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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9)

 


영광을 잃은 예루살렘을 본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주변에서 일어나는 큰 아픔을 보면서, 오늘 하루하루 평온하게 시작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어제 일을 지웠으면 좋겠다.’고, 반대로 ‘어제로 돌아가고 싶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지금 일어난 일들을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눈앞에 놓인 결과 때문에 몹시 아프고 쓰립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면 후회하고 회개하면 되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나 변명하거나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당장에는 아픔이 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런 불행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습니다.
 
4장에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선지자의 개인적인 탄식으로 예루살렘의 참상을 기록한 탄식(1-10)과 지도층의 책임과 참상에 대한 탄식(11-16)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17-20절은 공동체의 탄식이로 21-22절은 선지자가 에돕과 시온에게 하는 말입니다. 시온의 멸망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들과 헛된 것들을 의지한 무리의 죄악들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심판은 모든 죄인들에게 공의롭게 적용됩니다.
 

성전 돌처럼 흩어진 예루살렘(1-2)

선지자는 시온의 굶주림을 주로 설명합니다. 금처럼 빛나던 시온에서 갓난아기는 젖을 먹지 못하고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으며 부유한 자들까지도 가장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비쩍 마른 상태가 되었고 심지어는 자기 자식까지 잡아먹게 되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1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2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1-2)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예루살렘과 성전의 참상을 묘사합니다. 단순한 사고 정도가 아니라 처참한 상태였습니다.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완전한 파괴였습니다. 건물과 성전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견고하게 만들어 놓은 신학이 무너졌습니다. 그 신학에 근거하여 누린 평화가 깨졌습니다. 마음에 평강도 살아졌고, 믿음도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이 가지고 있던 희망도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희망이 아닌 것을 희망을 품고 의지할 수 없는 것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거짓 성들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재앙입니다.
⑴ 영광이 변질된 예루살렘 성전(1)
다시 형식을 따라서 선지자는 ‘에카(הכיא)’로 시작합니다. 그가 사용한 첫 번째 비유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다’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정금과 같이 찬란한 빛을 발했습니다. 아름다운 돌들과 고귀한 정금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그 찬란한 빛을 잃고 말았습니다.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서 ‘순금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절 하반절은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라고 고백합니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때 성소와 지성소의 벽과 바닥은 금으로 입혀졌고 그곳에서 쓰였던 모든 기물들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벨론이 성전의 모든 금과 기명을 가져갔습니다(예레미야 52:19). 그러므로 선지자는 금처럼 빛나던 성전을 비롯한 예루살렘의 모든 것이 퇴색되고 파괴되었다며 현재의 상황을 한탄합니다. 현재 예루살렘의 상황은 황금처럼 빛나던 옛날의 영화가 사라지고 무너진 돌만 나뒹구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황금과 돌이 다르듯이 하나님께서 계신 이스라엘과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이스라엘은 너무 달랐습니다. 이것은 영광의 차이였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세상적인 것으로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한 성도와 교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⑵ 질그릇 같이 천한 예루살렘(2)
선지자는 빛을 잃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야기 한 후 시온의 아들들에 대해 비유로 시작합니다. 먼저 그 아이들이 금보다 보배롭다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며 한탄합니다. 여기서 토기는 금과 대조를 이룹니다. 즉, 토기는 금그릇처럼 귀하게 다루지 않고 천하게 취급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토기는 막 다루어지고 쉽게 깨지는 그릇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보물 같은 백성들이 함부로 가치없게 다루어지는 것에 대해 매우 비통해합니다. 이곳에서 사용한 ‘어찌하여(에카הכיא)’라는 단어를 다시 사용하여 선지자는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더욱 강조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이 함락 직전까지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밟히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을 심어주면서 예루살렘 성문을 굳게 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백성들의 고통과 고난은 가중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있는 사람, 즉 예레미야 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징계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비참한 지경에 놓이는 것을 원하시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이 비록 바벨론에 점령당하겠지만, 최악의 상황에 놓여 백성들이 목숨을 잃지 않도록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패전을 예언하고 항복을 권유했던 예레미야를 매국노로 몰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의지했고, 애굽의 원군들이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렇게 비참하게 멸망한 예루살렘의 모습이었습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예루살렘(3-4)

생명 얻는 신앙을 전수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것으로 채우려합니다. 그 무엇을 자녀에게 무엇을 안겨준들, 그것은 직무 유기일 뿐입니다. 자녀를 통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것일 뿐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아닙니다.
3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4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3-4)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비참한 모습을 두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기성세대의 무책임하고 악한 행위가 다음 세대를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조와 어른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무고한 아이들의 미래와 삶이 불타버렸습니다.
⑴ 먹을 것이 없는 아이들(3)
선지자는 아주 소중한 아들을 들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라고 소개합니다. ‘들개’로 번역된 ‘탄님(םגית)’은 짝을 이루거나 떼를 지어 다니면서 시체를 뜯어먹는 들짐승으로 개나 자칼의 일종으로 여겨집니다. 구약에서 ‘탄님’은 보통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해진 성읍들에 사는 동물(이사야서 13:22; 34:13: 예레미야 9:11)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기에 부정하고 야비한 동물들일지라도 가슴에 끌어다가 자신의 새끼에게는 젖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들개만도 못하게 자기 아이들에게 먹을 것조차도 줄 수 없었습니다. 선지자는 ‘딸 나의 백성은 광야에 있는 잔인한 타조 같도다’라고 합니다. 타조는 모래에 알을 낳고 둥지에 내버려둔 채 사냥하러 나가기 때문에, 구약에서 타조는 새끼를 잘 돌보지 않는 짐승으로 간주 되었습니다(참조, 욥기 39:16). 딸 시온이 자신들이 경멸하던 들개보다 못한 상황이라고 말하면서 선지자는 시온의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⑵ 목말라서 죽어가는 젖먹이(4)
선지자는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고 소개합니다. 최우선으로 보살핌을 받아야할 젖먹이까지도 먹지 못해서 목말라하는 모습입니다. 어머니가 물도 젖도 주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어미의 젖을 주지 못하는 것은 어머니가 물이나 음식을 먹지 못해 젖이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극도에 기근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4절 하반절은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라고 어린아이들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다니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아이들이 양식을 구하지만 나누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이들은 젖먹이보다 큰 아이들로 스스로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부모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합니다. 4절은 갓난아기와 아이들에게도 젖 한 모금, 떡 한 조각 줄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 어머니로서의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국교회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 동안 화려한 모습으로 흥청거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셨는지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를 교회들이 행하고 있는지도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만 인용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back to the Bible’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많은 죄를 지은 예루살렘(5-6)

풍요로움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그 축복을 바르게 누리지 못하면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를 축복으로 누리지 못하고 재앙으로 누렸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도 스스로를 살펴보아야할 시기입니다. 세상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교회 안에 있는 악한 모습부터 제거해 나가야 합니다.
5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6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5-6)
예루살렘은 곳곳에서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활기차고 사람들로 가득했고, 어느 곳을 가나 식사를 대접 받을 수 있는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생명의 떡도, 육신의 떡도 심지어는 사람들까지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⑴ 허기져서 고통을 당한 어른들(5)
선지자는 이제 어린이를 넘어서 어른들까지 당하는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거리에 있으며’(5a)를 직역하면, ‘진수성찬을 먹던 사람들이 거리에 거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흥겹게 잔치를 즐기던 사람들이 이제 먹을 것도 없이 쓸쓸하게 길거리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5b)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자색옷’을 입은 사람으로, ‘자색’은 왕과 귀족들이 사용하는 색입니다. 그러므로 자색옷을 입은 사람들은 귀족과 왕족들처럼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제는 거름더미에 앉았습니다. 즉 쓰레기 더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먹고 입는 것을 통해 예루살렘의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선자지가 말하는 역전된 모습은 사무엘상 2장의 한나의 노래를 연상시킵니다. 즉, 예루살렘의 상황이 역전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⑵ 소돔보다 더 악한 죄악들(6)
선지자는 딸 내 백성, 즉 이스라엘의 죄가 소돔보다 크다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불타 없어진 소돔은 가장 악한 사람들의 대명사입니다. 그들보다 악했다면 심판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결과였습니다.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9장을 기초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은 소돔을 가장 악한 도시의 상징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고 말합니다. 이런 선지자의 이야기는 에스겔 5:6 및 16:46-47과 유사합니다. 소돔보다 시온의 죄가 무겁다고 보는 이유는 소돔은 순식간에 무너져 고통의 시간이 짧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천천히 하나님의 심판을 모두 받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죄를 소돔과 연결시키는 것은 선지자의 괴로움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다음 단락에서 선지자는 다시 시온의 참상을 고백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일순간에 파괴되어 적들은 무너진 성벽 사이로 물밀 듯 들어와 살육과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유다의 결사항전의 각오는 성벽이나 성전 그리고 백성까지도 지킬 수 없는 허망한 외침이 되었습니다.
 

말라 비틀어진 예루살렘(7-8)

항상 성도들은 교회 안에 있지만 하나님 밖에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소돔의 죄보다 예루살렘의 죄가 더 크다는 고백처럼, 우리 교회 안에 더 큰 죄가 있지는 않은지, 교회 안에 하나님이 없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도와 교회 위에 하나님의 임재임을 기다려야 합니다.
7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 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7-8)
다시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현재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합니다. 기근으로 젖먹이, 아이들의 비참한 모습을 이야기하던 선지자는 이제 귀족들과 지도자들의 비참한 모습에 대해사도 노래합니다.
⑴ 존귀한 자들의 아름다웠던 모습(7)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존귀한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이들은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 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라고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의 이전 모습은 그 부유함과 영광이 드러날 만큼 윤택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자신이 아는 순결하고 아름답고 귀한 모든 것을 들어 선택받은 자인 나실인, 즉 이스라엘 백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런 강조는 8절 이하의 시온의 비참함을 더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⑵ 비참해진 존귀한 자들(8)
바벨론 침공을 받아 오랫동안 포위되고 마침내 함락된 예루살렘의 모습은 뼈가 들어날 만큼 마르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선지자는 눈처럼 희던 예루살렘이 이제 칠흑 같은 어둠이 되었다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흑백의 대비를 통해 과거와 현재 상황의 역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그리고 재앙으로 얼굴과 몸 상태는 마른 나무같이 말랐습니다. 귀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기근으로 인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졌습니다.
 

인간성마저 상실한 예루살렘(9-10)

돈이 주는 교양이나 권력이 주는 품격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그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됨됨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신앙 인격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적인 가식적으로 꾸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비참함은 인간성마저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9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10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9-10)
기근을 견디지 못해 자녀를 먹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죄된 본성을 지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악행에는 한계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깊은 죄악성과 약함을 드러내는 이런 비국적인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왜 사람이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는가에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⑴ 죽기보다 힘든 기근 재앙(9)
선지자는 예루살렘에 닥친 기근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전쟁에서 칼에 찔려 죽은 자가 낫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칼에 죽은 자가 더 낫다고 말하겠습니까! 칼에 찔려 죽는 자들은 고통도 짧고 ᄈᆞᆯ리 죽지만, 기근으로 즉는 자들은 극심한 고통과 공포 중에서 점점 쇠약해지면서 천천히 죽어가기 때문에 훨씬 불행하다고 본 것입니다. ‘토지의 소산이 끊겼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약속하신 신명기 28:47-51의 저주의 경고가 온전히 성취된 상황입니다.
⑵ 기근으로 인한 재앙들(10)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 평소에 자비로운 여자들일지라고 자신들의 아기를 삶아 먹는다고 탄식합니다(신명기 28:53-57). 기근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자기 자녀를 잡아먹는 끔찍한 이리들이 일어났는데, 이는 고통 가운데서 인간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자녀를 삶아 먹었던 부녀들이 비정상적인 여인들이 아니라 ‘자비로운 부녀’들이었습니다. ‘자비로운’이란 단어는 ‘동정심이 많은’, ‘인정 많은’이란 뜻으로 모성애의 일면을 설명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부녀들이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사랑인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 버린 무서운 상황을 보여줍니다. 극한의 고통과 공포에 빠진 이스라엘은 기본적인 인간성마저 지킬 수 없는 야만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심으로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원인을 분명히 교만입니다. 선지자의 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지만, 동시에 두려운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만을 기억하며 자만하지 않도록 경고한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잃은 후에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인식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지 못하면, 내일 삶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여정은 하나님의 부재로 살 수 있는 날들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평안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삶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것이 하나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비참함은 하나님 앞에 교만한 이스라엘의 결과입니다. 그 교만함은 예루살렘 성벽의 벽돌 한 장도 지켜낼 수 없을 만큼 초라했습니다. 심판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 찾아올 때, 진짜 신앙이 들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할 때 감사하고, 어려움이 닥쳤을 쉬운 대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깊이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잔인한 심판을 거울삼아 정결한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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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3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아름답습니다

한재욱 목사(강남비전교회)


창세기 말씀을 묵상하다가 ‘종류대로’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2) 하나님께서는 종류대로 지어 놓으시고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해 하셨습니다.

물로 세계를 심판하실 때에도 노아를 통해 창조의 세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창 6:20) ‘종류대로’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보시기에 좋아하셨고 훼손되지 않도록 노아의 방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말의 ‘아름답다’에서 ‘아름’은 ‘나, 개인’이라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엄마는 엄마다울 때, 아이는 아이다울 때 아름답습니다. 종류대로 지으신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하나님, 종류대로 유지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름다움은 내 모습을 지킬 때 생기겠지요.

세계화가 될수록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이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나 자신을 잃어버리면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종류대로 지으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말씀하신 하나님, 그것이 지금도 아름답습니다.

곽주환 목사(서울 베다니교회)

[출처]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738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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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8)


과거를 기억하고 간구한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3장 55-66절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며 인격적인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아름다운 영적 교통이 있고, 이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격적인 교통을 합니다. 기도를 통해 인격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 영적 교통이 막히기도 하고 열리기도 합니다. 고통 가운데 마음이 너무 답답하면 어찌 기도해야 할지도 막막합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성도들에게 예레미야애가는 주님과 교통할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어려울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심기우면 생명이 뿌리내리고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공동체에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권면한 선지자가 도리어 자신은 곧 죽을 것 같다며 통곡합니다. 선지자가 자신의 영적인 상황이 죽음의 구덩이 속에 있는 것 같다고 밝힙니다. 이곳에서 과거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니 응답해 달라며 여호와께 자신의 사정을 말합니다. 대적에 대한 심판을 통해 구원을 얻게 해달라는 선지자의 기도에는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근거가 나타나 있습니다.

 

과거에 응답하셨던 여호와(55-58)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신이 어려운 지경에서도 기도를 들어주신 것을 회상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은 그때와 같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으니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또한 원수들의 행위를 듣고 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해주시길 선지자는 기도합니다.

55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56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57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58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55-58)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께 과거 응답해주셨던 상황을 회상하면서 다시 한 번 응답해주실 간구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잘 지키신 신실한 분이며, 예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돌보아주셨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구원의 경험에 근거해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⑴ 구원 받은 일을 회상한 선지자(55)

선지자는 현재 상태가 구덩이에 빠져 죽기 일보 직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왕궁 시위대 뜰 안에 있었던 왕자 말기야의 구덩이 사건을 떠올립니다(예레미야 38:7-13). 민족의 반역자로 누명을 쓰고 던져졌던 절망적인 상황을, 이제는 조국 유다의 절망적인 현실에 비유하여 탄식하고 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구원을 호소하기 전에 예레미야는 먼저 자신의 이 같은 경험을 아뢰며, 다시 한 번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가장 원통하고 비통한 순간, 죽음 외에는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예레미야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소망의 끈을 끝까지 잡고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여호와께서 자신의 원통함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깊은 구덩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절히 간구합니다. 이제 그는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가장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었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 받은 적을 회상합니다. 지금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과거에도 신실하게 도와주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도 도와주실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회상한 것입니다.

⑵ 기도를 들어주셨던 하나님(56)

선지자는 자신의 기도에 대한 여호와의 음성을 들였다고 합니다. 과거에 자신이 여호와를 불렀을 때, 여호와께서 가까이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처럼 선지자가 믿음의 기도로 담대하게 드릴 수 있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삶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간절하게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음성을 들었던 것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현재 자신의 외침과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에 귀를 닫지 말아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과거에도 자신의 음성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현재 도움의 외침도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요청입니다. 그는 41절에서 하나님을 구름에 가려진 분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자신의 상황을 기도가 원활하게 상달되지 않는 상태로 보고 있습니다. ‘구름에 가려졌다’는 것과 ‘귀가 가려졌다’는 것은 모두 기도를 듣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귀를 여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해주시길 요청합니다.

⑶ 불렀을 때 가까이 오셨던 하나님(57)

선지자는 자신이 여호와를 불렀을 때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가까이 오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때 선지자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전체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은 여호와께서 본격적으로 돕기에 앞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선지자의 소명을 재확인시킬 때도 이 말씀이 들려졌습니다(예레미야 1:8).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자, 상처 입은 자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선지자도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있었고 그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려고 합니다.

⑷ 변호자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58)

선지자는 법정 다툼 하는 상황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자신의 변호사가 되셔서 자신을 위해 싸워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자신의 생명의 구속자라고 말합니다. ‘속량하다’로 번역된 동사는 사람이나 물건을 대신 사주는 것을 뜻합니다. 보통 ‘구속하다’로 번역합니다. 예수가 자신의 피로 우리의 생명을 사셨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변호사로 사건을 맡아 자신을 구원해주신 구속자라고 고백합니다. 즉 선지자는 현재 자신이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하심 때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현재의 상황을 기도하기에 앞서서 과거에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신 것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현재적 구원을 기대합니다. 지금은 비록 상황이 매우 힘들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불안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과거에 신실하셨고 자신을 지켜주셨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께서 다시 자신을 도와주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처한 상황에서 항상 이렇게 과거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는 가운데 기도하면, 더욱 힘을 얻고 능력을 얻게 됩니다.

 

원통함을 보신 여호와(59-63)

부모들은 자녀를 키우면서 다양한 일들을 만납니다. 그 중에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의 자녀가 사람들에게 비방과 조롱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든지 속상해서 자녀 편을 들어줄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방과 조롱을 들고 있을 때,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59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 주옵소서 60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61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62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63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59-63)

공의로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심각한 환란이 도래해서도 절망의 낙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현재 이스라엘이 당한 고난이 하나님의 심판이란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공의로운 하나님의 징계였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⑴ 본격적으로 요청한 선지자(59)

본격적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동안 자신이 당한 고난이나 모함을 보셨다고 하면서, 여호와께 이것을 심판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회개할 줄 모르는 패역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억울한 오해와 핍박을 많이 겪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도움을 베푸셨습니다. 여호와를 세상에 정의로운 재판장과 같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에게 정의를 실현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⑵ 요청한 이유를 설명한 선지자(60)

선지자가 왜 하나님께 이런 요청을 하는지 그 이유가 나옵니다. 여호와는 모든 것을 살피신다는 사싱을 신횔 수 있었습니다. 원수들의 행동들과 악한 생각들을 모두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제 일어나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위하여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 달라고 호소한 것입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약해서 패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께서 없고, 자신들이 왕이며 재판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대로 남을 판단하고 재판하고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악을 몰래 저지르는 사람은 아무도 자신의 악한 생각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스라엘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회개할 필요도, 하나님께 돌아올 필요도 그리고 기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다만 강대국 왕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모든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시며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겪는 불의한 상황과 억울한 고난 속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며 기다립니다.

⑶ 듣고 계신 걸 확신한 선지자(61-62)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모든 것을 들으셨다고 호소합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신 것은 선지자를 향한 원수들의 비방과 모든 나쁜 생각과 대항자의 입술과 반복되는 노래입니다. 여기서 대항자의 입술은 선지자를 공격하는 자의 말이란 의미입니다. 즉, 말로 선지자를 공격하고 욕하고 모함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울려 퍼지는 노래’는 본래 ‘힉가욘’으로, 이것은 음악 용어로 ‘널리 퍼지는 음악’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비방의 말을 계속해서 널리 퍼뜨린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원수들은 선지자에 대한 비방을 하루 종일 끊임없이 했습니다. 이 모든 말을 여호와께서 들으셨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의 입술의 열매대로 심판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⑷ 원수들을 확실히 지켜봐달라고 요청(63)

선지자는 다시 원수들의 앉고 서는 것을 자세히 봐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자신은 그들의 따돌림을 당한 노래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원수들의 말에 대해 두 절을 더 할애합니다. 몸이 당하는 고난도 힘들지만, 원수들의 말에 의한 공격이 선지자에게는 더 힘들고 참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돌림 노래’라는 말 속에 선지자의 참담한 심정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날 따돌림과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 보고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인격 모독적인 말과 욕설로 인해 인정은 메마르고 사회는 날로 각박해집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인터넷상에 댓글로도 부정적인 인격을 모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말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마음 죄로 여기시기 때문에 항상 말조심을 해야 합니다.

 

대적에게 보응하신 여호와(64-66)

성도들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없을 수 없겠지만, 그 일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여호와께 고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의 기도를 헛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64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65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66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64-66)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과 원수들이 자신에게 행한 일을 모두 듣고 계셨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응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⑴ 적들이 행한 대로 심판을 요청(64)

선지자는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보응해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는데 도구였던 대적 바벨론은 자신들의 본분을 넘어섰습니다. 즉 유다에 대해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 이상의 가혹한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자신들이 행한 대로 갚아주길 원하는 마음으로 신명기의 기록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동해보복법 사상이 나타납니다. 동해보복법의 원칙은 과도한 보복이나 형벌을 막기 위한 처벌의 원칙입니다. 선지자는 간구한 대적들에 대한 보응은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그들이 말로 범죄하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행동으로 범죄하였으면 또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적 보복과는 다른 것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입증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⑵ 회개하지 못할 마음을 달라고 요청(65)

선지자는 그들에게 강퍅하게 하며 저주를 내려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만한 마음’을 가지므로 회개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과 ‘둔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함으로 파멸을 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그 자체가 이미 저주이고 심판인 것입니다. 죄에서 회개하지 못하면 결국 심판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⑶ 끝까지 추격해 진멸할 걸 요청(66)

선지자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진노로 그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진멸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진노로 그들을 쫓아가서 심판하셨습니다(43).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쫓으신 상황과 반대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유다를 쫓고 죽이신 것처럼, 유다의 원수들도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결국 대적들은 철저히 명절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어려움이 하나님께서 얼마나 혹독한 사랑을 베푸셨는지 모를 수 있습니다. 당하시는 순간은 아프고 쓰리고 원망스럽기까지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모두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알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하시면서 놀라운 일을 발견할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시면 반드시 응답 받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황폐한 상태는 그 광경을 본 사람이라면 맨붕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예레미야애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해주신 기도의 언어들입니다. 마음을 담아 간절히 하나님께 간구할 때, 주께서는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모든 원수와 대적들을 물리쳐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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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2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아름다운 거리감

한재욱 목사(강남비전교회)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고전 13:5)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거리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제주도에 가면 구멍이 많은 돌담이 있습니다. 돌담은 거센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로 구멍의 간격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사랑한다고 해서 태양 쪽으로 뛰어든다면, 달이 지구가 좋다고 달려와 안긴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별빛이 고운 것은 그 빛이 오래전 출발해 지금 우리 눈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별이 지척에 있었다면 우리는 그것이 한낱 돌멩이에 불과하다고 업신여겼을 것입니다.

건축물의 기둥들도 서로 좋은 거리를 두며 세워져 벽과 지붕을 받치고 있습니다. 꽃과 꽃, 나무와 나무 사이에도 적당한 간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성이 있는 우리 인간들은 고슴도치 같습니다. 떨어져 있으면 외로워하고 가까이 있으면 서로에게 있는 수많은 가시에 찔려 아파합니다. 가까이하되 좋은 거리를 둔다면 외롭지도 않고 가시에 찔리지도 않습니다. 함께 가까이 있되 마구 대하지 않는 예의의 공간과 거리. 그래서 하늘과 바람이 이 사이에서 춤추며 늘 신선하게 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여 노래하는 거리의 미학(美學)입니다.

한재욱 목사(강남비전교회)

[출처]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393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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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9-01)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에 대한 소원

로마서 9장 1-5절


어떤 건강식품 광고에서 사장이 나와서 ‘이렇게 좋은 걸, 말로 표현한 길이 없네!’라고 제품에 대한 안타까워하는 것을 봅니다. 자신 생각에는 제품은 좋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깐 그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 고아고를 볼 때마다, 한 성도님께서 ‘하나님을 믿으니깐, 이렇게 좋은데 사람들은 전해도 왜 믿지 않을까요?’라고 안타까워하던 생각이 납니다. 믿지 않는 주변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깐 안타까움을 토로일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선민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동족이기 때문만 아니라 선민 민족으로 누려야할 복을 누리지 못한 것을 보면서 아파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슬픔과 고통(1-2)

성령충만한 삶이란 그리스도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닮은 생각과 꿈 그리고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사역자들은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기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도 바울의 모습 속에서 성령충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1-2)

사도 바울은 앞 31-39절에서 감정적으로 찬양하던 언어에서 갑자기 냉정하게 법정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1절은 9-11장 전체의 풍조를 범정에서 마치 검사나 변호사가 피고인을 놓고 격돌하는 것으로 정립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부터 자기가 쓰는 것이 법적으로도 거짓 증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써 양심상 성령 안에서 참말을 하고 있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성령충만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고 그 뜻을 따라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첫머리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1)고 단언한 것도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 모든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10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0-11)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직한 영과 성령 충만합니다. 바울 당시에는 많은 거짓 교사들이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미숙한 성도들은 이런 거짓 교사들에게 속아 넘어갔습니다.

10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11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딛 1:10-11)

이렇게 악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바울은 정직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직하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사람들 앞에 보이려고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했던 것입니다.

 

동족을 위한 거룩한 고통(3)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서,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고통스러운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만, 자기 동족 이스라엘은 믿지 안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습 때문에 일어나는 고통이 있었던 것입니다.

3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3)

사도 바울은 이방인 사역을 하면 할수록, 구원 받지 못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 속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모습에서 예전에 벅찬 감격으로 개선가를 부르던 장군과 같은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는 큰 근심과 걱정은 자신의 골육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때부터 자기 민족으로부터 메시아 탄생과 하나님 말씀을 보전하는 사명을 가지고 지속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겸손하게 받아 들렸습니다. 복음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흘러가지 않고 이방 민족들에게 전파되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그는 가슴 아파합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서 바울은 동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말합니다. 속담에 ‘피는 물보다 진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피를 나눈 가족은 타인보다 더 관계가 낫다는 가족의 중요성을 의미한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 이방인 성도들의 구원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제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면서 가슴 아파합니다. 그래서 대단히 극단적이고 무거운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기 동족이 구원받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방법이 모세나 그리스도의 희생처럼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끓어지는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차라리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까지 간절히 유대인의 구원에 대한 절박한 소원에서 표현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끊어질지라도 자신의 민족이 하나님 가운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버리셨던 모습을 떠올렸던 것입니다. 모든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예수님처럼 자신이 희생해서 동족 이스라엘을 돌아올 수 있다면, 희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하시고 대속적인 죽음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45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1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바울은 이처럼 사역 속에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신 것에 대해 헤아려보면 너무나도 감사하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끊어질지라도 구원을 바라는 소원은, 구원에 대한 사실을 전하고 싶은 충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골육친척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을 안고 기도합니다. 이것은 모세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자기 민족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31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모세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끊어질지라도, 그는 자신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달라고 중보 기도했던 것입니다. 모세나 바울은 자신의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중보기도자로 서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가족에 구원에 대해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절실한 구원의 바람이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혼자 열심히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가족의 구원에 대해서는 절실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당신의 구원이 놀라운 구원이라면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야합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특권(4-5)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평생 동안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방인의 사역을 하면서도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식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특권을 누리지 못한 것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4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5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4-5)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특권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민족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여러 축복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들은 선민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기득권을 받았고, 그의 영광을 누렸던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받았던 특권들은 모두 7개입니다. 이 목록은 로마서 8:15-33에 나오는 이방인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유대인에게 주어졌는지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 양자됨(출 4:22)과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출 16:10; 24:17; 40:34; 왕상 8:11), 하나님과 맺은 언약(창 15:18; 삼하 7:12-16; 렘 31:31-34), 율법을 맡음(신 5:1-22), 성전 예배와 하나님의 약속들(특히 메시야)입니다. 이것은 그들만이 차지하고 있었던 특권들이었습니다. 그 특권들 중에 최고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음으로 인해서 복음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볼 때,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특권들이 주어진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다른 민족 위에 군림하고 우월감에 빠져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업신여기며 그들을 정복하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메시아가 그들에게서 난 것이 그 클라이맥스입니다. 그들은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전할 의무가 있었으나,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그 일이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셔야 했지만,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거절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모욕했습니다. 온갖 좋은 선물을 주시되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이스라엘은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려 했지만, 자신을 힘들게 했던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이스라엘의 구원을 원했던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결정하거나 소원하는 바를 성취하려는 삶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뤄지는 삶을 말입니다. 특별한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름으로 바울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했던 전철을 한국교회의 불순종으로 재현되지 않아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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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8-04)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8장 28-34절


어렸을 때에 한 번쯤은 ‘내 엄마가 진짜 엄마인가?’라는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의심할 때 가장 확실한 대답은 부모님이 ‘너는 내 자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를 낳을 때, 얼마나 내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아니?’, ‘많은 사람들이 너를 축복했는지 아니?’라는 것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합니다. 영적으로도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자녀임을 확신 받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처럼 모든 만물들이 회복되는 것을 원합니다. 외형적인 모습으로 보면, 세상을 점점 멸망 길로 치닫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부분으로 살펴보면, 정점 하나님 나라로 회복되어 갑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성도들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선을 이루는 비결(28-30)

하나님께서는 항상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이것은 성도된 우리가 장래에 대해 긍정적 확신을 갖고 인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준비하신 것은 선한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일 수도 있고, 삶 가운데 탄식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해피엔딩’입니다.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28-30)

이번에는 성령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는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름 받은 성도에게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십니다(28). 교회에서 성도를 위로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입니다. 본문은 ‘이미와 아직’ 과정의 모든 것을 다 해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피조물이나 성도의 탄식은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선(善)’은 29-30절에서 말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과정을 뜻합니다. 성도에 대해 하나님의 미리 아심 → 미리 정하심 → 부르심 → 의롭게 하심 영화롭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한 진행이 담겨 있습니다. 과거는 미리 아심과 정하심인데,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맏아들이 되고, 그를 따르는 성도들이 또 다른 자녀가 되어 그분의 가족을 형성합니다. 이런 계획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성취되기 시작했고, 복음을 통해 그 과정 안으로 성도를 부르고 의롭게 하는 현재 과정을 거쳐 장차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함을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합력해 선을 이룬다는 것은 (1) ‘이미와 아직’ 과정 속에서 당하는 성도의 고난도 이런 구원 과정의 일부이며, (2) 성도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자를 향한 구원 과정을 끝까지 완성한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구원 과정을 완성하실 것이기에 그 과정에 신실하게 붙어 있는 자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미래를 경험할 것입니다. 성도는 혼자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새 언약 관계 안에서 구원 계획을 완성하시는 삼위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으며(참고, 성도를 향한 예수님의 중보기도[34]), 그 관계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구원 과정을 완성하는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와 아직’사이에서 고통과 탄식이 없을 수 없지만, 관점을 바꾸면 성도의 현재는 새 언약 백성의 의무이자 자랑이며 지금 여기서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은혜의 동행입니다.

 

담대한 결론(31-34)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렇기에 그에 따른 우리의 신앙고백도 분명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신앙이 어떤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1-34)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그날까지 고난이 있는 것은 우리를 예수님 닮은 형상으로 빚어가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속에 몰아넣고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게서 우리를 위하시니 걱정 없습니다.

(1) 도입 질문(31a)

구원 영역에 속한 성도의 삶을 성령을 중심으로 설명한 바울은 여기서부터 구원의 확신에 대해 다룹니다. 일련의 수사적 질문으로 진행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이 일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라고 질문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이미와 아직’의 시간 속에 이중 정체성으로 사는 성도의 탄식과 그에 대한 미래 소망과 신적 도움을 설명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성도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확신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었습니까? 이 질문은 일차적으로 8장 앞부분 내용에 근거하지만, 5:12-7:25에서 설명한 어둠과 빛의 두 영역을 배경으로 한 구원 과정과 1:18-5:11에서 상호 작용 과정으로 설명한 구원 과정과도 관련 있습니다.

(2) 구원의 법정적 차원에 대한 설명(31b-34)

구원의 확신에 대한 본격적 설명을 진행합니다. 첫 주제는 성도를 정죄하고 대적하는 상황에 대해서입니다. 우선 이런 상황에 대한 두 가지 이해가 필요합니다. 첫째, 본문의 상황은 죄와 죽음의 영역과 사탄의 영향력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이런 세력에서 해방되는 길을 열었지만, 완전한 승리는 주님의 재림과 심판 때 가능합니다. 그때까지 이 세력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인데, 그 영향력은 사람보다 강합니다. 특별히 사탄은 거짓으로 성도를 미혹하고 정죄와 고소로 흔드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고, 어둠의 영역에 속한 자들 또한 사탄처럼 성도를 고소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신자 역시 자신의 연약함으로 외적 정죄와 반대 상황에서 스스로 주눅 들거나 위축될 가능성이 늘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이미와 아직’으로 인해 겪을 수 있는 실재입니다. 둘째, 여기서 말한 상황은 성도의 잘못으로 빚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물론, 구원 과정 안에 있는 성도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몸이 아직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채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6:11-14 에서 몸의 지체들을 죄에게 종으로 내주지 말라고 명령한 것도 이 가능성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성도가 죄를 짓는 상황 암시가 없습니다. 오히려 빛의 새 영역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맺고 살아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부분을 구원 과정에 참여했기에 무슨 행위든 다 용서된다고 말하는 방종의 삶에 대한 면책 근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상적’으로 잘 사는 성도에게 힘을 주기 위한 설명입니다. 정죄와 대적하는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문답식 대화법으로 제시됩니다. 가상 대화 상대자와 주고받는 형식 대신 바울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문제 해결의 열쇠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역인데, 세 가지 차원에서 답합니다. 첫째,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라고 말합니다(31). 하나님께서 성도 편이기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의 적절성과 신뢰성은 하나님께서 최종 심판자요 권위자라는 점에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도를 대적하거나 반대하지 않기에, 성도에 대한 다른 피조물의 태도와 반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 편이라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또 다른 수사적 질문으로 그 증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주신 것입니다. 4:25은 ‘내어주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설명하는데, 4:25이 수동태를 통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과정이었다면, 여기서는 하나님을 과정의 주체로 제시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속죄(화목)제물입니다(3:25-26; 8:3).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는 아들을 죽게 할 정도로 성도 편인데, 누가 감히 신자를 대적해 하나님을 대적하겠습니까? 그분은 아들까지 주셨으니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성도에게 기꺼이 은혜로 주실 분입니다(32). 둘째,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 선택은 구원 과정의 시작이며,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하는 과정을 거쳐 영광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고(29-30),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32절에서 말한 것처럼 아들을 내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죄인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이 의롭다고 평가한 자를 누가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33)? 셋째, 예수님의 구속 사역입니다. 앞의 두 경우는 하나님 중심으로 구원 과정을 소개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합니다(34).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성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아 십자가에서 죽었고, 부활을 통해 죄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확증하고 죄/죽음/사탄의 통치에 대한 승리를 선포했습니다(참조. 4:25). 이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해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뜻이자, 성육신 이전의 원래 지위와 영광을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아직 어둠의 영역의 완전한 복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장차 재림과 심판으로 모든 구원 과정을 완성할 것입니다. 그 영광의 예수님께서 성도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중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설명을 몇 가지 요소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모든 상황은 정죄와 고소를 중심으로 한 법적 차원에 대한 것입니다. (2) 문제 해결의 근거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죄 사함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모든 죄와 그로 인한 정죄와 심판을 완전히 처리한 과정이기에 믿음으로 그 과정을 통과한 성도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3)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마치 변호인처럼 혹은 재판관처럼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성도 편에서 성도를 옹호하고 깨끗함을 확증합니다. 그분들은 ‘우리’ 편입니다. (4) 그렇기에 성도는 사탄을 위시한 세상의 정죄나 자책감에 눌려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의 관계 차원에 대한 설명(35-39)

깊은 수렁 같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가장 위험한 적은 고통이 아닙니다. 외로움입니다. 수많은 고난을 당했던 바울은 그것을 이기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은 홀로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고난 당하는 그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고난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5-39)

성도의 구원 확신에 대한 두 번째 설명으로 이번에는 관계 차원에 대해서 다룹니다. 신자가 치한 어려운 상황을 전제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성도를 두렵게 만드는 두 가지 외부 환경을 배경으로 하는데, 먼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 등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려움들입니다(36). 다른 하나는 사망이나 생명, 천사나 권세자들 같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포함한 영적 영역이나 세력들입니다(38-39). 이 모든 환경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회복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성도 편에서는 ‘이미와 아직’의 구원 과정 안에서 주를 위해(36)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이런 상황의 성도에게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신적 사랑의 확실성입니다. 그는 메시아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씩 제시하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수사적 질문과 답을 통해 먼저 소개합니다(35-37). 누가 ‘우리’를 메시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랴? 환란이나 박해 등 이 땅에서 경험하는 환경이 그것을 끊을 수 있습니까? 비록 시편 4:22처럼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해 죽음의 위협에 처할 수 있지만, 성도를 사랑하는 예수님을 통해 넉넉히 이깁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내가 확신한다’ 표현을 통해 그 어떤 세력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39). 바울의 해결책은 두 가지 전제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입니다. 성도가 경험하는 모든 환경은 다 피조물입니다. 비록 사람보다 강하지만, 창조주를 이길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예수님의 신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기까지 사랑했고(5:8; 8:32), 아들은 자기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했습니다(5:6,8).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을 사랑하고 관계를 신실하게 유지하는 언약 관계의 의무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신실한 ‘의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그 사랑을 배신하지 않는 한, 성도를 향한 그분들의 사랑은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붙드시며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자기 백성에게 새생명을 주기 위해 아들 예수님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장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에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가장 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기 그 어떤 위험 속에서도 안전할 수 있습니다. 환란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협 칼 능력 힘 권세 하물며 천사라고 할지라도 성도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 앞에 대장부처럼 당당하게 서시길 바랍니다.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성도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신뢰하며 찬양하는 백성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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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1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두 가지의 길

지성호 목사(서울이태원교회)


성경을 보면 두 가지의 길이 보입니다. 하나는 기도하는 길, 다른 하나는 원망과 불평의 길입니다. 먼저 기도하는 길을 걷는 모세와 다윗을 봅시다. 이들은 위기가 오면 먼저 무릎을 꿇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과 불평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먼저하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시글락 사건을 보면 다윗을 따랐던 600명 군사는 아말렉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재산과 아내와 자식을 잃게 됐습니다. 그러자 다윗과 함께 실컷 울고 난 후에 이들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제사장에게 에봇을 가지고 오라면서 가장 먼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다윗이 위기 속에서 가장 먼저 취한 자세는 기도였습니다.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수많은 위기 속에 삽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지금 힘이 들고 어려운 상황이 먼저 보여도 우리는 먼저 기도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의 자리에 선 모세와 다윗에게 길을 여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지성호 목사(서울이태원교회)

[출처]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306096&code=23111512&sid1=f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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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7)

 


회개하고 돌아가자는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3장 40-54절


영화 ‘슈퍼맨’에서 종종 사람들이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어디선가 슈퍼맨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위험한 위기에 처한 사람을 도와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같지는 않습니다만, 힘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소리를 들으십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자녀들을 위험에서 구해 주십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심판을 받아 아주 비참하게 된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철저한지를 토로하던 선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원할 분은 오직 여호와 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현재의 고난을 잠잠히 받아들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들을 멈추어야 된다고 종용합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함께 하나님께서 돌아가자고 권면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제안(40-41)

선지자는 자기의 동료들에게 같이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간절히 기도하자고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공동체의 죄를 고백할 것을 말합니다. 심판의 혹독함을 호소하며 눈물로 여호와의 도우심을 바랍니다.

40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1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40-41) 

앞에서 강론한 말씀처럼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유다의 배교와 배도, 반역과 불순종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예루살렘에 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고,예언한 대로 예루살렘에 임한 하나님의 진노를 목격하고 있는 중에서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끈을 절대로 놓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영원한 효력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반드시 열리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⑴ 자기중심을 살피자는 선지자(40)

이제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앞에서 왜 죄인인지를 살피자고 권유합니다. 먼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행위를 살핀다’는 것은 지금까지 왜 이스라엘이 이런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외부에서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찾아보려하는 반성하는 의미입니다. 그것도 대충이 아니라 철저하게 검증해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과 반성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첫걸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 선지자는 ‘여호와께 돌아가자’고 권유합니다. 여기서 ‘돌아간다’는 것은 ‘회개(悔改)’를 의미합니다. 지금까지의 길을 버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위기와 어려움의 때에 자꾸 원인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회개와 회복의 전제 조건은 내부를 면밀하게 살피고 어떤 죄와 문제들이 숨어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문제들을 제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남 탓만 해서는 개혁이나 회복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⑵ 진실한 회개하자고 권한 선지자(41)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과 손을 들자’고 권유합니다. 일반적으로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함축합니다. 선지자는 형식적으로 손만 드는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드려서 진정한 회개를 드리자고 권유합니다. 즉 외식적인 회개보다 내면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이 선지자의 간절한 바람을 담은 권고입니다. ‘회복되리라’는 소망은 반드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외적으로 요란한 반응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중심을 드리는 회개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자신을 살피고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면서 마음을 드리는 기도가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신앙은 외식적으로 흐르고 점점 영적 생명력은 사라지고 삶은 무기력해집니다. 정말로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원한다면 마음을 드리는 회개의 기도부터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공동체의 죄에 대한 고백(42-47)

죄인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을 만나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언변으로 기도한다 할지라도 그 기도는 하늘을 뚫고 하나님에게까지 상달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회개를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42우리의 범죄함과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43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우리를 추격하시며 죽이시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44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45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46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47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42-47)

이스라엘은 민족과 열방 중에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가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를 무시했고, 세상의 것들이 진리인 것처럼 따랐습니다. 그들은 이로 인해 심판에 놓이게 되자 징계를 모면하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으시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이 훼손되지 않도록 폐기물처럼 취급하시고 내쳤습니다.

⑴ 죄악을 사하지 않으신 하나님(42)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2인칭 ‘당신’으로 부르며 하나님께 공동체의 죄를 고백합니다. 선지자는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라고 고백합니다. 범죄 사실과 여호와의 용서하지 않으심을 대조하며 강조합니다. 선지자는 비슷한 단어를 반복함으로 공동체의 범죄를 더욱 강조합니다.

⑵ 심판을 멈추지 않으실 하나님(43)

선지자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범죄와 하나님의 용서하지 않음으로 인해 초래된 재난에 대해 서술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지만, 예언한대로 심판이 도래하지 않길 간절히 바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그 진노가 여호와의 모습을 가릴 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큰 진노는 결국 자신의 백성을 추격하여 죽이시고, 전혀 인정을 베풀지 않으시는 것 같은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⑶ 자신을 가리우신 하나님(44)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자신을 가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곳에서 ‘가린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신 것입니다. 원래 여호와는 백성들을 만나기 위해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고 나타나셨습니다(참조, 출애굽기 19:9: 신명기 4:11; 민수기 12:5; 신명기 31:15). 백성들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죽을까봐 걱정이 되어 베일로 가리듯 구름으로 가리고 백성들을 만나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신을 가리우신 이유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방어막을 치듯 구름으로 자신을 감싸셨습니다. 선지자는 익숙한 표현을 반대로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철저한 거절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4:7-8의 상황과 반대입니다.

⑷ 폐기물 취급하신 하나님(45)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모든 나라들 가운데 쓰레기와 폐기물로 두셨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출애굽기 19:5에서 ‘내 소유’ 즉 ‘내 보물’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반대의 상황입니다. 열방 중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특별한 보물이었던 이스라엘은 지금 열방 중에 쓰레기요 폐기물과 같은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본래 부강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은혜와 돌보심으로 이스라엘이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왕국으로 살아남으며 나름대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교만해서 부와 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대로 방치하셨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쓰레기처럼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빠진 공동체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아닌 밖에 버려져야 폐기물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⑸ 입을 벌려 덤벼들게 하신 하나님(46)

하나님께 버림받는이스라엘을 보면서 적들은 입을 벌려 달려듭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1,2장에서 여러 번 등장했는데 비웃거나 조롱할 때 사용되는 관용어입니다. 마치 쓰레기장에 버려진 폐기물들 중에서 넝마주의들이 재활용거리라도 주어보겠다는 심정으로 이스라엘을 바라본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철저히 능욕했고 조롱했습니다.

⑹ 버림받은 이스라엘의 상황(47)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거절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맞이한 비참한 상황을 드러냅니다. 아주 부정적인 단어들을 나열하며,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 그리고 ‘멸망’의 상황입니다. ‘두려움’은 보통 하나님의 심판(출애굽기 15:16; 이사야서 19:16; 33:14)이나 예기치 않은 출현(이사야서 2:10, 19, 21)에 대한 반응을 묘사합니다. ‘파멸’은 ‘파괴’, ‘멸망’, ‘혼돈’ 또는 ‘죽음’을 전형적으로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멸망’은 ‘부서짐’, ‘깨짐’을 뜻하는 단어로, 여기서는 ‘흩어짐’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음성학적 언어유희(파하트/파하드, 하쉐트/하샤베르)를 사용하여 자신들에게 임한 재앙의 심각성을 강조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심판을 예언했지만, 그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임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동족에게 여러 가지 고난을 받아가면서까지 예언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은 예레미야로 망해버린 이스라엘 민족에게 소망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고난에 대한 슬픔(48-51)

예레미야 시대 때뿐만 아니라 오늘날도 하나님의 공동체를 신뢰한다면 당신이 처한 자리를 인내할 수 있습니다. 모욕과 따돌림이 있고, 때로는 외면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들어내시고 싶은 뜻이 있다면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48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49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50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51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하는도다(48-51)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닥친 멸망을 본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유다는 초토화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적의 칼에 쓰러졌고, 아이들은 먹지 못해 아사했습니다. 심판으로 인한 유다의 참상은 생존자들의 눈에 눈물을 마르지 않게 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애가 1장 2절 및 16절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흩어짐’을 당한 것을 보면서 계속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⑴ 멸망한 예루살렘을 본 선지자(48-49)

선지자는 망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을 보면 눈물이 쉴 새 없이 계속해서 쏟아진다고 고백합니다(49). ‘흐르다’는 ‘쏟아지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원수들의 이유 없는 괴롭힘은 유다의 고통을 더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이 당하는 고통을 여러 모양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처참함 모습을 보고 선지자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고 고백합니다. 비참해도 너무나 비참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⑵ 멸망한 이스라엘을 보실 하나님(50-51)

또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이스라엘의 형편을 굽어보실 때까지 이런 눈물이 계속 흐를 것이라고 합니다(50). 그러면서 하나님의 불쌍하게 여기셔서 개입을 하시길 간절히 바라는 선지자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의 형편은 모든 딸들로 인해 나의 눈이 나의 마음을 괴롭게 만든다고 고백합니다(51). 여기서 딸들은 예루살렘 성안의 여성들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예루살렘 성읍에 딸린 마을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여성으로 특정하기보다는 예루살렘과 그 주변 마을들이 모두 파괴된 것을 보고 슬퍼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선지자는 비참하게 무너진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보면서도 가슴 아파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합니다. 돌아가겠다는 외침에 맞추어, 하나님께서도 마음을 돌리셔서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돌아온들, 하나님께서 돌이키시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은 헛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이든지 어떤 공동체를 섬기든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백성들에게서 영광의 찬송을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백성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의 날을 기대하며 세상에 하나님에 대해 담대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수들이 공격하는 모습(52-54)

진정한 지도자는 자기가 속한 구성원이 잘 나가고 축복 받는 것을 시기해서는 안 됩니다.ᆞ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고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구성원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는 마치 자신이 당한 어려움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한 나라의 훌륭한 지도자는 국가가 절망스러고 어려울 때, 국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감당하고 슬퍼할 줄 알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52나의 원수들이 이유 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53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54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52-54)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이 당한 억울한 일들, 즉 원수들이 행한 일들을 하나님께 낱낱이 고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벌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합니다. 먼저 유다의 당한 어려움을 자신이 당한 것처럼 묘사합니다.

⑴ 원수들이 괴롭힌 상황(52-53)

선지자는 원수들이 이유 없이 자신을 새처럼 사냥한다고 고백합니다. 마치 아이들이 새총을 가지고 장난으로 새를 잡듯이 그렇게 자신을 다루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⑵ 쓰나미 같이 몰려오는 죽음(54)

본 절은 53절과 연결되어 원수들이 선지자를 물이 있는 구덩이에 넣고 죽이려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속해서 원수들이 선지자의 생명을 끊으려고 선지자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지며, 물이 선지자의 머리 위로 넘치니 선지자 스스로 멸절되었다고 느끼게 됩니다. 선지자는 이런 원수들의 공격에 이제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호소합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음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재촉합니다. 애가 타는 선지자의 심정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때때로 죽을 것 같은 고통에 휩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정한 때에 움직이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울며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선지자 또한 한편으로는 잠잠히 기다리라고 말하다가도(예레미야애가 3:26) 극심한 고통 앞에서 다시 무너지고, 다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재촉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서 근근이 이 고난의 시기를 이겨내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위해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향해 심판의 손을 드신 하나님께서 이제 원수들에게도 심판의 손을 들어 그들이 행한 대로 되갚아 주시길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을 향해 원수들이 꾸미는 음모도 들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주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사정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당신의 자녀들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언제든지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잘못된 위치에 있다면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너무 많이 잘못된 길을 왔습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합니다. 앞으로 나가는 인생이 멋있지만, 돌아가는 인생이야말로 존귀하고 정결합니다. 사정을 살피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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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1-01)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받는 예레미야

예레미야 1장 1-10절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믿음의 큰 격려를 받습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세워져 갑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두려워하고 떨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해가 되지 안 되더라도 순종하면 나중에는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으면 갈등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데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출신과 활동 시대 그리고 소명 기사를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나돗 지역 출신이며, 제사장 가문에 속한 인물입니다.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4-5km 떨어진 곳으로, 솔로몬 시대 제사장 아비아달이 권력에서 쫓겨난 후에 유배된 지역입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13년에 처음 선포를 시작했고, 남유다의 멸망을 직접 경험한 몇 안 되는 예언자입니다.
 

시대적인 배경(1-3)

우리는 부름을 받은 자리도 고난 받는 역사의 한복판입니다. 처한 시대와 자리에서 부르심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심판 전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먼저 경고하십니다. 냉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들려주고 돌아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의 끝은 아닙니다. 그러니 희망마저 거세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2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3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1-3)
예레미야서의 서론은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활동한 기간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고합니다. 요시야의 통치 십삼 년부터 시드기야의 통치 십일 년까지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활동한 기간은 회복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가 갑자기 사그라지고, 유다가 멸망의 길로 내몰린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생존을 위한 유다의 정치와 강대국의 패권주의가 서로 격렬하게 충돌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겉모습에 불과할 뿐입니다.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함락, 그리고 성전의 파괴와 하나님 백성의 유배는 그 근본에 있어 신학적 사건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의지를 계시하시며 살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읽는 사람은 하나님 백성이 멸망의 심판에 떨어지게 된 참 원인을 깨달아, 다시는 그러한 파국적 재앙이 임하지 않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아나돗은 베냐민 지파의 영토에 속한 성읍으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대략 4-5km 떨어져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2:26-27에 의하면 솔로몬은 다윗의 후계 자리를 놓고 다툴 때 아도니야 편에 섰던 제사장 아비아달을 그의 고향 아나돗으로 추방했습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예레미야의 집안이 실로 성소의 전통을 잇는 아비아달의 후손에 속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주전 722년 북왕국이 멸망할 때 남쪽으로 피난 온 제사장들이 아나돗에 집단으로 정착했을 수도 있습니다. 제사장 집안 출신이지만 예레미야의 선포에는 제사장직 특징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은 주전 627-626년이고 ‘시드기야의 십일 년’은 주전 587-6년이므로, 예레미야의 사역은 대략 사십 년간 지속됩니다. 40-45장에 따르면 예레미야는 유다가 멸망한 이후에도, 그리고 애굽으로 끌려가서도 계속해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아마도 예레미야의 핵심적 선포가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배로 성취됐기 때문에 머리글은 이를 예언 활동의 하한선으로 삼은 것 같습니다.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 예레미야(4-10)

미래를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암흑기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암흑의 터널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제시해주신 이 뜻을 무시하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멸망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 다시 살아나는 역사를 경험합니다. 4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4-10)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심을 따라 열방의 선지자로 예레미야를 택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격 없다고 항변했는데도 가라고 명하시고 동행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신실한 메신저로 불러 말씀을 선언하도록 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주저하지도 말고, 기쁘신 부르심에 기꺼이 응하시길 바랍니다.
(1) 도입부(4)
예레미야의 부름은 여러 가지 면에서 파격적이었습니다. 모태에서 지으시기 전에 여호와께서 이미 예레미야를 아셨고, 태어나기 전에 그를 구별하셨습니다(53: 참조. 사 49:1). 예언자는 일반적으로 생의 한가운데서 부름을 받는데(참조, 겔 1:1-3: 암 7:15). 예레미야는 놀랍게도 예언자로 지음을 받아 예언자로 태어났습니다. 말씀 선포가 예레미야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 됐기 때문에 그에게는 개인적 삶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에서나 자신의 삶을 온전히 여호와의 메시지로 내드리며 예언자적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참조, 16:1-9), 그에게 맡겨진 역할은 세계사적 지평으로 확대되었습니다.
(2) 예레미야를 부르시는 하나님(5)
예레미야는 단순히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아니라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5).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범위 안에 포함되었습니다. 곧 이스라엘의 멸망과 유배가 세계사적 차원에서 선포되었습니다.
(3) 부르심을 거절하는 예레미야(6)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셨음은 민족들의 운명과 역사를 결정하시는 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신비스럽기까지 한 출생 전의 선택과 부름의 말씀에 대한 예레미야의 반응은 놀랍게도 부정적입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6). 예의상 한번 거절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예언자의 직분을 감당할 능력과 자질과 자격이 없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모든 심에 기쁘게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나가 즐기는 개인적·사회적 삶을 송두리째 포기해야 했습니다. 출생 전에 민족들의 예언자로 성별됐다는 말씀은 너무나도 무거운 짐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예레미야가 거절의 근거로 제시한 ‘아이’와 ‘말할 줄을 알지 못함’은 아마도 사회적 의미로 사용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가 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면, 그 사회가 인정하는 자격이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했습니다.
(4) 예레미야의 거절을 거부하시는 하나님(7)
하나님께서는 예언자의 능력과 자격이 없다는 예레미야의 주장을 무시하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누군가를 당신의 예언자로 부르시는 사건은 하나님의 일반적 결정이기에 부름을 받는 자에게는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부름을 받은 자는 부르신 분께서 ‘누구에게 보내는지’ 그 사람에게로 가야하고, ‘무엇을 명령하든지’ 그 명령한 것을 말해야 합니다(7). 여호와의 예언자로 활동하는데 개인적 자질이나 사회적 조건은 부차적입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예언자에게 요청하시는 유일한 것은 순종입니다.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람에게 가서 그분께서 전달하라고 주신 말씀을 전하면 되었습니다. ‘누구에게 보내든지’는 예레미야의 활동 반경이 예루살렘과 유다에 한정하지 않고 그 너머로 확정될 것을 ‘무엇을 명령하든지’는 심판 예언뿐만 아니라 구원 예언까지 선포하게 될 것을 시사합니다.
(5) 도움을 약속하시는 하나님(8)
하나님께서는 부르심의 사건을 홀로 주도하시고 부름을 받은 자에게 오직 순종을 요구하시는 절대자이시지만, 명령만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부르시는 분은 부음을 받은 자를 지켜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수행하다가 직면하게 될 어려움으로부터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8). 예레미야가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함께하며 도와주실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약속은 예레미야의 선포를 듣는 자들의 반응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매우 적대적일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해 적대적 세력의 위협과 공격에 맞서나가야 합니다.
(6) 표적 행위(9)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서 ‘아이’이고 ‘말할 줄을 알지 못하는’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손을 내미셔서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고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하고 말씀하십니다(9).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지와 결정을 선포할 자로 예레미야를 택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가는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예레미야는 15:16에서도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닌’ 묵시를 말하는(23:16) 거짓 예언자들과는 달리,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입에 담아주신 그분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입니다.
(7) 사명을 맡기시는 하나님(10)
예레미야를 당신 의지의 대언자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위임하십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10). 하나님께서 입에 넣어주신 말씀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에게 민족들을 멸망시키고 나라들을 세우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여기서 처음 네 동사는 심판 행위를, 뒤의 두 동사는 구원 행위를 기술합니다. 이는 예레미야가 일차적으로는 심판 예언자이지만, 더 나아가 구원 예언자로도 활동하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문자적으로는 ‘나라들과 왕국들’은 그의 활동 범위, 곧 그가 선포하는 말씀의 지평이 세계사적으로 확대될 것을 시사합니다. 예레미야의 사명을 기술하는 여섯 동사는 다양한 형태로 결합해 거듭 사용되는데, 여기를 제외하고는 동사들의 주어가 언제나 하나님으로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 예레미야의 선포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온 땅의 통치자이심이 드러납니다.
 


 
어둡고 절박한 시대일수록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종을 찾으시고 그 사람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세상의 흐름에 맞서 통렬한 메시지를 전할 대언자를 찾고 계십니다. 악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릴 수 있는 사람, 의의 나라를 건설하고 전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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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0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고경환 목사<순복음원당교회>


 

‘하루는 생애의 축소판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나의 생이 시작되고 피로한 몸을 뉘여 잠자리에 들면 생애가 마감됩니다. 단 하루밖에 살 수 없다고 가정해봅시다. 눈을 뜰 때 태어나 잠들 때 죽는다면 나는 당신에게 투정 부리지 않을 겁니다.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당신에게 좀 더 부드럽게 대할 겁니다. 아무리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 열심히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모두 사랑하기만 하겠습니다.’

울리히 샤퍼의 시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의 내용입니다. 단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미움과 원망으로 상대를 대하겠다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다투거나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 하루 안에 화해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생각할 것입니다.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는 걸,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걸 왜 진작 못했을까.’

하루밖에 살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그 사랑을 왜 평소에는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앞으로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남은 시간 동안 더 많이 챙기려는 욕심이 용서를 더디게 하고 화해를 머뭇거리게 하고 사랑을 주춤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고경환 목사<순복음원당교회>

[출처] https://m.kmib.co.kr/view.asp?arcid=0923518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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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8-03)


영광을 기다린 탄식들

로마서 8장 18-27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시편에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6)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있을 영광을 생각하면서 그 열매를 기대하면, 소망을 가지는 삶이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 소망 때문에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문은 앞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영광을 받지만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진정으로 바라야 할 희생이 무엇이며, 또 믿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뜻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은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탄식하는 피조물(18-22)

어떤 분이 ‘고난은 지나가고 것이고 영광은 머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맞은 말입니다. 고난은 언젠가는 아침 안개와 같이 지나가게 될 것이고, 고난을 통한 영광을 삶에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속받을 자들이기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18-22)

이전 단락의 마지막 절에서 대조한 ‘성도의 현재적 고난’과 ‘미래적 영광’이라는 주제를 이어 받습니다. 다시 ‘영광’이라는 주제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본 다락의 주제는 성도가 이를 미래적 구원의 영광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⑴ 성도를 위해 준비된 영광(18)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는 고난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고난을 받은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서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고난을 통해서 시험과 연단을 받을 때, 온전한 자로 설 수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고난과 영광은 결합될 수 있습니다.

⑵ 피조물 탄식과 구속에 대한 기다림(19-22)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를 영광의 소망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피조물까지도 구속에 참여하게 될 것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19)고 소개합니다. 피조물들도 썩어져 가는데서 피조물들의 영광도 회복될 그날을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기다렸습니다. 이 아들들은 성령을 소유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의 자녀’로 칭했습니다(8:14,16). 하나님의 아들들은 새 언약의 약속을 따라 성령이 내주하는 새로운 인류를 의미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출현을 고대하는 이유는 그들을 통해 피조물의 회복이 이루어져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던 시간에는 만물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모든 동산이 에덴동산과 같이 매우 좋았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타락으로 사람들이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모든 피조물까지 저주가 임했습니다.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것을 보겠습니다.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16-19)

이처럼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피조물들도 함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피조물도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당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저주 중에서 피조물에 대한 저주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내리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고통가운데 신음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피조물인 자연의 탄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탄식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오로지 물질만능주의로 피조물을 통한 이익에만 급급하면서 살아갑니다. 만물의 영장이면서 이제는 만물에게 지배를 받는 종으로 전략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피조물은 더욱 괴로워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조물의 탄식은 자연 이변이나 지진 그리고 해일 같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은 신음하고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회복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구약의 이사야 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올 때, 자연 만물도 그 해방에 참여하게 될 것을 예건하고 있습니다(이사야 35:1-2, 6-10; 41:17-20; 44:23; 55:12-13). 즉 선지자는 자연 만물이 누릴 미래적 회복과 영광이 하나님 백성의 해방과 영화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이러한 예언이 그리스도를 통해 포로 됨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이를 그때에, 자연문물도 그 영광에 함께 이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만물의 대표입니다. 피조물의 세계가 원래 원리대로 진행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의 세계가 신음하며 장차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영장인 사람들도 하나님의 영광이 완성될 때까지 소망하며 인내로 기다리라고 촉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원한다면 현실의 삶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고난에 대한 자세를 바르게 세워야 하겠습니다.

 

최종적인 구원을 향한 소망(23-25)

원래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만 급급합니다. 이렇게 현실만 급급하고 살아가는 것은 타락한 사람들의 일부분입니다. 현실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미래에 대한 소망이나 꿈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에게 장차 주어질 소망을 바라보라고 권고하십니다.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3-25)

앞에서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기다린다고 소개했습니다. 이제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소망을 갖게 되면서 우리에게 확신이 생깁니다. 바울은 성령을 받은 성도들까지 여전히 탄식하면서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⑴ 성도들의 탄식과 몸의 속량에 대한 기다림(23)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추수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드렸던 ‘처음 익은 열매’에 성령을 비유합니다(출애굽기 22:29; 레위기 2:12; 민수기 15:20). 그 첫 열매는 밭 전체 열매들의 일부이자, 밭 전체 열매들을 대표합니다. 그 열매의 체가는 밭 전체의 추수가 시작되었다는 시작을 알립니다. 성도들에게 임한 성령이 완전한 구원의 일부분임을, 그리고 그 완전한 구원을 바울은 ‘양자 됨의 지위를 얻는 것’과 ‘몸의 속량’으로 표현합니다. 이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희망의 탄식입니다. 마치 산모가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은 탄식과 같습니다. 산모의 비명은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 고통이 동반 됩니다. 그러한 성도들의 고통에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되길 바라는 탄식을 의미합니다. 때로는 부모님에게 상속을 받는다는 것은 부모님의 모든 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만 받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빚도 떠안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부모님이 종이면 자녀들도 종으로 태어나서 평생 동안 종으로 살아야할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유산을 주지 않습니다. 오직 자녀들에게만 주는 것입니다.

⑵ 보이지 않는 소망에 대한 인내(24-25)

당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대부분 종이었지만, 종으로 남은 작은 권리까지 모든 권리를 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더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즐겁게 받아드렸습니다. 세상에 고난이 즐거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즐겁게 받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은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고 하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서 어느 집에 양자로 들어가서 법적으로 주민등록상에 양자로 입적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미 양자이지만, 실질적으로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유산을 받음으로 자녀로서 대를 잇는 실질적인 아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미 양자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이 재림하심으로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때, 자녀로 확실하게 확인이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들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그 영광을 바라면서 인내를 배우는 것이 성도들이 배워야할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힘들 때마다 고난의 상황에 묻힌 것이 아니라 고난 뒤에 올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난을 묵상하지 마시고 뒤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로마교회의 성도들처럼 우리들도 나름대로 고난을 받고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가 상속받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고난이 전부인 줄 알고 낙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장차 우리들이 주어질 영광을 바라보라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탄식하는 성령님(26-28)

고난과 핍박이 있을 때, 홀로 당하면 매우 힘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고아와 과부처럼 그냥 버려두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탄식하시면서 영광이 회복되길 기다리며 성도들을 도우시며 동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6-28)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고 살아가지만 육신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질그릇과 같이 연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십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성령의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16-18)

성령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해 주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영적인 가이드가 되어 주십니다. 히말라야 산을 등반할 때는 등반가들만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산의 속사정을 잘 아는 가이드들을 동반하고 오릅니다. 그 가이드들은 등반가들이 산의 정상에 오를 때까지 반드시 같이 동반합니다. 하지만 매스컴에는 등반가들이 올랐다고 하지 이 가이드들이 올랐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도 우리들과 같이 동행하며 인도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자신의 역사를 들어내지 않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하게 박수를 받게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교만한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이 스스로 한 것처럼 교만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홀로 신앙의 삶을 살아가기엔 무척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힘이 들거나 영적으로 절망하고 있을 때,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할 수 없으면 영적으로 회복하기 너무 힘듭니다. 우리들이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성령님은 연약하고 무지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이 완성되도록 간구하심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 때문에 좌절하거나 회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너무 힘이 들어서 탄식하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성도들을 도우시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혼자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힘들 때는 자신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당신의 마음을 성령님께 열어놓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심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20)

예수님의 약속대로 우리들과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지만 신앙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간구하시는 성령의 중보기도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고난이나 핍박이 있기 때문에 절망과 탄식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천국의 소망들로 바뀌어야 합니다. 아픔과 낙심 중에 함께하시면서 저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시는 성령을 사모하며, 당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 드리길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위로와 평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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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8-02)


성령 안에서 새로운 생활

로마서 8장 9-17절


고위공직자 청문회를 볼 때마다 한 가지 공통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 분수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혼돈스러울 때, 분위기에 편승해서 분수에 넘치는 행동할 수 있지만, 훗날에 그러한 행동이 자신의 올무가 되어서 넘어집니다. 세상이 복잡하고 혼돈스러울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항상 신분에 걸맞은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에게 걸맞은 생활을 하기 위해 자신에게 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자격에 대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특권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격(9)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선언하는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성도의 이런 정체성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해 주어진 것입니다.

9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일반적으로 특권을 누릴 만큼 그에 상당한 희생이 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누리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무슨 희생이 필요 하겠습니까?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누릴 수 있기 위한 대가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지속적으로 교회를 출석한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한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20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장 20절)

성령님께서 오순절 강림하신 후에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성령이 임재하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모습은 부족하지만 성령께서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말씀했습니다.

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린도전서 3:16-17)

성령님께서 임하시면, 점차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할 때가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성령이 임하신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아갑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새로운 생명을 일어납니다. 마치 여인들이 임신을 했을 때, 임신에 대한 징표가 일어나듯이 말입니다. 처음에는 입덧을 하고, 다음에는 배가 불러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생명을 출산하게 됩니다. 출산을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엄마로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임신을 하면, 생명은 보이지 않지만 이미 새로운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성령의 임재도 성령께서 임하셨지만 느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생활을 시작할 때는 성도들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신앙이 점점 성숙해지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자녀인 것을 확증해 줍니다. 이러한 영적인 경험들을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윤리, 종교 그리고 문화까지도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분명한 삶의 가치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인 느낌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가치관이 있다 할지라도 복잡한 삶을 스스로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항상 힘들고 복잡한 삶 때문에 스트레스 속에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아갑니다.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과 순간적인 즐거움에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한 후에는 자신이 가치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매우 후회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고 있는가 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성령의 지배와 인도하심을 받은 참된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의 모든 것보다 성령의 인도하신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열매(10-11)

성령의 부르심에 순종했을 때 성령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일어난 일들은 무엇입니까?

10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10-11)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몸은 죄 때문에 죽지만 영은 그리스도의 의를 인하여 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몸은 죽게 되지만 영혼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성령께서 장차 우리의 죽을 몸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한 번 모두 죽습니다. 그런데 죽음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27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27)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몸은 죄로 인하여 한 번은 죽어 땅에 묻힙니다. 그리고 육체는 썩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으로 끝나버린다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육신의 쾌락이나 권모술수를 통해 즐기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변화된 몸으로 부활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40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41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42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린도전서 15:40-44)

이러한 사실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판단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이 세상의 것에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점차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 들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활(12-14)

성령님이 마음에 임한 사람들은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외부에 의해 강압적인 변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12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2-14)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수고로 된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해 ‘빚진 자’입니다. 성령에게 빚진 자이기 때문에 육신을 따라서 살 의무가 없습니다. 이제는 영을 따라서 살아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대로 마음이 원하는 데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은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죄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죄입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는 사실을 바로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로마서 8:5-8)

어떤 분은 육신이 원하는 데로 살아가면 자연스럽지 않으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신이 원하는 데로 살아가면 순간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이 있을진 모릅니다. 하지만 반드시 영원한 죽음을 맛볼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으로서 육신에서 나오는 행실들을 죽여야 합니다. 순간순간 일어나는 육신의 생각을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육신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자학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방법을 죽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성령 충만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므로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갈라디아서에서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라디아서 5:16-17)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15-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고아와 과부처럼 방치하지 않습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듯이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특권을 부여해 주십니다.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5-17)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특권은 세 가지입니다.

⑴ 아버지 되신 하나님(15)

첫째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입니다.

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15)

이제는 사탄의 영에 매어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악령에 시달려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두려움은 악령에 시달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과거에는 노예 상태에 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것만 해도 감사한데,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것입니다. 얼마나 큰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이제 하나님께서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자하신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이제는 삶에 있어서 실수를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사탄이 우리 실수할 때마다 징벌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더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실수를 해도 천진한 아이처럼 하나님의 품에 안기면서 용서해달라고 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첫 번째 특권입니다.

⑵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음(17a)

하나님의 자녀된 두 번째 특권은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17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17a)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게 되는 상속자가 됩니다. 이는 실로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축복이며 특권입니다. 종은 아무리 잘해도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아무리 부족해도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상속자이면 상속자가 되면 아버지의 재산뿐만 아니라 권리나 특권까지도 모두 물려받았습니다. 당신이 어느 나라에 왕자라면 왕의 특권을 모두 물려받을 것입니다. 잠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여서 모든 세상을 창조의 질서대로 회복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아 누리게 될 영광과 권세를 의미합니다. 이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영광과 권세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씀하였습니다.

11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디모데후서 2:11-12)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⑶ 예수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17b)

어떤 분은 ‘고난을 받는 것이 특권입니까?’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있습니다.

17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b)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고난도 특권이라는 답부터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은 영광만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서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길을 가고 있는데 백발의 노인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당신의 부모님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형제들이 길거리에서 강도에게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태도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족이란 공동체 안에 있기 때문에 동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으로 다른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동참하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은,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할 때, 슬프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와 은혜와 기쁨이 넘칩니다. 믿음의 많은 선배들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슬프거나 위축되지 않고 기뻐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상속자의 영광과 소망이 없었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속자의 특권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떤 고난이나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생활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을 좇는 생활입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점점 성숙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힘써 성령을 좇는 생활을 할 때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권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감추어졌던 영적 세계의 비밀을 점점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비밀 중에 가장 큰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당신의 아바 아버지이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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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6)


소망을 버리지 않는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3장 19-39절


이란에서 2007년에 17세 ‘발랄’이 다른 청년과 싸우던 중에 격분하여 상대방을 살해해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7년 후, 사형 집행 당일에 피해자 부모님도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처형하는 장면을 보기 위해 사형장에 참석했었습니다. 피해자 아버지는 발랄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살인범은 ‘부모님을 봐서라도 살려 달라.’고 말했습니다. 피해자 어머니는 화가 나서 사형수 따귀를 치면서 ‘너는 우리에게 무슨 자비를 보여주었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잠시 있다가 한 마디 하길, ‘우리는 너를 용서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형수 의자를 빼서 사형시키는 대신 목에 밧줄을 풀어주었습니다. 이 장면은 TV중계가 되어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본문은 예레미야애가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락입니다. 1-3장까지는 무너진 예루살렘을 목격했던 것에 대한 비참한 현실을 토로한 내용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비참한 현실에 낙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으로 바뀌는 극적인 전환이 나타납니다. 성벽과 성전이 파괴된 현장에서 탄식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고백과, 무너진 터를 회복시키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바뀌어 나타납니다.

 

성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19-24)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마음에 품고 새로운 희망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성실하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치욕을 참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실 구원의 때를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인자를 베푸실 것입니다.

19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19-24)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비참한 멸망인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이렇게 심각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고 나서,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완전히 진멸되는 않는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품은 소망은 당면한 재난과 참상을 경감시킨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을 의지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파괴 되었어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하신 행하신 일도 옳으신 분입니다.

⑴ 고통을 기억해 달라는 선지자(19-21)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재난을 기억해달라고 강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아주 철저하게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동일시하면서, 자기 문제처럼 아파하면서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하자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제 선지자는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기억하소서!’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기도합니다. ‘기억’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시작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로써 출애굽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난을 기억해달라고, 그리고 구원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선지자는 ‘내 마음이 반드시 기억한다’고 고백하는 동시에 낙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선지자가 기억하는 것은 고난과 재난이었지만, 이것을 마음에 담아두었기 때문에 소망이 되었다면서 갑자기 분위기를 전환합니다(21).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사랑의 성품들이었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며 소망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⑵ 긍휼하심을 고백한 선지자(22-23)

선지자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끝이 없다고 고백하는데, 직역하면 ‘하나님의 자비로 참으로 우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긍휼은 참으로 멈추지 않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끝이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6-7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신 인자 그리고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인해 현재는 힘들지만, 자신들이 완전히 망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마다 새롭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증거들을 날마다 새롭게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성실함이 크다’라는 말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고백과 찬미로 하나님이 성실하시기 때문에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때리셨지만,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자비를 풍성하게 내려 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⑶ 절망에서 소망을 보는 선지자(24)

선지자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소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라고 하며, 그 때문에 자신은 끝까지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바라리라’(24)는 ‘나의 소망이 되었다’(21)와 동일한 의미의 문장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기업’은 세상의 모든 기업을 빼앗겨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실 기업은 남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선지자는 이것을 믿고 끝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믿음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환경만 바라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고 절망만 보일 뿐이지만 모든 성도들이 희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그곳에서 희망의 불빛이 비추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이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세아서 6: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너무 힘이 들더라도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끝까지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도들이 실천해야 할 일들(25-30)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실 때, 사람들이 원하고 길들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이 몇 번 실패했다고, 성도를 향해 기대를 버리진 않으십니다. 끝까지 성도들을 바라보시면서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25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29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25-30)

징계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차피 받아야할 징계라면 달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징계를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동안 태도로 기다려야 할지에 대해 소개합니다. 특히 본문 25-27절에서는 동일한 형식으로 세 가지 좋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⑴ 여호와의 선하심을 기다림(25-26)

선지자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찾는 자들에게 그는 선하신 분이라고 찬양합니다. 좋은 것을 잊어버렸는데(17), 좋은 것 되시는 여호와를 다시 기다리고 찾습니다(25). ‘여호와를 구하다’는 ‘여호와께 묻고 도움을 요청한다’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기다림의 동기가 이어집니다(26). 화자는 잠잠히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이 시작될 때까지, 즉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6)고 하셨습니다. 조용한 시간에 오직 하나님과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의미로 선지자는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⑵ 여호와의 해방을 기다림(27-28)

선지자는 젊었을 때는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27). ‘멍에’는 노예나 포로를 상징합니다. 누구나 멍에는 맺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멍에를 젊었을 때 메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아직 어려움을 견딜만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늙어서 당하면 자신의 몸도 지탱할 힘도 없는데 고난까지 겹치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조금이라도 젊은 나이에 겪는 것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멍에에 대한 것이 이어 지는데, 홀로 조용히 그 멍에를 묵묵히 감당하라고 말합니다(28). 이 멍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 때문에 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풀어주실 때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여기서의 침묵은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징벌의 시간을 끝내고 다시 구원을 시작하실 날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으로 곧 희망의 시간입니다.

⑶ 여호와의 소망을 기다림(29-30)

선지자는 ‘입을 티끌에 둔다’(29)는 의미는 얼굴을 땅바닥에 붙여야 한다는 표현입니다. 즉 이것은 자신을 최대한 낮추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최대한 낮추고 침묵하며 견디는 것은 혹시 여호와가 구원해주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낮아져서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다고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회복하신다는 보장은 없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작은 소망이라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간 동안에 받는 치욕도 견디라는 의미입니다(30). 왜냐하면 이런 치욕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이 감당해야할 몫이며, 이런 치욕의 기간이 지나야 비로소 여호와의 구원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지자의 모습에서 고난을 대하는 좋은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긍휼을 믿고 지금의 상황들, 심지어 치욕까지도 잘 견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자신의 죄악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아뢰는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용서와 구원이 임하신 것을 믿고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과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 의로우신 하나님(31-36)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위한 심판, 징계를 위한 징계를 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심과 긍휼하심 때문에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죄인들을 위해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로 십자가의 은혜를 요청할 만큼에 가난하고 애통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31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34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35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36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31-36)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이 고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자녀들에게 징계하신 것은 죄악으로 인해 더 이상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도 베풀어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⑴ 긍휼하게 여기실 하나님을 소망(31-32)

본문에서는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면서, 현재의 고통과 고난을 왜 참고 기다려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내쫓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70년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를 징계하시지만 영원히 버리는 분이 아니십니다. 고통스럽게 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심이 많기 때문에 끝내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⑵ 본심은 자녀를 사랑하는 하나님(33)

선지자는 인간을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는 게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범죄한 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벌하는 것을 기뻐하시지는 않습니다. 즉, 현재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고난과 슬픔은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지 하나님의 변덕이나 악함 때문이 아닙니다.

⑶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세 가지(34-36)

세상이 혼란스러운 가운데도 성도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세 가지 악한 행동을 언급합니다. 이 행동은 하나님의 정의로운 성품과 연결됩니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성도들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바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① 갇힌 자를 밟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 중, 첫 번째, 세상의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입니다. 여기서 갇힌 자는 포로로 끌려온 자들입니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온 약자입니다. 약자를 학대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시편 68:5-6에서는 여호와가 특별히 돌보신 사람들이 고아와 과부와 함께 갇힌 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발로 밟는 것’은 학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약자에 대한 학대를 하나님께서는 결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② 재판을 굽게 하는 것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두 번째,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훼손한다는 의미입니다. 재판은 하나님의 정의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기본적인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이스라엘은 몰래도 아니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좌초한 것입니다. ③ 억울한 재판하는 것 마지막으로 재판과 연결된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재판을 억울하게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이런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지도자나 힘 있는 자들입니다.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해야 하지만 앞장서서 재판으로 악을 행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선지자는 특별히 힘 있는 자들에게 약자들을 억울하게 만들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지금까지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 가운데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우연히 진행된 것이나 강대국 바벨론의 횡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받은 하나님께서 재판장으로 공정하게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인정해야만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37-39)

부모님들은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잘못된 것을 보면 가슴이 아파합니다. 때로는 자녀가 지나치다 싶으면 채벌하기도 하지만, 자녀를 벌하면서 마음이 좋은 부모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책망하실 때 동일합니다.

37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38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39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37-39)

하나님의 심판은 정치적인 희생양이 아니라 죄에 대한 대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벨론에 심판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부터 시작합니다.

⑴ 비극적인 명령하신 하나님(37)

선지자는 다시 자신들에게 일어난 재난과 비극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말한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명령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비극적인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비극적인 것을 명령하신 분이지만 그러한 일들을 기뻐하신 분은 아닙니다.

⑵ 화복을 주관하신 하나님(38)

선지자는 이제 화와 복이 동일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다고 고백합니다. 결국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받고 있는 벌은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시 고백하는 셈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산 사람이 어찌 불평하는냐고 합니다. 여기서 비록 현실은 힘들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것에만도 감사하는 선지자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⑶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말 것(39)

결국 선지자로 하여금 끔찍한 슬픔 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지게 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실하심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이런 선지자의 믿음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이 배워야 할 참 신앙의 모습입니다.

 


선지자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소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회개하는 백성들을 향해 긍휼과 인자가 무궁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반드시 회복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겹더라도 마음을 다해 주께 온전히 돌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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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9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주소서’ 기도에 대한 단상

안성국 목사(익산 평안교회)


존 달림플이 쓴 ‘단순한 기도’를 보면 기도의 형태를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청원의 기도’ ‘감사의 기도’ ‘회개의 기도’ ‘찬양의 기도’ 등입니다. 사실 이런 정리는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들이지요.
청원의 기도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뜻합니다. 감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푼 은혜를 깨닫고 감사를 표현하는 기도이죠. 회개의 기도란 우리의 삶과 행실 가운데서 주님 앞에 죄지은 것과 연약한 것을 아뢰고 참회하는 기도입니다. 찬양의 기도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행위와 존재, 이름을 높여드리고 경배하는 기도이지요.
나름대로 기도의 구력이 갖춰지고 신앙의 연륜을 얻으면 청원의 기도보다 감사의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는 충고를 듣곤 합니다. 그런데 이게 딜레마입니다. 아무리 ‘주소서’ 기도를 하지 않는 대신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려 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달림플은 이 갈등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청원이 곧 기도의 시작”이라는 겁니다. 청원의 제목들이 우리를 기도하는 자리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느끼고 이를 주님의 능력으로 해결해 달라는 위탁인 것이지요.
‘주님 들어주세요’ ‘해결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뭘 들어 달라는 것인지, 왜 해결해 달라는 것인지, 누구를 위해 달라는 것인지를 점검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더욱 성숙해질 것입니다.
안성국 목사(익산 평안교회)
[출처]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04514&code=23111512&cp=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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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8-01)


성령을 따라가는 삶

로마서 8장 1-8절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 중에 두 가지는 ‘죽음’과 ‘죄인’이라는 단어입니다. ‘당신은 죽습니다.’라고 하면, ‘죽은 줄 아는데, 재수 없게 말하느냐?’고 합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무슨 죄를 지었는데, 내가 죄인이냐?’라고 반문합니다. 심지어는 감옥에 죄수까지도 듣기 싫어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죄인’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 서로 죄인된 모습과 장차 죽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은 8장에서 본격적으로 성령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성화의 과정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에게 사로잡혀 노예살이 하고 있던 인간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입니다. 변화는 자신의 노력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한 성도에게 율법의 요구(1-4)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즉 예수님의 구속 사건으로 믿음을 갖게 된 자는 정죄함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은 예수님 안에서 사망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1-4)

8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7절은 ‘이미(already)’가 강조되고, 18-39절은 ‘아직(not yet)’이 강조괴고 있습니다. 로마서 전반부인 1-8장의 결론인 8장은, 특히 5장부터 시작된 소망에 대한 결론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사는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보여줍니다.

⑴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케 됨(1-2)

바울은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능력의 근원이자 매일의 영적 승리를 위한 비밀인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묘사합니다. 먼저 ‘그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하는데, 논리의 대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는 8장은 7:4-6, 특히 6절의 내용과 바로 이어집니다. 7:6에서 우리가 얽매였던 것들, 즉 죄와 육신에 대하여 죽었고 율법에서도 벗어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성령을 따라 산다는 주제를 이미 던졌습니다. 인류는 사망의 몸에서 율법을 이용한 죄의 간교한 즉 죄가 우리에게 탐심을 이루게 해서 얽어 매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노예로 만들어 우리의 내면까지 들어와 괴롭혔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해결하신 이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 것입니다. 육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리킵니다. ‘정죄함’은 유죄 선고를 의미합니다. 법정에서 피고가 유죄선고를 받을 때 사용되었던 말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다 완수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께 받는 선고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선고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완수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법과 사망의 법은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 완전히 무효가 되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정죄할 수 있는 효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은혜의 능력이 죄의 능력을 덮어 씌어 눌러버린 것처럼 생명의 성령의 법(원리)이 죄와 사망의 법(원리)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것입니다.

⑵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하나님(3-4)

해방된 사실에 대해 쓴 바울은 이제 해방이 일어나게 된 근거를 제공합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이기고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다시 지적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육신 때문에 약해져서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했던 의와 생명을 주는 기능을 직접 해주셨는데, 그 방법이 바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입니다. 그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심을 받아 육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를 정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육신의 모양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습니다(빌립보서 2:6-8). 예수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죄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육신의 모양을 가졌던 예수가 죽을 때, 육신이 정죄 당했고, 그 안에 갇혀있던 죄도 육신과 함께 정죄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죄의 요구(사망=죄의 삯)를 다 들어준 것뿐 아니라, 죄가 가장 큰 무기로 자랑하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사망을 예수의 부활이 깨뜨려버림으로 죄의 능력이 무력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던 목적이 4절에서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7장에서 계속 쓰이던 ‘나’와 2절의 ‘너’를 지나 1인칭 복수 ‘우리’로 바뀜) 안에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육신과 성령을 따르는 자에 대한 대조(5-8)

율법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성령의 법은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성령의 법은 단지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는 데 그치지 않고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어 불의와 악을 따라 살지 않고 선을 행하며 진리 안에 거하는 자들이 되게 하십니다.

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5-8)

 

⑴ 육신과 성령을 따는 두 열매(5-6)

바울은 유대인들의 문제가 율법이 아니라 ‘육신’이었다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율법은 육신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육신 아래 있는 인간의 문제를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하도록 계획하셨다는 구속사적 이해를 가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육신’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 세대에 속한 인간의 죄악된 속성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그 육신을 따르는 존재 방식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구를 표출하는 방향의 사고를 전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다음 세대, 곧 하나님 나라 삶과 생명의 원리입니다. ‘성령을 따르는 존재 방식’은 하나님 중심적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사고를 이끌어냅니다(5). 전자의 삶이 사망으로 귀결된다면 후자의 삶은 다음 세대의 생명과 평화로 귀결됩니다(6). 여기서 ‘생명’은 부활 생명을, ‘평화’는 종말적 샬롬을 지칭하는 단어들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완전한 구원에 대한 묘사들입니다.

⑵ 육신을 따르는 자의 하나님과의 관계(7-8)

이제 바울은 이상의 논의를 다시 정리합니다. ‘육신 아래’ 있는 인간들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율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육신 아래’ 거하는 삶의 방식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과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주님을 믿으면 성령님을 선물로 받습니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면, 이미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 분의 인도하심에 따르기 위해 영적인 생활에 힘쓰길 바랍니다. 진정한 평안과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자로 변화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 누리게 되는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골로새서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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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7-03)


사망에서 건져내실 그리스도

로마서 7장 14-25절


 

모든 사람은 영적 고통, 곧 죄로 인한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한 사망의 고통에서 구원 받들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실 뿐이 누구인지 본문을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선한 율법이 오히려 죄에게 이용당하여 사망을 낳는 결과를 초래하는 근원적인 환경이 ‘육체’에 있음을 밝힙니다. 즉, 인간이 ‘육체’에 거하는 이상, 아무리 선을 행하기 원해도 악을 행하게 되고, 선한 율법도 ‘죄의 율법’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합니다.

 

육체 아래에서 죄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나’의 분열(14-20)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4-20)

14절에서 바울은 본격적으로 죄 아래 있는 ‘나’의 고뇌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합니다.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15), 혹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19) 등의 표현은 이 단락에서의 일인칭 ‘나’가 성화의 길에서 영적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이러한 이해에 의하면, 성도는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적 구원 사이에서 내적으로 투쟁하지만 결국에는 이 땅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는 사실상 바울 자신의 고백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로마서 5-8장 큰 단락의 전체 흐름 속에서 볼 때는 바울의 중요한 논점을 뒤집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선 7장 안에서만 보더라도, 바울은 4절과 6절에서 명확하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서 6장에서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미 ‘죄에서 해방’되었고(18,22), 더 이상 ‘죄의 종들'이 아니라(17,20)고 못 박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의 다스림을 깨뜨리고 의와 생명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가심으로 구속사의 결정적 전환이 일어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죄에 대해서 죽고 의와 생명에 대해서 살아났다는 5-6장 전체의 흐름에 반합니다. 바울은 5-8장 전체에서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세대 한가운데에서 다음 세대의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확신 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대의 특징들인 죄와 사망에 대해서 이미 죽었을 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도 죽었다는 큰 흐름은 7장에서도 여전합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는 12절의 진술을 되풀이합니다. 문제는 ‘내’가 ‘육신적’이라는, 즉 이 세대를 포괄적으로 묘사해주는 단어인 ‘육체/육신 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육신’이라는 말을 통해 바울은 이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속성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말합니다. 그 육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고, 율법을 부여받은 ‘나’마저 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15-20절은 선한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원하지 아니하는 것을 행하고 마는 ‘나’의 상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율법은 여전히 선한 것으로 묘사되고(16), 악을 행하게 하는 장본인은 내 속에 있는 죄이며(17), 그 죄의 다스림을 조장하는 근본적인 환경은 ‘육신/육체’(18)입니다. 20절은 ‘나’라는 존재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이 ‘죄’의 노예 되어 있기 때문임을 명시합니다.

이러한 ‘나’는 누구입니까? 7-25절 전체 내용이 5절을 극화해 놓은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육신’으로 대표되는 이 세대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았지만, 결국 죄의 다스림을 면하지 못하였고 사망의 열매를 맺은 ‘나’는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율법이 선하다는 것도 알고(14),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기도 하고(22), 율법을 지키기 원하여 노력하고(15-21), 나아가 그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25) 사람입니다. 이는 ‘나’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나'쉽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단정 짓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6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해방되었고(18,22), 죄의 종이 아니며(17,20), 이제는 하나님과 의의 종이 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18,22). 다음 단락인 8장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며(1),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고(2), 결정적으로 성령을 따라 이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4)고 말합니다. 즉,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묘사하는 다른 표현들과 7:14-25의 내용들이 정면으로 배치됨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나’는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율법을 부여받은 유대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내’가 율법이 선하다는 것(7,10,12,13,14,16)을 잘 인식하고 있음을 보시길 바랍니다.

 

육체 아래에서 죄에게 이용당하는 율법의 분열(21-23)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1-23)

이 소단락에 등장하는 헬라어 ‘노모스’를 개역개정은 모두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법’으로 번역하였으나, 바울이 4-6절에서 자기주장의 핵심을 먼저 말한 뒤에, 줄곧 ‘율법’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점은 명백합니다. 이제 바울은 율법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였습니다(21). 그런 다음 21b절에서 율법에 대해서 바로 말하지 않고,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죄 아래에서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나’의 아담적 실존, 곧 ‘육체’라는 이 세대의 환경 아래에서 살면서 죄와 사망의 통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육체 아래 있는 유대인에게 주어진 율법은 유대인과 함께 분열을 경험합니다. 유대인들은 속사람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였습니다(22). 23절에서는 이를 ‘내 마음의 율법’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헬라어 ‘누스’는 생각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즉, 내면적으로는 율법이 옳다는 것도 알고 또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한 율법을 구체적 행동으로 실현하는 순간에는, 너무나 허무하게 율법이 ‘죄’에게 굴복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에게 굴복하고 마는 율법을 ‘죄의 율법’이라 표현하고 이를 ‘하나님의 율법’과 구별되는 ‘한 다른 율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대/육체 속에서는 유대인도 율법도 다스림을 벗어나지 못하고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나'의 딜레마(24-25)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4-25)

24절에 이르러 율법 아래에서 살아가는 유대인은 절규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실행하기는커녕, 율법을 거슬러 악을 행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호라 나는 절망적인/비참한 사람이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줄 자’를 찾습니다. 우리는 이미 6장에서, 그리고 7:4,6에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대의 몸과 사망의 다스림에서 우리를 건지셨다는 바울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25절에서 바울은 바로 이 고백을 되풀이합니다. ‘우리 주 예수 메시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즉, 이미 해답을 알고 있는 문제를 설명한 셈입니다. 이 구절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었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을 미리 보여주는 기능을 합니다. 25b절에서 바울은 7:7-25 단락 전체의 내용을 다시 정리합니다. ‘나’라는 내적 자아는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즐거워하지만, 육체/육신으로 대변되는 이 세대의 구조 속에서는 그 율법이 죄에게 이용당하여 ‘죄의 율법’으로 전락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 전체는 율법을 지닌 유대인의 딜레마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풀어 쓴 것입니다. 즉, 유대인도 아담 안에 있어서 죄와 사망의 다스림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였고, 유대인에게도 예수가 필요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는 유대인에게요’라고 말했습니다. 7장의 ‘나’가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해서 7장이 다른 이들에게는 적용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구속사 속에서 먼저 부르심을 받고 율법을 부여받은 유대인도 육체와 이 세대, 죄와 사망의 다스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다른 민족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이 7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화자로 등장한 ‘나’의 존재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 자신인지 아니면 타인인지, 회심 전인지 아니면 회심 후인지,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면서도 죄의 법 아래에서 절망하고 있는 이 사람이 누군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이 ‘나’는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의에 이르지 못하고 율법을 성취 못하는 우리 모두 인간인 ‘나’인 것입니다. 선을 원하고 악을 미워하지만, 정작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삐뚤어진 악의 본성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죄를 지어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자신의 능력에 기대어 살지 않고 주님의 자비와 성령의 인도에 이끌려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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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


예레미야서는 같은 대선지서에 속해 있는 에스겔서나 다니엘서나 이사야서보다 긴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역사서와 비교해 보아도 사무엘서나 열왕기서나 역대기서를 상하권으로 나누면 그것들보다 긴 책입니다. 예레미야서는 해석상의 흥미나 예루살렘 함락에 관한 주제나 후대에 미친 신학적인 영향력들을 보면 상당한 비중을 가진 책입니다.

 

제목 예레미야

저자 예레미야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던지신다.’라는 뜻입니다. ‘던지다’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저자 예레미야

본서의 저자는 예레미야입니다. 본서와 구약의 다른 책들의 증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 내적 증거

본 예레미야서 1:1, 36:1-2 등은 저자가 예레미야라는 점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외적 증거

구약 다른 성경에서는 다니엘 9:2, 역대하 36:22, 에스라 1:1 등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치하에서 70년간 포로 생활을 한 것과 바사 왕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본국으로 귀환시킨 것을, 예레미야에 의해 기록된 본서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선포하는 내용이 각기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바룩에 의해 대필되었고(36:4), 52장은 다른 사람에 의해 첨가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역사적 배경

B.C.8세기 때와 마찬가지로 7세기말 경에서 6세기 중반까지 수 많은 선지자들이 활약하였습니다. 예레미야와 동시대 선지자들로는 스바냐, 훌다, 에스겔, 다니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에스겔과는 매우 각별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나훔과 하박국도 동시대인입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대선지자들 중 세 명이 바벨론 포로와 관련된 예언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다니엘은 여호야김 시대의 포로 사건을(단 1:1), 에스겔은 여호야긴 시대의 포로 사건을(겔 1:1-3)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때의 포로 사건을(1:1-3) 각각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록 연대

예레미야 36:1-2에 의하면 여호야김 4년(B.C.605년)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그 메시지를 두루마리에 기록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29:1, 30:2, 51:60 등의 구절들은 바룩의 두루마리에 기록된 것 외에는 대부분 여호와의 메시지가 주어지자마자 곧바로 기록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본서에 수록된 내용은 52장 끝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전체가 예레미야의 사망(B.C.585년) 직후에는 완성되었을 것입니다. 요컨데 본서의 대부분은 예레미야가 예언 활동을 시작한 요시야 13년(B.C.627년)으로부터 예루살렘 함락(B.C.586년) 직후까지 기록되었으리라 봅니다.

 

기록 목적

타락한 백성들에게 공의에 엄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회개를 촉구할 목적으로 예레미야는 본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본 서의 주된 메시지는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와 계획으로 말미암아 종국적으로는 다시금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제 및 특징

본서는 역사서, 시집, 전기의 합본이라 할 수 있으며, 연대순으로 정리되지도 않았고, 논리적인 구성을 갖추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선포한 예언의 내용들은 이스라엘 멸망에 대한 하나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메시지 속에 담긴 주요 주제들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

유다 멸망에 관한 예언과 회복, 메시야적 대망 등 소망의 메시지가 주어진 사실은, 그 백성의 극악한 타락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끝내 성취하시는 주권적 섭리를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열방의 우상들을 허상으로 취급하는 대신 하나님을 만유의 창조주(27:5)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들을 복 주시며 사랑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2) 죄

요시야의 개혁은 백성들의 피상적인 회개와 므낫세 이후 근절되지 못한 우상숭배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백성들의 고의적이고 반복적인 우상숭배와 지도자들도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5:1-31). 이러한 우상숭배는 형식뿐인 여호와 예배와 함께 하나님을 모독하는 가증스러운 범죄였습니다. 한편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거짓됨을 줄곧 공박하였다. 첫째, 회개에의 모든 요청을 거부하는 거짓 평안이다. 둘째, 백성들을 자기 만족에 빠지게 유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이다. 셋째, 우상 숭배 등과 같은 거짓 계시이다.

(3) 심판과 회복

예레미야 당시 유다는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 사회적 부정 부패가 만연하였고, 백성들과 제사장, 선지자와 같은 지도층 모두 타락하여 유다의 심판은 불가피하였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가뭄, 기근, 이방의 침략을 통해 심판하신 바 있지만(4:11-22, 14:1-6), 이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통해 결정적 심판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심판이 치명적이지 않게 배려하십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향해 심판과 파멸뿐 아니라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을 예언하셨습니다(25:11, 29:10). 또한 유다 멸망과 함께 메시야 도래를 예언하였습니다(23:1-8). 이는 유다의 타락에 대한 심판과 함께 남은 자들과의 언약 갱신 속에 계시가 되고 있습니다(31:33).

 

예레미야의 내용 분해

1. 서론: 선지자로서의 소명 /1장

2. 민족적인 내용:유다에 대한 메시지 / 2-33장

    (1) 정죄 / 2-24장

        ① 민족 전반에 대한 정죄 / 2-20장

        ② 특히 지도자들에 대한 정죄 / 21-24장

    (2) 포로됨 / 25-29장

    (3) 회복됨 / 30-33장

3. 개인적인 내용: 예레미야의 고난 / 34-45장

(1) 예루살렘 포위 공격 이전/ 34-39장

(2) 포위 공격 이후, 남은 자들과 함께 함/ 40-45장

4. 국제적인 내용: 나라들에 대한 메시지 / 46-51장

    (1) 애굽 / 46장

    (2) 블레셋 / 47장

    (3) 모압 /48장

    (4) 암몬/49장 1-6절

    (5) 에돔/49장 7-22절

    (6) 수리아, 게달, 엘람/49장 23-39절

   (7) 바벨론/ 50-51장

5. 결론: 선지자의 사로잡힘과 해방/5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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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05)


응답을 기다리는 선지자

예레미야애가 3장 1-18절


 

탈무드에서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0리를 가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살아가는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고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알고 있는 고난도 있지만, 어떤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고난과 아픔을 우리 편에서 손쉽게 생각하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흔들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해 회의를 품기도 합니다. 비신자들은 비아냥거리고 빈정거리기도 합니다. 잘못된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이라면 누구에게 하소연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범죄한 이스라엘은 철저히 파괴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본 3장은 예레미야애가에서 가장 긴 장입니다. 1,2,4장이 알파벳의 개수에 따라 22절로 구성된 것과 다르게 3장은 각 알파벳의 철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장의 세 배 분량인 66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장은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고난을 여러 가지로 묘사한 1-18절과 누군가 여호와께 이야기하는 19-39절, 우리끼리 하는 말인 40-41절, 우리가 여호와께 하는 말인 42-47절, 나의 탄식인 48-54절, 나의 기도인 55-66절로 구분됩니다.

 

참상으로 인해 슬픔에 쌓인 예루살렘(1-6)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분노의 매를 맞으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감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현재는 하나님께서 도망갈 수 없게 길을 막으시며 자신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죽이려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복과 희망의 하나님이 아닌 심판하는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1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 당한 자는 나로다 2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3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4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5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6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1-6)

예레미야애가 1,2장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참상을 보면서 제3자 입장에서 애통했던 선지자는, 이제는 그 문제를 자신의 한 가운데에서 격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고통당하는 자가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1인칭 화법으로 받아들이고 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서 눈물의 호소합니다. 남들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범죄 하면서 왕과 제사장들은 말씀을 거짓으로 바꾸어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음으로 그 고통과 고난이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⑴ 직접 매를 때리신 하나님(1)

선지자는 자신을 여호와께 분노의 매를 맞은 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는 점을 한탄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 쓰디쓴 고통의 원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자기 백성들에게 매로 진노하십니다. ‘매’는 아이들을 훈육하거나 목자들이 양들을 인도할 때 사용하는 막대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사무엘하 7: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들이라도 잘못하면 사람의 막대기로 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다윗을 통해서 ‘31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32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시편 89:31-32)라고 다시 언급하시면서 모든 이스라엘에게로 확대되어 심판을 받게 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매는 현재는 아프고 슬프지만 결국은 유익한 것이 됩니다.

⑵ 어둠으로 행하게 하신 하나님(2)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빛이 아닌 어둠으로 행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어둠은 고난과 혼란을 의미합니다. 이때 ‘어둠’은 요엘서 2:1-2에 나오는 심판의 날의 어둠입니다. ‘이끌다’라는 단어는 막대기로 양들을 몰아가는 것을 뜻합니다(창세기 31:18; 출애굽기 3:1). 일반적으로는 여호와께서 목자처럼 이스라엘을 푸른 초장이나 물이 많은 곳으로 인도할 것이라 예상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자기 백성에게 분노하셔서 어둠으로 인도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임한 재앙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임했습니다.

⑶ 대적으로 나타나신 하나님(3)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대적으로 나타나신 것에 한탄합니다. 하루 종일 자신을 말처럼 이리저리 몰고 다니시면서 괴롭히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양을 이끌듯이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매우 거칠게 자신을 재앙으로 몰고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로 치시며 돌이켜 돌아올 때 까지 종일토록 계속하십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손을 들어’서 친다고, 2장에서 ‘손을 들어’ 간구한다와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중에 손을 들어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향해 손을 들어 매섭게 치십니다.

⑷ 고통을 더하신 하나님(4)

선지자는 유다의 상태를 나이 많아서 노쇠한 사람으로 비유합니다. 노쇠하여 자신의 몸도 지탱할 수 없는데, 그곳에 고통을 더하신 것입니다. 회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분노는 그치지 않습니다. 아픈 상처로 멈출 수 없는 눈물을 흘리지만 치유는커녕 또 다른 질병으로 더욱 괴롭기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고 뼈를 꺾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쇠하게 하다’는 ‘마찰로 갈아지고 떨어져 나갔다’는 의미로 예레미야애가 2:24, 5, 8절과 16절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뼈를 꺾다’는 직역하면 ‘뼈를 부서뜨리다’의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애가 1:15과 2:9과 11절에서 예루살렘의 젊은이들, 도성의 방비, 도성을 부수어 흩어버릴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예루살렘의 멸망에 사용된 단어를 자신에게 적용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의 고난과 자신의 고난이 연결하고 있습니다.

⑸ 피할 수 없게 하신 하나님(5)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에 담즙과 고통을 쌓으시고 둘러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에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예루살렘이 적들에게 완전히 포위된 것처럼 포위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도망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에 주의를 기울이는 만큼, 하나님의 심판에도 두려워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⑹ 잊혀진 사람처럼 만드신 하나님(6)

2절에서 언급된 어둠의 동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어둠 가운데 처하게 된 선지자는 마치 오래전부터 죽은 자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현재 자신의 삶을 보니 무덤에 있는 시체와도 같았습니다. 자신은 살아도 산 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을 철저하게 받아서 회복 불가능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고통을 겪습니다. 아무도 헤아려 줄 수 없고 위로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더 잘살아보겠다고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회복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그 분노의 매는 선지자 자신의 죽도록 시시때때로 내려칩니다. 고난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도록 계속적으로 임했던 것입니다. 연속된 고난으로 숨 쉴 여유조차 없는 선지자는 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적인 복만 추구한 사람들의 결말은 이렇게 비참합니다.

 

주변에 조롱당하신 예루살렘(7-9)

고난을 당할 때 자신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비참한 슬픔이 마음으로 다가올 때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7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8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9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7-9)

이스라엘에게서 생명의 하나님께서 돌아서셨으니 죽음 밖에 남은 것은 없습니다. 돈과 직장 그리고 명예가 없으면 힘들지만,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섰다고 할 때는 아무런 소망도 없습니다. 선지자를 절망스럽게 하는 것은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길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어둠에서 빠져나가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자기 주위에 담을 쌓아놓으셨기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자신의 쇠사슬을 더욱 무겁게 하셨다고 합니다. 감옥의 이미지를 통해 사슬에 묶인 채로 갇혀서 꼼짝달싹 못하는 선지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지자는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 간절히 외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철저한 하나님의 유기(遺棄)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가장 혹독한 심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자신의 길에 담을 쌓고 길을 굽게 하고 재앙에서 도망갈 수 없게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탈출구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유일한 도움이신 하나님조차 자신을 외면하셨습니다.

살다보면 사방이 이렇게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은 꼭 한꺼번에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리고 반드시 한계점을 보도록 하십니다. 자신이 진짜 사랑하고 의지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사랑하고 있다면, 유일한 출구이신 하나님마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해자인 것처럼 보이는 상황을 만나게도 하실 것입니다.

 

모든 소망이 끊어진 예루살렘(10-18)

교만은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때 찾아옵니다. 하나님 없는 생활, 하나님 없는 가정, 하나님 없는 직장 그리고 하나님 없는 교회에서 교만은 시작합니다. 성경에서는 스스로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 없는 생활을 자유롭게 살려는 것이 방탕하게 되고 결국은 타락했다고 소개합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절대로 겸손할 수 없습니다.

10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11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 12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13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14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15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16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17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18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10-18)

선지자는 앞 단락보다 고난을 강화시켜서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예루살렘을 고난을 넘어서 죽이기 위해 움직이십니다. 꼼짝 못하도록 하고 마치 덧에 걸린 짐승처럼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여기시고 죽이려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⑴ 살해하려고 기다리신 하나님(10)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께서는 잡아 죽이려는 기다리는 곰과 사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곰과 사자처럼 가만히 숨어 있다가 기회를 보아서 먹잇감을 잡아먹는 맹수로 표현합니다.

⑵ 적막하게 방치하신 하나님(11)

여기서 ‘나를 적막하게 하셨다’는 표현은 ‘나를 황폐하게 두셨다’는 의미입니다. 맹수에게 찢겨 황폐해진 상황에서 이 단어는 각각 ‘예루살렘의 문’, ‘예루살렘 자체’, ‘예루살렘의 자녀’를 묘사합니다(예레미야애가 1:4,13,16). 아름다운 예루살렘은 다들 외면한 도시, 누구든지 마음대로 유린하는 도시, 사람들은 다 도망치고 포로로 끌려가고 이제 유령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들짐승의 거처로 변해버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예루살렘 성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⑶ 자신을 활로 쏘시는 하나님(12)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냥꾼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번에도 싸움의 대상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과녁 삼아서 살을 쏘신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애가 2:4에는 원수같이 이스라엘을 향해 활을 당기는 모습이 나옵니다. 사냥꾼은 프로이기 때문에 활쏘는 것을 실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⑷ 치명상으로 고통을 주신 하나님(13)

하나님께서 자신의 허리를 맞추셨다고 합니다. ‘허리’는 본래 ‘콩팥’을 의미합니다. 콩팥은 신체 중에서 가장 예민하고 생기가 넘치는 장기에 해당합니다. 그만큼 치명상을 입었을 때 가장 고통스러움을 느낄만한 곳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을 파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콩팥을 화살로 맞추었다는 것은 고통스럽게 생명을 취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⑸ 조롱거리가 된 상태를 탄식하는 선지자(14)

선지자는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어 있는 상태에 대해 탄식합니다. 예루살렘은 주변 백성들 사이에서 노래와 조롱거리가 됩니다. 여기서 노래는 조롱을 하기 위한 노래를 가르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조롱을 받습니다. 유다 공동체와 구별되며 공동체 안에서 따돌림 당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예레미야나 욥이나 시편 탄원시의 주인공들처럼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겪는 불행 때문에 가슴 아파합니다. 그리고 배척당한 예언자들처럼 선지잔 또한 공동체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⑹ 쓴 것으로 배불리신 하나님(15)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다고 소개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힘든데 그 상태에서 쓴 것으로 먹여서 고통을 더하게 하십니다. 쓴 것은 속으로 들어가서 복통을 일으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더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곡식과 포도주가 없는 궁핍한 상황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곡식과 포도주로 배부르게 하는 대신에 고통의 쓴 것과 쑥으로 채우셨습니다.

⑺ 재로 덮으신 하나님(16)

계속해서 먹는 것과 조약돌로 선지자의 이를 꺾으시고 재로 덮으셨습니다. 조약돌로 이를 꺾는다는 표현은 먹는 문제와 연결되는 바, 이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쓴 것도 먹지 못하게 자신의 이를 돌로 부수어버리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예 재로 덮어버리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일말의 희망도 남겨놓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짓밟으셨다고 토로합니다.

⑻ 소망까지도 거두시는 하나님(17-18)

본문에는 ‘평강’, ‘복’, ‘소망’이란 희망적인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역설적으로 희망이 전부 사라졌다는 슬픈 현실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17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심령을 평강에서 떼어놓았고 좋은 모든 것을 잊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현재 선지자의 상태는 평강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언제 좋은 일이 있었는지 잊을 정도로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평강과 행복은 모두 자신의 율법에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버린 백성들은 결코 평강과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런 극심한 고통의 상황에서 선지자는 자신의 힘과 여호와를 향한 소망이 모두 끊어졌다고 합니다. ‘힘’으로 번역된 ‘명성’, ‘부유함’을 의미합니다. 즉 선지자는 자신의 명성과 여호와께로부터 오는 희망 모두가 사라졌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선지자는 죽음에 이를 만큼의 고통과 재앙을 당하는 의인입니다. 또한 공동체로부터 조롱을 당하는 의인입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 앞에 서는 선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가 받는 고난을 같이 받습니다. 이로부터 공동체와 그 일원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분의 잘못을 전체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체 일원으로서 전체의 잘못을 통감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한 분 예수님만을 모시고 사는 하나의 교회이기 때입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언어는 잔인하고 거칠지만, 그곳에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 고통을 몰라라 하지 않으시고 함께 고통에 동참하십니다. 그 고통을 감당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고통을 지나고 나면 이제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넓은 마음으로 지체들을 대할 수 있게 되어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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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3 정민아의 Amazing Grace 방송

 


더 큰 것을 바라봄

한재욱 목사(강남비전교회)


 

 

돈이 전부라는 사람은 돈으로 바꿀 수도, 살 수도 없는 영원한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존심만 강하다는 말은 자존심 외에는 붙들 게 없다는 말입니다. 복수가 지배하는 사람은 복수 아니면 자신의 존재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붙들고 있는 사람도 불행하지만 버려야 할 독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더욱 불행합니다.

죽어도 구리반지가 최고라며 안 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금반지를 주면 구리반지를 뺍니다. 더 소중한 것, 크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면 아픈 것들을 내려놓고 치유가 일어납니다. 신앙은 만유보다 크고 영원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돈이나 우리의 아픔보다 크다는 것을 체험할 때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게 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한재욱 목사(강남비전교회)

한재욱 목사(강남비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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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7-02)


바른 백성으로 인도한 율법

로마서 7장 7-14절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이해력이 많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해서 방방 뛰고 화를 낼 수 있겠지만, 나중에 그것을 돌아보면 이해되고 후회스러운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당시는 자기 기준대로 생각하고 판단한 결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기 때문에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지금까지 율법의 권세에서 벗어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이제 쓸모없어서 폐기처분해야 한가?’에 대한 질문이 나옵니다. 패기처분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율법과 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율법이 존재했던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율법을 통한 깨달음(7-8)

인간은 나약한 죄인이므로 아무리 선하고 아름다운 율법이라도 스스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율법 앞에서 죄성과 정욕이 자극받아 죄가 늘어날 뿐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있는 죄가 범죄의 기회를 자꾸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은혜를 구하지 않고 율법적 행위에 대한 강박만 가지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움 없이는 율법의 역기능만 체험하게 될 뿐입니다.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7-8)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의 역할에 대해 말씀합니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는 도구로 이용 했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지으면서도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율법이 와서 죄를 깨닫게 만들고 영적인 무지를 깨우쳐 줄 때 비로소 죄의식을 느끼며, 죄에 대해 고통하게 됩니다. 전에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계명을 알게 되어 그 계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부모님이나 윗사람에 대한 순종을 배우며 자라납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부모님이나 윗사람에게 반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른들의 마음에 못을 박는 일을 하지만,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왜 간섭하느냐?’고 데듭니다. 그럴 때 어른들이 하신 말씀은 ‘너도 나중에 자식 나봐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당시는 모르지만 나중에 성장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큰 불순종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후회하지만, 그때는 이미 부모님은 늙고 돌아가시고 난 후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죄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에게 죄가 무엇임을 알려는 ‘가이드라인(Guide line)’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약속의 백성답게 살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잘못된 일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정신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해 간섭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지자들이 전한 말은 옳은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순종하는 뼈를 깎는 아픔이 동반됩니다. 순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쉬운 선택을 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습관대로 살고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선지자들이 자신의 걸림돌로 생각하고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이런 불순종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34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눅 13:34)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암탉이 새끼를 보호하려 했던 것처럼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간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까지 죽였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이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부분들을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아픔이 필요합니다. 편안한 길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을 인정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간섭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처럼 예수님을 죽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죄가 항상 틈을 타서 들어오려 한다고 말씀 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단은 넘어지도록 합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신앙생활하며, 편안한 방법대로 신앙생활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부분에서 가장 큰 실수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로 성장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을 통한 사망(9-11)

오늘날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분별하지 못하면 위험합니다. 사단은 우리 주변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불순종의 영으로 작용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매우 고상한 신앙생활처럼 포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반대된 생활이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털고 일어서야 합니다.

9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9-11)

바울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위해 율법을 주셨지만, 죄로 인해 율법이 변질되고 왜곡되었다고 말합니다. 앞서 율법을 죄와 연관 지어 살펴보며 매우 부정적으로 언급했던 것과는 기조가 달라집니다. 이 율법을 통해서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9)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생명에 이르게 해야 할 계명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인간은 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면 전적으로 무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죄가 율법을 통하여 우리를 정죄할 때 우리는 아무런 힘도 없이 굴복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대로 완벽하게 살 수 없습니다. 이것도 죄이고, 저것도 죄이기 때문에 죄의 지뢰밭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죽음의 지뢰밭에서 나갈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4-25)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의 세력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방법, 당시의 종교적인 습관으로 생명의 길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이 하지 않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잡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깨달았습니다(사도행전 9:18).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진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게 하는 율법(12-14)

많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우리를 억합하고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율법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배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위해 주신 것이 율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12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13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12-14)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율법이 죄냐?”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오히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특히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만약에 율법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탐심이 죄라는 것을 율법을 통하여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의 죄 된 모습을 들추어 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율법은 우리의 본래 모습을 바르게 보게 하는 선한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나를 책망하고 가르칠 때 나의 전인격이 아프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바로 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은 예수님 없이는 죄와 사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영적으로 죄와 사망의 병을 앓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영원히 구하실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날마다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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