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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8-03)


영광을 기다린 탄식들

로마서 8장 18-27절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시편에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6)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있을 영광을 생각하면서 그 열매를 기대하면, 소망을 가지는 삶이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 소망 때문에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본문은 앞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영광을 받지만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진정으로 바라야 할 희생이 무엇이며, 또 믿는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뜻과 사랑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은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탄식하는 피조물(18-22)

어떤 분이 ‘고난은 지나가고 것이고 영광은 머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맞은 말입니다. 고난은 언젠가는 아침 안개와 같이 지나가게 될 것이고, 고난을 통한 영광을 삶에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속받을 자들이기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18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18-22)

이전 단락의 마지막 절에서 대조한 ‘성도의 현재적 고난’과 ‘미래적 영광’이라는 주제를 이어 받습니다. 다시 ‘영광’이라는 주제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본 다락의 주제는 성도가 이를 미래적 구원의 영광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⑴ 성도를 위해 준비된 영광(18)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는 고난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고난을 받은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서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고난을 통해서 시험과 연단을 받을 때, 온전한 자로 설 수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고난과 영광은 결합될 수 있습니다.

⑵ 피조물 탄식과 구속에 대한 기다림(19-22)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를 영광의 소망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피조물까지도 구속에 참여하게 될 것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19)고 소개합니다. 피조물들도 썩어져 가는데서 피조물들의 영광도 회복될 그날을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기다렸습니다. 이 아들들은 성령을 소유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 혹은 ‘하나님의 자녀’로 칭했습니다(8:14,16). 하나님의 아들들은 새 언약의 약속을 따라 성령이 내주하는 새로운 인류를 의미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출현을 고대하는 이유는 그들을 통해 피조물의 회복이 이루어져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던 시간에는 만물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모든 동산이 에덴동산과 같이 매우 좋았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타락으로 사람들이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모든 피조물까지 저주가 임했습니다. 창세기 3장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것을 보겠습니다.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16-19)

이처럼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피조물들도 함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피조물도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당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저주 중에서 피조물에 대한 저주가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내리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고통가운데 신음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모든 피조물인 자연의 탄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탄식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오로지 물질만능주의로 피조물을 통한 이익에만 급급하면서 살아갑니다. 만물의 영장이면서 이제는 만물에게 지배를 받는 종으로 전략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피조물은 더욱 괴로워하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조물의 탄식은 자연 이변이나 지진 그리고 해일 같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은 신음하고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회복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구약의 이사야 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올 때, 자연 만물도 그 해방에 참여하게 될 것을 예건하고 있습니다(이사야 35:1-2, 6-10; 41:17-20; 44:23; 55:12-13). 즉 선지자는 자연 만물이 누릴 미래적 회복과 영광이 하나님 백성의 해방과 영화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이러한 예언이 그리스도를 통해 포로 됨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이를 그때에, 자연문물도 그 영광에 함께 이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만물의 대표입니다. 피조물의 세계가 원래 원리대로 진행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의 세계가 신음하며 장차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영장인 사람들도 하나님의 영광이 완성될 때까지 소망하며 인내로 기다리라고 촉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원한다면 현실의 삶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고난에 대한 자세를 바르게 세워야 하겠습니다.

 

최종적인 구원을 향한 소망(23-25)

원래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만 급급합니다. 이렇게 현실만 급급하고 살아가는 것은 타락한 사람들의 일부분입니다. 현실에 너무 집착하다보면, 미래에 대한 소망이나 꿈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에게 장차 주어질 소망을 바라보라고 권고하십니다.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23-25)

앞에서 피조물들이 탄식하며 기다린다고 소개했습니다. 이제 장차 올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소망을 갖게 되면서 우리에게 확신이 생깁니다. 바울은 성령을 받은 성도들까지 여전히 탄식하면서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⑴ 성도들의 탄식과 몸의 속량에 대한 기다림(23)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추수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드렸던 ‘처음 익은 열매’에 성령을 비유합니다(출애굽기 22:29; 레위기 2:12; 민수기 15:20). 그 첫 열매는 밭 전체 열매들의 일부이자, 밭 전체 열매들을 대표합니다. 그 열매의 체가는 밭 전체의 추수가 시작되었다는 시작을 알립니다. 성도들에게 임한 성령이 완전한 구원의 일부분임을, 그리고 그 완전한 구원을 바울은 ‘양자 됨의 지위를 얻는 것’과 ‘몸의 속량’으로 표현합니다. 이 탄식은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희망의 탄식입니다. 마치 산모가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은 탄식과 같습니다. 산모의 비명은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 고통이 동반 됩니다. 그러한 성도들의 고통에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되길 바라는 탄식을 의미합니다. 때로는 부모님에게 상속을 받는다는 것은 부모님의 모든 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것만 받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빚도 떠안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부모님이 종이면 자녀들도 종으로 태어나서 평생 동안 종으로 살아야할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유산을 주지 않습니다. 오직 자녀들에게만 주는 것입니다.

⑵ 보이지 않는 소망에 대한 인내(24-25)

당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대부분 종이었지만, 종으로 남은 작은 권리까지 모든 권리를 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더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즐겁게 받아드렸습니다. 세상에 고난이 즐거운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즐겁게 받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은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고 하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서 어느 집에 양자로 들어가서 법적으로 주민등록상에 양자로 입적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미 양자이지만, 실질적으로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유산을 받음으로 자녀로서 대를 잇는 실질적인 아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미 양자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이 재림하심으로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때, 자녀로 확실하게 확인이 되어진 것입니다. 우리들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그 영광을 바라면서 인내를 배우는 것이 성도들이 배워야할 덕목입니다. 그러므로 힘들 때마다 고난의 상황에 묻힌 것이 아니라 고난 뒤에 올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고난을 묵상하지 마시고 뒤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로마교회의 성도들처럼 우리들도 나름대로 고난을 받고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가 상속받을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현재의 고난이 전부인 줄 알고 낙심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고 장차 우리들이 주어질 영광을 바라보라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탄식하는 성령님(26-28)

고난과 핍박이 있을 때, 홀로 당하면 매우 힘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고아와 과부처럼 그냥 버려두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탄식하시면서 영광이 회복되길 기다리며 성도들을 도우시며 동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6-28)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고 살아가지만 육신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질그릇과 같이 연약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아십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도와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성령의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6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한복음 14:16-18)

성령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해 주시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영적인 가이드가 되어 주십니다. 히말라야 산을 등반할 때는 등반가들만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산의 속사정을 잘 아는 가이드들을 동반하고 오릅니다. 그 가이드들은 등반가들이 산의 정상에 오를 때까지 반드시 같이 동반합니다. 하지만 매스컴에는 등반가들이 올랐다고 하지 이 가이드들이 올랐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도 우리들과 같이 동행하며 인도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자신의 역사를 들어내지 않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충분하게 박수를 받게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교만한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이 스스로 한 것처럼 교만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홀로 신앙의 삶을 살아가기엔 무척 연약한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너무 힘이 들거나 영적으로 절망하고 있을 때,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할 수 없으면 영적으로 회복하기 너무 힘듭니다. 우리들이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성령님은 연약하고 무지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이 완성되도록 간구하심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 때문에 좌절하거나 회의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너무 힘이 들어서 탄식하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성도들을 도우시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혼자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힘들 때는 자신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말고 당신의 마음을 성령님께 열어놓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심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20)

예수님의 약속대로 우리들과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세상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하지만 신앙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간구하시는 성령의 중보기도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고난이나 핍박이 있기 때문에 절망과 탄식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천국의 소망들로 바뀌어야 합니다. 아픔과 낙심 중에 함께하시면서 저의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시는 성령을 사모하며, 당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 드리길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의 위로와 평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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