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001-01)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시편 1편 1-6절
사람들은 누구나 복 받기를 원합니다. 누가 복 없는 인생을 꿈꾸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사무엘상 2:6-7)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은 명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아무나 축복하지는 않으십니다.
시편 1편은 2편과 함께 시편 전체에 입문하는 서론처럼 놓여 시편의 핵심 주제를 표현합니다. 곧 기도와 감사와 찬양으로 가는 입구입니다. 1편은 이른바 ‘토라 시편’ 또는 ‘지혜 시편’으로 하나님의 법을 깊이 묵상하고 마음에 세기는 의인의 행복과 악인의 멸망을 대비하여 의인의 길을 걷도록 교훈합니다. 의인은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지속적인 돌봄을 받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1-6)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고 있는 두 부류의 사람 즉, 의인과 악인에 대해 어떻게 역사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시인은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을 선명하게 대비시킵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를 도전하게 합니다. 멸망의 길과 형통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1-6)
시편을 처음 읽었던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에스라로부터 모세를 통해 받은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시편 전체의 서론이자 시편의 핵심 주제를 나타내는 시편 1편도 여호와의 율법을 강조합니다. 시편 1편이 말하는 복은 ‘아시와르’의 복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멸망’을 선명하게 대비시킵니다. 시편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도전하게 합니다. 멸망의 길과 형통의 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알려 줍니다.
(1) 행복한 사람의 길(1)
시편 전체와 1편을 시작하는 첫마디는 ‘복 있는 사람’, 곧 ‘행복한 사람’입니다. ‘복’의 개념은 주로 물질적인 소유와 번영의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복 있는’으로 번역된 형용사 ‘아슈레’는 ‘행복하다’라는 말에 더 가깝습니다. 행복은 물질적인 소유의 넘침이나 세속적인 성공의 여부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와 관련 있습니다. 시인은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복의 개념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의 어떠함을 묘사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의 꾀(음모),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를 피하는 사람입니다.
의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집에 앉았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날 때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칩니다(신명기 6:4-9). 그렇기에 악인들의 꾀를 따르거나 죄인들의 길에 서거나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1). 악한 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거나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않습니다.
1절은 중요한 단어들이 점층적으로 나열되고 그 의미가 확장됩니다. 악인 죄인 오만한 자 모두 동의적인 차원에서 연결되고, 이들의 행위와 존재를 특정 짓는 꾀-길-자리가 순차적으로 나열됩니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과 어울려 걷지 않고 서지 않고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곧 악인-죄인 오만한 자와 반대되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악인들의 음습한 음모, 죄인들이 매우 그럴듯하고 매끄럽게 다져놓은 길, 경건을 비웃는 거만한 자의 자리를 기웃거리지 않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2) 여호와의 법과 즐거움(2)
악하고 반역적이며 오만한 행위를 피하는 것이 행복의 시작이라면(1), 시인은 좀 더 적극적으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길을 노래합니다. 행복은 악한 무엇을 피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무엇을 받아들일 때 충만해집니다. 행복한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 곧 ‘여호와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읊조리며 깊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토라’는 본래 ‘가르침’, ‘교훈’을 뜻합니다. 삶의 방침이며 지침입니다.
의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기에 오직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합니다(시편 1:2; 예레미야 17:7-8). 여호와의 율법을 버거운 짐과 의무로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토라’의 본래적 의미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을 위해 바람직한 삶의 길을 안내하는 하나님의 애정 어린 가르침입니다. 길 없는 광야에서 살아갈 방향을 설정하도록 주신 지침입니다. 온종일 낮은 목소리로 여호와의 가르침을 읊조리며 건져 올린 깊은 성찰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을 즐거워함이 악인과 오만한 자들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입니다.
(3) 시냇가의 나무와 같은 의인(3)
‘악인 죄인 오만한 자’의 길을 피하고, 여호와의 가르침을 온종일 읊조리며 깊이 새기는 사람의 행복은(1,2) 삶의 충만으로 귀결됩니다. 그는 비가 오지 않는 계절에도 물줄기가 끊이지 않는 강가에 심긴 나무가 됩니다.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나무처럼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합니다(3).
악을 떠난 ‘행복한 사람’(1)은 생명의 활기로 충만하여 열매 맺고 번성하는 나무처럼 안전합니다(참조. 에스겔 47:12). 나무가 계절에 맞게 정해진 때에 열매 맺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 질서와 시간표에 따라 사는 삶입니다. 순리에 맞는 삶입니다. 그러니 서두르거나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질서와 때에 따라 안전한 삶을 누리는 행복한 사람이 의인인 셈입니다. 물론 행복한 사람은 의인이라는 직접적인 명시는 없으나 4절에서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은 악인과 6절의 의인과 악인 대비는 자연스럽게 ‘행복한 사람-시냇가에 심긴 나무-의인’을 질적으로 하나처럼 연결합니다.
(4)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4)
그러나 악인들은 ‘그렇지 않다’. 시인은 3절과 대조하여 강조합니다. 2절에서 ‘오직’이라는 한정 부사로 시행을 강조한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악인의 삶은 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겨’와 같습니다. 이 직유법은 악인을 가볍고 무익하고 텅 빈 껍데기 같은 존재로 그려냅니다.
더군다나 ‘겨’(모츠)와 3절의 ‘나무’(에츠) 비교는 의도적으로 비슷한 음가를 활용한 언어유희처럼 보여 악인의 운명을 암묵적으로 비유입니다. 눈여겨볼 것은 ‘겨’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것은 예언서의 종말론적인 심판 문맥에서 주로 발견됩니다(이사야 17:13; 41:15; 호세야 13:3; 스바냐 2:2 등). 반면에 겨와 대조되는 ‘나무’(3)는 태초의 에덴동산을 적시는 강가에 심겨 생명이 약동하는 ‘생명나무’(창세기 2:9)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5) 악인의 심판과 고통(5)
시인은 악인들의 최후를 묘사합니다. 악인들이 끝내 심판을 견디지 못하고 죄인들은 의인들의 모임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침내 행동하십니다. 4절에서 악인들이 ‘겨’와 같다는 종말론적인 심판 문맥과 연결된 것처럼, 악인의 최후 심판 장면이 묘사됩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공평과 정의로 악을 판결하시는 법정 소송에 불려나온 악인들을 연상시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어떤 중재나 변호도 받을 수 없기에 자기의 권리 주장을 위해 일어설 수 없습니다. 이것은 공평한 판결을 통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의인들의 모임에 끼어들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첫 소절,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a)는 것과 둘째 소절,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한다’(b)는 말은 같은 뜻 다른 표현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인들과 악인들의 분리를 기정사실화합니다. 그러니 의인들이 누리는 행복을 악인들은 결코 맛볼 수 없습니다. 분리 자체가 심판입니다.
(6) 멸망하는 악인의 길(6)
마지막 시행에서 의인들의 길과 좀 더 악이 분명하게 대조됩니다. 시인은 의인들의 길을 여호와가 ‘인정하시지만’ 악인들의 길은 멸망하한다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여호와가 ‘인정한다’는 말은 본래 ‘알다’라는 뜻으로 앞(지식)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정보원의 지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인의 삶에 개입하셔서 꼼꼼히 보고 경험하시는 구체적인 앎을 통한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뜻합니다. 이렇게 1편의 마지막 시행은 시편 전체 문을 열면서 삶의 두 갈래 길을 제시합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입니다. 이것은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어느 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하도록 설득합니다. 이후 시편들도 의인의 평탄한 길(26:12)과 악인의 미끄러운 길(35:6)을 묘사하며 양 갈래 길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안내합니다. 이렇게 시인은 명령과 설명이 아니라 시적인 묘사를 통해 삶의 진리와 진실을 밝힙니다.
‘행복한 사람’은 악인-죄인 오만한 자와 어울려 한길 걷지 않고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1). 그는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삼고 온종일 읊조리며 삶을 반성합니다(2). 이것이 매일의 습관으로 내면화할 때 의인의 삶이 됩니다. 끝내 여호와가 ‘의인들의 길’을 아십니다(6). 눈여겨볼 것은, 악인들이 사악한 중범죄자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시인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과 악인들을 같은 범주의 사람으로 묶고, 이들이 길을 잃어 멸망하는 것이 자명한 이치인 것처럼 노래합니다.
정리하면, 1편은 ‘행복한 사람’과 ‘의인’의 삶의 존재 방식을 하나로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의 율법’, 곧 ‘여호와의 가르침’에 뿌리내린 삶입니다. 이와 함께 시인이 말하는 ‘의인들의 길’과 ‘악인들의 길’로 대조되는 두 갈래길은 구약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 전통의 흐름과 조화를 이룹니다(잠언 4:18,19; 15:9). 잠언의 지혜도 의인의 길은 생명의 길(12:8), 악인의 길은 파멸과 죽음의 길이라고 교훈합니다(14:12). 이후 예수님도 고대 이스라엘의 시인과 지혜자처럼 두 갈래 길을 말씀하십니다. ‘파멸에 이르는 넓은 길’과 ‘생명에 이르는 좁은 길’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습니다(마태복음 7:13-14).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촉촉하게 생명력을 유지하며 제 삶을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의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 하나님이 정하신 ‘방향’을 따라 ‘걷고’, ‘서고’, ‘앉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매 순간 갈림길에 섭니다. 하나님과 세상 중 어느 리듬에 따라 살아야 할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행복은 오직 말씀을 따라 살 때뿐입니다. 말씀의 리듬을 따른 의인의 리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 가치 없는 인생으로 판명됩니다. 심판 견디지 못하며, 의인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의로운 길을 걷는 자는 하나님이 보호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 인생을 인정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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