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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002-01)


복 있는 사람의 신앙관

시편 2편 1-12절


세상은 전쟁, 분노, 무질서 등으로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절망스러운 세상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께 집중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해 가시는 또 다른 소망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휘둘리거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시편 2편은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의 왕권을 통해 인간 왕권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 관계를 묘사합니다. 이것은 지상의 열방과 통치자들의 행복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 통치를 즐거워하는 것에 근거함을 역설합니다. 또한 ‘나의 왕’과 ‘나의 아들’의 호칭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종말론적 메시아 개념으로 확장합니다.

 

열방의 왕들, 메시아 왕권에 대적(1-9)

하나님의 백성은 주의 말씀을 묵상하지만(시편 1:2), 세상 사람들은 헛된 일을 꾸밉니다. 그들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서 감히 허세 부리는 죄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꾸미는 헛된 일, 악인의 꾀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의 거만함과 흡사하지 않습니까?(창세기 11:3-4) 그들은 복이 없는 죽음의 삶인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1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4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5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6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8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1-9)

시편을 읽을 때는 다윗의 마음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시편을 지금 우리 상황에 비추어 읽는 것이 잘 읽는 것입니다. 시편 1편과 2편 사이에는 표제어(標題語)가 없습니다. 표제어가 없다는 것은 이 시편에 대해 누가 기록한 사실이 없다는 것입니다. 1편과 2편이 연결된 시라고 보기도 합니다. 이 시는 ‘제왕시’, ‘즉위시’라고 하기도 합니다.

(1) 여호와와 왕을 대적하는 열방들(1-3)

먼저 시편 2편은 의문사 ‘어찌하여’로 묶이는 시행들의 집합입니다. 시인은 걱정에 찬 질문으로 말문을 열면서 의분을 표합니다. ‘어찌하여’로 시작한 질문은 뭇 민족들의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강렬하게 개탄하기 위해 의 도적으로 선택한 수사학적인 기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신 절대 주권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 절대 주권의 왕을 대적하며 반역을 꾀하는 나라들이 있다는 것을, 시인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들이 전쟁을 위해 요란하게 움직이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작전과 음모 꾸미는 것을 질타하기 위한 방식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항상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국가 단위 전쟁을 치렀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의 공격으로 치열한 영적인 전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강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상한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게 하면, 주변 나라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벌벌 떨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게 될 것인데, 왜 이렇게 약하고 보잘것없는 나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먼저 시인은 이방 나라들이 소동을 피우고 법석 떨고, 민족들이 내용 없고 가치 없는 것들을 퍼뜨리고 꾸며 소동을 일으키는 행위를 비난합니다(1). 또한, 시인은 외칩니다. 어찌하여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 곧 통치자들이 일어나 함께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를 향해 대적합니까(2)? 시인은 하나님의 왕권과 그가 세우신 왕에 대항하여 반기를 든 열방과 폭력과 위협과 음모로 가득한 세상을 고발하듯이 말을 잇습니다.

시인은 열방의 왕들이 내거는 구호를 반박하려는 듯 그대로 인용하여 옮깁니다.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3), ‘맨 것’과 ‘결박’은 일종의 은유입니다. 이는 통치와 통제를 뜻합니다. 곧 열국의 왕들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를 통해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의도가 없음을 드러낸 말입니다.

(2) 하나님, 시온에 메시아 왕을 세우심(4-6)

시인은 뭇 민족들과 열방 통치자들의 음모와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전합니다. 하늘에 앉으신 자, 곧 주님이 그들을 비웃고 계십니다(4).

시인은 지상의 통치자들이 볼 수 없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땅 통치자들의 반역과 오만을 조롱하시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며 그들을 향해 말씀하시고, 불타오르는 진노로 호령하십니다(5). 시인의 상상력이 가미된 극적인 표현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의 중요성을 각성시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지상의 통치자들을 두렵게 하십니까? 시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6). ‘나의 왕’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신 후(사무엘하 7:16) 예언자들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세워지는 새로운 왕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의 거처, 시온은 어디입니까? 본래 시온산은 다윗성을 일컫습니다(사무엘하 5:7). 그러나 이 의미가 확대되어 이후에 예루살렘과 솔로몬 성전이 서 있는 언덕이 됩니다. 사실상 시온과 예루살렘은 동의어입니다. 그러니까 시온산은 하나님이 구별하신 산으로서 주님이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나의 왕’(6), ‘기름부음 받은 자’(메시아)는 포로기 이후에 새로운 왕권을 암시하는 새로운 계약으로 발전됩니다(예레미야 31:31-34). 이후 지상의 왕에게만 적용된 ‘메시아’(2:2)는 종말론적인 메시아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때문에 초기 기독교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인식된 예수님은 히브리어 ‘메시아’에 상응하는 헬라어(그리스어)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받으신 것입니다.

(3) 하나님, 메시아 왕의 우주적인 왕권을 약속하심(7-9)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로 시작하는 7절 시행은 왕의 선언과 왕이 인용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새롭게 왕이 된 사람이 기름 부음을 받고 왕좌에 앉은 후 하나님께서는 공식적으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말은 왕의 합법성과 정통성을 부여하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누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다윗의 왕권을 잇는 후손들입니다(삼하 7:14). 따라서 이것은 다윗 가문의 영원한 왕권에 대한 약속이 재천명 되고 갱신된 선포로서 기능합니다. ‘오늘 내가 낳았다.’라는 비유적인 표현은 즉위식으로 세우지는 왕의 신성함과 새로운 출생을 나타냅니다.

또한, ‘낳았다’라는 표현은 출생만이 아니라 부활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시온에서 왕으로 세워졌다가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설교를 합니다. 사도행전 13장 33절에서는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리고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이 된 자에게 하나님께서 ‘내게 구하라’(8)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왕에게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구조, 왕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를 것을 약속하십니다(8). 고대 근동 나라들의 왕은 신적인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왕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 인간적인 존재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은 열방을 ‘쇠 지팡이로 깨뜨리고 질그릇처럼 부수는’ 힘과 권세를 부여받습니다(9). 매우 강하고 견고한 통치권의 상징인 ‘쇠 지팡이’와 그 반대 묘사인 ‘질그릇’이 대비되어 철저하고 완전한 파괴의 실행을 상상하게 합니다. 곧, 다윗 혈통의 왕이 실행하는 강력한 통치권이 ‘질그릇’ 같은 땅의 군주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범세계적인 통치가 실현됨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권세는 반역적이고 오만한 나라들을(2:1-3) 향해 행사하는 힘과 권세입니다. 그 권세는 왕의 인간적인 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권세에 기초한 것입니다.

 

열방의 왕들에게 메시아 왕권을 받들도록 권면(10-12)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그분이 왕으로 다스리시니, 그의 백성은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인간의 참된 지혜와 계획을 포기하고 하늘의 지혜와 교훈을 얻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고 아들에게 항복하고 섬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살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 세상에게 살길, 복의 길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10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11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10-12)

시온, 곧 예루살렘 왕이 등극하는 장면입니다. 시인은 오만한 지상의 왕들과 권력자들을(2:1-3) 향해 경고하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시인의 의도가 정확히 드러납니다. 시인은 군왕들에게는 지혜를 얻고, 재판관들에게는 교훈을 받으라고(10) 경고합니다. ‘지혜를 얻으라’는 말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통찰력을 얻으라는 권면이지만, ‘교훈을 받으라’는 말은 좀 더 엄격한 표현으로 징계를 받고 이치에 맞게 자기를 수정할 줄 알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왕들과 재판관들을 향한 조언은 계속되는데, ‘여호와를 두려워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하라’(11)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지혜 신앙 전통에서 여호와 경외는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입니다(잠언 1:7; 9:10). 그러면 어떻게 떨면서 즐거워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개념적인 모순입니다. 그런데 11절은 시편의 평행 관계 속에서 두려워함과 떠는 것이 동의적인 의미인 것처럼, ‘섬기라’와 ‘즐거워하라’는 명령도 한데, 묶여 여호와 섬기는 것을 즐거워하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왕들은 ‘하늘에 앉으신 이’(4)에게 복종하라는 시인의 강력한 요청인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12a)고 합니다. 여호와가 분노하여 길에서 멸망하지 않도록, 그분의 진노가 일순간 확 불타오르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12bc). 입맞춤은 경의와 자신을 맞추는 겸손과 복종의 표시입니다(참조, 삼상 10:1).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경고입니다. 여호와를 기쁨으로 섬기든지, 망하든지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향한 섬김은 반역적이고 오만한 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들이 여호와를 섬긴다면 파멸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주님이 기쁘게 받아주실 것입니다.

시인의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자는 행복하다’(12d). 경고 후에 제시된 초대입니다. 이는 시편 1:1의 ‘행복한 사람’과 서로 어울려 ‘행복’이 1, 2편 전체를 감싸는 구조를 제시합니다. 시인은 시온에 세우신 하나님의 아들인 왕의 통치를 받들도록 경고했고, 이제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 피하여 행복을 누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목적 때문에 시편 입구에 자리 잡은 두 편의 시가 이러한 구성으로 배열되었습니까? 사람이든지 민족과 나라든지 삶의 ‘행복’이 무엇에 기초를 두는지, 시편 신학의 일면을 시의 언어로 역설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통치자들의 ‘행복’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지를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행복한 사람’ 또는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읊조리며 깊은 묵상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인 것처럼(1:1-2),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무거운 책임감을 가질 왕들과 통치자들의 ‘행복’의 기초와 근원이 무엇인가를 경고하며 권고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2편은 각 사람에서부터 나라의 권력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가르침과 통치권을 겸손히 받들고, 그 보호 아래 있는 것이 행복임을 역설합니다.


우리 시대는 실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권력은 하나님을 지나치다 못해 활 시위를 겨누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상은 모든 권력이 무릎 꿇는 세상이요, 하나님께 피신한 자들에게 복 주시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어떤 지휘에 맞춰 살아가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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