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창세기(35-01)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

창세기 35장 1-22절


새 길을 가려면 낡은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벧엘의 하나님을 잊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벧엘에서 새 길을 가라 말씀하십니다. 떠나기 위해 챙길 것과 버릴 것을 정리하다 보면 신앙의 민낯도 드러납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외에 다른 걸 품고 살았는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세겜에서 디나 사건 이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거기 거하라 명령하라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할 때 그에게 임재하셨던 그 장소에 제단을 쌓으라 명하십니다(1). 이것은 분명 앞서 세겜 사건에서 살펴봤듯이 야곱의 심각한 영적 침체로 인한 것일 수 있습니다. 벧엘은 세겜에서 남쪽으로 30km의 여행길이며 벧엘의 고도가 300m 더 높습니다. 벧엘은 야곱 인생의 대사건이 발생한 곳입니다(창세기 28:10-22).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지시(1-5)

세겜 성읍에는 살육과 애통의 흔적이 코를 찌르고, 야곱 가정에는 분노와 두려움이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이젠 끝났다고 포기할 무렵,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야곱에게 벧엘이라는 비상구 하나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만이 언제나 우리의 출발이 되어주십니다.

1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1-5)

이제 무대는 세겜에서 벧엘로 바뀝니다. 여기서 잠시 왜 야곱은 가나안에 들어온 직후 아버지를 뵈러 가지 않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 문제는 지면상 다음 본문에서 다루기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엘은 야곱의 인생이 바뀐 곳입니다. 그는 하란으로 도피하는 도중 벧엘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그때 야곱은 자신이 베고 잔 돌베개를 세워 기념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을 드립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면, 그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자신은 십일조를 바치겠노라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가 서원을 성취하도록 벧엘로 올라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벧엘 순례를 앞두고 야곱의 부흥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종교개혁입니다(2). 야곱은 집안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지시합니다. (1) 간직하고 있는 모든 개인우상들을 버리라; (2) 자신을 정결케 하라; (3) 옷을 갈아입으라(2). 아마 야곱의 아내와 자녀, 그리고 집안의 모든 일꾼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여전히 우상에 심취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 우상은 아마 라헬이 가져온 드라빔과 같은 메소포타미아 우상들 및 세겜 성에서 약탈 후 입수했거나 다른 방식으로 획득한 가나안 우상을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은 여전히 영적 역기능 가정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더럽혀진 몸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목욕과 옷 세탁이 요구됩니다(레위기 12-15장). 야곱의 지시를 받은 모든 집안사람들이 자신들의 각종 신상들을 가져오고 귀고리를 빼서 야곱에게 건넸습니다.

귀고리를 모은 이유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귀고리가 종종 우상의 형상물을 제조하는 원료로 모아지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32:2-4; 사사기 8:24-27). 이방인 성에서 약탈한 합법적인 전리품의 사용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매장하는 것에서 옷은 제외되고 우상들과 귀고리들뿐이므로 이 둘은 분명히 우상숭배와 관련 있습니다. 옷을 갈아입는 것은 깨끗한 옷을 입으라는 명령으로 옷 세탁과 같은 의미로 보입니다. 야곱은 우상들과 귀고리들을 모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습니다(4). 이곳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창세기 12:6). 이 매장식은 우상과의 철저한 결별을 선언하는 상징적 행위로 보입니다. 이러한 준비는 마치 시내산에 도착 후 강림하실 하나님을 맞을 백성에게 지시한 명령과 비슷합니다(출애굽기 19:10). 야곱의 가족들도 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를 정결케 해야 합니다.

집안의 전면적 영적 쇄신을 이룬 후, 야곱은 모든 구성원들을 데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3). 야곱은 그동안 자신을 지키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것입니다. 야곱의 진영 모든 사람들이 벧엘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변 모든 고을들은 아마도 세겜 성 학살 사실을 전해들은 후 야곱과 그의 가족을 두려워하여 누구도 건들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가나안 종족들의 공포심은 행진해오는 여호수아 군대의 소식을 듣고 심장이 녹아내린 여리고 성과 가나안 사람들의 공포심을 예고합니다(여호수아 2:9,24; 14:8).

 

벧엘에서의 예배와 하나님의 임재(6-15)

드디어 도착한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 야곱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엘벧엘’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에서의 얼굴을 피해 떠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주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제야말로 진정 밧담아람에서 돌아왔다고 인정되자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르시며 복을 약속하십니다.

6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8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9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13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 14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6-15)

야곱과 그의 사람들은 루스라 불리는 벧엘에 도착하여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장소를 ‘엘벧엘’이라 불렀습니다. 그 뜻은 ‘벧엘의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집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그 이름에 야곱이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는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이 즈음 사망했습니다. 야곱은 그녀를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지낸 후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칭했습니다. 이것은 ‘눈물의 상수리나무’라는 뜻을 갖습니다. 왜 갑자기 리브가가 아닌 그녀 유모의 사망 소식이 여기에 등장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리브가의 장례 소식은 창세기 마지마에 가서야 보고됩니다(창세기 49:31). 어쩌면 창세기 저자는 리브가가 사실상 야곱의 사기극의 주동자였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문책을 하는지 모릅니다.

9-15절은 드보라의 죽음이 방해를 하지만 아마 위의 벧엘에서 예배를 드린 뒤 거기서 두 번째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건을 별도로 기록한 부분으로 보입니다. 야곱이 라반의 땅 밧단아람에서 돌아온 후 다시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맹세했던 약속을 그에게도 상세히 전달하십니다.

요약하자면,

(1) 야곱은 이제 이스라엘로 칭한다;

(2) 생육하고 번성하여 너에게서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나오리라;

(3)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4) 너와 네 후손에게 땅을 주리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구입니다(11). ‘한 백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면 ‘백성들의 총회’는 열국의 연합체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대로 열국의 아비가 된다는 의미라면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해서는 더 이상 이방 민족이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일차적으로 현재 야곱의 후손의 번성을 명령하고 축복하는 것이므로 애굽에서 형성될 거대한 민족을 내다보는 예언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가 ‘한 백성’을 이룰 것인데 그들이 각 지파마다 번성하여 민족과 같이 거대해짐으로써 ‘백성들의 연합체’와 같은 한 백성이 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고이’가 ‘지파’를 가리키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 약점입니다. 다른 견해로, 더 그럴듯하게는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에게 장차 다른 민족들이 언약 공동체의 일원으로 연합하여 민족들의 연합체를 이룬다는 예언일 수 있습니다(참조. 출애굽기 12:38; 신명기 23:1-8). 한편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는 약속은 후에 이스라엘이 왕정 체제가 되면서 실현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그 자리에 다시 돌기둥을 세웁니다. 이것은 예전에 세운 돌베개 삼았던 기둥과 별개의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20년 동안 방치되어 폐허가 된 벧엘 성소를(창세기 28:22) 복원하는 작업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파괴되고 폐허가 된 성소의 재건축과 복원은 당대에 흔한 일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기둥에 전제의 제물을 붓고 기름을 부은 뒤 다시 전과 같이 ‘벧엘’이라 칭했습니다. 이것은 복원되어 갱신된 벧엘의 이름입니다. 이로써 ‘벧엘’은 ‘엘벧엘’과더불어 두 개의 이름을 갖게 되나 갱신된 이름 벧엘이 공식적으로 사용됩니다.

 

라헬의 죽음과 장례(16-22)

벧엘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 전, 야곱은 산고 끝에 라헬을 잃고 베냐민을 얻습니다. 만삭인 아내 때문에 세겜에서 짐을 푼 건진 알 수 없지만, 가장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야곱 가정의 사건사고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16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16-22)

야곱의 나그네 여정은 계속됩니다. 이제 그는 벧엘을 떠나 에브랏에 도착합니다. 에브랏은 베들레헴의 다른 이름입니다(19). 에브랏 근처에서 라헬이 출산을 하고 그녀는 사망합니다. 그녀는 사망 직전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습니다(18). 그러나 남편 야곱은 그 이름의 뜻이 부적절해서인지 아기의 이름을 베냐민으로 불렀습니다. 라헬은 에브랏(베들레헴) 근처에 매장되었고 야곱은 그녀를 위해 묘비를 세웠습니다(20).

야곱의 개명된 이름 이스라엘이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그는 에브랏을 떠나 에델 망대에 머물렀습니다(21). ‘양떼 망대’라는 이름을 지닌 이곳은 아마 베들레헴 북쪽 8km 지점 예루살렘 근처의 한 장소로 보입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집안이 풍비박산하는 사건이 터집니다.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을 했고 이스라엘이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22). 갱신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집안에 다시 음울한 기운이 감돕니다. 아마도 르우벤의 범행은 다분히 정치적이었을 것입니다. 라헬의 여종 빌하를 더럽혀서 라헬이 죽은 뒤 그녀가 라헬 대신 본처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컸습니다. 그는 장자권을 박탈당하고 요셉이 그것을 이어 받습니다(역대상 5:1). 야곱은 마지막 유언에서 그는 ‘끓는 물과 같고 탁월치 못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창세기 49:4). 이것은 장자권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더 두려워해야 할 때는 사면초가의 위험에 빠져있는 상황이 아니라 헤쳐 나갈 의지도, 기도할 용기도 다 증발해버린 때일 것입니다. 다시 시작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벧엘에서 맞이할 새 길을 준비하시고 초청하십니다.


구독과 광고 클릭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