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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주해(02-01) 


 인간 창조와 안식의 의미

창세기 1장 26절-2장 3절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절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왕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직접 계획하시고 도모하시므로 완벽하게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땅 위의 생물과 더불어 인간을 지으시므로 창조 사역을 완결하십니다. 결코 인간은 우연의 산물이거나 진화론적 산물일 수 없습니다. 특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사명과 더불어 생육을 명하셨습니다.

 

여섯째 날 마지막 창조물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물리적 의미의 형태나 실체를 의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내적 형상, 곧 속성과 본질에 대한 표현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심과 의로우심, 자비하심과 거룩함의 속성을 인간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이것은 역시 인격적 존재들인, 하나님을 시중하는 천상존재들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여섯째 날의 인간 창조(26-27)

인간은 왕적 권한을 이행하는 존재입니다. 권한을 선히 사용하여 지혜와 성실함으로 다스리면 기뻐하실 것이나, 남용하여 함부로 짓밟고 탈취한다면 탄식을 낳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지나친 착취와 전횡으로 인간과 자연을 위험에 빠트리지는 않습니까? 대리통치자로서 겸손과 자애를 가지며 살아가야 합니다.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인간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6-27)

여섯째 날의 마지막 창조물은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많은 난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어전(御前) 회의를 하셨습니다. 무엇인가를 만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함께 머리를 맞대신다는 이 특이한 언급은 하나님께서 이제 창조하고자 하시는 대상의 중요함과 독특함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1) ‘우리’(26a)

먼저 살핀 것은, 복수형 ‘우리’에 대한 의미를 둘러싼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유대 해석가들의 견해를 따라 하나님과 천상 존재들의 하늘의 어전 회의 장면에 대한 묘사라는 해석이 인기를 얻어왔습니다(창세기 11:7; 이사야 6:8; 예레미야 23:18,22). 반면에 초대교회 시대부터 기독교 해석가들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일 수 있겠지만, 아직 삼위일체 개념이 드러나지 않은 창세기 본문에 조직신학적 개념을 과도하게 주입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다른 기독교 해석가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는 존엄 복수 호칭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라는 표현은 이것이 하늘의 어전 회의에서의 어법이긴 하되 천상존재들의 왕으로서 천사들과의 협의를 통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자기 결정권의 행사에 의한 일방적 선선으로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절대 주권을 가진 권력자는 ‘우리가 ∽하자’는 어법으로 선언적으로 사용합니다. 이것은 27절의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진술에도 정확히 부합합니다.

(2) ‘형상’과 ‘모양’(26b)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인간을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구약에서 ‘형상’과 ‘모양’은 별다른 의미론적 차이 없이 유사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형상’은 복사본 혹은 원본과 아주 흡사한 형태를, ‘모양’은 한 대상과 다른 대상이 비교됨을 강조하거나 두 대상의 유사함을 강조합니다.

27절에 비추어 보면, ‘형상’과 ‘모양’은 자주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으로 대표됩니다. 아마도 천상의 인격적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성품,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을 것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공유한 하나님의 속성을 내던지고 반란을 저질렀으며, 결국 인간의 하나님 형상까지도 훼손해 타락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최근의 매우 좋은 해석은 이어지는 26절 마지막의 ‘다스리게 하자’는 표현과 28절에 비추어 하나님의 형상을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제국들은 왕을 신의 형상을 지닌 대리 통치자로 간주했습니다.

(3) 창조(27)

세 번이나 반복된 ‘창조하다’라는 특별한 용어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구절의 조합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심으로 창조 목표를 이루셨음을 보여줍니다. 이 외에 창조 주간에 바다의 거대 생물에게만 ‘창조하다’가 사용된 사실은(21) 하나님이 인류의 기원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알려 줍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진술에서 이 ‘사람’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집단 명사입니다. 다시 말해서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신 이들뿐 아니라 그들의 후손을 포함합니다. ‘형상’의 반복하며 중심에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을 배치해 그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본문이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 도발적인 구절은 학자들의 활발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해당 문맥과 9:5-6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어구가 차지하는 역할을 보면 그 의미에 대해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표현을 배치하여 이 구절을 강조합니다. 이 기본적인 관계 외에 인간은 삶을 유지하고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27절은 중요한 네 가지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1) 남녀의 구분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본성의 본질적 측면은 하나님의 본성과 상당히 다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녀라는 양성에서 각기 보이는 뚜렷한 특성들을 포괄해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어느 한 성에 치우친 속성을 가진 분으로 상상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림은 부분적이고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2) 인간의 양성에 대한 이 언급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산의 복을 베푸시고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시는 배경으로 작용합니다(28). (3) 이 구절은 모든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인간됨의 본질적 측면에서 남자와 여자는 질적으로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4)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만드시고 친교를 특징으로 하는 관계에서 정체성과 운명을 발견하도록 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라는 어구는 기본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상호 호혜적 관계임을 암시합니다(참조, 2:21-24). 이 기본적인 관계 외에 인간은 삶을 유지하고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고 함께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식입니다.

이 단락에서 인간됨의 중요한 측면을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데, 또 다른 하나는 말이나 언어를 다루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축복하시고 피조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심으로 태초에 이 능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28-30).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형상을 닮은 이들과 대화하실 수 있으며, 성경은 그러한 대화들의 기록입니다. 나아가 사람은 대화로 하나님과 순전한 관계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근거가 이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부르심으로 자신을 전심으로 예배할 한 민족을 세우셨습니다. 사람은 또한 대화로 서로 소통하고 이를 통해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깨닫습니다. 풍부한 인격적 교류로 인간은 큰 기쁨을 얻습니다. 이러한 기쁨은 깊은 내면에서,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성의 한 측면에서 흘러나옵니다.

나아가, 인간은 말을 다루는 능력으로 사물을 개념화하고 계획하며 평가하고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생물학적 필요를 넘어서는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행동을 인지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또한 인간은 언어 능력이 있기에 지혜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은 인간이 창조적 본능을 실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28)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동물에게 먹을거리를 주십니다. 원초적인 즐거움이자 충만한 생을 위한 축복입니다. 탐욕으로 취한다면, 복은 저주로 바뀌고, 질서는 깨지고, 생태계의 균현은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믿고 서로 나누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욕심을 버리고 제 몫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28)고 인간에게 특별한 복을 주셨습니다. 인간의 생식 능력은 신체적 조건에 내제되어 있지만 다산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었기에 다산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는 주변 이웃 국가들과 차이를 보입니다. 주변 국가들은 지역 산당에서 다산 의식을 행해야만 땅이 풍성한 곡식을 내고 가축과 여성들이 많은 자손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다스리거나 지배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1:26,28). 하나님의 지배권이 어느 한 ‘대표’(representative)에 의해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만물이 인간의 지배 아래 놓여 있지만은 않게 되었습니다(히브리서 2:8).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의 때에 지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시키실 것입니다(히브리서 2:5-8).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주셨습니다. 창세기에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부요하게 되고 번영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경이로운 하나님의 선언은 하나님의 지상 대표적인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연속적인 복을 기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창조의 완료와 안식(2:1-3)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은 자유인입니다.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살다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영적으로 회복되는 시간입니다. 다시 세상에 나가서 승리하는 비결은 바로 주일날 교회에 와서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그 이름을 높여드릴 때 창조의 축복으로 다시 회복될 줄 믿습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1-3)

마지막으로 인간의 창조와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다 이루어졌음’을 말해 줍니다. 하늘과 땅(천지)을, 그리고 하늘과 땅의 다양한 구성물들(만물)의 창조를 완성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서 원하신 대로 창조되었고 세상이 자체적으로 지속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일을 멈추고 안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일곱째 날은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하신 그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한 날로 구별하셨습니다.


안식은 창조의 목적이자 향유의 축제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며 평온과 휴식을 경험하는 영광스럽고 축복된 시간입니다. 사람이 안식을 회복할 때, 생존을 위한 싸움을 그치고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창조의 주기를 따라 살 때 진창 같은 삶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인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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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주해(01-02)

  


충만하게 하시는 하나님

창세기 1장 14-25절


 

처음부터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숨 쉬고 움직이며 번성하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께로 나왔습니다. 인간이 생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조차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칙과 원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생과 사가 모두 그에게 달려있습니다. 그가 생명의 주권자임을 인정합니까? 하나님‘도’ 생명의 주권자가 아니라 하나님‘만’ 생명의 주권자임을 인정하십니까?

  

넷째 날에 빛이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발광체인 태양과 달이 하늘에 만들어지고, 더 나가서 별들도 창조됩니다. 다섯째 날에는 하늘(공중)과 물(수중)에 생명체들이 탄생하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각자의 영역에 가득 채웁니다. 여섯째 날에는 땅에 동물과 인간이 창조되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마무리 됩니다. 생명체는 식물과는 달리 호흡을 하는 생물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흡을 가진 생명체들에게 복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넷째 날의 창조(14-19)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온 우주 만물이 아무리 크고 놀랍다 할지라도 천체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뿐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우상은 신이 아닙니다. 한낱 사람이나 물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창조주를 떠나 살면 삶은 질서를 잃고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삶의 틀과 내용 모두 주님이 창조하시도록 허락합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14-19)

넷째 날부터는 세상을 충만하게 채우고 살아갈 존재들을 창조하십니다. 첫째 날에 빛을 만드신 것에 대응하여,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 그리고 하늘의 별들을 창조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늘의 해와 달을 만드셨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태양과 달이 이날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최초의 ‘빛이 있으라’는 명령과 더불어 지구를 비추는 태양과 달, 별들이 이미 창조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아마 첫날 창조된 광명체인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지구에 온전히 발현되어 계절과 하늘의 시간표 역할을 시작한 것이 넷째 날일 수 있습니다. 하늘의 광명체인 해와 달을 구분할 뿐 아니라,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결정하는 우주의 시계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징조’는 동양의 춘분, 추분, 하지, 동지와 같은 천계 변화의 변곡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계절’은 사계절, ‘날’은 365일의 날짜, ‘해’는 1년의 기간을 뜻할 것입니다. 따라서 3절에서 ‘빛’의 창조가 이미 지구 생태계 조성을 위한 광명체들을 포함했다고 본다면, 앞서 말할 대로 태초에는 직두의 기상 조건에 의해 하늘에 또렷이 나타나지 않았던 해와 달이 이때 드러난 것을 묘사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14절의 ‘광명체들이 있으라’는 명령은 이미 창조된 해와 달에 대한 지구 중심적인 문학적 묘사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해와 달이 지구의 시간표 기준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하도록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3절에서 빛이 창조될 때 지구를 비친 임시적인 광명체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매우 억지스러워 보입니다. 흥미롭게도 1장의 우주와 지구의 창조 과정 및 생명체의 출현 순서는 과학적으로 드러난 생명체의 출현 순서와 거의 동일합니다. 과학 진화론에서 우주/지구-(미생물)-식물-동물-인간 순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은 과학과 전혀 무관하며, 오로지 신학적-문학적 진술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과도한 주장에 불과합니다. 만일 문자적으로 6일 창조를 믿으면서 식물 이전에 태양은 없었다면, 하루 뒤에 즉시 태양의 창조와 더불어 식물이 자생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넷째 날부터 여섯 째 날까지의 3일은 창조의 처름 3일과 다음 도표와 같이 대조될 수 있습니다. 첫째 날의 광명체들과 별들의 창조로 구체화됩니다.

형태 갖춤/자원
(혼돈에 반대)
영역 채움/사용자
(공허에 반대)
창조물 창조물
1 4 광명체들과 별
2 궁창(1:6-8),
하늘, 바다
5 서식 생물들, 새, 물고기
3 마른 땅(1:9-10)
식물(1:11-13)
6 육상동물(1:24-25),
사람(1:26-31)

둘째 날 궁창의 창조와 더불어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는데, 넷째 날 하늘에는 새가 바다에는 물고기가 창조됩니다. 셋째 날 마른 땅이 드러나고 거기에 식물이 싹트기 시작하며, 여섯째 날에 땅 위의 동물들과 사람들이 창조되고 식물은 그들의 먹거리가 되었습니다.

 

다섯째 날의 창조(20-23)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이성과 의지로 내적인 것에 속한 것을 유용하고, 먹고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있는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속사람에 속한 것이 내적인 것을 먹고 마셔야지 자연적인 것을 먹고 마셔서는 안 됩니다. 내적인 사람에게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내적인 것을 먹고, 남에게 전하여 주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20-23)

다섯째 날에 둘째 날 준비된 하늘(궁창)과 바다에 생물을 채우십니다. ‘생물’(네페쉬 하야, היה שׁנפ)은 숨 쉬며 살아 있는 생명체(iving creature)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더불어 물에 생물들이 번성하여 가득 찹니다. 물은 물고기를 비롯한 각종 수증 생물들의 영역입니다. 강과 바다, 호수가 다양한 생물들로 채워집니다. 21절 수중 생물의 ‘번성’(샤라츠 רץשׁ)은 떼 짓는다는 뜻입니다. 물속의 때 잣는 생물은 수영하는 물고기 떼와 바닥에 기는 것들을 포함할 것입니다. 하늘의 궁창은 공중을 나는 새들의 영역입니다. 각종 새들이 하늘을 날면서 지구 생태계에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생명의 역동성을 더합니다. 수중 생물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큰 바다 짐승들’과 ‘떼 지어 움직이는 생물들’입니다. 아마 후자는 작은 생물체들일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큰 바다 짐승들’의 히브리어 타니님(תננים)을 우가릿 신화에서 바알의 대적인 바다 괴물 얌(yam)의 별칭인 타난(tnn)에서 차용한 용어로 봅니다. 물론 창조 기사는 ‘타니님’의 신화적 색체를 걸러내어 단순히 피조물로 보고 있지만 그 단어의 우가릿 기원설은 가능한 견해일 수 있습니다. 타니님(단수 타닌)은 구약의 몇 군데에서도 이러한 신화적 특정이 반영된 상징적인 ‘용’으로 번역됩니다(시편 74:13-14: 이사야 27:1; 51:9; 예레미야 51:34). 하지만 다른 여러 곳에서는 그것이 단순히 고래, 악어, 뱀과 같은 짐승들로 번역됩니다(출애굽기 7:9, 10, 12: 신명기 32:33; 시편 91:13; 에스겔 29:3, 32:2). 타닌/타니님의 정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현재의 번역 ‘큰 바다 짐승’은 무납해 보입니다. 대체로 ‘큰 바다 짐승’은 수종에서 개체로 헤엄치는 큰 생물로 볼 수 있으며, ‘물에서 번성하는 모든 생물’은 기는 것을 포함하여 때 지어 헤엄치는 작은 생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날의 창초 작업을 나타내는 동사는 1절에 이어 다시 하나님의 창조 작업에만 사용되는 바라()입니다. 이것은 동사의 의도적인 사용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호흡이 있는 생명체의 창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새와 물고기의 창조 후, 하나님께서 그것들에게 복을 주시어 번성할 수 있게 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법이지만, 이것은 자신이 친히 생물들을 축복하여 온 땅을 생물들로 가득 채우려는 창조주의 의지와 계획에 대한 표현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복을 주다’라는 단어가 구약에서 최초로 나타나는데, 최초의 복의 대상은 생명체들, 곧 새와 물고기들입니다.

 

여섯째 날의 창조(24-25)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기도 하고 축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것을 듣지 못하고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여 그냥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표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리고 이루심을 받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시니 ‘생육하고 번성’하는 축복을 내리십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24-25)

여섯째 날의 창조물은 공중의 새와 수중 생물에 이어 땅의 생물들인 육상 짐승과 사람들입니다. 이 단락에서 짐승의 창조가 언급되고 이어지는 단락에서 창조의 절정으로 연간 장조조가 묘사됩니다. 육상 동물들이 종류별로 구분되어 나열됩니다. 가축, 기는 것, 땅의 짐승. ‘땅의 짐승’(하에토 에레츠 )은 매우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범주로 보여지만, 앞선 ‘가축’과 대비되는 ‘야생 동물’로 볼 수 있습니다. 새나 물고기의 경우와 달리 육상 동물에는 복이 선언되기 않습니다. 다음 단락의 인간 창조에서 보듯이, 인간에게도 역시 복이 선언되고 생육과 번성의 명령이 내려집니다(28). 그러나 육상 동물에게는 복뿐만 아니라 생육과 번성의 명령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생육과 번성이 하나님의 복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상 동물의 복과 번성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로 어떤 사람은 동물의 번성이 인간을 위협하고 거주지와 이를 둘러싼 경쟁을 초래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주 창조의 절정이자 생물 창조의 절정인 남녀 사람에게 선언 복과 번성의 명령 아래 동물이 자동적으로 포함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2장에서 아담이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짓습니다. 반면에 식물의 작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하지만 식물계 또한 그에게 위임되었기에 그가 식물의 이름도 지었다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의 자리를 주시고, 각 생물체에게도 걸맞은 자리를 주십니다. 두신 자리에 있을 때 그 생명은 빛나고, 종류대로 만드신 다양성을 발현할 때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합니다. 우리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려면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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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5-02)


유다의 아사 왕

열왕기상 15장 9-24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메시지를 주실 때, 대충 정당하게 전하지는 않습니다. 강한 메시지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특히 죄악 가운데 있을 때는 메시지가 강하고 무겁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항상 선명하기 때문에, 죄악에 대해서 분명하게 죄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 중에는 ‘정당히’라는 표현으로, 세상에 죄악에 순종하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흰색과 검정색이 합해진 ‘회색지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아사는 다윗처럼 여호와의 눈에 정직하게 행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통치 전반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앙 개혁운동을 벌이는 등,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통치 후반에 이스라엘의 침략을 받자 아람의 원조를 구하는 죄를 짓고 맙니다. 아사의 삶은 서 있다고 생각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며(고전 10:12), 넘어졌더라도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도록 교훈합니다.

 

유다 왕 아사(9-24)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거나 좋은 것에 있는 작은 흠을 일컬어 ‘옥의 티’라고 합니다. 흠과 티가 없을수록 그 보석은 더 귀하고 가치 있는 보석이 됩니다. 신앙에서도 하나님께서 원하는 성도는 흠이 없는 아름다운 성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힘든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끝까지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9○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 제이십년에 아사가 유다 왕이 되어 10예루살렘에서 사십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11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12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13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 14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 15그가 그의 아버지가 성별한 것과 자기가 성별한 것을 여호와의 성전에 받들어 드렸으니 곧 은과 금과 그릇들이더라 16○아사와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 동안 전쟁이 있으니라 17이스라엘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와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18아사가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 곳간에 남은 은금을 모두 가져다가 그 신하의 손에 넘겨 다메섹에 거주하고 있는 아람의 왕 헤시온의 손자 다브림몬의 아들 벤하닷에게 보내며 이르되 19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가 있고 내 아버지와 당신의 아버지 사이에도 있었느니라 내가 당신에게 은금 예물을 보냈으니 와서 이스라엘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그가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20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의 군대 지휘관들을 보내 이스라엘 성읍들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벧마아가와 긴네렛 온 땅과 납달리 온 땅을 쳤더니 21바아사가 듣고 라마를 건축하는 일을 중단하고 디르사에 거주하니라 22이에 아사 왕이 온 유다에 명령을 내려 한 사람도 모면하지 못하게 하여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 23○아사의 남은 사적과 모든 권세와 그가 행한 모든 일과 성읍을 건축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그는 늘그막에 발에 병이 들었더라 24아사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그의 조상들과 함께 그의 조상 다윗의 성읍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9-24)

아사의 선동으로 아람의 벤하닷이 북구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바아사는 단과 이욘과 아벨마임을 포함한 중요한 교역회랑 지대를 일게 됩니다. 그 지역들은 모두 수리아와 페니키아 연안 성읍인 두로, 시돈, 막고 사이를 연결하는 선상에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의지한 아사(9-15)

아사(주전 910-869년)는 여로보암 제20년에 유다의 셋 번째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다스렸습니다. 통치 기간은 41년으로, 므낫세(55년)와 웃시야(52년)에 이어 세 번째로 깁니다. 그의 어머니로 소개된 마아가는 실제로는 압살롬의 손녀로서 아사의 할머니입니다(15:18의 참고). 부친 아비얌이 등극 3년 만에 죽었고, 아사의 통치 기간이 41년인 점을 생각하면 어릴 때 왕이 되어 조모 마아가가 섭정했을 것입니다. 마아가는 이후에 폐위되는 등 아사의 통치와 깊게 관여된 인물이므로, 모친 대신 소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사는 ‘다윗처럼 하나님께 순종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이런 평가를 받은 유다 왕 8명 중 처음입니다.

12-13절은 재위 제15년의 신앙 개혁 운동(대하 15:10)을 소개함으로 그 평가의 근거를 제공합니다. 동시에, 우상숭배 근절과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여호와의 눈에 정직한 일’(11)임을 알립니다. 신앙 개혁이 있기까지 하나님의 큰 섭리가 있었습니다(대하 14-15장). 개혁은 전쟁에서의 승리,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격려, 북쪽 백성의 유입 등 군사, 신앙, 사회면에서 고무된 상황 속에서, 아사와 백성이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면서 일어났습니다. 첫째, 아사는 남색하는 자를 유다 땅에서 쫓아냈습니다. “남색하는 자”는 가나안 족속이 섬기는 우상 신전에서 예배 의식을 따라 매음하던 자들입니다. 아마도 다산 숭배와 관련하여 나타난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데 이런 신전 창기들이 르호보암 당시 유다에도 존재했습니다(14:24). 약 300년 후 요시야 때는 이들이 여호와의 성전에도 있었던 만큼(23:7), 아사가 이들을 쫓아낸 것은 큰 성과였습니다. 둘째, 아사는 그의 선조들이 만든 우상을 모두 없앴습니다. 솔로몬은 이방 아내들이 섬기는 온갖 우상을 위해 산당을 만들고 분향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역에 우상숭배를 퍼뜨렸습니다(11:3-8). 르호보암 때도 유다 곳곳에 산당과 우상들이 즐비했습니다(14:23). 아사의 조모 마아가도 아세라 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13). 그러나 아사는 선왕들과 달리 우상이 예배의 대상이 아님을 각인시키고,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했습니다(대하 14:4). 셋째, 아사는 아세라를 숭배한 태후를 폐위했습니다. 친조모를 처벌할 만큼 아사의 신앙개혁 의지가 단호했습니다. 당시 아사가 장성했으므로 태후의 정치, 종교적 세력을 꺾으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사는 태후가 만든 우상을 잘라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태웠습니다. 한편 14절의 아사가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설명은 긴장을 자아냅니다. 그런데 실상 산당을 제거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대하 14:3,5). 이런 상충된 내용을 정리하면 14절은 아사가 산당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음을 뜻합니다. 열왕기 저자는 산당이 남아 있어, 아사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가 유다에 지속될 것을 전조로 알립니다. 또한 우상숭배로 인해 유다도 결국 멸망했음을 독자에게 상기시켜 경각심을 주는 의도라 볼 수 있습니다. 산당 문제는 남았으나, 아사의 마음은 평생 여호와와 온전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아비양은 부친의 전철을 따라 죄를 지었으나(3), 아사는 부친 아비암의 죄를 좇지 않았습니다. 아비암은 도리어 부친과 자신이 성별한 전쟁 전리품인 은, 금, 기명들을 여호와의 성전에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이 일은 이후에 소개되는 사건의 복선이기도 합니다.

(2) 벤하닷을 의지한 아사(16-22)

하나님을 의지했던 아사는 군사적 위기를 맞자 아람(시리아)의 벤하닷을 의지하는 죄를 짓습니다. 분열 왕국 이래 르호보암과 아비얌 그리고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있었듯(14:30; 15:7) 아사와 바아사 간에도 충돌이 계속됐습니다(16). 솔로몬의 죄로 빚어진 왕국의 분열은 지파, 영토, 신앙의 분열만 아니라 이처럼 군사적 충돌과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아사의 통치 초기에는 전쟁 없이 평안했습니다(대하 14:1; 15:19). 그러나 제16년에 바아사(주전 908-886년)가 유다를 공격하여 라마(예루살렘의 북쪽 8km)까지 남하했습니다. 그곳을 요새화하고 국경으로 만들어, 백성의 유출을 차단하고 예루살렘을 공략하려는 전략입니다. 여로보암이 종교 제도를 변형한 것과 방식만 다를 뿐 백성과 나라를 잃을까 두려운 마음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12:26-27 대하 15:9). 아사의 41년 통치 동안 북이스라엘은 여섯 차례 바뀌고(나달, 바아사, 엘라, 시므리, 디브니/오므리, 다합), 왕조가 네 번 바뀌며 불안정한 정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물에서 흔들리는 갈대와 같았습니다(14:15).

한편 예루살렘 코앞까지 밀어닥친 바아사의 침략으로 아사는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세라와의 전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했으나(대하 14장), 이번에는 하나님을 갖는 대신 다메섹의 아람 왕 벤하닷 1세(주전 약 896-874년)를 찾는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다윗의 속국이었던 아람은(삼하 8:5-6) 솔로몬 대에 르손이 다메섹의 독립을 이루며 성장했습니다(11:24). 이미 아비암과 바아사가 아랍과 조약을 맺었고, 이제 아사까지 조약을 맺은 것을 보면(19), 솔로몬 이후 2~3대 만에 이스라엘과 아람의 판도가 역전됐음을 알려줍니다. 솔로몬의 배역의 후폭풍은 이처럼 이스라엘의 신앙과 정치적 평안에 치명적이었습니다. 독자들은 죄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 지를 기억하며, 회개와 순종의 길로 가야 합니다. 아사는 예루살렘을 사수하기 위해 르호보암처럼(14:26) 성전과 왕궁합니다. 보물을 다 꺼내어 벤하닷에게 보냅니다.

부친과 자신이 하나님께 바친 모든 성물도 포함되었습니다(15). 아사는 벤하닷에게 부친과의 동맹을 상기시키며, 바아사와의 조약을 깨고 그를 치라고 요구합니다. 이처럼 왕들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택한 성읍이며 그의 임재가 함께함을 망각하고, 인간적인 힘으로 도성을 지키려 합니다. 벤하닷은 패권을 쥐고 양국 왕들을 저울질하며 자신의 유익에 따라 조약을 맺고 깨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아사의 요구대로 바아사와의 동맹을 깨고 군대를 보내 이스라엘 성읍을 쳤습니다. 아사가 보낸 예물도 많았겠지만,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 이득이 컸기 때문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벤하닷 군대 장관들은 북서쪽에서 남하하면서 이스라엘 북부의 이욘, 단, 아벨벧마아가, 긴네렛 호수 주변 땅과 납달리의 온 지역을 쳤습니다. 이로써 다메섹에서 두로와 지중해로의 무역로를 뚫을 수 있었습니다. 벤하닷의 공격 소식에 바아사는 라마 건축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수도인 디르사로 돌아가 국정을 살폈습니다. 반면 아사는 온 유다에 강제 명령을 내려, 바아사가 라마의 건축 현장에 남긴 돌과 나무를 가져와, 예루살렘 북쪽 각각 16, 12킬로미터에 있는 게바와 미스바를 요새화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침입을 대비해 방비 성을 마련한 것입니다. 열왕기는 이 사건을 여기서 종결하나, 역대기는 이 일로 하나님께서 하나니 선지자를 보내 아사를 책망한 일을 후기로 기록합니다(대하 16:7-10). 하나니는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유다에 전쟁이 있을 것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아사는 하나님의 책망에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선지자를 옥에 가두고 백성을 학대함으로써 분풀이를 하며 죄를 더했습니다. 아사의 변질된 신앙은 순종의 삶에서 긴장을 늦추지 말고 겸손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3) 아사의 통치 종결부(23-24)

아사는 노년에 발에 병이 들어 죽었고, 여호사밧이 왕위에 오릅니다. 열왕기는 아사의 병만 언급했으나, 역대기에 따르면 그가 병들었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원들을 찾았음을 지적합니다(대하16:12). 아사의 삶은 이처럼 아쉽게도 순종에서 불순종으로 끝납니다. 이는 열왕기 청중과 현대 독자에게 각자를 돌아보게 하며 겸손히 하나님만 찾는 삶을 권유합니다.


우리 시대와 교회의 현실은 올바른 것을 꾸준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을 살피면서 일평생 하늘 하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이루어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처리하는 단호하게 결단할 수 있는 힘이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변함없이 한결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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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01-0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세기 1장 1-13절 


새해가 되면 새로운 태양을 보는 것처럼 모두가 새 희망을 가지고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태양은 어제도 떠올랐던 같은 태양이며, 해가 바뀌었다고 태양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바뀐 것은 인간들의 마음인 심정상태가 변화된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태초가 뜻하는 것은 사람이 새롭게 거듭나기 시작하는 처음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모세는 창조 기사에서 창조의 각 단계들을 시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루로 표현된 날이 실제 역사에서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우주와 지그의 장대한 창조에 대해 매우 제한된 정보만 제공할 뿐 세부적인 내용은 커다란 공백으로 남겨둡니다.

 

창조의 선언(1)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더불어 하늘과 땅,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지으셨습니다. 우주만물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존재하며, 하나님의 의해서만 생명과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피조물로서 바른 관계를 맺을 때, 올바른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

 본문은 1장 전체의 서언인지, 아니면 2-3절의 초기 원시적 우주의 발생을 일으킨 창조의 순간에 대한 묘사인지에 대해 견해가 나뉩니다.

1절은 최초의 무에서 유의 창조 순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3절은 그 최초에 창조된 우주의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1장의 창조 기사가 원시적인 혼돈의 상태를 전제한다는 견해는 '배경이해'에서 설명한 대로 수용하기 어렸습니다. 1절은 1장 전체의 서언일 수도 있습니다. 서언은 종종 곧 장 이어지는 내용과 전체 내용을 위한 이중적 서언이 될 수 있습니다(예. 레위기 1:2). 1절의 선언은 가나안과 고대 근동 지역의 우주 발생론과 범신론적 창조론을 의도적으로 반박하고 자연을 비신화하는 여호와 종교의 차별적 선언입니다.

‘천지’, 곧 ‘하늘과 땅’은 전형적인 총칭어법(merism)으로 온 우주와 그 안에 속한 만물을 가리킵니다. 동사 ‘바라’는 언제나 독점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라는 측면에서 매우 특별합니다. 이 동사는 인간이 흉내 내거나 재현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비교 불가한 능력의 창조 행위를 표현합니다.

  

첫째 날의 창조(2-5)

하나님께서는 혼돈과 공허를 걷어내고 질서를 창조하셨습니다. 혼돈의 세력이 전쟁과 파괴와 죽음으로 창조 세계를 위협하지만 혼돈을 이기신 하나님께서 샬롬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존재의 혼돈과 삶의 공허로 힘겨워하고 있습니까? 삶에 질서를 부열하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2-5)

‘혼돈’과 ‘공허’의 상태는 아직 바다와 뭍의 경계가 설정되지 않은 등, 초기 지구의 무질서한 상황을 말하며, 최초 창조 직후의 상태에 대한 묘사일 수 있습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의 문자적 의미는 ‘깊음의 표면 위에 있다’입니다. 이것은 빛이 없는 깊은 어두움의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 ‘깊음’을 고대 근동의 신화를 배경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깊음’을 뜻하는 ‘테홈’은 수메르 창조 신화에서 바다의 신 티아마트에서 기원하는데, 창세기에서는 신화적 요소가 탈색되었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이 우가릿어와 에블라어에서 깊음과 심연을 의미하는 비슷한 단어들을 찾아내 그것이 티아마트와는 관련 없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한다’는 묘사는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강풍’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신’인데, 다만 사도행전 2:2에서 볼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영이 임재한 가운데 자연풍이 아닌 강한 성령의 기운으로서 특별한 바람이 동반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참조. 출애굽기 14:21; 15:10의 루아흐[기는 ‘바람’을 의미하는데 이 바람도 자연풍으로 보이지 않는다).

1-3절을 중조설, 즉 재창조론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1:1에서 하나님께서 완벽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1:2에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었습니다. 그래서 3절부터 하나님께서 우주의 질서를 다시 바로잡는 재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이단 사설에 의하면, 1절에서 이미 인간 창조도 이루어졌는데, 1절과 2절 사이에서 사탄의 반란이 발생하여 그들이 땅으로 내쫓겼고 세상을 혼돈과 공허로 망가트려놓았습니다. 그들은 인간 여성들과 혼음하여 네피림을 낳았으며 이로써 최초의 인류는 모두 사탄의 추종자로 전락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1장과 2장의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인류가 아닌 새롭게 창조된 인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전혀 증거가 없는 억측이며 많은 이단들이 악용한 해석입니다. 최초의 직접 명령은 ‘빛이 있으라’입니다. 이후의 창조도 명령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세계창조는 말씀에 의한 창조입니다. 최초의 빛은 갓 태동한 우주에 존재하는 빛의 출현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일 수 있으며, 거기에는 지구를 비추는 태양이 포함될 것이다. 필자는 태양은 넷째 날의 광명체의 창조 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첫째 날에 이미 창조되었다고 생각합니다. 5절에서 빛의 창조와 더불어 ‘첫째 날’의 창조가 마무리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지구적 관점에서 명백히 낮과 밤의 구분이며 하루에 대한 표현입니다. 모세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체계를 이용해 우주와 지구의 창조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과학적 사실의 문제와는 별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1장의 본문 자체 내에서도 넷째 날에 지구를 비추는 광명체의 출현과 더불어 ‘사시사철과 날과 해’의 주기, 곧 낮과 밤의 주기가 비로소 고정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날에 대한 문자적 해석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히브리어 욤()의 의미에 대한 해묵은 논쟁과 관련되어 있는데, 필자는 표현상 창세기 1장에서 ‘욤’은 24시간의 하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오랜 지구론을 믿는 점진 창조론자의 입장을 지지하며, 여기서 ‘날’은 긴 ‘연대’를 가리킵니다. 사실 ‘욤’이 24시간의 하루가 아닌 긴 시대나 기간을 지시하는 것은 구약 여러 곳에서, 특히 ‘마지막 시대(날)’에 대한 종말론적 예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시편 90:1; 요엘 4:18; 아모스 5;18; 오바냐 1:12,15).

 

둘째 날의 창조(6-8)

창조 신앙은 모든 신앙의 시작이고 근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 있는 모든 신앙의 시작이고 근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근원이시고 세상은 그분의 의지에 의해서만 존재하기에, 모든 피조물이 자기 자신을 알고 지으신 분을 의뢰할 때만 존재의 참 의미를 누릴 수 있습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6-8)

둘째 날에 하늘의 궁창이 만들어집니다. 궁창(라키아)은 창세기 1장 외에 주로 에스겔(5회), 시편 (2회), 다니엘(1회)에서 등장합니다. 이것은 모두 창세기와 시편처럼 자연계든, 에스겔처럼 천상계든 하늘에 대한 묘사에서 사용됩니다. 동사 라카()는 손바닥이나 천막과 같은 것을 '펼치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고대인의 관점에서 거대하게 하늘에 펼쳐져 온 땅을 뒤덮고 있는 창공을 의미합니다. 하늘을 마치 거대한 덮개와 같이 이해한 것입니다. 8절에서 그 궁창은 ‘하늘’(샤마임)로 불립니다(참조. 20절의 ‘하늘의 궁창’ [레키아 하샤마임].

물은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뉩니다. 이것은 땅 위의 강과 호수, 바다에 담긴 물과 더불어 하늘에 갇혀 있는 물(비구름이 담고 있는 물)이 있다는 뜻입니다. 둘째 날에만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반목 형식문이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물의 창조가 셋째 날의 육지의 조성과 더불어 마무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셋째 날의 창조(9-13)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권능이 있어 존재와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려고 말씀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오신 말씀이실 때 말씀을 듣는 자는 변화와 능력을 경험합니다. 말씀이 새 창조의 능력임을 믿는다면, 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9-13)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가 아직 미완성이었던 최초의 창조 상태, 곧 혼돈의 무질서한 세계에서 정돈되고 질서 있는 세계로 진행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필자는 창세기 1장이 시적인 형식의 창조 작업을 묘사하지만, 성경은 저자 모세의 지적 수준과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기에 역사적 사실 또한 담고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9절은 지구의 점진적인 형성 과정에 대한 묘사일 수 있습니다. 뭍이 드러나고 물이 한곳에 모여 '바다'라 불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풀과 채소와 초목이 종류대로 나오게 하십니다(11). 여기서 ‘종류’(민)의 범주는 동식물 분류학적으로 정확히 적시하기 어렵습니다. 창조와 진화와 관련된 토론에서 이 용어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지만, 그것이 생물학적 분류의 어느 범주에 속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습니다. 진화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직접 개입에 의한 창조를 믿는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예컨대 개나 고양이의 ‘종류’를 창조하셨고, 아종과 변종은 번식 과정의 자연스런 결과로 간주합니다. 진화론은 자연법칙에 따라 생명체가 우연히 탄생하고 이후로는 물리학적 법칙에 의한 자가 발전의 진화를 이어갔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서 유신 진화론은 생물의 탄생과 진화의 방향만 유도할 뿐 생물 개체의 직접적 창조에는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유신진화론에 의하면, ‘각기 종류대로’에서 모든 생물의 종류는 결국 진화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아직은 비어있는 땅, 바다, 하늘에 셋째 날부터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채워 가십니다. 이 삼중적 자연계의 공간은 하나님께서 생물들을 채우기 위해 준비한 무대로서 생명으로 충만한 생태계로 조성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보시고 만족해 하셨습니다. 창조 안에 지혜와 영광, 권능이 충만히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이자 거룩한 임재를 담은 성소입니다. 우리는 세계가 정결하고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도록 보존과 회복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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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01-02)


유익한 오네시모를 받아주길 원하는 바울

빌레몬서 1장 17-25절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이 시스템을 ‘가치관’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가치관은 과연 세속적인 가치관인지, 하나님 나라 가치관인지로 구분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가치관과 시스템은 어떤 시스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길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빌레몬은 바울을 영접하는 것처럼 오네시모를 영접해야 합니다. 비록 오네시모가 종일지라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종과 자유자는 하나입니다. 바울은 그를 사랑받는 형제로 인정할 뿐 아니라, 만일 그가 빌레몬에게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그것까지 배상하고자 합니다. 빌레몬 역시 오네시모를 영접함으로써 바울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오네시모에 관한 바울의 구체적인 요청(17-19)
 

자신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친 원수라고 합니다. 사극에 보면, 이 원수를 갚기 위해 평생을 찾아다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인간적인 가치관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안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17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17-19)
 
사도 바울은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다시 빌레몬의 집으로 보냅니다. 그는 빌레몬 집에서 도망하면서 부당한 짓을 했었습니다. 오네시모나 빌레몬은 좋은 관계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네시모를 이제는 믿음의 형제로 영접하라고 부탁합니다.
 
(1) 오네시모를 영접하라는 요청(17)
 
이제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영접하라고 구체적으로 요청합니다. 빌레몬은 바울을 영접하는 것처럼 오네시모를 형제로 영접해 주길 요청합니다. 빌레몬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간 노예를 어떻게 사도 바울을 영접하는 것처럼 영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바울의 요청은 빌레몬과의 긴밀한 관계에 근거한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깊은 영적 친교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함께 일하는 동료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동역자로서 자신의 영적 아들이 된 오네시모를 영접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빌레몬이 하는 역할을 오네시모가 감당했으며, 바울에게 있어서 빌레몬이나 오네시모는 동급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게다가 바울의 요청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과 자유인이 하나라는 복음의 진리에 근거한 것입니다(갈 3:25). 빌레몬은 자신의 동역자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회심한 오네시모를 동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고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2) 손해 배상에 관한 언급(18-19)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한 것이나 빚진 것이 있다면, 그것까지도 기꺼이 담당하겠다고 말합니다. 18절에서 ‘불의를 행하다’와 ‘빚을 지다’라는 이중적인 표현은 오네시모가 자기 주인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그의 돈 얼마를 훔쳤다는 점을 암시할 수 있습니다. 또는 그가 주인으로부터 부당하게 도망한 기간 동안 수행하지 못한 일에 대해 빚을 지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18절에서 ‘계산하다’라고 번역한 동사 ‘엘로게오(ἐλλογγέω)’는 ‘어떤 사람의 회계장부에 기입하다’를 의미하는 전문적인 상업용어이며, 19절에서 ‘갚다’라고 번역한 동사 ‘아고티노(ἀποτίνω)’는 배상합니다. ‘손해를 지불하다’를 의미는 전문적인 법률용어입니다. 이런 용어들을 사용함과 동시에 약속 어음에 서명하는 것처럼 “나 바울이 친필로 쓴다”라고 말함으로써, 바울은 오네시모가 끼친 손해들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들을 배상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입니다(새번역, “그가 그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거나, 빚진 것이 있거든, 그것을 내 앞으로 달아놓아 주십시오”).
이어서 빌레몬 자신도 바울에게 빚진 것이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전도로 회심했을 것입니다. 그가 바울에게 진 영적 빚은 오네시모가 그에게 입힌 경제적 손해보다 훨씬 큰 것입니다. 큰 빚을 진 빌레몬은 상대적으로 작은 빚을 진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 사랑의 빛을 아는 자만이 모든 차별의 담을 허물고 진정한 형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빌레몬의 순종에 대한 요청과 확신(20-22)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을 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차별이나 판단하지 아니하고 가족으로 형제의식을 가지고 하나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 모습을 우리를 통해 세상에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서로를 돌아볼 때, 우리 안에 형제로서 지체의식을있어야만 사랑이 실천될 수 있습니다.
 
20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22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숙소를 마련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노라(20-22)
 
바울은 오네시모에 대한 자비를 호소하면서도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간과하지 않고, 만약 오네시모가 불의를 행했거나 경제적인 손실을 끼친 일이 있다면 자신이 배상하겠다고 제안합니다.
 
(1) 빌레몬의 순종에 관한 요청과 확신(20-21)
 
‘오 형제여’라는 표현에서 오는 확인, 동의 혹은 강조를 나타내는 불변화사 ‘나이’(ναί)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예’, ‘그래’, ‘진실로’, ‘분명히’ 등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와 함께 애정 어린 호칭인 ‘형제’는 바울의 요청을 강화시켜 줍니다. 그것은 한 형제를 위하여 다른 형제에게 하는 형제의 애정 어린 요청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의 요청을 들어줌으로써 바울 자신을 기쁘게 하고 그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길 기대합니다. 빌레몬이 사랑의 행위로 성도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었듯이(7), 이번에는 오네시모를 영접하는 사랑의 행위로 바울 자신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과 관대함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그가 오네시모를 따뜻하게 영접해줄 것을 확신합니다. 빌레몬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도저히 받올 자격이 없는 오네시모에게도 사랑을 나눠야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됩니다. 신실한 믿음과 사랑의 사람인 빌레몬은 바울의 요청에 기꺼이 응할 뿐 아니라 바울이 요청한 것들보다 더 많이 행할 것입니다. 즉, 빌레몬은 단지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할 수 있도록 오네시모를 자유인이 되게 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바울의 방문을 위한 준비(22)
 
지금 바울은 로마에서 죄수의 몸으로 편지를 보내지만,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 골로새를 방문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빌레몬에게 자신이 묵을 숙소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여기서 숙소라고 번역한 헬라어 명사 ‘크세니아(ξεία)’는 일반적으로 ‘환대’, 혹은 ‘대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손님이 투숙하는 장소, 곧 객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골로새를 방문하여 자신이 요청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직접 확인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풀려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레몬과 그의 집에 있는 교회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바울은 자유의 몸이 되어 골로새에 있는 빌레몬을 방문할 것입니다. 왜, 이런 방문 계획을 말했습니까? 빌레몬이 바울의 부탁을 들어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에게 자유를 줄 때 이 방문이 가능하고, 또 반가이 서로를 맞이하고 기다릴 수 있는 방문이 될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마지막 인사와 은혜의 축도(23-25)

 
복음은 자신의 편이와 이해를 위해 거리를 두는 사랑이 아니라 세상의 상식과 통념, 자신이 정한 기준과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을 요구합니다. 용서에는 허비도 없고 지나침도 없습니다. 지치지 않는 용서의 사랑, 지체와 이웃이 기대한 것 이상의 사랑을 베풀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3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24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있을지어다(23-25)
 
마지막으로, 바울은 편지를 끝내면서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인사를 빌레몬에게 전합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설립자이자 사역자입니다(골 4:12-13). 그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복음을 듣고 회심했으며, 그 후에 고향인 골로새에 교회를 설립했습니다(행 19:10; 골 1.17).
얼마 뒤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아킵보에게 사역을 맡기고 로마에 있는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라의 보고를 듣고 골로새서를 썼습니다. 에바브라는 로마에 남아 바울을 섬기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그와 함께 옥에 갇히는 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언급한 아리스다고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에베소에서 바울과 함께 사역했고(행 19:29; 20:40), 바울이 로마로 갈 때에도 그와 동행했습니다(행 27:2). 데마는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년에 세상을 사랑하여 그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딤후 4:10).
 
동역자들의 문안 인사를 전한 뒤 바울은 은혜의 축도로 편지를 끝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빌레몬과 그의 집에 있는 교회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그가 여기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언급한 것은 편지의 문맥상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빌레몬의 심령에 역사하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영접하는 어려운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집에서 모이는 성도들 역시 오네시모를 영접해야 합니다. 신자들의 심령 속에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공동체 안에 진정한 화해와 교제가 이루어지게 할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빌레몬 개인에게만 보낸 서신이 아니라 공동체에 보내는 형식을 취한 것은 빌레몬이 가정 교회의 리더로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여 본을 보이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서 곳곳에 묻어나는 바울의 진심 어린 호소는 개인의 한계와 사회적 관계의 벽을 극복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교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지배적 가치와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복음이 요구하는 사랑의 원리를 따라 ‘사랑의 사람’이 되고, ‘용서와 사랑의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큰 울림과 긴 여운을 안겨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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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01-01)

 


무익했던 오네시모를 받아주길 원하는 바울

빌레몬서 1장 1-16절


인생의 여행에서, 여행을 즐겁게 하는 것은 행복한 동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외롭고 때로는 고달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동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 바로 행복한 인생입니다. 이러한 행복한 동행하는 사람을, 우리는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동역자는 같은 비전을 가지고, 함께 하며, 함께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를 위하여 사랑으로 간청합니다. 오네시모는 도망한 노예였기 때문에 엄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오네시모는 단지 빌레몬의 노예가 아니라 바울의 영적 아들입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가 더는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서신의 인사(1-3)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도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큰 기쁨과 위로를 줍니다. 이처럼 사랑의 삶과 본은 우리를 더 깊고 풍성한 믿음의 교제로 이끌고, 공동체에 활력과 지도자에게 큰 힘을 더해주며, 주 안에서 있는 복을 함께 깨닫고 누리게 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지도자와 성도의 관계, 성도와 성도의 관계는 서로 자신을 낮추고 섬기며 사랑하는 관계로 성장해야 합니다.

1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 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3)

바울은 빌레몬을 ‘우리의 사랑받는 자’라고 부릅니다. 성도의 관계가 십자가의 사랑에 뿌리를 둔 사랑의 관계이며, 빌레몬이 사랑의 수혜자요, 사랑에 빚진 자임을 언급합니다.

(1)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냄(1-2)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라며, 어떤 죄를 범에서 구속된 상태가 아닌 복음을 위해서 갇힌 자라고 소개합니다(1). 그런 구속된 상태에서 빌레몬서를 써 보냅니다. 이때 바울 곁에는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었습니다.

이 서신의 일차적인 수신자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입니다(1). 아마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할 때 빌레몬과 친분을 맺었을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골로새 출신이라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골 4:9) 그의 주인인 빌레몬이 골로새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큰 집을 소유한 부자였습니다. 골로새의 가정 교회가 그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빌레몬과 함께 이 편지를 받은 자매 압비아와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내와 장성한 아들일 것입니다. 두 사람은 교회와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빌레몬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킵보가 바울과 함께 병사 되었다는 표현은 그가 골로새 교회의 중요한 사역자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참조. 골 4:17).

(2) 은혜와 평강의 인사(3)

바울은 동역자인 수신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인사를 전합니다(3).

이곳에서 말하는 ‘은혜와 평강’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죄인들에게 먼저, 그리고 값없이 베푸시는 구원의 사랑입니다. 또한,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의 결과로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죄인들이 누리는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빌레몬을 위한 바울의 감사(4-7)

목회자로 성도를 위해 기도할 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그분만 생각하면 감사가 넘쳐나지만, 어떤 분은 안타까움으로 염려 속에 기도해주는 분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의 사랑과 믿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를 위해 누군가 중보할 때, 눈물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4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5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6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이르도록 역사하느니라 7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4-7)

바울은 빌레몬이 이 사랑의 호의를 공동체 안의 성도들만 아니라 그에게 손해를 끼친 오네시모에게도 베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이 든 사도로서 권위 있게 명령할 수 있지만, 사랑으로 설득하고 간청합니다.

(1) 빌레몬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감사(4-5)

바울은 기도할 때 빌레몬을 기억하면서,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가 감사하는 이유는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모든 성도들을 향한 것이며,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사랑합니다. 건강한 신자들에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함께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2) 빌레몬을 위한 기도(6)

본문 4절에 있는 “기도할 때에”라는 구절에 종속된 헬라어 접속사 호포스(ὅπως)로 시작합니다. 이 접속사는 기도의 내용을 진술하는 절을 소개합니다. 따라서 ‘기도한다’라는 동사가 없을지라도 이 본문을 빌레몬을 위한 바울의 기도로 간주하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네 믿음의 교제가 효력 있게 되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을 네가 알게 되기를 내가 기도하노라.”

이것은 믿음에 기초한 교제, 즉 바울과 함께 나누는 빌레몬의 교제가 더욱 효력 있게 되어서 바울 안에 있는 모든 선을 온전히 알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모든 선이란 빌레몬의 노예인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요청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오네시모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그를 받으라는 요청은 바울 자신의 모든 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빌레몬은 그 모든 선을 알고 오네시모를 기꺼이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한 자신의 요청을 빌레몬이 받아들이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빌레몬으로 인해 기쁨과 위로(7)

바울은 빌레몬이 성도들에게 베푼 사랑을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노라”(7)라고 다시 언급합니다. 그는 빌레몬의 사랑에 관한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빌레몬으로 인해 많은 기쁨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마음이 평안함을 얻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빌레몬은 성도들을 섬기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 헌신한 사랑의 사람, 바울과 함께 하나님을 위한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 관한 자신의 요청을 빌레몬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마음도 평안하게 해줄 것입니다(20).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간청(8-16)

우리를 통해 복음이 전해지므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된다면, 영적인 열매를 보면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자를 낳을 때는 많은 고생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무익했던 사람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수고는 잠시 힘들겠지만, 미래의 영적 열매를 바라보면서 행복한 사명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8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15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16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8-16)

권위보다 사랑으로 가르치고 설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과 본이 된 삶은 오네시모 문제를 명령과 지시로 해결해도 될 만큼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1) 오네시모를 위한 바울의 간청(8-10)

바울은 8절에서 빌레몬의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위한 중재를 시작합니다. 그는 사도의 권위를 앞세워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랑으로 간구합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를 자신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로 소개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이었습니다. 그는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쳐 나온 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만나게 하시고, 바울에게 복음을 듣게 하셨고,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9)라고 소개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헬라어 본문에서는 ‘내가 갇힌 중에서 낳은 나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사역을 통해 오네시모가 회심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9절에서 ‘아들’이라고 번역한 ‘테크논’은 바울이 오직 디모데와 디도를 아들이라고 부를 때에만 사용한 단어입니다(딤전 1:12; 딤후 1:2; 딛 1:4). 이 단어는 ‘자식’, ‘아이’, ‘어린이’ 등을 의미합니다. 오네시모는 디모데나 디도와 같은 바울의 영적인 자녀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의 영적인 아들을 위하여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오네시모를 돌려보냄(11-12)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낸다. ‘오네시모’(ὀνήσιμος, 오네시모스)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이익이 되는 유용한’, ‘유익한’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이름과는 달리 자기 주인에게 무익한 존재였습니다. 주인에게 손해를 입히고 로마로 도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그 결과 그는 바울과 빌레몬 모두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오네시모를 “내 심장”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자신의 심장이라고 부를 만큼 오네시모는 그에게 소중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영적인 아들일 뿐 아니라 바울의 심장입니다.

(3)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 이유(13-16)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머물러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빌레몬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 오네시모를 돌려보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선한 일을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하기를 바랍니다.

14절에서 “너의 선한 일”이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처벌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자비로 다시 받아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바울과 함께 복음 사역을 하도록 그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로마로 도망한 것과 그곳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일부로 생각합니다(15). 오네시모는 자신의 과오 때문에 빌레몬을 떠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오네시모를 변화시키셨고, 그를 빌레몬의 사랑받는 형제로 영원히 머물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더는 종이 아니라 사랑 받는 형제로 받아야 합니다. 오네시모는 특별히 바울에게 사랑받는 형제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적으로, 그리고 주안에서 밀접한 관계가 있는 빌레몬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빌레몬에게도 오네시모는 사랑받는 형제인 것입니다.


바울은 짧은 서신을 통해 아낌없는 사랑과 남김 없는 용서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한없는 사랑이 끝없는 용서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내게 사랑 없음을 가슴 치기 전에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해보라고 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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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서론


빌레몬서 서론


Ⅰ. 제목

본서의 제목은 ‘빌레몬’인데 헬라어 원문에는 ‘프로스 필레모나’로 ‘빌레몬에게 보낸 서신’이란 의미입니다.

 

Ⅱ. 저자

본서가 바울의 서신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부 학파에서는 이의를 제기하지만, 믿을 만한 견해는 될 수 없으며 외증과 내증이 너무 확실합니다.

(1) 내증

본서를 자신이 언급하고 있습니다(1,9,19). 사상, 표정, 감정, 문체 등 모든 것이 철저한 바울적인 표현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어떠한 증거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리고 본서는 골로새서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골 4:10-17, 몬 2:23-24). 그래서 골로새서의 증거는 본서의 증거에 큰 도움을 줍니다.

(2) 외증

본서는 익나티우스의 편지 가운데도 본서의 한 구절(20)을 시사하고 있으며, 다른 목회서신이 빠져 있는 말시온의 정경(Marcion's Canon)과 무라토리 단편(Munatorian Fragment)에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리겐도 본서 14절을 바울의 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태복음 주석에도 7,9절을 가리키고 있으며 역사가 유세비우스, 구라틴어, 구수리아역에서도 본서를 바울이 저자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Ⅲ. 수신자

수신자인 ‘빌레몬’은 교회의 명칭이 아니고 사람의 명칭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빌리몬에게 서신을 보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에 관해 많은 소개가 없습니다. 다만 골 4:9과 본서 6,7,10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골로새 출신의 부자로서,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 전도할 때 회개하고 돌아온 듯합니다. 그는 골로새 교회의 장로요 골로새 교회도 그의 집에서 모인 것 같습니다. 또한, 전승에 의하면 골로새 교회의 감독으로 있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순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은 그 당시 노예제도가 있어서 적어도 로마시에 6000만 명이나 되는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빌레몬이 어떻게 노예를 가질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인데, 당시 상당 수의 성도들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여러 곳에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고전 7:20-24, 골 3:22-4:1, 엡 6:5-9). 그리고 본서의 수신자와 함께 언급된 압비아와 압킵보는 그의 가족으로 추측됩니다.

 

Ⅴ. 기록 연대 및 장소

본서가 골로새서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미 논하였습니다. 본서의 기록 시기는 골로새서와 같은 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본서도 옥중서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서를 기록한 당시는 바울이 죄수의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3,10).

골로새서 4:7-17을 자세히 보면 본서가 기록된 곳이 동일한 장소임을 암시해 줍니다. 그러나 바울의 투옥 문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바울이 옥에 있을 때 오네시모가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본서를 기록할 때는 에베소 감옥에 있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서 도망하여 은닉하여 가장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던 장소는 에베소 보다는 로마가 더 유리했을 것이고 그곳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오네시모가 바울을 시중들게 되었고 바울의 많은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으나 빌레몬의 허락을 받고 싶었습니다(13-14). 그러므로 오네시모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서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 시기가 A.D 62년경 로마 옥중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Ⅵ. 기록 목적

본서는 바울서신 중에서는 가장 짧은 서신입니다. 그래서 원어는 335개의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본서에 나오는 빌레몬에게는 오네시모라고 하는 종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을 도적질하여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도망간 곳이 로마였으며(18,19),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무엇이 참 자유인지를 깨닫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시중을 들어주고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노예는 주인의 소유였으며, 그에게는 사형에 해당하는 형벌이 내려진다 해도 바울로서는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된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보내어 주인과 화해시키기 위해 붓을 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손해를 입힌 돈 문제도 자신이 해결하겠다고(18)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본서는 단지 인간적 동기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고 기독교적 사랑으로 종 오네시모를 형제같이 대우하라는 사랑의 실천적인 복음인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에 골로새 교회에는 빌레몬 만이 노예를 소유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본서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사이를 화해시키는데 주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 빌레몬의 신앙을 칭찬하기 위해, (2) 오네시모를 용서하라는 간구, (3) 오네시모를 복음 전파자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Ⅶ. 특징

바울 서신을 분류한다면 공적인 서신과 사적이 서신으로 나눌 수 있는데, 본서는 전적으로 사신입니다. 대상도 한 가정만을 상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제가 개인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리고 본서에서는 바울의 부탁을 살펴보면 개인의 인격과 성품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노예제도와 같은 사회 윤리성, 즉 사회악을 취급하고 또한 기독교인이 취해야 할 신앙적 태도가 무엇인가 하는 기독교로써의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윤리의 아름다운 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공통적인 견해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주종관계를 벗어나 형제 관계로 돌입하기 때문에 주 안에서의 주종 관계 성립은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요 형제이므로 서로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것을 특징으로 한다. 때문에 본서는 사랑의 서신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마땅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에서는 바울이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사도적인 권위조차 주장도 않고 오히려 한 계단 더 내려가 겸손한 태도로 오네시모를 위한 간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서는 이간이 아닌 설득을 통하여 무신자가 순종하도록 만들고 있다. 한 때는 존경받는 선배요 신뢰할 만한 친구가 이제는 탄원자로서 데리고 있는 사람을 위하여 자비를 호소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 한층 더 돋보인다. 그러므로 본서의 특징을 통해서 그리고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죄인들을 대속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수난을 당하시고 또한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한다.

 

Ⅷ. 개요

1. 도입 인사(1:1-3)

2. 서신의 본론(1:4-22)

    (1) 기도(4-7)

     (2)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된 오네시모의 부탁(8-14)

     (3) 부탁을 충분히 전개함(15-22)

          15-16 오네시모와 빌레몬 간의 새로운 관계

          17-20 오네시모와의 화해 시도

          21-22 요점 요약과 추가적인 부탁

3. 맺는 인사(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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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03-02)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성도들

베드로후서 3장 8-18절


어릴 적에 시냇가에서 죽마고우들과 송사리를 잡으며 놀았습니다. 들과 산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다가 푸른 잔디에 누어 하늘을 바라보면, 어른이 되어도 절대로 변하지 말자고 약속했습니다. 아무리 손가락을 걸고 곧게 약속해도 세월이 지나면서 변했고, 그 약속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변하지 않은 약속이 있습니다.

 

본문은 주님의 날이 임하면 하늘이 사라지고 모든 것들이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베드로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그 날을 기다리라고 권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다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도리어 주님께서 재림하심이 늦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거짓 가르침과 관련한 베드로의 권면들(8-16)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고 느린 것 같아도 하나님의 스케줄은 정확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하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한 스케줄이 있음을 기억합시다.

8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14○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8-16)

주님의 재림의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예수님과 영적인 결혼식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린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할 성도로서 경건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불의한 세상과 정욕을 피하고 의가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간절히 소망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열린 문으로 들어가는 감격적인 날이 있을 것입니다.

(1) 종말에 대한 바른 관점 소개(8-10)

3-7절에서 거짓 가르침의 내용을 반박한 저자는 이제 종말에 대한 참 진리로 초점을 전환합니다. 세 가지 요소를 통해 전달합니다. 첫째 요소는 때와 관련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8). 하나님께 하루는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참조. 시 90:4). 시간에 대한 그분의 관점은 인간과 다릅니다. 사람은 시공간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그분은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창조주입니다.

저자는 두 가지 표현을 통해 이 요소를 강조합니다. (1) ‘이 한 가지’입니다. 원문은 '하나, 곧 이것’이란 강조 표현으로, 다른 것보다 우선하는 중요도를 전달합니다. (2) 외면하지(란타네토) 말라는 명령입니다. 선택적 증거로 진실을 외면하는 거짓 교사를 묘사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5). 그들과 달리 참 진리의 요소를 외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둘째 요소는 주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에 대한 이유입니다(9). 거짓 교사들은 이 상황을 근거로 약속에 대한 주의 신실성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놓친 것들이 있습니다. (1) 때는 하나님 주권에 속해 있습니다. 예수도 이에 대해 간섭하지 않습니다(마 26:36). (2) 주의 자비로움입니다. 재림과 심판이 진행되면 믿는 자 외에는 모두 부정적 판결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림을 늦춘 것은 많은 이들이 그분과의 구원 관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참조, 15). 은혜입니다. (3) 재림의 약속이 지체되는 것은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9절 표현은 만일 모든 사람들이 회개한다면 주님이 재림할 것이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분이 재림을 늦춰 자비로운 기회를 주는 것은 아직 죄인들이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는 거짓 교사들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역설적이게도 주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은 거짓 교사들 때문입니다. (4) 창조주의 의도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 곧 언약 관계 안으로 인도해 그분의 가족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참조 엡 1:5). 아담과 하와를 지을 때나 지금 사람의 생명을 창조하실 때도 그분의 의도는 동일합니다. 그분의 선한 의도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창조주께 반역하는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 요소는 주의 재림과 심판의 확실성입니다(10). 마치 도둑이 오듯 그때를 재단하거나 예측할 수는 없지만, 그 날은 분명히 옵니다. 그 때는 하늘이 급하게 달려가는 듯 큰 소리로 사라지고, 모든 물질은 뜨거운 불에 풀어질 것입니다. 기존 질서가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새 질서가 창조됩니다. 또한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 즉 모든 세상 역사와 사람들의 행함이 그대로 드러나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2) 바른 가르침에 근거한 권면들(11-13)

주의 재림에 대한 바른 가르침(8-10)에 근거해 독자를 권면합니다. 내용 이해를 위한 요소들은 구조에서 나타납니다. 이 구조에 의하면 저자의 권면은 모든 것이 불에 풀어져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다 드러날 미래 사건을 전제로 합니다. 앞부분 내용이며 독립 속격으로 제시됩니다. 권면의 초점은 독자가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입니다. 특별히 진리에 근거한 거룩한 삶의 모습과 경건에 대한 것입니다. 삶의 모습(아나스트로파이스)은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을 묘사할 때(2:7) 사용한 단어고, 경건은 멸망 받을 사람들의 태도(2:5, 6, 3:7)와 반대 모습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전제로 그분 안에서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라는 말입니다(1:3,6,7), 멸망 대신 구원의 판결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1:10-11). 더 나아가 이런 삶은 두 가지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분사를 통한 첨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을 기대하고 앞당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 날을 앞당긴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기 위해 저렴을 늦추고 있기 때문에(9), 만일 독자들의 증거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한다면 그 때가 당겨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참조, 마24:14; 사 66:18-22).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계획의 완성이 신자의 삶과 증거를 통해 앞당겨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구원받은 신자를 아직 이 땅에 살게 하신 의도가 여기 있습니다. 여전히 때는 그분 주권에 속해 있지만, 그분의 시간표에 기여할 수 있는 여지를 주신 것은 은혜입니다. 이후 저자는 권면을 강조하기 위해 주의 재림과 심판날을 부연합니다(12b-13).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불로 녹아 새 질서가 만들어질 그 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창조주이자 새 언약 관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신실함과 사랑, 곧 그분의 ‘의’를 영원히 경험할 그날, 신자인 ‘우리’는 그 약속의 성취를 기대하며 삽니다.

(3) 거짓 가르침과 관련한 결론적 권면들(14-16)

거짓 가르침과 관련해 결론적 권면을 합니다. 12b-13절에서 언급한 주의 재림 상황을 근거로 두 개의 명령법을 사용해 전달합니다. 첫째, 그 때를 기다림으로 그분 앞에서 평안 가운데 점 없이 흠 없이 발전되기를 힘쓰라스푸다사테, 14). 최후 심판을 전제로 그분 앞에서 긍정의 판결을 받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행함의 차원이지만, 선행으로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단어를 통해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굳게 하라는 1:10 내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로 옮겨와 그분과의 관계 안에 있기에, 그 관계의 온전함을 경험할 수 있도록 조심해서 살라는 말입니다. 둘째,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임을 생각하라(15). 9절 내용에 근거한 생각 차원의 명령입니다. 재림에 대한 진리와 하나님의 의도를 바르게 헤아리고 살라는 말입니다. 바른 관점이 중요함을 확인시킵니다. 이어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 내용을 이 명령들의 근거로 언급합니다(156-16). 그 내용이 무엇인지 언급하진 않았지만, 주목해야 할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바울의 권위 인정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주어진 지혜’, 곧 구약 예언(1:21)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썼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편지를 다른 성경들과 같은 수준으로 묘사합니다(15). 편지에 신적 권위가 있다는 말입니다. 독자들이 따라야 할 사도의 가르침(2) 속에 바울의 편지가 포함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둘째, ‘너희’에게 썼다는 표현입니다. 비록 바울의 편지를 직접 받은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이 편지 내용을 알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셋째, 바울의 편지는 ‘이런 일들’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합니다. 현 문맥에 의하면 주의 재림과 심판(예. 살전 5:1-10; 살후 2:2-3:2)에 대한 것과 구원에 근거한 바른 삶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넷째, 일단의 사람들이 바울의 편지 중 알기 어려운 어떤 부분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마치 구약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듯(참조. 1:20), 사도의 진리를 왜곡해 멸망으로 가는 이들입니다. 특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 중에서 그렇습니다. 이들은 바른 진리를 배우지 못한 자이거나 거짓 교사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분별력 없는 자들입니다(2:14). 저자가 이처럼 바울의 예를 든 것은 자기 가르침이 진리임을 확증하는 동시에 바울의 편지도 왜곡하는 거짓 교사들의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편지 마무리 명령과 송영(17-18)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지연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오래 참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멸망치 않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은 불평할 때가 아니라 감사해야할 때입니다. 게으르고 방종할 때가 아니라 깨어 근신할 때입니다. 그 날을 더욱 간절히 사모할 때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토록 누릴 모습은 거룩함과 경건한 삶입니다.

17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17-18)

편지 전체를 마무리하며 마지막 명령을 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사도의 진리와 거짓 교사들의 특징과 가르침에 대한 것을 모두 알았기에 무법한 자들의 유혹에 이끌려 구원과 진리 안에 굳게 서 있는 상태에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앞 1:10-11절 내용의 반복입니다. 줄째, 오직 주와 구원자인 예수 메시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할 뿐 아니라, 거짓을 분별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역시 1:1-10 내용입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1) 주의 재림과 그에 근거한 신자 삶에 대한 진리를 바탕으로 (2) 거짓 교사들의 영향력을 분별하고 (3) 하나님 안에서의 경건한 삶을 지속적으로 굳건하게 살아가라고 권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들이 회개할 때까지 참하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이 유혹하는 삶 속에 흔들리지 않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의 약속은 변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로 변질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 도둑 같이 오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심판과 구원에 대한 약속을 기억하며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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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03-01)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

베드로후서 3장 1-7절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입니다. 인간 이성의 능력은 매우 탁월해서 다른 피조물들이 누릴 수 없는 독보적인 지위를 확립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이성은 초월적인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말씀에 의해서 자신을 들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인간의 이성을 복종시켜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대부분 할애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을 조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주장이 왜 틀렸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다양한 이론보다 말씀으로 증명합니다. 말씀대로 세상이 창조되고 또 심판이 수행되었던 것을 역사가 증거한 것입니다.

 

저자가 편지를 쓰는 이유(1-2)

현대인들은 합리적인 이성을 앞세워 성경의 말씀을 취사선택하고 합니다. 하지만 이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이성은 결코 그것을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을 능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 앞에 겸손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1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1-2)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표현으로 거짓 교사들(‘그들’)에서 독자들(‘너희’)에게로 초점을 이동합니다. 이 부분의 역할은 두 가지 요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지금까지 보여준 논리 진행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자들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 편지(‘둘째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1) 진리와 관련해 주의 재림과 심판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2) 세상을 좇아 자기중심적으로 방탕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저자는 바른 삶에 대한 가르침을 먼저 제시합니다(1:3-11). 이후 또 다른 문제인 진리 차원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저자는 잠시 다른 내용을 언급합니다. 자기 가르침을 소개한 이유와 자기와 구약 예언의 권위를 확인시키는 것입니다(1:12-21). 그러고 난 후, 거짓 교사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상술합니다(2장). 주된 초점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그들의 존재와 삶입니다. 이제 드디어 진리 차원을 다룰 차례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자기가 편지 쓴 이유를 또 소개합니다(3:1-2). 이후 3:3부터 비로소 그들의 가르침을 반박합니다.

전체적으로 (A) 저자의 바른가르침 1(삶에 대해: 1:3-11) - (B) 가르침의 이유와 권위 확인(1:12-21) - (C) 거짓 교사들의 존재와 삶지적(2:1-22) – (B') 가르침의 이유와 권위 확인(3:12) - (A') 저자의 바른 가르침 2(진리에 대해: 3:3-18) 구조입니다. 이 속에서 3:1-2은 마치 한 박자 쉬고 다음 도약을 준비하는 느낌입니다. 둘째, 1:12-21과의 연관성입니다. 이 둘은 여러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독자를 일깨우기 위해 권면하고(1:13; 3:1), 독자를 기억하게 하며(1:12, 13, 15; 3:1-2), 사도의 가르침(1:16-18; 3:2)과 구약 예언의 권위 (1:19-21; 3:2)를 언급한 것 등입니다. 특별히 거짓 교사들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마다 이런 내용들을 언급한 점, 더 나아가 편지를 쓴 이유라고 소개한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 부분 내용에 집중해 교회 문제를 대하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무게감을 가진 저자의 가르침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가르침의 출처를 분별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배우는가가 중요하다. 저자는 사도와 구약 예언자의 가르침을 잘 따르기를 요청합니다. 둘째, 기억하는 믿음을 놓치지 말라.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삶을 살아갑니다. 한 번의 믿음으로 끝나는 과정이 아니기에 지속적으로 진리를 기억해 그분과의 관계 안에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셋째, 신앙의 삶의 시작은 바른 생각입니다. 저자는 독자의 '순전한 생각'을 일깨우기 위해 편지를 쓴다고 합니다. 넷째, 진리를 삶으로 표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3:1-2에 언급되진 않았지만, 저자가 첫 번째 가르침으로 전한 내용입니다(1:3-11). 또한 자기가 죽기 전에 그 가르침을 상기시키고 싶다고 말한 것(1:12-15)도 이 요소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독자는 이 편지 전체를 읽고 거짓 교사를 조심해서 이런 요소들에 집중해 살아야 합니다.

 

주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거짓 교사들의 조롱(3-4)

성도들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중심을 잡는 것입니다. 성도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 대산 세상에 규칙과 방법을 비판 없이 따른다면 그것은 이미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깊이 믿으며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3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3-4)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내용에 대해 다루기 시작합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1:20에서 예언을 사사로이 해석하면 안 된다고 말할 때 사용했던 것인데, 이 부분에서는 주의 재림과 심판을 거절하는 거짓 교사들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합니다. 독자가 알아야 하는 내용은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조롱하며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주목할 표현이 있습니다. 첫째, 말세입니다. 직역하면 ‘마지막 날들에’입니다. 구약은 최후 심판을 수반한 구원이 완성되는 때를 의미하지만, 신약은 예수의 사역으로 종말이 시작된 것으로 여깁니다. 역사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부활(참조. 단 12:2)이 예수를 통해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말들과 주의 재림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며, 그들의 존재가 임박한 주의 재림의 증거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재림이 없다는 거짓 교사들의 이해와 반대입니다. 둘째, ‘조롱하는 자’란 표현입니다. 꼭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거짓 교사들(2:2)이나 멸망의 종들(2:19)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표현을 쓴 것은 진리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저자는 조롱하는 거짓 교사들을 두 가지로 묘사됩니다. 하나는 자기 정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정적 심판 대상을 묘사한 2:10과 같은 표현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의 요약이며, 주의 심판 대상임을 재차 확증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폄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대상들이 도리어 그분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들에게도 논리가 있습니다. 조상들이 죽은 후 긴 세월 동안 심판의 경고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은 창조 이후 지금까지 변한 게 없습니다. 내일도 그럴 것이니 주의 심판은 없다는 논리입니다. 자연 현상을 보면 그럴듯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5-7)

하나님계서는 시간을 초월하시고 영원히 현존하신 분입니다. 천년의 장구한 세월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하루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인간의 시간 개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의 천년이 하나님께는 하루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 계산은 하나님께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5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5-7)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그 말씀대로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보존하신 그 말씀의 권능으로, 죄악 가득한 노아 시대의 땅을 물로 덮어 심판하셨던 그 말씀의 권능으로 마침내 말씀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세상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살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역사의 끝에 구원과 심판을 통해 그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1) 세상의 기원에 대한 설명(5)

‘왜냐하면’이란 접속사로 그들 생각의 이유를 설명하고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저자가 진단한 그들 주장의 1차적 문제는 방법론의 오류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헬라어 어순과 달라 번역 과정에서 순서가 바뀌었지만, 5절 원문은 ‘이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의 관심을 피한다’는 표현이 먼저 나옵니다. 대명사와 생략된 주어를 고려해 의역하면 ‘자신들의 주장(이것)을 원하기 때문에 저자가 제시한 내용(그것)이 거짓교사들의 관심을 피해간다’입니다.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다른 증거는 눈감는다는 말입니다. 논리와 이성을 중심으로 사도들과 예언의 진리를 비판했지만, 정작 스스로에게는 자신들의 방법을 일관성 있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저자는 계속해서 그들이 외면하는 세상에 대한 또 다른 진실을 소개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하늘과 땅의 항존성을 근거로 주장하기에, 저자 역시 하늘과 땅을 예로 들어 반박합니다. 거짓 교사들 논리에 세 가지 요소를 추가해 설명한다. 첫째, 성경과 예언의 권위 인정입니다. 저자의 반론 내용은 거짓 교사들이 무시한 성경 내용들입니다. 둘째, 하나님입니다. 세상은 그냥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을 물로부터 물을 통해 세우셨습니다(5). 물과 분리해 땅이 드러나게 한 둘 떠날 창조의 내용입니다(창 1:9). 창조주의 말씀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의도와 관계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으로 시작된 세상은 또한 말씀으로 유지됩니다. 거짓 교사들이 주장하는 세상의 일관성도 말씀으로 드러난 그분의 신실성, 곧 의로움의 결과입니다. 셋째, 심판, 곧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평가입니다. 그들은 세상이 창조된 이후 늘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2) 과거 물 심판(6)

과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홍수로 멸망한 적이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평가자입니다. 창조 과정에서 말씀에 대한 피조물의 긍정 응답에 ‘선하다’고 평가하셨고, 이후 부정적으로 응답하는 아담과 하와(창 3장)와 세상(창 6-9장)에 대해 부정적 심판을 보이셨습니다.

(3) 장차 올 심판(7)

하나님께서 과거에 불경건한 자들을 평가하셨다면, 지금 존재하는 불의한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 대한 심판 방법이 물에서 불로 달라지지만, 그분은 반드시 평가하신다는 것을 추론해야 합니다. 그 심판이 현재 진행되지 않음은 장차 있을 마지막 심판 때까지 그분이 세상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 점을 놓쳤습니다. 이성적이고 나름의 근거를 주장하지만, 중요한 진실에 눈감고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 없습니다. 저자의 이런 설명은 ‘무조건적 믿음’을 강요하는 것과 결이 다릅니다. 오히려 합당한 추론과 이성을 사용해 거짓 교사들 주장의 맹점을 납득 시킵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그분이 계시한 것에 근거해 생각하고 기억하고 추론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지금도 말씀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이 죄악 가운데 살아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순간부터 붙들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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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02-02)


멸망할 짐승 같은 거짓교사들

베드로후서 2장 10-22절


‘그리스도인’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곳에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풍성함을 맛보지 못하고 세상에 끌려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알면서도 세상에 끌려 다니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무엇에 이끌려 살고 있습니까? 명예, 권세, 물질, 이성 등에게 모든 관심이 쏠려 있다면 그것에 끌려 다니는 사람입니다.

 

1-9절에 이어 거짓 교사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갑니다. 베드로는 거짓 선생들의 특성은 짐승과 같이 지각없는 행동을 합니다. 음란하고 탐욕스러운 성격을 가지고 거짓된 지식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대한 상응한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들은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불의함(10-16)

하나님께서 교만하여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권위 까지 무시하여 자기 멋대로 사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다른 삶을 무시하고 깔보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며 자신의 멋대로 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겸손 합시다.

10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 11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도 주 앞에서 그들을 거슬러 비방하는 고발을 하지 아니하느니라 12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14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15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10-16)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이 자유를 강조하면서 영적 지도자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적 탐닉을 부추겼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많은 모습들이 있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큰 죄악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은 두 가지로 특징지어 집니다.

첫째는 자신들을 높이 평가하는 교만합니다. 그들을 거만함이 대단해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심지어 자신을 신처럼 여기며 하나님의 종인 천사를 함부로 말하기도 합니다. 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목소리만 크고 다른 사람에게 욕까지 하는 무례한 태도를 보입니다.

둘째는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며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고, 바람과 같이 돈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대낮에서 술을 즐기고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방탕한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무지의 결과는 무섭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성 없는 짐승처럼 육체의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생각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발람 선지자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 못하는 나귀의 입을 열어 선지자의 잘못된 행동을 막으셨습니다. 발람은 불의의 삯에 미혹되어 나귀보다도 못한 하나님의 뜻을 더 알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나귀에게 미친 행동을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도 더러운 육체의 정욕에 미혹을 당해 짐승만도 못한 영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도살한 짐승같이 자신의 심판 날을 앞당기고 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짐승처럼 멸망할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 역시 진리와 삶이 함께 망가져 있기에 진노의 대상이며, 그들을 따르는 자들 역시 동일한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

(1) 거짓 교사들 1(10b-12): 천사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방함

하나님의 부정적으로 심판 받을 대상인 거짓 교사들 상황을 부연합니다. 첫 모습은 천사들에 대한 태도입니다(10b-11). 그들은 ‘영광들’로 표현한 선한 천사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방합니다. 실제로 선한 천사들은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졌음에도 하나님 앞에서 거짓 교사들을 비방하는 판단을 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얼핏 보면, 이런 설명은 문맥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천사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의 심판 기준이 아닙니다. 그들을 무시해도 심판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의 이런 모습을 언급했습니까? 핵심은 그들의 태도 이면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당돌하고 교만해서 천사들의 권위를 업신여기는데, 그 이면에는 지적 교만과 어리석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성 없는 짐승들처럼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비방합니다. 이성적 사고를 근거로 천사들의 존재를 믿지 않고 비방의 말을 쏟아놓은 듯합니다. 천사들에 대한 이런 태도도 문제지만, 그들의 태도가 천사를 넘어 하나님의 미래 심판 영역까지 이어지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성적 관점에서 보면 주의 재림과 심판도 납득되지 않는 것이기에, 그런 가르침을 사도들이 지어낸 헛된 신화로 치부하고 조롱한 듯합니다(1:16;3:3-4). 바로 여기서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부정적심판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천사와 관련한 거짓 교사들의 모습은 주님을 부인하는(1) 배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에 근거한 교만으로 망할 것입니다. 이성 없는 짐승들이 살찌우다가 때가 되면 잡혀 죽을 운명을 경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2) 거짓 교사들 2(13-16) ; 불경건하고 불의한 모습

거짓 교사들의 또 다른 모습은 삶의 타락입니다. 그들은 방탕한 연회와 성적 문란과 탐욕으로 묘사되는 자신들의 불의한 삶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13).

베드로는 그들의 삶을 생각-눈-마음-삶의 길로 연결되는 인상적인 방법으로 소개합니다. 첫째, 생각과 관련하여 그들은 낮에 행하는 무절제한 연회를 즐거움으로 여기는 자들(헤구메노이, 13)입니다. 심지어 교인들과 함께하는 연회, 예를 들어 주의 만찬이나 함께 즐기는 애찬을 거짓 즐거움이 가득한 그들만의 연회로 만들려 합니다. 절제와 경건의 모습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보다 자기를 더 중시하고 육체를 좇아 타락한 즐거움만을 추구합니다(10). 둘째, 눈과 관련해 그들 눈에는 음란과 쉬지 않는 범죄가 가득합니다(14a). 교회 안에 굳세지 않은 영혼들을 죄의 길로 유혹합니다. 셋째, 마음과 관련해 그들은 탐욕으로 길들여진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14b). 마음(카르디아)은 사람 인격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 누구를 두는가에 따라 관계성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모신 자는 그분과의 새 언약 관계 안에 있고, 자기를 중심에 둔 자는 그분과 관계가 없습니다. 특별히 탐욕은 대표적 자기만족 표현이기에 탐욕을 중심에 둔 자는 우상숭배자입니다(눅 16:13). 이런 면에서 거짓 교사들은 저주의 자식들입니다. 넷째, 삶의 길과 관련해 그들은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불의의 삶을 사랑한 발람의 길을 걷고 있는 자들입니다(15-16). 탐욕에 대한 부연입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미디안 왕 발락의 돈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러 가다가 나귀에게 책망 받았습니다(민 22:21-35).

베드로는 이 이야기를 통해 거짓 교사들의 탐욕과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말 못하는 나귀도 탐욕 때문에 죽으러 가는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막았는데, 정작 그들 자신은 탐욕의 결과를 몰랐습니다. 거짓 교사들을 이성 없는 짐승으로 묘사한 바 있는데(12), 여기서는 짐승보다 어리석은 존재로 묘사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속에 있는 악함을 몸을 통해 삶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자입니다. 안과 밖이 다 타락한 죄인인 것입니다.

 

거짓 교사의 거짓된 가르침(17-22)

예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악하고 더럽게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는 몰라도 믿는 사람들은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아는 인격적인 지식을 통하여 세상의 더러운 것들에서 벗어났습니다. 다시 그 더러운 것들에 빠지지 않도록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17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18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9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20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17-22)

거짓 교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창하고 신선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물 없는 샘’처럼 알맹이 없고 껍데기뿐인 거짓 진리에 불과합니다. 거짓 이론과 허탄한 자랑과 속임수임으로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처럼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지속성이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또한 범죄한 천사들처럼(4) 깊은 어둠에 던져서 주님의 재림 때 영원한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로 성도들을 유혹해 잘못된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에게 대해 몇 가지 요소를 통해 그들의 미혹 과정을 묘사합니다. 첫째, 유혹 대상은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사람들입니다. 세상 어둠의 영역에서 갓 건짐을 받은(1:4) 새신자들이나 믿음의 기초가 역한 자들입니다. 둘째, 유혹 방법은 허무맹랑하고 교만한 말입니다. 이성과 논리에 호소해 영적 존재들이나 주의 재림과 심판 등의 진리의 요소를 왜곡한 말일 것입니다. 셋째, 유혹 내용은 참 자유에 대한 약속입니다. 삶의 변화와 해방에 대한 것으로 자기중심의 자유분방한 삶을 소개하는 것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이런 요소들을 담은 그들의 가르침은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가르치는 자들 자체가 죄의 종입니다(19).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데, 그들은 죄를 이길 수 없고 이기고 싶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죄에 굴복해 자유가 없는데 타인에게 자유를 약속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이 추구하는 삶은 불의하고 불경건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이며, 구원받기 이전의 죄 있는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구원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심각합니다. 베드로는 예수 믿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얻은 후 다시 세상 더러움을 주인 삼고 옛 관계 가운데로 돌아가는 것을 엄하게 경고합니다(20-21). 차라리 구원의 과정을 아예 경험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더러운 구덩이로 다시 가는 것과 같습니다(잠 25:11). 끔찍합니다. 이런 면에서 거짓 교사와 그들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윤리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를 왜곡해 하나님을 거절하고 그것을 자기중심의 삶으로 표현하는 배교입니다.


언제나 말솜씨가 좋은 사람들에게 넘어가기 쉽니다. 그것이 감언이설인줄 모르고 말입니다. 이러한 습성 때문에 지도자들을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신 교회가 악한 영의 이단들의 잘못된 교훈에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자신의 사명에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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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02-01)


거짓 교사들의 특징과 결과

베드로후서 2장 1-9절


학교에서 선생님께서 제자들에게 잘못 가르쳐서 문제가 틀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특히 인생을 좌우하는 대학입학 시험이라는 아마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항의하고 대단한 문제로 번질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부분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을 가르치게 되면, 개인적으로는 영성은 파괴되고 구원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사회적으로는 대단한 파급되어 혼란을 좌초할 것입니다.

 

본문은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가운데 거짓 선지자들이 나온 것처럼, 초대교회 당시에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출현할 것입니다. 그들은 옛적에 거짓 선지자들이 결국 심판을 받았듯이 거짓 교사들은 심판을 받고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거짓 교사에 대한 분별력이 있길 원합니다.

 

거짓 선지자와 교사들의 특징(1-3)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만 당신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 해석하려 할 때 이단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죄의 은총을 망각하면서 열정이나 감사 그리고 영적 열매도 없다면 이단을 노려보고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집중할 때 흔들림이 없습니다. 바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1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3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1-3)

베드로는 생의 마지막을 예건하며 신앙의 후배들에게 바른 지식을 가짐으로써 신성한 성품으로 변화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장 큰 방해가 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단적 교리를 가르치는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를 파악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1) 거짓 교사들의 영향에 대한 경고(1a)

베드로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런 자들이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라고 확언합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 중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하고 미혹해서 배교(背敎)시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였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미혹한 영은 초대교회에도 거짓 교사들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몇 가지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구약시대 사람인 거짓 선지자들을 언급한 점입니다. 이들은 당시 교회와는 상관없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먼저 소개합니다. 둘째, 거짓 교사와 관련해 거짓 선지자들을 주절이고 거짓 교사들이 더 부각되는 구조로 설명합니다. 셋째, 독자 문제와 관련한 사람들을 거짓 교사로 부른 점입니다.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타납니다. 넷째, 거짓 교사의 존재를 미래형으로 기술한 점입니다. 이런 독특함에도 저자의 표현은 교회 문제에 대한 탁월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의 거짓 선지자를 언급한 것은 구약 예언에 대한 1:19-21 내용 때문인 듯합니다. 참 예언이 하나님 기원의 메시지를 성령으로 전달하는 것(1:20)이기에 거짓 선지자들은 선포의 기원과 전달 방식에 있어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을 부인하고(겔 13장) 자기 이익을 위해 평안만 전했습니다(렘 6:13-14; 미 3:5). 그들은 하나님의 부정적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렘 14:13-15). 문제는 이들이 하나님 백성 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을 미혹해서 그분께 돌아가는 길을 막아 멸망을 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런 모습이 과거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상기시킵니다. 비록 교회에서 문제 일으키는 자들이 예언을 무시했기에 ‘선지자’ 대신 ‘교사’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들의 본질과 행태는 동일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에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재림과 심판에 대한 가르침을 무시하고 오직 평안과 쾌락만을 추구합니다. 그렇기에 심판으로 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인 독자들 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독자들도 망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은 거짓 교사들에 의한 폐해와 결과를 짐작케 합니다. 이런 연결은 4-8절에서 과거의 예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 방식과 잇닿아 있습니다.

(2) 거짓 교사들의 특징과 운명(1b-3)

거짓 교사들의 특징을 소개합니다. 그들이 ‘너희’ 안에 있다는 제로 시작합니다(la). 어떻게 교회 속에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점은 교회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 가지 차원으로 그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그들 개인에 대해서입니다(16). 그들은 이단 가르침을 비밀리에 교회 안으로 유입시킵니다. 저자는 멸망이란 표현을 통해 그 가르침의 끝이 부정적임을 말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계속 진리를 희석시킵니다. 심지어 자기를 구원하신 주도 부인합니다. 공개적 선포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교회 모임에서 축출되어 영향력을 끼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부분적인 왜곡과 그에 따른 삶의 모습으로 배교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교회 안 다른 성도들에 대해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극한 방탕의 삶을 따라가고(2a), 거짓말로 착취를 당하며 탐욕의 희생양이 될 것입니다(3). 거짓 교사들의 배교의 영향으로 성도의 삶이 망가지고 교회가 허물어진다는 말이다. 셋째, 세상 속 교회에 대해서입니다(2b). 삶이 망가진 성도와 교회는 세상에서 욕을 먹고 진리의 도, 곧 복음과 하나님 따르는 삶이 비방 받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세상을 하나님과 연결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일탈 수준에서 끝나지 않으며, 개인 차원의 배교가 성도와 교회를 흔들고 복음을 막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들에게 오래전에 결정된 그분의 심판은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36).

 

하나님의 심판의 예들(4-9)

주변의 말들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절대 거짓 가르침에 휩쓸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고 어떤 행동을 하든지,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진리만을 따르겠다는 의연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4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5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9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4-9)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를 드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심판이 임박했다고 말했지만 현실은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심판 받지 않고 있었고, 그들이 재림과 심판의 가르침을 조롱할 만도 했습니다(3:35). 저자는 하나님 심판의 확실함을 더 설명하기 위해 과거 역사를 통해 세 가지 예를 듭니다.

(1) 범죄한 천사들에 대한 심판(4)

첫째, 범죄한 천사에 대한 심판입니다(4). 노아 홍수와 관련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한 천사들입니다(창 6:1-4). 구약에는 이들에 대한 심판이 기술되지 않았지만, 유대교 전승을 담고 있는 에녹 1서 6-19장에 묘사되어 있고 유다서 6절에도 그 표현이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 천사들의 상태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때(계 20:10,14)까지 지옥에 감금당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단죄하셨지만, 완전한 심판은 유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거짓 교사들과 관련해 하나님 심판의 확실성과 유보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2) 노아 홍수 때의 구원과 멸망(5)

둘째, 홍수로 인한 심판입니다(5). 첫째와 달리 구원과 멸망이 함께 있습니다. 죄로 얼룩진 옛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와 그 식구들은 보존하셨지만 다른 이들은 멸망케 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심판 과정과 관련해 주목할 표현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와 관련해 사용된 ‘의’입니다. 노아가 의롭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의, 즉 심판을 행하실 창조주의 신실함을 선포했다는 말입니다(참조. 요세푸스 Ant 1:74).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을 묘사하는 불경건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신자의 경건(1:3,6,7; 3:11)과 반대 상태입니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의를 따른 심판으로 경건하게 사는 자는 구원받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벌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3) 소돔과 고모라 때의 구원과 멸망(6-8)

셋째, 소돔과 고모라 성을 잿더미로 만든 심판입니다(6-8). 둘째처럼 멸망과 구원은 함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했습니다.

‘경건하지 않은 자’라는 표현을 통해 그들이 홍수로 심판 받은 자들과 같은 상태였음을 말해줍니다. 또 무법하고 방탕한(아셀게이아, 2) 자들이라고도 묘사합니다. 이 역시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거짓 교사들의 상태와 같습니다. 반면, 롯은 구원받았습니다. 그의 특징은 ‘의로움’입니다. 노아에 대해 사용한 것과 달리,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합당한 반응을 의미합니다. 절대적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당시 세상과 구별되게 살았던 롯의 모습을 말합니다.

(4)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재진술(9)

4-8절의 예를 따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정리합니다. 두 가지 원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평가하는 분입니다.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피조물의 반응을 평가하셨고(창 1:4,31), 마지막 날 모든 것을 평가하실 것입니다(계 20:10, 12-13).

둘째, 하나님의 평가는 공정합니다. 그분의 의로움, 곧 창조주의 신실함에 대한 피조물의 반응을 기준으로 긍정 반응인 경건은 구원으로, 부정 반응인 불의와 불경건은 진노로 응답하십니다(참조. 롬 1:18). 이 과정에 불공정은 없습니다. 오직 행위대로 응답하십니다(참조, 롬 2:6-11;계 20:12).

셋째, 하나님의 심판은 때가 있습니다. 그분의 평가가 당장 나타나기도 하지만 미뤄지기도 합니다. 주의 재림으로 진행될 최후 평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평가를 게을리 하시거나 구원과 멸망의 판결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3). 단지 유보하고 계실 뿐이다.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함입니다(3:9). 이 원리들은 거짓 교사들에게 적용됩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음에도 창조주 하나님께 합당한 반응을 하지 않기에 진노의 대상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최후 심판을 유보하고 계실 뿐입니다.


세상의 지식은 잘못 배우면 다시 바르게 배워 수정할 수 있지만, 거짓된 교리에 학습되어지면 잘못된 진리를 빠지면 빠져 나오기 매우 힘듭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불의한 사람들을 벌하시고, 경건한 사람들을 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단들을 경계하며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바르게 배우고 제대로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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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01-02)


그리스도의 영광과 성경의 예언

베드로후서 1장 12-21절


무엇인가를 배울 때 계속해서 읽고 쓰며 반복하는 것을 ‘반복학습’이라고 합니다. 공부할 때 한 번만 보고 알면 잊어버리기 쉽지만, 계속해서 반복하면 쉽게 잊어버리지 않게 됩니다. 기독교 교육은 항상 반복교육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그리고 구원 받은 성도들의 삶에 대해 교육되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도 반복 학습 효과를 알았습니다.

 

앞서 언급한 신자의 삶에 대한 가르침(3-11절)을 부연합니다. 2:1부터 거짓 교사들 문제를 다루기 전에 저자의 가르침의 권위와 확실성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의도입니다.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2-15절은 독자를 향한 베드로의 태도와 마음을 전합니다. 16-18절은 예수님의 목격자임을 강조해 가르침의 권위를 확증합니다. 19-21절은 성경의 예언에 대한 태도를 다룹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기억(12-15)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후에도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베드로는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듯이 베드로는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고 천국에 가고 싶어 한 것입니다. 자신이 죽임당할 날이 임박했음을 알고서 성도에게 말씀을 일깨워 주려고 합니다.

12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2-15)

본문은 서신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진단하는 소아시아 문제는 거짓 교사들이 교회 내에서 종말과 성도의 삶에 대한 왜곡된 가르침을 퍼뜨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성도의 삶에 대한 바른 가르침을 첫 권면으로 제시했습니다(3-11).

다음 과정은 종말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나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반박이어야 할 것 같은데, 저자는 대신 권면의 이유를 소개하고 자기 가르침의 권위와 확실성을 부연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영향력을 분별할 수 있도록 분명한 근거를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크게 세 가지 영역을 추가합니다. 첫째, 12-15절은 독자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전해서 자기 가르침의 중요성을 각인시킵니다. 이런 의도는 여러 방식을 통해 전달됩니다. 첫째, 1인칭과 2인칭의 친밀한 대화 구도 설정입니다. 3-11절은 주로 신자의 삶이라는 객관적 주제에 대해 독자에게 명령하는 방식이었지만, 이 부분에서는 1인칭 단수 지시어를 사용해 ‘나와 너희’의 관계를 만듭니다. 어조도 명령법 대신자기 상황을 소개하는 다소 부드러운 방식을 사용합니다. 저자의 관심을 표현해 독자들 마음을 이끌어내기 위한 상황 설정입니다. 둘째, 독자들을 이미 진리 안에 서 있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12). 베드로는 편지 전체에 걸쳐 한 번도 독자들을 책망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 안에 있는 자로 인정하고, ‘그들’이라 부르는 거짓 교사들의 위험성을 경고할 뿐입니다. 3-11절도 명령법을 사용했지만, 책망은 아닙니다. 오히려 독자를 ‘형제’로 부르며 신자 삶에 대한 진리를 확인시켰습니다(10). 편지에서 거짓 교사들의 상황을 미래형으로 묘사한 것(2:1,2,3,12; 3:3)은 아직 그들의 영향력이 교회를 본격적으로 흔드는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영향력은 실재합니다. 이 상황에서 베드로는 독자가 여전히 진리 안에 있다는 신뢰를 전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영향에 대해 저자의 가르침에 계속 거하라는 간접 명령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양괄식 구조를 통해 전달합니다. 12절에서 항상 기억하게 하기 위해 3-11절 내용을 썼다고 말하고, 15절에서 다시 어느 때나 생각나게 하기를 힘쓴다고 합니다. ‘항상 기억하라’를 앞뒤에 배치한 반복을 통한 강조합니다. 저자의 가르침에만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넷째, 저자의 죽음에 대한 언급입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기억하라고만 해도 됩니다. 그럼에도 소개하는 것은 독자를 향한 저자의 강렬한 사랑과 의무감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저자는 임박한 죽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14). 자기가 죽더라도 독자들은 바른 진리를 기억해 그 안에 계속 머물게 하고 싶었습니다. 숨이 다하기까지 그 일을 계속하려 했고, 이제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진리를 확인시켰습니다(15). 저자는 독자들이 자신의 이 마음을 알아 자기 가르침에 집중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마치 자기 명령을 유언처럼 생각하고 항상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12-15절을 단순히 저자의 사역 변호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이 부분은 사역자와 성도의 관계도 잘 보여줍니다. 사역자는 성도가 진리 안에 계속 서기를 기대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고, 성도는 사역자의 그 마음을 헤아려 지속적 삶을 위해 진리의 가르침을 항상 기억하고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의 목격자로서 베드로 가르침의 확실성(16-18)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수많은 사람이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정리한 신학을 바탕으로 해석해야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 늘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16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16-18)

저자 가르침에 대한 두 번째 부연입니다. 12-15절이 독자와의 관계에 근거했는데, 16절 구조에 의하면 이 부분에서 저자의 초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가르침의 내용입니다. 예수 메시아의 능력과 재림에 대한 것이며, ‘알게 하다’ 동사를 사용해 독자들에게 전한 내용입니다. 편지에서 처음 등장하는 주제입니다(참조. 3:4,12). 3-11절에서 신자 삶을 다룰 때 언급하지 않았기에 별개의 가르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의 재림은 어둠의 통치 영역을 끝내고 구원을 완성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에는 창조주로서 모든 것을 평가하고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자의 삶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에 대한 감사로 새 언약 관계에 충실해야 하는 차원도 있지만, 최후 평가를 염두에 두고 조심해서 정성스레 살아야 하는 차원도 있습니다. 전자가 구원 과정의 과거(9)에 근거한 것이라면, 후자는 미래 완성(11)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두 요소 중 어느 한쪽을 놓치면 구원 과정과 신자의 삶은 사상누각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사도의 가르침은 구원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붙잡아 오늘을 바른 신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둘째, 가르침의 기원입니다. 두 분사절의 대조를 통해 전달됩니다. 독자에게 전한 주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은 교묘히 꾸며낸 신화를 따라 전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거짓 교사들이 이렇게 비방한 듯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의 위대함을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전했다고 합니다.

17-18절에서 그에 대한 설명을 추가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사역, 곧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과정에서 저자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거룩한 산에 올라갔을 때 경험한 사건입니다(마 17:1-8). 베드로는 예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16:마 17:2). 그분이 원래 소유하고 있던 것으로 부활을 통해 드러낼 영광이자 장차 다시 오실 때 보일 능력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17-18: 마 17:5). 예수님께서 구약(시 2:7; 참조. 삼하 7:12-14)에서 약속한 메시아라는 하나님의 확증이요 선포입니다. 이 두 경험은 주의 재림에 대한 저자의 가르침이 참이라는 것을 방증합니다. 장차 능력으로 재림할 영광의 예수, 하나님께서 친히 확증한 메시아 예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예. 마 24:44; 막 13:26). 이런 면에서 베드로의 가르침은 거짓 교사들이 폄하하듯 한갓 신화 속 허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기인한 진리이며, 그분들에 의해 반드시 실현될 실재입니다. 독자들은 이미 서 있는 그 진리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의 예언에 대한 확증(19-2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구원과 멸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절대 권위를 지닌 삶의 척도로 삼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계 22:7)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19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19-21)

저자의 가르침에 대한 세 번째 부연입니다. 재림에 대한 가르침은 구약 예언과 맥을 같이하고 있기에 권위와 확실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예언은 어두운 세상에서 버티고 살아가게 하는 소망의 등불과 같습니다(19). 문제는 신뢰성입니다. 성취함 없는 예언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신 18:22). 그렇다면 주의 재림에 대한 예언은 확실한 빛입니까?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한 열쇠는 예수입니다.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예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확증을 들은 베드로의 경험은 예언의 확실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재림과 심판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주의 날’(참조. 3:10)에 대한 구약 예언(예. 사 13:6,9; 겔 30:3; 욜 1:15; 2:11; 3:14; 암 5:18,20 등등) 역시 성취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구약의 예언은 확증된 예언이자 동시에 장차 성취될 예언이기도 합니다. 독자들은 그 예언이 온전히 성취되는 그날, 마치 새 날을 알리는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듯 그때까지 예언의 말씀에 집중하고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19).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주의 날이 없다고 말하는 거짓 교사들처럼 되면 안 됩니다. 예언은 사람들이 말한 것이지만, 하나님께 기인한 것으로 성령을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성령 안에서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과정과 예수의 존재와 사역의 관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 관점이 없습니다. 주를 부인하고(2:1) 탐심을 채우고자 성경을 아전인수로 해석해서 사람들을 이익의 도구로 삼습니다(2:3). 세상을 즐기는 삶을 포기하지 않아 미래 심판의 진리를 부인합니다(3:3-4). 성경과 삶을 대하는 동기와 태도가 복음과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실제 경험으로 복음의 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저자의 가르침을 따라 주의 약속을 담고 있는 구약 예언을 기억하고(3:2), 거짓 교사의 교훈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예수님께서 오신 메시아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가 가셨던 것처럼 다시 오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고대하면서 영적 진보를 이루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신 성경을 통해 날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데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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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3-01)


여호와께만 있는 구원

시편 3편 1-8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신앙 그 이유 하나만으로 직장이나 사회에서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또 주위에서 나를 미워하고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 내 원수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어려움 중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 전체의 서론격인 1-2편의 ‘행복’의 문을 통과했습니다. 3편은 원수들의 위협에 따른 고통과 좌절을 정직하게 호소하는 ‘탄식시’입니다. 이후 7편까지 시편의 많은 분령을 차지하는 탄식시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행복한 사람’에게도 고난과 시련은 휘몰아치는 광풍처럼, 때로는 낯선 방문객처럼 찾아옵니다. 3편은 거친 현실에서 주님을 향해 탄원하며 평정을 찾아가는 진실한 노래입니다.

 

많은 대적들을 불평하며 탄식(1-2)

어느 때보다 어려운 절박한 상황에 빠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뜻하지 않게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반대로 조롱 당하는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모두 들 돌린 건 같은 상황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한 가지 잊지말아야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1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1-2)

시편 3편에 첫 두 절은 시인을 둘러싼 적들에 대한 분노와 탄식이 동의적인 평행구로 배열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표제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이라고 붙습니다. 제목을 제외한 시행의 첫마디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대적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음을 탄식합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도망쳤을 때 쓴 시로서 그의 힘든 마음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 너무 많은 이들이 자기를 대항하려고 일어나고 있다(1)고 탄식합니다. 시인은 어떤 비밀도 숨길 수 없는 분 앞에서 위험을 무릅쓴 상태입니다. 시인은 자신을 그럴싸하게 꾸미지 않습니다. 다른 탄식시들은 이보다 더 거칠고 위험스러워 보일 때도 있습니다. 시인이 불평과 탄식의 언어를 쏟아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대적이 누구입니까? 구약에서 보통 ‘대적’은 정치적 군사적 차원에서 적대 감정을 가진 이들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에게 적의를 가진 원수나 경쟁자들 같은 자들이지 국가적인 전쟁 상황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목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칠 때 지은 시라고 소개합니다. 이때는 아마 이스라엘의 민심이 다윗이 아니라 압살롬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했을 즈음일 것입니다(사무엘하 15:13).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여호와께 고합니다.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2)고 조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셔서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그를 위해 일하지 않으신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빈정거림이 괴롭습니다. ‘어찌 그리 많은지’,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많다’라는 형용사를 세 차례나 반복할 만큼 사람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말로 왕의 사기를 짓밟습니다. 시인은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입니까?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하나님의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탄식의 목소리로 호소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실 하나님을 확신(3-4)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난의 때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자책합니다. 때로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기도 합니다. 성도라고 고난이 피해가지 않습니다. 성도이기에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무리 큰 고난의 때에도 부르짖고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3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3-4)

그러나 시인은 거친 탄식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는 방향을 바꿔 여호와께 신뢰를 고백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당신은 나를 둘러싼 방패십니다. 나의 영광이시고 내 머리를 들어 올리시는 분입니다’(3). 탄식은 어느새 신뢰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시인이 갑작스럽게 마음을 고쳐먹은 것입니까? 그보다 탄식은 신뢰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 없이 이름을 부르며 탄원의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다시 부르는데, 이제 ‘당신’이라고 호명합니다. 시인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당신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만남을 확신합니다. 자신을 객체화하지 않고 1인칭 소유격 대명사(‘나의’)를 반복하며 하나님과 자신의 거리를 밀착시킵니다. 시인에게 여호와는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실 방패이고 영광입니다. 영광은 스스로 취할 수 없습니다. 왕의 영광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니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시인 다윗은 자기의 위엄과 가치가 회복될 것을 믿습니다. 왕은 원수들과 많은 이들의 공격을 받았어도 여호와는 나의 머리를 드시는 분임을 확신합니다. 메리를 드는 것은 법정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 죄가 없음을 인정하는 행위거나 이전의 지위로 복귀됨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공적으로 억울함을 풀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 회복시키실 여호와를 굳게 믿습니다.

시인의 확신은 더 커졌고 여호와를 굳건히 붙듭니다. ‘나의 목소리로 내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가 그의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십니다’(4). ‘거룩한 산’은 시온입니다. 다윗 왕의 대관식이 거행된 장소입니다(시편 2:6). 거룩한 산 시온, 곧 예루살렘은 모든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중심이고, 우주의 중심이며, 다윗과 솔로몬의 위대한 정치적 힘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옛적 다윗의 조상들에게 시내산에서 계시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임재의 처소를 시온으로 옮기셨다는 데 있습니다(시편 68:8,17). 그러므로 이곳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로서 예언자들도 정의와 평화의 세계 질서가 실현될 곳으로 간직합니다(이사야 2:2-4).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5-6)

사람은 대게 조금이라도 불안한 상황에 처하면 근심 걱정에 싸여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기도하면서도 근심으로 잠 못 이루고, 겹쳐 오는 고난에 하나님마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거룩한 산 시온에 자신을 왕위에 세우셨으니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5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5-6)

시인은 내가 눕고 내가 잠자고 다시 내가 깨는 것이 여호와가 자기를 붙들고 계시는 증거라고 노래합니다(5). 시인은 누구의 간섭과 방해 없이 오로지 자신의 주체적인 고백을 강조하고 싶었습니까? 없어도 문장 구성에 문제없지만 1인칭 주격 대명사 ‘내가’를 덧붙입니다. 사람들이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2)고 비아냥거리는 말이 틀렸다고 강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는 사람들의 적의에 찬 말에 무너지지 않고 평안히 일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증거입니다. 그는 밤의 어둠이 휴식이 되도록 잠들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깨워 생명을 지켜주시는 분이라고 확신합니다. 시인은 분통 터지는 마음, 고통과 분노를 솔직하게 표현한(1,2) 것만큼 강인합니다. 시편의 이러한 솔직함과 분노의 표현은 소망으로 이어지는 히브리 시인들의 문학적인 관행입니다. 시인의 대담한 표현은 계속됩니다. 시인은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여호와를 향한 그의 신뢰가 평정심을 찾게 했습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무리의 사람들’(새번역은 ‘천만대군’)이 나를 에워싸 끌어내려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6). 시인은 어찌하여 나의 대적이 많은지를 탄식했지만, 이제 적대적인 위기가 절정에 이른 순간에도 두렵지 않습니다. 시인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져도 잠자고 다시 깨어날 수 있을 만큼 깊은 고요와 확신에 차 있습니다.

 

원수의 패배를 구하는 기도(7-8)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방패가 되사 빗발치는 원수의 화살 속에서도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영광이 되실 때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머리를 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낙심하고 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도 얼굴을 당당히 들고 걸을 수 있게 하십니다.

7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7-8)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승리를 간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7절 시행의 첫 소절은 강렬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7a) 이 말은 자기를 치려 하는 자들이 많다고 탄식을 것과(1) 대조됩니다. 시인은 지난날 여호와가 행하신 일을 회상하듯 말합니다. ‘당신이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셨고, 악인의 이를 꺾으셨습니다’(7bc). 특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이 말은 옛적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하고 전쟁하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나갈 때 했던 말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민수기 10:35), 시인은 시내산에서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떠날 때의 상황을 현재화합니다. 그는 자기 조상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현재로 소환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불확실성과 불안을 가라앉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간구합니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있으니 당신의 복을 당신의 백성에게 내려주시기를 원합니다’(8). 시인은 자기구원에만 관심 갖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에게 복이 내려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는 통치자로서 갖는 책임의식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탄식을 멈추고 ‘구원’과 ‘복’을 하나로 연결시켜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구하는 ‘복’은 시편 1편의 ‘복’, 곧 ‘행복’과 다릅니다. 이 ‘복’은 흔히 신의 은총을 구할 때 사용하는 축복(blessing)이며 하나님의 선물 개념입니다. 구원의 주체가 여호와이듯 복의 주체도 하나님이기에 간청합니다. 이것은 구원과 복이 하나님 활동의 핵심임을 밝힙니다. 구원은 삶에서 경험하는 구체적인 위기나 억압의 현실에서 도와주고 다양한 필요를 채워줌을 뜻합니다. 복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가능성들을 지속적으로 공급해주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후에도 ‘복’을 구하는 시인들의 기도는 계속됩니다(5:12;28:9;29:11;67:1,6,7;115:12-13; 133:3;147:13). 무엇보다 시인의 최종 간구는 백성을 향한 공동체적인 복을 요청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마지막 시행은 믿음의 공동체성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빛을 비춰줍니다.


피폐한 삶에 오래 노출되다 보면 하나님의 응답이나 존재에 대해 무덤덤해질 때가 많습니다. 더는 믿음을 갖고 기도할 여력도 사라지고, 응답이 지체되면 그나마 있던 믿음의 뿌리도 흙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향한 구원이 반드시 다가옴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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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5-01)


유다 왕 아비얌

열왕기상 151-8


학창시절에 받았던 성적표가 생각이 나십니까? 그 성적표는 1년 동안 우리가 시험을 치렀던 점수도 기록이 되었지만, 1년 동안 학교생활을 어떻게 보냈는지 선생님께서 우리의 생활 태도를 평가해 주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 살펴보면, ‘두뇌가 총명하지만 조금 선만합니다’, 또는 명랑하고 정직합니다. 계속해서 기대되는 삶입니다등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는데, 여러분이 받으신 성적표에는 어떤 표현들이 있었습니까?

 

다윗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함이 없습니다. 남유다의 왕이 된 아비암은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하고, 르호보암을 따라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사를 세워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의 후손으로 왕위를 잇게 하고,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할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의 긍휼과 은혜로 다윗의 순종을 높이 인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유다 왕 아비얌(1-8)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적표를 주신다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평가가 내려지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한 평가를 반드시 내리신다 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다면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문제가 깨끗이 해결되어야 합니다. 아비얌에 대한 인생의 성적표에는 그가 죄를 지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열여덟째 해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2예루살렘에서 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요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3아비얌이 그의 아버지가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의 마음이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나 4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그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의 아들을 세워 뒤를 잇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셨으니 5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6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더니 7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아비얌의 남은 사적과 그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8아비얌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니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8)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얌은 아버지의 악행과 아세라 상을 만든 어머니 마아가의 우상숭배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다윗의 온전한 신앙 전통이 솔로몬과 르호보암을 거치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1) 아비의 통치 도입부(1-2)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얌(아비야, 주전 913-910)은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제18년에 유다의 제2대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3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이처럼 분열왕국 각 왕의 통치 도입부에는 통치기간만 아니라 상대국 왕의 통치 연도를 제시하여, 당대 왕들을 비교 대조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런 구체적 정보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역사적 신빙성 또한 강화합니다. 아비얌의 어머니는 아비살롬(압살롬)의 딸인 마아가로 소개됩니다(2). 아비얌은 모친덕에 르호보암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왕위에 오른 것으로 나타납니다. 르호보암은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을 두었고, 그들로부터 아들 28명과 딸 60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처첩 중에서 마아가를 가장 사랑했기에, 아비얌을 후계자로 세워 왕으로 삼을 계획을 했습니다(대하 11:21-22). 또한 그의 왕권의 안전을 보장하고 불필요한 견제를 막기 위해, 다른 아들들은 많은 아내와 양식을 주어, 유다와 베냐민의 견고한 성읍에 흩어져 살게 했습니다. 한편 아비얌의 어머니 마아가는, 결론부터 말하면, 압살롬의 딸이 아니라 손녀입니다. 히브리어의 가족 관련 단어가 확장된 의미로 사용되는 점을 이해하면 쉽게 해결됩니다. 예를 들어, ‘이라는 단어는 만 아니라 손녀증손녀등 여자 자손을 뜻할 수 있습니다. 압살롬에게는 다말이라는 딸 하나만 있었으므로(삼하 14:27), 마아가는 그의 딸이 될 수 없습니다. 대신 역대하 13:2에서 마아가를 미가야로 부르며, “기브아 사람 우리엘의 딸임을 알립니다. 이를 참작하면, 마아가는 압살롬의 딸 다말과 기브아 사람 우리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미야'(대하 13:2)라는 이름은 마아가의 오기이거나 다른 표기로 유추됩니다.

(2) 아비암의 통치와 평가(3-6)

아비얌의 통치 내용에는 그가 악한 왕이었다는 평가만 나옵니다. 왕에 대한 평가는 열왕기의 특징으로, 분열왕국 각 왕의 통치 도입부에 이어서 언급됩니다. 평가 내용은 각 왕이 여호와의 눈에 선한 왕 또는 악한 왕이었는지에 대한 판정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제정한 왕의 규례(17:14-20)를 기초로 하여, 각 왕이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서 임무를 다했는지를 최종 진단합니다. 슬프게도, 유다 왕 8명을 제외하고는 양국의 나머지 30여 명의 왕들은 모두 악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이와 같은 왕들의 악과 불순종은 역사 속에 반복되면서 각 왕국의 멸망으로 연결됩니다. 이런 구성은 왕들의 불순종이 백성들의 죄와 함께 양국의 몰락을 가져온 필연적 원인이었음을 암시합니다. 이 같은 기록은 열왕기의 청중인 포로기 백성에게 나라를 잃은 고통스러운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순종의 삶을 살도록 유도합니다. 한편 본문의 아비얌에 대한 평가는 구체적으로 부친 르호보암과 조부 다윗의 삶에 비추어 조명됩니다. 먼저 아비얌의 악은 그가 부친이 저지른 모든 죄를 행한 데서 나타났습니다(3). ‘죄를 행했다는 말은 죄 안에서 걸었다', 아비얌이 앞서간 부친의 발자취를 따라 죄의 삶을 지속했음을 묘사합니다. 르호보암의 통치 첫 3년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의 힘을 입어 다윗과 솔로몬의 길을 따랐습니다(대하 11:17). 그러나 나라가 강성해지자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우상숭배로 돌아섰으며, 유다 전역에 우상숭배가 퍼지도록 방치했습니다(14:22-24;대하 12:1,14). 아비얌도 부친처럼 행했으므로 자신만 아니라 백성까지 죄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다윗과 관련해서, 아비얌은 마음이 다윗처럼 여호와와 온전함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온전함’(샬렘, 3)은 화목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뜻합니다. 아비얌이 받은 지적은 솔로몬이 우상숭배로 인해 책망받았던 내용으로(11:4), 마음 및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은 명령에 부합하는 행동만 아니라 마음의 헌신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아비얌의 불순종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위해 왕조를 지속시키심으로 그의 은혜를 나타내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윗 왕조 후손의 지속성은 다윗 앞에 항상허락된 등불로 비유되었습니다. 등불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미 선언하신 것으로(11:36), 하나님이 이를 신실하게 이행하고 계심을 증명합니다. 이 약속의 근본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다윗과 맺은 언약에 있습니다(삼하 7). 열왕기 저자는 이 언약에 암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덧붙여, 다윗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다윗은 솔로몬 때부터 다윗 왕조가 끝날 때까지 선한 왕의 표본이 됩니다. 그의 정직과 순종의 삶은 여호와의 말씀을 기준 삼았기에 칭찬받습니다. 말씀에 헌신했기에 다른 왕들처럼 우상에게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만 향하여 그와 온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헷 사람 우리아(우리야)의 일(삼하 11-12)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습니다(5). 그의 죄는 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아를 살해한 일로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욕을 위해, 또 죄를 덮기 위해 죄 없는 부부를 희생시켰습니다. 게다가이 과정에서 요압이나 신하 등 무고한 자들을 자신의 범죄에 가담시켰습니다. 이 모든 죄악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긴 것이며, 여호와의 눈에 악이었습니다(삼하12:9). 다만 다윗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즉각 회개했습니다(삼하 12:13). 이후 하나님의 심판(삼하 12:10-12)을 견뎌냈고, 다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부분이 바로 솔로몬이나 여로보암을 포함한 여러 왕들(11:9-13; 14:7-11)과 달랐던 점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그나마 우리아의 일을 제외하고는 평생 하나님의 명령에서 돌아서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5). 왕들과 백성들 그리고 독자들은 이러한 다윗의 회개와 재헌신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그의 회개와 재헌신을 용납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 왕조가 존속되는 것은 오직 그의 긍휼과 은혜 아래에서입니다.

(3) 아비암의 통치 종결부(7-8)

아비얌의 통치 종결부는 르호보암의 종결부와 거의 유사합니다. 그의 행적이 역대 지략에 기록되어 보존된 것 외에, 아비얌도 르호보암처럼 여로보암과 국경을 두고 전쟁을 벌였습니다(7; 14:30). 분열왕국 시작 후 양국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충돌했습니다. 특히 당시는 각 왕국의 초기이므로 상대국에게 백성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지역을 통제하고 자신의 왕국을 견고히 세우려는 목적이 우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12:21, 26-28; 15:16-22; 대하 15:9). 역대기는 아비얌의 통치 기록에 여로보암과의 전쟁을 주된 사건으로 기술하면서, 악한 왕으로 평가한 열왕기와 달리, 그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전한 데 초점을 맞춥니다(대하 13:15,18). 이처럼 열왕기와 역대기에 나오는 왕의 평가는 서로 상충하기도 합니다. 이는 르호보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왕기와 역대기 둘 다 시삭의 침입을 공통적으로 기록했으나, 열왕기는 그 침입을 죄에 대한 징벌로만 묘사했고, 역대기는 여기에 그의 회개와 하나님의 응답까지 포함시켰습니다. 이런 상충된 내용은 열왕기와 역대기 저자들이 이용한 참고자료들이 서로 다른 데서 기인했을 수도 있습니다(7;대하 13:22). 그러나 무엇보다 저자들의 관점과 강조하려는 의도가 다른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가 목표로 한 1차 독자/청중은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역대기의 청중은 포로 귀환자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정당성을 제시하면서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반면 역대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기초로 하여 성전과 예배를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두 책 모두 다윗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하나님의 은혜를 부각합니다.


부모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혼합종교에 열중하는 동안, 아들은 그 문화를 비판하거나 극복할 만한 신앙의 힘을 전혀 기르지 못했습니다. 부모의 신실함에 자식이, 선배 신앙인들의 신실함에 후배들이, 우리의 신실함에 이 사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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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14-01)


유다 왕 르호보암

열왕기상 1421-31


참된 믿음의 잣대는 믿음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의 대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다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의 행위라 생각한 그 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행위는 참된 믿음의 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실 때만 우리의 믿음은 참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통치 동안 남유다도 북이스라엘 못지않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조상들이 행한 것보다 더하므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일으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쫓아낸 가나안 족속의 가증한 모든 일을 따라 산당과 우상들을 만들고 숭배했습니다. 이들의 죄를 심판하기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시삭으로 하여금 유다를 공격하게 하십니다. 유다는 이 일로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다 잃고 애굽의 속국이 됩니다.

 

유다 왕 르호보암(21-31)

세상은 교회가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자신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것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부러워할 수는 있어도 우리와 같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잣긴들과 다르게 살아도 자신들보다 더 행복할 때 우리처럼 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나안보다 더 가나안스러웠습니다.

21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유다 왕이 되었으니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사십일 세라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서 택하신 성읍 예루살렘에서 십칠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 22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으니 23이는 그들도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과 우상과 아세라 상을 세웠음이라 24그 땅에 또 남색하는 자가 있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무리가 본받아 행하였더라 25○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의 왕 시삭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치고 26여호와의 성전의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모두 빼앗고 또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를 다 빼앗은지라 27르호보암 왕이 그 대신 놋으로 방패를 만들어 왕궁 문을 지키는 시위대 대장의 손에 맡기매 28왕이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시위하는 자가 그 방패를 들고 갔다가 시위소로 도로 가져갔더라 29르호보암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0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항상 전쟁이 있으니라 31르호보암이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니 그의 조상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나아마요 암몬 사람이더라 그의 아들 아비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21-31)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통치 동안 남유다도 북이스라엘 못지않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조상들이 행한 것보다 더하므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쫓아낸 가나안 족속의 가증한 모든 일을 따라 산당과 우상들을 만들고 숭배했습니다. 이들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시삭으로 하여금 유다를 공격하게 하십니다. 유다는 이 일로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다 잃고, 애굽의 속국이 됩니다.

(1) 르호보암의 통치와 평가(21-24)

르호보암(12:1-24; 14:21-31)과 여로보암(12:25-14:20)의 통치 기사는 이스라엘의 분열이 현실화하고 첫 왕들이 계속 불순종함으로써, 두 왕국 또한 멸망으로 다가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에 불순종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의 말씀이 계속 예고되고, 또 실현되어 갑니다.

여로보암의 통치 기록은 왕의 영적 타락을 직접적으로 기술한 반면, 르호보암의 통치 기록은 백성의 영적 타락을 수면에 띄우고 그 아래에서 왕의 책임을 넌지시 묻습니다. 르호보암은 그의 어리석음과 포악함으로 북쪽 열 지파의 신임을 얻지 못한 채 유다와 베냐민의 왕으로 군림했습니다. 41세에 왕이 된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에서 17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방비를 위해 유다 남부에 요새성을 건축하여 정치 군사적 안정을 꾀했습니다(대하 11:5-12). 또 통치 첫 3년은 북이스라엘에서 이주한 제사장들과 신실한 백성들에 힘입어 하나님을 따르며 나라를 강성하게 했습니다(대하 11:13-17). 그러나 나라가 견고해지자 그는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버렸습니다(대하 12:1). 그의 죄와 우상숭배에는 암몬 여인인 모친 나아마의 영향이 상당했을 것입니다. 나아마는 솔로몬이 사랑한 이방 아내 중 하나로 다른 아내들처럼 자국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솔로몬을 우상숭배로 이끌었던 자입니다(11:1-8). 한편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은 여호와가 그의 이름을 두기 위해 이스라엘 지파 중에 택한 성읍이었습니다. 이곳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성전이 있어, 그의 눈과 마음이 항상 머물고 있습니다(9:3). 솔로몬의 배역으로 인해 나라를 찢어 여로보암에게 주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그가 택한 예루살렘과 다윗을 위해 유다 지파를 남겨 르호보암에게 주셨습니다(11:32, 36; 12:17). 이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예루살렘과 유다와 다윗과 함께해왔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에 아랑곳없이 여호와의 눈에 악을 행했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읍 예루살렘은 우상숭배와 죄악이 들끓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백성은 모든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산당들, 석상들, 아세라 목상들을 지었습니다(23). 이들 장소와 우상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 이전에 가나안 족속이 깊게 관여했던 우상숭배의 현장과 대상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 모든 것을 부수고 불살라, 우상숭배를 근절하라고 명하셨습니다(12:2-3). 그러나 23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히려 가나안 종교를 들여와 자기 것으로 삼았음을 증명합니다. 이처럼 우상숭배는 북이스라엘(13:32)만 아니라 남유다 구석구석에 파고들었습니다. 게다가 이방 신전에서 예배 행위로 매음하던 자들(남색하는 자")이 유다 백성 중에도 생겨났습니다(24). 23-24절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쫓아내신 가나안 족속들이 행하던 가증한 일로, 하나님께서 엄히 금한 행위였습니다(23:17). 조상들보다 더한 이들의 행악은 여호와를 더욱 노엽게 했습니다(22). ‘노엽게 하다’(카나)질투를 유발하다의 뜻으로, 언약직 사랑을 배신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를 가리킵니다(20:5: 1:2).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다른 대상을 향해 예상과 열성을 품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한편 앞서 22절은 모든 악행의 주체로 유다"만을 기록하는데, 그렇다 해서 르호보암을 제외시키지는 않습니다. 여로보암과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호관련성을 보여주었듯(14:16), 르호보암의 죄로 인해 유다 백성도 악영향을 받았음을 이미 함축합니다(대하 12:1, 14. 왕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한 규례에 부응하여(17:14-20) 영적 지도력과 책임감을 가져야 했습니다. 결국 여로보암과 르호보암의 배역과 불순종, 백성의 우상숭배를 방관한 죄, 또한 여기에 더불어 왕들의 불순종을 따라간 백성의 죄악이 남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했습니다. 포로기의 청중이나 현대 독자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순종을 다시 결단해야 합니다.

(2) 시삭의 침략(25-28)

르호보암과 백성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 시삭(셰숑크/쇼생크 1, 주전 945-924)을 보내 유다를 침공하게 하십니다. 이 일은 르호보암 때 일어난 정치적 사건 중 열왕기에 유일하게 기록된 사건입니다. 이집트 제22왕조의 창시자인 시작은 여론보암이 솔로몬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했을 때 그의 망명을 받아준 왕입니다(11:40). 이 사건은 르호보암 제5년에 일어났습니다. 역대기(대하 12:1-16)에 의하면, 시작은 병마 수출국의 왕답게 병거 1,200대와 마법 60,000명을 통솔하고, 리비아(), , 구스 사람들로 구성된 동맹군을 몰고 침투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유다 남부의 요새성들을 함락한 후 예루살렘까지(후에 북이스라엘까지) 올라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스마야 선지자를 궁으로 보내 시삭의 침입이 하나님을 버린 죄의 징벌임을 알리셨습니다. 이에 르호보암과 방백들은 겸손히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겸허함을 보고 예루살렘을 지켜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동시에 죄의 대가로 유다가 시작의 종이 됨을 예고하셨습니다. 열왕기는 이런 내용은 생략하고 예루살렘 및 성전과 관련된 내용 위주로 기술함으로써 유나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한 성읍과 성전이 위협받고 더럽혀짐을 부각합니다. 시삭은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보물과 왕궁의 보물 그리고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를 다 앗아갔습니다. 26절에서 빼앗다라는 동사는 원문에 세 번 나오고, 특히 그가 모두 빼앗았다라는 문장으로 성전과 왕궁이 철저히 약탈당했음 표현합니다. 결국 솔로몬의 대표 건축물인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다 뺏김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으로 누렸던 부귀영화의 증거물은 다 사라졌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솔로몬과 르호보암에게 경고한 불순종의 결과입니다(삼상 7:14). 르호보암은 빼앗긴 금방패 대신 놋 방패를 만들어 대신했습니다. 왕궁 문을 지키는 시위대 대장들이 이를 맡았습니다. 왕이 성전을 출입할 때마다 시위대가 방패를 꺼내 들고 갔다가 다시 시위대의 저장고에 갖다 보관했습니다. 한편 26절은 시삭이 성전을 훼손하고 약탈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함락이나 성전 훼손 내용은 기록에 없습니다. 실상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을 보전하기 위해 성전과 왕궁에서 보물들을 내준 것입니다. 그는 시삭에 맞서기보다는 항복을 택했습니다. 유다는 결국 하나님의 예고대로 애굽의 속국이 됐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전을 예배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개방하고, 하나님께 바친 헌물을 이방 나라에 조공으로 바친 행위는 여호와의 이름과 거룩한 처소를 더럽힌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그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한다면 이 성전을 손수 던져버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9:7). 그러므로 왕과 유다 백성은 이때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과 북이스라엘 백성이 심판의 여러 징조와 경고를 받고도 죄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13), 르호보암과 남유다 백성도 계속 죄를 범했습니다. 종국에 나라는 멸망하고, 성전은 전소되며, 기물과 기둥까지 다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됩니다(왕하 25:9, 13-17).

(3) 르호보암의 통치 종결부(29-31)

북이스라엘 왕이나 유다 왕의 업적과 행적은 각 왕국의 역대지략 등 여러 기록물을 통해 보존되었습니다. 이런 자료와 자료에 대한 설명은 남북 이스라엘의 각 왕과 이스라엘 역사의 실재성을 입증합니다. 분열왕국의 시작 초기에는 남북 이스라엘 간의 충돌이 잦았습니다(15:6,7,16,32). 전쟁의 목적은 각각 남북의 국경을 사수하고, 백성들의 왕래를 막아 새로 시작한 왕조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이해됩니다(15:17). 한편 열왕기는 유다 왕의 통치 도입부나 종결부에 종종 왕의 모친 이름을 기록합니다(15:2;22:42; 왕하 12:1; 15:1). 르호보암의 통치 종결부에는 도입부처럼 그의 모친 이름과 그녀가 암몬 사람임을 한 번 더 기술함으로써 유다의 우상숭배를 상기시킵니다. 르호보암을 이어 아비얌이 왕이 되었습니다.


물질만능과 배금사상, 성공주의와 쾌락주의에 젖은 우리 시대를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이스라엘처럼 금 방패나 놋 방패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허튼 기대를 버리시길 바랍니다. 가나안을 이스라엘화할 때, 비록 분열의 심판을 받았더라도 끝까지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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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01-01)


바른 신앙을 위한 준비

베드로후서 1장 1-11절


‘이름 값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명성에 걸맞은 행동이나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혹은 ‘그리스도를 따른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이름값’하는 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베드로의 첫 편지가 고난 받는 성도들을 향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는 거짓 교사들의 영행을 받고 있는 성도들 위한 편지의 시작 부분입니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2절은 도입부로 발신자와 수신자와 인가 담겨 있습니다. 3-11절은 편지 몸말의 시작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 바른 삶을 만들어가라고 권면합니다.

 

베드로의 안부 인사(1-2)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흔히 이것을 지적이고 사변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는 매우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을 설명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인간의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믿음에 근거한 경건한 삶을 통해 점진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1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1-2)

사도 베드로는 소중한 믿음을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믿음 안에서 날마다 성장하기를 바라며 두 번째 서신을 보냅니다. 당시 거짓 교사들에게 신앙이 미혹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교만한 우월의식과 무질서한 방탕한 생활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삶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

(1) 발신자(1a)

어떤 사람들은 본 서신을 익명의 저자가 쓰고 베드로의 이름을 붙였다는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에 결정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1절에 베드로가 저자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베드로는 순교하기 직전인 65-66년에 로마에서 이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수신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라고 합니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종(1a)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은 겸손함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다는 영광스러움을 내포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이리에 쓰임을 받는 종이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② 사도(1b)

‘사도’라는 표현은 베드로가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이 편지를 썼음을 드러냅니다. 권위의식을 가지고 우월성 때문에 말한 것도 아닙니다.

(2) 수신자(1b)

이 편지의 수신자를 베드로는 ‘믿음을 받은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믿음을 받았다’는 표현은 믿음이 외부로부터 주어진 선물임을 나타냅니다.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믿음을 갖게 된 것에 대해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이 받은 믿음을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묘사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믿음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믿음과 성도의 믿음은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그는 이 믿음이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 하나님’과 ‘구주’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하나님과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믿음을 받은 것입니다.

(3) 인사말(2)

베드로는 소아시아의 성도들을 향해 문안 인사에서 ‘믿음’과 ‘지식’이라는 두 개념을 소개합니다.

① 믿음(2a)

그는 먼저 소아시아 성도들의 ‘믿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우리와 같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표현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은 사도들의 믿음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사도들의 믿음보다 열등하거나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동일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믿음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믿음이 개인의 자질이나 노력에 의한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믿음이나 독자들의 믿음은 모두 같은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동일하게 보배로운 것입니다. 베드로가 동일한 믿음을 강조하는 이유는 독자들 가운데 활동하고 있던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사도들이 가르친 것과 다른 믿음을 가르치면서 독자들을 현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가져야 할 참된 믿음은 사도들의 믿음과 동일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 베드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그를 아는 지식을 통해서 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지식’(에피그노시스,επίγνωσις)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에 근거한 믿음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더욱 친밀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3-11)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또한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신령한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은사를 아낌없이 주십니다. 그래서 영광의 광채와 탁월한 덕으로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권합니다.

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3-11)

모두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죄에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도우십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고 살아가십니까? 처음 구원 받을 때와 지금 당신은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1)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3-4)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을 명하시거나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건한 삶을 살라고 명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십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두 가지 일을 설명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경건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능력을 이미 주셨습니다(3).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 삶에 필요한 것만 주신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크고 보배로운 약속을 주셨습니다(4).

먼저 경건한 삶을 위한 능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아는 지식을 가진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경건에 필요한 능력이 ‘믿음’이 아닌 앞을 통해 주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생소합니다. 그러나 저자가 ‘믿음’대신 그리스도를 앎에 대해 언급한 이유는 아마 스스로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음행과 불의를 일삼던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입니다(2:1-14). 그러한 믿음은 사도들이 독자들에게 전한 믿음이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사도적 믿음은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에 근거를 둡니다. 따라서 저자는 믿음보다 앞에 더 많은 관심을 둡니다. 2절의 은혜와 평강이나 3절의 신기한 능력은 모두 그리스도를 앞으로 주어집니다. 5절에서는 지식이 믿음과 덕이란 기반 위에 세워지는 것이며, 8절에서는 5-7절에서 설명한 믿음에 근거한 경건한 삶이 곧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경건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즉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1), 경건한 삶에 필요한 모든 능력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경건을 위한 능력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또 다른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곧 보배롭고 큰 약속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말하는 약속은 1:11과 3:13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약속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약속을 바라봄으로 세상의 썩어질 것에서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재적 삶에 필요한 모든 능력과 미래를 위한 약속을 주신 것은 그리스도인들로 이 세상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2) 믿음에서 사랑으로(5-7)

5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3-4절에서 설명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이 지금부터 저자가 하는 권면의 근거와 기초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건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고 또한 위대한 약속을 주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5-7절에서 설명하는 믿음의 덕목들을 실천하도록 힘써야 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힘써야 할 여덟 가지의 덕목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5-7)고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납니다. 이미 1절에서 우리가 가진 보배로운 믿음을 하나님에게서 받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물은 모든 경건한 삶의 기초이며 원동력입니다. 반면에 ‘사랑’은 그 완성이며 끝입니다.

‘사랑’은 모든 기독교적인 덕목의 왕관입니다. ‘믿음’과 ‘사랑’ 사이에 있는 여러 덕목들은 순서에 있어서 서로 어떤 논리적인 연관성이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덕목들을 힘써 행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성취하는 것입니다(10).

(3) 힘써 그리스도를 알아가라(8-10)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성육신하셨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으며 나중에 다시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까? 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내용들을 알고 있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에 관해 아는 것이지 그리스도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을 매우 실천적이고 점진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실천적이란 것은 5-7절에서 열거한 덕목들을 힘써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점진적인 이유는 그것이 믿음에 근거한 삶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8절에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흡족하다’(플레오나조,πλεονάζω)라는 단어는 ‘증가하다’, ‘성장하다’ 혹은 ‘더 해지다’라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은 그리스도인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성장해가는 것이며 마치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이러한 지식의 성숙이 없으면 영적인 무지에 빠져서 진리를 보지 못하고 맙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가리켜 근시안이나 소경과 같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덕목을 열심히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 영적인 진리를 외면하고 보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감는 것과 같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결코 철학적인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가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합당하게 경건한 삶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4)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11)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것입니다(4). 그러나 그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경건의 덕목들을 힘써 행함으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굳게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너희에게 주시리라’는 표현을 통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힘써 경건을 행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믿음이나 신기한 능력에 근거한 것이기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생활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성령이 임하기 전과는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도들도 과거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와는 변화된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이 어떤 환경으로 유혹해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항상 변함없이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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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서론)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위의 노래는 손양원 목사님의 <주님 고대가>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주님 오심을 기대하고 있겠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갈수록 ‘재림’이나 ‘심판’이 신자들에게도 긴박하거나 절대적인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것이 신자들의 실제적인 삶에 미치는 심각한 영향입니다. 이와 같은 재림과 심판에 대한 신앙적 회의와 그로 인한 도덕적 타락에 대한 문제의식이 베드로후서의 출발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성도의 신앙적 삶의 위기에서 기인합니다. 교회 구성원인 성도 각 개인의 삶의 정황이 곧 교회의 형편을 좌우합니다. 그렇다면 교회 위기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전서는 외적인 박해로 인한 위기에 대한 지침서인 반면에, 베드로후서는 이단 사설로 인해 교회의 내적 위기에 대한 경계서입니다. 성도 각 개인이 거짓 교회와 것 메시지에 물들어 반성경적인 신앙을 지난다면 교회는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

(1) 내적 증거

베드로는 서신 초두에 분명하게 자신을 ‘시몬 베드로’라고 밝혔습니다(1:1). 만일 위작이라면 그냥 베드로 사도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맨 처음 부르심 받은 제자들 중의 하나이며, 예수님께서 항상 데리고 다니시던 수제자 그룹에서도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생생한 신앙의 경험담, 즉 변화산에서 주님이 변모하신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벧후 1:16-18). 이는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에게 직접 그의 죽음에 관한 예언을 들었다고 말합니다(1:14). 그는 바울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3:15). 본서가 베드로전서의 후편임을 밝혔다(3:1).

(2) 외적 증거

신약성경 중 베드로후서처럼 저자의 진위 논란이 많은 정경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2-3세기부터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Eusebius)는 베드로전서는 베드로가 썼지만, 베드로후서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교부 오리겐도 다소 의심스럽다고 했습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와서도 루터(Luther)만이 베드로의 저술로 인정했고, 칼빈(Calvin)이나 에라스무스(Erasmus)는 부인했습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 필체의 문제점이었습니다.

다음으로 문체나 어휘가 약간 차이가 있는 것은 ‘베드로전서’는 베드로의 감독 하에 실루아노의 대필로 작성된 것이라면, ‘베드로후서’는 베드로가 직접 작성한 것임으로 문체가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의 시기, 장소

(1) 기록 시기

본 서신은 베드로에 의해 집필 시기는 63-64년에서 순교한 주후 58년경 사이일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13절에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옴을 암시한 듯한 내용으로 볼 때, 67-68년 사이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 기록 장소

바울이 기도한 장소는 로마 감옥 안에 있을 때인 로마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베드로후서의 수신자

이 서신의 수신자는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1:1)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3:1)라고 쓴 것을 볼 때, 이 서신의 수신자들이 적어도 베드로가 보낸 첫 번째 편지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3장 15절에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라고 함으로, 그들은 사도 바울의 편지의 수신자이기도 하다. 베드로전서와 마찬가지로 그가 이 편지를 로마에서 썼다면, 그의 편지의 수신자들은 사도 바울의 편지의 수신자이기도 한 소아시아 교회 신자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본 강해서에서는 수신자를 소아시아 성도들이라고 확정하며 서술해 갈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의 목적

이 공동서신 역시 베드로의 첫째 서신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교회나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모든 교회를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서신을 쓰게 된 목적을 두 차례에 걸쳐서 밝히고 있습니다.

12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 15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에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12,13,15)

1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3:1,2)

베드로후서는 어떤 목적으로 기록했습니까? 그 목적은 크게 베드로 사도의 개인적인 문제와 당시 세계 교회의 보편적인 당면 문제 때문일 것입니다. 즉 사도 베드로는 유언적으로 온 교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는 ‘일깨운다’라는 단어로 성도들이 영적인 감각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그와 같은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 1:15)는 말대로 입니다. 그 다음 세계 각처에서 성행하는 이단적 종교 사조인 ‘영지주의 풍조’를 경계하고자 본 서를 쓴 것으로 추정됩니다(벧후 2:1-3). 영혼만 귀한 것이요, 육체는 하찮은 것이니 육체로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관계없다는 교설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종말적인 심판을 염두에 두고 거룩한 생활을 할 것을 강조합니다.

 

베드로후서의 주제

‘신앙적인 참 지식’이 본 서의 큰 주제입니다. ‘앎’, ‘지식’(Know, Knowledge)이라는 말이 16회나 반복됩니다. 끝에도 ‘오직 우리 주 곧 구주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벧후 3:18)고 했습니다. 이는 당시 특별한 영적 지식과 지혜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미혹하는 영지주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강조했습니다(벧후 1:5-7). 영지주의에 미혹된 자들이 극단적으로 무도덕한 생활을 했기에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참 지식과 지혜임을 교훈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활은 종말에 필히 시행될 하나님의 대심판을 염두에 두고 행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신앙의 참 지식, 참지혜가 본서의 강조점입니다.

 

베드로후서의 내용

제1장

1-2 발신자와 수신자 및 안부

3-11 사도의 메시지

12-15 편지를 쓰는 목적

16-21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대한 반론(1) : 예수님의 능력과 재림

(1) 사도가 직접 목격하였고, 더 확실한 구약의 예언

(2) 구약 예언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것

 

제2장

1-3 거짓 선생들이 일어날 것에 대한 예언

4-10a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에 대한 반론(2) : 심판

(1) 노아 시대

(2) 소돔과 고모라

10a-16 거짓 선생들의 실제적인 삶 : 탐욕, 쾌락 그리고 거짓된 가르침

17-22 다시 정욕에 굴복하여 사는 자들에 대한 경고

 

제3장

1-2 두 번째 편지를 쓰는 목적

3-4 말세에 심판과 재림을 기롱하는 자들의 주장

5-10 기롱하는 자들(거짓 선생들)에 대한 사도의 반론(3) :

(1) 불로 심판 받도록 보존

(2)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재림과 심판

11-16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17-18 마지막 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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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05-01)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베드로전서 5장 1-14절


세상을 보면 감히 맞설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언제라도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언제라도 포기할 것 같은 마음입니다.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서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까? 주께서 돕겟다고 하셨는데 우리를 어떻게 도우신다는 것입니까?

 

4:12에서 시작한 고난 자체에 대한 권면을 이어갑니다. 이후 일반적 편지 형식을 따라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5절은 공동체 구성원, 특히 교회 지도자인 장로들에게 대한 것과 그들의 인도를 받는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입니다. 둘째, 6-11절은 결론적 권면입니다. 고난 상황에서 믿음을 곧게 지키라고 말합니다. 셋째, 12-14절은 편지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내용 정리와 문안 인사, 축복의 말이 이어집니다.

 

장로들을 향한 권면(1-5)

 지도자는 멀리서 보기면 영광스럽게 보여 부러워볼 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서보면 영광스럽기보다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동체가 은혜스러워지길 원한다면 함께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야만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1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1-5)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는 다양한 연령대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성도들이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는 독특한 제도로서 출애굽 당시에도 이지 존재했습니다. 이는 공동체 내의 일정한 자격을 갖춘 연장자들에게 주는 명예와 책임입니다.

 (1) 장로들에 대해(1-4)

베드로는 ‘내가 권한다’로 독자를 향한 권면을 지속합니다. 이 표현은 2:11에서 세상 속 신자 삶을 구체적으로 권면하기 시작할 때 사용했습니다. 둘 다 고난을 배경으로 하지만, 초점이 다릅니다. 2:11은 세상 속 사회 구성원 역할에 집중했다면, 5:1은 공동체 구성원 역할입니다. 또한 4:12-19 내용과도 차이가 있습니다.

독자 전체를 다룬 앞부분과 달리 이 부분은 특정 부류를 다룹니다. 첫 대상은 장로들입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라고 합니다(2). 그분의 백성인 교회를 이끌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장로들에게 다스림의 권세를 위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에 집중해 권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여러 표현을 첨가해 부연합니다.

첫째, 정체성 확증입니다(1b). 저자는 ‘장로’에 대한 세 가지 호칭을 언급합니다. ‘함께 장로 된 자’들과 ‘메시아 고난의 증인’,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입니다. ‘함께 장로 된 자’란 사도처럼 연장자란 말이지만, 같은 사역자란 의미이기도 합니다. 지역 교회 지도자의 사역을 사도의 사역과 동일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직접 목격자나 복음 증거 사명의 1차 수혜자는 사도입니다. 지역 교회 장로들은 사도 혹은 사도로부터 증거 받은 자들의 전도를 통해 믿게 된 자들입니다(1:12). 사도의 사역이나 권위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인 저자가 지역 교회 장로들을 자기처럼 장로로 부른 것은 그들의 사역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들 위치를 존중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한편, ‘메시아 고난의 증인’이란 장로들 사역의 내용과 관계있습니다. 예수 고난을 직접 목격한 자라는 말이 아닙니다(1:8).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구원의 복음을 증거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의 증거와 함께 고난의 삶을 통한 증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차 있을 영광에 참여할 자’는 미래 소망에 대한 것입니다. 고난 이후 영광 얻은 예수님처럼 이 땅 사역에 대한 보상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참여하겠지만, 특별히 장로들은 사역자로서 그 영광에 기쁘게 참여할 것입니다.

둘째, 분사를 통해 ‘어떻게’ 요소를 첨언합니다(2-3). 1) 감독하되 2)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3) 더러운 이익이 아닌 열정으로 하고 4) 군림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는 방식으로 하라고 합니다. 바른 지도자의 덕목이지만, 인간적으로 좋은 지도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요소들을 가진 참 목자의 본은 하나님/예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백성을 돌보지 않던 유대 지도자들을 꾸짖고, 자신이 직접 백성의 목자가 되어 사랑과 정의로 돌보겠다고 하셨습니다(에스겔 34:11-16). 그분의 마음은 메시아를 목자로 보내는 약속으로 이어지고(에스겔 34:23),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이 땅에 와서 영혼의 목자와 감독으로서 사역하셨습니다(2:25; 참조. 요한복음 10:1-18). 장로들은 그 예수님을 주로 모신 자들이며, 하나님 백성을 섬기는 일을 맡은 자들입니다. 메시아 고난이 담긴 복음을 증언할 뿐 아니라 하나님/예수의 본을 따라 그분의 백성을 그분의 마음으로 섬기라는 뜻일 것입니다.

셋째, 사역에 대한 보상입니다(4).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썩지 않는 영광의 관을 얻을 것이라고 합니다. 1절에서 언급한 미래의 소망을 부연합니다. 저자는 예수를 목자장으로 부릅니다. 장로들은 목자이지만 최고 권위자는 아닙니다. 장차 목자장 예수가 오실 때 긍정 평가를 받으려면 오늘 바르고 정성스럽게 섬겨야 합니다.

(2) 젊은 자들과 모두에 대해(5)

청년을 포함해 장로들보다 어리고 지도를 받는 자들입니다. 그들을 향해 장로들에게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앞서 사회 구조 속에서 상대적으로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한 것과 같습니다(2:13,18;3:1). 이어 저자는 ‘판테스(πάντες/모든)’라는 표현으로 장로와 젊은이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에게 서로에 대해 겸손한 생각으로 옷 입으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처럼 삶을 평가하시는 분이 있음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참조, 1:17).

 

마지막 권면들: 겸손하고 깨어 있어 믿음을 잃지 말라(6-11)

마귀에게 승리하기 위해 항상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믿음에 굳게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든 고난이라도 고난은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며, 고난 후에 반드시 될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 영광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영원합니다.

6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6-11)

베드로는 독자를 향해 마지막 권면들을 합니다. 모두 세상 속 신자의 고난을 배경으로 합니다.

첫째, 겸손하라고 합니다(6-7). 5절과 연결된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6절과 7절이 서로 다른 명령인 듯 번역했지만, 7절 원문은 분사이며 6절에 나온 명령을 이행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그러면 때가 되면 독자를 높일 것입니다(6). 그 한 방법은 모든 염려를 주께 던지는 것입니다. 그분이 돌보시기 때문입니다(7). 이 명령은 몇 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1)고난 속에서 고민하고 염려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단순히 교만/겸손에 대한 윤리 권면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신자를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신자에게 고난이 특별한 것이 아니듯, 그로 인한 염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뜻을 따르는 삶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2) 겸손의 의미를 말해줍니다. 본문은 하나님께 염려를 던지는 것을 겸손의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마치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듯 전전긍긍하는 것은 교만이고 불신입니다. 그분의 능력이나 돌보심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겸손의 핵심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이 신자를 높인다는 것은 세상 속 바른 신자의 삶을 인정해주신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염려를 맡기고 고난에 직면하는 겸손함은 세상에 지지 않고 바른 신자의 삶을 지속해가는 첫 단계입니다.

둘째, 마귀를 대적하라고 합니다(8-11). 신자는 하나님께 속해있지만, 마귀가 거짓말로 다스리는 반역 세상에 발붙이고 살고 있습니다. 1:1-2에서 말한 이중 정체성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백성으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저자는 몇 가지를 당부합니다. 1) 온전한 정신으로 깨어 주의해야 합니다(8). 세상 소리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바른 생각과 판단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대적자 마귀가 먹이를 찾아 헤매는 사자처럼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편지 앞부분에서 당부했던 내용입니다(1:13; 4:7). 2) 믿음으로 맞서야 합니다(9). 특별한 무엇을 행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를 따르는 세상의 거짓 소리와 겁박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진짜로 중요하고 영원한 가치가 있는지를 보는 믿음의 눈을 놓치지 않는 것이고, 일상의 삶에서 신자의 바른 모습을 계속 견지해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복음에 담겨 있는 구원의 큰 그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1:13). 실제로 그분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도 필요합니다(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두 가지를 첨언합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견디는 동료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믿음의 선후배들이 하나님을 향한 삶을 굳세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기억하고 힘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분은 고난당하는 자신의 백성을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신자들이 잘 버틸 수 있도록 강하게 하시고 흔들리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신자는 계속해서 시야를 넓게 열어야 합니다. 상황을 넘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분을 함께 섬기고 버티는 믿음의 식구들을 보고 세상 속 제사장의 삶을 지속해야 합니다.

 

편지 마무리(12-14)

고난 가운데 있는 양무리를 칠 때, 억지로 지배하려거나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자원하는 마음과 즐거운 뜻으로 해야 합니다. 양들을 자기 소유처럼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먼저 본을 보이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자장이신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편지를 마감합니다.

12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3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14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2-14)

베드로는 바벨론에 있는 교회와 마가의 문안 인사를 전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강을 바는 인사말로 편지를 끝맺습니다. 베드로는 편지를 통해 소아시아의 성도들이 위로와 격려를 받길 원하며, 이 편지를 실라를 통해 보냈습니다.

대필자 실루아노를 통해 편지를 썼는데,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참 은혜를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독자가 딛고 서 있는 진리의 토대를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복음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과정입니다. 둘째, 하나님 은혜 위에 굳게 서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자 삶에 대한 권면입니다. 결국, 이 편지의 핵심 내용은 복음과 그에 근거한 삶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지는 소아시아 성도들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후에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까지 위로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손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분이며 그 분에게 모든 걱정과 근심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때,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해 성숙한 성도들은 베드로처럼 다른 사람을 위로해 줄 수 있습니다. 더 나가서 베드로처럼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다른 성도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연약한 성도들이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로함으로 다른 성도들이 세우는 것은 정말 복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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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04-02)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학생들이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하지만 시험을 보는 목적은 학생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학생들의 학력을 파악하고 취약한 점들을 보강하여 위하여 테스트한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싫다고 시험을 보지 않는다면 성적은 자랄 수 없습니다. 시험을 통해 자신의 수준을 알며, 성적이 자란 것입니다.

 

세상 속성도 삶에 대한 주제(2:11-4:11)를 마친 저자는 독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고난 자체에 집중합니다. 5:11까지 진행됩니다. 이 부분은 성도 개인에 대한 권면입니다.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12-16절로 고난에 관련한 일련의 명령들을 전달합니다. 둘째, 17-18절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내용을 통해 고난과 관련한 명령의 이유를 제시합니다. 셋째, 19절로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결론적 권면을 전합니다.

 

고난 중에 있는 독자들에게 : 개인적 명령들(12-16)

세상에는 숱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당한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다면, 그것은 치욕이 아니라 영광입니다. 그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즐거워 할입니다. 그것인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요, 사망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12-16)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라는 표현으로 주제를 전환합니다. 동일하게 고난당하는 독자들 상태에 대한 것이지만, 이전과 초점이 약간 다릅니다. 앞부분은 세상 속 신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집중했다면, 이 부분은 독자들의 고난 상황 자체에 대해서입니다. 세 가지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첫째, 불 시련(프뤼시스)입니다. 마치 불에 타고 있는 듯한 극심한 고통으로 표현합니다. 독자의 고난을 처음 언급한 1:6 묘사보다 심각합니다. 거기서는 단순히 여러 시험으로 근심한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불 시련이라고 합니다.

둘째, 시험이란 표현입니다. 1:6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고난의 본질이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과 관련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의 죄(창세기 3장)로 모든 피조 세계가 죄와 죽음의 통치를 경험하고 있습니다(참조. 로마서 8:19-22). 모든 이가 병에 걸릴 수 있고, 까닭 모를 고통을 경험할 수 있으며, 결국엔 죽습니다. 하나님의 현재 심판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참조. 로마서 1:28-31).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불 시련은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신앙과 진리에 대한 세상의 압박입니다. 더 나아가 이 어려움은 신자가 하나님 백성으로 잘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들을 더 순전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유혹이 아닌 시험(test)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셋째, ‘너희에게’ 표현의 반복입니다. 12절에서만 세 번 사용합니다.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이해될 수 있는 문장인데도 그렇게 했습니다. 믿음과 관련한 시험과 고통이 독자들에게 있음을 강조합니다. 고난과 관련해 일련의 명령을 전달합니다. 이상한 것인 양 당황하지 말고(12) 오히려 기뻐하라고 합니다(13). 얼핏 보면, 이전 내용과 비교해 약간 어색한 느낌이 있습니다. 1:6-8에서 시험과 기쁨 표현을 사용해 독자들이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미 기뻐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편지 뒷부분에서 그런 독자들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합니다. 첫째, 저자의 마음입니다. 그들이 잘 버티고 있음을 칭찬함과 동시에 그런 삶을 지속해 가라는 마음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초점의 차이입니다. 1:6-8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초점이라면, 이 부분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해 믿음으로 견디는 것을 넘어 그 고난을 경험하는 것 자체를 메시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의 증거로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훨씬 적극적이고 능동적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처럼 그 고난에는 미래 보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고난 가운데 기뻐하는 삶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첫째, 인지 요소의 준비입니다. ‘왜’와 ‘무엇을 위해’라는 신자 삶의 근거와 방향성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전 설명에 의하면, 여기에는 하나님/예수님으로 인한 구원 과정, 세상에서 언약 백성으로 존재하는 이유와 소명, 미래에 대한 소망이 포함됩니다. 13절도 그 고난을 단순히 고통 자체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에 대한 미래 소망, 곧 주의 심판을 근거로 지금 상황에 대한 반전의 보상을 생각하고 기대하라고 합니다. 둘째,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힘입니다. 저자의 명령을 따라 마음과 태도를 바꾸어 기뻐하며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두 요소는 반드시 함께 갑니다. 사람인 신자가 이행하고 살아가는 것이지만, 신적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계속해서 ‘만일’ 조건문을 사용해 메시아 고난에 동참하는 예를 듭니다(14-16). 조건절은 고난 상황이고 주절은 그에 대한 신자의 반응입니다. 첫째 상황은 메시아의 이름으로 모욕당하는 것입니다(14-15). 3:14과 같은 내용이며, 예수의 팔복 가르침 마지막 부분(마태복음 5:10-11)을 반영합니다. ‘메시아의 이름으로’란 예수님과의 관계성 때문이란 말입니다. 15절처럼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자는 이 상황을 복된 것으로 여기라고 합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독자(너희)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은 전도자들에게 임해서 복음이 잘 전해지도록 도울 뿐 아니라(1:12),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구원 과정의 일을 합니다(1:2). 하지만 이 부분의 초점은 정체성 보증입니다. 성령님께서 함께하는 것은 성도가 그분의 백성이고 자녀라는 증거입니다(참조, 로마서 8:15-16;갈라디아 4:6). 이 성령님께서 성도 안에 있기에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얻는 고난을 성도가 예수님의 사람이라는 확증으로 여기고 복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정체성 표지는 장차 심판에서 구원받을 은혜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참조. 17-18).

둘째 상황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메시아)를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이나 세상 권위자를 주(主)로 여기지 않고, 메시아 예수만을 섬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무시하고 가볍게 여깁니다. 하지만 3:18-22처럼 예수는 부활과 승천으로 원래의 영광스러운 위치에 있고, 장차 모든 권세들이 무릎 꿇어야 하는 온 우주의 주입니다. 그 예수님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제자임을 자랑스러워하며, 그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명령의 이유(17-18)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으로 고난 받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은 시작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날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주 앞에 설 수 없습니다.

17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18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은 어디에 서리요(17-18)

명령에 대한 이유를 제공합니다. 일차적으로는 16절과 연결되지만, 보다 넓게 12절부터 언급한 것들에 대한 신학적 설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핵심은 주의 재림 때 있을 심판입니다. 성도(1:3-5,7,17.21; 4:7,13)나 세상(4:5)의 현재 모습을 설명하는 근거로 언급했던 주제입니다. 이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해 성도의 상황과 세상 불신자의 상황을 비교함으로 제시합니다. 두 가지 견제로 시작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습니다. 역사의 종말적 완성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세상 반역의 통치 영역에 남아 있는 것 사이의 확연한 갈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직은 그 미래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세상 역시 회개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 때는 그분의 심판이 완성되어 그 결과를 모두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심판의 공평성과 보편성입니다. 이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임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별이 없습니다. 또한 평가 기준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는 것이며(1:17) 공정하게 진행될 것입니다(참조. 로마서 2:6-11). 흥미롭게도 저자는 그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구약의 개념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집, 곧 그분의 거룩한 성전으로서의 교회(2:5)에서 하나님의 평가가 시작될 것입니다. 다만 그의 십자가 피로 멸망의 판결을 받지 않을 뿐입니다. 마치 보험 증권 받은 듯 생각하고 함부로 살면 안 됩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예수의 은혜로 새 언약 관계 안으로 들어간 자로서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더 집중하는 것은 불신자의 운명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그분의 백성과 자녀가 된 사람들도 평가 받는다면, 그 복음을 거절한 자들에 대한 평가는 어떻겠습니까? 의인이 예수의 피를 통해 은혜로 어렵게(몰리스) 구원받았다면, 그것을 거절한 자들의 운명은 어떻겠습니까? 독자 스스로 대답하게 해서 세상의 위협에 기죽지 말고 계속 주님께 신실하게 살라는 말을 하고픈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결론적 권면(19)

우리 힘으로 고난을 감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순간에 우리 영혼을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고난은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받는 고난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이요 생명이 될 것입니다.

19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19)

고난에 대한 결론적 권면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받는 자들, 곧 선행을 하는 자들은 모든 것의 평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께 삶을 의탁하라고 합니다. 고난을 피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다 잘된다는 말도 없습니다. 오히려 계속 고난을 당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의지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신자 삶을 계속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결론적 권면은 신자 삶의 초점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분명히 합니다. 역시 우리에게 전하는 바가 크다.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기 위해 고난을 받는 사람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고난을 수용하고 자처하는 사람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악을 미워하여 당하는 고난이요 의를 추구하여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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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04-01)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베드로전서 4장 1-11절


서양 속담에서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때가 가장 빠른 때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르고 잘못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전의 잘못을 깨달았다면 즉시 돌이켜야 합니다. 특히 선한 일을 시작하기에 너무 시간은 없습니다.

 

예수 메시아의 모본을 근거로 3:13에서 시작한 하나님 백성으로서 겪는 고난에 대해 계속 권면합니다.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1-6절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독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권면합니다. 특별히 세상에 있는 믿지 않는 이전 동료들의 압박에 견딜 것을 요청합니다. 둘째, 7-11절은 성도 개인과 함께 고난 받는 동료 성도들을 향한 태도를 다룹니다. 정신차려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고 권면합니다.

 

예수 메시아로 인한 세 삶과 고난(1-6)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봉사하려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봉사하면, 자칫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쉽습니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고, 원망없이 서로 대접하고, 어려운 성도들을 섬기고 대접하라는 사도의 권면 가운데 스스로 좀 더 힘서 행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2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4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6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1-6)

실제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던 방탕한 삶의 방식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이 살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악을 더 들어나기 때문에 같이 죄악을 범함으로 동류의식 속에서 평범해지는 것입니다. 이 평범한 것은 세상을 깨끗함의 평범함이 아니라 죄악의 보편화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1) 거듭난 자로서 새 삶을 살라(1-3)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을 독자와 연결시켜 새로운 삶을 권면하기 시작합니다. 세 가지로 그 연결을 표현합니다. ① 인과 접속사 ‘그러므로’와 ② 등장인물 예수님과 ‘너희’, 그리고 ③ 분사구문과 그것의 꾸밈을 받는 주절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육체의 고난을 받았기에[분사구문] ‘너희’는 무장하라[주절]’입니다(1a). 메시아의 고난은 3:18에 언급했던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무장하라’는 것은 전쟁을 준비하는 군사 용어입니다. 세상에 맞설 신자의 바른 삶을 위한 준비입니다. 주목할 것은 준비의 내용입니다. 인지 영역을 의미하는 ‘엔노이아(ἔννοια)’를 써서 예수님과 같은 생각 혹은 의도를 무장하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신자 삶에 대한 베드로 권면의 특징을 다시 보여줍니다. 하나님/예수의 일하심이나 모본, 독자의 사고 영역 무장(내면 요소) - 삶의 외적 표현(외면 요소) 순서입니다. 1b-2절에는 신자 삶의 ‘어떻게’ 요소를 설명합니다.

육체로 고난 받은 자가 죄를 그쳤기 때문인데, 육체로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람의 정욕이 아닌 하나님 뜻에 따라 살게하기 위해서입니다.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육계로 고난 받은 자가 누구냐입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la절에 언급한 예수님입니다. 육계와 고난 당함 표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고난 받았기에 죄 짓는 것을 멈췄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자입니다. 후자가 좋은 듯합니다.

둘째, 육체로 고난 받은 사람이 죄를 그쳤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고난 받는다고 죄가 멈춰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쇠는 앞에서 다룬 고난과 관련한 문맥입니다. 이 고난은 일반적 어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세상과 다른 삶을 살기에 받는 것입니다. 또한 죄를 그쳤다는 것도 모든 죄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 죄를 따르지 않고 있는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선을 행함으로 세상에서 고난 받는 자는 세상 따르는 것을 멈추었음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셋째, 고난의 목적입니다(2). 이 땅에 사는 동안 사람의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구원 이전 삶의 모습과 단절하고 다른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자는 3절에서 과거 세상속 모습(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 등)의 추함은 과거로 족하다는 표현을 부연함으로 새로운 삶을 촉구한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살면 더 고난 받습니다(4). 그럼에도 그렇게 살라고 한 것은 고난을 피하고 평안함만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황과 상관없이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바른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신자는 계속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신자를 핍박하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4-6)

1-3절이 예수 믿는 독자에 대한 것이라면, 4-6절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독자들이 버렸다는 3절 죄의 모습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고 당황해합니다. 어제까지 자기들과 같이 극한 방탕의 삶을 살았는데, 갑자기 그 모든 일을 버리고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신자들을 비난하기까지 합니다(4). 세상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자기들처럼 살다가 하나님/예수 때문에 갑자기 그런 삶을 악한 것으로 여기면, 계속 그 삶을 추구하는 자기들은 악한 자들이 됩니다. 말로 비난하든 그렇지 않는 삶이 대조되고 옳고 그름의 구분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신자의 삶을 따라 자신을 바꾸는 것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삶의 방식이 옳고 자기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기득권과 힘이 있으니 자연스레 신자를 미워하고 비난하며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복음 3:19-20처럼 빛(예수)이 세상에 왔지만 자기 행위가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빛을 겁박하고 제거하려는 세상 모습과 유사합니다. 시대와 장소와 상관없이 세상과 신자 사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땅에서는 그들 목소리가 우세하고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장차 주님이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그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된 모습을 고하게 될 것입니다(5; 참조. 2:12). 이런 면에서 그들의 태도는 세상을 주관하는 창조주를 믿지 않는 불신이며, 어떤 것이 실제이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르는 무지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다릅니다(6).

특별히 믿고 죽은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어리석은 것을 믿고 아무 유익 없이 자기들과 똑같이 죽었다고 판단 받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그들은 생전에 자신들에게 증거된 복음을 믿었습니다. 비록 육신으로는 죽었지만,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을 따라 산 것입니다. 역사의 마지막에는 누가 실제로 웃는 삶을 살지 판명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과 보이지 않는 이면의 실제는 다릅니다. 또한 현재와 미래의 진실도 다릅니다.

그렇기에 신자는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런 삶에 고난과 어려움이 있지만, 비난과 겁박에 기죽거나 동화되어 살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예수를 믿는 것으로 인한 새로운 관계와 무엇이 실제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진리를 알고 있는 자가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개인과 고난 중에 있는 동료 신자들 향한 태도(7-11)

예수 그리스도에게 불림을 받기 전에, 즉 세상 가운데 있을 때는 우리들도 세상의 쾌락을 즐거웠습니다. 정욕적인 쾌락이 즐거웠고, 세속적인 영광이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고 난 후에 천국이 얼마나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국에는 이러한 것들이 아무런 소용도 없고, 그런 일들을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7-11)

베드로는 마지막 때가 가까이 왔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자세에 관해서 말합니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어서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기에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1) 고난 중에 있는 신자의 태도 정신 차려 기도하라(7)

화제를 다시 신자에게로 옮겨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다룬다. 11절까지 지속된다. 먼저, 신자 삶에 대한 명령이 왜 필요한지를 다시 언급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마지막 때란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선악 간에 모든 사람을 판단할 시간이다. 세상은 주님께 자기 일을 고하고 멸망의 심판을 받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인하는 때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종말에 있을 하나님 나라 완성이 시작되었기에 그 마지막 과정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마지막이 가까이 왔기에 세상 위세도 곧 끝날 것입니다.

이런 전제로 저자가 신자 삶에 대해 다루는 첫 요소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기본 기능은 유한자(有限者) 사람이 무한자(無限者)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어느 한 영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이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저자가 특별히 염두에 둔 기도 내용이 있습니까? 이 기도는 하나님 뜻을 위한 선행과 그로 인한 고난과 관련 있을 듯합니다. 세상에 대한 제사장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해 주의 도움을 구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저자는 ‘기도하라’를 명령법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명령법은 정신 차리라는 것과 근신하라는 것이고, 기도는 목적 전치사구로 표현됩니다. 즉, 기도를 위해서 정신 차리고 맨 정신으로 있으라는 말입니다. 신자 삶에 대한 일반 권면을 제시하는 1:13과 같은 내용입니다. 세상 소리에 휩쓸리지 말고 고난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도록 바른 사고와 판단이 가능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2) 고난 중에 있는 동료 신자에 대한 태도 여러 권면들(8-11)

동료 신자와의 관계 요소들을 언급합니다. 첫째, 사랑입니다(8). 뜨겁게 사랑하라고 합니다. 동료 신자들을 향한 죄 용서를 포함합니다. 1:22 내용의 반복입니다. 둘째, 불평하지 말고 서로 환대하라고 합니다(9). 셋째, 성령의 은사를 받은 대로 서로를 향해 섬기고 봉사하라고 합니다(10-11a). 모든 일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1차적으로 은사 사용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언급한 신자의 삶, 곧 언약 백성으로서 세상 속 제사장 삶의 궁극 목적이기도 합니다(참조. 2:9-10).


그리스도인답게 젓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수용하며 사는 삶입니다.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삶이 고난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쇄도하여 들어온 종말의 시간표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이 세상의 저항에 남다른 가치관으로 저항할 때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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