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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4-01)


정직한 믿음의 기도

시편 4편 1-8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기도도 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난 척하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여과 없이 아뢰기를 원하십니다. 기쁘면 기쁘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그백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안아 주시며 평안을 주십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정직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이 시는 다윗이 자기의 의로움을 변호해주실 의의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의 성품과 통치의 관계를 노래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당면한 현실에서 혼란스러움을 경험하더라도 정돈된 마음과 신뢰를 잊지 않도록 격려하는 찬양입니다. 무엇보다 다윗은 여호와를 ‘내 의의 하나님’으로 호명하며 하나님께 속한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우선순위를 확정합니다.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1)

의의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경제적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자신을 허사와 궤휼을 써서 비참하게 만든 그들을 오히려 대담하게 꾸짖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나누보다 소유에 집착하는 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한 의인의 고난은 끊이지 않을 것이지만, 의로운 삶이 무익할 만큼 하나님도 가만있지 않으실 것입니다.

1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1)

다윗은 번민과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절은 네 개의 소절로 구성된 시행입니다. 다윗은 ‘내 의의 하나님’을 부르며 곤경에서 풀려나는 은혜를 구합니다. 다윗의 곤경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부당하게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고소를 당하기나, 무죄한데도 비난을 받는 치지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간절함이 묻어난 표현이 집중적으로 반복됩니다. ‘내가 부를 때 응답하소서’, ‘막다른 곳을 나를 위해 넓히셨습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등에는 절박함이 배어 있습니다.

또 억울함을 호소하듯이 ‘내 의의 하나님’을 호명합니다. 1인칭 소유격 대명사를 반복 첨가하여 자신의 부끄럼 없는 삶을 강조한 것처럼 들립니다. 구약에서 ‘의’는 ‘정의’와 ‘공의’로도 번역되곤 합니다. 이것은 법정적인 개념으로 단순히 옳음을 변호하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정의는 본래 ‘의’(rightness)와 ‘공평’(justice)을 말하며 하나님의 구원 능력과 관계된 법정 용어입니다(이사야 51:5,8). 그러니까 다윗은 ‘의의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믿고 당당하게 확신에 차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의 간절한 요청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빠져나오기 힘든 협곡의 위험에서 넓고 광활한 곳으로 인도하신 것처럼,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넓은 길로 인도하신 것처럼, 위기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2)

언약의 관점에서 ‘의’는 구원을 베푸시는 능력으로,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결백함에도 비난을 받는다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단순하면서도 묵진한 믿음을 실행보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의의 하나님으로 그의 사정을 의롭게 판단하시고 구원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2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셀라)(2)

다윗은 특정한 어떤 무리들을 호명하며 꾸짖습니다. ‘인생들아, 어찌하여 나의 영광을 욕되게 하고, 헛된 일과 거짓을 좋아하고 구하는가’(2).

다윗의 번민과 근심의 원천은 ‘인생들’입니다. ‘인생들’(개역개정)을 직역하면, ‘어떤 남자의 아들들’입니다. 이 표현은 시편 다른 곳에서, 평범한 서민들과 대조되는 고관대작들 또는 귀족들로 해석됩니다(시편 49:2). 그러니까 다윗의 영광과 명예를 욕되게 할 정도의 힘을 가진 사람들인 셈입니다. 그들이 다윗을 불명예스럽게 만들고, 공허한 것을 사랑하고 거짓을 추구하며 괴롭히는 상황입니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대체 ‘어느 때까지’ 헛된 욕망을 좇을 것인지 따져 묻습니다. ‘어느 때까지’라는 말에서 암시하듯 고통의 기간이 길어져 다윗은 괴롭힘을 견뎌내기 힘든 상황입니다.

 

사람들에게 반성을 촉구(3-5)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대적들에게는 당당함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선 기븜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을 비웃고 대적하는 자들에게 충고하고 호통 칩니다. 보통 애가에서처럼 원수에 대해 푸념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로 원수에 대해 푸념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로 자신의 태도와 행동을 바꾸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3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4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셀라) 5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3-5)

다윗은 헛된 일과 거짓으로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자들을 향해 ‘너희들이 언제까지 거짓을 꾸밀 것인가’(2) 꾸짖었다면, 지금은 여호와가 경건한 자를 선택하신 것을 ‘알라’(3a) 경고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경건한 사람이라는 자기인식이 분명합니다. ‘경건한 자’는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 간절한 사람을 이르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별된 사람은 신실할 뿐만 아니라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곤란 중에 탄식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뿐 아니라 거짓을 용감히 꾸짖기도 합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사람들, 헛된 것과 거짓을 구하는 자에게 경고합니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실 것’(3b)이라고 말할 정도로 확신에 차 있습니다. 다윗은 ‘내 의의 하나님’을 부르며, ‘나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1)라고 기도했고, 여호와가 들으실 것을 확신합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고, 침상에서 마음을 살피고 잠잠하라’(4bc) 경고합니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가장 은밀하고 조용한 시간, 곧 잠드는 침상에서 악한 행동과 말을 반성하고 억제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때 ‘떨라’는 말은 매우 강한 발언입니다. 땅이 흔들릴 정도로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고 감정이 전복되고 전율을 느낄 정도로 떨림을 뜻합니다.

‘범죄하지 마라’는 경고는 질책당할 만한 행동이나 비난받을 일은 죄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흠이 없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해야 할 일을 놓쳐서도 안 된다는 뜻이 포함되었습니다. 다윗은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권면으로 적당히 넘기지 않습니다.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양심과 의지를 스스로 치밀하게 조사하라는 뜻입니다. 고대인들은 마음을 양심과 의지의 자리로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 밑자리를 살피라는 말입니다. 그러고서 여호와께 의의 제사를 드리고 그분을 의지하라고(5) 권면합니다. 다윗이 믿는 의의 하나님(1)께 ‘의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마음을 살핀 후입니다. ‘의’의 제시는 진실한 제사, 올바른 제사입니다. ‘의의 제사’는 온전한 마음과 온 맘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신명기 33:10,19). 형식보다 의로운 행실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다윗은 거짓과 헛된 일을 꾸미는 고관대작들을 향해 철저하게 마음을 살핀 후에 의의 제사를 드리라고 권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6)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성도들에게는 곤란을 이길 수 있도록 마음에 기쁨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 합니다. 이 세상에는 괴롭고 슬픈 일들도 많지만 반면에 기쁘고 즐거운 일들도 있습니다. 곡식을 추수하는 일, 새 포도주를 대하는 일은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결혼이나 취업, 자녀들의 건강과 형통 등은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님께서 내 마음에 주신 기쁨은 이처럼 세상이 줄 수 있는 어떤 향락이나 즐거움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노래합니다.

6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6)

다윗은 많은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며 애통합니다. 다윗의 주변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이것은 불평과 의심의 마음이 뒤섞인 말입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정확히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인생들아’(2)로 호명된 권세 있는 자들인지 불만을 가진 백성들의 불평인지 모호합니다. ‘많은 이들’은 아마 다윗을 둘러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선’을 구합니다? 대체 이들이 말하는 ‘선’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1차적으로 도덕적인 의미의 ‘착함’을 뜻하지만, ‘좋은 것’, ‘기쁨을 주는 것’, ‘쓸모 있는 것’을 말하는 ‘토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즐거움과 기쁨을 채워줄 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사적인 이득을 채워주는 실용적인 것들을 욕망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이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음의 통증을 느낍니다. 이 때문에 다윗은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다윗은 많은 사람들처럼 자기의 이득만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모두에게 내려지는 여호와의 얼굴빛을 구합니다. 이 기도는 옛적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제사장 축복 기도문을 상기시킵니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비추사 …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수기 6:25-26). 얼굴 빛은 여호와 임재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완전한 복, 곧 샬롬이 구현되는 것을 함축합니다.

다윗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 달리 하나님 임재가 가장 절실합니다. 절망과 고통의 시간이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져 소스라치게 놀란 이들에게 하나님의 임재 경험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습니다. 다윗은 다수가 추구하는 속물적 욕망이나 혼자만의 유익이 아니라, 신앙공동체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구합니다.

 

신뢰를 고백하는 기도(7-8)

하나님께서는 곤란을 이길 수 있도록 마음에 평안을 주십니다. 곤란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평안을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평안이 눕고 자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만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거하게 하시는 분이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군대에 쫓겨나 경호원들만 데리고 도망하는 상황에서 과연 어떤 사람이 평안히 누울 수 있습니까?

7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8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7-8)

다윗은 여호와의 얼굴빛, 곧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입니까? 다윗은 하나님께 신뢰와 감사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당신이 더 큰 기쁨으로 내 마음을 채우셨습니다. 햇곡식과 새 포도주로 누릴 때보다 더 큽니다’(7). 추수의 기쁨보다 임재의 기쁨이 더 크다고 고백합니다. 농경 사회에서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는 기쁨과 부의 상징이지만, 다윗에게는 하나님 자체가 더 큰 기쁨입니다. 풍요를 갈망하는 거짓 신들을 찾아 숭배하며 이교적인 풍요 의식에 참여하는 시대의 지배적인 상황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다윗은 무겁고 괴로운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지만, 이제 그의 마음은 신뢰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잠잘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 여호와만이 나를 안전히 거하도록 이끌어주셨기 때문입니다’(8). 환경은 그대로일지 모르지만 ‘오직 여호와만이’ 안전을 책임지는 근원이라는 고백으로 마무리 합니다.


대적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를 택하셨음을 알라고 한 호통은 한편으론 다윗 자신이 다져야 할 확신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단순한 애통과 간구에서 많이 진화되어 있습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만이 우리를 강하게 하고 빛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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