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0-01)
참된 구원의 지식
로마서 9장 30절 -10장 4절
훌륭한 의사일수록 질병을 섣불리 단정하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질병을 진단하고 노력합니다. 환자를 다양한 방법으로 살펴보면서 여러 가지 원인을 찾습니다. 원인을 찾아내야 정확한 진단이 나옵니다. 그 질병에 대한 처방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지 못한 원인과 그것에 대한 처방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 주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른 개념을 설명했던 바울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와 회복의 문제를 다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했던 원인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의로움에 이르지 못한 이스라엘(30-33)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있습니다. 율법은 그 기능과 목적을 오해했습니다. 율법 자체에 대한 열심이 오히려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행위를 의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우리의 한결같은 반응은 ‘믿음’뿐입니다.
30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30-33)
의로운 행위를 위한 그들의 열심은 이해하기만, 그것을 의지하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구약에서도 분명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한 자들은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였습니다.
(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에 이른 이방인(30-31)
30-31절에서 바울은 구속사의 절정에서 일어난 역설적인 상황을 설명합니다. 의로움을 추구하지 않았던 이방인들은 의로움을 얻었으나, 의로움을 추구하였던 유대인들은 의로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방인들이 얻은 그 의로움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이라고 부연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하여 ‘의롭다 함’을 얻었음을 상기시켰습니다(4:3). 바로 그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약속을 상속받게 된다고 설명했습니다(4:16).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 믿음을 보인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반응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30절은 바울이 지금까지 설명한 ‘믿음’과 ‘의로움’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준 셈입니다.
(2) 율법 행위에 의지하여 의로움에 이르지 못한 이스라엘(31-32)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32절에서 바울은 이를 ‘그들이 믿음이 아니라 행위를 의지했다’라고 표현합니다. 32절의 ‘행위’는 31절에서 두 번이나 등장하는 ‘율법의 준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추구한 이유는 율법을 통해서 의로움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31절의 ‘의로움의 율법’이라는 표현에 담긴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율법 준수를 통해 반응함으로써 의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31절이 말하듯이, 율법이 의로움을 줄 수 있다고 여기고, 그 율법을 따라간 유대인들은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 ‘율법에 이르지 못했다’는 표현은 ‘율법의 진정한 목적에 이르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율법이 수행한 구속사적 역할과 한계에 대해서 선명하게 제시했습니다. 로마서 5:20; 7:13 등이 말해주는 대로, 율법은 죄를 심히 죄 되게 하여 그 결과인 사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붓는 예상치 못한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에게 진정한 의로움과 생명을 가져오시도록 돕는 보조적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율법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처음부터 그리스도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이전에 주어진 율법의 제한된 영광에 붙잡혀 정작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3) 걸림돌과 구원의 반석이 된 예수 그리스도(32)
32b-33절에서 바울은 이사야서의 두 구절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인용하여 이를 기독론적으로 사용합니다. 이사야 8:14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걸림들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반석’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사야 28:16 칠십인역은 여호와께서 ‘시온에 한 돌, 곧 시험한 돌,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을 두어 기초를 삼으시는데, 그를(혹은 그것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사야 8:14의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이사야 28:16의 ‘돌’에 관한 언급들과 교체하였습니다. 바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이사야의 돌들에 관한 말씀을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으로 사용하여,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는 분명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였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3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다’는 신명기 21:22-23 말씀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3에서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28:16에 등장하는 돌들에 관한 원래의 묘사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로서, 시온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기초가 되는 돌입니다. 이사야 28:16의 원래 구절들을 불러올 수 있는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의미를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1:18, 24이 말하듯이, ‘십자가의 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은 이스라엘(10:1-4)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바울은 살았습니다. 그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 유대들에게 핍박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길 원하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간절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1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1-4)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근심을 쏟아내던 바울은(9:1-5) 이제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구원을 열망합니다(1). 그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도 이방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와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그 의를 따라감으로 구원받길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1) 이스라엘의 구원을 염원하는 바울(1)
바울은 이스라엘 동족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1).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2) 하나님의 의로움을 알지 못한 그릇된 이스라엘의 열심(2-3)
그러나 그 열심은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2). 바울은 3절에서 곧바로 이를 구체적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알지 못했다’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17에서 하나님 아들의 이야기인 ‘복음에 하나님의 의로움이 나타났다’고 선포했습니다. 3:25-26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셨다고 선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따르지 않았던 ‘지식’이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관한 지식을 말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9:31-32에서 바울이 밝혔듯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을 따르지 않고 율법의 준수를 통해 얻는 의로움을 고집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유대인들이 세우려는 ‘자기 의로움’은, 3절 하반절에서 부연하듯이, ‘하나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는 것’자체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선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는 그릇된 노력’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의로움을 계시하신 방식을 수용하지 못하는 우둔함과 교만함입니다.
(3) 율법의 목적과 완성이 되신 그리스도(4)
바울은 4절을 ‘그리스도는 율법의 텔로스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텔로스’는 ‘목적’을 의미합니까? 아니면 ‘마침/끝’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이전 단락의 논의들에서 율법이 그리스도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논증했습니다. 즉,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는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죄를 심히 죄 되게 하여 사망을 퍼붓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다메섹 체험 이후, 바울은 이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이 율법에게 부여하신 숨겨진 기능임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율법과 그리스도는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을 주기 위해 경쟁하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부터 율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그의 십자가 사역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로마 교회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율법과 그리스도의 복음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예상치 못한 놀라운 성취가 있었지만, 역시 연속성 속에서 설명해낼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텔로스’에서 ‘마침’의 의미를 완전히 배제합니까?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바울은 이미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6:15),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7:4) 등과 같이 말하면서 율법을 이 세대에 속한 것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오셔서 종지부를 찍은 이 세대를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율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신비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이 악하거나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가지는 애초의 구속사적 기능을 다 수행하였기 때문에 이제 그 유효 기간이 다한 셈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0:4의 ‘텔로스’라는 한 단어 속에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의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목적과 마침이 되신 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로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원문에서는 ‘판티’ 곧 ‘모든’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9-11장 단락에서 이 단어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보았듯이, 육신 아래서 죄의 노예로 살면서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율법을 소유한 유대인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은 ‘먼저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다’(1:16).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았음을 감사합니다. 항상 말씀에 붙들려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단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단이 무서워한 것은 말씀들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순종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말씀에 능력 있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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