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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09-02)


하나님의 뜻을 대적할 수 없음

로마서 9장 19-29절


독수리는 새끼들이 날아야할 시기가 지나서 날지 않으면, 새끼를 둥지 밖으로 밀어낸다고 합니다. 넓은 창공을 날아오른 새로운 세상으로 날아올라야 위엄있는 독수리로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중년이 되면 변화를 두려워하여, 과거의 습관이나 전례에 따라 안전하게만 행동하려고 하지, 새로운 경험을 시도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처럼 오랫동안 새로움을 꾀하지 않고 굳어진 습성을 ‘타성에 젖다.’라고 합니다. 타성에 젖는 이유 중에 변화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타성의 보호막을 깨고 나와야만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변화를 통해 새로운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과 책망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바울은 토기장이 그릇의 관계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진흙을 사용해서 어떤 그릇을 만들든 그 권한이 토기장이에게 있듯이 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이 창조주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의 자유(19-23)

구원은 물론이고 최후의 심판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은 역사합니다. 진노의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능력을 들어내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순종을 심판하려 하셨다 가도 멸하시기로 된 진노의 그릇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자유로운 주권에 따라서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에게는 영광을 풍성함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19-23)
긍휼히 여길 자와 심판할 자를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정한다면 인간에게는 무슨 책임이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꼐서는 공평하지 않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대한 항의(19)
19절은 9:6-18, 특히 18절에 대해 예상 가능한 반박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긍휼히 여길 자와 완악하게 할 자를 스스로 결정하셨다면, ‘왜 하나님께서 (완악한 자들을) 여전히 허물하시느냐?’는 질문입니다. (그 뒤에는 ‘왜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시느냐?’는 질문도 전제되어 있다.) ‘누가 그 뜻을 대적(하여 성공)하였느냐?’, 즉 하나님의 뜻대로 완악하게 할 자를 완악하게 하셨는데도, 왜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완악한 자들을 허물하시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된다. 17-18절에서도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강퍅케 하여 하나님께 저항하였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은 역사 속에서 항상 동시에 일어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을 대적하였다면, 그는 심판 아래 놓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1:18-32에서 바울이 애초에 강조한 바다. 19절의 이 가상의 질문자는 마치 인간이 아무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반박한다.)
(2)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결정의 자유(20-21)
이 질문에 대해 바울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20-23절에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과 심판자로서의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주권과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20절에서 사용된 동사 ‘플라쏘’는 창세기 2:7-8, 15에서도 사용된 동사로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21절에서는 ‘만들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진흙덩이로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행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그 생김에 대해서 항변할 수 없고, 진흙으로 귀한 그릇과 천한 그릇을 만드는 것은 토기장이의 자유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천한 그릇’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우선 그것은 구속사 속에서 언약의 범위 밖에 있었던 이방인들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9-11장의 전체 문맥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현재 새 언약의 백성 범위에서 제외 되어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킬 가능성 또한 없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떠한 구속사적인 특권을 누려왔다 하더라도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신비로운 계획 속에서 ‘천한 그릇’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것과 흡사합니다(17-18). 물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한 것은 유대인들 자신입니다(롬 3:3). 그러나 만약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신비로운 구원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들을 그러한 ‘천한 그릇’으로 계획하셨다 한들 누가 이에 대해서 반문할 수 있겠습니까(20a)? 하나님께서 어떤 민족에게 ‘천한 그릇’의 역할을 맡기든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22-23)
그럼에도 그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성품이 긍휼히 여기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22-23절은 최후 심판의 문맥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을 다시 설명합니다. ‘진노’의 심판 날에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순종에 진노로 심판하려 하셨다가도, 멸하기로 준비된 그 진노의 그곳에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22). 또 그분의 자유로운 주권을 따라 영광을 위해 예비된 그릇에게는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십니다(23).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이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에 해당 될 수 있습니다. 결국 22-23절은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 모두를 선대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3:21-26; 5:1-11; 8:31-39에서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들에게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그들과의 화해를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선포하였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스스로 부르시는 하나님(24-29)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들이 출현한 현재까지, 하나님의 백성 아니었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컬음을 받았지만, 유대인들은 극히 소수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에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24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27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28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29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24-29)
은혜로 회복하시기로 한 그릇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남은 자들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만이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너무 적다고 항의할 일이 아닙니다.
(1)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부르신 하나님(24)
바울은 24절에서 이미 그 하나님의 관용의 대상이 되어 긍휼함을 받은 이들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바로 바울과 로마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9:6-13에 의하면, 모든 유대인들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해 긍휼함을 받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로마 교회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이 이들에 해당합니다. 1:18-32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은 이들입니다.
(2) 백성 아닌 자들을 백성으로 부르신 하나님(25-26)
25-29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호세아와 이사야 선지자의 글들을 인용합니다. 호세아 2:23의 인용을 통해 바울은 백성 될 수 없는 자들을 백성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표현합니다(25). 호세아가 말한 백성이 누구였든지 간에,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름 받는 새 언약 백성들을 일컫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3) 남은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27-29)
본문이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25-26절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받지 못한 자’를 ‘사랑 받는 자’로 부른다는 표현은 사랑받을 자격 없는 자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 로마서 3:21-26; 5:1-11, 8:31-39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호세아 2:23에 이어 호세아 1:10의 인용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26)이라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8:14-17에서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그들이 상속자로서 물려받을 영광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 개역개정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단수로 번역했지만, 원문의 복수 의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8:29에 등장하는 ‘맏아들’ 예수 안에서 그와 함께 상속자들이 된 많은 아들들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이 호세아 1:10을 통해서 의도한 것은, 호세아 말씀의 궁극적인 성취에 해당하는 것으로, ‘맏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의 유업을 상속할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27-29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 가운데 ‘긍휼의 그릇’(24)으로 부름 받은 이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은 이사야 10:22을 인용하여 ‘남은 자’라는 단어를 도입합니다. 이미 앞 단락인 9:6-13에서 모든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만 약속과 긍휼을 받는다는 점을 창세기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한 바울은, 이제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미가를 비롯한 예언서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남은 자’ 사상을 불러와 하나님 백성의 범위를 더 좁힙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도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받습니다(27). 28절에서 곧이어 인용된 이사야 10:23의 의미도 로마서 문맥 안에서 예사롭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완전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시행하실 것이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굳이 추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만 새 언약 백성으로 진입하는 일이 철저하게 진행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11장에서 다룰 ‘모든 이스라엘의 구원’이 어떻게 전개 될 지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29절에서 인용된 이사야 1:9 말씀은 그마나 주께서 남은 자를 남겨두셨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전멸하는 것을 면했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구약 인용을 통해 현재 이스라엘의 상황을 설명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들이 출현한 현재까지, 백성 아니었던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칭함을 받았으나,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남은 자’라는 개념을 불러와야 할 만큼 소수만이 하나님 백성의 범위에 들어와 있는 기막힌 구속사적 현실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을 온전히 이루시고 시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남은 자를 구원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행한 대로 하나님께서 갚으셨다면, 그들은 모두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었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은혜를 오늘도 감사와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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