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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8-01)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편 8편 1-9절


천영희 시인에게 ‘아름다움’이란 상처가 피워낸 꽃으로, ‘앎음다음’에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꽃피운 아름다움만 봐도 수긍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얼마나 큰 앎음을 경험했느니 알기에 우리를 미물(微物)이 아닌 미물(美物) 되게 하신 주님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기에’를 외칩니다.

 

이 시편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달과 별들의 질서에 깃든 영광스러운 주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이것은 지상의 모든 대적자를 꺾으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위엄과 온 세계에 깃든 하나님의 왕권과 사람의 작고 유한한 위치를 지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존귀와 영광을 허락하시고, 친밀한 랑으로 돌보심을 노래합니다.

 

온 땅에 깃든 주의 영광을 찬양(1)

나이야가라 폭포나 그랜드케넨과 같은 위대한 창조 세계를 바라보면, 그 피조물의 거대함과 아름다움에 놀라고 압도당할 것입니다. 그것을 만든 하나님의 위대함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거대한 피조물이 아니더라도 하늘에 해와 달과 수많은 별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

시편 8편은 시편 전에서 처음 나오는 찬양시입니다. 1-7편까지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다가 시편 8편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우리 주’라고 부르며 주 이름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다윗은 ‘온 땅’인 창조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 거대함과 아름다움에 놀라고 압도당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인격적이고 안약적인 이름으로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친밀성을 표현한 이름입니다. 이때 ‘우리 주’에서 ‘주’는 구약에서 왕을 부를 때 사용되곤 하는데(열왕기상 1:11,37,43), 시편에서는 온 땅의 주(97:5)를 찬미하거나 ‘주들 중에 뛰어난 주’(135:5; 136:3; 147:5), 곧 최고로 위대한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칭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시인은 온 땅에 새겨진 그 이름의 위엄과 뛰어남을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a)라고 찬미합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에 대한 감격과 감탄을 표현하는 것은 전형적인 찬양시의 특징입니다. 특히 첫 소절 ‘당신의 이름’은, 둘째 소절 ‘당신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1b)로 확장됩니다. 온 땅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아름과 위엄을 하늘을 덮는 탁월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윗이 선택한 ‘우리 주’, ‘아름다움’, ‘영광’은 온 땅과 하늘에 넘치는 우주적 왕권을 강조합니다.

 

사람의 비천함(2-4)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뜻과 목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관찰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그 거대함과 다양함과 오묘한 조화로 인해 놀람과 경이로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자연 만물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2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2-4)

다윗은 갑자기 분위기를 전환시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연약과 겸손과 온유함을 상징하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 아기들과, 거만한 자들과의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어린아이들과 젖먹이 아기들의 입으로 당신의 권능을 세우셨다고 찬양합니다(2a). 이는 당신의 원수와 보복자를 파멸하기 위함입니다(2b). 어린아이, 젖먹이와 원수, 보복자를 대조하는 것도 독특합니다. 그 목적이 주의 원수들에게 보복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가장 연약한 자들을 통해 주님의 적대자들을 어떻게 파멸시킨단 말입니까? 대적자들은 인간의 오만한 힘을 자랑하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그들은 온 땅과 하늘에 넘치는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인식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가장 섬세한 돌봄을 받아야 할 어린아이와 젖먹이 아이들은 연약함의 상징입니다. 여호와 주님이 가장 연약하고 왜소한 존재에게 힘을 주셔서 권능을 나타내신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의 창조 솜씨를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태곳적 창조행위를 가까이서 바라본 것처럼 친밀하게 묘사합니다. ‘당신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당신의 하늘과 달과 별들’(3)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고, 주님이 수립하신 질서로 운행됩니다. 인간의 눈에 들어오는 하늘은 멀고 드높아 손으로 만질 수 없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달, 저 먼 곳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과 같이 인간이 닿지 못하는 우주 공간의 움직임이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작동하는 광경입니다. 광활한 세계를 운행하시는 커다란 하나님의 손과 그것을 만질 수 없는 사람의 작음이 비교되어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렇게 광활한 우주를 손수 운행하시는 하나님 앞에 사람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창조자 하나님의 위대함과 사람의 비천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그를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십니까?’(4)

다윗은 광활한 우주에서 사람을 가장 작은 파편에 불과한 존재로 인식하고 비하시켜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낮고 낮은 인간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대비시켜 하나님을 높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우주 활동을 묘사하여 인간의 왜소함을 자각시킵니다. ‘땅’(아다마)의 티끌로 만들어진 ‘사람’(아담)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인식하는 모습입니다.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탈피한 더 큰 세계 인식입니다. 다윗은 광활한 우주의 활동을 기획하신 하나님을 통해 인간의 무기력함을 까발린 셈입니다. 이로 인해 독자는 땅에 속한 사람은 하늘을 만드신 하나님의 돌봄 없이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이며 가련한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사람의 존귀함(5-8)

세상에는 의인이 악인에 의해 억압당하고, 곳곳에 부조리가 만연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죽으셨다거나 창조세계에 대해 그분의 무관심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처음 창조 세계가 참으로 아름다운 것처럼 결국 악인은 심판하시고 그 세상을 아름답게 회복하실 것입니다.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5-8)

사람의 작음과 비천함을 강조해야 하나님께서 위대해집니까? 그런지 않습니다. 다윗은 반대로 사람의 존귀함도 노래합니다. ‘당신이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부족하게 하시고, 영광과 위엄의 관을 씌우셨습니다’(5).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모자라게 하셨을 뿐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람을 하나님과 비등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편했던지 고대 역본들(70인역, 시리아어역, 아람어역, 라틴어역)은 ‘하나님’을 ‘천사’로 바꾸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라는 표현이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주인으로서 지배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며, 당신의 통치권을 자기를 닮은 사람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창세기 1:27-28). 이것은 시인이 ‘여호와 우리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다고(1) 선포적인 고백을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광과 위엄’관을 씌우셔서 통치권을 부여하셨다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마치 창조의 사건을 떠올리듯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부여하신 것을 노래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그가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당신은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6). 5절에서 ‘영광과 위엄’의 관을 씌우셨다는 말을 구체화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이 만드신 만물을 다스릴 왕적인 통치권을 부여하셨다는 뜻입니다. 특히 ‘그가 다스리게 하셨습니다’라는 말은 왕에게 부여된 권위를 일컫습니다(사사기 8:22-23; 사무엘하 23:3; 시편 103:19 등). 마치 한 국가의 왕이 나라를 통치하듯 사람이 자연을 다스리고 통치할 권한을 하나님이 위임하셨습니다. 물론 사람에게 부여된 왕적인 통치권은 하나님의 권위를 사람이 일부 위임받은 것이지 소유원의 의미는 아닙니다. 만물의 주인은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뿐입니다(3).

사람에게 하나님이 위탁하신 통치권의 범위는 가축에서 야생의 들짐승, 새들, 물고기들, 바다의 모든 생물들에까지 미칩니다(7,8).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동물이 교감하고, 동물과 짐승이 사람을 따르고 복종하도록 하셨습니다. 우주의 왕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돌보듯이(4), 사람은 각종 가축에서 바다 생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돌봅니다. 사람의 왕적 통치대상의 순서가 점점 확장됩니다. 사람과 가까운 가축들(소, 양)에서 시작하여 고대인들이 혼돈의 장소로 여겼던 바다와 그곳에 사는 생물에까지 미칩니다. 바닷속 신비로운 생물까지도 사람의 관리와 보호 아래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돌봄과 보호를 받는 사람이 그렇게 창조세계를 돌보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보다 조금 부족한 존재’(5)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통치권이 아니라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약간 부족한 정도의 영광과 존귀를 주셨다는 것을 망각한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각종 짐승들에게 폭력을 행사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류의 왜소함과 비천함(2-4)과 인류의 영광과 존귀함(5-8)을 서로 대비시켜 긴장감 넘치고 역동적인 관계를 설정하여 노래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초대교회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 이후 높임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인 통치와 관련시켜 기독론적인 의미로 해석되고 수용되었습니다.

 

온 땅에 가득한 주의 영광 찬양(9)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손으로 이 세상을 시작하셨고 지금도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우리를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상을 통치하라고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 세상을 통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성도들의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9)

이 시가 처음 시작할 때처럼 주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다윗은 하나님보다 조금 부족한 사람이 영광과 위엄의 관을 쓰고 왕적인 통치를 시행하는 모습을 노래하는 것으로 끝맺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공유할 수 있더라도 사람은 땅의 흙과 먼지로부터 하나님의 손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기 위함입니까? 다윗은 처음 생각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끝맺습니다. 다윗은 인간의 왜소함과 비천함뿐 아니라 사람이 영광스러운 하나님 통치의 대행자로 부름 받은 은총을 노래했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존엄성과 영광이 하나님 은총에서 시작되었기에 그분을 찬양하는 것은 사람 본연의 임무입니다.


온 땅에 드리워진 하나님 이름의 영광과 위엄은 찬양의 이유 그 자체입니다. 젖먹이들과 어린아이들의 찬양을 통해 원수를 제압하신 하나님께서는, 한낱 사람으로 광활한 우주를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존재를 작다 않으시고 크게 사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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