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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3-04)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사역한 결과

사도행전 13장 44-52절


 

복음을 전하는 길은 어떤 길이 있습니까? 순탄하게 복음을 받아드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항상 좋은 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험하고, 힘겨운 길도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행복을 만나는 길입니다.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사람에게 영적 호기심을 주었습니다. 대부분 시민들이 다음 안식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회당에 모여들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담대히 복음을 전하여 이방인의 회심자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유대인들의 시기심아 질투심을 자극하게 되어 사역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안디옥에서 쫓겨납니다. 하지만 이에 복음은 믿음으로 반응한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갑니다.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44-45)

신앙에 있어서 시기심은 독약입니다. 버려야 할 독버섯입니다. 그래서 시기심은 버려야합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들으려고 몰려드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시기심에 불탔습니다. 바울의 사역을 비방하고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자신과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44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45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44-45)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일행들은 계속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안디옥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다시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다음 안식일에 안디옥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기 위해 회당으로 모여들었습니다.

44절에 기록된 유대인들은 아마도 유대인 지도자들을 의미할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이 상황이 전혀 달갑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이 바울에게 적대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누가는 그들의 적대적인 태도를 45절부터 구체화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의 적대적인 반응이 바울이 전한 메시지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전체적인 흐름을 볼 때, 누가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적대적으로 바뀐 이유에 대해 본문 안에서 간단하지만 명확하게 기록합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45).

유대인 지도자들은 수많은 이방인 무리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 회당으로 나온 것을 보자 심한 질투심에 사로잡혔고, 바울의 설교에 대해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헬라어 ‘가득하다’는 ‘에플레스데산’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사도행전 13:52에서 제자들이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했다고 표현할 때 사용된 단어 ‘에플레룬토’와 의미상 매우 유사합니다. 누가는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표현할 때에 이 동사를 함께 사용합니다.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유대인 지도자들과 이방인들의 모습을 대비시킵니다. 적대적인 유대인 지도자들은 시기로 가득한 모습을 보였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아들인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심한 이방인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세속적인 욕심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유대인 지도자들이 시기심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은 그들 역시 유대교를 전하려는 열심을 가지고 이방인들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가정하게 합니다. 그들은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 많은 노력과 헌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 눈에 바울과 바나바는 동역자가 아니라 그들이 수고하여 얻은 결과물을 한순간에 빼앗아 간 자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결국 시기심에 사로잡힌 유대인 지도자들은 복음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복음의 걸림돌이 되는 어리석은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열정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열심은 있었지만, 그들은 지식이 없어 망하게 되었습니다(롬 10:2).

 

말씀에 대한 유대인의 반응(46-49)

위기는 두려움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새로운 소명의 눈을 뜨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하나님꼐서 세상을 주관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막에 물을 흐르게 하시고 길을 여시며 꽃을 피우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46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47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48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49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46-49)

이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소식을 유대인들이 스스로 거부했기에 그들 대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유대인이 거부한 복음은 안디옥을 넘어 그 지방 방방곳곳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방인들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때문에 안디옥 전역에 두루 복음이 퍼졌습니다.

(1)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을 주장함(46-47)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은 과거 조상들의 잘못을 되풀이합니다. 그들은 이미 바울의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인들의 무지와 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를 들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로 확장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을 거절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들이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임을 자처하는 것입니다(46). 이에 대한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그들은 이사야 49:6을 인용하면서 이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수혜자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향하게 되는 이유가 유대인의 태도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후에도 바울은 계속해서 유대인들로부터 거절당하고 이방인 선교를 위해 나아가는 패턴을 따릅니다(행 18:8; 28:28). 이제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요 선교사로 활동합니다. 이사야 49:6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학적으로 이사야 49:6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 메시지를 포함합니다. 사도행전 13:47의 상황에서 그 ‘한 사람’은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가로막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 사람 바울과 바나바의 순종을 통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2) 복음을 듣고 회심하는 이방인들(48-49)

바울과 바나바의 선포에 대한 이방인들의 반응은 유대인들의 반응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고 회심합니다. 그들을 통해 주의 말씀은 계속해서 그 지역의 다른 사람들에게로 퍼져나갑니다. 가장 이상적인 선교의 모델입니다.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있는지! 여기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누가가 이 이야기에서 예정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표현을 통해 누가는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한 구원을 나타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거절 앞에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훗날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 될 것입니다.

 

이고니온으로 이동하는 선교사들(50-52)

우리가 죄사함의 감격과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은혜의 복음 속에 머물러 있으며 자연스럽게 이 기쁨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이 기쁨은 세상의 여건에 의해 빼앗길 수 없습니다. 이 기쁨은 하나님게서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으키시는 신적 축복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50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51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52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50-52)

유대인 지도자들의 반응은 매우 실망스럽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까지도 멸망으로 인도하는 최악의 부류입니다. 누가는 그들이 취한 두 가지의 비열하고 어리석은 방식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첫째, 유대인 지도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고 이용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여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이용했습니다. ‘선동하다’라는 ‘누군가의 감정을 자극한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극할 때 진실을 그대로 알리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각종 비방과 거짓 정보를 이용하여 사람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경건한 이방인 귀부인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고 그들의 감정을 선동적으로 자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방인 귀부인들을 속임으로써 그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도 바울 일행에게 타격을 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죄질이 아주 나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경계해야 할 모습입니다.

둘째, 유대인 지도자들은 행정 관리들을 움직였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한 지역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책임을 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지위를 이용하여 행정 관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경건한 귀부인들’은 이방인들 가운데 유대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로서, 그 지역의 유지들을 남편으로 두고 있는 여인들이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경건한 귀부인들’을 선동하고 그녀들의 남편들을 움직여 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고 추정하게 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행해진 종교와 세속 정치의 야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세속 지도자들을 이용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비열한 모습에 단호하고도 분명한 태도로 맞섭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발의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향합니다(51). 51-52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도록 힘과 은혜를 더하시는 상황을 요약적으로 보여줍니다. 누가는 기둥과 같은 영적 지도자들인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났지만, 남아 있는 제자들이 오히려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기록합니다. 52절의 제자들은 새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비록 이제 막 복음을 받아들인, 영적으로 갓 태어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였지만 그들에게는 성령으로 인해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8:8에서 복음이 전해진 결과로 큰 기쁨이 있었음을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복음이 선포된 결과는 기쁨과 담대함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의 방해와 핍박으로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반대와 핍박은 있기 마련입니다. 복음에 대한 반대와 박해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우리가 아무리 열악한 조건 속에 갇혀 있어도 하나님의 일은 지체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뤄 가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려 기쁨과 성령의 충만을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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