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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6-01)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었을 때

시편 6편 1-10절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때, 매 순간마다 앞에 놓여 있는 어려움을 봅니다. 뭐 하나 수월한 게 하나 없습니다. 인생은 순간순간마다 수월한 곳 없습니다. 한 고비 넘으면 또 한 고비가 있습니다. ‘이 산을 넘으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하지만, 그 다음에는 더 높은 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 6편을 지은 다윗도 우리와 형편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시는 인도자를 따라 현악 여덟째 줄에 맞춘 노래이며, 개인적인 탄식의 전형성을 가장 잘 드러낸 시입니다. 시인의 영적, 육체적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고뇌에 찬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을 확신하는 기도입니다.

 

몸과 마음의 아픔을 탄식(1-3)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주님 안에서 자신을 통제하고 말씀에 순종하면 자유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소망은 오직 여호와께만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해 있더라도 여호와만 바라봐야 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분노하심으로 자신을 책망하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합니다.

1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1-3)

시편 6편은 구원의 간구하는 ‘탄식의 시’입니다. 5편과 함께 기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6편은 ‘밤의 기도’라고 불립니다. 시인이 어떤 사정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시인은 먼저 여호와를 부르고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1)라고 호소합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분노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폭력과 악을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시인의 어떤 불의 때문에 분노하십니까? 시인과 여호와만이 아는 생략된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시인은 하나님의 분노와 격해진 노여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징계를 철회해달라고 간구할 수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믿기에 꾸짖음과 징계를 거두어달라고 간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면책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자의식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내세워 은총을 구하는 상황입니다.

시인은 그 비참함을 2-3절 시행에서 묘사한다. 시인은 반복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해졌습니다. 내게 자비를베푸소서. 여호와여, 내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쳐주소서’(2). 시인은 몸과 마음이 병들어 매우 쇠약해진 상태입니다. 뼈마디가 떨릴 정도의 극심한 고통에 짓눌려 있습니다. 뼈의 떨림은 육체적인 건강, 곧 몸의 기력이 쇠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극심한 내적 고통과 슬픔의 표현이기도 합니다(참조. 시편 31:10). 시인은 의욕과 활력을 상실한 상태이며, 스스로 일으켜 세울 힘조차 없어 특별한 은총을 구합니다. 이 와중에도 시인은 여호와가 참된 치료자라는 것을 알고(출애굽기 15:26; 민수기 12:13; 신명기 28:27,28; 32:39) 믿기 때문에 ‘나를 고쳐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다음과 질문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떨립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3절). ‘영혼’은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하고, 감각과 의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 시인은 고통 중에 간절하게 도움을 바라는 한 인간의 현실을 표현한 것이고, 그러한 인간 모두를 대표합니다. 뼈가 떨리는 것처럼 감정과 의지마저 떨리는 상태입니다. 그 정도로 시인의 전인격적이고 총체적인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어느 때까지인지 묻는 것은 탄식시의 전형성을 드러낸 표현입니다(74:10; 80:4; 90:13; 94:3). 시인은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르기에 하나님의 침묵과 부제가 대비되는 긴장감 속에서 떨고 있습니다.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간구(4-7)

하나님께서는 악행을 뿌리 뽑아 주실 것이며, 의인은 굳게 세워주시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 옵니까? 다윗은 심신이 병들어 수척한 상태에 있었지만, 고통을 끝낼 분이 하나님뿐임을 알기에 강청합니다.

4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4-7)

시인은 또다시 여호와를 부릅니다. 절실함의 강도가 세지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4a). 시인은 여호와의 분노와 침묵, 부재를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그의 직설은 거침이 없고, 구원을 청하는 근거도 분명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4b). 구원을 청하는 근거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 곧 헤세드입니다. 시인은 ‘실패하지 않는 사랑', 곧 흔들림 없는 견고한 사랑을 믿기에 간청할 수 있습니다. 그의 언어도 점점 더 절실해집니다. 시인은 심각한 질병 때문에 죽음 가까이에 있습니다. 누구라도 죽으면 여호와를 기억하지 않는다며, ‘스올’에서 당신을 찬미할 자 누구인가(5)라고 묻습니다. 죽으면 누구도 여호와를 기억할 자 없다는 반어적 의미의 수사학적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듣는 이에게 생각의 짐을 지우는 설득의 방식으로 히브리 시인들의 문학적 관습입니다. 죽음을 표현하는 다른 방식의 개념인 스올은 죽은 자들의 세계입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구약의 세계관을잘 드러낸 말입니다. 구약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명확한 구별을 유보합니다. 죽음은 땅 속 무덤으로 가는 일이고, 죽음의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입니다(전도서 9:10). 돌아올 수 없는 땅입니다(욥기 7:9; 10:21; 16:22). 망각의 땅입니다(시편 88:4). 그러니 시인은 잊힘의 땅, 죽은 자들이 가는 땅에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처지를 더 상세하고 과장되게 묘사합니다. ‘내가 탄식하여 피곤해지고 밤새도록 나의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울 정도로 내 요를 적십니다.’(6) 강물이 범람하여 침대를 물에 띄울 정도로 눈물이 흐릅니다. 슬픔과 고통으로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의 외로움과 그 생생함에 몸서리치는 기나긴 밤입니다. 더군다나 시인의 눈은 근심 때문에 약해지고, 자신을 둘러싼 대적 때문에 어두워졌습니다(7). 시인은 몸의 질병 때문에 마음까지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더군다나 적들 때문에 눈의 건강마저 극도로 악화되고 쇠약해질 만큼 고통스러워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치유를 확신(8-1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간구를 들으시고 기도에 응답해주셨다고 확신했기에 가능한 담대함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은 저절로 생기지 않습니다. 차마 기도할 수 없을 때라도 부딪쳐 기도할 수 없을 때라도 부딪처 기도해 보아야 합니다. 우묵한 기도를 통해 다시 용기를 회복한 다윗은 원수들을 행해 호통 칩니다.

8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8-10)

갑자기 시인의 어조가 바뀝니다. 암담한 고통을 버거워하며 탄식했던 목소리가 아닙니다. 여호와를 부르며 자신의 고통을 호소했던 모습과 완전 반대입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모든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8a). 확신에 차서 강경한 발언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8b)입니다. 이는 침묵하셨던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것을 확신하는 말입니다.

시인은 유달리 ‘여호와’ 곧 언약의 이름, 친밀하고 인격적인 이름을 여덟 번 부릅니다. 시인이 하나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 때문에 그의 간절함은 훨씬 더 강화됩니다.

그러면 ‘악을 행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고통과 근심을 가져오는 자들입니다. 아마도 7절에 언급된 ‘대적’을 다르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인의 말이 더 확정적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9). 첫 번째 ‘들으셨다’는 완료된 상태지만, ‘받으시리로다’는 완료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시인의 확신이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입니까? 시인은 이전에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두려움과 뼛속 깊은 떨림 속에서 여호와를 부르며 탄원하고 애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여호와가 자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계셨음을 확신하면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명합니다.

이제 그 믿음대로 몸과 마음이 치료되고 회복된다면, 주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를 근심하게 만들었던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며,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10). 이것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장차 원수들이 당하게 될 일을 내다보듯 확신에 차 있습니다. 여호와가 시인의 원수들에게 내릴 심판은 불명예와 수치로 인한 떨림입니다.

시인은 ‘나의 영혼이 매우 떨립니다. 어느 때까지 입니까?’(3)라고 질문했습니다. 이제 상황이 뒤집혔습니다. 시인과 그의 원수들 사이에 역전이 일어납니다. 육신적인 고통과 마음의 번민으로 떨었던 시인은 이제 새로워졌습니다. 반대로 시인의 원수들이 수치심과 비참한 나락으로 던져질 두려움 때문에 떨게 될 것입니다. 끝내 시인의 원수들은 부끄러워 물러가게 됩니다(10b), ‘물러가다’의 원래 의미는 ‘되돌리다’인데, 시인이 여호와를 부르며 ‘돌아오십시오’라고 간청한 말과 연결됩니다. 시인이 자기를 떠난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와 주시기를 간청했던 말을 상기시켜 이제 원수들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이 역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로 느꼈던 시간들이 하나님의 응답과 현존을 확신하는 시간으로 뒤바뀐 것은 물론이고, 자기를 괴롭혔던 악인들의 운명이 뒤집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이르러 괴로움을 호소했던 시인과 원수의 운명이 바뀐다면, 원수들은 악행 때문에 죽음 가까이까지 가야 합니다. 시인은 악인들이야말로 죽음 너머에 있는 죽은 자들의 세계, 곧 ‘스올’에 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시인에게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뇌보다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침묵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부재로 느껴졌던 침묵의 시간을 경험하고서야, 자기의 울음소리를 들으신 주님을 고백하며 삶의 반전을 굳건한 마음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시인에게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 임재의 또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지더라도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기도에 자신을 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기도하지 않고는 회복도 응답도 성장도 힘듭니다. 나뿐 아니라 절벽 끝까지 내몰려 밧줄 하나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를 협력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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