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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8-04)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로마서 8장 28-34절


어렸을 때에 한 번쯤은 ‘내 엄마가 진짜 엄마인가?’라는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의심할 때 가장 확실한 대답은 부모님이 ‘너는 내 자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를 낳을 때, 얼마나 내 마음이 얼마나 기뻤는지 아니?’, ‘많은 사람들이 너를 축복했는지 아니?’라는 것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합니다. 영적으로도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자녀임을 확신 받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처럼 모든 만물들이 회복되는 것을 원합니다. 외형적인 모습으로 보면, 세상을 점점 멸망 길로 치닫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부분으로 살펴보면, 정점 하나님 나라로 회복되어 갑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성도들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선을 이루는 비결(28-30)

하나님께서는 항상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이것은 성도된 우리가 장래에 대해 긍정적 확신을 갖고 인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근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준비하신 것은 선한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일 수도 있고, 삶 가운데 탄식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언제나 ‘해피엔딩’입니다.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28-30)

이번에는 성령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는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름 받은 성도에게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십니다(28). 교회에서 성도를 위로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입니다. 본문은 ‘이미와 아직’ 과정의 모든 것을 다 해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피조물이나 성도의 탄식은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한 ‘선(善)’은 29-30절에서 말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과정을 뜻합니다. 성도에 대해 하나님의 미리 아심 → 미리 정하심 → 부르심 → 의롭게 하심 영화롭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향한 진행이 담겨 있습니다. 과거는 미리 아심과 정하심인데, 아들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맏아들이 되고, 그를 따르는 성도들이 또 다른 자녀가 되어 그분의 가족을 형성합니다. 이런 계획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성취되기 시작했고, 복음을 통해 그 과정 안으로 성도를 부르고 의롭게 하는 현재 과정을 거쳐 장차 영원한 영광으로 인도함을 통해 완성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합력해 선을 이룬다는 것은 (1) ‘이미와 아직’ 과정 속에서 당하는 성도의 고난도 이런 구원 과정의 일부이며, (2) 성도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자를 향한 구원 과정을 끝까지 완성한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구원 과정을 완성하실 것이기에 그 과정에 신실하게 붙어 있는 자는 현재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미래를 경험할 것입니다. 성도는 혼자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빛의 새 언약 관계 안에서 구원 계획을 완성하시는 삼위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으며(참고, 성도를 향한 예수님의 중보기도[34]), 그 관계에 신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구원 과정을 완성하는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동참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미와 아직’사이에서 고통과 탄식이 없을 수 없지만, 관점을 바꾸면 성도의 현재는 새 언약 백성의 의무이자 자랑이며 지금 여기서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은혜의 동행입니다.

 

담대한 결론(31-34)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렇기에 그에 따른 우리의 신앙고백도 분명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신앙이 어떤 어려움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1-34)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그날까지 고난이 있는 것은 우리를 예수님 닮은 형상으로 빚어가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속에 몰아넣고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게서 우리를 위하시니 걱정 없습니다.

(1) 도입 질문(31a)

구원 영역에 속한 성도의 삶을 성령을 중심으로 설명한 바울은 여기서부터 구원의 확신에 대해 다룹니다. 일련의 수사적 질문으로 진행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이 일들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라고 질문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이미와 아직’의 시간 속에 이중 정체성으로 사는 성도의 탄식과 그에 대한 미래 소망과 신적 도움을 설명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성도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확신할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었습니까? 이 질문은 일차적으로 8장 앞부분 내용에 근거하지만, 5:12-7:25에서 설명한 어둠과 빛의 두 영역을 배경으로 한 구원 과정과 1:18-5:11에서 상호 작용 과정으로 설명한 구원 과정과도 관련 있습니다.

(2) 구원의 법정적 차원에 대한 설명(31b-34)

구원의 확신에 대한 본격적 설명을 진행합니다. 첫 주제는 성도를 정죄하고 대적하는 상황에 대해서입니다. 우선 이런 상황에 대한 두 가지 이해가 필요합니다. 첫째, 본문의 상황은 죄와 죽음의 영역과 사탄의 영향력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이런 세력에서 해방되는 길을 열었지만, 완전한 승리는 주님의 재림과 심판 때 가능합니다. 그때까지 이 세력들은 여전히 존재할 것인데, 그 영향력은 사람보다 강합니다. 특별히 사탄은 거짓으로 성도를 미혹하고 정죄와 고소로 흔드는 일을 지금도 하고 있고, 어둠의 영역에 속한 자들 또한 사탄처럼 성도를 고소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신자 역시 자신의 연약함으로 외적 정죄와 반대 상황에서 스스로 주눅 들거나 위축될 가능성이 늘 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이미와 아직’으로 인해 겪을 수 있는 실재입니다. 둘째, 여기서 말한 상황은 성도의 잘못으로 빚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물론, 구원 과정 안에 있는 성도도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몸이 아직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채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6:11-14 에서 몸의 지체들을 죄에게 종으로 내주지 말라고 명령한 것도 이 가능성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성도가 죄를 짓는 상황 암시가 없습니다. 오히려 빛의 새 영역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맺고 살아가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부분을 구원 과정에 참여했기에 무슨 행위든 다 용서된다고 말하는 방종의 삶에 대한 면책 근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상적’으로 잘 사는 성도에게 힘을 주기 위한 설명입니다. 정죄와 대적하는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이 문답식 대화법으로 제시됩니다. 가상 대화 상대자와 주고받는 형식 대신 바울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문제 해결의 열쇠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역인데, 세 가지 차원에서 답합니다. 첫째,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라고 말합니다(31). 하나님께서 성도 편이기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의 적절성과 신뢰성은 하나님께서 최종 심판자요 권위자라는 점에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도를 대적하거나 반대하지 않기에, 성도에 대한 다른 피조물의 태도와 반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 편이라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또 다른 수사적 질문으로 그 증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주신 것입니다. 4:25은 ‘내어주다’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설명하는데, 4:25이 수동태를 통해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과정이었다면, 여기서는 하나님을 과정의 주체로 제시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속죄(화목)제물입니다(3:25-26; 8:3). 하나님께서 가장 아끼는 아들을 죽게 할 정도로 성도 편인데, 누가 감히 신자를 대적해 하나님을 대적하겠습니까? 그분은 아들까지 주셨으니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성도에게 기꺼이 은혜로 주실 분입니다(32). 둘째,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 선택은 구원 과정의 시작이며, 예수님을 통해 의롭게 하는 과정을 거쳐 영광에 이르는 과정을 담고 있고(29-30),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32절에서 말한 것처럼 아들을 내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죄인을 의롭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이 의롭다고 평가한 자를 누가 고소할 수 있겠습니까(33)? 셋째, 예수님의 구속 사역입니다. 앞의 두 경우는 하나님 중심으로 구원 과정을 소개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합니다(34).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성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아 십자가에서 죽었고, 부활을 통해 죄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확증하고 죄/죽음/사탄의 통치에 대한 승리를 선포했습니다(참조. 4:25). 이뿐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해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뜻이자, 성육신 이전의 원래 지위와 영광을 회복했다는 뜻입니다. 아직 어둠의 영역의 완전한 복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장차 재림과 심판으로 모든 구원 과정을 완성할 것입니다. 그 영광의 예수님께서 성도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 중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설명을 몇 가지 요소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모든 상황은 정죄와 고소를 중심으로 한 법적 차원에 대한 것입니다. (2) 문제 해결의 근거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죄 사함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모든 죄와 그로 인한 정죄와 심판을 완전히 처리한 과정이기에 믿음으로 그 과정을 통과한 성도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3) 하나님과 예수님의 은혜입니다. 마치 변호인처럼 혹은 재판관처럼 하나님과 예수님께서는 성도 편에서 성도를 옹호하고 깨끗함을 확증합니다. 그분들은 ‘우리’ 편입니다. (4) 그렇기에 성도는 사탄을 위시한 세상의 정죄나 자책감에 눌려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의 관계 차원에 대한 설명(35-39)

깊은 수렁 같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가장 위험한 적은 고통이 아닙니다. 외로움입니다. 수많은 고난을 당했던 바울은 그것을 이기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은 홀로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고난 당하는 그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와 같이 고난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5-39)

성도의 구원 확신에 대한 두 번째 설명으로 이번에는 관계 차원에 대해서 다룹니다. 신자가 치한 어려운 상황을 전제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성도를 두렵게 만드는 두 가지 외부 환경을 배경으로 하는데, 먼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 등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려움들입니다(36). 다른 하나는 사망이나 생명, 천사나 권세자들 같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포함한 영적 영역이나 세력들입니다(38-39). 이 모든 환경은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회복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성도 편에서는 ‘이미와 아직’의 구원 과정 안에서 주를 위해(36)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이런 상황의 성도에게 바울이 제시하는 것은 신적 사랑의 확실성입니다. 그는 메시아와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씩 제시하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수사적 질문과 답을 통해 먼저 소개합니다(35-37). 누가 ‘우리’를 메시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랴? 환란이나 박해 등 이 땅에서 경험하는 환경이 그것을 끊을 수 있습니까? 비록 시편 4:22처럼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해 죽음의 위협에 처할 수 있지만, 성도를 사랑하는 예수님을 통해 넉넉히 이깁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내가 확신한다’ 표현을 통해 그 어떤 세력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39). 바울의 해결책은 두 가지 전제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입니다. 성도가 경험하는 모든 환경은 다 피조물입니다. 비록 사람보다 강하지만, 창조주를 이길 수 없습니다. 둘째, 하나님/예수님의 신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기까지 사랑했고(5:8; 8:32), 아들은 자기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했습니다(5:6,8).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을 사랑하고 관계를 신실하게 유지하는 언약 관계의 의무를 절대로 저버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에 신실한 ‘의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그 사랑을 배신하지 않는 한, 성도를 향한 그분들의 사랑은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붙드시며 세상을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자기 백성에게 새생명을 주기 위해 아들 예수님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장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에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가장 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기 그 어떤 위험 속에서도 안전할 수 있습니다. 환란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협 칼 능력 힘 권세 하물며 천사라고 할지라도 성도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 앞에 대장부처럼 당당하게 서시길 바랍니다. 그 누구도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성도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신뢰하며 찬양하는 백성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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