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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5-01)


다윗의 아침에 드린 기도

시편 5편 1-12절


성도에게 하나님의 보호가 필요한 것은, 주위에 유혹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보호와 기쁨을 선물로 받아 어려움을 이겨 나가겠다는 다짐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토하며 기도한 것이 너무 오래된 옛 추억이 되진 않았습니까? 주님 앞에 어떻게 마음을 활짝 열 수 있겠습니까?

 

시편 5편은 위협적인 거짓 고소, 적대적인 박해 상황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식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탄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악인들이 심판 받기를 간구하는 기도가 됩니다. 그렇게 이 시는 다윗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의인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실 기쁨을 확신합니다.

 

억울한 심정을 호소하는 기도(1-3)

다윗은 애타게 하나님을 찾습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아침부터 당신으 찾는 시인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애끓는 생각까지 알아듣고 응답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불의와 피 흘리는 것과 오만과 거짓과 행악을 미워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며,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고 그들을 멸망하게 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1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2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1-3)

다윗은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다윗의 첫 마디가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1a)입니다. 보통 히브리어 문장은 동사가 가장 앞에 위치합니다. 목적어 ‘나의 말’이 순서상 앞서도록 배열된 것은 목적어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나의 말’이 무엇인지 집중해서 들어주기를 간청한 것입니다. 둘째 소절은 히브리어 본래 순서대로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1b)이라고 합니다.

이 구성은 소절과 소절의 교차구조(X형)안에서 나의 말은 곧 나의 신음소리가 되고, 들어달라는 명령형은 헤아려달라는 말과 동의적인 의미관계를 형성해 히브리 시의 형식미를 오롯이 드러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을 표시하는 친밀한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간청했다면, 이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을 부르며 도움을 청합니다. 신음소리가 아니라 외치는 목소리를 주의 깊게 들어달라고 간구합니다(2).

다윗은 자신의 부르짖는 목소리에 경청해주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이 부르는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자이며 통치자로서 그분이 곧 ‘여호와’라는 신앙고백에 근거합니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분이고 응답하시는 유일한 존재이며 참 재판관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요청입니다(참조, 사무엘하 15:2). 하나님의 정의로운 판결을 기대하는 다윗의 마음은 한층 간절해집니다.

다윗은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호명하며 믿음을 표현합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3). ‘아침에’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아침은 짙은 어둠을 몰아내고 도착하는 벅찬 희망의 시간입니다. 이때 준비하고 기다린다는 말은 제사 준비를 뜻할 수 있지만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기도하며 사정을 아뢰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킬 것입니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시편 46:5;참조, 시편 130:6)라는 고백처럼 마음의 준비와 응답에 대한 기다림은 믿음 없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는 악인(4-6)

악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지만, 다윗은 성전에 들어가 지성소를 향하여 경배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새앆하지 않았습니다. 악인과 다른 점은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의지하는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번제물보다 더 좋아하시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4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4-6)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그 행위를 미워하시는 분임을 확신합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4). 죄악과 악은 불법한 온갖 행위들과 올바르지 못한 행동들, 도덕적인 타락, 질적으로 나쁜 온갖 것입니다. 악 그 자체나 악행도 하나님 곁에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다윗에게는 오만한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5a).

오만한 자는 자랑을 일삼는 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만만한 자들입니다. 스스로 돋보이게 빼어나게 꾸미는 자입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도덕적인 결함이나 타락만이 악행이 아닙니다. 다윗이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5b)라고 말하듯 ‘오만한 자들’과 ‘모든 행악자들’이 평행관계 안에서 동의적 의미입니다. 그러니 자랑을 일삼는 것도 악행입니다. ‘행악자들’이라는 말은 시편에서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일컫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 갖가지 고통과 슬픔,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악인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거짓말하는 자이며,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 속이는 자들입니다(6a). 시인은 하나님이 이들을 멸망시킬 것이고, 싫어하신다(6bc)고 확신합니다. 온갖 거짓과 자기기만으로 연약하고 무죄한 이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자들의 마지막은 파멸입니다. 물론 여기 묘사된 악인들이 시인의 실제적인 대적을 묘사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기만으로 타인과 공동체에게 고통과 슬픔을 하거나 속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들, 사기 치는 자들은 모두 악의 본질을 드러낸 것이니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인도하심(7-8)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도 여러 가지 형편을 통해 우리를 온전하게 빚고 계십니다. 억울한 처지에서도 자신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숨 쉬고 있을 때가 아니 큰 숨을 몰아쉬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입니다. 바른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7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8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7-8)

다윗은 악인들과 반대입니다. 그가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당신의 집에 들어갈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거룩한 성전을 향해 두려움으로 경배할 것입니다(7). 다윗이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 때문입니다. 자기의 의로움이나 선행 때문이 아닙니다. 두 시행이 완벽한 문법적 평행구조를 이루어 각 시행의 의미를 보충합니다.

‘당신의 집/당신이 거룩한 성전 //

당신의 풍성한 사랑으로 두려움으로//

내가 들어갈 것입니다. 내가 경배할 것입니다’가 서로 어울립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보이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랑입니다. 언약에 근거한 사랑,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주의 사랑 때문이고, 거룩한 성전을 향해 엎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때 ‘경외’, 곧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주님의 풍성한 사랑을 경험한 데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공경의 마음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8), 시인은 단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함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의 인도함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곧 그분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주님의 의로운 판단을 주님의 응답으로 믿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악인(9-10)

하나님께서 의롭게 판단하셔서 자신의 억울함이 해결되고 이제 아무도 자신의 길을 애매하게 가로막지 못하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신실하지 못하고 아첨과 악을 일삼는 인간에게 기대어 공평한 범과 제도가 세상에 서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그 악인들이 자기 꾀에 빠지게 심판하시는 주권자 하나님만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9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9-10)

다윗은 악인들을 하나님 앞에 고발하고(9), 저주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합니다(10). 왜 악인들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지를(5) 구체적으로 나열한 셈입니다. 악인들의 입에는 신실함이 없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파괴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들의 혀는 아첨합니다(9). 다윗이 묘사한 원수들의 특징은 온갖 중상과 비방, 속임수가 섞인 거짓된 말과 파괴를 일삼는 마음입니다. 마음과 언어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악인들을 묘사한 시인의 가차 없는 표현이 악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꿰뚫고 있습니다. 다윗은 파멸로 이끄는 악인들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다윗은 격정적인 마음을 감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악인들의 죄에 대한 판결을 구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해주십시오’(10). 하나님께서 벌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악인들이 자기 꾀에 스스로 빠지기를 요청합니다(10b). 악인들이 자기들의 음모와 사기 행각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길, 곧 나락으로 떨어지길 요청한다. 끝내 하나님이 쫓아내시기를 간청합니다(10c). 다윗의 이러한 대담한 요청의 근거는 분명합니다. 간결한 이유 절이 이것을 반영한다. ‘그들이 당신을 거슬러 반역했기 때문입니다’(10d). 시인은 악인들의 배반과 반역, 곧 배역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의인의 행복과 은혜를 확신(11-12)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로 보호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피난처로 삼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새가 자기 새끼를 날개 아래 품듯이 지키시며 은혜로 큰 방패 삼아 보호하십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백성 됨의 복을 누리며 언제나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11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11-12)

악인들에게 벌이 내려지기를 간구했던 격정적인 언어는 은총을 구하고 찬양하는 언어로 바뀝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피하는 모든 이들이 그 보호 때문에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움으로 노래하며,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당신 안에서 즐거워하기를 바랍니다(11).

하나님께 피하는 자들과 그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임재를 경험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왜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했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조상들을 노예적인 삶에서 해방시켜 언약 백성으로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출범시키시던 때를 강조하면서 하나님 이름 여호와, 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출애굽기 3:13-15; 6:2-3; 34장) 상기시키려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윗은 다시 여호와를 부르며 의인에게 복 주시고, 방패 같은 은혜로 의인을 호위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12).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악뿐만 아니라 잠재적인 모든 악으로부터 여호와가 의인을 보호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는 여호와가 역사와 시간의 주인이며 선과 악 사이에서 판결하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기도이며 기다림입니다.


외인과 악인의 그명한 대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의인은 결국 하나님께 닿겠지만, 의인들을 괴롭힌 악인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도려내실 것입니다. 자신과 자녀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리에 남길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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