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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4-01)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전한 복음

사도행전 14장 1-18절


사람들은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갈구합니다. 더불어 이들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이나 기적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영광과 칭송을 구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것 또한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충돌질해서 핍박함하게 만들어 그곳을 떠나게 되고 이고니온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합니다. 청중의 반응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와 비슷했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믿기도 했지만, 적대적인 그룹들도 표적과 기사를 보고도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치려합니다. 결국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루스드라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이고니온에서의 복음 전파(1-7)

복음이 전해질 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환영과 핍박입니다. 복음 증거의 현장에는 은혜와 감격뿐만 아니라 핍박의 역풍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꾼들은 핍박과 방해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대히 구원의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 일행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할 때도 이러한 현상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1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2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3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4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5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여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6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7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1-7)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지만, 박해 때문에 복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 복음은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이번에 그들이 들어간 곳은 안디옥에서 약 140km로 떨어진 이고니온 지역입니다. 앞 본문을 통해서 복음을 선명하게 전할 때, 반응이 환대와 반대가 있음을 살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와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이고니온(1-4)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이고니온Iconium으로 이동합니다. 이 지역은 물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해 부유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명성과 위엄은 로마 통치 시대에 크게 성장했습니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이 도시에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 자기 이름을 따서 이 도시를 클라우디코니움(Claudiconium)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곳에는 원주민 브리기아인과 셀레우코스 통치 기간(주전 312-65년)에 이주해 온 헬라인과 유대인, 그리고 최근 물려온 로마 식민주의자들이 뛰셖여 살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 도착하여 ‘함께’ 유대인의 회당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함께’로 번역된 헬라어는 ‘카타 토 아우토(κατα τα αυτο)’입니다. ‘함께’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평소와 같이’(NIV: as usual)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유대인의 회당을 찾은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유대인들의 완악함으로 인해 바울은 이미 이방인들에게로 선교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행 13:46). 그런데 지금 바울이 다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는 모습을 누가는 보여줍니다. 이는 바울이 아직도 동족 유대인들을 향한 기대와 마음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으로 인해 유대인과 헬라인의 허다한 무리가 주 예수님을 영접하는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1).

하지만 반대로 바울과 바나바는 순종하지 않은 유대인 무리와도 맞닥뜨립니다. 그들은 극한 반대로 이방인들의 마음까지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에게 악감을 품게 했습니다(2). 바울과 바나바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래 있어’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래 있어’(멘 운, μεν αυν)라는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적인 열정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의 핍박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고니온에 계속해서 머물고,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 전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때로는 발에서 티끌을 떨어버리기도 했지만,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근본적으로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 일하셨던 방식은 그들이 전하는 말에 신빙성을 더 해주기 위한 ‘표적과 기사’를(세메이아 카이 테라타 σεμεια και τερατα) 행하셨습니다(4). 신약성경에서 ‘기사’(τερατα)는 항상 ‘표적’과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역에 개입하셨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누가가 이고니온에서 일어났던 ‘표적과 기사’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표적과 기사’로 나타날 수 있음을 결코 소홀히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다는 사실보다 ‘표적과 기사’가 두 사도들이 입으로 전했던 복음의 내용을 증언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 무게를 둡니다. 초자연적 현상 자체를 복음의 능력으로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표적과 기사가 말씀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 역시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해볼 것은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지칭합니다(1,4).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가 이 두 사람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지금까지 ‘사도’라는 칭호를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게만 제한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님의 직전 제자들이 아닙니다. 좁은 의미에서 그들은 사도가 될 수 없었습니다. 특히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논쟁은 끊임없이 제기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릅니다. 사도행전 13:1에 의하면, 바울과 바나바는 ‘선지자 혹은 교사’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사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과 관계없이 분명한 것은 초대교회의 직제가 명확하게 구분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마도 초대교회는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직제(office)보다 기능(function)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럼에도 ‘사도’로 부르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바울과 바나바를 열두 사도 속에 포함시키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까지 제한적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이러한 관행을 깨고 처음으로 바울과 바나바를 사도라고 부른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3)라고 표현한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주 예수님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는 합법적인 증인임을 분명히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고, 배척하는 것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반응은 언제나 두 가지입니다. 복음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복음을 대적하게 됩니다. 이고니온에서 무리가 나뉘었다고 말합니다(4).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유대인들 편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습니다. 이로써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일임을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복음 앞에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기적과 표적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무너뜨립니다.

(2)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이고니온(5-6)

복음을 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믿었지만, 믿지 않은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선동해서 약감을 품게 하였습니다.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극적이고 적대적인지를 보여줍니다(5). 그들은 사도들을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돌로 치려했습니다. 이처럼 빛은 어두움을 몰아내지만, 어둠에 있는 자들은 반대로 빛을 끄려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박해를 예수님의 고난과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사건과 연결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예언대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실 때 모욕을 당하셨습니다(눅 18:32; 22:63; 23:35,39). 즉 바울과 바나바가 당하는 고난을 통해 예수님의 사역이고, 이 고난은 곧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의 음모를 알고 즉시 루가오니아의 두 도시 루스드라와 더베Lystra and Derbe의 인근 지방으로 피신했습니다(6).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남쪽으로 약 29km, 더베는 동남쪽 방향으로 약 74km 각각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인근 지역에서 복음을 계속 전패했습니다.

(3)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7)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복음 전하는 일 때문에 생명을 위협하는 일까지 있었지만, 그들은 그러한 일에 굴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오래 있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곳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의 치유 사역과 대소동(8-18)

사역자에게 있어서 박해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자기우상화의 유혹입니다. 자기우상화의 유혹은 복음 증거자들을 넘어뜨리는 사탄의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사역자들의 눈을 가리고 귀를 어지럽게 하는 과도한 칭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헤롯은 자신을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는 백성의 거짓 환호에 교만하여 죽음의 심판을 받았지만(행 12:23),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만 누리실 수 있는 영광을 조금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8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11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15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16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17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18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8-18)

바울과 바나바는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성 근처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했지만, 여기서 행한 선교 사역에 대해서는 주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못 걷는 자를 고친 이야기(8-10),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했던 이야기(11-15a), 그리고 이에 대한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을 소개하는 이야기(15b-18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⑴ 못 걷는 사람을 고친 바울(8-10)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는 초자연적 치유 사역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표적과 기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보조적 도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기적은 의도적으로 계산된 선교 방식이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 마음에 가지고 있었던 구원에 대한 열망에 바울이 적극적으로 반응했을 뿐입니다. 그가 가졌던 믿음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7절은 작은 실마리를 던져줍니다. 비록 문맹률이 높고 미신적 환경에 쉽게 노출되어 있었지만, 복음은 듣는 사람들에게 구원 얻을 믿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더 분명하게 표현해서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적어도 그 사람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헬라어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루스드라에서도 치유의 기적에 우선하여 복음 선포가 있었습니다(7). 그곳에서 일어난 기적의 배경에는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9). 바울은 이 사람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명하여 그 사람을 고쳐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중풍병자가 들것에 실린 채 지붕에서 내려졌을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죄 사함을 선포하고 치유하신 사건을 상기시켜 줍니다(눅 5:19-20). 또한 사도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한 후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행 3:7). 바울은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만 했을 뿐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즉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⑵ 루스드라 사람들의 반응(11-15a)

바울이 행했던 기적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기적을 행한 바울과 바나바를 보면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을 인간의 형상으로 내려온 두 신들의 이름으로 바나바는 ‘제우스’라고, 연설자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에게 제우스는 신과 인간의 아버지요, 허메는 제우스의 아들이자 동시에 신들의 사자였습니다. 성문 밖에 있는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은 급히 황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화서 무리와 함께 두 사람에게 제사하려고 한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합니다(11).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생겨난 이유에 대한 작은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루가오니아 지역은 아나톨리아 원주민들의 거주 지역으로 헬라어가사되지 않던 곳이다. 반면에 바울과 바나바는 지금까지 헬라어가 통용되던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해왔습니다. 당연히 바울의 복음 선포는 헬라어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이런 전도의 결과로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은 치유의 기적을 경험했지만, 반대로 헬라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사람의 모습을 한 신들의 방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이상한 행동에 몹시 당황한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면서 외쳤습니다(14).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은 매우 신속하고 적절했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으며 무리 가운데로 뛰어들어 그들을 제지했습니다. 그리고 치유의 능력은 자신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분명히 설교합니다.

⑶ 바울과 바나바의 반응(15b-18)

루스드라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은 오히려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였습니다. 14-18절에 기록된 바울의 설교는 사도행전 17:22-31과 매우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향한 바울의 메시지가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최초의 설교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 가운데 뛰어든 바울과 바나바는 일차적이 목적은 원주민이 그들에게 제사 드리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 것입니다(15). 그리고 최종적인 목적은 루스드라 원주민이 돌이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데 있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향해 자신들이 하는 일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5)고 권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제우스와 헤르메스 같은 신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만물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역사와 자연의 현상 속에 섭리하고 ㄱ역사하시는 주권자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께서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라고 설명합니다(16). 이것은 사도행전 17:30의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라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각 종족아 자기 뜻대로 우상을 섬겨도 죄 없는 것으로 허용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방인 역시 자연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으므로 하나님을 몰라서 경배하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롬 1:20-21). 하나님께서는 끈질긴 인내로 참아 오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는 17:30에 ‘알지 못하던 시대’였으며, 본문 16절의 ‘지나간 세대’입니다.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전의 구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이방 나라들로 하여금 각기 제 길로 가게 방임하신 시대가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인해 옛 시대가 끝나고 모든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는 새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마 28:19-20; 눅 24:47; 행 1:8).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새 시대의 도래를 온 세상에 공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을 통해 이제 각 나라가 그들의 우상에서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열방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었습니다(17; 17:30).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증거를 열방 나라에 남겨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땅에 비가 내려와 사람들이 풍부한 곡식을 거두고 기쁨으로 음식을 나누는 가운데 얻는 마음의 만족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친히 베푸시는 자신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비를 통한 각종 식물의 결실과 추수, 이것을 향유하는 인간의 삶은 하나님이 만물을 붙들고 인간의 유익을 위해 선한 손길로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자연 섭리를 이용해 그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 회당에서 성경을 활용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던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복음의 사람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약해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매우 강합니다. 또한 강력해져야만 합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이겨내고, 어떤 유혹도 이겨내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승리하는 복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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