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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7-03)


사망에서 건져내실 그리스도

로마서 7장 14-25절


 

모든 사람은 영적 고통, 곧 죄로 인한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한 사망의 고통에서 구원 받들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 주실 뿐이 누구인지 본문을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선한 율법이 오히려 죄에게 이용당하여 사망을 낳는 결과를 초래하는 근원적인 환경이 ‘육체’에 있음을 밝힙니다. 즉, 인간이 ‘육체’에 거하는 이상, 아무리 선을 행하기 원해도 악을 행하게 되고, 선한 율법도 ‘죄의 율법’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합니다.

 

육체 아래에서 죄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나’의 분열(14-20)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15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16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4-20)

14절에서 바울은 본격적으로 죄 아래 있는 ‘나’의 고뇌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합니다.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15), 혹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한다’(19) 등의 표현은 이 단락에서의 일인칭 ‘나’가 성화의 길에서 영적 좌절을 경험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이러한 이해에 의하면, 성도는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적 구원 사이에서 내적으로 투쟁하지만 결국에는 이 땅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괴로워하는 ‘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는 사실상 바울 자신의 고백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로마서 5-8장 큰 단락의 전체 흐름 속에서 볼 때는 바울의 중요한 논점을 뒤집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선 7장 안에서만 보더라도, 바울은 4절과 6절에서 명확하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나아가서 6장에서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미 ‘죄에서 해방’되었고(18,22), 더 이상 ‘죄의 종들'이 아니라(17,20)고 못 박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께서 ’아담 안에서‘ 죄와 사망의 다스림을 깨뜨리고 의와 생명의 다스림 속으로 들어가심으로 구속사의 결정적 전환이 일어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죄에 대해서 죽고 의와 생명에 대해서 살아났다는 5-6장 전체의 흐름에 반합니다. 바울은 5-8장 전체에서 이제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세대 한가운데에서 다음 세대의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확신 있게 전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대의 특징들인 죄와 사망에 대해서 이미 죽었을 뿐만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도 죽었다는 큰 흐름은 7장에서도 여전합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선하다는 12절의 진술을 되풀이합니다. 문제는 ‘내’가 ‘육신적’이라는, 즉 이 세대를 포괄적으로 묘사해주는 단어인 ‘육체/육신 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육신’이라는 말을 통해 바울은 이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속성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말합니다. 그 육체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고, 율법을 부여받은 ‘나’마저 그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15-20절은 선한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실제로는 원하지 아니하는 것을 행하고 마는 ‘나’의 상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율법은 여전히 선한 것으로 묘사되고(16), 악을 행하게 하는 장본인은 내 속에 있는 죄이며(17), 그 죄의 다스림을 조장하는 근본적인 환경은 ‘육신/육체’(18)입니다. 20절은 ‘나’라는 존재가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이 ‘죄’의 노예 되어 있기 때문임을 명시합니다.

이러한 ‘나’는 누구입니까? 7-25절 전체 내용이 5절을 극화해 놓은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육신’으로 대표되는 이 세대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았지만, 결국 죄의 다스림을 면하지 못하였고 사망의 열매를 맺은 ‘나’는 누구입니까? 이 사람은 율법이 선하다는 것도 알고(14),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기도 하고(22), 율법을 지키기 원하여 노력하고(15-21), 나아가 그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25) 사람입니다. 이는 ‘나’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나'쉽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단정 짓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6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해방되었고(18,22), 죄의 종이 아니며(17,20), 이제는 하나님과 의의 종이 되었다고 선포했습니다(18,22). 다음 단락인 8장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으며(1),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고(2), 결정적으로 성령을 따라 이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되었다(4)고 말합니다. 즉,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묘사하는 다른 표현들과 7:14-25의 내용들이 정면으로 배치됨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나’는 구속사 속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율법을 부여받은 유대인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내’가 율법이 선하다는 것(7,10,12,13,14,16)을 잘 인식하고 있음을 보시길 바랍니다.

 

육체 아래에서 죄에게 이용당하는 율법의 분열(21-23)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21-23)

이 소단락에 등장하는 헬라어 ‘노모스’를 개역개정은 모두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법’으로 번역하였으나, 바울이 4-6절에서 자기주장의 핵심을 먼저 말한 뒤에, 줄곧 ‘율법’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점은 명백합니다. 이제 바울은 율법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였습니다(21). 그런 다음 21b절에서 율법에 대해서 바로 말하지 않고,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죄 아래에서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나’의 아담적 실존, 곧 ‘육체’라는 이 세대의 환경 아래에서 살면서 죄와 사망의 통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육체 아래 있는 유대인에게 주어진 율법은 유대인과 함께 분열을 경험합니다. 유대인들은 속사람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였습니다(22). 23절에서는 이를 ‘내 마음의 율법’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헬라어 ‘누스’는 생각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즉, 내면적으로는 율법이 옳다는 것도 알고 또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한 율법을 구체적 행동으로 실현하는 순간에는, 너무나 허무하게 율법이 ‘죄’에게 굴복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에게 굴복하고 마는 율법을 ‘죄의 율법’이라 표현하고 이를 ‘하나님의 율법’과 구별되는 ‘한 다른 율법’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이 세대/육체 속에서는 유대인도 율법도 다스림을 벗어나지 못하고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나'의 딜레마(24-25)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4-25)

24절에 이르러 율법 아래에서 살아가는 유대인은 절규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실행하기는커녕, 율법을 거슬러 악을 행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호라 나는 절망적인/비참한 사람이다’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줄 자’를 찾습니다. 우리는 이미 6장에서, 그리고 7:4,6에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대의 몸과 사망의 다스림에서 우리를 건지셨다는 바울의 선언을 들었습니다.

25절에서 바울은 바로 이 고백을 되풀이합니다. ‘우리 주 예수 메시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즉, 이미 해답을 알고 있는 문제를 설명한 셈입니다. 이 구절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율법의 요구가 성취되었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을 미리 보여주는 기능을 합니다. 25b절에서 바울은 7:7-25 단락 전체의 내용을 다시 정리합니다. ‘나’라는 내적 자아는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즐거워하지만, 육체/육신으로 대변되는 이 세대의 구조 속에서는 그 율법이 죄에게 이용당하여 ‘죄의 율법’으로 전락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로마서 7장 전체는 율법을 지닌 유대인의 딜레마가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풀어 쓴 것입니다. 즉, 유대인도 아담 안에 있어서 죄와 사망의 다스림 아래 있기는 마찬가지였고, 유대인에게도 예수가 필요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는 유대인에게요’라고 말했습니다. 7장의 ‘나’가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해서 7장이 다른 이들에게는 적용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구속사 속에서 먼저 부르심을 받고 율법을 부여받은 유대인도 육체와 이 세대, 죄와 사망의 다스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다른 민족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로마서 전체에서 가장 난해한 부분이 7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화자로 등장한 ‘나’의 존재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 자신인지 아니면 타인인지, 회심 전인지 아니면 회심 후인지,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면서도 죄의 법 아래에서 절망하고 있는 이 사람이 누군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이 ‘나’는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의에 이르지 못하고 율법을 성취 못하는 우리 모두 인간인 ‘나’인 것입니다. 선을 원하고 악을 미워하지만, 정작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삐뚤어진 악의 본성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죄를 지어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도 자신의 능력에 기대어 살지 않고 주님의 자비와 성령의 인도에 이끌려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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