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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3-01)


여호와께만 있는 구원

시편 3편 1-8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신앙 그 이유 하나만으로 직장이나 사회에서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또 주위에서 나를 미워하고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 내 원수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어려움 중에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 전체의 서론격인 1-2편의 ‘행복’의 문을 통과했습니다. 3편은 원수들의 위협에 따른 고통과 좌절을 정직하게 호소하는 ‘탄식시’입니다. 이후 7편까지 시편의 많은 분령을 차지하는 탄식시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행복한 사람’에게도 고난과 시련은 휘몰아치는 광풍처럼, 때로는 낯선 방문객처럼 찾아옵니다. 3편은 거친 현실에서 주님을 향해 탄원하며 평정을 찾아가는 진실한 노래입니다.

 

많은 대적들을 불평하며 탄식(1-2)

어느 때보다 어려운 절박한 상황에 빠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뜻하지 않게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반대로 조롱 당하는 경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모두 들 돌린 건 같은 상황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한 가지 잊지말아야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1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2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1-2)

시편 3편에 첫 두 절은 시인을 둘러싼 적들에 대한 분노와 탄식이 동의적인 평행구로 배열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표제가 ‘다윗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이라고 붙습니다. 제목을 제외한 시행의 첫마디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대적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음을 탄식합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반역하여 도망쳤을 때 쓴 시로서 그의 힘든 마음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 너무 많은 이들이 자기를 대항하려고 일어나고 있다(1)고 탄식합니다. 시인은 어떤 비밀도 숨길 수 없는 분 앞에서 위험을 무릅쓴 상태입니다. 시인은 자신을 그럴싸하게 꾸미지 않습니다. 다른 탄식시들은 이보다 더 거칠고 위험스러워 보일 때도 있습니다. 시인이 불평과 탄식의 언어를 쏟아내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대적이 누구입니까? 구약에서 보통 ‘대적’은 정치적 군사적 차원에서 적대 감정을 가진 이들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에게 적의를 가진 원수나 경쟁자들 같은 자들이지 국가적인 전쟁 상황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목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칠 때 지은 시라고 소개합니다. 이때는 아마 이스라엘의 민심이 다윗이 아니라 압살롬에게 돌아갔다는 소식을 접했을 즈음일 것입니다(사무엘하 15:13).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여호와께 고합니다.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2)고 조롱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셔서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그를 위해 일하지 않으신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빈정거림이 괴롭습니다. ‘어찌 그리 많은지’,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보듯 ‘많다’라는 형용사를 세 차례나 반복할 만큼 사람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말로 왕의 사기를 짓밟습니다. 시인은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입니까?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하나님의 언약의 이름, ‘여호와’를 부르며 탄식의 목소리로 호소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실 하나님을 확신(3-4)

많은 사람들은 이런 고난의 때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자책합니다. 때로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기도 합니다. 성도라고 고난이 피해가지 않습니다. 성도이기에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무리 큰 고난의 때에도 부르짖고 의지할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3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4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3-4)

그러나 시인은 거친 탄식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는 방향을 바꿔 여호와께 신뢰를 고백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당신은 나를 둘러싼 방패십니다. 나의 영광이시고 내 머리를 들어 올리시는 분입니다’(3). 탄식은 어느새 신뢰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시인이 갑작스럽게 마음을 고쳐먹은 것입니까? 그보다 탄식은 신뢰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 없이 이름을 부르며 탄원의 목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시인은 여호와를 다시 부르는데, 이제 ‘당신’이라고 호명합니다. 시인은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당신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질 만남을 확신합니다. 자신을 객체화하지 않고 1인칭 소유격 대명사(‘나의’)를 반복하며 하나님과 자신의 거리를 밀착시킵니다. 시인에게 여호와는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실 방패이고 영광입니다. 영광은 스스로 취할 수 없습니다. 왕의 영광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니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시인 다윗은 자기의 위엄과 가치가 회복될 것을 믿습니다. 왕은 원수들과 많은 이들의 공격을 받았어도 여호와는 나의 머리를 드시는 분임을 확신합니다. 메리를 드는 것은 법정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 죄가 없음을 인정하는 행위거나 이전의 지위로 복귀됨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공적으로 억울함을 풀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 회복시키실 여호와를 굳게 믿습니다.

시인의 확신은 더 커졌고 여호와를 굳건히 붙듭니다. ‘나의 목소리로 내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가 그의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십니다’(4). ‘거룩한 산’은 시온입니다. 다윗 왕의 대관식이 거행된 장소입니다(시편 2:6). 거룩한 산 시온, 곧 예루살렘은 모든 이스라엘에게 신앙의 중심이고, 우주의 중심이며, 다윗과 솔로몬의 위대한 정치적 힘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옛적 다윗의 조상들에게 시내산에서 계시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임재의 처소를 시온으로 옮기셨다는 데 있습니다(시편 68:8,17). 그러므로 이곳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로서 예언자들도 정의와 평화의 세계 질서가 실현될 곳으로 간직합니다(이사야 2:2-4).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5-6)

사람은 대게 조금이라도 불안한 상황에 처하면 근심 걱정에 싸여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기도하면서도 근심으로 잠 못 이루고, 겹쳐 오는 고난에 하나님마저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버리지 않습니다. 거룩한 산 시온에 자신을 왕위에 세우셨으니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5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5-6)

시인은 내가 눕고 내가 잠자고 다시 내가 깨는 것이 여호와가 자기를 붙들고 계시는 증거라고 노래합니다(5). 시인은 누구의 간섭과 방해 없이 오로지 자신의 주체적인 고백을 강조하고 싶었습니까? 없어도 문장 구성에 문제없지만 1인칭 주격 대명사 ‘내가’를 덧붙입니다. 사람들이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2)고 비아냥거리는 말이 틀렸다고 강조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는 사람들의 적의에 찬 말에 무너지지 않고 평안히 일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증거입니다. 그는 밤의 어둠이 휴식이 되도록 잠들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깨워 생명을 지켜주시는 분이라고 확신합니다. 시인은 분통 터지는 마음, 고통과 분노를 솔직하게 표현한(1,2) 것만큼 강인합니다. 시편의 이러한 솔직함과 분노의 표현은 소망으로 이어지는 히브리 시인들의 문학적인 관행입니다. 시인의 대담한 표현은 계속됩니다. 시인은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여호와를 향한 그의 신뢰가 평정심을 찾게 했습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무리의 사람들’(새번역은 ‘천만대군’)이 나를 에워싸 끌어내려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6). 시인은 어찌하여 나의 대적이 많은지를 탄식했지만, 이제 적대적인 위기가 절정에 이른 순간에도 두렵지 않습니다. 시인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져도 잠자고 다시 깨어날 수 있을 만큼 깊은 고요와 확신에 차 있습니다.

 

원수의 패배를 구하는 기도(7-8)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방패가 되사 빗발치는 원수의 화살 속에서도 지켜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영광이 되실 때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머리를 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낙심하고 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때도 얼굴을 당당히 들고 걸을 수 있게 하십니다.

7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7-8)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 승리를 간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7절 시행의 첫 소절은 강렬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십시오. 나를 구원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7a) 이 말은 자기를 치려 하는 자들이 많다고 탄식을 것과(1) 대조됩니다. 시인은 지난날 여호와가 행하신 일을 회상하듯 말합니다. ‘당신이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셨고, 악인의 이를 꺾으셨습니다’(7bc). 특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이 말은 옛적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하고 전쟁하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나갈 때 했던 말입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민수기 10:35), 시인은 시내산에서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떠날 때의 상황을 현재화합니다. 그는 자기 조상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현재로 소환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불확실성과 불안을 가라앉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간구합니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있으니 당신의 복을 당신의 백성에게 내려주시기를 원합니다’(8). 시인은 자기구원에만 관심 갖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에게 복이 내려지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는 통치자로서 갖는 책임의식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탄식을 멈추고 ‘구원’과 ‘복’을 하나로 연결시켜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구하는 ‘복’은 시편 1편의 ‘복’, 곧 ‘행복’과 다릅니다. 이 ‘복’은 흔히 신의 은총을 구할 때 사용하는 축복(blessing)이며 하나님의 선물 개념입니다. 구원의 주체가 여호와이듯 복의 주체도 하나님이기에 간청합니다. 이것은 구원과 복이 하나님 활동의 핵심임을 밝힙니다. 구원은 삶에서 경험하는 구체적인 위기나 억압의 현실에서 도와주고 다양한 필요를 채워줌을 뜻합니다. 복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가능성들을 지속적으로 공급해주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후에도 ‘복’을 구하는 시인들의 기도는 계속됩니다(5:12;28:9;29:11;67:1,6,7;115:12-13; 133:3;147:13). 무엇보다 시인의 최종 간구는 백성을 향한 공동체적인 복을 요청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마지막 시행은 믿음의 공동체성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빛을 비춰줍니다.


피폐한 삶에 오래 노출되다 보면 하나님의 응답이나 존재에 대해 무덤덤해질 때가 많습니다. 더는 믿음을 갖고 기도할 여력도 사라지고, 응답이 지체되면 그나마 있던 믿음의 뿌리도 흙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향한 구원이 반드시 다가옴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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