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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4-02)


1차 선교 여행을 마친 바울

사도행전 14장 19-28절


 

텔레비전 ‘안녕하세요?’라는 프로그램에 결혼한 젊은 여성이 출현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결혼해 자녀를 낳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남편에게 모든 것을 물어야만 일을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아마 성장할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해주어서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결정 장애’로 성장한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킵니다. 마치 한 알의 씨앗과 같습니다. 이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싹을 내고 자라서 큰 나무로 자라고, 성장한 나무는 시절을 따라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복음의 씨앗이 심령 안에 떨어지면 그 사람을 성장시키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성장시킵니다.

 

 

  •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은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듭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한 일도 있었지만,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과 바나바는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유대인들의 원정 핍박(19-21a)

 

하나님 나라가 확장하면 할수록 사단의 왕국이 무너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의 복음이 확장되어 가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복음이 전파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때로는 유혹으로 또 때로는 폭력으로 방해하지만, 절대로 복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19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제자들이 둘어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19-21a)

 

본문에서는 선교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광하던 무리들이 급변하여 바울을 향해 돌을 던진 모습을 소개합니다. 다음 장에 있는 지도는 바울 일행의 1차 전도 여행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⑴ 돌에 맞아 죽은 바울(19)

 

바울 일행들이 복음을 전하자 루스드라 사람들이 복음을 잘 이해했겠습니까?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대대적으로 열광했던 것만큼 하나님을 열광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바울과 바나바의 복음 전파를 집요하게 추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많은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바울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살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에 있는 바울 일행을 찾아왔습니다.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찾아온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유대교를 흔들 만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들을 바울 일행을 가만히 두면 유대교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온 유대인들은 루스드라 시민들에게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도 충동질을 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무튼 사람들을 성공적으로 현혹시켰습니다. 아마 바울을 박해할 때, 간섭하지 말라고 설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들이 이미 이고니온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쳐 죽이려고 계획했다가 실패했었습니다(5). 먼 이곳까지 달려온 것은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며 각오를 다졌을 것입니다. 전에 실패한 일을 성사시키려 왔습니다.

 

결국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은 바울을 돌로 쳐 죽인데 성공했습니다(19). 이것은 사법적인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불법적인 형벌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으로 추앙하던 사람을 오늘은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미리 빼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스데반이 돌아 맞아 죽을 때 외면하셨던 하나님, 그 자리에 있었던 바울, 바울은 스데반을 향해 돌을 하나쯤은 던졌을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동족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고 있습니다. 단순히 경고하려고 던진 돌이 아니라 죽이려고 작정하고 던진 돌이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맞았던지 이미 죽은 줄 착각하고 성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이전에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해서 끌어냈습니다. 마치 스데반 집사가 거짓 증인들에 의해 성 밖으로 끌려가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을 본 듯합니다(사도행전 7:58). 이제 바울도 죽도록 맞은 후, 죽은 줄 알고 밖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보호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모두가 바울처럼 돌에 맞는 것도 아니고, 혹 돌에 맞는 것과 같은 핍박을 받더라도 바울처럼 모두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의 생명을 지켜주신 것으로 해석합니다(19).

만약 유대인 대적자들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바울은 정말로 죽음에 이르렀을 수도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바울을 육체적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육체적 고통에 몸부림쳤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돌로 칠 만큼 미워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적개심을 품은 것입니다.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개심이 극에 달했음을 알려줍니다. 이런 상황은 회심하기 전 바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유대인들이 보여주는 적개심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쫓아갔던 바울의 잘못된 열심과 거의 흡사합니다(사도행전 9:1-2). 적대적인 유대인들의 잘못된 열심으로 인해 돌에 맞아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 때, 바울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끔찍했던 바울의 경험은 바울의 소명 의식을 더욱 강하게 했을 것입니다.

 

⑵ 회복된 바울 다시 루스드라(20)

 

사도 바울을 수습해준 것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에 의해 죽은 줄 알고 던져진 바울을 제자들은 극진하게 간호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깨어나길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제자’라는 표현은 이미 루스드라에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생겼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돌을 맞을 때는 나서지 못할 만큼 소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을 극진히 간호하자 바울이 일어났습니다. ‘일어났다’는 것은 죽었던 바울이 부활한 것같이 그의 행동을 묘사합니다.

 

기력을 회복한 바울은 놀랍게도 다시 루스드라 성으로 들어갔다고 소개합니다(20). 루스드라 성에는 그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울의 결정은 무모해 보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밤중에 조용히 루스드라로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죽음의 위협이 남아 있지만, 반대로 돌아봐야할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죽음을 면하기는 했지만, 형제들의 도움이 절실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죽으면 죽이라는 각오로 복음 사역에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4)라고 고백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상황에 놓였는데 바나바는 무사했다는 사실입니다. 왜 바나나가 핍박과 돌에 맞음을 피할 수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앞장서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주된 목표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고, 유대인들이 바울을 공격했을 당시에 바나바가 그 장소에 없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⑶ 더베에서 복음 사역(21a)

 

바울의 복음 사역에 대한 열정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사역을 마친 후,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났습니다. 아마 돌에 맞은 상처가 온전하게 낫지 못한 상태로 떠나갔을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도착한 더베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7). 이곳에서의 사역은 다행히 박해가 없었던 것으로 기록합니다. 아마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로 찾아왔던 유대인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돌아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 바울 일행의 복음 사역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누가 바울의 열정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바울은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온몸이 불타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 바울도 바나바가 필요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좋은 위로자요 동역자였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돌에 맞아 육체적으로 힘들어하는 바울을 도왔을 것이며, 거절당하는 아픔과 수모를 겪은 바울에게 분명 따뜻한 위로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동역하는 선교의 아름다운 모델이 된다. 하나님도 삼위가 함께 서로 동역하십니다. 독불장군처럼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다고 거절하는 것은 좋은 선교의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아픔과 고통에 바나바가 좋은 위로자와 동역자가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함께 세워가는 것입니다.

 

선교지 다시 방문(21b-23)

복음은 그 복음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더 강력한 능력으로 작용합니다. 그 체험된 능력은 복음의 메시지로 확신 가득 찬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그러한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강력하게 전달되어집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능력 있는 복음자가 될 것입니다.

 

21…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21-23)

 

이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바울과 바나바가 새로 태어난 교회들을 돌보는 내용(21-22),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우는 장면(23),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내용(24-28)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⑴ 새로운 교회들을 돌봄(21b-22)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가는 부분입니다. 이 도시들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건재했을 것입니다. 특히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과 바나바는 새로 태어난 교회를 돕기 원했고, 그 도시들의 제자들을 방문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안위보다 새로 태어난 교회가 견고하게 세워지는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인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신생 교회의 제자들을 어떻게 도왔는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①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함

‘굳게 하다’는 사도행전에만 나온데(15:32,41; 18:23), ‘용기를 북돋아주다’, ‘격려하다’라는 뜻으로 모두 교회를 견고하게 하고 사람의 마음을 확고하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당한 핍박에 대한 소식은 제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요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바울은 굳게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음의 상황을 벗어났던 바울의 격려는 제자들에게 큰 위로와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②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고

새로운 신자들에게는 믿음 안에 견고하게 남아있는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머물다’라는 표현은 요한복음 15:1-7을 생각나게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머물다’라는 신약성경에서 22절을 포함해 4회 나타납니다. (εμμε vo)는 신약성경에서 22절을 포함해 4회 나타납니다(행 14:22; 28:30; 갈 3:10; 히 8:9). 지속적으로 한 장소에 꾸준히 머물러 있는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믿음이 가지는 꾸준함과 지속성을 바울이 강조한 것입니다. 믿음은 순간적 혹은 일시적인 열정이 아니다 끝까지 머물러 있는 신앙을 가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③ 환난에 대해 경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 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바울과 바나바는 이 구절에서 복음에 뒤따르는 환난의 필연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환난을 통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고난과 환난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주어지는 선택적 복이라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선물이지만 하나님 나라는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인내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되기 때문입니다.

 

⑵ 교회의 지도자들을 세움(23)

 

사실 바울과 바나바가 초신자들에게 믿음에 대한 요구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그들을 구체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그 일을 위해 장로들을 택하여 세웁니다. 바울이 장로를 택한 방식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로부터 따로 세움을 받았던 방식과 동일합니다. 바로 기도와 금식입니다. 어쩌면 이 방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회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성도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신뢰할 만한 지도자를 세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고, 최종적으로는 그들을 주께 위탁했습니다. ‘위탁하다’는 ‘다른 사람 앞에 누군가를 세우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는 모두 4회 나타납니다(행 14:23: 16:34: 17:3; 20:32), 이 단어는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주의 말씀에 부탁하는 장면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1차 선교 여행 마무리(24-28)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연약해 보이는 지도자를 세워 교회를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경험이 적어보이는 교회의 불완전한 지도들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온전하게 하십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바울과 바나바는 장로들을 주께 맡기고, 자신들이 세운 교회를 가슴에 품고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습니다.

 

24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24-28)

 

바울과 바나바는 각 교회에 세운 장로들을 자기들의 영향력 아래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직접적인 돌봄도 필요하지만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을 파송한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⑴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과정(24-26)

 

이제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지역을 통과해서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항구 동시 앗달리아로 내려갔습니다(24-25). 버가와 앗달리아는 그들이 구브로의 바보에서 처음 도착했던 곳입니다. 아마도 이 두 지역에서 복음을 증거하지 않고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올라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25절에는 두 사람이 두 지역 중 버가에서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앗달리아 항구에서 안디옥 쪽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들에게 복음 전파 사명을 맡기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그들을 위탁했던 곳입니다. 이제 그들은 그 사명을 다 이루고 약 5년 만에 안디옥 교회로 돌아간 것입니다.

 

⑵ 안디옥에서 선교 보고(27-28)

 

이제 1차 선교 여행의 종착지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향합니다. 서사에서 돌아가는 여정은 조금 단순해졌지만, 그들은 복음 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이룬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더 나가 하나님의 은혜가 곧 목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돌아와서 지금까지의 선교에 관한 경과와 앞으로의 기대에 대한 보고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대단하게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설명했습니다. 이 선교 보고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다는 점이었습니다.

한 편,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이기 때문에 두 복음 전도자들이 소아시아 지역에서 얼마나 많은 이방인 개종자를 얻었는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관심을 반영해서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온 사실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선교는 이방인들만 영접한 것이 아니라 적지 않는 유대인들도 구원을 받았습니다(행 13:43; 14:1). 하지만 많은 이방인의 개종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선교 보고는 다음 장에서 심각하게 다루게 될 할례와 이방인의 구원 문제를 준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28).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수록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큰 논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15장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게 될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들이 안디옥에 머물고 있을 때 문제가 불거진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십리의 일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선교 사역에 엄청난 영향을 줄 이 문제가 완전하게 해결된 후에 그들이 2차 선교 여행을 떠나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에게 들어오면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성장하는 속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죄인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더욱 자라서 다른 이를 돌볼 수 있는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들의 삶이 단순해집니다. 바울처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당신은 어느 수준까지 성장했습니까? 오직 사명을 따라서 다른 성도들을 돌아볼 만큼 성숙한 성도들이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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