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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04-01)


위용을 갖춘 솔로몬 왕국

열왕기상 4장 1-19절


당신이 갑자기 큰 회사를 맡아서 일하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을 뽑아서 일을 맡겨야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뽑을 수 있을까, 사람들을 적제적소 자리에 앉힐 수 있을까 고민할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주변 인물들에게 정보를 구하고 이력서를 보면서 정보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가십니까? 무슨 일을 하던지 오직 하나니께서 함께 하셔야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로 솔로몬 왕정은 체계가 잡혀갑니다. 솔로몬은 행정부에 제사장, 서기관, 군사령관, 지방 관장 감독관, 왕궁 감독관, 부역 감독관을 배치하여 이스라엘의 종교, 정치, 군사, 경제 등을 돌봤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솔로몬은 온 이스라엘 땅을 12개 행정구로 지배했고, 열두 지방 관장을 두었습니다. 조직 개편으로 이스라엘은 지파 중심에서 유다와 예루살렘 중심의 중앙집권정치로 탈바꿈합니다.

 

솔로몬의 고관들 명단(1-19)

솔로몬은 재판하는 일에 지혜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나라를 다스린 면에서도 지혜로웠습니다. 솔로몬에게 뛰어난 지혜가 있었지만, 모든 일을 혼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사역을 나누어서 각자 합당한 일들을 신하들에게 맡겼습니다.

1솔로몬왕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2그의 신하들은 이러하니라 사독의 아들 아사리아는 제사장이요 3시사의 아들 엘리호렙과 아히야는 서기관이요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요 4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군대장관이요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요 5나단의 아들 아사리아는 관리장이요 나단의 아들 사붓은 대신이니 왕의 벗이요 6아히살은 궁내대신이요 압다의 아들 아도니람은 감역관이더라 7솔로몬이 또 온 이스라엘 위에 열 두 관장을 두매 그 사람들이 왕과 왕실을 위하여 식물을 예비하되 각기 일년에 한달씩 식물을 예비하였으니 8그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브라임 산지에는 벤훌이요 9마가스와 사알빔과 벧세메스와 엘론벧하난에는 벤데겔이요 10아룹봇에는 벤헤셋이니 소고와 헤벨 온 땅을 저가 주관하였으며 11돌 높은 땅 온 지방에는 벤아비나답이니 저는 솔로몬의 딸 다밧으로 아내를 삼았으며 12다아낙과 므깃도와 이스르엘 아래 사르단 가에 있는 벧스안 온 땅은 아힐룻의 아들 바아나가 맡았으니 벧스안에서부터 아벨므홀라에 이르고 욕느암 바깥까지 미쳤으며 13길르앗 라못에는 벤게벨이니 저는 길르앗에 있는 므낫세의 아들 야일의 모든 촌을 주관하였고 또 바산 아르곱 땅의 성벽과 놋빗장 있는 큰 성읍 육십을 주관하였으며 14마하나임에는 잇도의 아들 아히나답이요 15납달리에는 아히마아스니 저는 솔로몬의 딸 바스맛으로 아내를 삼았으며 16아셀과 아롯에는 후새의 아들 바아나요 17잇사갈에는 바루아의 아들 여호사밧이요 18베냐민에는 엘라의 아들 시므이요 19아모리 사람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나라 길르앗 땅에는 우리의 아들 게벨이니 그 땅에서는 저 한 사람만 관장이 되었더라(1-19)

솔로몬은 하나님께 받은 지혜(3:12)로 일반 백성부터 고위 관리 그리고 왕실과 지방 전체에 이르러 다방면에서 체계를 잡아가며 왕국을 견고히 세워나갑니다. 3장에서 솔로몬이 백성에게 공정한 판결을 행함으로써 사법과 사회 영역의 역량을 보여주었다면, 4장에서는 왕정 고관 임명(1-6)과 지방 행정 개편(7-19)을 통해 정치, 경제, 행정 영역의 역량을 발휘합니다.

(1) 왕실의 신하들(1-6)

저자는 솔로몬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고 밝히는데(1),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솔로몬에게 약속한 견고하고 영화로운 왕국(3:13; 삼하 7:11-13)이 성취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특히 그간 다윗 왕조 역사에 나타난 이스라엘 내부의 ‘균열’과 솔로몬 이후 실제가 될 이스라엘의 ‘분단’을 고려할 때,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재위 동안에 이스라엘 주변 나라를 정복하고,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평화를 꾀했습니다. 그 결과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백성에게 공의를 행한 왕으로 평가받았습니다(삼하 8:15). 그러나 밧세바와 간음 이후 압살롬의 모반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민심은 압살롬에게 향했습니다(삼하 15:13; 16:15). 반란 진압 후 다윗이 왕권에 복귀한 때에도 유다와 북쪽 지파들 사이에 야기됐던 갈등이 심화되어 왕정은 위태로웠습니다(삼하 19-20장). 설상가상으로 말년에는 아들 아도니야가 다윗 측근들과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분열과 반역과 위기 속에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약속한 견고한 나라의 기반을 이루도록 이스라엘 백성의 결속을 이끌어가셨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으로 즉위식에서 솔로몬을 기꺼이 왕으로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1:39-40). 또 통치 초기에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을 통해 다시금 “온 이스라엘”로 하여금 솔로몬을 하나님께서 세운 통치자로 인정하게 이끄셨습니다(3:28). 이후 진행될 성전 건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신앙적 소속감과 연대를 다지는 계기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솔로몬은 그의 왕정을 꾸려갈 관료들을 임명합니다. 왕실 고관 목록(2-6)에는 일곱 직책인 제사장, 서기관, 사관, 군사령관, 지방 관장 책임자(두령), 궁내대신, 노동 감독관이 수록되었습니다. 이전에 다윗이 행정 조직의 기반을 다져두었기에(대상 23-27장) 솔로몬은 이를 바탕으로 조직을 강화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전쟁을 치르고 영토 확장에 힘썼던 다윗 시대에는 군사적 행정체계가 중요했지만, 솔로몬의 관료 명단은 제사장으로 시작하며, ‘제사장’ 직분이 세 번 언급되어 종교적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지방 관장 책임자와 궁내 대신이 새로운 직책으로 포함되었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신하들 중 군사령관 브나야, 노동 감독관 아도니람,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재임명했습니다. 브나야는 다윗의 충성스러운 신하였고(삼하 8:18; 20:23) 솔로몬의 즉위 전부터 왕이 된 이후 줄곧 솔로몬에게 충성했습니다(1:8, 38; 2:25, 46). 아도니람(아도람, 하도람)은 다윗 통치 후반의 명단(삼하 20:24)에만 나온 것으로 보아 성전 건축 준비를 위해 다윗이 강제 노동자를 소집했을 때(대상 22:2) 이들을 감독할 자로 발탁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사독과 아비아달은 다윗의 제사장으로서(삼하 20:25) 압살롬의 반역 때 다윗의 명에 따라 예루살렘에 남아 압살롬 측을 감시하는 첩자 노릇을 톡톡히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죽은 후 아비아달은 다윗을 배반하고 아도니야를 지지했으며, 사독만 다윗과 솔로몬의 충실한 제사장으로 남았습니다. 아도니야의 모반이 실패로 끝나자 아비아달은 솔로몬으로부터 제사장 직분을 박탈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2:26-27). 이들 외에 솔로몬이 새로 등용한 엘리호렙과 아히야는 시사의 아들들로서 서기관 직을 맡았습니다. 여호사밧은 사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사관은 역사 기록관처럼 왕이 하는 일과 판결 등을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는 일을 했습니다. 나단의 아들 아사리아는 솔로몬이 새로 기획한 12행정구의 관장들(8-19)을 총괄하는 감독이 되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일부 고관들이 혈연관계인 것으로 보아 나단은 다윗의 아들로 추정됩니다(삼하 5:14). 나단의 또 다른 아들로 소개된 사붓은 제사장이자 솔로몬 왕의 벗입니다. 왕의 “벗”은 다윗에게 있어 후새(삼하 15:37;16:16-17)와 같이 단순히 친구만 아니라 자문관의 역할을 담당한 자로 추측됩니다. 아히살은 궁내대신으로서 왕궁을 관리 감독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2) 이스라엘 12행정구의 지방 관장들(7-19)

왕실의 행정 체계를 잡은 솔로몬은 “온 이스라엘”을 12개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에 관장을 임명함으로써 지방 행정 체계를 수립합니다(7). 솔로몬이 등용한 지방 관장에는 사위인 벤아비나답과 아히마아스(11, 15)나 후새의 아들 바아나(16)도 포함되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솔로몬의 행정 조직의 주목적이 왕실의 식량 조달로, 각 행정구가 1년에 한 달씩 돌아가면서 곡식과 가축 등을 공급하는 책임을 맡는다고 설명합니다(7). 또한 이들의 책임감 있는 양식 공급과 헌신으로 왕실에 부족함이 없었고(27-28),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지혜로운 통치로 평안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합니다(20,25).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한 견고한 나라(삼하 7:12)와 솔로몬에게 약속한 부귀영화(3:13)가 실현되고 있음을 증명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행정구 신설의 이면에는 나라의 경제 부담을 분산하려는 목적 또한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을 건축하고, 말들을 사들이고 병거성을 축조하며, 국제 무역을 확장하는 등 여러 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이를 충당할 막대한 경비와 인적 자원이 요구되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솔로몬이 정비한 12행정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분배 구획을 근접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다만 산과 강과 같은 지리적 경계나 지파의 원래 경계를 깨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대강 지리상으로 간추리면, 8-12절은 이스라엘 중부, 13-14절은 요단 동편, 15-17절은 이스라엘 북부, 18-19절은 각각 이스라엘과 요단 동편의 남부에 해당합니다. 8-12절의 다섯 행정구는 에브라임 산지, 서쪽 욥바 항구로부터 남동 및 북동쪽의 땅, 이스르엘 골짜기를 포함한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영역입니다. 13-14절의 두 행정구는 요단 동편의 북부와 중부인 길르앗 라못, 바산, 마하나임으로서 므낫세와 갓 지파의 영역입니다. 15-17절의 세 행정구는 납달리, 아셀, 잇사갈, 스불론에게 할당되었던 지역입니다, 18-19절 지역은 베냐민 지파 지역, 요단 동편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의 영역인 길르앗 지역으로, 갓과 르우벤 지파의 영역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7절에서 12행정구로 지목된 “온 이스라엘”의 실체는 4-19절의 지명에 비추어 볼 때, 온 지파가 아닌 북부열 지파에게 할당된 지역을 의미합니다. 레위 지파는 할당받은 영토가 없고 성막과 제사의 책임을 맡았으므로 명단에서 빠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유다 지파만 행정구에서 빠져 세금 부담에서 면제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에 70인역(LXX)에서는 19절의 “그 땅”을 일부러 ‘유다’로 바꿔놓았지만, 당시 유다의 누락은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가나안 정착 이래 이스라엘은 지파 간의 동맹과 협력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성장해왔습니다. 그러다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예루살렘에 옮겨 그곳을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삼았고, 이제 솔로몬은 예루살렘 중심의 집권 체제를 통해 이스라엘의 결속을 다지려 합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개별 행정구의 신설로 지파의 협력 체제가 약화되고, 유다가 받는 특혜로 타 지파들의 불만이 높아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풍요와 안전을 누리는 솔로몬과 온 이스라엘은 이런 긴장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지속적인 신뢰와 순종을 잃지 않을 책임이 있습니다.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더해져야 하고, 하나님 백성의 신실성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솔로몬의 왕국은 다윗 언약에 기초한 나라입니다. 모든 조직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지향할 때,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성장을 담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른 조직은 망합니다. 솔로몬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협력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이처럼 천국의 모형인 교회도 여러 사람이 각자 받은 달란트대로 협력하여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자리를 열심히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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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7-01)


대제사장으로 우월하신 예수님

히브리서 7장 1-10절


만약, 당신이 백화점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백화점 안에 있는 물건 중 원하는 한 가지만 가져가도 좋다!’라고 한다면, 그 많은 물건 중에 아마 ‘가장 값지고 좋은 것’을 취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곳에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은 ‘가장 좋은 것’ 전 단계가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베풀어 주시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분’,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 가장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만나시길 바랍니다.

 

본문에서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며 왕입니다. 그는 구약에 아주 자미 나오지만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비록 레위 지파가 다른 지판의 십일조를 받지만 그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이니, 아브라함과 함께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멜기세덱과 그리스도(1-3)

믿음의 선진들은 믿음과 오래 참음 그리고 인내로서 약속을 기업으로 잡고 소망 가운데 살아간 자들입니다. 그 당시뿐 아니라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도 믿음의 대표적인 표본이 되고 본보기가 된 사람들입니다. 많은 선진들 중에 아브라함을 언급하면서 멜기세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과 같은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1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1-3)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해서 멜기세덱을 소개해 합니다. 멜기세덱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한 설명을 시작합니다. 멜기세덱은 매우 신비로운 사람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제사장으로 섬기게 되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1) 살렘 왕 멜기세덱(1)

히브리서 기자는 5:6-11에서 언급한 후 잠시 미루어둔, 멜기세덱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 주제를 다시 꺼내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창세기 14:17-20을 근거로 멜기세덱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소개합니다. 멜기세덱은 창세기에서 갑작스러운 등장한 인물이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는 성경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의 언급은 신비감을 줍니다. 그에 대해 창세기 14장에서 소개합니다. 그곳을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왕에게 붙잡혀 있는 조카 롯을 구하려 갑니다. 롯을 구하기 위해 여러 나라 왕들과 전쟁으로 승리해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사람이 멜기세덱이었다고 말합니다.

멜기세덱에 대해 창세기 14장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17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 14:17-20)

아브라함 시대에 멜기세덱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멜기세덱은 불가사리한 신비감이 있는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가나안 땅에는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고,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모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만났고,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등지고 완전히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를 안타까워하시면서 홍수로 심판을 하셨습니다. 그 이후에 노아가 세 아들을 통해서 인류를 번성시키면서 인류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노아의 10대손이 아브라함입니다. 그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이런 놀라운 신앙의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소개한 멜기세덱의 이름은 ‘나의 왕은 의로우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소개합니다. 멜기세덱을 소개하면서 ① 살렘 왕 ② 떡과 포도주 가짐 ③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④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함 ⑤ 아브라함으로부터 얻은 것 중 십분의 일을 받음 등으로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전쟁에서 큰 승리를 이룬 것도 감사의 제목이지만, 그 전쟁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멜기세덱과 같은 인물을 만나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아갔다는 것은 크고 놀라운 영적 체험이었습니다.

(2) 의의 왕, 평강의 왕(2)

그 특징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살렘 왕 : 이곳에서 ‘살렘’이란 말은 ‘평화’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 왕은 ‘평화의 왕’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사야서에서 이와 관련된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사 9:6) 장차 오실 메시아 아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놀랍도록 완벽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도 예수님에 대해서 ‘평강의 왕’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② 떡과 포도주 가짐 : 떡과 포도주는 우리가 행하는 성찬과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찬식은 영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만큼 귀한 교제가 있었다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포도주와 떡을 가지고 나아간 적이 없습니다. 귀한 승리를 위한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③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④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함 : 도대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할 수 있었습니까?

⑤ 아브라함으로부터 얻은 것 중 십분의 일을 받음 :아브라함은 십일조라는 규칙이 생기기도 전에 십분의 일을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받쳤습니다.

이처럼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을 아주 존귀하게 여기고 신격화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아들과 닮은 멜기세덱(3)

히브리서 기자는 더욱더 대범한 해석을 시도합니다. 시편 110:4이 해석의 기준점입니다. 이는 “(그가)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라는 진술이 잘 보여줍니다. 히브리서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3)라고 소개합니다. 멜기세덱은 전혀 그의 배경에 대한 소개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중에 이런 존재는 누구입니까? 이런 존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에 의거해서 몇 가지 추론 합니다. 먼저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의의 왕’으로 풀이하고, 또 살렘 왕이었다는 사실을 ‘평강의 왕’이라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이는 멜기세덱을 진정한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의 예표로 보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는 뜻의 신비한 출현을 소개합니다. 이 역시 예수님과 연결시키지 위한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입니다. 중요한 것은 멜기세덱이 비춰 주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이루셨을까?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망이 더 좋은 소망으로 가득 차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멜기세덱이라는 존재에 대해 함께 나누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탁월성(4-10)

샘플은 원형의 특징을 보여줍니다. 잘 만들어진 모형은 원형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해줍니다. 모형의 목적은 원형을 가리키는 데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모형이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본문에 등장한 멜기세덱도 예수 그리스도 모형의 한 예입니다. 다음으로 멜기세덱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4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 5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은 자들은 율법을 따라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6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8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나니 10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이미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4-10)

구약의 내용을 통해 멜게세덱의 탁월성을 논증합니다. 특별히 대제사장으로서의 위치에 대해 다루는데, 멜기세덱의 위치, 멜기세덱의 지위가 매우 우월하다는 의미를 거론합니다. 그를 설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서 입증하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줌(4)

멜기세덱의 첫 번째 탁월성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에게 전쟁에서 얻은 노획물에 십분의 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선물을 드리고 나서 그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인 유대인들에게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며 가장 존경스러운 인물입니다. 그 아브라함이 더 높은 자라고 인정했던 멜기세덱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2) 멜기세덱의 탁월성1(5-7)

아브라함의 증손자인 레위의 후손 제사장들은 모세 율법을 따라 자기 형제들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으라고 명령받았지만(5; 민 18:21), 멜기세덱은 레위 족보에 들지 않았음에도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았습니다. 그가 아브라함 후손의 삶을 규율하는 모세 율법을 뛰어넘는 존재하는 말이며, 레위의 조상 아브라함이 바쳤기에 레위도 아브라함을 통해 십분의 일을 바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9). 이런 면에서 제사장 위치로 보면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뛰어납니다.

(3) 멜기세덱의 탁월성2(8)

다음으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것입니다. 위에 있는 자가 아래 있는 자를 위해 축복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7)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역시 ‘조상’이라는 말이 중요한데, 아브라함이 레위 계통 제사장의 조상이기에 후대 대제사장들보다 멜기세덱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죽은 자들과 살아 있다는 자와의 대조입니다. 멜기세덱이 부모와 족보뿐 아니라, 출생과 죽음의 정보도 없이 항상 제사장직에 있다고 말한 3절 내용과 관련해 영원한 제사장직의 모형이기에 죽음을 경험해 늘 새로운 제사장이 필요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탁월합니다.

(4) 멜기세덱의 탁월성3(9-10)

여기에서는 제사장 가문으로 알려진 레위 지파도 포함됩니다. ‘레위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라는 표현은 레위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받쳤다는 것, 제사장 지파인 레위도 아브라함이 드렸기 때문에 멜기세덱에서 십분의 일을 드린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이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단정해서 말하지 않고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9)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 율법, 모세 그리고 대제사장 아론 이런 인물들은 이스라엘의 신앙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인물들이고 중요한 신앙적인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 드린 헌신과 예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헌신과 예배는 아브라함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인 멜기세덱에게 드렸던 것입니다. 율법 이전에 중심이 있었고, 형식 이전에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가 레위 제사장보다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훨씬 높고 탁월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종합하면, 멜기세덱은 레위 계통 제사장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빌고 십분의 일을 받은 영원한 대제사장 같은 존재이기에 모세 율법이 규정한 제사장들보다 뛰어납니다. 저자의 의도는 멜기세덱 자체를 높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레위 계통보다 뛰어난 멜기세덱을 모형으로 그보다 더 뛰어난 참대제사장 예수를 소개하고픈 것입니다. 더 나아가, 모세와 관련한 옛 언약 제사장을 통한 속죄 사역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논증하려는 것입니다. 구약을 알고 있는 유대인 신자에게 다시 구약을 통해 이렇게 논증해야 하는 것은 안타까운 모습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독자를 지키고 싶은 저자의 마음과 열심이 담겨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의와 평강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은 중요한 순간에 감격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인 십일조를 받쳤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에게 복을 빎을 받았습니다. 멜기세덱과 비교할 수 없는 의와 평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의와 평강을 내려 주시고 계십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존경심을 표했던 것처럼 우리도 마땅히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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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6-02)

 


영혼의 닻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6장 9-20절


약속하신 기업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항해 중입니다. 그 항해 속에는 항상 바람과 파도가 있습니다. 때로는 배를 삼킬 만한 큰 파도가 닥치기도 하는데, 그런데도 이 항해의 길에서 벗어나 떠내려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혼의 닻, 즉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이 든든히 붙들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성숙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경고의 말씀에 이어 확신과 격려로 균형을 잡습니다. 성도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보여준 행위와 사랑을 하나님께서 기억하므로 우리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저자는 ‘우리가 바라는 것, 구원의 소망이 과연 이루어질까?’ 하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실하게 참고 실천하는 믿음이 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의 사례에서 배웁니다.

 

구원에 대한 축복(9-12)

하나님께서는 성숙을 말씀하시지만, 쉽지 않습니다. 정말 성장하고 성숙하고 싶지만, 자꾸 초보에 머물렀습니다. 더욱더 전진하지 못하는 모습을 우리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받은 축복을 귀하게 여깁니까? 축복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축복을 지키는 일입니다.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9-12)

본문 이하는 앞부분과는 반전을 이루며 목회적인 격려 하고 있습니다. 그 격려는 8절까지의 엄중한 경고의 목소리와 균형을 이룹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그러한 이야기들을 남겨놓고 히브리서를 읽는 수신자들에게 다시 히브리서 기자는 이야기합니다. ‘당신들을 조금 더 전진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을 덧붙이면서 시작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이삭의 아들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을 소홀히 여기는 자는 결국에는 그 축복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축복을 받는 것과 지키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믿음의 행진, 복음의 행진. 소망의 행진을 계속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10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9-10)

성숙할 수 있다는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결코 성장해야할 우리들을 잊어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방황하려고 하고, 성장하지 않으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의 성장을 보장하시고 성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도 당신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장과 성숙을 기다리고 계시며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삶을 감사하면서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1-12)

편지를 보내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장하고 성숙하길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되길 원했습니다. 그러면서 각 사람들에게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11)라고 부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지런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라고 권합니다. 소망이 끝나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게으르지 아니하고”라고 권고합니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사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 이러한 네 가지를 이루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항상 똑같이 부지런하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끝까지 지킬 것을 확신하면서 믿음으로 나가고 계십니까? 또 게으름을 내어버리기 위해서 하나둘씩 매진하면서 노력하면서 믿음과 오래 참음을 사용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열매를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성장을 향해 나가는 길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길은 이러한 것을 지켜갈 때, 가능하다 라고 이야기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정말 성숙하여서 구원의 확실을 날마다 누리며 나가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린 아브라함(13-15)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장과 성숙을, 우리들이 구원의 확실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하시겠습니까? 그것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어떻게 이끄셨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성장하고 성숙하길 소망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13-15)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더욱더 성숙하고 온전하게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신 만큼 성도들의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은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예를 듭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그 믿음을 통해서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소망을 같이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1)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아브라함(13-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을 때,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습니다(13). 원래 맹세란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를 두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기 때문에, 이름을 걸 대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아브라함과 약속하시며 맹세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독단적이고 독선적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그 위에 어떤 존재도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보다 위대한 존재가 있다면, 아마 그것은 거짓된 우상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으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14;창 12:1-2; 22:17)고 약속하셨습니다. 너무나 귀하고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기까지 아브라함은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고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 그의 아내 사라의 나이 90세에, 이삭을 얻는 데도 무려 25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창 12:4; 21:5).

(2) 오래 참아 약속을 받음(15)

히브리서 기자는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보기까지 인내가 필요함을 역설합니다(15). 아브라함의 나이로 볼 때, 도저히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으로 인해 그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 중 그가 살아생전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창 17:6-8). 약속의 씨에 대한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에 맹세로 그 약속의 확실함을 보증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복음의 약속들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장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모진 난과 유대주의의 유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된 복음의 약속은 전혀 변함이 없지만, 그 약속이 실현되기까지는 성도들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너무나 조급합니다. 조급하면 지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조급하신 분이 아닙니다. 약속을 받은 우리는 그 약속이 변치 않음을 믿으며 차분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약속을 견고하게 품음(16-20)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신뢰하고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충분히 인내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은 인내입니다.

16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20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16-20)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성도들은 흔들림이 없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느 순간에도 절대로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예를 통해 약속의 확고함을 설명합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큰 안위를 주는 일입니다.

(1) 맹세의 역할(16)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을 맹세하셨습니다(16). 원래 ‘맹세’라는 뜻은 ‘사람들 사이의 다투는 일에 최종적인 결론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 이후에는 다른 결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더 큰 자를 지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자가 없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는 맹세가 필요치 않습니다. 항상 다툼이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간에게는 맹세가 필요하지만, 빈말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께서는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이 맹세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실 때도 맹세하셨다(7:20-22)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 차원으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맹세가 보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먼저 이야기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17-18)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입니다. 맹세는 특별히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17). 그 약속은 당장 손에 실물을 쥐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주는 행위입니다. 실물을 당장 손에 쥐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매우 불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약속만을 기다렸는데, 그 약속이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기나긴 기다림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약속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이 큽니다. 하나님게서는 우리의 이러한 처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맹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든 다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맹세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우둔하여 불안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에게 우리를 향한 뜻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려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받았던 약속은 현실에서 직접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 자체를 ‘기업으로 받은 자들에게’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은 여호수아 13장에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분배해 줄 때, 정복한 땅만 아니라, 아직 정복하지 않는 땅도 분배해 주셨습니다. 각 지파가 분배받을 땅을 지도에 그려서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곳들은 너희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라는 것입니다. 약속을 기업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힘이 나는 것은 현실만 가지고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까지 기업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직 현실은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당신의 꿈과 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에게 우리를 향한 뜻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시려고 맹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를 통해 우리에게 안위를 주십니다(18).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두 가지 행위가 있다고 합니다. 그 두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입니다. 약속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맹세하실 때에는 더더욱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실물로 가진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18)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우리에게 큰 위로와 능력이 됩니다. 소망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절망이 됩니다. 희망이 기대감이 무너지면 낙망이 됩니다. 사람들이 약속은 희망을 부풀렸다가 높이 뛰어놓은 후에 터뜨려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기대감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기대감을 이루어 주시고 채워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엡 1:18)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르심의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3) 휘장 안에 들어감(19-20)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이 ‘영혼의 닻’에 비유됩니다. 배가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닻이 필요하듯 우리 영혼도 닻이 필요한데, 이 닻이 우리가 가진 소망입니다.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안전한 항구에 닻을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튼튼하고 견고할 것입니다. 지금은 그 항구에 멈추어 서 있지만, 이제 곧 하나님의 약속을 향하여서 출항할 것입니다. ‘소망’은 현실에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이미 확신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약속 또는 맹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휘장 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언급합니다(19). 이런 주제의 전환이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7장에서 다룰 내용을 고려하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이 소망의 실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세우신 일 가운데 하나님의 맹세가 가장 크게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닫혀 있던 휘장 안으로 담대히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아서 우리는 휘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휘장은 지성소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만고불변의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맹세에 의거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받아 하나님의 성소로 우리보다 앞서 들어가셨습니다. 이 사실은 현실에 많은 유혹과 도전 앞에 놓여 있는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소망의 문이 활짝 열렸기 때문입니다. 소망의 능력이 우리의 현실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18)에게 하나님의 맹세로 세움 받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보다 큰 위안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당신 안의 의심과 불안, 흔들리는 믿음을 모두 떨쳐 보리고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며 그 약속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의 모습으로 성숙함으로 하나님 맹세를 따라 승리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약속을 이루신 영광의 예수님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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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6-01)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으로 성장

히브리서 5장 11절 - 6장 8절


‘당신은 영적 성장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가운데 성장하지 못해 아직 젖만 먹는 어린 성도가 있는가 하면, 단단한 식물을 먹는 성숙한 성도들도 계십니다. 이런 판단 기준은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느냐?’, ‘어떤 직분을 가지고 봉사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얼마나 성숙했느냐?’입니다. 신앙생활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성장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는 수준으로 끝나면, 영적 젖 먹이 수준으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을 할 때, 영적인 성장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멜기세덱의 반차에 따른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설명하기에 앞서(7장) 저자는 잠시 정리의 시간을 갖습니다. 신비롭고 그래서 자칫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청중이 들을 준비를 시키고 있습니다. 믿음의 도의 초보에 언제까지나 머무른 채 깊은 지식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아닌지 염려하면서 신앙에 있어서 자라가야 할 것, 그리고 뒤로 물러나 배교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합니다.

 

미성숙한 신앙을 진단함(5:11-14)

자신의 건강상태를 점검하는 것을 ‘건강검진’이라고 합니다. ‘건강검진’을 하다가 큰 병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최근에 자신의 영적인 생활을 점검해 본 적 있습니까? 즉, 당신의 영혼에 관한 건강검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살펴보므로 영적인 상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정기적으로 당신의 영적 상태를 점검함으로, 늘 성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11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11-14)

본문은 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지 않고, 잠시 중단합니다. 앞서 엄중한 소리로 경고했던 히브리서 저자는, 이번에는 그들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전합니다. 그들이 구원에 속했다는 증거는 성도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보여준 행위와 사랑입니다. 저자는 더 나가 소망이 성취될 때까지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받은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권고합니다. 당시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쯤이면 다른 사람을 교육하고 양육할 만큼 지적이나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1) 당시 성도의 영적 상태(11-12)

저자는 여러 차례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분의 대제사장직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5:6,10). 그렇다면 이제 멜기세덱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야 하지만, 5:11이하에서 6:20에 이르기까지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잠시 무대 뒤로 사라진 멜기세덱이 다시 나타나는 시점은 6:20입니다. 그때까지 저자는 당시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잠재적 위험을 경고하면서 ‘믿음 안에서 자라가라’고 권면합니다. 저자는 멜기세덱에 관한 설명을 망설이는 이유는 당시 성도들이 ‘듣는 데에 둔해졌기’(11b) 때문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듣기에 게으른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 때문에 그렇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청력의 감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력 면에서의 아둔함과 의지적인 면에서의 고집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잘 적응하지 않는 상태, 그것이 ‘둔함’입니다. 광야 세대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함과도 비교될 수 있었습니다(3:8,13,15). 멜기세덱의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면면을 이해할 만한 성경에 대한 이해, 영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그들은 갖추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젖 먹는 아이’와 ‘단단한 식물을 먹는 자’로 두 가지는 비유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젖 먹는 아이’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긴 하지만, 둔해서 온전하게 해석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고집과 욕심에 가득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2) 성숙해야 할 성도들(13-14)

이런 영적 상황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처방하기 위해 저자는 젖먹이와 어른의 비유를 사용합니다(12b-14). 단단한 음식을 ‘의의 말씀’이고, 이것을 먹을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은 ‘지속적인 연습을 통해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하는 훈련된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성격과 그 실체적 결과를 가리킵니다.(4:14-16; 1019-25). 그것은 신자들의 구원과 천국 소망과 연결됩니다(10:38; 11:4,7). ‘의의 말씀’을 받기 위해서 마치 운동선수가 지속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하고 시합하는 과정처럼, 성도는 도전과 시행착오, 인내와 성실불굴의 의지를 갖추어야 합니다(6:12; 10:36; 12:1), ‘선한 것과 악한 것’의 분별은 실생활에서 윤리적 결단 행동으로 이어질 것입니다(13:1-21). 장성한 사람은 연단된(훈련된) 영적 감각을 가졌습니다. 감사, 드림, 협력, 섬김, 자기 죽음, 은혜로운 말의 습관 등 훈련된 영적인 감각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을 감추어 놓지 말고 성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들으로 신앙이 더 자라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단단한 음식까지 먹으면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장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자신을 처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6:1-3)

성도는 식물처럼 성장해야 합니다. 항상 기초적인 신앙의 자리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기초에 머물지 말고, 기초 위에 더욱 튼튼한 진리의 집을 세우고, 날마다 성장해야 합니다. 영적인 성장은 자신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공동체에 능력 있게 영향력을 미치게 해야 합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1-3)

누군가가 ‘성장한 교회는 많지만 성숙된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장할 수 있으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본문에는 신앙인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먼저 신앙의 성장에 가로막는 6가지 장애물을 소개합니다. ① 회개치 않은 죽은 행실, ② 하나님에 대한 의심, ③ 세례에 관한 오해, ④ 안수에 관한 혼돈, 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불신 그리고 ⑥ 영원한 심판에 대한 의심 등을 나열했습니다. 여섯 가지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들입니다.

신앙의 기초적 원리에 해당하는 것들을 ‘버리라’는 권면의 의미는 아마 ‘초보 진리를 배우느라 같은 자리에서 언제까지나 맴도는 일은 그만두라’(우리말 성경)에 가까울 것입니다. 먼저는 그리스도의 초보에 매어서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모습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 ‘죽은 행실을 회개함’은 불신자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일 때 가장 먼저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개는 신자들조차 순간순간 크고 작은 죄를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전격적으로 바꾸는 일생일대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능력, 성품을 깨닫는 데서 신앙의 움이 틉니다. 세 번째, ‘세례들’은 회심의 표지로서의 세례만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 행해지던 여러 가지 정결 예식을 포괄합니다. 네 번째, ‘안수’는 치유, 파송, 임직 등을 위해서 행해진 예식 행위입니다. 이 두 가지 항목은 초대 교회에서 혼히 행해졌던 예전이기 때문에 그 의미와 방법을 세례 교육의 일환으로 가르쳤을 것입니다. 마지막 두 항목(‘부활과 심판’) 역시 기독교인이 된 후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기본 교리에 속합니다.

기초적인 원리를 배웠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온전한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3)이라는 말씀은 신앙의 성숙 과정이 은혜의 과정임을 넌지시 드러냅니다. 성숙은 우리의 주도권, 우리의 애씀보다는 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의 애쓰심에 우리가 이끌림으로써 가능합니다.

자신을 돌아볼 때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의의 열매를 맺는 성숙한 자가 되었다고 생각합니까? 교회에서 믿음의 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만 머무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 어떠한 내용인지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 설교와 성경 연구를 통해 기본 교리를 제대로 정리하여 묵상하는 것은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배교의 양상과 결과(4-8)

생명은 시간이 가면서 성장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반대로 퇴보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유지나 전진하지도 못하고 퇴보하는 신앙인들은 무엇인지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은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까지 맛보고서도 타락한 자들에 대해 소개합니다.

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4-8)

이 단락은 흔히 10:26-27과 함께 ‘배교 본문’이라고 불립니다. 앞 단락(5:11-6:3)과 이 단락은 논리적으로 어떻게 연결됩니까? 방금까지 설교자는 기독교의 기초적 원리에 머무르지 말고 성숙한 경지로 나아가라고 역설했고 이어서 4절부터 배교와 그 결과를 설명합니다.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에게 배교라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주지시키는 것입니다,

(1) 배교에 대한 정의(4-6)

이 단락은 ‘배교(背敎)’에 대한 일종의 정의입니다. 여기 묘사된 네 가지 혹은 다섯 가지 상태는 신약과 당시 유대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는 표준적인 용어였습니다.

‘한 번 빛을 받음’과 ‘하늘의 선물을 맛봄’ 그리고 ‘성령을 함께 받음’은 모두 회심 과정에서 일어나는 체험을 담아내는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다가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봄’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 체험입니다. 하지만 이런 체험을 거친 참된 기독교인이 배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중요할 수 있는 이 질문을 설교자는 던지지 않습니다. 답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실한 기독교인의 배교는 적어도 히브리서의 저자와 당시 성도에게 기정사실이며, 현실의 일부인 것으로 전제됩니다.

저자는 배교한 신자를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도록 만들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최초의 구원과 마찬가지로 배교자의 구원도-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합니다. ‘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제한성이 아니라 당위(‘마땅히 그러해서는 안 됨’) 혹은 사태의 확실성(‘결코 그렇지 않음’)을 표현합니다. 더욱이 배교는 혼자 마음에 품는 생각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주 되심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버리는 행동은 자신의 결연한 의지의 산물이 아닙니까! 그처럼 완고하고 적극적인 배교자에게 ‘새롭게 될’ 일말의 여지가 있다고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2) 믿음에 대한 결과(7-8)

본문에서 땅과 작물의 비유는 배교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입니다. 농부, 나무, 열매의 모티프는 예수의 가르침과 구약성경에서 종종 발견됩니다. 산상 설교의 일부로서 예수께서는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안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복음 7:16-23//누가복음 6:43-45). 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다가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막 11:12-25). 요한복음에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가 연합될 때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요한복음 15:1-8). 이런 가르침들의 배경에 구약으로부터의 울림이 있다. 기대했던 참포도 열매 대신 들포도 열매를 맺는 포도원의 노래를 통해 이사야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져 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을 개탄합니다(이사야 5:1-7). 이런 성경신학적 흐름에 비추어 본다면, 배교는 보다 넓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못하는 삶, 행동, 습관들이 곧 ‘가시와 엉겅퀴’입니다.

교회가 박해받던 시기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 십자가를 밟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만 배교의 경고가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이들에게만 배교의 경고가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비를 흡수해 왔지만 좋은 열매가 아닌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은 안정된 가운데 권력과 풍요를 누리는 타락한 교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신의 삶이 성장하는 신앙인의 모습으로 변화되길 원합니다. 지금 영적인 상태에서 자만하며 머무르거나 퇴보하지 말고, 주님의 은혜를 맛보고 보인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길 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주님을 닮아가는 성품이 자라나길 원합니다. 항상 그리스도의 초보를 넘어서 성숙한 신앙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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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5-01)


위대한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5장 1-11절


이 시대는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사람, 조직 그리고 공동체들이 기초가 흔들리고 무너져갑니다. 앞날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존재입니다. 이 불안한 시대에서 누군가 도움 없이 혼자 살아가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지켜주는 후견인이 대단한 능력자이며 위대한 분이라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탁월한 후견인이십니다. 그분은 능력이 많으시며 자신의 생명도 아낌없이 내어 주시기까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본문에서 아론 후손의 대제사장보다 예수님께서 위대한 대제사장의 역할한 것을 알립니다. 구약 대제사장은 아무나 맡을 수 있는 직분은 아닙니다. 아론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 받은 사람들만이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선택된 대제사장의 모습(1-4)

예수님 같은 대제사장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들과 똑같은 조건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사람들의 연약함을 공감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면서, 먼저 구약 대제사장의 자격과 역할에 대해 설명합니다. 대제사장의 위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신 것을 설명합니다.

1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3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 때문에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죄를 씻는 방법인 제사법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의 백성을 대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유대인들은 유다 지파 출신인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제사장이 될 있내고 반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제사장으로 새워졌던 멜기세덱처럼,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특별한 임명으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1) 대제사장의 자격(1a)

‘왜냐하면’이라면서 대제사장 예수님과 관련한 결론적 권면의 이유를 제공합니다. 대제사장이 누구인지 왜 예수님께서 큰 제사장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대제사장이 세워지기 위한 자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사람 가운데서’라고 소개합니다(1).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부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하므로 신적인 존재가 아닌 사람만 가능했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충만한 신성을 가지고 태어나신 분이지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해서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장으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사람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자격으로 대제사장은 ‘취한 자’로서 택함을 받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사람 중에서 취해지기 때문에 사람들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 선택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2) 대제사장의 사역(1b)

본문에서 대제사장의 사역을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선택함을 받은 대제사장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예물과 속죄 제사들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가 백성들을 위해 중보를 감당했습니다. 요약하면, 대신 제사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중요한 역할은 1년에 단 한번 있는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모든 백성들의 죄를 놓고 용서를 구하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3) 대제사장의 자질(2-3)

대제사장의 자질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대제사장은 일반 사람들과 거룩하게 구별된 일을 하지만, 그들은 일반인과 똑같은 존재라고 합니다. 먼저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2) 대제사장조차도 특별한 능력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연약한 사람들을 용납해야 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백성을 위해서 속죄제를 드리지만, 자기를 위하여서도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대제사장’이란 거룩함과 독특함이 있지만, 자신도 일반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이해하고 공감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4:15).

베드로는 성도들을 향해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선포했습니다(벧전 2:9). 모든 성도는 대제사장입니다. 이제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항상 자신을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속한 사역을 하는지, 아니면 육신에만 매어 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리스도(4-6)

지상의 대제사장은 스스로 이 존귀한 신분을 취할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은 하늘의 부르심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불러주신 아론과 그 자손들만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대제사장의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신 이유를 소개합니다.

4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6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4-6)

지금까지는 사람을 대표하는 대제사장에 관해 설명했지만, 이제는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 대제사장의 역할을 잘 감당한 분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부르심을 받은 대제사장(4)

다시 원리적인 측면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존귀는 사람이 스스로 취하거나 아무나 스스로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신 자라야 그 존귀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이는 첫 대제사장 아론을 세울 때부터 지키던 원리입니다(출애굽기 28:1-3; 29:1). 이런 원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어 거룩한 직무를 자의대로 수행하려 했던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습니다(고라, 민수기 16장; 웃시야, 역대하 26장). 왕 같은 대제사장인 성도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2)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5-6)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그 영광을 치하실 충분한 자격이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저자는 시편 2:7을 통해 예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소개합니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편 2:7)

예수님께서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라고 스스로의 지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시편 2:7은 이제 1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인용되었습니다(1:5).

‘내가 너를 낳았다’는 선언을 통해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이 하나님의 주권에 따른 이루어진 일임을 밝힙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으로부터 지명받듯이 그렇게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지명하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시편 110:4은 신약성경에서 딱 한 번 인용됩니다.

4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110:4)

시편 110:1은 신약 여러 곳에서 나오는(마태복음 22:44; 마가복음 12:36; 누가복음 20:42-43; 사도행전 2:34-35) 것과 대조적입니다. 그만큼 4절이 히브리서 신학의 독특성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서 대제사장이 될 수 있다란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이셨다면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과 같은 중보의 역할을 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순 있지만, 사람으로 바뀐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성육신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의 혈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들은 아무나 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론의 자손들만이 대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받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존귀한 직분입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 때 한 번 나타난 아무 독특하고 신비로운 존재였습니다. 그를 소개하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창 14:18). 아브라함의 혈통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이라는 제사장을 만나게 하시고, 축복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바친 하나님의 제사장은 일반적인 위치를 초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신적 기원을 같은 멜기세덱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레위지파의 반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제사장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레위의 자손들로부터 나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과 달리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멜기데섹(히 7:3)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을 통해서 세워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온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대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친히 일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것처럼 귀한 축복은 하나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 큰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성육신하셔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입니다. 인간 대제사장과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하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완전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죄인들의 연약함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구약시대의 대제사장은 인간 죄를 위해 속죄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대제사장 자신들도 온전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자신을 위한 제사를 먼저 들려야 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으로 갈등하는 백성들과 공감하며 도와줄 주 있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어서 설명하기를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자신을 위한 속죄 제사가 필요 없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불완전한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을 능가합니다.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대속죄일이 돌아올 때마다 죄 사함의 제사를 드려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단번에 속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은 사람이 하지 못하는 탁월한 속죄를 가능하게 하는 증표가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확신하고 기뻐하며 평강 중에 거할 수 있는 까닭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중보자로 자청하셨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님께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벨기세덱의 반차를 쫓는 예수님(7-10)

우리가 성숙한 신앙인이 되려면 예수님의 본을 좇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에 자신을 드릴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대제사장들과 차이점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의 사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참된 성도답게 살 수 있는 보여 주셨습니다.

7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7-10)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대제사장의 영예를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랐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겸손에 대한 좀 더 깊은 묵상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스스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영적인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한 모습으로 몇 가지 구체적인 행동과 성품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육신 기간 그리스도의 신분과 성품을 특징짓습니다.

(1) 간구하셨던 예수님(7)

예수님께서는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능히 구원하실 하나님께 심판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고, 고난을 거절하지 않고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일은 육체에 계실 때,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오신 예수님께서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성부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대신해 고난 당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2) 순종하신 예수님(8-9)

예수님께서는 고난 중에도 ‘순종을 배우는 시간’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사람들과 자신을 위해 대제사장의 사역을 행하셨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아들이지만 고난의 터널을 통과합니다. 순종을 배우게 되고 온전하게 됩니다. 이것은 고난과 죽으심을 당하심은 인간을 위한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모든 자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고난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완전함을 성도들이 본받길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의 비결은 순종입니다. 할 말 다하고 살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끝까지 침묵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말 있어도, 침묵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할 말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본디오 빌라도의 불의한 재판에서도 침묵하신 예수님을 목상해 보시길 바랍니다(마태복음 27:14). 침묵하시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성숙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3) 멜기세덱의 반차이신 예수님(10)

6절에서 처음 인용되었던 멜기세덱이 10절에 다시 등장하게 된 단서는 9절의 ‘영원한’ 구원의 모티프입니다. 시편 110:4에서 멜기세덱은 ‘영원한’ 제사장으로 칭해졌습니다. 영원성은 존재 혹은 기원뿐 아니라 수행한 직무의 결과와도 관련됩니다. 속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그것이 영원하다는 말입니다. 6절의 인용 구절과 10절에서 반복된 표현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제사장’이 ‘대제사장’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또한 사소해 보이지만 우연이나 실수가 아닌 저자의 분명한 의도를 엿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9절 이하에서 더 명확하게 그려질 대속죄일 제의에서 그 속죄 제의의 담당자는 일반 제사장이 아닌 대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만드신 세상의 빛과 어둠을 다 겪으셔야 했고, 기쁨과 영광만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도 아셔야 했고, 기쁨과 영광만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도 아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온전하게 되셔서 그분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으로 칭함을 받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진심 어린 사랑을 느끼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는가?’라는 질문의 답은 바로 죄인이었던 우리에게 있습니다.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사람들은 ‘조물주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세상을 내버려둘 수 있느냐?’고 항의합니다. 그러면서 정작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주시요 온전히 장성한 믿음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진리의 말씀에 대한 계속적인 훈련 없이 신앙의 연조만을 자랑하지 맙시다. 우리를 초보적 믿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부단한 진리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경건의 훈련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굳건한 믿음을 향해 분발하시길 바랍니다. 아직도 그 사랑을 외면하는 세상을 향해 열정적으로 복음을 외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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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4-02)


대제사장을 통한 천국 입성

히브리서 4장 12-16절


우리 손에 성경이 들려져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성경은 움직이지 죽은 말씀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살아 있으므로 운동력 있고 에너지가 있습니다. 운동력만 있을 뿐만 아니라 날쌘 검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에 도전을 주고, 삶의 기준으로 살아 계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역사도 철학도 예술도 그리고 문화도 아닙니다. 오직 실재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당신을 인도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살아있고 예리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니 어떤 것도 그분 앞에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숨김없이 드러남(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선포되지만, 사람들의 귀를 통해 듣습니다. 단순히 입으로 전하고 귀로 듣는 작용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만나주시는 거룩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인격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매우 귀하고 자세하게 말하고 있는 말씀이 본문에 나타납니다.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2-13)

저자는 앞부분 1-11절까지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언급합니다. 출애굽 했지만, 불신앙으로 광야에서 약속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불신앙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제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우리는 아무것도 감추거나 꾸며낼 수 없었습니다. ‘불순종의 본’에 빠지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감추려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감출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단 한 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어떤 것도 감출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날선 칼(군인의 검이라기보다는 수술 집도의의 메스와 같은)과 같아서 우리 마음의 생각의 결과 의도의 방향까지 분별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우리의 삶에 관한 결산을 해드려야 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습니다. 말씀은 힘이 있고, 양날에 날카로워서 그 효과가 탁월합니다. 혼과 영과 관절 그리고 골수를 쪼갤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성에 대해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고 소개합니다. 아직까지 유효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운동력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살아있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부지런함 때문에 많은 존재와 많은 상황이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지 움직인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큰 영향력을 미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좌우에 날쌘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가장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을 의미합니다. 알지 못한 부분, 우리 안에 더 숨겨진 부분까지 모두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 일을 합니다. 첫째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12)라고 분리합니다. 예리한 칼은 분리하는 힘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들이 제사할 짐승을 예리한 칼로 각을 떴습니다. 그리고 드려야 할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합니다. 이렇게 말씀은 칼과 같아서 구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과 마귀의 생각으로, 즉,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으로 구분합니다. 두 번째로 말씀은 마음과 생각을 감찰합니다. 본문에서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이 들어 납니다. 말씀에 가까이 가면, 모든 것이 들어날 것입니다. 감추어진 모든 것이 들어나는 것이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13)고 하였습니다. 말씀은 마치 많은 사람 앞에서 강제로 옷을 벗긴 것처럼 부끄럽고 수치스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과 판단 앞에 모든 피조물이 하나도 그 앞에서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사의 메스보다 예리합니다. 의사의 메스가 가르지 못하는 부분, 마음의 숨은 생각까지도 하나님의 눈앞에 드러내어 놓습니다. 하나님이 상관하시는 만물은 다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납니다. ‘드러난다’라는 의미는 레슬링에서 목이 잡힌 상태나 제물의 목이 칼 앞에 노출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치명적 약점이 노출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은 그의 취약점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태어나기도 전부터 당신을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행해왔던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당신이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면, 모든 것이 피할 수 없게 다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말씀으로 주님께서 당신의 삶을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신다면 무엇으로 치료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순결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며 예리한 검으로 역사하시는 말씀을 체험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심판을 위한 해결(14)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 있으며 예리하게 다가올 때, 거부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부한다고 거부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당신의 치명적인 허물이 드러났을 때, 그 허물에 대한 결과는 분명히 심판입니다. 그 심판을 해결할 해결책들은 무엇입니까?

14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14)

하나님 앞에 드러날 모든 모습은 연약함 그 자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부르실 때,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2:11)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벌거벗은 존재로 나간다고 할지라도 담대하게 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성도들을 이끌고자 하신 것은, 벌하고 욕하기 위해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히 여기셔서 온전케 만드시기 위해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곧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형태로 나타났는데, 말씀이 보인 형태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의 몸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숨도 못 쉴 정도로 긴장되었지만, 예수님 앞에 나오면 자비와 위로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초대하고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로 날마다 가까이 나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어떤 존재이든지 상관하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가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던 예수님, 삼십 팔 년된 병자를 일으켜 세워 주셨던 예수님, 십자가에 보혈을 흘려주셨던 예수님,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예수님,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 어떤 죄인도 어떤 원수도 다 품어주시는 예수님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험한 세상에 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반면 자신이 약하다고 여기고 강함의 원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불행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함과 강함을 모두 갖추기 원하십니다.

 

사정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15-16)

이처럼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약함이 적나라하게도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담대함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담대함은 자비로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유일하신 분이시며 하늘의 성소를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대제사장을 세상이 본 적이 없습니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15-16)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보면서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한결같이 우리처럼 육신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셔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처럼 죄를 짓는 분은 아니며, 또한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며 그 긍휼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대제사장이십니다. 다시 한 번 대제사장의 역할을 살펴보면,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를 가지고 1년에 한 번만 성전의 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백성의 죄악을 해결한 일을 담당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을 통해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대제사장이 없습니다. 이 땅에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한 번 들어갔을 뿐, 오직 휘장 밖에서만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휘장을 열어젖히듯 하늘을 가르시고 지성소 중의 지성소라고 할 수 있는 하늘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참 성전에 들어갈 길을 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당신의 연약함을 모두 감당하고 성전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당신의 연약함, 허물, 부족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고통과 배신과 매맞음, 억울함 그리고 죽음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살다 가신 것은 당신을 위함입니다. 당신이 당신을 아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더 잘 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절망보다 더 깊은 절망을 체휼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괴로우셨으면 심한 통곡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을 당신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이 은혜로 대제사장을 힘입을 때 우리는 하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의지해 긍휼과 도우심을 얻어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의 원천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 앞으로 우리를 인도해 나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주저하지 말고 담대하게 그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 앉으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당신에게 넘칠 것입니다.

한 주 동안 찬송가 27장 “빛나고 높은 보좌와”를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찬송을 통해 주님의 보좌를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런 상태로 주일 준비하면, 예배의 시간이 은혜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 연약함을 대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하늘 보좌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항상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다가 오실 것입니다. 문제와 결정을 하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변명하지 않고 솔직하게 아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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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4-01)


순종으로 얻는 영원한 안식

히브리서 4장 1-11절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하는 이유는 안식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후, 참 안식에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안식(安息)’은 쉬운 말로 ‘쉼’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할 일을 다 하고 난 다음에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안식에 들어가는 비결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안식은 때려야 땔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안식의 결국은 평안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평안하십니까? 지금 평안이 흔들리고 있다면 안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3:7에서 시작한 설교는 4장으로 넘어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식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선포된 것이 전부가 아니라 선포된 약속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말씀과 믿음의 연합(1-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선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그 약속을 따라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많은 약속을 응답해 주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대한 효과는 그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만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약속을 누릴 수 없습니다.

1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1-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로 삼아주시기 위해 성육신하셨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을 섬기려는 유혹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힘을 무력 시키고 믿음의 자녀들로 살 수 있도록 믿음의 자녀로 창조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 믿는 자들을 도와주십니다.

(1)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1)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결국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로 가다가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길로 갔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저자는 먼저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1)라고 소개합니다. ‘안식’이라는 단어가 주목을 받습니다. 그 의미를 자유자재로 바꾸어 하나님의 구원 섭리와 하나님 백성의 삶을 다채롭게 표현합니다. 만약 ‘멈추다’, ‘쉬다’라는 의미를 강조하면 행위에 대한 규정이 될 것입니다. 장소(안식처)나 시간(안식일)을 뜻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안식은 종말에 누릴 구원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4장을 포함한 보다 큰 단락(3:7-4:13)의 출발점은 출애굽 세대의 광야 여정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이 그들의 소유가 되리라고 약속하셨고 그들에게 ‘복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복음은 대부분의 출애굽 세대에게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불신실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천국에 들어갈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 땅에 모든 고통과 수고를 벗어버리고 영원히 안식에 들어갈 길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두려워하라고 권고합니다. 어떤 사람이 약속이 있어도 들어갈 수 없습니까?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because they were not united by faith with those who listened/ESV)”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안식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따라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역사적으로 예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출애굽 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기적도, 반석에서 물이 나온 기적도, 날마다 만나는 먹는 체험도 그리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에 의해 광야까지는 이끌려 왔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은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나 가나안 땅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면 안식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환경 때문에 넘어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환경 속에서 약속을 믿고 끝까지 붙잡아야 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는 구원에 대한 ‘두려움’과 ‘힘씀’에 대해 반복적으로 말씀합니다.

(2) 믿음으로 들어가는 안식(2)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예로 보면서, 수신자들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2)라고 소개합니다. 안식(천국)은 믿음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가게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참 안식도 구원도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마음만 강퍅해집니다. 강퍅하면 고집이 생기고, 고집은 교만이 낳습니다. 그리고 교만은 불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불순종의 세계에서 살면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지만, 그 들은 말씀을 믿음과 결합해야 합니다. 성경의 약속들을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믿음은 사람들이 결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결단해야 합니다. 주저하고 있으면 또 계속 광야에게 머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깁니다. 매일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매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결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약속하신 안식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믿음의 결단을 내릴 때,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당신의 삶을 변화시켜 줍니다. 죄악과 싸워 이기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사탄의 세력을 막아내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한데로 살 것을 결단하시면, 당신에게 놀라운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천국이라는 소망을 위해 달려가는 지금, 당신은 과연 천국에 이를 있는 사람인지 항상 두려워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과 믿음 위에 굳게 서야합니다. 선포되는 말씀과 우리의 믿음이 연합될 때,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누리게 될 것입니다.

 

창조 때 안식하신 하나님(3-8)

과거 출애굽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거울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끝까지 순종하면 안식을 누리며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는 안식은 어떤 안식입니까?

3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3-8)

믿음의 선배들의 실패는 오늘날 우리를 위한 좋은 교훈이면서 또한 두려움과 좌절의 이유도 될 수 있습니다. ‘선배들이 못한 일을 우리가 할 수 있을까? 결국, 그들처럼 우리도 실패하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앞설 수 있습니다.

(1) 창조하신 때 안식하신 하나님(3-4)

이런 두려움에 응답이라도 하듯 저자는 회중에게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고 확언합니다(3a). 3b절의 전환은 다소 파격적입니다. 이제껏 시편 95편을 중심으로 출애굽과 광야 여정을 다루어 오다가, 여기서 창세기 2:2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태초의 창조와 안식을 거론합니다.

본문은 창세기 1장에 나온 안식에 대해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안식의 원형은 일곱째 날에 하나님께서 쉬신 일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본향’(11:14) 혹은 ‘하늘의 예루살렘’(12:22)이라고도 합니다. 안식은 창조 때 주어진 것입니다. 안식은 단순히 일을 마쳤기 때문에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분의 피조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고 누리시는 날입니다. 안식일에 초점은 하나님과 백성들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에 안식하셨습니다. 창조를 마치신 다음 날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주시려고 했던 쉼,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쉬셨던 태초의 쉼(창세기 2:2)의 반영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무 피곤함이나 고통, 두려움도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 다음 안식을 하셨지만, 인간은 먼저 안식하고 일을 하기 시작하는 스타일입니다. 따라서 먼저 안식하고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안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먼저 관계를 회복하는 예배를 드리고 일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의 안식일 개념이 다릅니다.

(2)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5-6)

하나님께서 안식을 준비하시고 모두 들어오라고 하시지만, 왜 많은 사람이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불순종은 불안을 낳고, 순종은 안식을 낳습니다.

안식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죽어서 가는 내세의 안식입니다. 또 다른 안식은 현실에서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안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는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는 것이 안식입니다. 이 세상에는 불의, 죄악, 고통, 눈물 그리고 죽음이 엉켜있는 세상입니다. 그렇지만 함께 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우리는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주시기를 원치 않고, 반대로 안식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그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세상이 주는 안식과 즐거움에 취해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고 완고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자녀들은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던 것처럼 성도들에게도 천국에서의 영원한 안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계획을 세워 시작하든지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순서이며 안식에 개념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기 전에 예배를 드리고 시작하길 바랍니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안식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기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는, 마음이 부드러우면 안식이 있지만, 강퍅하면 안식이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을 모든 것을 용납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말씀과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용납의 마음, 순종의 마음에 안식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헌신을 원하시면,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 곳에 안식이 있습니다.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데,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불순종하면 안식이 없습니다. 순종하면 그곳에 안식이 있습니다.

(3) 안식에 들어가려면 (7-8)

구약 성경에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즉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고 선언하는 것입니다(7). 이러한 내용이 세 번이나 언급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진노를 초래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비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얻게 되는 안식은 여호수아가 주었던 안식과 비교할 수 없는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는 진정한 안식과 비교할 수 없는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의 안식을 얻은 것은 하나의 예표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다’라고 한 말은 우리가 실제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여호수아인 예수님을 따라 본질적인 안식, 곧 영원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안식에 들어가길 위한 수고(9-11)

어제의 확고한 신앙과 강력한 의지가 오늘의 신앙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들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해주지 못합니다. 어제 잘했던 사람들이 오늘 죄의 유혹으로 완악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는 것입니다. 저자는 안식에 들어가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9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9-11)

앞서 설명한 대로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안식은 역사를 초월하여, 더 정확히 말하면, 역사의 시간을 관통하면서 모든 세대에게 지속합니다. 과거나 현재의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열려 있다는 것은 맛볼 수 있고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옛적 광야의 이스라엘에게도,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에게도, 히브리서의 청중에게도, 그리고 오늘날 히브리서를 읽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안식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안식을 미래의 일이 아닌 ‘현재’로 설명합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안식을 완성되어버렸다면, 하나님께서는 시편 95편에서 다시 거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편 95편에 전제된 영적 상황과 히브리서의 영적 상황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안식에 들어갈 약속’, ‘안식할 때’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구원신학은 ‘이미 그러나 아직’ 위에 펼쳐진다는 면에서 신약성경 전체의 구원신학과 일맥상통합니다. 성경 다른 곳에도 구원이 역사 속 현실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전망이라고 말하는 말씀은 많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다른 신약성경보다 더 분명하고 큰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점은 ‘이미’ 얻은 안식이 ‘아직’ 얻지 못한 안식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40년 동안 광야를 통과해야 했던 이스라엘처럼, 우리도 해방과 구원 이후의 여정에서 불순종과 불신앙의 도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넘어질 수 있습니다. ‘거기에 닿지 못한다고 여겨질까?’ 두려워하고(1),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넘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진행하고 있지만, 안식에 들어가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9).

이미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셔서 안식을 완성시키시고 누리고 계십니다(10).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누리고 계신 안식에 들어가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안식이 완성될 때까지 믿음의 경주를 계속해야 합니다(히 12:1). 사탄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안식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진정한 안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참된 안식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놀라운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복음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안식이 없습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행위기 때문입니다. 오직 복음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끝까지 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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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03-02)


지혜롭게 판결한 솔로몬

열왕기상 3장 16-28절


살아가면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다가옵니다. 문제를 해결해야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당신만 바라보고 있고, 그 문제가 너무나 어렵고 힘든 문제라면 난감할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지혜를 간구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 속에 지혜의 열쇠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재판 이야기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를 시험하는 장이었습니다. 그가 백성의 송사에 귀기울이고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사회에서 멸시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어졌습니다. 이런 지혜야말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참 지혜입니다.

 

재판을 요청 받는 솔로몬(16-22)

어려운 일이 갑자기 다가오면 대부분 당황합니다. 상식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문제 앞에서는 순간적으로 막히기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태도는 당황스런 상황이 다가오면, 당황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달라고 일천 번제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하신 내용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16그 때에 창기 두 여자가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17한 여자는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여자가 한집에서 사는데 내가 그와 함께 집에 있으며 해산하였더니 18내가 해산한 지 사흘 만에 이 여자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19그런데 밤에 저 여자가 그의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의 아들이 죽으니 20그가 밤중에 일어나서 이 여종 내가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21아침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22다른 여자는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여자는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며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23왕이 가로되 이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24또 이르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 앞으로 가져온지라 25왕이 이르되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 26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27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28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16-28)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는 어떤 것입니까? 열왕기에만 기록된 ‘한 아이에 대한 친모 판별 소송’(16-28)은 위의 질문에 대답해줍니다. 이 사건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첫째, 온 이스라엘에게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은 왕임을 증명합니다(28). 둘째, 백성의 재판을 분별력 있게 판결하도록 ‘듣는 마음’을 구한 솔로몬에게(9) 하나님께서 응답한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12)이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셋째, 이 성취를 통해 하나님의 전능함과 응답의 진정성이 증명되었습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지혜의 근원임을 깨닫게 합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의 민생 치리에 적용됨으로써 왕국의 견고함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됨을 입증합니다.

(1) 두 창녀의 한 아들(16-22)

오늘 솔로몬이 판결을 내려야 할 재판은 한 아들을 놓고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기라고 주장하는 송사에 대한 것입니다. 이 일로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왕임이 증명되었으므로(28), 이 일은 기브온에서 돌아온 후(15)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두 여인은 ‘창기’로 소개되는데(16), 이는 왕 앞에 송사를 제기할 수 있는 대상이 사회의 소외계층까지 적용됨을 보여줍니다. 나그네, 고아, 과부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베풀 것을 명한 하나님의 의중(신 27:19)에 부합합니다. 두 여인이 왕 앞에 섰다는 것(16)은 이 송사가 마을의 장로나 재판관 사이에서 판결이 나지 않아 왕에게까지 올라온 어려운 소송임을 함축합니다. 재판이 시작되자 먼저 산 아이의 친모로 밝혀지게 될 여인이 사건 전모를 증언합니다(17-21). 두 여인은 한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친모가 먼저 아들을 낳았고, 삼 일 후에 가짜 친모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느 날 밤 가짜 친모가 실수로 자신의 아들 위에 눕는 바람에 아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 여인은 밤중에 일어나 친모가 자는 틈에 친모의 산 아들을 데려와 자기 품에 뉘고, 자기의 죽은 아들은 친모의 품에 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아들에게 젖을 먹이려고 일어난 친모는 아들이 죽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자기 아들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이때 친모의 증언을 듣고 있던 가짜 친모가 나서서 산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친모도 이에 질세라 가짜 친모를 반박합니다. 사건이 나던 밤에 집에는 두 여인과 아기들만 있었으므로(18) 다른 증인은 없습니다. 누가 진실을 말하는지를 뒷받침할 만한 물증도 없습니다. 솔로몬은 재판에 필수적인 증인이나 증거 없이 오직 두 여인의 말만을 듣고 판결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에서 재판이 공식화되고 체계화된 것은 출애굽 이후입니다. 애굽을 떠나 광야로 들어선 백성들 사이에 여러 분쟁이 일어났고, 모세는 종일 이들의 송사를 해결해주었습니다(출 18:13). 재판은 분쟁 당사자들의 양쪽 주장을 듣고, 그들에게 마땅한 하나님의 율법을 전달하는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출 18:16). 모세 혼자 송사를 떠안고 있는 것을 본 장인 이드로는 일의 과중함과 비효율성을 파악했습니다. 이에 그는 재판관의 정의, 재판의 올바른 방법, 분담의 필요성을 모세에게 조언했습니다(출 18:19-20). 이드로는 무엇보다 재판관이 하나님의 세우심을 받은 자임을 강조했습니다. 재판관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위해 존재해야 하며, 백성의 송사를 자기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이는 재판관이 백성의 대리인으로서 송사의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뜻대로 시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판결해야 함을 뜻합니다. 실제 판곁에 있어 재판장의 역할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경고하고 그들이 행해야 할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내산 언약(출 19장)을 통해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으로 살 수 있도록 십계명을 기본으로 한 여러 율법을 제공하셨습니다. 이는 현대의 헌법 및 부차적인 법률에 상응합니다. 이드로는 재판의 효율적 체계를 위해 자격 있는 자들을 뽑도록 모세에게 권유했습니다. 재판관은 영적, 도덕적 면에서 고결함이 요구되며,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능한 자, 부정한 이득을 얻는 것을 혐오하는 자, 정직한 자여야 합니다(출 18:21-22). 조언에 따라 모세는 백성 중 천 명, 백 명, 오십 명, 열 명을 거느릴 자들을 각각 세웠습니다. 이 재판관들은 작고 쉬운 사건들을 처리했고, 어려운 사건들은 모세에게 가져왔습니다. 이와 같은 재판 제도를 기초로 가나안 정착 후 왕정시대에 이르러서 재판권은 왕에게 속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왕이 성읍에 재판관들을 임명하여 백성의 송사를 판결하게 했고, 어려운 판결은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도록 했습니다(삼하 14장; 15:2-4; 왕하 15:5; 대하 19:5-7). 그 외에도 규례에 따라 장로들이 성읍 백성의 송사를 다루는 재판관 역할을 했습니다(신 21:18-21).

(2)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23-28)

솔로몬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판결을 내려 아기의 친모를 가려내고, 이로써 그가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왕임이 증명됩니다. 먼저 솔로몬은 소송의 진상을 ‘두 여인이 살아있는 한 아이를 서로 친자라 하고, 죽은 아이는 상대편 아들이라 주장한다’(23)고 요약합니다. 이 말은 다른 증인이나 증거 없이 여인들의 증언만을 토대로 판결해야 함을 함축합니다. 이때 솔로몬은 갑자기 신하들에게 칼을 가져오라 명합니다. 칼을 대령하자, 솔로몬은 칼로 아이를 둘로 나눠 반반씩 여인들에게 주라는 파격적인 판결을 내립니다(25). 두 사람이 하나를 놓고 소유권을 주장하므로 반반으로 나눠주는 것은 언뜻 공정한 판결로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상이 생명체가 아닙니까! 아이를 죽이면 두 여인 모두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므로 공평한 처사라 생각될 수 있으나, 분쟁을 없애기 위해 소유물을 없애는 것이 공정합니까? 아이의 억울한 죽음은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이 판결은 들은 친모는 경악했고, 가짜 친모는 흡족했습니다. 친모는 아들에 대한 긍휼이 불타올라, 아들을 제발 죽이지 말고 가짜 친모에게 주라고 간청합니다. 모성애를 표현한 ‘긍휼이 불붙다’(26)에서 ‘불붙다’(카마르)는 ‘뜨거워지다’, ‘열망하다’, ‘불타다’의 뜻입니다. 이는 요셉이 친동생 베냐민을 애굽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를 향해 사랑의 마음이 복받쳐 오른 상태와 같습니다(창 43:30; 참조. 호 11:8). 하지만 가짜 친모는 산 아이가 친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일말의 동정심이나 양심의 가책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차피 친자가 아니니 자기가 차지할 수 없다면 친모 또한 아기를 갖지 못하게 할 심사였습니다. 그녀는 신하들에게 어명을 받들어 아이를 죽이도록 재촉합니다. 친모는 친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아들의 ‘생명’을 구하려 들지만, 가짜 친모는 비열하고 비정하게 남의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가려 합니다. 자기 아들은 ‘실수로’ 죽였으나, 남의 아들은 ‘고의로’ 죽이려 듭니다. 생명에 대한 존중이나 긍휼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는 생명의 원천과 생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며, 그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는 분이란 사실을 망각한데서 옵니다. 죄는 이 여인처럼 마음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이기적이고 주관적인 자기 생각을 그 자리에 두는 데서 출발합니다. 솔로몬은 여인들의 심리적 반응을 보고 친모를 구별해내어, 아이를 친모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 것을 명합니다(27).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 소식은 온 이스라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이 판결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뤄졌음을 자각했습니다. 이로써 백성들은 솔로몬을 경외하며 그가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왕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통치는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견고해져 갑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지혜로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위해 구해야 합니다. 주신 지혜는 연약한 자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연약한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린 솔로몬이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높이 들림을 받은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높이 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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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03-01)


솔로몬의 소원

열왕기상 3장 1-15절


사랑하던 사람과 데이트하던 추억을 기억하십니까? 만나도 만나도 지루하지 않고, 항상 새롭고, 금방 헤어져도 또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쓰는 돈이나 시간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학을 천 마리를 접는 일을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마음은 이보다 더 했습니다.

 

솔로몬은 시므이를 죽임을 아버지 다윗의 유언을 성취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의롭지 못한 사람은 제거됨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산당에서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렸고, 이 행동에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에 솔로몬은 백성을 다스릴 지혜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솔로몬을 기뻐하신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부귀 그리고 장수를 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정략 결혼과 산단 제사(1-3)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대하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는 사람을 통해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잡한 상황이나 완악한 사람이 아니라 최종 결정권자인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1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니라 2그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3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1-3)

드디어 솔로몬 시대가 열렸습니다. 국내의 정적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안정시킨 솔로몬은 대외적으로 이스라엘을 안정시키기 위한 전략을 구사합니다. 점점 나라가 강해지면서 애굽과 함께 조약을 맺을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솔로몬을 통해 모세를 통해 출애굽했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애굽과 동등한 자격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집권 초기에 솔로몬이 적대 세력을 축출하여 왕정의 내적 견고함을 다지는 모습(2:13-46)에 이어 3:1에서는 정략결혼을 통해 외적 견고함을 세우는 모습을 기술합니다. 솔로몬이 정치적 지혜로 왕정을 꾸려가는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인간적 방책은 솔로몬의 지혜로 적들을 제거하고 지지자들을 살피라고 당부한 다윗의 유언을 상기시킵니다(2:5-9). 저자는 솔로몬의 여러 정략결혼 중 애굽 공주와의 결혼을 대표 사례로 듭니다. 이는 첫째, 솔로몬의 국제적 위세가 높았음을 보여줍니다. 애굽은 가나안과 주변의 군소국에 비교되지 않는 제국이라서 바로가 자식의 결혼을 통해 이웃 나라와 화친을 맺는 사례가 드물었습니다. 그런 애굽이 솔로몬과 전략적 동맹관계를 맺은 것은 당시 애굽의 위세가 이스라엘보다 취약했음을 드러냅니다. 후에 바로(시아문[주전 978-959년]으로 추정)가 게셀을 탈취하여 딸에게 결혼 예물로 준 것(왕상 9:16)도 이런 상황을 뒷받침합니다. 둘째, 이방 여인과의 결혼은 솔로몬의 신앙과 통치에 화근이 될 것을 암시합니다. 이방, 특히 애굽과 우호 관계를 맺어 의존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화평을 유지하려는 시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됩니다(사30:2; 31:1-3). 또한 이방 여인과의 결혼은 이방 신의 유입이 예견되는 일이라 왕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걸림돌이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왕의 규례’(신 17:14-20)에서 이에 주의를 주셨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왕후는 왕만 아니라 백성과 나라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예. 이세벨, 아달랴). 결국 솔로몬의 정략결혼은 하나님을 배역하는 길로 이끕니다(11:1-13). 바로의 딸은 다윗 성에 머물렀는데, 이는 솔로몬이 왕궁과 성전과 예루살렘 주변의 성벽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대순으로 보면 성전 공사가 맨 먼저 착수되어 7년이 걸렸고(6:38), 왕궁은 그 후 13년에 걸쳐 완공되었습니다(7:1). 성전 건축은 솔로몬 제4년(주전 966년)에 시작되었습니다(6:1). 앞서 시므이를 처단한 사건이 즉위 제3년인 것을 고려하면(2:39) 주변의 적들을 정리한 후 곧 성전 공사에 집중한 것으로 보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전 이스라엘은 산당을 예배처로 삼았습니다. “산당”(바마)은 가나안 인들이 ‘신에게 제사하는 장소’입니다. 원래 ‘높은 곳’이란 뜻으로 평지보다 높은 언덕에 마련된 예배처를 가리켰으나, 후에는 지형과 관계없이 제단을 쌓은 곳은 다 산당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방신 제단이 즐비한 환경에 노출되어 하나님께 제사했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오늘 솔로몬만 아니라 그전에 사무엘과 예언자들도 산당에 출입했습니다(삼상 9:19; 10:5). 그렇다 해서 산당 제사가 적법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산당을 없애고 오직 그가 ‘택한 곳’에서 제사할 것을 명하셨기에(신 12:2-5) 성막이나 성전에서의 예배가 합법적입니다. 그러므로 열왕기 저자는 백성의 산당 제사(2)와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제사를 기술한 문장 맨 앞에 ‘다만’(라크)을 넣어 부정적 암시를 풍깁니다(3). 이는 솔로몬의 제사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과 예배를 통한 헌신을 비롯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윗의 법도를 행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제사 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고 지혜를 주신 것 또한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음을 알려줍니다. 산당 제사의 부정적 암시는 성전 완공 후에 조차 산당과 그곳의 제사가 사라지지 않아 이스라엘 백성과 왕의 신앙에 줄곧 거침돌이 되고 훗날 나라의 멸망을 초래했음을 독자에게 암시하며 이를 경고하려는 의도입니다.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4-15)

자신의 찬양과 기도 그리고 헌물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표현되었을 때 그렇게 힘들지 않습니다. 만약 자신이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고 있는데, 힘들고 어려움이 있다면 혹시 자신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었는가 보시길 바랍니다. 같이 있고 싶은 시간이 점점 줄어들 때,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이 솔로몬이 하나님을 사랑 때문에 일천번제를 주께 드리며 나가는 귀한 예배, 제사가 오늘 세계 곳곳에서 드려지길 바랍니다.

4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5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7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줄을 알지 못하고 8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11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12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13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14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15서서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모든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5-15)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북서쪽 10킬로미터에 위치한 기브온 산당에 올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 산당은 규모가 컸고, 여호와의 성막과 브살렐이 만든놋제단이 있었습니다(대하 1:3-6). 솔로몬은 일천 마리의 희생 제물로 번제를 드려 하나님께 헌신과 감사를 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브온에서 제사 드린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지혜와 부귀영화를 약속하셨습니다. 단어 “꿈”이 5, 15절에 나와 단락을 이루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사건은 솔로몬 왕국의 견고함을 기술하는데 있어 전환점을 이룹니다. 앞 2:12-3:1에서 솔로몬의 정치적 지혜가 왕정의 견고함의 바탕임을 기술했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견고한 왕국의 기초가 됨을 증명합니다.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5)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구하는 것을 무엇이든 줄 수 있는 전능함이 암시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원하는 것을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다윗과 자신에게 베푸신 큰 은혜에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6).

첫째, 하나님께서는 언약(삼하 7:16)을 통해 다윗에게 견고한 왕위와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성전 건축에 대한 다윗의 열망과 예상을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다윗과 언약을 맺음으로써 그와 후손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언약에 선언된 하나님의 약속은 무조건적이며 번복되지 않는 특성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 하나님의 은혜에 다윗의 순종을 결부시켜,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함께하며 성실, 공의, 정직의 마음으로 행한 점을 언급합니다(6). 언약과 결속된 다윗 왕조의 순종 의무는 다윗의 유언에서도 나타납니다. 이로써 순종이 왕조의 지속을 위한 후대 왕들의 책무임을 강조합니다(2:3-4). 이런 강조점은 포로기의 청중에게는 솔로몬을 비롯한 후대 왕들의 불순종이 다윗 왕조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가져왔음을 역설적으로 상기시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다윗의 후계자로 주심으로써 큰 은혜를 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통해 약속한 아들(삼하 7:12)을 다윗에게 주어 왕을 삼게 하심으로써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로 왕이 된 솔로몬이지만, 그는 자신이 작은 아이이며 아직 미숙하고 부족한 왕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7; 대상 22:5). 그래서 그는 왕으로서 백성을 재판할 때 선악을 분별하여 재판할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하나님께 구합니다(9). 이때 솔로몬은 이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 수효가 많음을 부각합니다. 또 이런 많은 백성을 감당해야 하는 자신은 다윗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종임을 인지하고 있습니다(6-9). 솔로몬의 요청은 하나님의 눈에 들었습니다. 그가 장수나 부나 원수의 생명을 구하지 않고, 재판(“송사”)을 듣고 분별하는 능력을 구한 점을 하나님은 높이 평가하셨습니다(11). 그리고 ‘보라! 내가 내 말대로 했다. 보라! 내가 네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었다’고 응수하셨습니다(12).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가진 자는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까지 주셨음을 선포하며, 당대에 그의 부귀영화를 따를 자가 없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13). 12-13절에 반복된 "내가 네게 주노니”란 말은 ‘앞으로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이미 주었다’(I have given you)라는 성취의 발언입니다. 이로써 5절에 암시된 하나님의 전능함이 현실에서 실현됩니다. 열왕기는 역대기(대하 1:7-12)와 달리 ‘장수에 대한 하나님의 조건적 약속’(14)을 추가로 기록합니다. 솔로몬이 다윗처럼 하나님의 길로 행하고 법도와 명령을 지킬 때 장수하게 될 것이란 약속인데, 이는 다윗의 유언(2:4)에 ‘하나님에 대한 솔로몬의 순종’이 ‘왕조의 흥망’과 직결되었음을 알린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열왕기는 ‘순종’을 개인과 나라의 존속 여부를 결정짓는 요건으로 상기시키며, 포로기 청중에게 이스라엘의 멸망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초래된 사건임을 일깨웁니다. 꿈에서 깬 솔로몬은 기브온을 출발해 예루살렘에 이르러 다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는 다윗이 예루살렘에 안치한 언약궤 앞에서 번제와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또 잔치를 열어 신하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눴습니다. 제사와 잔치는 5-14절 내용이 실제 일어난 참된 사건임을 입증해줍니다.


솔로몬은 꿈에서 주님의 약속을 들은 뒤 예루살렘에 올라와 언약궤 앞에서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고 잔치합니다. 감사하고 호의를 베푸는 이런 마음이 있다면 평생에 축복받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이에게 나머지 필요를 다 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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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02-04)


처형당하는 시므이

 

열왕기상 236-46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 같은 죄인도 사랑하십니까?’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고백을 점점 희미해집니다. ‘나와 같은 의인이 어디 있을까?’라고 이런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사람들을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점점 변화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주님! 저런 사람도 사랑하십니까?’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네가 죄인이라고 고백했던 첫 사랑을 회복하고, 그 만남의 장소로 다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해 다윗과 하신 약속처럼 솔로몬이 통치한 나라가 점점 튼튼하게 세워집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정치적 행동을 가운데 성취합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제거해야할 세 사람 중 마지막으로 시므이가 어떻게 심판을 해야 할지 말합니다. 시므이는 죽음을 면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앞에서 솔로몬과 맺은 약속을 가볍게 여겨 어김으로써, 시므이는 준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죽음을 자초합니다.

 

시므이를 향한 경고(36-38)

성도는 주일이면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세상에 나가서는 삶으로 예배 드리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진정성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불법과 편법으로 위기를 넘기고 권모술수로 성공에 이르고자 한다면 결코 예배와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정직하지 않고 진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됩니다.

36왕이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37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38시므이가 왕께 대답하되 이 말씀이 좋사오니 내 주 왕의 말씀대로 종이 그리하겠나이다 하고 이에 날이 오래도록 예루살렘에 머무니라(36-38)

솔로몬은 다윗이 심판하라고 당부한 시므이에 대해 조치를 취합니다. 시므이는 사울의 친족이며 다윗에게 악감을 가졌던 자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할 때(삼하 16:5-14)와 압살롬이 죽은 후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올 때(삼하 19:15-23) 시므와 다윗은 서로 만납니다. 시므이는 바후림에 사는 베냐민 사람으로 게라의 아들이며 사울의 친척이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길 때 다윗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요단강을 건너 동쪽 마하나임으로 피신하려 했습니다. 다윗 무리가 예루살렘에서 나와 바후림에 도달했을 때, 시므이가 나와 다윗과 무리에게 돌을 던졌고 다윗에게 악독한 저주를 퍼부었습니다(삼하 16:5). 그는 다윗이 사울의 집안에 피를 흘려 왕좌를 빼앗았으며, 그 때문에 하나님이 압살롬을 통해 다윗의 나라를 빼앗게 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시므이의 주장은 억측이고 사울 집안에 대한 화풀이었지만, 다윗은 분개하는 대신 그의 말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겸허히 받아들였습니다. 도리어 시므이를 당장 죽이겠다는 아비새를 꾸짖습니다. 다만 시므이의 악행으로 시련 당하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저주를 선으로 바꿔주시기를 고대했습니다. 결국 압살롬의 모반이 실패로 끝나고, 다윗은 왕권을 되찾아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이때 시므이는 발 빠르게 베냐민 사람 천명을 소집하고, 이스라엘의 북부 지파들보다 앞서 요단으로 내려가 다윗을 맞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용서를 빌었고, 당시 유다의 지지만 등에 업었던 다윗은 베냐민과 다른 지파의 지지도 필요했으므로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처치하라고 유언한 것(8-9)을 보면 그는 시므이의 저주와 죄를 결코 용인할 의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 유언은 사적인 보복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모반의 전력이 있는 세력을 제거해서 솔로몬의 왕정에 평화로운 시작과 부흥을 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요압처럼 시므이도 이미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다윗을 배반하고 민심을 선동하는 등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켰으므로 언젠가 솔로몬 왕정에 큰 화근이 될 소지가 다분했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조언대로(9) 지혜롭게 일단 시므이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그를 처벌할 틈을 노립니다. 솔로몬은 시므이의 활동 반경을 예루살렘으로 제한합니다. 시므이는 이제 거주지를 떠나 예루살렘에 집을 짓고 안주해야 했습니다. 고향의 토지는 팔든지 종들의 손에 맡겨야 했습니다. 여기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36)는 직역하면 거기로부터 여기든 저기든 나가지 말라입니다. 예루살렘 밖의 출입을 완전히 통제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도피처로 제공하는 대신 그를 감시망 아래 둔 것입니다. 시므이가 특히 조심할 곳은 기드론 시내 너머입니다. 솔로몬은 그가 기드론을 건너는 날은 그의 피가 머리로 돌아가는 날, 즉 자기 죄로 죽는 날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동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로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동북쪽 경계입니다. 시므이의 거주지인 바후림(8)은 기드론 시내의 건너편에 있습니다. 솔로몬이 기드론 너머의 출입을 특별히 통제하는 목적은 시므온과 베냐민 및 북쪽 지파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 그가 지파를 선동하거나 역모를 일으키는 일을 미리 차단하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경고의 위증함은 너는 분명히 알라”,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니”(37)라는 강조된 표현과 여호와를 두고 엄중히 맹세한 점(42, 43)에서 두드러집니다. 시므이는 솔로몬의 처분을 합당하게 받아들였고, 이에 왕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는 다윗에게 저지른 죄를 알고 있고 이제 다윗이 죽은 터라 목숨이 위태했는데, 솔로몬으로부터 금족령만 받고 목숨을 건졌으니 어찌 좋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다윗에게는 목숨의 보전을 약속받았으나(삼하 19:23) 이번에는 목숨이 끊어질 것을 경고 받았습니다.

 

시므이에 대한 보고(39-40)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도들을 평가할 때 그의 진정성을 봅니다. 신앙생활의 열심을 보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빛과 소금으로 살자는 말은 곧 삶에서 진정성을 갖자는 말과 상통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오늘날 성도들을 대상으로 영성 시험을 보신다면 가장 먼저 그들의 진정성을 보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언제나 일의 동기와 마음의 중심에 관심을 두십니다. 성도란 주님과 사람들 앞에서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여 현실의 삶을 정직하고 진정성 있게 살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39삼년 후에 시므이의 두 종이 가드 왕 마아가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도망하여 간지라 혹이 시므이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의 종이 가드에 있나이다 40시므이가 그 종을 찾으려고 일어나 그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가드로 가서 아기스에게 나아가 그 종을 가드에서 데려왔더니(39-40)

그 후 시므이는 예루살렘에서 3년 간 무사하게 지냈으나, 3년 후에 예기치 못한 일에 휘말립니다. 그의 두 종이 블레셋 땅으로 도망한 것입니다. 다윗 당시 시므이는 아들 15명과 더불어 적어도 20명 이상의 종을 거느리고 살았으며, 베냐민 지파 1,000명을 소집할 수 있고, 이스라엘 북쪽 지파에 관여할 만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삼하 19:16-17,20). 그의 두 종이 가드 왕 마아가의 아들 아기스에게 도망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도주자 신세였을 때 그의 망명을 받아준 자입니다(삼상 21:10; 27:2). 그때부터 수십 년이 지났으므로 현재 아기스는 동일인이 아닌 아기스의 후손입니다. 종들의 도주 보고를 받은 시므이는 즉각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종들을 찾으러 가드의 아기스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종들을 가드에서 데려왔습니다. 다혈질로 보이는 시므이가 종들을 되찾느라 혈안이 되어 금족령을 잊었는지, 아니면 알고도 무리수를 두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시므이의 죽음(41-46)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의 기준에 모두 부합한 일입니다. 정치적 보복으로만 볼 일은 아닙니다. 시므이는 배은망덕으로 자초한 형벌입니다. 솔로몬은 시므이 제거가 사적인 감정에 따른 정적 제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때를 따른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41시므이가 예루살렘에서부터 가드에 갔다가 돌아온 일을 혹이 솔로몬에게 고한지라 42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내가 너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고 경계하여 이르기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밖으로 나가서 어디든지 가는 날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도 내게 말하기를 내가 들은 말씀이 좋으니이다 하였거늘 43네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가리켜 한 맹세와 내가 네게 이른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느냐 44왕이 또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무릇 네 마음의 아는 모든 악 곧 내 부친에게 행한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 보내시리라 45그러나 솔로몬왕은 복을 받고 다윗의 위는 영원히 여호와 앞에서 견고히 서리라 하고 46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하매 저가 나가서 시므이를 쳐서 죽게 한지라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41-46)

시므이의 행보는 솔로몬에게 보고되었고, 솔로몬은 이를 기회 삼아 그를 처단합니다. 시므이를 소환하는 장면에 36절에 나온 첫 세 문장이 42절에 재등장하여, 이번에도 소환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됨을 보여줍니다. 그의 첫 소환은 목숨을 연장시켰으나, 이번 소환은 목숨을 앗아갑니다. 솔로몬은 금족령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명령의 진정성을 나타내고, 시므이가 명령에 동의했음을 확증합니다. 이는 왕의 명령이 쌍방의 합의였음을 분명히 합니다. 더구나 이는 여호와로 맹세한 엄중한 사안이지 않습니까(42, 43). 그런데 시므이가 여호와께 한 맹세와 왕의 명령을 어겼으니, 그는 유죄이며 처벌이 마땅합니다(43). 이어 나오는 44-46절의 내용과 순서는 요압 에피소드(32-34)와 유사하게 전개됩니다. 요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32) 시므이의 악()을 그의 머리로 돌려보내는 주체는 여호와이시다’(43). 요압의 처형 판결이 과거에 그가 저지른 살인과 배반에 대한 여호와의 의로운 심판이듯이(32), 시므이의 처형 또한 과거에 그가 다윗에게 행한 모든 악에 대한 여호와의 정당한 심판입니다(44). 여호와께서 요압의 악을 보복하되 다윗 왕위에는 영원한 평화를 주시듯(33), 이번에는 시므이의 악을 보복하되 다윗 왕위에는 영원한 견고함을 베푸실 것입니다(45). 42-45절의 솔로몬의 판결 내용에는 여호와가 네 번 나와, 그 판결이 사적인 앙갚음이 아닌 여호와와 율법에 적법한 선고임을 암시합니다. 요압의 죽음처럼(삼하 3:39) 시므이의 죽음은 저주를 선으로 갚아주시길 구한 다윗의 간구(삼하 16:12)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처형은 브나야가 맡습니다(46; 참조.25,34). 그는 어명에 순종하여 시므이를 쳤고, 그는 마침내 죽었습니다. 시므이의 처형 기록 후 열왕기 저자는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해졌다’(46)고 평가합니다. 유사한 평가(‘나라가 심히 견고하다’)가 이미 솔로몬의 왕정 기사를 시작하며 나왔으므로(12), 12-46절은 한 단락을 이룹니다. 열왕기는 견고한 나라의 공로를 솔로몬의 손, 그의 숙청 작업(13-46)에 돌립니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당부했던 지혜’(6,9) 그리고 솔로몬이 행한 지혜는 결국 여호와 경외보다는 정치 지략과 율법을 이용한 정치적 수완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왕국의 견고함은 인간적, 정치적 노력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솔로몬과 함께하셨고(대하 1:1), 다윗과 맺은 약속(삼하 7:12)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큰 은혜와 섭리로 솔로몬의 등극과 왕정의 현실을 감싸 안으셨습니다.


시므이를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잊어버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태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약의 파괴에 대한 결과가 죽음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자신들을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바른 행동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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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02-03)

 


아비의 충고를 따르는 지혜자

열왕기상 226-35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서 심는 데로 거둔다!’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들은 참 두려운 말입니다. 어떤 행동을 한 것에 대한 결과의 책임을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의 아비아달을 보면서 그 말이 맞다는 것을 다시 생각합니다.

 

이복형인 아도니야가 다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음흉한 음모를 꾸미다가 솔로몬에 의해 발각되어 제거되었습니다. 이어 본문에는 아도니야의 반란 음모에 가담했던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 장관 요압을 솔로몬이 숙정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관계를 정리하는 지혜:제사장 아비아달의 파면(26-27)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유언대로 지혜롭게 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왕권을 세워가면서 자신에게 불리한 사람들과 왕권을 세우는 사람들을 분리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대상들은 솔로몬이 왕이 되는데 반대하고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이 대상입니다. 그가 먼저 제거한 인물이 누구입니까?

26왕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네 고향 아나돗으로 가라 너는 마땅히 죽을 자로되 네가 내 부친 다윗 앞에서 주 여호와의 궤를 메었고 또 내 부친이 모든 환난을 받을 때에 너도 환난을 받았은즉 내가 오늘날 너를 죽이지 아니하노라 하고 27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26-27)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측근인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사령관 요압까지 제거합니다(26-34). 그는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구한 것을 반역으로 간주했고, 이 일에 아비아달과 요압의 공모 가능성을 의심했습니다(22). 이야기 전개상 아도니야 사건 직후에 이들의 숙청이 기록되어 두 사건의 연관성이 암시되었습니다. 다만 아도니야 사건처럼 모의의 진위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아 솔로몬의 처사가 정당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는 아도니야와 그 측근이 제거됨으로써 장래의 역모 가능성이 미연에 방지되었고, 요압의 처단을 명한 다윗의 유언이 실현되었습니다. 솔로몬은 먼저 아비아달을 파면하고 고향 아나돗으로 추방하여 그의 종교적 영향력을 차단합니다. 그는 마땅히 죽을 자”(‘죽음의 사람’)이지만 솔로몬은 오늘 죽이지는 않겠다고 선언합니다(26). 그의 죄목에는 다윗을 배반하고 아도니야와 역모를 꾸민 일(1:7)이 분명하게 암시됩니다. 이번에 아도니야 사건에 개입했는지, 파면하는 공식 죄목이 무엇인지는 설명되고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저자는 아비아달이 목숨을 보전한 이유를 밝힙니다. 첫째, 그는 다윗을 섬기며 여호와의 궤를 메었던 충실한 제사장이었습니다. 법궤를 옮긴 일은 제사장직의 대표성을 띄어 율법에 순종했음을 암시합니다. “다윗 앞에서”(26)라는 표현은 다윗에 대한 충성을 시사합니다. 그는 압살롬의 반역 때에도 법궤를 간수했고 다윗의 명을 따랐습니다(삼하 15:24-29). 둘째, 아비아달은 다윗의 고난에 참예한 헌신적인 신하였습니다.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던 다윗은 아비아달의 아버지이자 놉의 제사장이었던 아히멜렉에게 찾아왔고, 그는 자초지종도 모른 채 다윗을 도왔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 일을 반역으로 몰아 아히멜렉과 놉의 제사장 85명과 주민 및 가축까지 진멸했습니다(삼상 22). 이때 유일하게 생존한 아비아달은 다윗에게 합류한다. 다윗은 자기 탓에 아히멜렉과 놉 주민이 목숨을 잃었음을 통탄했다(삼상 22:22). 아비아달도 다윗이 원망스럽기도 했겠지만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내내 도왔고(삼상 23:6; 30:7), 압살롬에게 쫓길 때에도 사독과 함께 다윗을 위해 첩자가 되어 그의 안전을 도모했다(삼하 15:36; 17:15). 그러나 다윗의 노년에 아비아달은 그를 배반하고 아도니야를 따랐고, 그 때문에 오늘 솔로몬에 의해 제사장직을 잃게 되었다. 한편, 그의 파직은 개인적 몰락만을 뜻하지 않는다. 조상 엘리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실현된 사건이기도 하다. 제사장은 레위인 중 아론의 자손에게만 위임되는 특별한 직분이다. 그런데 아론의 네 아들 중 나답과 아비후가 여호와가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분향하여 죽게 됨으로써 (10:1-2) 엘르아살과 이다말 자손만이 제사장직을 맡아왔다. 세월이 흘러 사무엘 시대의 엘리 제사장이 이다말의 자손이었다. 당시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직분을 망각한 채 제사를 업신여기고 성소 봉사자 여인들과 동침하는 등 온갖 죄를 저질렀다. 엘리는 그들을 말로만 꾸짖었고, 그들은 훈계를 귀담아듣지 않았다(삼상 2:12-25). 하나님은 엘리와 아들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행임을 지적하며 엘리 가문의 몰락과 직분의 박탈을 예고하셨다(삼상 2:27-34). 결국 홉니와 비느하스는 블레셋 전투에서 죽었고, 그 소식을 전해 듣던 엘리도 즉사했다(삼상 4:11, 1822). 이후에 벌어진 엘리 집안 사건이 바로 아히멜렉을 포함한 놉의 살육 사건이다. 이제 아비아달까지 파면됨으로써 엘리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결코 잊히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과 섭리 아래 성취되고 있다. 이후로는 엘르아살의 자손인 사독 계열이 제사장 직을 담당하게 됩니다(35; 43:19).

 

관계를 끊을 줄 아는 지혜:군사령관 요압의 처형(28-34)

우리의 인생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잘 나가고 모든 권력을 가진 것 같지만, 어느 날 죽음 앞에서, 또는 위험한 환경 앞에서 하나님 앞에 도망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28그 소문이 요압에게 들리매 저가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단 뿔을 잡으니 이는 저가 다윗을 떠나 압살롬을 좇지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를 좇았음이더라 29혹이 솔로몬왕에게 고하되 요압이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단 곁에 있나이다 솔로몬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며 가로되 너는 가서 저를 치라 30브나야가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러 저에게 이르되 왕께서 나오라 하시느니라 저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브나야가 돌아가서 왕께 고하여 가로되 요압이 이리이리 내게 대답하더이다 31왕이 이르되 저의 말과 같이 하여 저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부친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32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 머리로 돌려 보내실 것은 저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대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유다 군대장관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이 일을 내 부친 다윗은 알지 못하셨나니 33저희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 자손의 머리로 돌아 갈찌라도 다윗과 그 자손과 그 집과 그 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34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저를 쳐죽이매 저가 거친 땅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28-34)

아비아달이 파면된 후 솔로몬은 지혜대로 행하여 요압을 처리하라고 명한 다윗의 유언(5-6)을 이룹니다. 요압은 아비아달의 소식을 듣고 다음 숙청 차례가 자신임을 직감합니다. 그는 아도니야가 썼던 수법을 좇아(1:50)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뿔을 잡음으로써 아도니야처럼(1:51-53) 목숨을 부지하려 합니다. “제단은 정사각형의 번제단으로 네 모퉁이에 뿔 모양이 달려 있습니다(27:1-8). 속죄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잡고 피를 네 뿔에 발랐습니다(29:12; 4). 뿔에 새겨진 예배자의 죄(17:1) 위에 피를 발라 속량한다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요압은 장막을 도피처로 삼았지만, 그곳은 우발적살인자가 피신하는 곳입니다(35:11-12). 그는 고의로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였으므로, 도피처에 숨어도 목숨을 건질 수 없습니다.

한편 28절은 요압의 피신 이유를 반역에 가담한데서 찾습니다. 다만 압살롬은 따르지 않았지만 아도니야를 따랐다는 설명은 1장의 반역을 가리키므로, 아비아달과 마찬가지로 그가 2장의 아도니야 사건에도 관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요압이 제단에 피신한 상황은 솔로몬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 때처럼 군사령관 브나야를 불러 장막으로 가서 요압을 치라고 명합니다(29). 어명에 따라 장막에 간브나야는 요압에게 나오라고 명하지만, 그는 거기서 죽겠다며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둔 거룩한 처소에서 피를 흘리는 일은 삼갔으므로(왕하 11:15) 요압은 이를 악용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요압의 처형에 단호했습니다. 그는 요압의 말을 역이용하여 브나야에게 그를 치고묻으라고 명합니다. 솔로몬은 요압의 죄를 고의적 살인으로 정의하며, 이를 심판하지 않으면 그 책임이 다윗과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 설명합니다. 요압이 다윗 몰래(32) 두 장수를 죽여 다윗에게 해를 끼쳤고(삼하 3:26-38), 다윗이 왕으로서 피살자들을 신원하고(35:30-31), 살인자를 심판할 의무를 유언으로 솔로몬에게 당부했기 때문입니다(5-6). 브나야가 요압을 처단한 것은 다윗 가문에 임할 피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은 요압이 그보다 의롭고 선한 아브넬과 아마사를 쳤으므로동등한 피의 형벌을 요압에게 내리는 것이 여호와의 뜻과 심판이라고 주장합니다. 고의적 살인자는 도피처로 도망한다 해도 끌어내어 죽이는 것이 규례이므로(21:12-14; 19:11-13) 솔로몬의 판결은 적법합니다. 이로써 장수들이 흘린 억울한 피값은 요압과 자손에게 영원히 돌아가고, 다윗과 자손, , 왕위는 영원히 평화(샬롬)를 누릴 것입니다. 브나야는 어명대로 요압을 쳐서죽였고, 요압은 광야에 있는 집 매장지에 묻혔습니다. ‘매장은 아도니야나 이후 시므이의 처형에 언급되지 않은 내용으로 요압에게 뭔가 특별한 대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압의 처형은 살인의 죗값을 치른 것만 아니라 다윗 집안의 무죄를 확증하고, 다윗의 유언을 이루었으며(6), 요압의 악을 갚아달라고 기도한 다윗(삼하 3:39)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되었습니다.

 

새로 임명된 군사령관 브나야와 제사장 사독(35)

하나님 나라는 정의가 서고 율법에 충성하는 자들이 사는 나라입니다. 권력 남용을 경계하되 하늘의 분별을 구하며 단호하게 결단하였습니다. 정의가 서고 율법에 충성하는 자들이 사는 나라를 만들기 원합니다. 솔로몬은 무죄한 피를 흘린 요압의 죄를 물어 죽음을 명령합니다.

35왕이 이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장관을 삼고 또 제사장 사독으로 아비아달을 대신하게 하니라(34-35)

솔로몬은 아비아달과 요압의 자리에 사독과 브나야를 세움으로써 왕정을 재정비합니다. 아비아달과 요압은 다윗의 오랜 신하들로서 아도니야의 신복이 되었으나, 제사장 사독과 군대장관 브나야는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신진 세력이 된 후 압살롬이나 아도니야를 좋지 않고 다윗과 솔로몬에게 충성했습니다. 엘르아살의 후손인 사독은 젊은 용사로서(대상 11:28) 다윗에게 합류했고, 후에 제사장이 되어 기브온의 성막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대상 16:39). 그는 압살롬의 반역 당시 다윗의 정보원으로서 그를 위기에서 구했으며(삼하 15:24-29; 17:15-18:8), 압살롬이 죽은 후에도 유다 백성을 다윗에게 돌아오게 도왔습니다(삼하 19:11-15). 브나야는 여호야다의 아들로서 다윗의 군사령관 열두 명 중 하나이며, 다윗의 군 조직의 셋째 달 반장이자 시위대 장관으로서 사독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충실한 신하였습니다(삼하 23:20-23; 대상 27:5).


다윗의 나라는 악의 세력에 의해 쉽게 흔들리고 좌초될 수 있는 나라였기에 하나님께서 정한 심판의 방식으로 지켜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칼과 힘으로 세워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죽음의 세력조차 흔들 수 없는 하나님의 주권이 통할 줄 믿고 주께서 주신 자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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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02-02)


어리석은 욕심이 불러 온 아도니야

열왕기상 213-25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었습니다. 하나를 가지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둘 셋을 가지고 싶어 하고, 셋을 가지고 싶으면 넷을 가지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심입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포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깐 다시 욕심이 살아납니다. 이런 인간의 죄된 모습을 아도니야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죽은 후, 솔로몬이 왕으로 신정 왕국을 확장해 나갑니다. 그러나 솔로몬으로부터 목숨을 구한 아도니야는 왕이 되려는 미련과 욕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또 다시 악한 계교를 꾸밉니다. 솔로몬이 베푼 은혜를 배반하고 어리석은 부탁을 함으로써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욕심은 당신을 미련하게 만들고 위험에 빠뜨립니다.

 

아비삭을 아내로 요구한 아도니야(13-18)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인간적인 수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다스림과 뜻을 거스르는 계획과 경영은 없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반역으로 인하여 죽을 뻔했던 아도니야, 그를 살려 주었던 솔로몬은 왕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아도니야는 왕권에 대한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밧세바를 찾아옵니다.

13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나아온지라 밧세바가 이르되 네가 화평한 목적으로 왔느뇨 대답하되 화평한 목적이니이다 14또 가로되 내가 말씀할 일이 있나이다 밧세바가 가로되 말하라 15저가 가로되 당신도 아시는 바여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을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위가 돌이켜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16이제 내가 한가지 소원을 당신에게 구하오니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마옵소서 밧세바가 가로되 말하라 17가로되 청컨대 솔로몬왕에게 말씀하여 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얼굴을 괄시치 아니하리이다 18밧세바가 가로되 좋다 내가 너를 위하여 왕께 말하리라(13-18)

다윗이 죽으면서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을 우리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입니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삼으려 합니다. 그런데 그가 왕이 아닌 대비(大妃)인 밧세바에게 찾아옵니다. 그는 나단처럼 솔로몬의 모친밧세바를 이용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계산된 책략입니다. 다윗의 아내 밧세바는 새 군주의 모친이자 대비가 되어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뜻밖의 방문에 그 목적이 화평인지를 물으며 그를 경계합니다(13a). 그가 왕권을 탐한 전력이 있기에 경계한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화평이라고 답하고, 할 말이 있다면서 그녀를 안심시킵니다(13b). 그런 후 다짜고짜 자신이 왕이 되는 게 순리였지만 솔로몬이 왕 된 것은 여호와의 뜻이었다고 진술합니다(15). 다윗이 솔로몬에게 네가 알 듯이’(5)라고 운을 떼며 원수들 숙청하는 문제에 솔로몬을 끌어들이려 했듯이, 아도니야도 말머리에 당신도 아시듯이’(15)라고 하면서 밧세바를 자기 일에 끌어들입니다. 아도니야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 왕위는 그의 것이었습니다. 그가 다윗의 적법한 장자이며 다윗의 총애를 받은 자였습니다(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후계자로 계획하셨고(대상 22:9-10) 다윗도 맹세했습니다(1:30).

둘째,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15). 아도니야는 온 이스라엘의 얼굴이 자신을 왕 삼고자 자기에게 고정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추종자들은 솔로몬을 뺀 왕자들, 아비아달, 요압, 일부 유다인들 뿐이었습니다(1:9). 압살롬처럼 백성의 마음을 빼앗았다거나 온 이스라엘이 그를 따랐다는 기록(삼하 15:6, 13)은 없습니다. 자축연마저 비밀리에 열려 백성들은 그의 등극을 몰랐습니다.

셋째, 왕권이 자기로부터 솔로몬에게 돌아간 것은 여호와의 계획이었습니다(15). 아도니야는 이때 솔로몬을 내 아우(아흐)”(15)로 칭하고 그에게 왕권을 뺏긴 것처럼 설명함으로써 솔로몬 왕정이 순리적인 결과가 아님을 표현합니다. 억울하지만 여호와의 뜻이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솔로몬을 후계자로 선택하셨기에, 아도니야에게 갈 왕권이 솔로몬에게 돌아갔다는 그의 주장은 전혀 옳지 않습니다. 아도니야가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자기가 큰 손해를 감수하고 물러났으니 이제 자신이 바라는 것을 말할 때에 거절하지 말고 꼭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밧세바의 반복되는 말하라”(14,16)라는 명령은 대비(大妃)의 권위와 권세를 드러냅니다. 아도니야는 그제야 아비삭을 아내로 얻도록 솔로몬에게 중재해달라며 방문 목적을 밝힙니다. 밧세바는 요청을 흔쾌히 수락하며 왕에게 말하겠다고 약속합니다. 흥미롭게도 아도니야와 밧세바의 진정한 속내를 알 수 없어 둘의 대화가 순수한 것인지 음흉한 계략인지 모호합니다. 아도니야의 말을 들여다보면 그는 반역을 꾀할 때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아비삭을 쉽게 얻을 것이라 믿고 섣부르게 행동합니다. 겉은 자신만만하지만 용기도 없고 솔로몬에게 절하며 목숨을 구걸했듯이(1:51-53) 지금도 대비 앞에서 비굴합니다. 자신의 반란이 가져올 최악의 상황을 부정했듯이, 지금도 최악의 경우는 배제한 순진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비삭을 요구한 의도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시도라면, 그는 밧세바의 모성과 권세를 이용하는 지략을 펼치고 있는 셈입니다. 그는 솔로몬에게 왕좌를 잃은 서러움과 왕권에 대한 미련을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밧세바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긍휼히 여기도록 속인 것입니다. 솔로몬의 왕권이 여호와의 뜻임을 인정한다면서 안심시켰습니다. 그녀의 청이라면 왕도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그녀에 강력한 권세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이를 입증하도록 부추겼습니다.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요구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청탁을 들어준 이유는 아비삭을 주어 그를 위로해주려고 했거나 혹은 이번 기회에 아도니야(나아가 아비아달과 요압까지)를 제거할 공식적인 빌미를 만들려고 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후자라면, 밧세바는 정치적 지략이 뛰어난 여인으로서 다윗을 움직여 아도니야가 가로챈 왕권을 솔로몬에게 되찾아주었듯이, 이번에는 솔로몬을 움직여 아도니야가 가로채려 한 솔로몬의 왕권을 확실하게 지켜준 여인이 됩니다.

 

아도니야의 죽음(19-25)

우리들의 삶 가운데도 조그마한 욕심을 빨리 분별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을 때에 그 욕심을 쳐버리는 은혜가 삶 가운데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얼마 작은 것 같아서 방심하고 가만히 나두면, 이렇게 성장해서 사람을 죽이게까지 하는 죄로 자라게 됩니다. 이제는 남을 해치는 큰 모양으로 변해가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도 본문을 통해 네 안에 이런 작은 욕심이 없느냐?’, ‘죄가 없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19밧세바가 이에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하려고 솔로몬왕에게 이르니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다시 위에 앉고 그 모친을 위하여 자리를 베풀게 하고 그 우편에 앉게 하는지라 20밧세바가 이르되 내가 한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오니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마소서 왕이 대답하되 내 어머니여 구하시옵소서 내가 어머니의 얼굴을 괄시하지 아니하리이다 21가로되 청컨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22솔로몬 왕이 그 모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 하고 23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24나를 세워 내 부친 다윗의 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날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19-24)

밧세바는 솔로몬에게 아도니야의 소원을 전하지만, 아도니야는 결국 목숨을 잃습니다. 밧세바가 이전에 나단의 계획대로 다윗을 만나러 갔듯이, 이번에는 아도니야의 계획대로 솔로몬을 만납니다. 나단이 일러준 말을 나름대로 바꿔 말했듯이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밧세바는 위 단락에서와 같이 솔로몬의 어머니로 계속 언급됩니다. 솔로몬은 깍듯이 예를 갖춰 모친을 접하고, 그녀는 왕좌 오른쪽에 마련해준 자리에 앉습니다. 20-21절의 밧세바와 솔로몬의 대화는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말한 내용(16-17)을 반영합니다. 밧세바는 한 가지 작은 일(소원)”을 구하니 자신의 청을 거절하지 말라고 솔로몬에게 당부합니다(20). 밧세바가 아도니야의 소원작은 소원이라 칭한 것은 소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거나 솔로몬이 그렇게 여기도록 축소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청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합니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소청을 말하면서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아내로 주어지게(be given) 하소서라는 소극적인 표현을 씁니다. 또한 아도니야를 당신의 형이라 칭하며 혈연을 넌지시 부각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모친의 말을 듣고 단번에 아도니야의 속셈을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판단합니다. 지금은 아비삭을 구하지만 결국은 왕좌를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전에 다윗을 속여 왕이 되려 했고, 이번에는 솔로몬을 속여 왕좌를 빼앗으려 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아도니야와 밧세바가 혈연지간을 내세운 점을 받아쳐 솔로몬도 아도니야를 나의 형(아흐)”이라 부르며, 그를 위해 왕권까지 구하라고 밧세바에게 역정을 냅니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에 대해서말했지만(18,19), 솔로몬은 그녀의 요청이 그를 위한것임을 세 번 반복하며(22), 아도니야의 진의가 왕권 찬탈임을 일깨웁니다. 보통 왕이 죽으면 선대왕의 규방(harem)은 후대왕의 감찰 하에 맡겨지므로 아비삭은 솔로몬의 합법적인 규방에 속했습니다. 고대에는 새 왕이 이전 왕의 처첩을 아내로 맞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는 왕위의 정당성을 나타내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상대편이나 제3자 입장에서 보면 왕의 여자를 넘보거나 취하는 행위는 왕권에 대한 도발로 간주되기 십상입니다. 이전에 군사령관 아브넬이 사울의 첩을 취한 행동을 이스보셋이 배역으로 여긴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삼하 3:7).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반한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과 동침하라고 조언한 것도 그의 왕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봅니다(삼하 16:20-23). 다윗의 경우는 사울의 딸 미갈을 아내로 되찾음으로써 베냐민 지파와의 결탁을 유도하고 새 왕조를 세우는 명분으로 삼으려 했습니다(삼하 3:13-14). 이런 사례들로 봤을 때, 아도니야가 아비삭을 아내로 구한 것은 왕권 찬탈의 의도가 다분한 행위입니다. 솔로몬이 아비아달과 요압까지 언급한 것(22)을 보면 그들이 관여했으리라 유추한 것 같습니다.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반역 의중이 드러났으니 그를 처단하기로 여호와께 맹세합니다. 아도니야에게서 악이 발견되면 죽을 것이라 경고한 바 있으므로(1:52), 솔로몬은 이 선고가 사적 보복이 아닌 정당한 판결임을 드러냅니다. 또한 그를 제거하는 것은 여호와가 다윗에게 예고한 솔로몬을 다윗의 왕위에 세우고 솔로몬 왕정을 수립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의 실현임을 선포합니다. 그는 브나야에게 아도니야의 처형을 명합니다. 브나야는 어명대로 아도니야를 쳤습니다. 다윗의 관대함과 솔로몬의 호의로 목숨을 부지했던 아도니야는 이렇게 죽고 맙니다.


당신의 인생과 미래가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상황 속에서 참된 지혜를 분별하여 지혜로운 사람으로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풍성함 속에 살면서도 그 말씀을 따라 행하는 일은 빈약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당신 안에 말씀을 좇기 싫어하는 게으름과 악함을 거절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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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02-01)


형통으로 이끄는 다윗의 유언

열왕기상 21-12


옛날 초등학교 교과서에 말 안 듣는 청개구리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평소에는 어머니 청개구리의 말을 잘 안 듣다가 죽게 된 어머니 청개구리의 마지막 유언을 듣습니다. 그리고 죽은 어머니 청개구리를 강가에 묻었다가 비만 오면, 어머니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서, 계속 울어댄다는 청개구리 이야기입니다. 정말 평소에는 부모님의 말을 안 듣다가도 마지막 유언에는 귀를 기우리는 것이 사람입니다. 본문에는 다윗의 생애를 마치면서 유언을 하는 현장이 나옵니다.

 

아도니야 사건을 잘 마무리하고 왕이 된 솔로몬에게 다윗은 통치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죽음을 앞둔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형통케 원리를 줍니다. 솔로몬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군사력도 정치력도 아니었습니다.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성공의 참된 비결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신하들에게 대해서 분별력을 가지고 대하라고 당부합니다.

 

다윗의 마지막 유언(1-9)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솔직해집니다. 죽어가는 사람도, 그를 보내는 사람도 서로 맺혔던 한을 풀고, 서로 용서하고 축복하는 장면이 죽음의 장면입니다. 부모들이 가장 솔직하게 자녀들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꾸밈없이 할 수 있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유언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깨달은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즉 인생의 결론입니다. 죽음을 앞둔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게 됩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무엇을 진실하게 권하고 있습니까?

1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2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3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찌라 4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 5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저가 저희를 죽여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6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8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저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저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기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9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찌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찌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1-9)

다윗은 이제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초연하게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후계자로 임명한 아들 솔로몬에게 꼭 해주어야 할 유언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가까워진 다윗은 솔로몬과 그 신하들에게 마지막 말 유언을 남깁니다.

(1)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1-4)

죽음이 가까워진 다윗은 솔로몬에게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무엇보다 하나님의 명령을지킬 것을 명하며, 순종하기 위해서는 어린 솔로몬이 굳세져서 대장부가 되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킨다는 것은 그분이 원하시는 길로 행하는 것이며, 그 길은 모세의 율법에 명시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를 그의 법률들과 그의 계명들과 그의 율례들과 그의 증거들로 반복하면서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그가 인간이 행할 길을 알리셨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순종하면 무엇을 하든 어디로 향하든 형통할 것이라면서 격려합니다. 다윗은 이어 하나님이 그와 맺은 언약을 이루실 것을 상기시킵니다. 이 언약은 조건적입니다. 다윗 후손들이 모든 마음과 영혼(“성품”)으로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행위를 주의하는지 여부에 따라 왕조의 지속이 결정된다는 내용입니다(4; 대상 28:7). 그런데 실상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런 조건을 내걸지 않으셨고, 오직 그의 은혜로왕조가 영원히 견고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삼하 7:12-16).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왕의 규례(6;17:18-20)를 통해 순종할 것을 명하셨고, 순종하는 왕에게 장구한 왕권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후손이 죄를 지으면 징계하겠지만 사울 때처럼 왕권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고 다윗 왕조는 영원할 것이라고 보장해주셨습니다(삼하 7:14-16). 이 다윗 왕조의 영구성에 대한 약속은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질 하나님의 왕국에 문자적으로 적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요압, 바르실래의 아들들, 시므이에 대한 지시(5-9)

다윗은 세 사람을 특정하여 그들에 대한 조치를 지시합니다. 이 당부들은 앞의 순종의 내용과 연결되어 솔로몬에게 압박을 줍니다. 다윗은 요압이 무죄한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일을 들어 그의 처벌이 마땅함을 표합니다. 요압은 다윗의 조카이자 군사령관으로서 다윗 옆을 지켰으나 태평시대(샬롬)에 전쟁의 피를 흘린 장본인입니다. 다윗은 그들이 죽으며 흘렸던 피가 요압의 칼이나 다른 무기가 아닌 허리띠와 신발에 묻었다고 묘사합니다. 이는 요압이 전쟁에서 두 장수와 정정당당하게 겨룬 것이 아니라 무방비 상태인 그들을 유인해 비겁하게 죽였음을 고발하려는 의도입니다. 요압이 죽인 아브넬 장군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자입니다. 그의 군사들과 요압의 형제를 포함한 다윗의 군사들 사이에 싸움이 일었을 때 아브넬은 자기 뒤를 뒤쫓은 요압의 형제 아사헬을 죽였습니다(삼하 2:12-23). 후에 아브넬은 이스보셋을 떠나 다윗에게 전향했지만, 요압은 아사헬에 대한 보복으로 아브넬을 살해했습니다(삼하 3:22-27). 당시 다윗은 자초지종을 몰랐으나 백성들에게 아브넬의 살인자로 오인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넬의 무덤까지 상여를 따라가 울었고 그를 위한 애가를 지어 불러 백성의 오해를 풀어야 했습니다(삼하 3:26-38). 이때 다윗은 왕권이 약하여 요압을 제거하기 어려웠음에 울분을 토하며, 하나님이 요압의 악을 갚아주시기를 기원했습니다(삼하 3:39). 한편 아마사는 이드라(예델)와 아비갈(아비가일)의 아들로, 다윗의 조카이자 요압의 사촌이었습니다(삼하 17:25; 대상 2:17). 그는 압살롬을 추종한 군사령관이었지만,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에 의해 요압 대신 군사령관이 되어, 특정 임무를 맡았습니다(삼하 19:13; 20:4-7). 요압은 강등당해 자존심이 상했는지, 다윗에 대한 반항심 때문인지, 다른 이유에선지 아마사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기회를 노려 그를 죽이고 온 군대의 군사령관 자리를 되찾았습니다(삼하 20:4-13, 23). 요압이 이처럼 평화의 시기’(샬롬)에 피를 불렀으므로 그가 평안히(샬롬)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제 평화’(샬롬)의 이름을 가진 솔로몬이 이를 처리하여 다시 평화를 되찾아야 합니다. 요압은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다윗에게 충성했지만, 사리사욕으로 제멋대로 행하여 그에게 가시와 같은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에는 그가 자기 아들 압살롬을 죽인 일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솔로몬이 요압을 처단함에 있어 지혜대로행하라고 명합니다(6). 이때 지혜어떻게 행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앞으로 솔로몬이 이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에 대한 언급은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게 될 자임을 미리 귀띔하는 역할도 합니다.

둘째, 길르앗의 거부 노인 바르실래의 자식들에게 은총을 베풀라고 당부합니다(7). 다윗이 압살롬에게서 도망할 때 요단을 건너 길르앗 지역의 마하나임에 은신처를 꾸렸습니다(삼하 17:24). 이때 바르실래를 비롯한 길르앗 주민이 다윗과 무리를 긍휼히 여겨 침구류와 그릇과 음식을 후하게 대접했습니다(삼하 17:27-29). 압살롬이 죽은 후 다윗이 요단을 건너 다시 서쪽 유다로 돌아갈 때에도 바르실래는 그의 안전을 위해 동행했습니다. 또한 다윗과 무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었습니다(삼하 19:31-39). 다윗은 그에게 예루살렘에 함께 가기를 권유했으나 이미 80세가 된 바르실래는 왕에게 누가 된다며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대신 김함을 데려가도록 요청했습니다(삼하 19:33-39). 다윗이 지금 솔로몬에게 바르실래의 아들들에게 호의를 베풀라고 명하는 것으로 보아 김함은 바르실래의 아들로 추정됩니다. 다윗은 이들이 솔로몬의 왕정에도 계속 도움이 될 존재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은 솔로몬의 식탁에서 먹는 권한을 누리게 될 것인데, 이는 궁정의 음식과 보호를 공급받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4:27). 이는 왕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유사한 예로 이전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이 같은 대접을 받았고(삼하 9:7-11),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의 옥에서 풀려나와 바벨론 왕의 공궤를 받습니다(왕하 25:29).

마지막으로, 다윗은 시므이를 처단하도록 명합니다(8-9). 다윗은 보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솔로몬의 이목을 집중시켜 시므이에 대한 지시가 위중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시므이는 바후림에 사는 베냐민 사람이며 사울의 친척이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마하나임으로 도망할 때 다윗에게 부당하고 악독한 저주를 퍼부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죽고 다윗이 왕권을 되찾자 용서를 빌었고, 다윗은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삼하 19:16-23). 이것이 그가 무죄하다거나 다윗이 용서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윗은 이제 솔로몬이 지혜의 사람’(9)으로서 이 일을 어떻게 행할지 알 것이라며, 시므이가 피 가운데 죽음을 맞이하게 하라고 당부합니다. ‘지혜의 사람이란 표현은 요압을 처리하는 방식(“네 지혜대로 행하여”(6)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수완으로 잘 해결하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 한 맹세와 정치적인 목적으로 시므이를 살려 두었지만, 솔로몬을 통해 그를 제거하여 새 왕정에 걸림돌이 없도록할 계획입니다. 열왕기는 다윗의 마지막 모습을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남은 문제들을 주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다윗의 죽음(10-12)

당대에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들도 시간이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갔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죽지 않기 위해 불로초를 구했지만, 49세에 죽었습니다. 우리가 해낼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그 영향력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언기 남겨놓으려고 안달자지 말고 끝까지 책임지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본문에는 다윗도 모든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10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자서 다윗성에 장사되니 11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지 사십년이라 헤브론에서 칠년을 치리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을 치리하였더라 12솔로몬이 그 아비 다윗의 위에 앉으니 그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10-12)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다스렸던 다윗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성에 묻혔습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더욱 견고하게 세워졌습니다. 아버지 다윗보다 더 솔로몬의 위가 든든하게 설 수 있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30세에 왕이 되어 헤브론에서 76개월, 나머지 33년은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다윗은 40년의 통치(주전 1010-970)를 끝으로 다윗 성 시온에 장사 되었습니다. 이제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제3대 왕이자 다윗 왕조의 둘째 왕으로 군림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가 왕위에 올랐고 그의 나라는 심히 견고했습니다(삼하 7:12).

 

 

다윗처럼 솔로몬에게 유언하듯이, 당신도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기는 귀한 유언을 하시길 바랍니다. 자녀의 미래는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말씀을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참된 지혜로 분별하여 지혜로운 사람으로 존경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풍성한 말씀 속에 살면서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시길 바랍니다. 당신 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하길 원합니다. 그러면 자녀들에게까지 풍성한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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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01-04)


제단 뿔을 잡는 아도니야

열왕기상 1장 40-53절


항상 이 세상은 좋은 소식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들으면 기뻐합니다. 자녀가 합격했다는 소식, 남편이 승진했다는 소식, 부동산 값이 올랐다는 소식, 이런 저런 소식을 다 좋은 소식이라고 기다립니다. 그런데 성경은 진정한 좋은 소식(Good News)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소개합니다. 성경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당신에게는 가장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솔로몬의 왕위 즉위식이 온 백성의 환호와 축하 속에 진행됩니다. 아도니야 일행은 요나단에게서 솔로몬의 등극한 소식을 듣고 모두 흩어집니다. 아도니야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두려워 성소에 들어가 제단 뿔을 붙잡고 목숨을 간청합니다. 아도니야의 사건을 통해 솔로몬은 왕으로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의 등극을 듣는 아도니야(40-45)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은혜스럽고 평화스러운 정권교체가 일어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며 축제를 버리기 시작합니다. 모두가 행복한 이때에 소외된 한 무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스스로 왕이 되려했던 아도니야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백성이 왕을 따라 올라와서 피리를 불며 크게 즐거워하므로 땅이 저희 소리로 인하여 갈라질듯하니 41아도니야와 저와 함께한 손들이 먹기를 마칠 때에 다 들은지라 요압이 양각 소리를 듣고 가로되 성중에서 소리가 어찌하여 요란하뇨 42말할 때에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오는지라 아도니야가 가로되 들어오라 너는 용사라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 오는도다 43요나단이 아도니야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과연 우리 주 다윗왕이 솔로몬으로 왕을 삼으셨나이다 44왕께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솔로몬과 함께 보내셨는데 저희 무리가 왕의 노새에 솔로몬을 태워다가 45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 기혼에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고 무리가 그곳에서 올라오며 즐거워하므로 성중이 진동하였나니 당신들에게 들린 소리가 이것이라(40-45)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왕으로 등극한 솔로몬을 따르며 피리를 불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 기쁨의 소리가 너무 크고 요란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려던 무리들의 잔치까지 드렸습니다. 그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나팔소리와 백성들의 환호성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 합니다.

바로 그때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인 요나단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다윗 왕이 솔로몬을 왕으로 세웠으며, 지금 들리는 소리가 솔로몬 왕에 대한 축하와 기쁨의 환성이라고 전합니다.

아도니야 무리들이 잔치를 베풀고 있을 때, 요나단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기뿐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왕이 되려는 잔치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축하한다는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허황된 망상과 같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소식(Good News)이 아니라 나쁜 소식(Bad News)이었습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왕이 되어서 모든 백성이 기뻐하는 소리라는 천청병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나팔 소리가 큰소리로 울리고 있을 때, 아도니야는 계속해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요압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대세를 따라 아도니야에게 ‘당신은 왕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라고 부추기며, 그들은 아부하면서 ‘당신은 왕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도니야에게 아부를 계속했을지 모릅니다.

아도니야는 스스로 마련한 잔치에서 소수의 동조자들의 왕으로 굴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왕 솔로몬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왕위에 등극했습니다. 한편 솔로몬이 등극했다는 소식은 아도니야 사람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아니라 두려운 소식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적인 기대와 꿈을 깨뜨려 버린 절망적인 소식이었습니다.

아도니야의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이 없습니까? 자신의 성공을 위해 사람들이 몰려다니며 대세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공지향적인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묵살하고 세상의 방법과 성공을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솔로몬을 세우신 하나님을 찬양(46-48)

드디어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왕에게 와서 솔로몬이 왕으로 등극한 것을 축하합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솔로몬이 나라 위에 앉았고 47또 왕의 신복들이 와서 우리 주 다윗 왕에게 축복하여 이르기를 왕의 하나님이 솔로몬의 이름을 왕의 이름보다 아름답게 하시고 그 위를 왕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매 왕이 침상에서 몸을 굽히고 48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내 위에 앉을 자를 주사 나로 목도하게 하셨도다 하셨나이다 하니(46-48)

드디어 솔로몬이 왕좌에 앉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이 새로운 왕으로 세워진 것에 대해 다윗에게 축하합니다. 그 내용은 ‘당신보다 당신 뒤에 앉을 사람이 당신보다 더 잘되길 바랍니다.’라고 축복을 했습니다. 이런 축복은 다윗에게는 기분이 나쁠 수 했지만, 하지만 다윗은 축하하는 마음으로 함께 공감하며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자신보다 자신의 후계자가 더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다윗의 모습이, 다윗을 위대한 왕의 모습을 가지게 하는 좋은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다윗도 왕위를 이을 사람을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허락해주심과, 그리고 아들 솔로몬이 자기 이름보다 더 아름답고 자기 왕위보다 더 크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를 듣고 하나님께 노쇠한 몸을 굽혀 감사를 드립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세운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왕으로 선택하여 세우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솔로몬을 이렇게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의 보물이 왕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의 직책이 아니라 영원히 들어갈 천국에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을 축복하고도 남을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입니다.

세상의 역사들이라 할지라도 그 근원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이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라고 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른 솔로몬을 보고 하나님께 찬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주관하신 분입니다. 사람을 높이시기도 하며 낮추시기도 합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 것이 대세처럼 보이는 상황을 완전히 뒤바꿔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솔로몬이 통치한 나라에 대한 번영도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실 뿐 아니라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솔로몬처럼 노라운 일을 경험할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아도니야의 무리(49-53)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팔 소리가 아도니야를 위한 소리가 아니라 솔로몬을 위한 나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도니야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아도니야와 함께한 손들이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 길로 간지라 50아도니야도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가서 제단 뿔을 잡으니 51혹이 솔로몬에게 고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솔로몬왕을 두려워하여 지금 제단 뿔을 잡고 말하기를 솔로몬왕이 오늘날 칼로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고 내게 맹세하기를 원한다 하나이다(49-51)

솔로몬이 완전히 공식적으로 왕이 된 것을 듣자 아도니야 일행들은 들었습니다. 대세에 따라 아도니야가 왕이 될 것을 기대하고 미리 잔치를 벌이고 있던 그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서 재빨리 도망쳤습니다. 무엇인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아도니야를 하나둘씩 떠나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허상을 잡고 있을 때는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당신이 잡고 있는 것이 전혀 진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성도들이 믿고 따라야할 대상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도니야도 그들이 떠나는 순간에 그것을 느겼을 것입니다.

이 전까지는 솔로몬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드디어 솔로몬이 나옵니다.

솔로몬이 가로되 저가 만일 선한 사람이 될찐대 그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려니와 저의 가운데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 하고 53사람을 보내어 저를 제단에서 이끌어 내리니 저가 와서 솔로몬왕께 절하매 솔로몬이 이르기를 네 집으로 가라 하였더라(52-53)

왕 행세를 하던 아도니야가 급해서 성소로 뛰어갑니다. 솔로몬이 두려워 제단 뿔을 붙잡고 생명을 구걸합니다. 밧세바와 솔로몬의 생명을 위협하던 아도니야가 이제는 제단 뿔을 잡고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지지하던 몇몇 안 되는 권력자들의 지지에 하나님과 아비지도 무시하며 의기양양했던 사람이 목숨을 구걸합니다. 이에 솔로몬은 조건을 걸고 그를 살려주지만 사실상 그 조건은 아도니야의 목숨을 솔로몬의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도니야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를 죽이지 않고 용서하고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배운 귀한 신앙을 첫 번째로 실천합니다. 당신의 삶 속에서도 솔로몬과 같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하는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대세를 따르지 말고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아도니야를 따랐던 이들은 솔로몬이 왕이 되자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도망쳤습니다. 지금 당신의 삶의 기준은 상황을 따릅니까 아니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세상을 통치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명예와 권력을 위한 잔치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잔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인도하신 것처럼, 당신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지금 상황이 불리하더라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뜻만 나가시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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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01-03)


왕으로 세움을 받는 솔로몬

열왕기상 1장 28-39절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끝임 없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하고 후회하고, 잘된 선택을 하고 기뻐하며 우리들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봅니다. 항상 두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까 망설이고 있습니다. 본문의 다윗도 말년에 그의 생애의 마지막 선택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고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배설하고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아무 것도 모르고 왕위를 위하여 아무것도 시도하지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왕인 다윗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선지자 나단와 아내 밧세바는 다윗 왕에게 알립니다. 그리고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밧새바와 맺은 맹세를 기억하고, 솔로몬을 왕으로 등극 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솔로몬을 왕으로 세울 맹세(28-31)

열왕기는 다윗이 늙어서 병약한 다윗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 모양 그대로 라면 무능한 왕일 것입니다. 그런데 나단의 충고를 듣고 상황을 파악한 다윗은 이제는 더 이상 무능한 왕이 아닙니다. 침상에서 일어나 자신의 일을 행하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로 시작합니다.

28다윗왕이 명하여 가로되 밧세바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매 저가 왕의 앞으로 들어와 그 앞에 서는지라(28)

다윗은 밧세바와 선지자 나단을 통해 아도니야의 악행에 대해 당황스러운 보고를 받았습니다. 정말 아도니야를 후계자로 삼았냐는 나단의 질문을 받습니다. 다윗은 성급하게 즉흥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자신의 침상에서 물리치고 혼자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기도합니다. 기도한 다음에 다시 밧세바를 부릅니다. 그리고 말을 시작합니다. 이제는 늙은 호랑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행동하는 왕으로 탈바꿈합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선택한 일에 대해 공포합니다.

이전까지는 다윗이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침상에 누어있었습니다. 연약한 다윗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 도움을 받고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늙은 다윗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0대 젊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자신의 삶에 매어서 하루하루 허비하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늙은 다윗과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영적 생명력이 없는 늙은이처럼 되어 집니다. 아무리 몸은 늙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능력만 살아있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삶 속에 잘 적용하시길 바랍니다.

왕이 가로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30내가 이전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 31밧세바가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며 내 주 다윗왕은 만세 수를 하옵소서 하니라(29-31)

다윗은 침상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이렇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능력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을 일으켜 세우신 분은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라고 고백합니다. 그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맹세”합니다. 그는 또 맹세한 것을 “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고 고백합니다. 노장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신실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결정하는 유일하는 것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다윗은 현직에서 왕으로 있을 때, 이스라엘이 번영하며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절실히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왕을 세우는 일이나 이스라엘의 운명 역시 여호와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통해 우리들에게 영적 교훈을 줍니다. 인생의 마지막 때에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고백할 것 같습니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천국에 올라가길 원합니다.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선물로 주신 자녀들을 말씀대로 잘 가르치고 주님 앞에 홀가분하게 나아가길 원합니다. 이러한 모든 고백들이 당신의 인생에 넘쳐나길 소원합니다.

또 한 가지 다윗은 자신이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을 때, 신속하게 변화된 삶을 가졌습니다. 그는 밧세바가 전해 준 소식을 받았고, 더불어 선지자 다난을 통해 주신 소식을 들였습니다. 자신이 잘못된 삶을 기도하면서 수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고 약속한 것이 기억이 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다시 밧세바에게 약속합니다. 밧세바는 크게 절하며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31).

잘못된 것은 가급적이면 빨리 고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깨닫는 대로 즉시 시행해야 합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나단의 지적을 받은 다윗은 지체하지 않고 자신의 약속에 대한 책임을 다합니다. 즉시 그 약속을 시행했습니다. 나단은 질문을 통해 다윗의 스스로 체면을 세울 기회를 주었습니다. 다윗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스스로 잘못된 일들을 인정해야할 것은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왕위 즉위 절차를 세운 다윗(32-35)

다윗은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기 위한 구체적인 명령을 실시합니다. 다윗은 왕권을 솔로몬에게 계승하기 위해 성전의 재료들을 다 준비했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하나씩 포기하기 시작합니다.

32다윗왕이 가로되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니 저희가 왕 앞에 이른지라 33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의 신복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나의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34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저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고 너희는 양각을 불며 솔로몬왕 만세를 부르고 35저를 따라 올라오라 저가 와서 내 위에 앉아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 내가 저를 세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주권자가 되게 하기로 작정하였느니라(32-35)

이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다윗은 문제를 즉각 해결하려고 사독(제사장), 나단(예언자), 브나야(장군)를 부릅니다. 그들에게 솔로몬을 왕으로 승계하기 위한 명령을 내립니다. 다윗은 신하들에게 명하여,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다윗의 노새를 솔로몬에게 내어줍니다. 이 왕의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뿔나팔을 불며 공포하며 솔로몬 왕 만세를 외치도록 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솔로몬을 데려가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왕위 즉위식을 거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윗 왕이 분부한 대로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보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도 새로운 왕이 된 솔로몬을 왕으로 맞이하면서 만세를 부릅니다. 그들은 나팔을 불며 크게 기뻐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도니야를 왕으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는 의미입니다. 외모는 훌륭해 보인데, 평상시 행동에서 왕답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을 누릴 사람들은 평상시 행동을 복되게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모습 속에서 ‘그 사람은 그 복을 당연히 받아야 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인정받길 바랍니다.

다윗은 솔로몬이 자신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것임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 것이 대세였는데, 순식간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솔로몬(36-39)

늙은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사람들을 부른데 그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하나님께 자신들과 함께 하시면 아무런 문제없이 일이 진행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36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37또 여호와께서 내 주 왕과 함께 계심 같이 솔로몬과 함께 계셔서 그 위를 내 주 다윗왕의 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38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이 내려가서 솔로몬을 다윗왕의 노새에 태우고 인도하여 기혼으로 가서 39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서 기름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양각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왕 만세를 부르니라(36-39)

다윗은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 일을 도울 충성스러운 신하들을 불렀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 그리고 군대 장관 브나야였습니다. 그들이 솔로몬을 왕으로 등극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확신합니다. 다윗은 그들이 중심이 되어 솔로몬을 왕으로 기름 붓는 행사를 주관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에게 순종합니다. 특히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다윗의 명령에 ‘아멘’이라고 화답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옳은 일이라고 하면 연합하여 순종하는 ‘아멘’의 삶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이러한 순종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어려운 과정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성취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윗이 부른 신하들이 대세를 거스르고 다윗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내 주 왕과 함께 계심 같이 솔로몬과 함께 계셔서 그 위를 내 주 다윗왕의 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분위기나 여론에 따라 모인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다윗 왕이 명령한 것들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솔로몬이 위대한 왕이 되기에 합당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독과 나단 그리고 브나야가 솔로몬을 위해 연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연합한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분위기나 여론으로 아도니야 쪽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움직이고, 그것을 위해서 연합한 집단입니다. 사람의 분위기 따라 연합하지 않도록 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연합한 공동체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의의 연합’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들은 언약 가운데 함께하신 하나님 때문에 다윗도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솔로몬도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본 것은 사람이 아니라 다윗과 솔로몬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한편 반대로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아도니야처럼 스스로 높아져서 자신을 위하여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을 모으는 사람들, 끝없이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며, 어느 누구보다 자신이 매우 중요하다가 느끼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남을 축복해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주인공이며 자신이 스포트라이트(spot-light)’를 다 받아야 하는데 하면서 자신만을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남을 축복해 줄 수 없습니다. 또 이들 가운데서는 이 솔로몬과 다윗처럼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바로 압살롬과 아도니야처럼 다윗 몰래 자신이 왕권을 가지고자 했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현장에서는 다윗의 말한 절차를 그대로 따라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왕으로 세웁니다. 모든 백성들은 기쁨 속에서 ‘솔로몬 왕 만세!’를 외칩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백성들 안에서 울려 나오는 외침입니다. 이런 명령을 받은 브나야는 다윗과 함께하신 하나님이 솔로몬과도 그가 앞으로 솔로몬을 왕으로 잘 섬길 것이라는 다짐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브나야는 다윗을 찬양하고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복 주시기를 빕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이루시는 분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아도니야가 왕이 될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고 어려워 보여도 결국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일을 너무 서두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짐을 믿어야 합니다.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인내하며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윗과 다윗의 신하들은 상황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만 믿었습니다. 그리고 대세가 아도니야에게 기우러진 상황이지만 상황을 보지 않고 순종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도 그런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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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01-02)


음모를 이길 지혜로운 계획

열왕기상 1장 11-27절


우리는 살아가면서 ‘조언자’, ‘상담자’ 그리고 ‘올바른 훈계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조언(助言)’이란 ‘말로 거들거나 깨우쳐 주어서 도움’을 뜻합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나 대가들의 조언은 큰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그 조언을 받아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은 이러한 사람들을 ‘맨토(manto)’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힘들 때 찾아갈 수 있는 사람, 당신이 잘못 가고 있을 때, ‘잘못 가고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랑의 조언자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어느 때는 마음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조언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다윗이 늙은 후에 이제 다윗은 다음으로 왕을 계승할 사람을 세워야 시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욕심 많은 아도니야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의 야망과 계교를 나타냈습니다. 이것을 안 선지자 나단은 밧세바와 함께 다윗 왕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립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도록 설득해 나갑니다.

 

나단이 밧세바에게 조언(11-14)

하나님의 뜻은 때로는 사람들의 기대와 다릅니다. 역사는 왕위가 당연히 자신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아도니야의 기대와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11나단이 솔로몬의 모친 밧세바에게 고하여 가로되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왕이 됨을 듣지 못하였나이까 우리 주 다윗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12이제 나로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아들 솔로몬의 생명 구원할 계교 베풀기를 허락하소서 13당신은 다윗왕 앞에 들어가서 고하기를 내 주 왕이여 전에 왕이 계집종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런데 아도니야가 무슨 연고로 왕이 되었나이까 하소서 14당신이 거기서 왕과 말씀할 때에 나도 이어 들어가서 당신의 말씀을 증거하리이다(11-14)

인간의 야망으로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한 아도니야의 음모는 음밀한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악한 아도니야의 방법을 막으십니다. 그래서 아도니야의 음모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것을 막으려는 하나님의 은밀한 역사도 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나단은 지혜롭게 일을 처리해 나가고 있습니다.

선지자 나단은 다윗이 밧세바와 함께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찾아와 다윗에게 죄를 지적했던 선지자입니다. 나단의 지적을 듣고 울며 회개했던 다윗, 그는 나단에게 아픔도 있었지만, 그것을 인하여 자신의 죄된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고마운 조언자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다윗이 늙어서 침상에 누어있을 때, 밖에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선지자 다난은 아도니야의 음모를 다윗에게 성급하게 공개하지 않습니다. 사태가 심각하고 다급했지만, 효과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지혜로운 방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공개하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일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일을 성취시켜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일에 대한 순서를 정했습니다. 먼저 다윗을 돕기 위해서 다윗의 아내 밧세바에게 알리고, 다음으로 밧세바가 다윗에게 찾아가서 알리도록 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윗이 문제를 듣고 충격을 받았을 때, 다난이 다윗에게 가서 일을 확정 시키기로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일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도 탁월한 지략을 발휘해 나가고 있습니다. 나단의 주장은 지극히 자기 개인적인 것 같습니다. 아도니야 잔치에 자기를 부르지 않아서 화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진행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나단은 이전에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밧세바에게 맹세한 것을 기억하도록 만듭니다. 이 약속은 사람들과의 약속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한 것이라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다윗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 침상에 누어있는 연약한 모습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야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후계자를 세워놓지 않고 죽으면, 이스라엘은 큰 어려움의 소용돌이에 휩싸입니다. 이 일을 이루어갈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실제적으로 다윗에게 나가서 말할 밧세바도 필요하고, 지원한 나단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단과 밧세바는 먼저 밧세바가 겸손하게 다윗 왕에게 나아가 전해 약속한 맹세를 상기시키고, 그 후에 나단이 왕을 찾아가 이를 확증하기로 계획합니다.

어떤 일을 성취해 나감에 있어서 옳고 그름이나 대의명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성취해 나가는 방법론이 더 중요합니다. 때로는 대의명분은 좋지만 지혜로운 방법이 없이 순진한 발상에 문제를 한꺼번에 터뜨리므로 더 큰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경우를 봅니다.

다른 사람들의 조언(助言)을 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밧세바는 하나님의 사람 나단의 조언을 듣고 나단이 지시한 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솔로몬이 안전하게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주변 사람들의 조언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특별히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님과 영적 지도자들의 조언을 잘 듣고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솔로몬을 향한 밧세바의 간청(15-21)

믿음의 사람들은 때로는 아무런 소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약속 하나만 붙잡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야 할 상황이 있습니다. 그때는 상황을 보지 않고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밧세바는 하나님의 약속만 의지하고 나갑니다.

15밧세바가 이에 침실에 들어가 왕에게 이르니 왕이 심히 늙었으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이 시종하였더라 16밧세바가 몸을 굽혀 왕께 절하니 왕이 이르되 어찜이냐 17저가 왕께 대답하되 내 주여 왕이 전에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계집종에게 맹세하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셨거늘 18이제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어도 내 주 왕은 알지 못하시나이다 19저가 수소와 살찐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장관 요압을 청하였으나 왕의 종 솔로몬은 청치 아니하였나이다(15-19)

다윗의 아내 밧세바는 나단의 조언에 따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밧세바는 다른 사람 말만 듣고 행하진 않습니다. 그녀는 나단의 말만을 가지고 나가기보다 더 섬세하게 잘 준비하여 다윗을 만납니다. 그녀는 다윗을 만나서 다윗의 신복이었던 요담과 아도니야, 그리고 제사장 아비야달 등이 아도니야와 함께 스스로 만든 왕 즉위식으로 왕이 되면, 이제 자신과 솔로몬은 그들에 의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나단처럼 다윗이 예전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솔로몬을 왕으로 세울 것이라는 맹세했던 것을 상기시킵니다. 아도니야는 다음을 결정할 권한이 다윗 왕에게 있음을 부인하지만 백성들은 인정하고 있다는 것도 알려줍니다. 당신의 존재는 당신의 행동 하나로서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지금 무엇을 결정해야 되는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지 않고 아도니야가 왕이 된다면, 밧세바 자신과 솔로몬은 반역자가 되어 죽을 것이라고 하여 다윗의 동정심을 자극합니다. 그래서 속히 결정하도록 효과적으로 재촉합니다.

어려움이나 중대한 결정 앞에 서 있거든, 밧세바처럼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구하며 담대하게 순종합시다.

내 주 왕이여 온 이스라엘이 왕에게 다 주목하고 누가 내 주 왕을 이어 그 위에 앉을 것을 반포하시기를 기다리나이다 21그렇지 아니하면 내 주 왕께서 그 열조와 함께 잘 때에 나와 내 아들 솔로몬은 죄인이 되리이다(20-21)

밧세바는 솔직하게 다윗에서 ‘당신이 죽고 나면 이제 문제가 시작될 것입니다.’하고 상황을 설명합니다. 어느 때는 솔직한 표현이 가장 정직하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간접적으로 돌려 말하기 보다는 솔직하게 상황을 이야기할 때, 다윗은 상황을 새롭게 다시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른 조언해 줄 수 있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자가 당신에게 그런 조언을 할 때에 그것을 기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받아들이는 성숙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는 사람을 통해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나단은 대세가 기울어진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는 것을 막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뜻과 주변 상황 중 무엇을 우선합니까?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들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입니까?

 

다윗에게 사실을 알리는 나단(22-27)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좋은 시기가 있습니다. 조언을 할 때도 때를 잘보고 말해야 합니다. 대화의 법칙에는 말할 때 말하고 기다릴 때 기다려야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22아밧세바가 왕과 말씀할 때에 선지자 나단이 들어온지라 23혹이 왕께 고하여 가로되 선지자 나단이 여기 있나이다 하니 저가 왕 앞에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어 왕께 절하고 24가로되 내 주 왕께서 이르시기를 아도니야가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셨나이까 25저가 오늘 내려가서 수소와 살찐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군대 장관들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청하였는데 저희가 아도니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아도니야왕 만세를 불렀나이다 26그러나 왕의 종 나와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왕의 종 솔로몬은 청치 아니하였사오니 27이것이 내 주 왕의 하신 일이니이까 그런데 왕께서 내 주 왕을 이어 그 위에 앉을 자를 종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나이다(22-27)

밧세바는 다윗을 찾아가서 아도니야가 왕이 되어져 가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날 쯤에 선지자 나단이 들어갑니다. 이어 선지자 나단이 들어와 아도니야가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다윗 앞에 겸손하면서도 단호하게, 상세하면서도 지혜롭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알려줍니다. 다윗 왕의 허락도 없이 아도니야가 왕이 되었다는 것을 돌려 말함으로써 왕의 결단을 요청한 것입니다.

선지자 나단과 아도니야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아도니야는 늙은 아비 다윗을 찾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스스로 왕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모아서 왕위 계승을 축하 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도니야가 특근들과 잔치를 벌이는 것을 볼 때, 누구나 다 이미 전세가 기울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대해 선지자 나단은 냉철한 분별력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나단을 알고 있었습니다. 늙은 다윗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찾아가는 모습은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된 선지자는 공동체의 모든 상황을 분별력을 가지고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울러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로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나단은 상황을 잡지 않고 언약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는 직접 다윗 앞에 나아가 아도니야가 벌이는 헛된 잔치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그것이 왕이 허락한 일인지를 당당하게 묻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윗에게 언약을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또 다윗이 이 일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11), 다윗이 추인한 것처럼 말하여 정서를 자극함으로써 즉각적인 대응을 이끌어냅니다. 역대상 22장 9절에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내가 저로 사면 모든 대적에게서 평강하게 하리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저의 생전에 평안과 안정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솔로몬이 왕이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 말씀이 이미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다윗을 찾아가 솔로몬이 왕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나단은 또 다윗이 이 땅을 떠나기 전에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늙었다고 침대에 누어있을 때가 아니라 마지막을 할 일이 있다고 그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당신이 죽으면 혼란이 오기 때문에 일어나서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사명을 이 땅에서 감당하라는 그런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말과 용기 그리고 분별력 등입니다. 지도자들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느 때는 죽을 수도 있고,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에 그것을 담대하게 지키며, 그것을 잡으며, 그것을 가지고 용기 있게 나가는 그런 믿음이 우리 지도자들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나단처럼 다윗 왕에게 담대하게 나가서 그를 이르켜 세우고 당신이 이제 마무리를 잘해야 합니다. 그렇게 외칠 수 있는 귀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나단의 이러한 활동의 결과 다윗은 솔로몬이 후대 왕이 될 것을 공포합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긴 그는 밧세바로 하여금 다윗 왕을 설득해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게 했습니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듯이, 당신에게도 그런 좋은 조언자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단과 같은 좋은 조언자가 되길 바랍니다. 이웃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있길 바랍니다. 모든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좋은 조언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동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은 지혜와 담대함 그리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얻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선지자 나단과 같은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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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01-01)


늙은 다윗의 생활과 상황

열왕기상 1장 1-10절


일이 진행되어 가는 결정적인 형세를 일컬어 ‘대세(大勢)’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세를 따릅니다. 그 이유는 대세는 유행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익이 되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유익이 없으면 썰물처럼 빠져 나갑니다. 모든 것이 눈으로 보인 대로 이루어질 것 같으니깐 따르는 것입니다. 진정한 대세는 눈에 보아는 사람의 수나 세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대세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열왕기는 다윗의 노년기로부터 시작하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늙어서 왕위를 다음 왕을 계승될 시기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늙어서 신체적인 능력과 함께 아버지와 왕으로서 권위도 점점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무기력한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아들 아도니야는 자신만만하고 거칠 것 없는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그 틈을 타서 아도니야는 솔로몬을 따돌리고 왕이 되려 합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될 배경으로 제시합니다.

 

말년의 노쇠한 다윗(1-4)

 

인생의 마지막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노년에는 점점 정신이 희미해져서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예배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노년에는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말씀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습니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다 아는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다윗도 하나님의 자연법칙에 따라 나이가 많아 늙었습니다. 다윗 노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2그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저로 왕을 모셔 봉양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3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4이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저가 왕을 봉양하며 수종하였으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1-4)

용맹하게 세상을 누볐던 이스라엘 왕이었던 다윗이 70세의 노년의 초란한 모습을 봅니다. 골리앗을 이긴 맹장이요, 이스라엘을 하나로 통일시킨 위대한 왕의 면모를 떠나서, 이제 자기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늙은 사자와 같은 모습입니다. 늙은 다윗은 자신의 체온을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늙었습니다.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낸 해결책이 있습니다. 다윗의 몸을 따뜻하게 하고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젊은 여인과 동침하도록 계획을 세웠습니다. 전 이스라엘을 돌아다니면 그에 합당한 여인을 찾았습니다. 그 젊은 아이의 이름은 ‘아비삭(Abishag)’라는 여인에게 시중을 받게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늙은 다윗에게 필요한 것은 젊은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기 전까지 삶을 잘 마무리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영적 도우미, 호스피스(hospice)들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은 이제 이스라엘에 다윗 왕을 계승할 새로운 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제 왕위를 아들에게 넘겨줄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일평생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그였지만, 이제 너무 늙어서 기력이 없어진 것입니다. 다윗의 죽음이 점점 다가오면서 권력 이동이 진행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항상 기억해야할 엄연한 사실 하나를 일깨워 줍니다. 그것은 모두가 늙어간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것들은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언젠가 다윗처럼 늙어 육신의 기력이 쇠하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움켜진 재물이나 지식, 악착같이 챙기는 건강도 모두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이 이르기 전에 당신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감사하며, 더욱 열심히 주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모두가 주님 앞에 서는 날에 칭찬 받길 원합니다.

 

스스로 왕이 된 아도니아(5-6)

이스라엘에는 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인가는 모든 백성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다윗의 아들들 중에 제일 연장자인 아도니야는 당연히 자신이 왕위를 승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5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하니 6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5-6)

아다니야는 다윗의 넷째 아들로서 살아있는 아들 중 가장 장자였습니다(삼하 3:2-5). 얼굴도 잘 행기도 키도 훤칠한 모습은 외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첫 왕인 사올처럼 왕으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아도니아 자신도 충분히 왕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높여 ‘내가 왕이 되리라’고 자신만만했습니다. 하지만 열왕기를 기록한 저자는 아도니야가 외모와 더불어 여러모로 압살롬처럼 부족한 것이 없지만(삼하 14:25; 15:1), 결과도 압살롬처럼 비참한 결과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압살롬처럼 멸망할 것이라는 암묵적인 증거는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6b)고 그의 성장 배경을 설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버릇없이 성장했다는 말입니다. 아도니야의 건방진 태도는 자식을 잘못 훈계한 다윗의 책임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울 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도 외모적으로 다윗이 아닌 다윗의 형 엘리압을 보고 왕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자격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또 한 가지를 살펴볼 수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녀들에게 대한 교육 문제입니다. 자녀를 교육하는 것은 부모들의 가치관으로 가르칩니다. 하지만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키운다고 잘못함에도 매를 아껴서 자녀들을 버릇없고 권위를 우습게 여기는 아이로 성장시키진 않습니까? 잠언에서 자녀들의 교훈에 대한 진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잠언 기자는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잠 23:13)고 하였습니다. 자녀를 키울 때는 하나님의 훈계와 사랑으로 아이를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성장하면서 아이의 기를 살려준다고 생각해서 기를 살려 놓으니깐, 나중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기로 얼마든지 변할 수 있음을 말씀을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버릇없이 성장하면, 하나님을 버릇없이 대하게 행동합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계를 받지 않고 자랄 때 본문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이 있습니다. 첫째 증상은 ‘스스로 높여서’(5)라는 증상입니다. 아도니야가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이 너무 중요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먼저 해야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스스로 높여서 교만스러운 반응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음 증상은 ‘자기를 위하여’(5)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늘 주인공이 되어야 하지 조연(엑스트라)은 싫어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언제나 자신이 주인공 되어서 다른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시기와 질투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파괴시킵니다. 그런 잘못된 특징들이 있습니다.

다윗의 대내외적으로 큰 성공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자녀들의 교육에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 성공을 이루기 위해 밤낮으로 뛰어 성공을 이루었지만, 자녀교육에는 소홀하면서 잘못한 자녀를 말슴으로 바르게 교육하지 않으면, 아도니야처럼 버릇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 자녀는 당신의 노년을 힘들게 할지도 모릅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바른 하나님의 말씀과 바른 생활에 대해 가르쳐 나가길 바랍니다.

 

양분되는 다윗의 신하들(7-10)

이미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왕권을 계승한다고 언약하셨습니다. 아도니야도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계속 자신의 고집대로 잘못된 행동하는 아도니야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7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 8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9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돌 곁에서 양과 소와 살찐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복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10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7-10)

다윗의 신하들은 득세하고 있는 아도니야 앞에서 그를 중심으로 양분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힘의 세력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끝까지 다윗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로 나누어졌습니다.

아도니아는 세력을 과시해서 왕위로 등극하기 위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자신을 지지하는 측근들을 모으고 스스로 왕이 되는 잔치 자리에 초청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옛 군대장관 요압과 종교의 최고 지도자인 아비아달 제사장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 잔치에 솔로몬의 이름을 뺐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세우고자 하는 것을 자신은 반대하는 것을 의미입니다. 그것은 아버지 다윗을 행한 반역이요, 또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도니야가 양분 시킨 사람들을 구분해보면,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추종했지만, 제사장 사독과 브나야와 나단과 몇몇 용사들을 따돌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을 솔로몬과 함께 초청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반역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편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람들을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분열을 만듭니다.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모으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공동체가 분열되어집니다. 시기와 질투가 판칩니다. 그는 자신이 왕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기초로 인생의 미래를 펼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측근들을 모아 놓고 왕이 될 모의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자신이 지도자로 섰을 때에 자신을 돕고 지지하도록 만듭니다. 군중 심리를 통해 개인의 의사는 무시되어버리고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도록 미혹하고 자신의 편을 만듭니다.

아도니야가 왕으로 세움을 입는 것이 대세인 것처럼 보이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함께 동참해야할 명단 중에 중요한 분이 빠져있습니다. 그분을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빠져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일 때에 그 전쟁은 승리합니다. 사람들의 이름이 아무리 많아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아도니야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배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편에 서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고 속상해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 편인가를 체크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동조하고 당신이 옳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지 않으시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삶의 명단에 하나님의 이름이 초청의 대상이 되길 바랍니다.

아도니야가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잊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엇인가 이익이 되는 동안만 지지한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냉철하게 떠난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종종 신분이나 수요를 기반으로 스스로 교만하여, 다른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로 자신의 미래를 펼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정말 잘못된 오산입니다. 왕을 세우는 분은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는 마치 자신이 왕이 된 것처럼 행세를 했습니다. 교만은 파멸을 앞당기고 패망의 선봉장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섬기고 살아가면서도 당신이 왕인 것처럼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강한 편이 아니라 옳은 편에 서야 합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될 것처럼 보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아도니야의 편에 섰지만,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혹시 하나님의 뜻은 저버리고 무조건 강한 편, 다수의 편에 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옳은 편에 서길 원하십니다. 항상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겸손한 믿음과 영적 통찰력을 가져야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높이며 겸손하면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항상 겸손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아도니야를 보면서 스스로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을 인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받을 상급을 기대함으로 오늘을 사는 겸손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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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4-01)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전한 복음

사도행전 14장 1-18절


사람들은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갈구합니다. 더불어 이들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이나 기적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영광과 칭송을 구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것 또한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충돌질해서 핍박함하게 만들어 그곳을 떠나게 되고 이고니온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청중의 반응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비슷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믿기도 했지만, 적대적인 그룹들도 표적과 기사를 보고도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치려합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루스드라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이고니온에서의 복음 전파(1-7)

복음이 전해질 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환영과 핍박입니다. 복음 증거의 현장에는 은혜와 감격뿐만 아니라 핍박의 역풍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들은 핍박과 방해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대히 구원의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 일행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이러한 현상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1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여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1-7)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지만, 박해 때문에 복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복음은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이번에 그들이 들어간 곳은 안디옥에서 약 140km로 떨어진 이고니온 지역입니다. 앞 본문을 통해서 복음을 선명하게 전할 때, 반응이 환대와 반대가 있음을 살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와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이고니온(1-4)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이고니온Iconium으로 이동합니다.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해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명성과 위엄은 로마 통치 시대에 크게 성장했습니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이 도시에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 자기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클라우디코니움(Claudiconium)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에는 원주민 브리기아인과 셀레우코스 통치 기간(주전 312-65년)에 이주해 온 헬라인과 유대인, 그리고 최근 물려온 로마 식민주의자들이 뛰셖여 살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 도착하여 ‘함께’ 유대인의 회당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함께’로 번역된 헬라어는 ‘카타 토 아우토(κατα τα αυτο)’입니다. ‘함께’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평소와 같이’(NIV: as usual)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유대인의 회당을 찾은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유대인들의 완악함으로 인해 바울은 이미 이방인들에게로 선교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행 13:46). 그런데 지금 바울이 다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는 모습을 누가는 보여줍니다. 이는 바울이 아직도 동족 유대인들을 향한 기대와 마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으로 인해 유대인과 헬라인의 허다한 무리가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1).

하지만 반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순종하지 않은 유대인 무리와도 맞닥뜨립니다. 그들은 극한 반대로 이방인들의 마음까지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에게 악감을 품게 했습니다(2). 바울과 바나바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래 있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래 있어’(멘 운, μεν αυν)라는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적인 열정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의 핍박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고니온에 계속해서 머물고,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때로는 발에서 티끌을 떨어버리기도 했지만,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근본적으로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일하셨던 방식은 그들이 전하는 말에 신빙성을 더 해주기 위한 ‘표적과 기사’를(세메이아 카이 테라타 σεμεια και τερατα) 행하셨습니다(4). 신약성경에서 ‘기사’(τερατα)는 항상 ‘표적’과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역에 개입하셨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누가가 이고니온에서 일어났던 ‘표적과 기사’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표적과 기사’로 나타날 수 있음을 결코 소홀히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다는 사실보다 ‘표적과 기사’가 두 사도들이 입으로 전했던 복음의 내용을 증언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 무게를 둡니다. 초자연적 현상 자체를 복음의 능력으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표적과 기사가 말씀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해볼 것은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지칭합니다(1,4).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 두 사람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지금까지 ‘사도’라는 칭호를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의 직전 제자들이 아닙니다. 좁은 의미에서 그들은 사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13:1에 의하면, 바울과 바나바는 ‘선지자 혹은 교사’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사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과 관계없이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의 직제가 명확하게 구분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마도 초대교회는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직제(office)보다 기능(function)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럼에도 ‘사도’로 부르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바울과 바나바를 열두 사도 속에 포함시키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까지 제한적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행을 깨고 처음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른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3)라고 표현한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주 예수님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는 합법적인 증인임을 분명히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고, 배척하는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두 가지입니다. 복음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복음을 대적하게 됩니다. 이고니온에서 무리가 나뉘었다고 말합니다(4).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유대인들 편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이로써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일임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복음 앞에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기적과 표적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무너뜨립니다.

(2)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이고니온(5-6)

복음을 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믿었지만, 믿지 않은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선동해서 약감을 품게 하였습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적대적인지를 보여줍니다(5). 그들은 사도들을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돌로 치려했습니다. 이처럼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지만, 어둠에 있는 자들은 반대로 빛을 끄려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박해를 예수님의 고난과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사건과 연결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예언대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실 때 모욕을 당하셨습니다(눅 18:32; 22:63; 23:35,39). 즉 바울과 바나바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이고, 이 고난은 곧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음모를 알고 즉시 루가오니아의 두 도시 루스드라와 더베Lystra and Derbe의 인근 지방으로 피신했습니다(6).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남쪽으로 약 29km, 더베는 동남쪽 방향으로 약 74km 각각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인근 지역에서 복음을 계속 전패했습니다.

(3)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7)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복음 전하는 일 때문에 생명을 위협하는 일까지 있었지만, 그들은 그러한 일에 굴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오래 있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의 치유 사역과 대소동(8-18)

사역자에게 있어서 박해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자기우상화의 유혹입니다. 자기우상화의 유혹은 복음 증거자들을 넘어뜨리는 사탄의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자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어지럽게 하는 과도한 칭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헤롯은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는 백성의 거짓 환호에 교만하여 죽음의 심판을 받았지만(행 12:23),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만 누리실 수 있는 영광을 조금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8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11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8-18)

바울과 바나바는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성 근처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했지만, 여기서 행한 선교 사역에 대해서는 주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못 걷는 자를 고친 이야기(8-10),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했던 이야기(11-15a), 그리고 이에 대한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을 소개하는 이야기(15b-18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⑴ 못 걷는 사람을 고친 바울(8-10)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는 초자연적 치유 사역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표적과 기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보조적 도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기적은 의도적으로 계산된 선교 방식이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 마음에 가지고 있었던 구원에 대한 열망에 바울이 적극적으로 반응했을 뿐입니다. 그가 가졌던 믿음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7절은 작은 실마리를 던져줍니다. 비록 문맹률이 높고 미신적 환경에 쉽게 노출되어 있었지만, 복음은 듣는 사람들에게 구원 얻을 믿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더 분명하게 표현해서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적어도 그 사람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헬라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루스드라에서도 치유의 기적에 우선하여 복음 선포가 있었습니다(7). 그곳에서 일어난 기적의 배경에는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9). 바울은 이 사람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명하여 그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중풍병자가 들것에 실린 채 지붕에서 내려졌을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죄 사함을 선포하고 치유하신 사건을 상기시켜 줍니다(눅 5:19-20). 또한 사도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한 후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행 3:7). 바울은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만 했을 뿐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즉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⑵ 루스드라 사람들의 반응(11-15a)

바울이 행했던 기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기적을 행한 바울과 바나바를 보면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을 인간의 형상으로 내려온 두 신들의 이름으로 바나바는 ‘제우스’라고, 연설자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에게 제우스는 신과 인간의 아버지요, 허메는 제우스의 아들이자 동시에 신들의 사자였습니다. 성문 밖에 있는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은 급히 황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화서 무리와 함께 두 사람에게 제사하려고 한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합니다(11).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생겨난 이유에 대한 작은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루가오니아 지역은 아나톨리아 원주민들의 거주 지역으로 헬라어가사되지 않던 곳이다. 반면에 바울과 바나바는 지금까지 헬라어가 통용되던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해왔습니다. 당연히 바울의 복음 선포는 헬라어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런 전도의 결과로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은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반대로 헬라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사람의 모습을 한 신들의 방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이상한 행동에 몹시 당황한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면서 외쳤습니다(14).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은 매우 신속하고 적절했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으며 무리 가운데로 뛰어들어 그들을 제지했습니다. 그리고 치유의 능력은 자신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분명히 설교합니다.

⑶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15b-18)

루스드라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은 오히려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였습니다. 14-18절에 기록된 바울의 설교는 사도행전 17:22-31과 매우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향한 바울의 메시지가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최초의 설교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 가운데 뛰어든 바울과 바나바는 일차적이 목적은 원주민이 그들에게 제사 드리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15). 그리고 최종적인 목적은 루스드라 원주민이 돌이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데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향해 자신들이 하는 일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5)고 권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제우스와 헤르메스 같은 신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만물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역사와 자연의 현상 속에 섭리하고 ㄱ역사하시는 주권자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께서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라고 설명합니다(16). 이것은 사도행전 17:30의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라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각 종족아 자기 뜻대로 우상을 섬겨도 죄 없는 것으로 허용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방인 역시 자연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으므로 하나님을 몰라서 경배하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 1:20-21). 하나님께서는 끈질긴 인내로 참아 오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는 17:30에 ‘알지 못하던 시대’였으며, 본문 16절의 ‘지나간 세대’입니다.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전의 구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이방 나라들로 하여금 각기 제 길로 가게 방임하신 시대가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인해 옛 시대가 끝나고 모든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는 새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마 28:19-20; 눅 24:47; 행 1:8).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새 시대의 도래를 온 세상에 공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을 통해 이제 각 나라가 그들의 우상에서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열방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었습니다(17; 17:30).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증거를 열방 나라에 남겨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땅에 비가 내려와 사람들이 풍부한 곡식을 거두고 기쁨으로 음식을 나누는 가운데 얻는 마음의 만족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친히 베푸시는 자신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비를 통한 각종 식물의 결실과 추수, 이것을 향유하는 인간의 삶은 하나님이 만물을 붙들고 인간의 유익을 위해 선한 손길로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자연 섭리를 이용해 그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 회당에서 성경을 활용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던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복음의 사람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약해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매우 강합니다. 또한 강력해져야만 합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이겨내고, 어떤 유혹도 이겨내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승리하는 복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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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3-04)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사역한 결과

사도행전 13장 44-52절


 

복음을 전하는 길은 어떤 길이 있습니까? 순탄하게 복음을 받아드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항상 좋은 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험하고, 힘겨운 길도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행복을 만나는 길입니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에게 영적 호기심을 주었습니다. 대부분 시민들이 다음 안식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회당에 모여들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히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의 회심자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유대인들의 시기심아 질투심을 자극하게 되어 사역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안디옥에서 쫓겨납니다. 하지만 이에 복음은 믿음으로 반응한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갑니다.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44-45)

신앙에 있어서 시기심은 독약입니다. 버려야 할 독버섯입니다. 그래서 시기심은 버려야합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들으려고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시기심에 불탔습니다. 바울의 사역을 비방하고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자신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44-45)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일행들은 계속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다시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 안식일에 안디옥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회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44절에 기록된 유대인들은 아마도 유대인 지도자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이 상황이 전혀 달갑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이 바울에게 적대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는 그들의 적대적인 태도를 45절부터 구체화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의 적대적인 반응이 바울이 전한 메시지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전체적인 흐름을 볼 때, 누가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적대적으로 바뀐 이유에 대해 본문 안에서 간단하지만 명확하게 기록합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45).

유대인 지도자들은 수많은 이방인 무리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회당으로 나온 것을 보자 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혔고, 바울의 설교에 대해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헬라어 ‘가득하다’는 ‘에플레스데산’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사도행전 13:52에서 제자들이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 ‘에플레룬토’와 의미상 매우 유사합니다. 누가는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표현할 때에 이 동사를 함께 사용합니다.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유대인 지도자들과 이방인들의 모습을 대비시킵니다. 적대적인 유대인 지도자들은 시기로 가득한 모습을 보였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인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심한 이방인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세속적인 욕심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유대인 지도자들이 시기심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은 그들 역시 유대교를 전하려는 열심을 가지고 이방인들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가정하게 합니다. 그들은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과 헌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 눈에 바울과 바나바는 동역자가 아니라 그들이 수고하여 얻은 결과물을 한순간에 빼앗아 간 자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결국 시기심에 사로잡힌 유대인 지도자들은 복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복음의 걸림돌이 되는 어리석은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열정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열심은 있었지만, 그들은 지식이 없어 망하게 되었습니다(롬 10:2).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46-49)

위기는 두려움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새로운 소명의 눈을 뜨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하나님꼐서 세상을 주관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막에 물을 흐르게 하시고 길을 여시며 꽃을 피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46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46-49)

이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소식을 유대인들이 스스로 거부했기에 그들 대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유대인이 거부한 복음은 안디옥을 넘어 그 지방 방방곳곳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방인들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안디옥 전역에 두루 복음이 퍼졌습니다.

(1)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주장함(46-47)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은 과거 조상들의 잘못을 되풀이합니다. 그들은 이미 바울의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인들의 무지와 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를 들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로 확장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들이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임을 자처하는 것입니다(46). 이에 대한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그들은 이사야 49:6을 인용하면서 이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수혜자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되는 이유가 유대인의 태도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후에도 바울은 계속해서 유대인들로부터 거절당하고 이방인 선교를 위해 나아가는 패턴을 따릅니다(행 18:8; 28:28). 이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요 선교사로 활동합니다. 이사야 49:6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학적으로 이사야 49:6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메시지를 포함합니다. 사도행전 13:47의 상황에서 그 ‘한 사람’은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가로막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 사람 바울과 바나바의 순종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2) 복음을 듣고 회심하는 이방인들(48-49)

바울과 바나바의 선포에 대한 이방인들의 반응은 유대인들의 반응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고 회심합니다. 그들을 통해 주의 말씀은 계속해서 그 지역의 다른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갑니다. 가장 이상적인 선교의 모델입니다.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지! 여기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누가가 이 이야기에서 예정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표현을 통해 누가는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한 구원을 나타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거절 앞에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훗날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 될 것입니다.

 

이고니온으로 이동하는 선교사들(50-52)

우리가 죄사함의 감격과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의 복음 속에 머물러 있으며 자연스럽게 이 기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여건에 의해 빼앗길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게서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으키시는 신적 축복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50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1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50-52)

유대인 지도자들의 반응은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멸망으로 인도하는 최악의 부류입니다. 누가는 그들이 취한 두 가지의 비열하고 어리석은 방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첫째, 유대인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고 이용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여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이용했습니다. ‘선동하다’라는 ‘누군가의 감정을 자극한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극할 때 진실을 그대로 알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각종 비방과 거짓 정보를 이용하여 사람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경건한 이방인 귀부인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고 그들의 감정을 선동적으로 자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방인 귀부인들을 속임으로써 그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도 바울 일행에게 타격을 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죄질이 아주 나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경계해야 할 모습입니다.

둘째, 유대인 지도자들은 행정 관리들을 움직였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한 지역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지위를 이용하여 행정 관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경건한 귀부인들’은 이방인들 가운데 유대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서, 그 지역의 유지들을 남편으로 두고 있는 여인들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경건한 귀부인들’을 선동하고 그녀들의 남편들을 움직여 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고 추정하게 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해진 종교와 세속 정치의 야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세속 지도자들을 이용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비열한 모습에 단호하고도 분명한 태도로 맞섭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합니다(51). 51-52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도록 힘과 은혜를 더하시는 상황을 요약적으로 보여줍니다. 누가는 기둥과 같은 영적 지도자들인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났지만, 남아 있는 제자들이 오히려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기록합니다. 52절의 제자들은 새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비록 이제 막 복음을 받아들인, 영적으로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였지만 그들에게는 성령으로 인해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8:8에서 복음이 전해진 결과로 큰 기쁨이 있었음을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복음이 선포된 결과는 기쁨과 담대함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의 방해와 핍박으로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반대와 핍박은 있기 마련입니다. 복음에 대한 반대와 박해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가 아무리 열악한 조건 속에 갇혀 있어도 하나님의 일은 지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뤄 가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려 기쁨과 성령의 충만을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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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3-03)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사역을 진행

사도행전 13장 32-43절


복음은 지속해서 반복해서 전파되어야 합니다. 이미 믿는 자에게도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시지만, 하나님께서 누구인지, 그분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존귀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울타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설교합니다. 그는 구약의 약속을 통해 선조들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동시에 약속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람들이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더 나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다시 돌이키도록 선포합니다.

 

약속의 성취(32-3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사역은 우연이나 우발적인 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 예수님을 약속하셨고, 때가 차매 그 약속을 이루셨는데, 그 성취를 신약에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백 년, 천 년의 간격을 두고 구약과 신약으로 기록되었지만, 그 자체가 우리 신앙의 확실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32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32-37)

지금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어느 한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는 ‘언약과 약속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바울의 연설은 부활 증언으로 바뀝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역사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역사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역사’인 부활은 이미 성경(시편, 선지서)에서 증언한 바 있습니다.

바울은 그와 그의 동료들이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사도들과 동일하게 ‘복음을 전한다’라고 말합니다(31). 그 내용은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한다는 것입니다(32), 그 ‘복음’의 내용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인데,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그들의 [조상들의] 자녀들에게 이루셨다’(32-33a)고 소개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바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무엇이었는지,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33-37절까지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셨던 약속의 성취를 바울이 복음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복음’에 대해 처음 듣는 이야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과연, 복음과 부활이 무슨 연관성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이곳에서 두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말하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이 약속의 성취가 될 수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약속은 ‘다윗에게 한 약속’을 말합니다(참조 23).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 7:12-14)

그러면 이 약속과 부활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부활이 이 약속의 어느 곳에 위치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으로써(23; 참조 롬 1:3)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봅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리스도의 ‘육신적 나심’은 이전 왕들의 탄생과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스라엘 왕을 나열하지 않고 더 근본적인 하늘의 선언을 지적합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일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부활에 대한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 세 곳에 나와 있는 본문을 인용합니다. 시편 2편과 이사야 55장 그리고 시편 16편입니다.

① 시편 2편 인용

시편 2편 7절에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너를 낳았도다’라는 것이 어떻게 부활시킨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시편 2편은 이스라엘 왕을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로 등극하게 하면서 선언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낳았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언이므로, 분명 생물학적인 출생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상의 한 인간, 이스라엘 총회의 한 형제가 하나님의 메시아로 ‘높아짐’ 또는 ‘영화롭게 됨’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부활의 새로운 개념이 있습니다. 즉 바울은 부활을 영화(승귀)와 유기적 통일체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왜 시편 2:7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거로 보는지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앞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출애굽부터 다윗 왕조까지의 역사를 ‘왕의 오심’으로 시작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세례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를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존귀한 존재로 소개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시요. 통치자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왕이십니까? 그리스도는 부활, 생명의 나라, 율법과 시편과 선지자 이후에 올 새 시대의 통치자로 ‘나신’ 것입니다.

② 이사야서 55장 인용

이어서 바울은 이 부활이 다윗에게 한 약속의 궁극적인 모습이며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출현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는데, 그가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가르쳤다고 말합니다(34). 바울에 따르면, 이것을 이사야와 다윗이 증언합니다.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사 55:3)

따라서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는 다윗에게 약속한 확실한 은혜를, 썩음을 당하지 않을 주의 거룩한 자는 다윗이 아니라 부활한자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실을 역사로부터 증명합니다. 다윗은 분명 자기 시대를 섬기다가 죽어 묻히고 썩음을 당하였습니다.

만일 이사야의 예언이나 시편의 예언이 다윗을 가리킨 것이었다면, 그 예언들은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참조, 29절). 그러므로 구약에서 ‘거룩한 것’ 또는 ‘거룩한 자’는 다른 이를 가리켜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후손 예수. ‘주의 거룩한 자’, ‘하나님이 살리신 이’를 가리킵니다(37).

③ 시편 16편 10절 이용

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편 16:10)

바울은 사도행전 13:16-31가지의 설교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약속이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선포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지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예수였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오심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 약속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비시 디아 안디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세 개의 구절들(시 2:7: 16:10: 사 55:3)을 인용합니다. 모두가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그 가운데 시편2:7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약속이지만, 나머지 두 구절들(시 16:10; 사 55:3)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약속입니다. 바울은 메시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설교합니다. 바울 설교의 핵심은 예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놀라운 약속의 성취가 부활이라고 바울은 생각한 것이다.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신 그 하나님을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냐고 바울은 도전합니다. 적어도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바울은 이 기쁜 소식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원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 청중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우면서도 감격적이었을지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들도 역시 아브라함의 약속에 해당되는 사람들임을 밝힙니다(32).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약속의 혜택이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대될 수 있음을 바울은 선언합니다.

 

복음으로의 초대와 반응(38-41)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힘입어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 말씀의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먼저 자신이 말씀에 힘입어 일어날 때, 말씀으로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함께 말씀을 보며 힘을 내자고, 함께 기도로 길을 찾자고 권면하는 그 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38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38-41)

바울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초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 사함을 얻을 기회입니다. 이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죄로부터의 자유를 줄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으로 절망하던 자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소망을 약속합니다. 특히 바울은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39)과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을 대조해서 설명합니다. 율법의 무능함과 믿음의 효력을 서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나가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들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 역시 좋은 모델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관심 보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말을 청중과 나누었을까? 아마도 바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들은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더불어, 대화를 계속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청중의 질문에 대답했을 것입니다. 이는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바른 모습입니다. 성도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려는 노력과 헌신이 목회자들에게 요구된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가질 수 있는 영적 궁금증들에 대해 꾸준하면서도 따뜻한 태도로 성실하게 답하려는 자세가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합니다.

바나바의 헌신에 주목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설교는 바울이 했으며, 청중의 관심도 바울에게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중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청중을 격려하고 도전하는 일에는 두 사람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바울의 일행 중 한 사람으로 격하되어버린 바나바였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기꺼이 동역하고 있습니다. 동역자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누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감동이 되었든지, 예수 그리스도적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최선의 모습는 것이 증인의 모습이다. 아마도 이런 바나바의 모습은 바울에게 큰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안타깝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설교를 끝맺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하박국 1:5은 선지자의 경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이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선지자는 이런 이스라엘 민족의 어리석음에 대해 신랄하게 경고하였습니다. 바울이 하박국 1:5절을 인용한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려 함입니다(40). 즉,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초대에는 항상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거절하는 자에게 임할 진노라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반응을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13:26-27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반응과는 정반대로 청중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바울의 설교를 듣길 원했다. 혹은 강력하게 권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로서, 회중의 마음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바울의 설교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는 바울과 바나나를 따르는 코루쎄오dKOAcukko)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따르는 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의미는 제자가 스승을 따른다는 의미와 같다(마 9:9; 막 1:18; 눅 5:11).

바울과 바나바는 청중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를 권면했습니다. 설교 사역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두 사도들이 잊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설교자들을 종종 위험에 빠트립니다. 청중의 긍정적인 반응을 마치 자신의 성공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설교자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말씀을 깨닫지도 순종할 수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청중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래 순종하기를 가르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들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을 보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말을 청중과 나누었습니까? 아마도 바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들은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더불어, 대화를 계속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 은 청중의 질문에 대답했을 것입니다. 이는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바른 모습입니다. 성도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려는 노력과 헌신이 목회자들에게 요구된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가질 수 있는 영적 궁금증들에 대해 꾸준하면서도 따뜻한 태도로 성실하게 답하려는 자세가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합니다.

바나바의 헌신에 주목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설교는 바울이 했으며, 청중의 관심도 바울에게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중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청중을 격려하고 도전하는 일에는 두 사람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바울의 일행 중 한 사람으로 격하되어 버린 바나바였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기꺼이 동역하고 있습니다. 동역자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누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감동이 되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증인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런 바나바의 모습은 바울에게 큰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직전에 바나바와 크게 다투고 서로 다른 선교팀을 꾸리게 됩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1:15-18에 나타난 바,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은 바나바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빌립보서 1:18). 누가 주목을 받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결론부 (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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