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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3-03)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사역을 진행

사도행전 13장 32-43절


복음은 지속해서 반복해서 전파되어야 합니다. 이미 믿는 자에게도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시지만, 하나님께서 누구인지, 그분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지속적으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존귀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울타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설교합니다. 그는 구약의 약속을 통해 선조들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동시에 약속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람들이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더 나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다시 돌이키도록 선포합니다.

 

약속의 성취(32-37)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사역은 우연이나 우발적인 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 예수님을 약속하셨고, 때가 차매 그 약속을 이루셨는데, 그 성취를 신약에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백 년, 천 년의 간격을 두고 구약과 신약으로 기록되었지만, 그 자체가 우리 신앙의 확실성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32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32-37)

지금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어느 한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는 ‘언약과 약속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이야기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바울의 연설은 부활 증언으로 바뀝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역사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역사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역사’인 부활은 이미 성경(시편, 선지서)에서 증언한 바 있습니다.

바울은 그와 그의 동료들이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는 사도들과 동일하게 ‘복음을 전한다’라고 말합니다(31). 그 내용은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한다는 것입니다(32), 그 ‘복음’의 내용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인데,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그들의 [조상들의] 자녀들에게 이루셨다’(32-33a)고 소개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바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무엇이었는지,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33-37절까지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셨던 약속의 성취를 바울이 복음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복음’에 대해 처음 듣는 이야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과연, 복음과 부활이 무슨 연관성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이곳에서 두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여기서 말하는 ‘약속’은 무엇입니까?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떻게 이 약속의 성취가 될 수 있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이 약속은 ‘다윗에게 한 약속’을 말합니다(참조 23).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삼하 7:12-14)

그러면 이 약속과 부활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부활이 이 약속의 어느 곳에 위치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으로써(23; 참조 롬 1:3) 약속이 성취된 것으로 봅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리스도의 ‘육신적 나심’은 이전 왕들의 탄생과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스라엘 왕을 나열하지 않고 더 근본적인 하늘의 선언을 지적합니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일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부활에 대한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약 성경 세 곳에 나와 있는 본문을 인용합니다. 시편 2편과 이사야 55장 그리고 시편 16편입니다.

① 시편 2편 인용

시편 2편 7절에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너를 낳았도다’라는 것이 어떻게 부활시킨 것이 될 수 있습니까? 시편 2편은 이스라엘 왕을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로 등극하게 하면서 선언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낳았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선언이므로, 분명 생물학적인 출생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상의 한 인간, 이스라엘 총회의 한 형제가 하나님의 메시아로 ‘높아짐’ 또는 ‘영화롭게 됨’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부활의 새로운 개념이 있습니다. 즉 바울은 부활을 영화(승귀)와 유기적 통일체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왜 시편 2:7을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거로 보는지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앞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출애굽부터 다윗 왕조까지의 역사를 ‘왕의 오심’으로 시작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은 세례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를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존귀한 존재로 소개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왕이시요. 통치자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왕이십니까? 그리스도는 부활, 생명의 나라, 율법과 시편과 선지자 이후에 올 새 시대의 통치자로 ‘나신’ 것입니다.

② 이사야서 55장 인용

이어서 바울은 이 부활이 다윗에게 한 약속의 궁극적인 모습이며 근본적으로 새로운 질서의 출현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는데, 그가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가르쳤다고 말합니다(34). 바울에 따르면, 이것을 이사야와 다윗이 증언합니다.

3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사 55:3)

따라서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는 다윗에게 약속한 확실한 은혜를, 썩음을 당하지 않을 주의 거룩한 자는 다윗이 아니라 부활한자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사실을 역사로부터 증명합니다. 다윗은 분명 자기 시대를 섬기다가 죽어 묻히고 썩음을 당하였습니다.

만일 이사야의 예언이나 시편의 예언이 다윗을 가리킨 것이었다면, 그 예언들은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참조, 29절). 그러므로 구약에서 ‘거룩한 것’ 또는 ‘거룩한 자’는 다른 이를 가리켜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후손 예수. ‘주의 거룩한 자’, ‘하나님이 살리신 이’를 가리킵니다(37).

③ 시편 16편 10절 이용

10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편 16:10)

바울은 사도행전 13:16-31가지의 설교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약속이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선포한 바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지하여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가 예수였음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오심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증거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 약속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비시 디아 안디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세 개의 구절들(시 2:7: 16:10: 사 55:3)을 인용합니다. 모두가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그 가운데 시편2:7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약속이지만, 나머지 두 구절들(시 16:10; 사 55:3)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약속입니다. 바울은 메시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다고 설교합니다. 바울 설교의 핵심은 예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보다 놀라운 약속의 성취가 부활이라고 바울은 생각한 것이다.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무너뜨리신 그 하나님을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냐고 바울은 도전합니다. 적어도 바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바울은 이 기쁜 소식을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원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 청중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우면서도 감격적이었을지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그들도 역시 아브라함의 약속에 해당되는 사람들임을 밝힙니다(32).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약속의 혜택이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대될 수 있음을 바울은 선언합니다.

 

복음으로의 초대와 반응(38-41)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힘입어 일어날 수 있도록 돕는 말씀의 사람이 되길 원한다면, 먼저 자신이 말씀에 힘입어 일어날 때, 말씀으로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함께 말씀을 보며 힘을 내자고, 함께 기도로 길을 찾자고 권면하는 그 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38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38-41)

바울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복음으로 초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 사함을 얻을 기회입니다. 이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죄로부터의 자유를 줄 것입니다. 복음은 율법으로 절망하던 자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소망을 약속합니다. 특히 바울은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39)과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을 대조해서 설명합니다. 율법의 무능함과 믿음의 효력을 서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나가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들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 역시 좋은 모델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관심 보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말을 청중과 나누었을까? 아마도 바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들은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더불어, 대화를 계속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청중의 질문에 대답했을 것입니다. 이는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바른 모습입니다. 성도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려는 노력과 헌신이 목회자들에게 요구된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가질 수 있는 영적 궁금증들에 대해 꾸준하면서도 따뜻한 태도로 성실하게 답하려는 자세가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합니다.

바나바의 헌신에 주목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설교는 바울이 했으며, 청중의 관심도 바울에게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중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청중을 격려하고 도전하는 일에는 두 사람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바울의 일행 중 한 사람으로 격하되어버린 바나바였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기꺼이 동역하고 있습니다. 동역자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누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감동이 되었든지, 예수 그리스도적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최선의 모습는 것이 증인의 모습이다. 아마도 이런 바나바의 모습은 바울에게 큰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안타깝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설교를 끝맺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하박국 1:5은 선지자의 경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이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심판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선지자는 이런 이스라엘 민족의 어리석음에 대해 신랄하게 경고하였습니다. 바울이 하박국 1:5절을 인용한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려 함입니다(40). 즉,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초대에는 항상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거절하는 자에게 임할 진노라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반응을 보였습니다. 사도행전 13:26-27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반응과는 정반대로 청중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바울의 설교를 듣길 원했다. 혹은 강력하게 권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로서, 회중의 마음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바울의 설교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는 바울과 바나나를 따르는 코루쎄오dKOAcukko)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따르는 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의미는 제자가 스승을 따른다는 의미와 같다(마 9:9; 막 1:18; 눅 5:11).

바울과 바나바는 청중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기를 권면했습니다. 설교 사역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두 사도들이 잊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설교자들을 종종 위험에 빠트립니다. 청중의 긍정적인 반응을 마치 자신의 성공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설교자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말씀을 깨닫지도 순종할 수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청중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래 순종하기를 가르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에 반응하는 사람들에 대해 보여주는 태도을 보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였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어떤 말을 청중과 나누었습니까? 아마도 바울의 설교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들은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더불어, 대화를 계속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 은 청중의 질문에 대답했을 것입니다. 이는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바른 모습입니다. 성도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려는 노력과 헌신이 목회자들에게 요구된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가질 수 있는 영적 궁금증들에 대해 꾸준하면서도 따뜻한 태도로 성실하게 답하려는 자세가 이 시대의 목회자들에게 필요합니다.

바나바의 헌신에 주목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설교는 바울이 했으며, 청중의 관심도 바울에게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청중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청중을 격려하고 도전하는 일에는 두 사람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바울의 일행 중 한 사람으로 격하되어 버린 바나바였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기꺼이 동역하고 있습니다. 동역자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누구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감동이 되었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증인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이런 바나바의 모습은 바울에게 큰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직전에 바나바와 크게 다투고 서로 다른 선교팀을 꾸리게 됩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1:15-18에 나타난 바,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은 바나바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빌립보서 1:18). 누가 주목을 받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결론부 (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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