 심리적 준비를 하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야곱이 그곳에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은 그에게 이 경험이 특별했음을 암시합니다. 이 경험은 단순히 에서와의 조우에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땅의 약속과 관련된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사건으로 보입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첫발을 내디딜 때 하늘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그는 하늘 군대가 머물러 있을 곳을 지정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에서에게 인사말을 보내는 야곱(3-5)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났어도 평안은 잠시였습니다. 야곱은 외교력을 발휘하여 세일 땅에 사는 형 에서에게 심부름꾼을 먼저 보내 자신을 주의 종으로, 형을 주로 일컫고 있습니다. 세심하게 할 말을 일러주었습니다. 형의 동행을 파악하여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으려 준비했습니다.

3야곱이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자기보다 앞서 사자들을 보내며 4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 주 에서에게 이같이 말하라 주의 종 야곱이 이같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과 함께 거류하며 지금까지 머물러 있었사오며 5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내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라 하였더니(3-5)

야곱은 전령들에게 극진한 예우를 담은 인사말을 보냅니다. 그는 형 에서를 ‘주인님’(‘아도니’으로 호칭하면서 자신은 주인을 시중드는 ‘종’(에베드)으로 격하합니다. 이것은 상급자에 대한 하급자의 관례적인 인사법이긴 했지만, 그의 호칭에는 형에 대한 뉘우침이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극도의 살의를 품은 형에게 화해를 시도하지만, 어쩌면 도리어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의 약속을 신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인사말을 담은 전갈은 단지 도착 소식이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라반과 함께 거류하여 머물다 돌아오는 중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빈손으로 떠났다가 이제 많은 가축 떼와 종들을 데리고 왔음을 덧붙입니다(4). 이것은 금의환향을 자화자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과분한 축복을 형과 함께 나누겠다는 의사가 들어있는 듯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20년 세월과 왜 라반을 떠났는지는 건너뜁니다. 월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만 아마 단순히 그 긴 사연이 인사의 자리에는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형의 자비를 얻기를 바란다며 말을 맺습니다(5).

 

마중 나오는 에서와 겁에 질린 야곱(6-12)

야곱은 에서가 4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에 겁에 질렸습니다. 즉시 일행과 가축을 두 떼로 나누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곱씹으며 전직으로 매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만이 유일한 해결책임을 지난 시간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6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7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양과 소와 낙타를 두 떼로 나누고 8이르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9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12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6-12)

전령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비관적 소식을 가지고 왔습니다. 형 에서가 무려 400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야곱을 ‘만나러’ 행진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6). 이 ‘만남’에 사용된 동사 ‘카라’는 일반적 만남에도 사용되지만(창세기 24:65; 여호수아 9:11; 열왕기하 8:8,9; 9:18) 전쟁터에 적을 만나러 갈 때도 사용됩니다(창세기 15:10; 민수기 21:3; 열왕기상 20:27; 열왕기하 23:29). 야곱은 에서가 대군을 끌고 오는 이유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함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 에서의 행동은 군사적 관점에서는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전령을 먼저 보내고 그들의 뒤를 따라가 자신들을 모두 노출시키며 상대방이 대응할 기회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의 공격은 효과적이지 않으며, 공습이나 야간 기습 작전이 상식적인 군사 행동일 것입니다. 사실 에서는 야곱을 호위하기 위해 큰 병력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잔뜩 겁에 질렸습니다(7). 죽느냐, 사느냐의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명석한 그는 자신들은 무장행렬이 아니기에 승산이 없는 정면 대결은 피하고 희생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찾습니다. 그는 대열을 반으로 나눕니다. 이것은 절반만이라도 살리기 위한 고육지책입니다. 만일 에서가 한 무리를 공격하면, 그때 시간을 확보한 다른 무리가 탈출한다는 계산입니다(8). ‘두 떼’로 번역된 단어는 흥미롭게도 ‘두 개의 마하노트’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쌍수’가 아닌 둘을 받는 복수형입니다. 그는 앞서 두 무리로 나뉜 하나님 군대의 대열에서 힌트를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절박한 기도를 올립니다(9). 이것은 그의 서원 기도를 제외하고(창세기 28:20-22) 야곱 이야기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그의 최초의 기도이며 매우 긴 기도입니다. 그는 조부 아브라함에게 땅의 선물과 후손의 번성을 약속하시고 인도와 보호를 보장하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맹세했던 약속을 기억하시기를 탄원합니다. ‘네 고향, 네 족속에게 놀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라고 하셨으니 지금 자신에게 그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베풀었던 그분의 모든 은총(헤세드)과 모든 진실하심(에메트)에 호소합니다. 혜세드는 끊임없는 자비와 성실한 도움을 의미합니다. ‘에메트’는 ‘진리’, ‘진실성’, ‘옳은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헤세드를 베푸는 자가 보여주는 변함없는 신뢰감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진실하신 분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고향을 떠날 때 지팡이만 쥔 맨손의 홀몸으로 요단강을 건넜으나 하나님께서 두 개의 진영(‘두 떼’)으로 나눠도 될 만큼 거부가 되게 해주셨다고 고백합니다(10). 지팡이에서 거대한 군단으로의 변화입니다. 야곱이 말하는 요단강은 사실은 요단강으로 흘러가는 지류인 얍복 강인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중에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기 때문입니다. 얍복 강은 암몬 땅에서 흘러나와 동서로 흐르면서 요단강으로 합류합니다. 야곱은 지금 요단강 지류인 얍복 강을 요단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강은 요단강을 향해 동서로 흐르는데 메소포타미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강이었습니다. 현재 그는 얍복 강 너머에 머물러 아직 건너오지 않았습니다(창세기 32:22).

야곱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에 호소하며 자신을 형 에서의 손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를 건지시옵소서!’(11). 야곱의 삶에서 그의 입으로 내뱉는 최초의 탄원입니다. 그의 삶의 여정을 볼 때 그는 벨엘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후 그의 삶은 근본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20년의 긴 세월 동안 라반의 끊임없는 견제와 핍박, 착취 속에서도 성자처럼 생활했습니다. 자신의 지혜로 라반의 부를 모두 차지하긴 했지만, 더 이상 속임수와 반칙, 그리고 착취를 부의 축적 수단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도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야곱 그가 기도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힘든 기억도 잊힌다고 하지만, 야곱에게는 20년 전 형과 해결하지 못한 갈등이 계속 마음을 옥죄어왔습니다. 두려움이 평안을 앞지를 때, 우리가 선 곳이 마하나임, 곧 칼의 진영이 아닌 하나님의 진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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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1-03)


 야곱과 라반의 언약 체결

창세기 31 36-55


우리는 축적한 재산과 명예 등이 자신의 잘남이나 노력으로 된 것인 줄 알고 자신을 높이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엄청난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라반과 대등한 존재로, 아니 두려움이 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신실함의 산물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음을 고백하고, 겸손히 청지기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20년 세월을 섬겼습니다. 7년간 레아를 위한 기간, 추가적인 7년의 라헬을 위한 기간, 그리고 이후 라반을 위한 6년의 섬김 기간의 합산입니다(41). 그러나 야곱은 이 20년 동안 라반이 품삯을 무려 열 차례나 변경했다고 비난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열 번은 실제적인 수라기보다는 꽉 채움을 의미하는 완전수의 개념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라반의 계약 위반이 수도 없이 빈번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이러한 상황이 극적으로 뒤집힙니다.

  

라반을 책망하는 야곱(36-42)

라반이 잃어버린 드라빔에 대해 야곱에게서 아무런 협의점도 발견하지 못하자, 야곱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은 지난 20년간 라반을 위해 일하면서 대가는커녕 배상하기 바쁜 세월이었습니다. 마치 욥기 31장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욥의 변론 고백을 듣는 듯합니다.

36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37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38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40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41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42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36-42)

야곱은 드리빔을 훔쳤다는 건으로 자신을 취격해온 외삼촌 라반을 향해 지금까지 참아 온 모든 울분을 쏟아 냅니다. 지난 20년 동안 착취당한 일들을 열거하며, 밤낮없이 더위와 추위와 위험을 무릅쓰고 일하면서 삼촌에게 항상 정직했음을 강변합니다.

(1) 야곱의 소나기 펀치(36-40)

야곱은 아무것도 찾지 못한 라반에게 향해 분노하며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쏟아냅니다. 그가 라헬에게 크게 분노한 이후(창세기 30:2) 다시 여기서 분을 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는 라반과 법정 소송에서 싸우는 것처럼 자신을 변론하며 라반의 죄를 나열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라고 따집니다. 내 허물의 히브리어 페샤는 반역질과 같은 항명죄이고 무슨 죄로 옮긴 하타트는 일반적인 죄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의 질문은 외삼촌에게 내가 무슨 반역질을 했습니까,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대든 적도 몰래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는데 무고한 나를 과연 이렇게 맹렬히 추격하는 것이 합당하냐는 항의입니다(6). 무엇보다 드라빔 분실에 대한 혐의를 야곱 일행에 뒤집어씌운 것이 오히려 라반을 난처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상대의 약점을 노리고 계속 몰아붙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확인시키기 위해 자신의 헌신적인 목축 원칙을 하나씩 나열합니다. 라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의 섬김은 독자들을 놀라게 하며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38-39). 첫째, 나는 임신한 양과 염소를 잘 돌보아 유산이 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나는 외삼촌의 숫양 고기를 일체 먹지 않았습니다. 셋째, 맹수에 물려 찢긴 가축은 내가 배상했습니다. 넷째, 도둑맞은 가축도 내가 배상했습니다.

이러한 야곱의 목축 원칙은 큰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야곱이 얼마나 놀라운 인물로 변화되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것이 야곱의 허풍이 아닌 이유는 라반이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여러 국가들의 법에 의하면, 천재지변이나 짐승에 의해 가축이 죽었을 때, 그리고 가축을 도둑맞았을 때, 목자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율법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되었습니다. 맹수에 잡아먹히거나 찢긴 짐승은 그것을 증거로 제시할 때 목자의 책임은 없었으며, 도둑맞은 가축에 대해서도 관리 소홀로 인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상 책임이 면제되었습니다(출애굽기 22:9-13). 결국 야곱은 이 모든 손실을 자신이 메울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그는 외삼촌에게 가축의 손실분을 일절 청구하지 않고 자신의 몫을 떼어 그것을 채웠습니다. 암양은 새끼를 치고 우유를 짜는 이유로 비싸서 숫양을 흔히 식용으로 잡았습니다. 목자가 자신의 재량으로 가끔씩 잡아먹어도 되었지만, 야곱은 그 어떤 숫양도 일절 손대지 않음으로써 외삼촌에게 아무런 손해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원칙을 따라 목축을 함으로써 외삼촌의 가축을 크게 늘려 놓았으며 낮에는 더위와 싸우고 밤에는 추위를 견디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을 했다고 항변합니다(40). 가혹한 환경 속에서 야곱은 오랜 세월 인내하며 라반의 목축업을 도맡아 최선을 다해 크게 번성시켜 놓았습니다. 그 혜택은 모두 라반에게 돌아갔습니다.

(2) 야곱의 인고의 20(41-42)

야곱은 20년을 인내하며 라반을 섬겼습니다. 그의 희생적이고 성실한 목축으로, 또한 그와 함께하며 그가 가는 곳마다 큰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라반의 가축 떼는 해마다 크게 번성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소나기 펀치 끝에 마지막 결정타를 날려 라반을 무릎 꿇게 했습니다. 이런 당신은 결국 빈손으로 밧단아람에 온 나를 다시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려보내려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수고와 고통을 아시고 어젯밤에 직접 외삼촌에게 나타나 꾸짖었지 않했습니까?(42) 야곱은 그에게 현몽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자신의 아버지 이삭이 두려워하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야곱과 라반의 조약(43-55)

라반은 야곱과 언약을 채결하여 비로소 야곱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합니다. 또한 자신의 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으로 딸들에 대한 보호와 안정적인 결혼행활, 상호 불가침의 조항을 달아 계약을 체결합니다. 이제는 종이 아닌 가장의 지위를 얻게 됐습니다.

45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46또 그 형제들에게 돌을 모으라 하니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무더기를 이루매 무리가 거기 무더기 곁에서 먹고 47라반은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니 48라반의 말에 오늘 이 무더기가 너와 나 사이에 증거가 된다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갈르엣이라 불렀으며 49또 미스바라 하였으니 이는 그의 말에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함이라 50만일 네가 내 딸을 박대하거나 내 딸들 외에 다른 아내들을 맞이하면 우리와 함께 할 사람은 없어도 보라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함이었더라 51라반이 또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나와 너 사이에 둔 이 무더기를 보라 또 이 기둥을 보라 52이 무더기가 증거가 되고 이 기둥이 증거가 되나니 내가 이 무더기를 넘어 네게로 가서 해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이 무더기, 이 기둥을 넘어 내게로 와서 해하지 아니할 것이라 53아브라함의 하나님, 나홀의 하나님,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은 우리 사이에 판단하옵소서 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고 54야곱이 또 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형제들을 불러 떡을 먹이니 그들이 떡을 먹고 산에서 밤을 지내고 55라반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며 그들에게 축복하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43-55)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함께하시고 야곱의 수고를 감찰하셔서 일시불로 품삯을 얻도록 복 주셨습니다. 당하고만 산 것 같은 20년이 하나님 앞에서는 한 날도 허사가 아니었으며, 더욱이 눈에 보이는 부()보다 야곱이 자기 한계와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한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더 큰 보상이었습니다.

(1) 화해의 조약식(43-50)

라반은 야곱에게 굴복합니다. 분명히 그는 야곱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조약 협정을 제의합니다(43). 하지만 그의 허세는 여전합니다. 그는 여전히 야곱의 아내과 손주들, 그리고 야곱의 모든 소유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의미 없고 공허한 주장입니까! 소돔 왕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마치 강자인 자신이 큰 아량을 베풀고 있는 것처럼 뻐깁니다. 그러나 이미 그가 조약을 제안한 순간 그는 자신의 패배와 열세를 인정한 셈입니다. 따라서 야곱과 라반의 관계는 더 이상 주종 관계도 상하관계도 아닙니다.

엄중한 조약을 맺은 후 그들은 기념석으로 세운 돌무더기에 각자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증거석(證據石)과 더불어 그것은 그들의 조약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또한 이것 역시 증거석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이 기념석을 중심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로운 동맹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각각은 자신의 언어로 그 돌무더기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라반은 아람어로 그것을 여갈사하두다라 불렀고 야곱은 가나안어(히브리어)로 그것을 갈르엣이라 불렀습니다. 둘 다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입니다. 라반은 그 돌무더기가 오늘 자신과 야곱 사이에 증거가 될 것이라고 공포합니다.  오늘은 오늘부터 이 조약이 영속적으로 유효하다는 선언입니다. 라반은 아마도 돌무더기와 함께 세운 별도의 기둥에 미스바라는 이름을 추가합니다(49). 미스바(미츠파)는 망을 보는 탑인 망대라는 뜻입니다. 라반은 그 기둥의 이름에 여호와께서 서로 멀리 떠나는 자신과 야곱을 그 망대에서 살피시고 지켜달라는 소망을 담았습니다(49).

라반은 이 조약의 조건 중 가장 중요하게 준수해야 할 것을 마지막으로 성기시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두 딸입니다. 그는 야곱이 자신의 딸들을 학대하거나 다른 아내들을 맞아 그들의 위치를 위협한다면, 하나님께서 둘 사이에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50). 그가 다른 아내들을 경계하는 이유는 아내들의 증가로 인해 자신의 딸들의 상속권이 위협받고 손주들의 유산의 몫이 축소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딸들을 터인 취급하고 딸들을 팔아 큰 이듯을 얻었던 비정한 아버지였습니다.

(2) 야곱과 라반의 송별식(51-55

라반은 조약 예식의 마지막 절차로 상호간의 철저한 조약 준수를 맹세합니다. 조약의 기념물로 세운 돌무더기와 기둥이 또한 조약의 증거물이 될 것입니다(52). 동시에 그 기념물인 돌무더기와 기둥은 양측의 경계선 역할을 합니다. 말ᄒᆞ자면, 이 조약은 일조의 상호불가침 조약이었습니다. 만일 그 돌무더기 경계선을 넘어와 계약 위반을 한다면, 이제 아브라함의 신들과 나홀의 신들’(개역개정의 하나님보다는 신들’), 그들의 조상의 신들이 둘 사이를 판단해달라고 기원합니다. 복수의 신들을 부른 라반과 달리 야곱은 하나님을 유일신 하나님이신 자신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분으로 호칭하며 맹세하고 있습니다. 조약식은 마지막 제사와 더불어 (주로 화목제였다) 풍성한 식사를 하면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출애굽기 24:5-8,11; 신명기 27:7). 야곱은 그 산에서 화목제를 드린 후 라반 측의 사람들(‘형제들’)을 모두 불러 함께 풍성한 식탁을 나누었습니다(54). 그들은 그 밤을 거기서 지낸 뒤,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날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라반은 자신의 딸들과 손주들과 더불어 송별 인사를 나누며 축복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야곱은 과거 자신이 무너뜨린 질서와 속임수에서 대가를 치르고 자신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속이는 자에서 속는 자로 살아가면서, 과오를 씻고 경계를 복구하는 시간은 길고 고달픈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묵은 시간과의 결별을 통해 새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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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1-02)

 


라반을 피해 도망하는 야곱의 대작전

창세기 31장 17-35절


 살면서 웬만하면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에게는 라반과 에서가 그런 존재일 것이고, 라반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존재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문이 누군가에게는 은혜로운 만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날벼락 같은 만남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게 될 때 그 만남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야곱은 제2의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조부 아브라함이 했던 떠남을 재현합니다. 아브라함도 아내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종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출발했었습니다(창세기 12:5). 그러나 이번에는 마치 야반도주와 같은 탈출극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그가 밧단아람에 올 때는 낙타도 없이 홀몸으로 걸어서 왔습니다. 신부 값도 없었던 빈털터리 도망자가 이제 낙타들을 거느리고 많은 가축 떼와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야곱의 도주(17-22)

야곱은 라반이 먼 길을 떠난 틈을 타 도주합니다. 사흘 후에야 라반은 친족들과 함께 떼로 추적하여 7일 만에 야곱이 머무는 길르앗 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야곱의 가나안 행을 위태롭게 할 라반을 사전 봉쇄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17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게 태우고 18그 모은 바 모든 가축과 모든 소유물 곧 그가 밧단아람에서 모은 가축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있는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가려 할새 19그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을 도둑질하고 20야곱은 그 거취를 아람 사람 라반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떠났더라 21그가 그의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을 향하여 도망한 지 22삼 일 만에 야곱이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17-22)

두 아내의 동의를 얻은 야곱은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아마 그는 즉시 도주를 시도하지 않고 최고의 기회를 노린 것 같습니다. 그는 디데이를 양탈 깎는 시기로 정했습니다(19). 양털 깎기는 봄에 진행되었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식구들이 오랜 기간 집을 비우고 멀리 떠나 커다란 수입이 보장되는 그 일에 집중했습니다. 라반의 가족들 모두가 양털 깎기에 동원되어 나갔을 때, 야곱은 작전을 실행에 옮겼습니다(17). 그는 아침에 일어나 가족들을 모두 낙타들에 태우고 모든 가축과 소유물을 가지고 나와 가나안 땅의 아버지 이삭에게로 향했습니다. 이때 라헬은 라반의 막사에서 드라빔을 홈쳐왔습니다(19).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드라빔의 정체와 기원, 용도, 그리고 크기와 형태에 대해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상의 형상인데 그 우상이 신인지 죽은 조상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개체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복수형으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에 대해 많은 견해가 제시되나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학자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주석을 써내려가 혼동을 일으킵니다. 베스터만은 이것을 단수로 취급하지만, 월키와 웬함 그리고 해밀턴은 복수로 간주하면서 드라빔을 지칭하는 신을 일관되게 ‘신들’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복수의 신들로 번역하는 이들조차 하나의 개체가 왜 복수의 ‘신들’로 표현되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필자의 견해로, 드라빔은 여러 신들의 단일 합일체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은 한 개체이면서 항상 복수형 ‘테라핌’으로 표기되고 대명사 또한 복수가 사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드라빔의 용도는 분명하지 않으나 구약에서 그것이 일단 점술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됩니다(에스겔21:26; 스가랴 10:2). 그 외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아마 드라빔의 가장 중요한 용도는 가족의 수호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이역만리 타향으로 떠나는 라헬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과 번영, 그리고 번성의 복을 위해 수호신 드라빔을 빼돌렸을 것입니다. 결국 여전히 메소포타미아 우상숭배에 심취했던 그녀였기에 자녀를 얻기 위해 합환채의 신통력에 의존했던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창세기 30:14; 참조. 창세기 35:2).

야곱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강’을 건너 길르앗 산으로 도주했습니다(21절). 이 ‘강’은 유프라테스 강입니다. 밧단아람에서 가나안 쪽으로 오기 위해서는 남서쪽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행진하면 갈릴리 호수 근처의 북부 길르앗에 도착합니다. 그가 도주한 지 삼 일이 지나서야 라반이 알아차렸습니다(23). 여기서 ‘삼 일’은 앞서 ‘사흘 길’의 어법이 그러하듯이 여러 날일 수 있습니다.

 

라반이 추격(23-30)

야곱과 대면한 라반은 매섭게 쏘아 붙었습니다. 그동안 야곱과 딸들에게 한 속임수를 생각하면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말들입니다. 거짓말 탐지기가 있다면 들통 났을 말들을 뻔뻔하게 내뱉었습니다. ‘야곱에게 아무 소리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기에 그나마 이 정도입니다.

23라반이 그의 형제를 거느리고 칠 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에게 이르렀더니 24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25라반이 야곱을 뒤쫓아 이르렀으니 야곱이 그 산에 장막을 친지라 라반이 그 형제와 더불어 길르앗 산에 장막을 치고 26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27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28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29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30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23-30)

추격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장면이 연출됩니다. 야곱이 하란에 도착했을 때 라반은 달려가서 그를 맞았습니다. 이제 야곱이 하란에서 도망가자 다시 라반은 달려가서 그를 붙잡습니다. 둘 다 물욕에 사로잡힌 달리기입니다. 라반은 형제들(아마 친족들)을 데리고 ‘칠 일 길’을 추격하여 길르앗 산에 도착하여 야곱의 대열에 바짝 붙었습니다(다바크 P7; 23). 거의 야곱을 따라잡았던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시어 야곱에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잘잘못을 따지지 말 것을 경고하셨습니다(24). 라반은 앞서 20절에서부터 ‘아람 사람’으로 불립니다. 이로써 야곱과 라반의 근본적인 민족적 간격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두 부류의 별개의 민족을 대표한다. 그것은 그들 사이의 조약을 예고다’(Waltke).

참고로 칠 일 길의 ‘칠 일’도 분명히 어림수이거나 꽉 찬 기간을 표현하는 문학적 숫자일 수 있습니다. 밧단아람에서 북부 길르앗까지는 직선거리로 무려 450km나 됩니다. 당시 일반적인 여행 속도는 하루 약 24km로 알려져 있습니다. 라반의 추격 속도가 매우 빨랐더라도 거의 보름은 걸릴 수 있는 거리입니다. 따라서 위의 ‘삼 일’과 ‘칠 일’을 문자적으로 볼 필요 없이 상당하긴 기간으로 보아야 합니다. 라반은 야곱을 따라잡아 야곱이 막사를 설치한 맞은편 길르앗 산에 자신의 막사를 쳤습니다(25). 라반은 야곱을 만나 그를 강하게 질책하며 꾸중합니다. 그는 자신의 딸들을 전쟁 포로처럼 끌고 가고 있다고 비난합니다(26). 그러나 오히려 라반이 그들을 포로로 취급했었습니다.

라반은 그가 자신을 훔쳐갔다고 거듭 비난하면서, 공식적인 절차를 밟고 이별을 통보했다면, 오케스트라가 동원된 성대한 송별식을 마련해줬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그의 허세이자 위선이요 거짓말입니다. 그동안 그는 이런 사탕발림으로 야곱을 열 차례나 속였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손자들과 딸들에게 이별의 입맞춤도 하지 못하게 하고 빼돌린 야곱의 행위가 비열하고 어리석다며 구석으로 몰아갑니다. 그는 군사적 행동을 들먹이며 야곱에 대한 힘의 우의를 최대로 과시합니다(29). 그러나 라반은 지난밤 자신에게 현몽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무력 행위를 참는다고 말합니다. 다신숭배자인 그가 야곱의 하나님의 권능을 인지하고 그분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야곱의 귀향 명분을 인정하면서 야곱을 놓아줍니다(29). 그러나 그가 결코 보낼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아마 가족 수호신으로 섬겼던 드라빔입니다. 그는 야곱에게 누군가가 자신의 ‘신들’(엘로힘)을 ‘훔쳐갔다고’(가나브) 항의합니다. ‘신들’은 드라빔을 말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드라빔은 하나의 형상에 결합된 여러 신들의 단일 연합체였을 것입니다. 이로써 라반은 야곱이 훔쳤다(가나브)는 말을 세번 말합니다. ‘내 마음을 훔쳤다’(26); ‘나를 훔쳤다’(27); ‘내 신들을 훔쳤다’(30).

 

라헬이 드라빔을 숨김(31-35)

야곱은 외삼촌이 내 아내들을 억지로 빼앗을까 봐 두려웠노라며 드라빔을 훔친 사람이 있다면 죽여도 좋다고 말합니다. 다행히 찾지 못하고 상황은 종료되지만, 하마터면 라헬을 잃을 뻔하였습니다. 라반이 믿는 수호신이란 스스로 자기 실체를 드러낼 수 도 없는 허망한 존재였습니다.

31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32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33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34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35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31-35)

야곱은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강력히 변호합니다. 요지는 이 모든 것은 외삼촌 라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두 아내를 라반이 강제로 빼앗아갈까(가잘) 두려워 탈출극을 벌였다고 항변합니다. 여기에는 야곱에게 20년 동안 자행된 라반의 탄압과 부당한 착취에 대한 비난이 들어가 있습니다(창세기 31:36-42). 이러한 악덕 고용주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라반의 ‘신들’을 훔쳐간 자가 발각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런 범죄에 대해 어떤 형벌이 주어졌는지 분명한 사례는 없는데, 왜 야곱이 그 범죄에 대해 죽음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여기에는 자신의 가족은 결코 도둑질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자들의 가슴은 철렁입니다. 범인은 그가 가장 아끼는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자칫 그의 발언은 그녀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라반의 범인 수색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야곱과 레아의 막사에 이어 두 여종의 막사까지 모두 뒤졌습니다. 마지막에 그는 라헬의 막사로 들어가서 수색을 진행했습니다(33). 그러나 라헬은 드라빔을 빼돌려 ‘그것들을’(복수 대명사) 낙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라반은 방 구석구석을 모두 찾았으나 허탕을 쳤습니다. 라헬은 자신이 생리 중이라 일어나 영접하여 안내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아버지의 이해를 구했습니다. 후대 레위기 15장의 율법에서(19-30절) 생리하는 여자는 부정하므로 격리된 채 사람들과의 접촉이 금지됩니다. 레위기 이전이지만, 이미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유사한 정결법이 적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라반은 라헬에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라헬은 최후의 극단적 방법을 쓴 셈입니다. 하지만 이로써 그녀는 결국 자신이 살기 위해, 혹은 필사적으로 드라빔을 지키기 위해 드라빔을 부정케 하는 일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 신들은 더럽혀진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되었다.’(Waltke). 이것은 라반의 가족들이 드라빔을 목숨처럼 간직하려 했지만, 정작 드라빔을 대하는 태도나 종교심은 사실은 얼마나 느슨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말씀한 대로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창세기 28:15) 하십니다. 야곱은 아내들에게 고백한 대로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창세기 31:7) 하심을 보았습니다. 주님을 약속한 말씀을 지키시며 응답을 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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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1-01)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때가 있음

창세기 31장 1-16절


하나님의 계획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상황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머물러야 할 때가 있고, 일어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야곱이 떠나고자 할 때는 머물러 있게 하셨으나, 적절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떠나도록 이끄십니다. 당신은 겸손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오늘의 어려움을 견뎌 내고 있습니까?

 

결국 야곱은 복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신붓감을 찾는다는 명분하에 사실상 맨몸으로 이국땅으로 도피했다는 사실입니다. 텅 빈 야곱이 채워진 야곱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텅 빔과 채움의 주제는 구약 전반에서 반복되는데, 노예로 이방 땅에 팔려간 요셉에게, 또한 속박의 땅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출애굽기 12:35-36), 그리고 이방 땅에서 텅 빈 몸이 되어 가나안으로 귀환했던 나오미의 삶을 그린 룻기에서도 재현됩니다.

 

거부가 된 야곱을 위협하는 라반의 아들들(1-3)

양 떼를 상대로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라반과 그 아들들은 야곱이 의심스러웠습니다. 대대로 목동 일을 해왔지만 이런 일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얼룩 유전자 피폭이라도 당한 듯 야곱의 양 떼는 온통 얼룩 물결입니다. 하나님의 편인 자를 어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1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하는 말을 들은즉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 하는지라 2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3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1-3)

야곱의 성공은 곧 라반의 실패였습니다. 라반의 아들들은 아곱이 라반의 재산을 가져가(라카흐) 거부가 되었다고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야곱의 귀에까지 이 소문이 들렸습니다. 라반의 법적 상속자인 아들들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야곱의 부를 ‘모든 재물을 모았다(카보드 기그)’라 표현하는데, 이것은 현재 야곱이 받은 복이 얼마나 큰지 가늠해볼 수 있게 합니다. 야곱은 라반의 달라진 안색을 살피고서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했습니다. 라반 집안 남자들의 야곱에 대한 공동 대응으로 인해 야곱과 라반 사이에 불길한 기운이 감돌며 파국이 감지됩니다. 사실상 가족을 거느린 홀몸의 가장인 야곱에게 상황은 매우 불리하며 위협적입니다.

서사의 흐름으로는 이 순간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임재는 분명 아래 10-13절에서 설명된 하나님의 현몽, 곧 라반과 가축 분할 협약을 마치고 야곱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육종법을 적용해서 새끼를 늘려 나가는 시점에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셨던 사건이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야곱은 이미 조만간 라반에게서 떠나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사실이 그 임재의 말씀이 여기 배치됨으로써 재확인됩니다. 하란(밧단아람) 땅을 떠나 고향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처음 주셨던 명령에 상응합니다.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한 번 떠나야 하는 결경의 시점을 하나님께서 정확히 알려주셨습니다. 한편, 야곱이 도망 오는 도중 벧엘에서 그분이 나타나셔서 맹세하셨던 약속, 특히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이 이제 이루어집니다(창세기 28:15). 섭리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시어 그 약속을 재확증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 아내에게 자신을 변증하는 야곱(4-9)

라반의 안색이 변했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니 남빛이 고울 리 없습니다. 그동안 야곱을 종으로 취급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기네 소유를 다 빼앗은 도둑 취급을 했습니다. 라반이나 그 아들들이나 생각하는 게 같습니다. 의심은 불신을 낳고 그것은 곁을 밀어내는 또 다른 폭력입니다.

4야곱이 사람을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자기 양 떼가 있는 들로 불러다가 5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6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 7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경하였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막으사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셨으며 8그가 이르기를 점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점 있는 것이요 또 얼룩무늬 있는 것이 네 삯이 되리라 하면 온 양 떼가 낳은 것이 얼룩무늬 있는 것이니 9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4-9)

야곱은 두 아내를 자신의 목초지로 불러 긴급한 비밀 가족회의를 개최한다. 야곱과 두 아내와의 대화는 4-16절로 구성된 긴 부분입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했습니다. 위협이 다가오는 절박한 상황에서 이 대화는 비밀스럽게 라반 몰래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이 대화에서 사실상 그동안의 라반의 모든 추악한 행각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사실은 들판에서 야곱의 가정 법정이 열린 셈입니다. 야곱의 긴 변론이 이어진 뒤 재판관이 된 라반의 딸들이 그의 변론을 듣고 아버지에 대한 규탄을 쏟아내며 중벌의 유죄 판결을 선고합니다

5-9절에서 원고 야곱은 피고 라반의 세 가지 죄목과 그에 따른 결과를 재판관인 두 아내에게 조목조목 설명합니다.

(1) 라반의 태도가 바뀌었다-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다(5)

(2) 라반은 열 번이나 속였다-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셨다(6-7)

(3) 임금은 공정했다-다만 하나님이 양 떼를 내게 몰아주셨다(8-9)

첫째는 라반의 태도가 바뀌었다는 비난입니다. 재물 때문에 자신을 더 이상 가족이 아닌 제거의 대상으로 보는 라반에 대한 고발입니다. 둘째 죄목으로 그는 야곱의 품삯을 열 번이나 속였습니다. 여기서 ‘열 차례’는 실제적인 문자적 횟수라기보다는 꽉 채움을 의미하는 완전수의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에서를 속인 야곱의 속임수가 결국에는 열 배의 보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야곱은 신적 인과웅보의 형벌을 받은 것일 수 있으나 라반의 죄가 면피될 수는 없었습니다. 임금을 변경했다는 것이 급여의 체불과 미지급 또는 삭감인 것은 당연합니다. 라반의 범죄 사실은 사실 그의 두 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야곱이 ‘그대들도 알거니와’라고 발언하기 때문입니다(6). 흥미롭게도 여기서 야곱은 라반이 최초에 저지른 대형 사기극은 지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 이미 뗄 수 없이 한 가족이 되 레아를 배려한 의도적인 침묵일 것입니다. 셋째 죄목은 고정한 협상을 통해 야곱 자신이 큰 손해를 보고 시작한 위탁 사업이었는데, 하나님이 복 주셔서 정당하게 모든 부를 거머쥐었음에도 지금 라반이 그것을 빼앗으려 한다는 고발입니다. 야곱은 라반과의 가축 분할을 위한 방법과 협상 내용을 공개합니다. 그는 자신이 크게 불리했던 조건, 즉 드물게 돌연변이 색을 띄고 출산되는 양과 염소만을 가져가기로 했던 조건이었음을 강조합니다. 라반은 크게 유리한 조건을 거머쥐었음에도 결국 그것이 그에게 불리한 결과로 이어졌는데, 야곱은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라반의 양들을 빼앗아 자신에게 주신 일이었다고 고백합니다(9). 앞서 우리는 야곱이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내걸 때 그의 목축 경험에서 온 확신에 근거했을 것으로 추론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지혜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셨기에 라반의 모든 것이 그의 수중에 들어온 셈입니다.

 

야곱의 귀향을 지시하신 하나님(10-13)

하나님께서는 동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라반의 거듭되는 악행 속에서도 야곱과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잘 지켜주셨습니다. 비록 열 번이나 라반에게 속았고 해하려는 위협도 받았지만 그때마다 건져주셨습니다. 최근에 야곱이 얼룩무늬와 점 있는 양들, 아롱진 양들을 많이 얻은 것도 야곱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가 꿈속에서 들려주신 전략을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이 고난 받는 동안 하나님은 쉬지 않고 그 백성을 위해서 복을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10그 양 떼가 새끼 밸 때에 내가 꿈에 눈을 들어 보니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었더라 11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이르시되 네 눈을 들어 보라 양 떼를 탄 숫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10-13)

야곱은 변론을 마치고 특별한 영적 체험이었던 하나님의 현몽을 간증합니다. 월키는 이 꿈과 환상이 그가 라반과 가축 떼 분할 협약을 하기 전에 경험한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야곱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을 알고 라반에게 얼룩진 양 떼만 취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설명입니다. 결국 이 현몽 사건은 시간의 순서가 이탈되어 여기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경우 월키는 스스로 모순된 논리를 펼치는 셈입니다. 야곱의 방법을 교묘한 또 하나의 사기극으로 평가하고는 그 방법은 결국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꿈은 서사의 시간 순서대로 야곱이 라반에게서 떼어 온 양을 치기 시작할 때 발생한 사건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전략에 복을 주시어 얼룩이들이 대거 태어나도록 가축들의 선택적 교배가 이루어질 때 더욱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친히 간섭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야곱이 양 떼를 교배시킬 즈음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얼룩진 숫염소들이(개역개정의 ‘숫양’은 오역) 다른 염소들 위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가축의 짝짓기 행위가 분명해 보입니다. 이 꿈의 의미는 자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육종 전략에 복을 주셔서 얼룩진 가축들이 우세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염소 떼 환상에 이어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지시한 말씀을 두 아내에게 들려줍니다. 그 사자는 야곱의 탁월한 육종 기술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직접 양 떼의 유전자를 통제해주실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얼룩진 양들이 양 떼를 지배할 것입니다. 이어서 그 사자는 야곱에게 이곳을 떠나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벧엘에서의 야곱과의 만남과 아마도 그에게 맹세한 약속 그리고 그의 서원을 상기시키십니다.

 

아버지를 떠나기로 하는 두 딸(14-16)

사위에 대한 라반 부자의 시기가 야곱 배후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시기가 돼버렸습니다. 좋은 아버지도, 좋은 고용주도 되지 못한 라반. 딸들을 가축과 맞바꿀 만큼 지금은 가축 부자로서 배부를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상은 허기를 느끼는 빈자일 뿐 딸도 사위도 곁을 떠납니다.

14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15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16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에게서 취하여 가신 재물은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니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14-16)

두 딸에 의해 아버지의 범죄에 대한 최종 선고가 내려집니다. 재판관인 라헬과 레아는 또한 추가적인 증인이기도 합니다. 그녀들은 자신들도 아버지의 피해자라고 합세합니다. 자신들도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몫을 받지 못했습니다. 두 여자가 말하는 자신들의 몫은 유산이라기보다는 신부 지참금이나 혼수품을 말할 것입니다. 15절의 ‘우리의 돈(은전)’이 바로 그것을 지시합니다. 그녀들은 아버지에게서 두 여종 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두 딸은 자신들이 물건처럼 취급되어 팔린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자신들을 딴 식구(외국인)로 취급했습니다. 이로써 라반은 두 딸에게서 중범죄자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녀들은 야곱에게 하나님이 빼앗아 가신 아버지의 재산은 이제 ‘우리와 우리 자식의 것’이라고 판결 내립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하나님의 지시대로 즉시 도주를 실행할 것을 요청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습니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듯, 고용할 때 마음과 고용 후 마음이 다릅니다. 노동하는 인간의 존엄성 대신, 노동하는 인간의 생산에 가치 우위를 두는 사회 속에서 그동안 우린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어왔고 잃는 중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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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0-02)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축복

창세기 30장 25-43절


우리는 지나친 경쟁에 집착하지 말고,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속이는 자 야곱은 더 큰 속이는 자 라반에게 20년간 속임 당했습니다. 야곱, 그리고 야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부가 된 라반은 끊임없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합니다. 딸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고, 조카이자 사위인 야곱을 착취하면서 부를 쌓아 가려 합니다. 

 

야곱은 라헬이 요셉을 낳은 직후 귀향을 결심합니다. 그가 ‘나는 언제 내 집을 세운단 말입니까’라고 항변하는 것을 볼 때(30), 그는 14년을 이미 채웠는데 아직 라반이 붙잡고 있는 상황으로 이해됩니다. 게다가 아마 자녀를 갖지 못한 여자는 스스로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에 그 상태로 고향으로 떠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사이 열한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태어났는데, 이 아들들이 몇 년 동안에 태어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야곱이 귀향을 요청(25-28)

하나님께서는 복 주시는 본입니다. 야곱은 20여 년 전 이곳에 올 때만해도 아무것 없는 단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가족의 가장이 되어 있습니다. 라반을 위해 양과 염소 떼를 친 세월이 마뜩찮아도, 하나님은 그의 발이 이르는 곳마다 복음 주셨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라. 주님이 꽤 많이 주셨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5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26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27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28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25-28)

야곱은 두 아내를 위해 필요한 14년의 기간을 이미 다 채웠습니다. 그가 31:38에서 20년을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두 번의 결혼을 위해 14년을 보내고 이후 6년을 더 라반을 위해 일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야곱은 라반을 찾아가 자신의 처자를 데리고 고향 땅으로 돌아가겠으니 허락해달라고 요청합니다(25). 야곱은 자신의 직무를 다했기에 처자들과 모은 재산을 가지고 떠나도 전혀 문제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가장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이 최선을 다해 외삼촌을 섬겼음을 말씀드리며 공손히 공식적인 허락을 받으려 합니다(26).

라반은 야곱으로 인해 자신이 여호와께 복 받았음을 인정합니다(27). 이것은 아브라함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민족이 복을 누린다는 것의 성취입니다. 여기서 라반의 말인 ‘내가 깨달았다’는 오역입니다(27). 동사 ‘나하쉬’는 ‘점술을 행하다’를 뜻합니다. 웬함을 비롯한 몇몇 학자는 ‘내가 부자가 되었다’는 뜻의 동사로 보려 합니다. 왜냐하면 라반의 말로 판단해보건대 그가 번영할 때 점술에 의존했을 것 같지 않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월키가 말한 대로, 그는 점술에 의존해서 자신의 재산이 왜 늘어났는지 알아보는 어리석은 자일뿐입니다. 결정적으로 나중에 라반은 야곱 일행이 자기 가정의 수호신인 드라빔을 빼돌린 사실을 알고 추적합니다(창세기 31:19, 34-25). 라반은 야곱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면, 자기와 함께 더 머물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원하는 품삯을 야곱 본인이 제시하면 그대로 주겠다고 약속합니다(28). 마치 백지 수표를 제시하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면서 자신의 권위를 한껏 뽐내고 있습니다. 그는 야곱이 라헬과 레아 그리고 자녀들을 가진 가장으로서 이제 돈을 충분히 벌어서 떠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는 야곱의 능력을 알아보았기에 이대로 떠나보내는 것이 자신에게 큰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큰 몸값을 제시하여 유능한 일꾼을 붙잡아놓으려 합니다.

 

야곱과 라반의 협상(29-33) 

야곱은 벧엘에서 주신 말씀을 상기하며(창세기 28:15), 라반의 집을 떠나려 합니다. 평생 라반 밑에서 무일푼 불공정 계약의 비애를 맛봤기에, 그의 눈높이에 맞춰 자신에게 불리해 보이는 제안을 했습니다. 라반은 이런 조건에서도 얼룩진 가축을 빼돌려 야곱의 확률을 낮춥니다.

29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30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31라반이 이르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이르되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32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 33후일에 외삼촌께서 오셔서 내 품삯을 조사하실 때에 나의 의가 내 대답이 되리이다 내게 혹시 염소 중 아롱지지 아니한 것이나 점이 없는 것이나 양 중에 검지 아니한 것이 있거든 다 도둑질한 것으로 인정하소서(29-33)

협상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종처럼 몸을 숙여 행동하던 야곱이 이제 당당히 목소리를 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후 삶이 변화되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속임수나 꼼수를 쓰지 않고 거드름 피우는 일 없이 진심으로 성실하게 외삼촌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 사실을 라반도 잘 알지 않느냐고 물으면서 자신 때문에 라반의 적은 가축 떼가 크게 번성하여 라반이 거부가 되었음을 강조합니다(29-30). 야곱은 자신의 발이 가는 곳마다 라반이 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가 발을 딛는 곳마다 사람들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의 복의 성취합니다.

야곱은 ‘나는 언제 내 집을 위해 뭔가 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자신은 라반을 위해 일했을 뿐, 정작 자신의 수입을 제대로 얻지 못해 가정의 재정을 채울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라반은 다시 야곱에게 원하는 몸값을 묻습니다. 야곱이 제시한 조건은 놀랍습니다. 그는 외삼촌의 양 떼를 계속 돌보는 조건으로 자신의 요구사항 한 가지만 들어주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라반이 거절하기 힘든 매력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참고로 개역개정의 ‘양 떼’는 앞서 말한 대로 ‘촌’인데 이것은 양과 염소를 포괄하는 소형 가축 떼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편의상 이것을 ‘양 떼’로 쓸 것입니다. 야곱은 양 떼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만 가려서 자신의 품삯으로 삼겠다고 제안합니다. 정확히는 양 떼에서 온몸이 흰 것들은 모두 제외되고, 염소 떼에서는 온몸이 흰 것과 검은 것 둘 다 제외됩니다. 따라서 양은 얼룩무늬를 가진 것(점박이와 얼룩이)과 검은 것(진갈색 포함)이 야곱의 것이며, 염소는 얼룩무늬를 가진 것(점박이와 얼룩이)이 야곱의 것으로 분류됩니다(32). 우리는 온통 털이 하얗거나 검은 가축을 제외하고 35절의 ‘얼룩무늬 있는 것’(아마 줄무늬)을 포함하여 색깔이 뒤섞인 털은 모두 ‘얼룩이’로 칭하기로 합니다. 또한 편의상 검정색과 진갈색의 털은 둘 다 ‘검은색’으로 칭하기로 합니다. 야곱은 그런 얼룩이들만(양은 검은 것 포함) 솎아내서 자신이 품삯으로 삼겠다고 제안하며 지금 바로(오늘) 라반의 양 띠 사이를 두로 돌아다니며 그것들을 가려내겠다고 말합니다(32). 이어서 후일에 만일 라반이 조사하여 다른 가축이 자신의 가축 떼에 끼어 있다면 도둑질한 것으로 인정하겠다고 약속합니다(33). 당시 목자들의 입금은 보통 새로 태어난 양/염소 새끼의 20% 미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들은 대부분 하얗기 때문에 얼룩진 양과 검은 양은 매우 드뭅니다. 또 염소는 희거나 검은 염소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얼룩진 염소는 드물을 것입니다(실제로 양들 중에는 검은 양과 진갈색 양이 존재한다). 라반은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야곱의 제안을 거의 횡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곱의 제안을 수용하는 라반(34-36)

라반은 자신은 사랑스럽게 여김 받길 바라면서(30:27) 야곱에게는 너무도 야박했습니다. 이번에도 야곱의 제안이 조카에게 터무니없이 불리할 줄 알면서도 그대로 수용합니다. 그뿐 아니라 얼룩무늬와 점 있는 숫염소와 아롱진 점이 있는 암염소와 검은 양은 야곱의 무리에서 사흘 길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두어, 야곱의 소유가 아예 생기지 못하도록 차단했습니다. 야곱을 두고두고 부려먹겠다는 고약한 심보입니다.

34라반이 이르되 내가 네 말대로 하리라 하고 35그 날에 그가 숫염소 중 얼룩무늬 있는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암염소 중 흰 바탕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가리고 양 중의 검은 것들을 가려 자기 아들들의 손에 맡기고 36자기와 야곱의 사이를 사흘 길이 뜨게 하였고 야곱은 라반의 남은 양 떼를 치니라(34-36)

물욕에 사로잡힌 라반의 음흉한 모습이 다시 드러납니다. 그는 즉시 자신의 가축 떼 중에서 얼룩이를 모두 속아낸 뒤 자신의 아들들에게 맡겼습니다(35). 그리고 야곱에게는 양 중에서는 약속대로 흰 양만을, 염소 중에서는 흰 염소와 흑염소만 건네주었습니다. 얼룩이는 한 마리도 건네지 않았습니다. 그는 야곱에게 백지수표를 건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게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에 일절 응대하지 않고 그 조건을 수용합니다. 이 순간 야곱에게서 물질에 초연했던 조부 아브라함이 보입니다. 라반은 야곱을 사흘 길이나 멀리 보내 점박이와 얼룩이가 많은 자신의 가축 떼와 섞이지 않도록 철저히 격리합니다. 지혜로운 야곱은 양을 치면서 유전 법칙을 나름 깨우친 것으로 보입니다. 라반은 야곱의 지혜를 능가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장인과 멀리 격리된 환경이 오히려 그에겐 최적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는 가축들을 인위적으로 교배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유전학 지식을 활용하여 원하는 개체를 늘릴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양 떼의 번성(37-43)

하나님께서는 일하실 타이밍입니다. 야곱에게는 온통 흰 양과 염소뿐이니 출생을 통해 얼룩진 새끼를 얻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두 아내를 통해 태의 문을 여시는 분이 주님임을 경험했기에, 주께서 허락하시면 가능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주의 손길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37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가져다가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 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 구유에 세워 양 떼를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40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을 라반의 양과 서로 마주보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41튼튼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 떼의 눈 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이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42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그렇게 함으로 약한 것은 라반의 것이 되고 튼튼한 것은 야곱의 것이 된지라 43이에 그 사람이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노비와 낙타와 나귀가 많았더라(37-43)

사르나(Sarna)는 버드나무, 살구나무(아몬드 나무), 그리고 신풍나무, 이 세 종류의 나무는 특수한 약 성분을 함유하여 의학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짐승의 발정기를 앞당겨 교배를 할 수 있게 하는 효과를 지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나무들을 약간 다른 용도로 사용합니다. 그는 세 종류의 푸른 나무 가지들을 꺾어온 뒤 껍질을 벗겨 하얀 가지(라반)들을 만들었습니다. 야곱이 빨간 죽으로 에돔(즉, 빨강)을 갈취했던 것처럼 이제 흰색 가지(라반 12)를 이용해 라반을 갈취합니다. 야곱은 그 나뭇가지들을 양 데가 물 마시러 오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놓았습니다. 그 가지 앞에서 양과 염소들이 교미를 하고 새끼를 별 때 얼룩진 양과 검은 양들이 태어났습니다. 이것은 분명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미신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교배 방법에 대한 개론적 설명이고 이 방법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한 내용이 41절부터 이어집니다. 매우 튼튼한 양과 염소는 잡종인 녀석들이 많은데 잡종끼리 교배할 경우 열성의 색깔 유전자의 발현으로 얼룩이가 태어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야곱은 튼튼한 양들이 교배할 때가 되면 나뭇가지들을 세워 그 앞에서 그것들끼리 교배를 시켰고, 약한 양들에게는 나뭇가지들을 세우지 않고 따로 그것들끼리 교배를 시켰습니다. 결국 색깔이 일관된 순종은 약했고 색깔이 얼룩진 잡종은 강했기에 자동적으로 약한 양/염소는 라반의 것이 되고 강한 양/염소는 야곱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라반은 알지 못했던 지식, 곧 야곱이 목축 경험에서 체득한 유전학적 지식에 따른 것으로 추론됩니다. 야곱은 매우 번창하여 양 떼와 남녀종, 낙타와 나귀의 수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는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하나를 포기하면 열을 주시는 희한한 계산법을 적용하시면서 말입니다. 지금까지 일한 우리의 품삯을 챙겨주시는 분도 앞으로 얻게 될 우리의 분깃을 관리해주시는 분도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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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30-01)


야곱의 집에 출산 전쟁

창세기 30장 1-24절


 우리는 내일 일도 알 수 없고, 오늘의 의미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생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종종 지난날을 돌아볼 때, 우리는 무릎을 치며 이때를 위함이라고 고백하며 찬양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유한한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의 고난을 묵묵히 이겨 내가면서 승리해야 합니다.

 

라헬은 오래도록 임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들을 무려 넷이나 낳은 언니 레아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혀 야곱에게 달려갔습니다. 언쟁의 시작됩니다. 야곱과 라헬이 결혼식에서 사랑하는 모습 이후 두 사람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부부싸움입니다. 그녀는 야곱에게 자신도 자식을 낳게 하라며 만일 자식을 낳지 못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1). 이후 야곱의 두 아내 사이에서는 본격적인 출산 경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라헬의 여종 빌하의 두 아들(1-8)

인간의 욕망은 또 다른 욕망을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레아의 아픔이 좀 해소되는가 싶더니 라헬의 질투가 기승을 부립니다. 레아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선물이 라헬에게는 도리어 상처가 되었습니다. 야곱의 사랑에도 만족하지 못했고, 붙임 콤플렉스 앞에선 열등감에 시달리기 일쑤였습니다.

1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의 언니를 시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2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3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4그의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아내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5빌하가 임신하여 야곱에게 아들을 낳은지라 6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7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임신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8라헬이 이르되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 하고 그의 이름을 납달리라 하였더라(1-8)

레아의 연달은 출산 소식과 더불어 더욱 낙심이 커진 라헬은 야곱을 찾아가 하소연하며 불임은 남편 탓이라고 떼를 씁니다. 애를 낳지 못하면 자신은 죽을 것이라고 겁을 줍니다. 이것은 자살 의사를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낙심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며, 또한 무자녀로 인해 자신이 낙심하여 병이 들거나 쇠약해져 시름시름 죽어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나중에 아이를 낳는 중에 죽습니다(창세기 35:16-19). 여성에게 불임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었으며 종종 하나님의 저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임은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경험할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사라나 리브가에 비해 인내심이 전혀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라헬은 지금 불임의 책임을 남편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야곱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분을 내다’의 히브리어 ‘하라 아프’는 문자적으로 ‘~의 코/콧구멍이 타오르다’입니다. 야곱이 매우 크게 화를 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고 말하는 야곱은 불임의 원인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2). 태를 열고 닫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임신은 사람의 통제 밖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라헬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과 인내심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질투심과 경쟁심에 사로잡혀 성급히 행동합니다. 자신의 몸종 빌하의 몸을 빌려 자식을 얻고 야곱의 총애를 되찾아 오고자 합니다. 그녀는 ‘내가 그를 통해 세워질 수 있다’(개역개정, ‘그로 말미암아 자식을 얻겠노라’)고 말합니다(3). 이것은 자신이 대리모의 아들을 통해 야곱의 가문이 이어갈 수 있게 할 것이란 기대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종 빌하를 야곱에게 ‘아내’로 주었고 야곱은 그녀와 잠자리를 가졌습니다(4). 여기서 ‘아내’는 후처나 첩을 의미합니다. 첩으로 불린 여자들은(창세기 16:3; 25:1; 30:4; 35:22) 동시에 흔히 아내로 호칭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족장 시대 이후 첩은 아내와 더 이상 동의어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지금 두 시녀 빌하와 실바를 차례로 법적인 후실 개념의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야곱은 지금 합법적인 첫째 아내 레아를 통해, 그가 그녀를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합법적인 장남이자 상속자인 르우벤을 이미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네 명의 아들이 태어났기에 이미 자신의 혈통 문제는 해결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현재 라헬의 입장에서는 본인을 통한 후대의 가문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빌하는 야곱에게서 단을 낳았습니다(5). 라헬은 자신이 원하던 대로 빌하가 아들을 낳자 하나님께 찬양을 올립니다(6). 단을 낳은 후 드린 감사의 기도를 볼 때 그녀가 인내심과 신앙심이 부족하긴 했어도 임신 문제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의 이름도 ‘하나님께서 판결하셔서 억울함이 풀렸다’는 뜻으로 단이라 지었습니다. 빌하는 이어서 둘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녀는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해서 이겼다’고 선언하고 아들 이름을 ‘경쟁’, ‘씨름’이란 뜻의 납달리로 짓습니다. ‘크게 경쟁하다’의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경쟁/씨름으로 경쟁했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씨름’으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서 ‘하나님께서 관여하신 씨름’으로 혹은 ‘하나님과의 씨름’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라헬의 열심 있는 기도를 뜻한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여러 모로 어색해 보이며 대리모에 의존하는 라헬의 신앙이 그 정도 경지는 아닌 듯합니다. ‘엄청난 경쟁을 했다’가 타당한 해석입니다.

 

레아의 여종 실바의 두 아들(9-13)

자긴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긴장감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갈수록 팽팽해져 갑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두 여인의 아들 경쟁은 자신의 여종들까지 동원하여 2차전을 이어갑니다. 추월한 자는 더 승점을 올리기 위해, 추월당한 자는 역전하기 위해 내달립니다.

9레아가 자기의 출산이 멈춤을 보고 그의 시녀 실바를 데려다가 야곱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더니 10레아의 시녀 실바가 야곱에게서 아들을 낳으매 11레아가 이르되 복되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갓이라 하였으며 12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13레아가 이르되 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아셀이라 하였더라(9-13)

두 아내의 경쟁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레아의 반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넷째 유다를 낳은 뒤 잉태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녀의 태가 닫혀서가 아니라 남편 야곱의 총애를 잃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레아는 라헬이 자기 시녀를 통해 두 아들을 낳은 것을 보고 자신의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들여보냈습니다(9). 실바에게서 다시 아들이 태어났으며 레아는 그의 이름을 ‘복 되도다’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갓이라 지었습니다. 실바는 둘째 아들도 출산했습니다. 레아는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할 것이다’라고 찬양하며 ‘기쁨’, ‘행복’을 뜻하는 아셀이란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레아가 추가로 두 아들과 딸(14-21)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기대가 이뤄지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을 통해 사람에게서 자신의 무력함과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고백을 받아내십니다. 시종을 통해서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한 라헬과 레아가 이번에는 최음제로 쓰이던 합환채를 사용합니다.

14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15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16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17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18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19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20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21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14-21)

언니 레아는 승승장구합니다. 아마도 경쟁이 약간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즈음, 합환채 사건이 발생합니다. 큰 아들 르우벤이 들판에 나가 합환채를 채집해 왔습니다. 합환채는 지중해의 다년생 식물로 구토제나 통변제로 쓰이는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무엇보다 성욕을 일으키는 최음제, 또는 임신 촉진제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참조. 아모스 7:13). 이 약재에는 마술적 요소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성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별명이 ‘합환채의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이 약초는 ‘밀 거둘 때’ 채집했는데, 보통 팔레스타인의 밀 수확기는 음력 3월(양력 5월)의 봄철입니다. 이 식물을 두 아내가 서로 탐내는 것으로 보아 분명 이것이 임신에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전히 라헬은 임신을 못한 상태이며, 레아는 출산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라헬은 레아에게 합환채를 달라고 요청합니다(14). 그녀는 다시 마술적 혹은 인위적, 의료적 방법을 써서라도 아이를 낳고 싶었습니다. 라헬은 합환채의 거래 조건으로 레아에게 야곱과의 동침을 양보하겠다고 말합니다(15). 아마 레아는 야곱과 오래도록 잠자리를 못하고 있는 상태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녀의 출산 중단의 가장 중요한 요인일 것입니다.

여기서 라헬이 비록 아들이 없지만, 잠자리에서 야합의 총애를 받으며 실제적 권력을 쥐고 있음이 확인됩니다. 합환채 교환과 더불어 레아가 남편과 동침할 권리가 확보되었습니다. 레아는 ‘내가 당신을 샀다(사카드)’는 말로 고용주를 자처합니다. 라반과 야곱의 혈육 관계가 상업적 거래를 통해 고용 관계로 변하더니 이제 두 딸과 야곱의 부부 관계가 합환채 거래를 통해 고용 관계로 변합니다.

그날 밤 야곱은 레아와 동침하였고 레아의 다섯째 아들 잇사갈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아의 소원으 들으셔서 야곱을 통해 다섯째 아들을 낳게 하십니다. 합환채를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임신은 궁극적으로 인간적 수단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이 다시 한 번 증거 됩니다. 분명 레아의 소원은 끊어진 남편과의 잠자리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덤으로 그녀는 또 다른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품삯/보상을 주셨다’는 의미를 부여하여 그 아들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불렀습니다. 레아는 이어 여섯 째 아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는 남편이 ‘나를 영예롭게 하리라(자발)’(개역개정의 ‘나와 함께 살리라’보다 더 타당함)고 노래하며 아들의 이름을 ‘영광 받음’, ‘찬양 받음’을 뜻하는 스불론으로 짓습니다. 레아의 출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심판’, ‘변론’의 뜻을 담은 디나로 지었습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음(22-24)

공교롭게도 이 숨 막히는 전쟁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한 방향은 아니었더라도 두 여인의 아들 경쟁을 통해 그분의 약속(창세기 28:14)은 성취되고 있었습니다. 잔잔하고 평온한 일상이 아닌 아옹다옹하는 상황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일하십니다.

22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22-24)

레아의 연이은 출산으로 라헬은 더욱 낙심이 컸을 것입니다. 합환채를 쓰지 않은 레아는 연달아 임신을 했고 합환채를 쓴 자신은 여전히 불임이었습니다. 태는 합환채가 아닌 하나님께서 여신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기억하셨습니다(자카르). 하나님께서는 누군가를 기억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구원 행동을 시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창세기 8:1; 19:29; 출애굽기 2:24). 하나님께서는 라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녀의 태를 여셨습니다. 라헬은 아들을 낳고 하나님께서 비로소 자신의 수치를 씻어내셨다고 찬양하며 그의 이름을 요셉이라 지었습니다. ‘그가 더 하신다’는 뜻의 이 이름에는 추가적인 자녀에 대한 소망이 들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더해진 아들, 곧 베냐민의 출생을 예고합니다.


 부러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비교는 자신을 유리 감옥에 가두어 그 수준에 머물게 합니다. 욕망의 벽이 투명한 탓에 자신이 감옥 밖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분간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고 주 안에서 축복하는 성숙함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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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9-02)

 


사기 당한 사기꾼

창세기 29장 21-35절


우리는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슬퍼하기보다는,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새로운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픔과 고통을 준 사람은 자신의 행동은 쉽게 잊어도, 당한 사람에게는 두고두고 상처가 되는 법입니다. 자신의 행동에서 실수를 모른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보다 더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야곱이 하란에 온지 7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찾아가 기간을 채웠으니 라헬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 이미 그는 라헬을 ‘내 아내’라 칭하는데, 당시 관례로 약혼 관계는 이미 실질인 부부 관계로 인정되어 다른 남자가 그 여자를 데려갈 수 없었습니다. 라반의 대답은 언급되지 않고 단순히 그가 곧바로 결혼식을 진행시키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22). 라반의 무반응을 통해 어쩌면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미 라반이 그 결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암시를 주는지 모릅니다.

 

사기 결혼을 당한 야곱(21-27)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만나야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정확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생깁니다. 또 사랑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내하게 됩니다.

21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내 기한이 찼으니 내 아내를 내게 주소서 내가 그에게 들어가겠나이다 22라반이 그 곳 사람을 다 모아 잔치하고 23저녁에 그의 딸 레아를 야곱에게로 데려가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 24라반이 또 그의 여종 실바를 그의 딸 레아에게 시녀로 주었더라 25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 라반에게 이르되 외삼촌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행하셨나이까 내가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을 섬기지 아니하였나이까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 어찌됨이니이까 26라반이 이르되 언니보다 아우를 먼저 주는 것은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아니하는 바이라 27이를 위하여 칠 일을 채우라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니 네가 또 나를 칠 년 동안 섬길지니라(21-27)

만 7년 기간을 채운 뒤 야곱은 라반에게 라헬을 아내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주소서’라고 말한 동사 ‘야하브’는 구약에서 아주 절박한 요구를 할 때만 나타납니다. 그가 얼마나 라헬을 갈망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구약에서 이미 혼전에 남자는 여자에게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즉, 여자는 물론 남자 또한 혼전 순결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라반은 결혼식을 열고 사람들을 초청해 결혼 잔치를 벌였습니다. 결혼식 축하연은 1주일간 계속되었습니다(27; 사사기 14:17). 결혼식 당일 저녁 라반은 라헬이 아닌 큰 딸 레아를 얼굴을 가린 채 데려갔으며, 야곱은 그녀를 데리고 신방에 들어갔습니다(23). 라반은 레아를 사기극으로 시집보내면서 관례대로 여종 실바를 일종의 혼수품으로 딸려 보냈습니다(24). 당시 관례로 그런 혼수품과 여종은 여주인의 개인 소유물입니다. 라반은 야곱을 의도적으로 포도주에 취하게 했을 것이며 신부의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심야의 어둠을 이용하여 그를 속이는 데 성공합니다. 이것은 라반의 누이 리브가가 털가죽 피부와 에서의 옷, 그리고 맛있는 죽으로 이삭을 속인 것에 비견됩니다.

라반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무래도 큰딸 레아를 더 편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히 그녀가 큰딸이어서만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었을 듯합니다. 예를 들어, 동생 라헬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상당히 버거웠을 주로 물 긷는 역할을 했던 목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 집안에 노동력이 부족해서 라헬의 역할이 상당히 컸음을 반증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목축은 신뢰하기 어려운 종이나 삯꾼에게 맡기지 않고 가족들이 직접 감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아마 언니 레아는 집안에서 주로 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기질과 성향의 차이로 인해 들판을 누비던 에서와 집 안에서 지내길 좋아하고 조용했던 야곱의 생활 방식과 비교됩니다. 활동이 왕성한 에서가 남성적 매력이 더 있었다면, 목축을 하는 라헬은 햇볕에 그을려 오히려 여성적 매력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야곱이 우물가에서 목축을 하던 라헬에게 첫눈에 반하지 않은 이유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레아는 주로 집 안에서 지냈다면 여성미를 가꾸는 데 훨씬 더 집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라반이 혼기가 먼저 찬 레아를 시집보내기 위해 집 안에 두었는지 모르나 라반이 큰딸을 편애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아는 야곱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야곱이 라헬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도 아닌 듯합니다. 라헬이 우물가의 첫 만남에서 리브가와 같은 친절을 베푼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야곱이 라헬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물 길으러온 리브가와 물 먹이러 온 라헬은 역할이 달랐으니 당연했을 것이다), 오히려 라헬이 처음부터 야곱에게 호감을 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 라반의 집에서 지낸 한 달 동안 야곱은 그녀의 미모와 매력을 발견하고 그녀의 내면을 살피면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대조가 엿보입니다. 이삭은 큰아들 에서를 편애했고 라반은 큰딸 레아를 편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역전되고 신적인 인과응보, 혹은 자업자득의 원리가 실현됩니다. 야곱은 이삭과 에서를 속여 장자권을 얻었으나, 여기서는 야곱이 라반과 레아에게 속아 라헬을 얻지 못합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왜 자신을 속였냐고 따집니다(25). ‘속이다’라는 동사는 에서가 야곱의 행위를 표현한 명사 ‘속임수’의 동사형입니다. 동일한 속임수를 이제 야곱이 당합니다. 위장술을 사용했던 야곱이 동일한 위장술로 당합니다. 원조 사기꾼이 도리어 사기를 당합니다. 장남 에서는 차남 야곱에게 사기극과 위장술로 지위를 뺏겼으나, 이번에는 장녀 레아가 차녀 라헬에게서 사기극과 위장술로 지위를 지킵니다. 라반은 위선적이고 교활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는 ‘우리 지방에서는’ 둘째를 첫째보다 먼저 주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받아칩니다(26). 하지만 그가 정직한 인물이었다면 처음부터 야곱과 계약할 때, 그런 관례를 말해줬어야 합니다. 아마 라반은 어디서 들었는지 야곱의 사기극 전말을 알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가 정곡을 찔러 ‘우리 지방에서는’ 둘째를 첫째보다 먼저 주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너희 집안에서는 둘째가 첫째 자리를 차지했을지 몰라도 여기서는 턱도 없는 일이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라반은 허를 찔러 야곱의 약점을 공략함으로써 그가 대응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야곱은 더 이상 항변하지 못하고 현실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라반은 큰소리치며 말합니다. ‘레아를 위해 7일을 채우라’(27). 이는 당시에 결혼식이 7일간 계속 진행되었음을 뜻합니다. 아마 ‘7’은 완전수로서 결혼의 완성을 뜻하는 기간일 것입니다. 태어난 지 7일이 지나 8일째에 남자 신생아가 할례를 받는 이유도 동일한 숫자의 신학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이어서 라반은 7일의 결혼 축하연이 끝나면 라헬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27). 이것은 야곱이 라헬을 위해 다시 7년 봉사를 하면 그 후에 그녀를 얻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시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삼되, 대신 신부 값으로 7년간의 봉사를 필히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라반은 이렇게 야곱을 혈육이 아닌 고용인처럼 부리며 착취합니다. 라반은 심지어 자신의 딸들도 이익의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딸들의 이름은 각각 ‘암소’와 ‘암양’을 의미하는데 목축을 하는 가족에게 적절한 이름입니다. 하지만 라반은 레아와 라헬을 자신이 기르는 가축처럼, 말하자면 매매하려고 내놓은 물건처럼 취급합니다.

 

라헬을 얻은 야곱(28-30)

신부에게 가장 기쁘고 행복해야 할 날이 가장 슬프고 잔인한 날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아내로 산다는 것, 그것도 동생을 사랑하는 사람과 산다는 것, 더욱이 7일 후면 사랑받는 아내의 자리마저 동생 라헬의 몫이 돤다는 것, 레아의 마음 밭은 이미 피밭입니다.

28야곱이 그대로 하여 그 칠 일을 채우매 라반이 딸 라헬도 그에게 아내로 주고 29라반이 또 그의 여종 빌하를 그의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30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여 다시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더라(28-30)

야곱이 레아와의 결혼 축하연을 정상적으로 마치자 7일 후에 라반은 약속대로 라헬을 그에게 아내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라헬을 위해서 여종 빌하를 혼수품으로 딸려 보냈습니다. 야곱은 다시 라헬과 잠자리를 가졌고 그는 라헬을 레아보다 더 사랑했기에 다시 7년 동안 라반을 인내하며 섬겼습니다. 여기서는 7년을 며칠처럼 생각했다는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나중 7년의 세월이 처음 7년과는 분명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아가 네 아들을 낳음(31-35)

하나님의 사람은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삶이 아닌 대화와 양보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레아의 마음을 헤아려 태를 열어주셨습니다. 이름의 뜻에서 알 수 있듯이 네 번째 자녀를 얻고 나서야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야곱의 아내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하나님의 신부 레아로 정체성을 찾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레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31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5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31-35)

레아는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원문은 ‘미움을 받았다’인데 이것은 남편의 감정적인 배제를 뜻합니다. 그러나 여러 번역들이 이것을 ‘사랑을 받지 못했다’로 순화합니다(NIV; NASB).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태를 먼저 여시어 연달아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라헬은 자녀를 갖지 못했습니다. 레아가 낳은 아들들의 순서는 각각 르우벤, 시므온, 레위 그리고 유다입니다. 그녀는 각각의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의미 있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처음 세 아들의 이름에는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남편의 사랑을 갈망하는 뜻을 담았습니다: 르우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보셨다’; 시므온,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다’; 레위, ‘내 남편이 나와 연합할 것이다’; 유다, ‘내가 여호와를 찬양하리라’. 레아가 아들들에 부여한 작명의 의미들은 그녀가 얼마나 남편을 사랑했는지 엿보게 합니다. 그녀는 넷째 아들 유다의 이름에는 하소연이 아닌 찬양의 의미를 담았습니다. 넷째 아들 유다와 더불어 그녀의 출산이 멈췄습니다. 이것은 그녀가 불임의 상태가 되었다는 뜻일 수 있으나 남편 야곱과의 잠자리가 중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창세기 30:14-20). 어쨌든 넷째 아들과 더불어 그녀의 한이 풀린 듯하며 그녀는 비로소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유다는 장차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지파로 부각되어 유다의 뿌리에서 다윗이 출현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술책에 야곱은 사기 결혼을 당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원치 않던 아내를 통해 섭리하시면서 자신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야곱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두고 일하십니다. 레아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랑 안에서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선입니다. 비록 지금은 이해할 수 없고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도 반드시 깨닫게 될 날, 회복될 날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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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9-01)

  


야곱과 라헬의 우물가 사랑

창세기 29장 1-20절


성도들이라면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 가운데 거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길에 서 있는 자에게만 부어주십니다. 하란은 향한 야곱의 여정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가까스로 그곳에 도착하더라도 새로운 험로가 펼쳐질 것입니다. 라반과 야곱, 라헬과 레아의 갈등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서, 어떻게 개입하시겠습니까, 어떻게 그를 향한 약속을 이루시며, 그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겠습니까!

 

야곱은 다시 목적지를 향해 떠납니다. 그는 낙타를 타지 않고 도보로 직선거리 600km가 넘는 거리를(아마 실제 여행 거리는 800km 정도 될 수 있음) 여행 중입니다. 왜 이삭이 신부를 구하도록 야곱을 보내면서 신부 값을 실어 나를 낙타와 종들의 대동 없이 혼자 보냈게습니까? 아마 이삭은 에서를 배려하거나 그의 눈치를 봤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런 규모 있는 야곱의 여행단은 형 에서를 더욱 견디기 힘들게 했을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 근처에 도착(1-8)

성도는 구별된 자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성도들은 신랑 되신 예수님의 신부로서 영적인 순결을 지녀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의 악과 섞일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것은 영적 간음입니다. 성도들은 항상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1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2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3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4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5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6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7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8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1-8)

이삭은 야곱에게 아브라함의 복으로 축복하면서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가 아니라 그 친족 중에서 아내를 맞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종을 고향으로 보냈듯이, 이삭도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가나안 사람들과 섞이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출발을 히브리어로 독특하게 ‘발을 들었다’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문학적 표현이며, 그가 먼 거리를 낙타도 타지 않고 일행도 없이 홀로 도보 여행 중임을 시사합니다. 그는 ‘동방 사라의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그가 하란 근처의 들판에 도착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들판에 한 우물이 있고 주변에 목자들이 거느린 세 무리의 양 떼가 누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현재 목자 세 명이 각자의 양 떼를 몰고 왔음을 의미합니다. 당시 관례에 따라 그들은 약속된 목자들이 각자의 양 떼를 몰고 모두 모이면 우물을 열어서 공평하게 물을 먹였습니다.

‘큰 돌’로 우물 위를 덮어놓았다는 언급은 분명 다분히 의도적입니다(2). 이것은 나중에 야곱이 라헬 앞에서 의도치 않게 이 돌을 홀로 치울 만한 기력을 가진 능력 있는 남자임을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돌이 너무 컸기에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나중에 10절에서 야곱이 그 돌을 라헬 앞에서 혼자 치운 것은 갑자기 괴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 갑자기 그런 놀라운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야곱의 이전 모습이나 이후의 모습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는 영리하고 계획적이고 경영에 능한 사람일 뿐 놀라운 육체적 능력은 전혀 그의 특징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야곱 이야기에서 그의 갑작스런 괴력은 너무나 엉뚱할 뿐입니다. 이 문제는 그가 돌을 치우는 10절에서 더 살피기로 합니다.

야곱과 목자들의 대화는 전반적으로 단순하고 무료합니다(3-8). 야곱은 그들을 '내 형제'라고 부르며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습니다. ‘형제’라는 호칭은 전형적인 접근을 위한 친근감의 표시입니다. 이러한 무뚝뚝한 단답식 대화를 통해 저자는 현재 야곱이 어느 곳에 와 있는지 알려주면서 결국 하나님의 섭리로 하란 사람과 만났으며 또한 정확한 시점에 라헬을 만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6).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야곱의 여정에 그분의 섭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목자들의 무미건조하고 냉랭한 홀대는 곧 있을 라헬의 따뜻한 환대를 더욱 부각하는 역할을 합니다. 야곱은 그들에게 아직 해가 지려면 멀어서 가축 떼가 모일 시간이 아닌데 양 떼에게 물을 빨리 먹이고 다시 양 떼를 몰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의향이 없다고 하면서 목자들이 양 떼를 몰고 올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말합니다(7-8). 그들이 이렇게 예정 시간보다 훨씬 빨리 온 이유는 아마 도착한 순서에 따라 선착순으로 물을 먹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과 라헬이 만남(9-14)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신비입니다. 정확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생깁니다. 또 사랑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감내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랑이 있지만, 하나님을 만나야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하지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9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10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11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12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13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14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9-14)

야곱과 목자들의 대화는 더 이어진 것 같습니다. 우물을 여는 시간까지는 상당 시간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양 떼를 몰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그가 하란의 목자들을 거기서 만나 라헬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그는 물을 얻어먹고 계속 길을 갔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녀가 목자들이 말한 라반의 딸인 것을 인식하고 가까이 가서 돌을 옮기고 그녀가 몰고 온 양 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 야곱이 아브라함의 종과 달리 기도와 찬양을 올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라헬과의 만남은 덜 극적이고 신비적이며, 이어지는 라반과의 만남에서도 일이 꼬이고 고난을 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여행과 만남이 지닌 특징을 간과한 지나친 단순화로 보입니다. 앞서 그는 아브라함의 종과 달리 하나님의 직접적인 임재를 체험했기에 영적인 충만함과 민감함 속에서 여행 중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기도를 통한 섭리로 인도를 받았으나 야곱은 임재를 통한 섭리로 인도를 받습니다. 섭리의 방식과 과정이 다를 뿐 야곱의 경우도 전혀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극적인 섭리가 작동 중입니다.

10절에서 야곱이 돌을 치울 때 저자는 별다른 인상적인 묘사를 하지 않고 ‘큰 돌’이라고도 하지 않은 채 단순히 ‘돌’로 칭할 뿐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무슨 괴력을 발휘했다는 그 어떤 암시도 없으며 오로지 야곱과 라헬의 조우와 야곱의 한 여성에 대한 친절과 배려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우물 덮개용 돌은 실제로는 다른 목자들이 합세해서 치웠거나, 아니면 그 돌은 분명 상당한 무게의 돌이긴 했더라도 성인 한 사람이 감당할 정도였을 수 있습니다. 2절에서 의도적으로 ‘큰 돌’로 묘사되었던 것은 야곱의 자상함과 야곱이 남자로서의 능력이 중문하다는 것을 라헬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앞서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에게 친절을 베풀었으나 여기서는 야곱이 라헬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야곱은 양 떼에게 물을 먹인 뒤 라헬에게 입을 맞추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이것은 멀고 힘든 여행 끝에 극적인 친족 상봉에 대한 기록의 눈물로 이해됩니다. 또한 이 눈물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때서야 라헬에게 자신을 상세히 소개하며 그녀의 혈육임을 밝힙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처음 봤을 때와 달리(창세기 24:16), 여기서는 라헬에 대한 첫인상이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라헬은 뙤약볕 아래서 양을 치는 목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때 등장한 라헬에게서는 여성적 매력이 부각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라헬은 즉시 아버지 라반에게 달려가 야곱의 도착을 알렸습니다. 라반은 조카 야곱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달려와서 그를 영접했습니다(13). 아마 그는 앞서 아브라함의 종이 낙타 열 마리를 동반해서 방문했을 때 막대한 재물을 함께 가지고 왔음을 상기하고 이번에도 그런 물욕에 사로잡혀 급히 달려 나왔을 개연성이 큽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본 맨몸의 여행객인 야곱은 라반에게 얼마나 실망스러웠겠습니까? 비록 라반이 겉으로는 야곱을 안고 입 맞추며 그를 맞아들이긴 하나 이미 빈 몸으로 확인된 야곱을 그가 진심으로 환대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자신의 모든 일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장자권이나 그것을 획득하게 된 과정 등에 대해서는 침묵한 채 그저 이삭의 아들임을 확인해 주면서 신붓감을 구하러 왔다고 말했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라반이 야곱의 말을 다 듣고 나서 ‘너는 정말 내 혈육이구나’라고 말하며 비로소 그의 거주를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아크)은 반색과 환영의 뉘앙스가 아닌 ‘진짜네’와 같은 심드렁한 감정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결국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한 달을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함(15-20)

하나님의 사람은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삶이 아닌 대화와 양보의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상대방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살펴서 성숙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며 원망 대신 감사의 기도를 하길 바랍니다.

15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16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17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18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19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20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15-20) 

한 달 동안 야곱을 지켜본 라반은 음흉한 계산을 끝낸 것으로 보입니다. 신부를 찾으러 온 야곱이 라헬에게 호감을 품고 있음을 간파했을 것입니다. 그는 품삯으로 무엇을 주길 원하는지 물으면서 우회적으로 야곱을 자신의 목적으로 유도합니다. 그는 이 순간 야곱에 대한 혈육의 관계를 끊고 품삯을 주는 삯꾼으로 전락시킵니다. 라반에게는 큰딸 레아와 작은 딸 라헬이 있었습니다. 라반의 입장에서는 야곱이 괜찮은 신랑감이고 집안도 매우 좋기에 딸들을 그에게 시집보내는 일이 나쁘지 않다고 결론내린 것 같습니다(19).

레아는 시력이 약했습니다. 문자적으로 ‘레아의 두 눈이 약했다(라크)’인데 이것은 시력보다는 눈에 총기가 없음을 뜻할 것입니다. 이삭에게서 보듯이 흔히 시력은 영적 분별력을 암시하기도 하므로 어쩌면 이것은 은연중에 내려진 그녀의 신앙과 분별력 또는 총명함에 대한 평가인지도 모릅니다. 반면에 라헬은 곱고 아리땁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라반은 7년 노동의 대가로 라헬을 주기로 약속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그가 라헬을 주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 것에서도 드러납니다(26). 그런데 그는 대놓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7년이 매우 긴 세월이지만, 야곱은 라헬을 위해 기쁘게 불과 며칠을 일한 것처럼 7년 동안 라반을 위해 일했습니다.


 등불(시 119:105)은 헤드라이트와는 다릅니다. 목적지까지 속 시원히 비추진 않지만, 발걸음 하나하나를 내딛게 하는 안전한 빛이 되어줍니다. 하나님의 길을, 마음을, 존재를 일깨우시는 만큼 우린 안심하고 나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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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8-02)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

창세기 28장 10-22절


 우리는 외롭고 힘든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과 항상 함께하시며 신실하게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진심으로 섬기고 신뢰해야 합니다.

 

야곱은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 라반의 집이 밧단아람이 아닌 하란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브두엘과 라반의 집을 강조할 때는 밧단아람, 29:1에서 야곱의 여행 방향에 주목할 때는 ‘동방’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란’이란 지명을 쓰는 이유는 아브라함이 떠나온 지역임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은 결국 아브라함이 떠나온 곳을 그대로 역행하여 여행하고 있습니다. 이삭은 본인이 직접 여행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꿈에 나타난 하늘 사다리(10-12)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탑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오직 혼자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성도들과 함께 하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들과 언약하신 것들은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가며 저녁에 꿈을 꿉니다.

10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10-12)

야곱은 에서를 피해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 집이 있는 하란으로 갑니다. 도중에 어느 곳에 도착해 해가 지자 밤을 보내기 위해 여장을 풀었습니다. 저자는 그곳을 ‘그 장소’(하마콤 디)로 부릅니다. 어떤 학자들은 단순히 ‘한 장소’를 의미한다고 말하나 그 경우 관사 없이 ‘마콤’을 쓰는 것이 관례입니다(창세기 24:23,25; 출애굽기 21:13; 신명기 1:33). 분명 저자는 그곳이 특별한 장소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돌 하나를 취해 베개 삼고 누워 잠들 없습니다(11). 혹자는 돌이 베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맡에 두었을 뿐 베개로 삼지는 않았다고 말하나 애굽에서는 금속으로 만든 베개가 있었습니다. 베개용이라면 그 돌은 그리 큰 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꿈속에서 하늘로부터 사닥다리가 내려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닥다리는 사실 많은 학자들의 견해대로 쌍방향 통행이 가능한 층계가 분명해 보이나 우리는 편의상 전통적인 견해대로 사닥다리로 간주합니다. 사닥다리에는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천상과 지상을 오가는 천사들의 분주한 임무 수행 장면으로 보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서 계셨습니다(13). 참고로 예수님은 장차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자신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현재의 하나님이 계신 자리에 자신을 놓으셨습니다(요한복음 1:51).

 

야곱에게 주신 여호와의 약속(13-15)

초등학생들을 아파트 브랜드와 평수로 서열을 정한다는 이 관기의 시대에, 내가 누운 어느 곳이라도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적인 줏대를 세우고 전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모든 백성들을 보호해주십니다. 이러한 약속은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한 번 약속하신 것들은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13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13-15)

사닥다리 위에 계신 여호와께서 야곱을 향해 자신을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십니다.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분이며 그와 언약을 맺고 놀라운 약속들을 주셨던 그 하나님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분은 야곱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시고 이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계보가 야곱에게 이어진다는 것을 확증하고 계시며 더불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모든 약속이 야곱의 것이 될 것임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야곱은 어머니와 꾀를 내어 에서와 이삭에게서 그 권리를 훔쳐냈습니다. 이삭은 속았지만 야곱의 합법적 권리를 승인하고 마침내 그에게 아브라함의 약속이 승계됨을 선언했습니다(창세기 28:3-4). 이제 그것을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인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 대한 약속들을 구체적으로 확증하십니다(13-14). 앞서 12:1-3,7의 반복입니다. 또한 더욱 흥미롭게도 아브라함이 롯과 결별한 후 현재의 장소인 벧엘로 거주지를 옮겼을 때인 13:14-16에서 약속된 복들이 거의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땅의 선물과 후손의 번성, 만민이 야곱의 후손을 통해 받을 복, 그리고 보호와 동행입니다. 먼저 그가 누워 있는 땅, 즉 가나안 땅을 야곱과 그의 후손에게 줄 것입니다. 후손은 번성하여 사방 땅에 퍼질 것입니다. 땅에 퍼져 나간다는 것은 아마 가나안 땅의 정복과 그 땅의 분배에 대한 예고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이어 야곱 자신이 받을 복은 생략되어 있지만, 열국이 그를 통해 받을 복에 당연히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약속이 다 성취될 때까지 언제나 야곱을 보호하고 동행하며 인도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란 땅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벧엘에서 이 약속을 맹세하셨고 이제 역으로 야곱이 다시 하란 땅으로 되돌아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이 약속을 재확증 하십니다. 야곱과 끝까지 동행하시고 그를 지키시며 그에게 준 약속들을 반드시 성취하겠다고 맹세하십니다(15절). 이후의 야곱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그 약속들이 그분이 맹세한 대로 어떻게 실현되는지 드라마처럼 보여줍니다.

 

야곱의 서원(16-22)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을 때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바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애곱은 자신의 미래를 이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께 결박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만약 …하면’이라는 조건이 붙은 신앙이었습니다. 더 깨지고 버리고 변해야 할 것이 남은 야곱이었습니다.

16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20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21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16-22)

야곱은 에서를 피해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갑니다. 도중에서 날이 저물자 돌을 베개를 삼고 잡니다. 그는 그곳에서 꿈을 꾸게 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을 때 크게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바르게 섬길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현현을 기념(16-19)

야곱은 아마 그 꿈을 꾸고서 한밤중에 깨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심히 두려운 마음이 엄습해왔습니다. 그는 떨며 ‘여호와가 과연 여기 계시는데 내가 알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의 인생 여정 속에서 하나님을 거의 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잔 곳을 가리켜 ‘이곳이 하나님의 집(베트 엘로힘)이요 하늘의 문(샤아르 하샤마임)이구나’하고 말합니다. 베트 엘로힘의 축약형이 벧엘입니다. ‘하늘의 문’은 앞서 11:5-7에서 설명한 대로 ‘바벨’의 원래 이름 뜻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바벨이나 다른 장소가 아닌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진정한 ‘신의 문’임을 깨닫습니다.

야곱은 아침에 일어나 자신이 뺐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부어 기념석으로 삼았습니다. 돌기둥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그곳을 거룩한 장소로 삼았음을 암시합니다(출애굽기 40:90-13; 레위기 8:10-12). 말하자면, 야곱은 그곳을 거룩한 성소로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벧엘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가나안의 종교적인 중심지 역할을 합니다. 여기서는 그가 돌기둥을 세운 뒤 제단을 세워 바졌다거나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벧엘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창세기 35:1-7). 그 후 야곱은 원래 루스라 불리던 그 장소에 '벧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이미 족장 시대, 곧 루스로 물리던 시대에도 벤엘은 가나안의 큰 성읍이었습니다. 이것은 그곳이 아무리 유명한 지역이었을지라도 신학적 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장소’가 중요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비로소 벧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부여됨으로써 구속사의 관점에서 중대한 장소로 바뀝니다.

월키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한 여러 가지 변화들로 채워져 있다: 고향으로부터 도망가며 달음질하는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달려간다: 형제를 두려워하던 한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저 어떤 한 장소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장소가 됩니된다; 바위가 성소가 된다; 밤이 아침으로 바뀐다; 가나안의 루스가 벧엘이 된다; 그 꿈이 성취될 때, 야곱(‘발꿈치/움켜쥐는 자’)은 이스라엘(‘하나님과 사람을 이긴 자’)이 될 것이다.’

(2) 서원하며 간구하는 야곱(20-22)

야곱은 거기서 하나님께 서원을 드립니다. 성경에서 서원과 서약(맹세)은 구분됩니다. 서원은 하나님께 기도 제목의 조건을 걸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서원자가 자신이 약속한 것을 실행하는 기도입니다(사무엘상 1:11, 한나의 서원; 사사기 11:30-31, 입다의 잘못된 서원). 그러나 서약(맹세)은 일방적인 다짐과 결심의 약속입니다(여호수아 2:17,20, 라합의 비밀 보장의 서약: 이사야 21:1,5,7, 이스라엘의 베냐민에 대한 서약). 야곱의 이 서원은 구약에서 가장 긴 서원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셔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신다면’, 자신이 돌기둥을 세운 곳은 하나님의 집(전)이 될 것이며 자신은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는 야곱이 그곳을 성소로 만들겠다는 결심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앞의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줌으로써 ‘증명되는 사실’일 뿐 야곱이 결정할 일은 아닙니다.

구약에서 최초로 택자의 백성이 십일조를 서원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피엘 동사 ‘야야세르’는 지속과 반복의 피엘 용법으로 ‘계속 십일조를 할 것입니다’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향후 계속 수입의 십일조를 바치기로 서원합니다.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선물로 바친 십일조는 그것의 원형일 수 있으나(창세기 14:20) 하나님께 바치는 십일조로는 이곳이 처음입니다. 거기서도 설명했듯이 원래 십일조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널리 시행되던 제도로 국세와 종교세 개념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은 이제 그 십일조를 왕이나 이방 신전의 제사장이 아닌 하나님께 바칩니다. 야곱의 십일조 서원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물질에 대한 소유욕을 내려놓는다는 결단입니다.


우리 머리 위로도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면, 그 사다리 끝에서 천사를 부리시는 분이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세상이 규정한 행복의 문법에 휩쓸릴 이유가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조차 나를 위해 내려오시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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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8-01)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야곱

창세기 27장 41절- 28장 9절


한 가족이 두 패로 나뉘어 속고 속이는 최악의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수습해보려는 저마다의 빗나간 노력 속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봅니다. 오해와 다툼 속에 조차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짚어볼 겨를 없이, 성급하게 내 뜻을 앞세워 추스르려 하는 우리 말입니다.

 

야곱의 속임수에 모든 것을 빼앗긴 에서는 오래도록 야곱에 대한 증오심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판단에 아버지의 죽음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야곱을 살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에서의 살인 계획은 가인을 연상시키는데, 이로써 그는 자신이 택함 받지 못한 가인의 계열의 후손과 다름없는 인물임을 스스로 증명합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이 위기 속에서 다시 한 번 기지를 발휘해 야곱을 멀리 밧단아람으로 도피시킵니다

 

살의를 품은 에서(41-45)

야곱이 죽으면 원한도 풀리고 장자권도 되찾을 수 있으니, 에서는 즉시 복수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복수심 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반추할 과거를 향한 여백이 없고, 하나님의 신원을 상상할 미래를 향한 여유도 없습니다. 복수심은 성령이 숨 쉴 공간을 탈취합니다.

41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42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43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44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45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46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 야곱이 만일 이 땅의 딸들 곧 그들과 같은 헷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재미가 있으리이까(41-46)

야곱에게 속아 모든 것을 잃은 에서는 야곱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시 약속의 씨의 위기가 발생했습니다. 에서의 증오감을 표현한 동사 ‘사탐’은 오래도록 내면에 축적된 그의 감정을 잘 표현합니다. 여기서 그는 살의를 발설하지 않고 혼자 마음에 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다’는 말은 앞서 일련의 사건들에서 이삭이 시력을 거의 잃고 육시의 감각이 쇠퇴한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가 무려 180세까지 생존했음을 밝힙니다(창세기 35:28). 에서는 아마 아버지가 죽은 다음 야곱을 죽이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에서 에서가 가인에 비하면 덜 충동적인 인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에서는 매우 즉홍적이고 충동적인 기질의 소유자가 분명합니다. 그는 허기진 배를 참지 못해 팥죽 한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 정도로 성급한 성격을 지녔으며 나중을 생각할 줄 모르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그의 신중치 못한 성격은 현재의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어느 날 리브가는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42). 혹자는 리브가가 에게서 그런 낌새를 눈치 챈 것일 수 있다고 말하나 사용된 동사 ‘나가드’는 항상 누군가 말을 전할 때 사용되므로 잘못된 추론입니다. 이것은 에서가 자신의 음모와 살의를 누군가에게 발설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것은 에서의 경솔하고 성급한 성격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셈입니다. 이것은 그가 팥죽 한 그릇에 엄청난 권리를 포기한 것이 단순한 실수가 아님을 시사합니다. 이 말을 들은 리브가는 에서가 한이 맺혀 야곱을 죽이려 한다고 야곱에게 말해주며 긴급히 도망갈 것을 지시합니다. 그녀의 계획은 구체적입니다. 먼저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에 사는 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하라고 지시합니다. 여기서 긴박함을 느끼게 하는 짧은 명령형 동사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집니다.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피신하라’(43). 앞서 이삭을 속일 때처럼 리브가가 빠른 작전 지시를 내리고 야곱은 즉시 이행하는 장면이 반복됩니다.

리브가는 에서의 분노가 누그러질 때까지 ‘몇 날 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다 오라고 말합니다. 가나안에서 하란까지는 약 600km의 먼 거리로 편도 여행 시간만 한 달 정도 소요됩니다. 거기서 머무는 기간도 불과 며칠이 아닌 한 달 이상의 기간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몇 날 동안’은 에서의 분노가 누그러질 때까지 충분한 기간 동안 피해 있으라는 뜻입니다. 리브가는 에서의 분이 풀리면 사람을 보내 야곱을 불러오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두 아들을 잃을 수는 없다고 어머니로서의 심정을 전합니다. 리브가의 지시에 대한 야곱의 반응은 전혀 언급되지 않습니다. 혹자는 어머니의 지시에 대한 야곱의 반응이 전혀 나타나지 않으므로 야곱은 즉시 실행하기를 망설였다고 추론합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의 생략 혹은 침묵은 오히려 그가 즉시 어머니의 말에 수긍하고 동조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야곱 역시 사태의 긴박성을 깨닫고 어머니의 말을 즉시 실행에 옮길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앞서 이삭을 속일 때도 드러났지만, 리브가는 매우 치밀한 여자입니다. 남편 이삭을 찾아가 야곱의 안전한 도피를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실행합니다. 이삭에게 에서의 음모를 정면으로 고발하지 않고 야곱의 결혼 문제를 꺼냅니다. 리브가 입장에서는 에서의 음모를 이삭에게 알린다 해도 이삭이 에서를 통제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을 수 있습니다. 에서의 고집과 성격은 아버지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례로 에서는 부모가 원치 않는 헷 여자를 자기 멋대로 아내로 삼은 인물입니다. 게다가 아마 이삭은 여전히 에서를 편애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결국 리브가 입장에서 이것은 현명한 문제 해결책이 아니었습니다. 대신 리브가는 야곱의 결혼 문제를 들고 이삭에게 접근합니다. 이것은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전략가인지 보여줍니다.

리브가의 놀라운 협상술과 지혜는 이어지는 그녀의 어법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녀는 자신이 헷 족속 출신 며느리들로 인해 인생의 낙이 없다고 푸념합니다. 이것은 이삭의 동감을 쉽게 얻어냄으로써 자신의 의도대로 이삭을 이끌어가려는 전략적 발언입니다. 에서의 잘못된 결혼은 이삭의 마음도 크게 상하게 했기 때문입니다(26:35). 리브가는 이삭의 이 심리를 효과적으로 잘 이용합니다. 이삭의 육체적 약점을 치밀하게 이용했던 리브가가 이제는 이삭의 심리적 약점을 절묘하게 이용합니다.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야 하고는 리브가의 명분은 이삭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확실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의도적으로 ‘에서의 아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이삭의 심기를 불편하지 않게 만들기 위한 신중한 언어 선택입니다. 또한 리브가는 의도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삭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도록 유도합니다. 만일 그녀가 야곱을 하란으로 보내야 한다고 설득한다면, 이삭이 자신의 계획을 눈치 챌 것을 염려했는지 모릅니다.

 

야곱을 밧단아함으로 보내는 리브가(28:1-5)

에서의 분노가 해소되기까지 아주 잠시만 리브가는 야곱을 피신시키려 합니다. 잠깐의 이별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남은 생애 동안 야곱을 만나지 못할 줄은 몰랐습니다. 회피는 비겁하고 무책임합니다. 갈등 속에는 당신이 개입하여 수습하길 주께서 바라시는 분명한 몫이 있습니다.

1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 또 당부하여 이르되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2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네 외조부 브두엘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네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라 3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4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도 주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네가 거류하는 땅을 네가 차지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5이에 이삭이 야곱을 보내매 그가 밧단아람으로 가서 라반에게 이르렀으니 라반은 아람 사람 브두엘의 아들이요 야곱과 에서의 어머니 리브가의 오라비더라(1-5)

이삭은 리브가의 의중을 따라 야곱의 결혼만큼은 에서의 길을 반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불러 축복하고 가나안 여자와 결혼해선 안 되니 밧단아람으로 가서 신붓감을 찾으라고 지시했습니다(1-2). 이어지는 축복은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 문제를 상의한 후 야곱에 대한 마음이 크게 변했음을 드러내는 듯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들이 그대로 야곱에게서 실현되기를 빕니다(3-4). 후손의 생육과 번성을 통해 여러 족속을 이루고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그가 받고 또한 약속의 땅을 그가 차지하길 기원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야곱이 아브라함의 대를 잇는 합법적인 아들이라는 사실을 이삭이 최초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순간입니다. 이로써 불법적인 방법으로 장자권을 거머쥐었던 야곱은 아버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아브라함의 계승자가 됩니다. 야곱은 이삭의 축복을 받은 뒤 밧단아람에 사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갔습니다(5).

 

에서의 추가적인 아내들(28:6-9)

에서는 이방인과 통혼한 잘못을 중혼이라는 또 다른 잘못으로 덮으려 합니다. 거짓을 거짓으로 덮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거짓을 덮으려면 스무 개의 거짓을 새로이 고안해야 합니다. 고통스럽더라도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고통스럽더라도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비난과 수치라도 진실하게 통과해야 합니다.

6에서가 본즉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거기서 아내를 맞이하게 하였고 또 그에게 축복하고 명하기를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라 하였고 7또 야곱이 부모의 명을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으며 8에서가 또 본즉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지라 9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6-9)

에서는 야곱의 결혼 여행 소식을 전해 듣고 부모의 환심을 사기 위한 또 다른 결혼을 시도합니다. 그의 실패한 결혼은 예견되는 야곱의 성공적인 결혼과 대비됩니다. 에서의 추가적인 아내에 대한 기사가 여기에 끼어든 것은 다분히 야곱의 합당한 결혼과 대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가문의 전통은 가나안 여인을 배제한 족내혼이었기에 야곱의 혼인은 부모의 마음을 흡족케 했을 것입니다. 이는 에서의 헷 여인들과 이 결혼이 부모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했던 것과 대조됩니다. 이로 인해 에서는 뒤늦게나마 나름대로의 족 내 혼을 시도했으나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었습니다. 에서는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의 딸 마할랏을 얻어 아내로 맞았습니다(9). 웬함은 창세기의 연대를 그대로 따르면 에서가 이스마엘의 딸을 취할 때 이스마엘이 이미 죽었으니 에서는 이스마엘 족속에게 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당시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스마엘은 137세에 사망했는데, 이때 에서와 야곱의 나이는 63세였습니다. 에서가 40세에 결혼할 때, 이스마엘은 114세였습니다. 25:19-20에 제시한 족장들의 연표를 보시길 바랍니다. 한편, 에서의 아내들의 목록은 두 군데서 나타나는데 둘 사이에서 차이점들이 관찰된다. 이것은 주석가들에게 상당한 혼란을 줍니다. 아래 도표에 이를 정리해놓았는데, 이 문제는 36장에서 상세히 논하기로 합니다.

창세기 26:34; 28:9 창세기 36:2-3
26:34 28:9
헷 여인 헷 여인 이스라엘 딸 헷 여인 히위 여인 이스마엘 딸
브에리의 딸 유딧 멜론의 딸
바스맛
느바욧의 누이 마할랏 엘론의 딸
아다
시브온의 손녀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

싸우고 나서도 술 한 잔 기울이며 금세 서로를 포용하는 세상 사람과 달리, 그리스도인은 갈등을 다루는 데 서툴 때가 많습니다. 야곱을 축복하면서 떠나보낸 이삭의 마음으로, 해결의 길을 여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먼저 용납하고 책임지며 사죄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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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7-03)

 


 축복을 빼앗긴 에서

창세기 27장 30-40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에서를 어떻게든 후계자로 앉히려던 이삭의 계획은, 에서의 ‘아버지여’하는 부름과 함께 산산이 부셔졌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빈틈을 노려 내 뜻을 도모해보려 하지만, 도무지 하나님께서는 빈큼이 없으십니다.

 

에서는 사냥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의 특식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서가 도착했을 때 이미 일을 마친 리브가가 야곱을 숨겼기에 집안 전체가 조용했을 것입니다. 에서 입장에서도 이삭과 독대해서 독점적 축복을 받을 계획이기 때문에, 그는 이 요리를 리브가와 야곱 몰래 준비했을 것입니다. 이삭의 집에는 알지 못할 긴장감과 적막감이 흘렀을 것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에서(30-33)

이삭은 왜 떨었겠습니까? 경악이나 분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에서를 축복하려던 자신의 얄팍한 계획조차 빈틈없는 하나님의 계획안에 묶여 있음을 실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심을 꺾으실 때, 이삭처럼 떨며 ‘무엇을 할 수 있으랴’(37)하고 엎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30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기를 마치매 야곱이 그의 아버지 이삭 앞에서 나가자 곧 그의 형 에서가 사냥하여 돌아온지라 31그가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일어나서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32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33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30-33)

리브가와 야곱은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직후, 야곱은 즉시 아버지의 숙소를 떠났습니다(30). 이것의 히브리어 문장 속에 그 아슬아슬한 긴박성이 잘 드러납니다. 이것은 ‘그가 나가자마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야곱은 에서가 도착하기 직전에 아버지의 숙소에서 빠져나갔습니다.

에서는 사냥에서 돌아와 즉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직접 음식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아, 에서는 음식 솜씨도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손질하고 각종 양념을 넣어 끓여서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리브가와 에서 둘 다 이 특식을 준비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아버지 입맛에 딱 맞을 별미를 준비해서 숙소로 가져갔습니다(31).

그러고는 아버지를 부르며 일어나 음식을 드시고 자신을 축복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여기서 야곱과 에서의 아버지에 대한 대화의 차이를 대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언뜻 같아 보이지만 다릅니다. 야곱은 ‘내 아버지여’라고 먼저 정중히 부르면서 아버지와 인사를 나눕니다(18). 이어서 그는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축복하소서’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명령형에 겸양을 표현하는 ‘나’(제발, 부디)가 붙어 있습니다. 반면에 에서는 정중히 인사하는 장면이 보이지 않으면서 곧 바로 ‘아버지여 일어나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축복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나’(부디, 제발)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분명 아버지에 대한 에서의 태도가 덜 정중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에 대해 웬함은 에서의 어법에서 축복 기도를 앞둔 그의 들뜬 마음이 엿보인다고 설명합니다.

그 순간 이삭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너는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앞서 야곱에게 물은 ‘너는 누구냐, 내 아들아’와 대조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인사를 나누는 성격이 짙었던 질문이었는데, ‘내 아들’이 빠진 지금의 질문은 놀람의 표현입니다. 앞서 이미 에서의 특식을 먹었다고 생각한 이삭은 그 에서가 다시 동일한 특식을 대령했다는 말을 듣고서 크게 놀라며, 본능적으로 ‘너는 누구냐’라고 물은 것입니다. 영문을 모르는 에서는 순간 조금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큰아들 에서라고 대답합니다(32). 아마 에서는 아버지께서 시력과 청력이 나쁜 탓에 저러시는가 보다 하고, ‘저예요. 아버지 아들, 장남 에서요’라고 답변했을 것입니다.

이삭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심히 크게 떨었다.’ 저자는 ‘큰’이라는 형용사와 ‘심히’라는 최상급 부사를 사용하면서 그의 넋 나간 공포심을 잘 묘사합니다. 이삭은 순간 야곱의 사기극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앞서 누가 사냥한 고기로 음식을 해 온 것이냐’는 질문은 그저 탄식 소리일 뿐입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자신이 그의 음식을 실컷 먹고 그에게 모든 축복을 쏟았기에 그가 ‘반드시’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33). ‘반드시’라는 강조 부사의 사용은 이 복이 철회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에서의 뒤늦은 축복 요청(34-36)

에서는 왜 통곡하는가. 에서에게 하나님 나라를 떠안는 사명은 팥죽 한 그릇만도 못했으니, 상속권을 뺏긴 데 대한 울분 아니었습니까! 그는 야곱의 ‘욕심’을 탓할 게 아니라 자신의 영적 ‘무심’을 한탄하며 울었어야 했습니다. 우리에겐 자신을 돌아보는 울음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34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35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 36에서가 이르되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하지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 전에는 나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이제는 내 복을 빼앗았나이다 또 이르되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34-36)

에서는 이삭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단말마의 비명이 담긴 히브리어 문장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34). 그가 ‘소리 질러 슬피 울었다’는 아쉬운 번역입니다. 오히려 예전 한글개역의 ‘방성대곡했다’가 히브리어 문장의 뉘앙스를 잘 반영한 번역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 내어 운 정도가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옮기면, ‘그는 심히 큰 쓰라린 부르짖음을 울부짖었다’는 뜻입니다. 격한 감정을 담은 단어들이 삼중, 사중으로 연속됩니다. ‘심히’(아드 메오드), ‘큰’(게돌라), ‘쓰라린’(우마라), ‘부르짖음’(츠아카)을 ‘울부짖었다’(차아크). 에서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자신도 축복해달라는 말을 반복하며 아버지에게 간곡히 호소합니다.

이삭은 동생 야곱이 속임수로 그의 복을 빼앗아 갔다고 말합니다(35). 이삭의 말대로 그는 속이는 자입니다. ‘속임수’(미르마)라는 단어는 그가 삼촌 라반에게 속을 때 똑같이 사용됩니다(창세기 29:35). 속임수로 상대를 고통스럽게 했던 그가 결국 속임수로 고통을 당합니다. 에서는 야곱이라는 이름 뜻을 들먹이며 그가 그의 이름대로 행동했다고 비난합니다. ‘속이다’라는 동사 ‘아카브’는 야곱의 이름과 어근이 동일합니다. 이 동사는 앞서 설명한 대로 ‘발목을 잡다’, ‘속이다’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마찬가지로 이미 살펴보았듯이, 야곱의 이름인 ‘야아콥’의 원래 뜻은 ‘그가 보호하실 것이다’였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에서는 야곱이 전에 자신의 ‘장자의 명분’(장자권)을 빼앗아 갔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복’(베라카)를 찬탈했다고 격분하며 말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장자의 명분(장자권)과 복이 분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이 보장하는 유산을 넘겨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에서가 아버지에게서 받으려 한 ‘복’은 ‘장자의 복’으로서 법적인 장자권을 지닌 자가 미래에 누릴 모든 혜택을 가리킬 것입니다. 결국 아마 안수가 동반된 가장의 이 예언적 축복의 선포는 장자권을 최종적으로 확증하는 의례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해밀턴 역시 ‘축복을 선언하는 것은 장자를 주요 상속인으로 인정하는 공식적인 행동으로 간주했다.’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장자권을 야곱이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예언된 에서의 미래(37-40) 

이삭이 에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리브가를 통해 받은 ‘형이 아우를 섬길 것이다’라는 애초의 예언을 반복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깨끗한 승복이자 인정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뜻은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수식어와 핑계가 많아 장황하다는 건 하나님 뜻과 멀어졌음을 실토하는 것입니다.

37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의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주었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38에서가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가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39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40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37-40)

자신의 복의 창고를 모두 비워 야곱에게 쏟아 부었기에 이삭에게는 에서를 위한 복이 없었습니다. 이삭은 이미 자신이 야곱을 에서의 주인으로 세웠으며, 나아가 장차 야곱의 형제들도 종으로 주었다고 말합니다(37). 또한 야곱에게 곡식과 포도주의 축복까지 다 건넸으니 에서에게는 더 이상 줄 복이 없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형제들’이란 야곱의 친형제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에서만이 유일한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나온 다른 계열의 야곱의 형제들(즉 친족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들도 야곱의 후손, 곧 이스라엘에게 예속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변 열국이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모두 정복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이해됩니다.

에서는 절박합니다. 아버지에게 빌 복이 하나뿐이냐면서 자신도 축복해달라고 간절히 거듭해서 요청합니다. 그는 소리 높여 울며 탄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에게 그를 위해 빌어줄 여분의 복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큰아들 에서를 위한 미래를 예언합니다. 분명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이 예언은 이삭의 즉흥적인 선언이 아니라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친 큰아들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신탁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에서는 이미 야곱에게 찬탈된 하늘과 땅의 복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대신 그는 칼을 의존해서 삽니다. 이 점에서 에서는 가인과 이스마엘의 운명과 비슷하게 투쟁을 하며 방랑할 운명이 지워집니다. 그는 동생 야곱을 섬길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동생의 속박에서 벗어날 때에는 그 멍에를 떨쳐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에서의 후예는 구약 전반에서 매우 호전적인 종족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에돔은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되어 아우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섬기게 됩니다. 매임을 벗는다는 것은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열왕기하 8:20, 22에서 성취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예언이 성취된 것처럼 야곱에 대한 이삭의 축복 또한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운명 속에서 성취됩니다.


이삭의 회개 동작을 따라가노라면, 우리가 그린 청사진들이 이미 하나님의 설계도 안에 치밀하게 엮여 있음을 실감합니다. 내가 지은 소망들을 부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애초에 견고히 구축해놓으신 참 소망 안으로 들어서라는 부르심임을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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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7-02)


축복을 가로채는 야곱

창세기 27장 15-29절


야곱은 유언의 때를 스스로 앞당겨 더 각별하게 사랑하는 아들 육신의 장남 에서를 축복하려고 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한 채 동물 가죽과 형의 옷을 뒤집어쓰고 그 축복을 가로채려고 합니다. 이 사이에서 정직한 하나님의 뜻만이 오롯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리브가는 행동을 개시합니다. 14절에서 야곱에서 야곱과 리브가의 작전 실행을 표현하는 간결한 세 개의 연속된 동시는 이작전이 즉각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여기서 리브가의 신속한 행동은 위장술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그녀의 음모가 즉흥적이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야곱 또한 얼마나 두뇌의 회전과 행동이 빠른지를 보여줍니다.

  

이삭의 특식이 준비(15-19)

이삭은 촉각과 후각을 동원하여 에서를 후계자로 세우려는 자기 뜻을 밀어붙였습니다. 어두운 눈으로도 잘할 수 있었을 듣기와 복종에 힘썼더라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삶에도 거추장스러운 몸부림을 중단하고 그저 듣고 무릎 꿇어야 해결될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15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17자기가 만든 별미와 떡을 자기 아들 야곱의 손에 주니 18야곱이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내 아버지여 하고 부르니 이르되 내가 여기 있노라 내 아들아 네가 누구냐 19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15-19)

리브가의 행동은 일사분란하고 빠릅니다. 그녀는 자기가 보관하고 있던 에서의 좋은 옷을 가져와 야곱에게 입힙니다(15). 히브리어는 이것이 단순히 ‘좋은 옷’이 아닌 매우 ‘소중한’ 옷이었음을 암시합니다. 리브가는 요리를 위해 새끼 염소 가죽을 벗겨낸 뒤 옷 밖으로 드러난 이삭의 신체를 모두 위장했습니다(16). 팔뚝까지 포함해서 두 손을 덮고 이어서 목에 둘렀을 것입니다. 또 그것을 만졌을 때 에서의 피부와 비슷한 느낌이 들도록 세밀히 새끼 염소의 털을 손질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에서의 피부에 난 털의 크기와 감촉, 밀도까지 고려해서 가짜 피부 털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축복 예식에서는 입맞춤을 하는 것이 관례이기에 이삭의 얼굴 주변에도 염소 털을 붙여 구레나룻을 위장했을 것입니다. 리브가가 새끼 염소 두 마리로 음식과 위장을 동시에 해결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음모가 사전에 매우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준비된 것임을 알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리브가와 야곱은 옷을 가지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그러나 후에 야곱 자신도 아버지가 된 후 결국 자녀들에 의해 위장된 옷에 속습니다(창세기 37:31-34). 어떤 사람은 이런 조잡한 위장술이 통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 의심을 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삭이 다 알고도 속아준 것일 수 있다는 추론까지 제안합니다. 즉, 이삭은 축복 기도를 받는 아들이 야곱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속는 척하면서 손을 머리에 얹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삭이 에서를 얼마나 편애했는지를 볼 때, 그가 에서를 위해 장자의 축복을 내리기로 결심하고 그를 불러 독대해서 실제적인 축복 의례를 실행하기 시작한 것을 볼 때 전혀 성립할 수 없는 해석입니다. 무엇보다 이삭이 이런 위장술에 속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둔해진 감각 때문입니다. 그는 시력뿐 아니라 손의 감각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녀는 정성스레 준비한 이삭을 위한 특식을 야곱의 손에 들려줍니다(17). 야곱은 그것을 들고 아버지의 숙소로 가서 아버지를 부릅니다(18).

그는 최대한 에서의 목소리를 흉내 냈을 것입니다. 아마 이삭은 이때 시력뿐 아니라 청력도 예전 같지 않았기에 위장된 목소리를 어느 정도 의심하긴 했으나(22), 결국 속고 말았습니다. 이삭은 ‘네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시력이 희미했던 이삭이 아들의 신분이 의심스러워 이 질문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에게 이 질문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물었던 질문일 것입니다. 야곱은 대담하게 자신이 에서라고 답변하면서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특식을 드시라고 권면합니다(19). 사냥한 고기를 다 드신 뒤 자신을 마음껏 축복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삭이 속임수에 넘어감(20-23)

서열에서 밀리고 부엌으로 밀려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형의 피부와 냄새를 가장해서라도 갈취하고 쟁취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에서 약속이란 기다림이자 상상력입니다. 조바심과 현실문제로 웅크려도 다시 일어서는 탄성력이 믿음이며 의로움입니다.

20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 21이삭이 야곱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네가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아닌지 내가 너를 만져보려 하노라 22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이르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23그의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20-23)

리브가와 야곱은 계획을 빠른 시간 내에 진행해야 했습니다. 에서가 돌아오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예상보다 너무 빨리 나온 특식이 의아스러웠습니다. 그는 야곱에게 어떻게 사냥을 이렇게 빨리 마칠 수 있었느냐고 묻습니다(20).

야곱은 하나님께서 사냥감을 ‘내 앞에서 만날 수 있게 해주셔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즉시 발견할 수 있게 해주셔서 빨리 음식을 준비할 수 있었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기만적인 위장술에 이어서 거짓말을 추가한 것입니다. 게다가 여호와의 이름을 끌어들여 사기극에 이용합니다. 이삭은 나름 신중하게 축복 의례를 진행하려 합니다. 누군가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하고 축복을 비는 행위는 중대한 일입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는 안전하게 최종적으로 기도의 대상을 확실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침침한 눈과 귀로는 누군지 확인하기 어렵기에 추가적인 검증 절차를 밝습니다. 아들의 몸을 만져 에서인지 확인해보려 합니다. 이삭에게 아들의 음성은 에서의 음성이 아닌 야곱의 음성인 것처럼 들렸습니다(22). 이삭은 야곱의 두 손(아마 팔뚝까지)을 만져보고 에서의 피부 털의 촉감을 느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속임을 당하며, 결국 야곱을 축복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23).

그가 속은 것은 탁월한 위장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분별을 하지 못했다’는 저자의 평가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신중치 못함과 손 감각의 기능 저하, 그리고 영적 분별력의 감퇴로 인해 생긴 결과라고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듣는 것을 진리의 원천이라고 말하는데(신명기 4:12) 이삭은 이 감각을 무시합니다.

23절 끝의 ‘축복하였더라’라는 언급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이삭의 축복이 29절에서 실행되는 이유로 여기서 그가 축복했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잘못 첨가된 부분이라고 말하거나 29절과 다른 자료라는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베스터만(Westermann)은 이것이 먹고 마시고 키스를 하고 축복을 선언하는 축복 의례 전체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제이콥(Jacob)이나 월키는 이것을 단순한 의례적 인사나 감사의 답례로 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인사로 본다면 문맥상 매우 어색합니다. 분명히 문맥은 이삭이 분별을 못하여 에서가 아닌 야곱을 축복한 것으로 읽힙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이삭이 이러한 속임수를 분별하지 못해 결국은 야곱을 축복하게 되었다고 미리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24-29)

인간은 저마다의 뜻이 뒤엉켜 엎치락뒤치락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아랑곳없이 흘러갑니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라는 애초의 말씀은 반드시 이뤄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가고 잊고 외면한 말씀들을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그 원류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24이삭이 이르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25이삭이 이르되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 야곱이 그에게로 가져가매 그가 먹고 또 포도주를 가져가매 그가 마시고 26그의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4-29)

이삭은 검증 작업을 마친 후 그가 자신이 총애하는(‘내 아들’) 에서라고 확신합니다(24). 24절의 질문은 의심의 질문이 아니라 확증의 질문입니다: ‘너는 진짜 내 아들 에서로구나!’ 야곱의 ‘맞습니다’라는 마지막 화답과 더불어 확인 작업이 끝납니다. 이삭은 아들이 가져온 별미를 즐깁니다. 축복 예식의 절차대로 음식을 배불리 먹은 다음 아들을 축복하겠다고 말합니다(25). 야곱은 특식과 떡을 드렸고 이어서 포도주를 가져와 마시게 했습니다. 아마 관례적으로 특식에는 포도주가 수반되었지만, 여기서 특별하게 이것이 언급되는 이유는 야곱이 이삭의 분별력을 더욱 흐리게 하려고 가져왔음을 암시하기 위함일 수 있습니다. 식사를 마친 이삭은 야곱을 가까이 오라고 부릅니다. 이어서 자신에게 입을 맞추라고 명합니다(26). 이것은 쌍방 간의 축복과 평안을 비는 관례적 의례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 입을 맞췄습니다. 이삭은 아마 그의 머리와 몸을 껴안았을 것이며, 그의 옷의 향취를 맡으면서 그를 축복합니다(27). 참고로 본문에서 생략되어 있으나 통상적으로 축복을 할 때는 상대방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이 관례입니다(창세기 4:12-14).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다’라며 그가 받은 복과 그에게 복을 주신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여기서 ‘밭’은 ‘들’을 의미합니다. 앞서 에서는 들사람으로 묘사되었습니다(창세기 25:27). 에서의 옷에서 들사람의 냄새가 나기에 이삭은 그가 나가서 활동하는 사냥터와 목초지의 풍요함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축복은 야곱에게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탁월한 목자가 되었으며, 가나안 전역을 누비는 사람이 됩니다. 이삭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새포도주를 의미함)가 그에게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원된 복들은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셨던 약속의 반복입니다. 물론 언뜻 그 내용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들과 다소 차이가 있는 듯 보입니다. 후손의 번성, 땅의 약속, 복을 누림, 열국의 복의 통로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브라함의 복의 반복이며 확증입니다. 만민이 그를 섬기고 열국이 그를 경배한다는 것은 야곱의 후손의 번성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름이 창대해져 모든 민족들이 그를 높이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로 말미암아 열국이 복을 받는다는 것과 일맥상통해 있습니다. 강대한 아브라함과 그의 손자 야곱의 나라를 통해 그에게 부복하고 섬기는 만민이 복을 누릴 것입니다. 이어지는 저주와 축복의 이분법적 예언도 같은 맥락에서 선언됩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러했듯이 이삭의 장자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축복하는 자는 목을 받을 것입니다. 이삭의 축복의 승계자는 결국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의 승계자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알아맞히고 하나님과 거래하여 얻어내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삭을 향해 치켜든 아브라함의 칼끝에서야 보이는 세계이며, 내 뜻을 꺾어야 비로소 맞닿는 세계입니다. 내 욕망의 그늘에 가려서도 묵묵히 전진해온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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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7-01)


축복을 가로채려는 리브가와 야곱

창세기 26장 34절-27장 14절


박철수 목사의 [축복의 혁명]에서, 저자는 ‘왜곡된 성령론과 이원론, 축복관’을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세 가지 질병으로 진단합니다. 중증은 단연 잘못된 축복관입니다. 기복적인 신앙으로 집착함으로 변질된 신앙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언약(복)은 인간의 눈먼 욕망에 의해 가려지고 가로채지는 천박한 대상으로 전략합니다.

  

에서는 아버지 이삭처럼 40세에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혼은 부모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일부일체를 고수했습니다. 그의 일부일처는 족장 중에서도 유일합니다. 그러나 에서는 두 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그것도 이방 혈통의 여자를 아내로 맞았습니다. 에서의 성격이 막무가네여서 그랬겠지만 부모의 만류가 소극적이었음을 암시됩니다. 이 에서에 대한 소개는 그가 왜 선택되지 못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에서의 잘못된 결혼(34-35)

에서는 가나안 헷 족속의 딸 중에서 아내를 얻어 경건한 부모의 근심이 됩니다. 이 일로 영적인 유산과 가치를 가볍게 여기며 언약을 상속받기에 적합하지 않은 자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행복과 번영은 가장되고 포장된 박복(薄福)일뿐입니다.

34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 35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더라(34-35)

에서는 40세에 두 명의 헷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되었습니다. 우선 그는 가나안 족속의 하나인 햇 족속 여인들과 결혼함으로써 할아버지 아브라함 가문의 전통을 깨뜨렸습니다.

또한 일부일처를 고수한 아버지 이삭과 달리 두 명의 아내를 함께 얻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이삭과 리브가는 심적인 고통을 겪습니다. 에서의 결혼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나중에 에서는 이 두 명의 아내 외에 여러 명의 첩을 맞아들입니다(창세기 28:9; 36:2-3). 에서는 삼손처럼 자신의 욕심과 혈기대로 성급하게 행동하는 인물이었기에 부모가 만류해도 소용없었을 것입니다. 이삭이 그의 결혼을 적극 만류하지 않고 방치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에서를 편애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왜 에서의 잘못된 결혼 이야기가 여기에 등장합니까? 서사는 에서가 선택되지 못한 계열임을 처음부터 드러냅니다. 그것은 왜 결국 야곱이 택자의 계열을 잇는지를 처음부터 암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에서는 에서는 야곱을 돋보이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에서는 아브라함의 손자로서 가나안 여인들을 피해야 하고 이삭처럼 멀리 메소포타미아에서 자신의 배우자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잘못된 결혼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약속의 백성이 되기에 무가치하고 부적절한 인물임을 드러냈습니다.

 

에서를 축복하려는 이삭(1-5)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이삭과 대조적으로 리브가는 귀가 밝아서 이삭과 에서의 대화까지 엿듣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탁(25:23)을 기억하지 못한 이삭의 영적 둔감함과 가장을 통한 축복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리브가를 대조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웁니다.

1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이르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2이삭이 이르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니 3그런즉 네 기구 곧 화살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4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5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1-5)

이삭의 무능함과 영적인 쇠락은 그가 잘못된 결혼을 감행한 에서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이삭은 영적 분별력을 잃었습니다. 에서의 행실은 안중에 없으며, 아브라함과 자신에게 준 약속도 잊었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전적으로 마음에 든 것은 아니지만, 그가 장남으로 태어난 데다 힘이 세고 용맹하며 활력이 넘치기에,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집안에만 있기 좋아하는 야곱은 배제하고, 그를 상속자로 굳힌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자신의 약점과 부족한 기질을 메워줄 후계자를 선호했을지 모릅니다.

이삭은 에서를 자신의 상속자로 여긴 뒤 그에게 장자의 축복을 베풀기로 결심합니다. 노년의 아버지가 임종 직전 자녀를 불러 장자에게 자신의 권한을 넘기고 자녀의 복을 비는 것은 일반적 관례였습니다(창세기 49장). 그러나 직전에 결혼한 에서가 40세이므로 현재 이삭의 나이는 100세가량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임종과 유언을 준비한 이유는 자신의 신체 기능이 급격히 떨어져 일찍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불렀습니다(27:1). 그러나 에서만 부르고 야곱은 부르지 않습니다. 이것은 관례에 어긋납니다. 분명 야곱은 이삭의 안중에 전혀 없었으며, 자신의 축복권을 사용하여 가문이 받을 모든 미래의 축복을 에서에게만 쏟아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축복 예식은 유산 상속 절차와 별개의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는 가족의 전통을 어기고 다른 혈통의 여자와 결혼한 아들입니다. 그는 전혀 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27:1에서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은 그의 육적 상태만이 아닌 어두워진 영적 상태를 암시합니다. 노쇠한 육체와 더불어 육적인 식탐은 더 강해지면서 영적 분별력을 잃은 채 이삭은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어긋난 계획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행위가 전혀 부당하게 취급될 수 없는 이유가 내비칩니다. 이삭은 자신이 죽을 날이 가까운 것 같다고 말하면서(그러나 무려 80년을 더 산다) 에서에게 나가서 사냥을 해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합니다(2-4). 그러면 자신이 에서를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약속합니다(5).

이삭은 에서의 고기를 탐닉했고 에서는 야곱의 팥죽을 탐닉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탐닉했습니다. 이 장자의 특권은 당장에 환상의 맛을 주고 순간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다림으로 맛볼 수 있는 영원한 미래의 축복의 열쇠였습니다.

이후의 이야기에서 이삭은 퇴장하고 그의 한참 이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창세기 31:28-29) 다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고의적으로 그의 삶의 족적을 공백으로 남깁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이삭을 비난합니다. 이삭은 에서를 축복하려 하는데, 이 기도를 통한 복과 장자권이 주는 유산 및 복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장자권의 현실적 혜택인 상속 재산과 장자권이 주는 영원한 복과 집안 계보를 이권은 분리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앞서 야곱이 에서에게서 부당한 거래를 통해 넘겨받은 장자의 명분은 사소 재산이었을 것입니다. 현재 이삭의 축복 의례는 그 집안의 적통을 이어갈 장자권의 확증을 위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둘이 절차상으로, 법적으로 구분된다 하더라도, 히브리서 기자는 신학적으로는 둘을 그림하지 않고 평가합니다(히브리서 12:16-17).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상속권을 팔 때 그는 이미 법적 장자권을 팔았습니다. 결국 섭리 가운데 그것이 이삭의 손을 통해 현실이 된 것입니다. 족장 시대에 가장의 축복은 먼 여행을 떠나보내거나(창세기 28:1) 결혼으로 가족이 이별을 할 때(창세기 24:60), 혹은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선언됩니다. 그것은 변경될 수 없었기에 현재 이삭의 상속자를 위한 축복의 선언은 결코 철회될 수 없습니다.

 

이삭을 속이기 위한 리브가의 계략(27:6-10)

이삭은 하나님의 신탁(25:23)을 망각한 채 에서의 야성과 그가 만든 별미를 좋아하다가 서둘러 축복하려 했습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 명분을 소홀히 요긴 에서와 비슷합니다. 눈먼 아비이고 아들입니다. 둘 다 자기만족을 위해 하나님의 복을 소홀히 여긴 것입니다.

6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7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8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9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10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6-10)

이삭은 에서를 편애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편애합니다. 이제 이삭-에서와 리브가-야곱이 충돌하는 가정불화가 임박한 가장의 최종적 축복을 앞두고 본격화합니다.

리브가는 이삭과 에서의 대화를 밖에서 엿듣고 있었습니다. 에서가 사냥을 하러 나가자 리브가는 아들 야곱을 찾아가 모든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올 것이 왔습니다! 아마 리브가는 에서에게 아브라함 집안의 계보와 축복이 넘어가서는 안 될 상황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따라서 야곱에게 자신이 꾸민 계략을 설명하며 시키는 대로 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것은 에서가 돌아오기 전에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 음식을 만들어 시력이 약한 이삭을 속여서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하자는 계산이었습니다.

9절을 볼 때, 에서는 요리에도 능했던 갓 같습니다. 아버지의 입맛에 딱 맞는 요리를 잘 만들 수 있었습니다. 남편의 음식을 평생 책임진 리브가는 더욱 이삭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요리와 그의 입맛을 잘 알기에 그녀가 손수 요리를 준비합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나가서 기르던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두 마리의 새끼는 두 손과(아마도 팔뚝까지) 목을 뒤덮어 위장할(16) 충분한 털가죽을 확보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어머니의 계략에 동조하는 야곱(27:11-14)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옳지 못한 인간적인 방법으로 축복을 가로챈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수와 계략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없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가십니다. 이것이 실수와 허물투성이인 인간의 유일한 위안이고 희망입니다.

11야곱이 그 어머니 리브가에게 이르되 내 형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즉 12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의 눈에 속이는 자로 보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 13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 내 말만 따르고 가서 가져오라 14그가 가서 끌어다가 어머니에게로 가져왔더니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었더라(11-14)

야곱은 어머니의 계획을 듣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에서와 자신은 신체적 특징이 전혀 다르므로 아버지를 속이기 어렵다는 견해를 내놓습니다. 애서는 털이 많고 자신은 털이 없는 사람이기에 시력이 약한 아버지도 만져서 둘을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고(11), 속임수가 들통 나면 아버지에게서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퍼부어질 것이라고 걱정합니다(12). 이것은 죄질이 아주 나쁜 범죄입니다. 부모를 속이는 데다 부모의 약점을 이용하는 패륜적 범죄입니다. 율법은 소경과 맹인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할 것을 말합니다(레위기 19:14; 신명기 27:12). 소경과 맹인을 착취하고 속이는 것은 반인륜적 범죄였습니다. 맹인의 길을 잃게 하는 자를 향해 저주가 선언됩니다(신명기 27:18). 따라서 부모님의 그런 장애를 개인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리브가는 이 일은 자신이 책임질 일이므로 아버지의 저주를 자신이 받겠다고 안심시키며 나가서 염소를 끌고 오라고 지시합니다. 야곱은 나가서 두 마리의 새끼 염소를 끌고 왔습니다. 해밀턴(Hamilton)은 이런 야곱의 모습을 인상 깊게 묘사합니다. ‘나중에 하나님과 씨름을 할 정도의 능력을 갖춘 그 사람이 그의 어머니와 혹은 그의 =양심과는 별다른 씨름을 하지 않는다.’ 리브가는 두 염소를 잡아 이삭을 위한 특식을 준비했습니다.


인생은 삼인 삼색입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복을 무시했고, 이삭은 복을 소홀히 여겼고, 리브가와 야곱은 복을 탈취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편애와 편집(偏執)의 대상이 될 만큼 천박하지 않습니다. 욕망에 눈이 멀면 모두가 원하지만 아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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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26-02)


이삭과 아비멜렉의 계약

창세기 26장 12-33절


25장에서 시작한 야곱 이야기 중간에 이삭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다가 27장에서 다시 야곱이 형의 축복을 가로채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말씀을 따라서만 움직이고,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혜를 발휘하지 않고 뒷걸음치는 이삭의 온유함은 야곱의 이야기에서 볼 수 없는 태도입니다.

 

아비멜렉이 가족을 해치지 말라는 방을 전국에 내린 후 이삭은 그 땅에서 평온히 지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는 농사를 지어 백배의 수확물을 얻었습니다. 족장들은 농사꾼이 아니었으며 유목인들은 보통 소규모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는 그랄 땅에서 상당히 오래 체류할 마음으로 큰 농사를 지은 것 같습니다.

 

이삭과 블레셋 백성의 갈등(12-18)

충복(忠僕)의 조건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의 번성에 시기하여 우물을 막더니 급기야 그 땅에서 쫓아냅니다. 번영이 시기의 원인이 되고 축복이 시련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번영이 축복의 표지이긴 하지만, 그것이 안전까지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참된 안전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12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13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17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류하며 18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12-18)

이삭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특별한 하나님의 복으로 그해 수확이 백 배로 늘어났습니다. 여기서 백 배는 완전수의 하나인 ‘10’의 열 배이므로 완전한 풍작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만일 문자적이라면,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대폭 늘었을 뿐 아니라 그의 경작지가 크게 늘어난 결과일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이삭은 그랄 땅에서 나그네 신분으로 지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비멜렉과 그랄 백성은 선친 아브라함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지 않고 원하는 곳에서 살도록 배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상당히 장기적으로 체류하였기에 이삭은 거기서 농사도 지었던 것입니다. 이삭은 갈수록 번창했습니다(13). 히브리어 원문은 ‘크다’를 세 번이나 사용하면서 그것을 강조합니다. 그의 가축 떼와 종들의 숫자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시기하며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서 아브라함이 거부가 되었을 때 아비멜렉의 백성이 시기하여 우물을 빼앗았습니다(창세기 21:22-26). 나중에 야곱의 목축이 크게 번창하자 삼촌 라반의 시기를 한 몸에 받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모든 우물을 흙으로 덮어 막아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지역에 여러 우물을 팠다는 것을 뜻합니다. 원래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사이에는 상호불가침 조약이 맺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후손들을 포함한 조약이었기에 이삭에게도 그 조약은 적용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은 이삭을 공격하고 권리를 침해하였으며, 적어도 사용권을 허락받은 땅을 침범하였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그랄 땅을 떠난 뒤 그가 팠던 우물들은 인구가 많지 않았던 그랄 사람들도 사용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삭은 그랄 땅으로 돌아온 후 아버지가 팠던 우물들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웬함은 18절에 근거하여 아브라함이 죽은 직후 일단 그랄 사람들이 그가 판 모든 우물들을 덮은 것으로 봅니다. 그랄의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을 폐쇄함으로써 거부가 된 이삭을 강력히 견제했습니다. 아비멜렉은 노골적으로 조약을 파기하고 그에게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그는 이삭에게 솔직하게 말합니다. ‘네가 우리보다 더 강하므로 우리를 떠나라’(16). 이것은 훗날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가 압도적으로 늘어나자 애굽의 바로가 모세에게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출애굽기 1:7,20).

이삭은 결국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는 그랄 골짜기로 옮겨가 거기에 막사를 짓고 거주했습니다(17). 이것은 계절천을 의미하는데, 협곡을 흐르기도 하지만 넓은 분지를 흐르기도 합니다. 비가 올 때만 흐르고 비가 멈추면 하천이 마르는 수많은 계절철들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우물은 당시 대단히 비싼 재산이었습니다. 특히 물이 부족한 네게브와 그랄과 같은 땅에서 우물은 생명줄과 같았습니다. 이삭은 골짜기로 내몰렸습니다. 그러나 골짜기 일대의 어느 곳에는 초지도 충분하고 비교적 지하수를 찾기 쉬웠습니다.

18절은 17절과 분리해서 읽어야 합니다. 17절로 이삭의 추방과 새로운 거주지에 대한 이야기가 일단 마무리되었습니다. 18절은 그가 그랄 골짜기에 가서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다시 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그가 17절에서 이미 그 우물들이 있던 그랄 땅을 떠나 그랄 골짜기로 밀려났기 때문이며, 19절 이하에서 보듯이, 이삭은 거기서 새로운 우물을 파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8절은 그곳 우물의 역사에 대한 요약적인 기록입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다’는 진술에 대해 웬함은 제이콥(Jacob)의 견해를 따라 이 단어의 동사 시제를 과거완료로 해석합니다: ‘아브라함 때에 팠었던(had been dug) 그 우물들을 그가 다시 팠다(He had redug)’. 요컨대, 이삭이 그랄에 도착해서 부친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파서 사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메웠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그 우물들을 다시 판 후에 아버지가 붙였던 이름을 다시 붙였습니다. 우물은 큰 재산이므로 우물을 판 소유자가 고유의 이름을 붙여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이삭이 그 우물들에 아버지가 붙였던 동일한 이름을 부여한 것은 우물의 소유권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삭과 그랄 목자들의 우물 분쟁(19-22)

우물을 팔 때마다 블레셋에게 거듭 양보하던 이삭은 마침내 하나님이 약속하신 번성을 누립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은 결과로 기나긴 고난을 감수해야 했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에게 편히 숨쉴수 있는 ‘넓은 곳’(르호봇)을 주셨습니다. 그 안전한 축복은 온유한 순종의 대가였습니다. 

19이삭의 종들이 골짜기를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20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이르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으로 말미암아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21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므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22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19-22)

이삭은 그랄 골짜기에서 우물을 새로 팠지만 그 우물마저 블레셋 사람들이 욕심을 냈습니다(19-20). 우물이 당시에 인간과 가축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합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다툼’이란 뜻의 에섹으로 지었지만 그 우물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사의 다른 우물을 팠는데, 다시 블레셋 사람들이 우물을 탐내 분쟁을 일으킵니다. 그는 그 우물을 ‘비방’, ‘적의’를 뜻하는 싯나로 불렀는데, 그 우물마저 블레셋 사람들에게 양보했습니다(21). 이삭은 다시 장소를 옮겨 세 번째 우물을 팠습니다. 이때 분쟁이 더는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이 우물도 빼앗길지 모르지만 묵묵히 믿음으로 우물을 팠을 것입니다. 그는 그 우물에 ‘르호봇’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경을 넓혀주셔서 그 땅에서 번성하게 되길 바라는 길은 신앙과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22). 땅의 정복과 번성은 창조 명령이며, 이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언약의 약속들의 핵심 요소입니다. 우물을 포기하는 이삭의 모습에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좋은 땅을 양보하고 자신의 막대한 전리품을 소돔에게 양도한 모습이 엿보입니다.

 

브엘세바로 이주한 이삭(23-25)

이삭의 번성을 본 아비멜렉이 브엘세바까지 찾아와 화친을 맺자고 청합니다. 아무리 빼앗겨도 다시 채워지는 이삭의 삶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신뢰했을 뿐인데 이삭은 이제 자신을 쫓아냈던 아비멜렉의 부러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23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24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25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23-25)

이삭은 마침내 그랄 골짜기를 떠나 브엘세바로 거처를 옮깁니다. 어느 날 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빈번히 직접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밤중에 이삭에게 직접 나타나셨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 가족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고, 아브라함이 아비멜렉 왕과 조약을 맺은 장소이자, 특별한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린 곳입니다(창세기 21:31-33). 하나님께서는 그랄 땅에서 두려워하는 그를 향해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십니다(24). 또 자신을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면서 아버지에게 약속했던 복을 이삭에게 모두 주어 후손이 번성할 것이라고 확증하십니다. 이삭은 이것을 기념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며 기거할 처소를 마련했습니다. 이삭은 브엘세바에서도 새로운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과 아비멜렉의 조약(26-33)

아브라함과 화친을 맺은 바로 그곳 브엘세바에서 아비멜렉은 다시 그의 아들 이삭과 화친을 맺자고 제안합니다. 아무리 잃고 빼앗겨도 다시 채워지는 이삭의 삶에서 하나님의 배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이삭을 자신들이 당해낼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사탄을 무력화한 하나님의 지혜였듯이, 지금도 그 십자가의 길만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수단이 됩니다.

26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28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29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30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31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32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33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26-33)

어느 날 아비멜렉이 부하들을 데리고 그랄에서 이삭을 만나기 위해 브엘세바로 찾아왔습니다. ‘친구/동료’라 불릴 만큼 신임하는 최측근 아홋삿과 군대 장관 비골을 대동했습니다. 유력한 수행원을 대동한 것에서 아비멜렉의 위상이 드러나고 또한 이 조약의 파트너인 이삭의 권세도 잘 나타납니다. 이삭은 자신을 내쫓더니 왜 찾아왔는지 묻습니다(27). 아비멜렉은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심을 보았기에 새로운 조약을 맺으러 왔다고 말합니다(28). 아비멜렉은 지나치게 커진 이삭의 권세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너는 우리를 해치지 말 것을 약속하고, 또한 우리도 너희를 해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29). 그는 이삭의 가족을 해하지 말라고 전국에 칙령을 내린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은 거듭된 우물 분쟁과 더불어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선대의 아브라함처럼 다시 두 사람은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 조약식을 마친 후 풍성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언약이나 조약 체결 후에는 잔치가 배설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들은 밤새 먹고 마시며 친목을 다진 후 일찍 일어나 조약 준수를 다짐한 후 이삭을 떠났습니다(31). 이삭은 거기서 새로 판 우물에서 종들이 생수를 퍼내자 그 우물 이름을 ‘맹세’를 뜻하는 ‘세바’라 칭했습니다. 그 성읍 이름은 아브라함이 붙인 그대로 브엘세바라 칭하였습니다.


비우니 채워지고 물러나니 다가옵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가능한 역전이고 역설입니다. 이삭의 이런 온유한 행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채우심을 기대하면서 자기 부인과 순종의 비움을 실천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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