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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2-02)


교만한 인생을 심판하신 하나님

사도행전 12장 18-25절


강한 자를 무너뜨리는 건 더 강한 자가 아닌, 강한 자 속에 숨어있는 약한 본성일 때가 많습니다. 자신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덫은 자기 안에 있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하하던 혜롯에게서 왕복을 벗긴 건 교만이 있습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면 언제든 최약자로 전략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천사의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탈옥한 사실을 모르고 있던 군인들은 헤롯 아그립바왕에 의해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실망한 아그립바는 가이사라로 내려가 연회를 베풉니다. 그의 연설을 듣던 백성은 그에게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아부를 합니다. 헤롯은 그 말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가로챈 헤롯에게 즉각적으로 심판의 손을 드십니다.

 

파수꾼을 사형시킨 아그립바(18-19)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 사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성장시켜려 하지만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을 제거하려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항상 자신을 성찰하고 변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으로 변화되어갈 것입니다.

18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9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18-19)

새로운 아침이 밝았습니다. 간밤에 마가라는 요한의 집이 베드로의 출현으로 소동이 일어났지만, 감옥에서는 베드로의 탈출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것을 헤롯의 간부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날이 밝자 그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그들 사이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를 지켰던 경비병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인 후, 그의 탈출이 어떤 음모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그들에게 사형을 집행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죄수의 탈출을 허용한 경비병은 탈옥수가 받아야 했던 동일한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아그립바 왕이 이 로마법을 반드시 그대로 따라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은 그들에게 사형 명령을 내린 후, 이제 절기가 다 끝나면서 행정 수도 가이사랴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큰 절기인 유월절과 무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보냈습니다. 로마의 총독과 함께 예루살렘의 치안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올라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려가는 길은 베드로를 놓친 아쉬운 마음을 안고 갔을 것입니다. 그는 야고보를 죽일 수 있었고 베드로를 투옥시킬 수 있었겠지만, 동시에 베드로를 감옥 안에 계속 둘 수 없었습니다. 죽일 수도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 힘없는 자기 부하들이나 죽여서 화풀이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거나 뜻 밖에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며,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헤롯이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유대’는 좁은 의미에서 유대인의 땅을 의미합니다. 반면 가이사랴는 정치적으로는 유대 지방에 속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유대인의 땅이 아닙니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도시를 설립한 때로부터 시작해 대체적으로 이방인들이 거주하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아그립바 왕이 유대에서 가이사랴로 내려갔다고 언급한 것은 다음 이어지는 장면이 그곳에서 일어난 일임을 말하기 위한 서술적 장치입니다.

 

교만한 아그립바를 심판하심(20-23)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책임져 주십니다. 반대로 자기 주제도 모르고 교만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면 한 나라의 왕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20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20-23)

헤롯 아그립바 왕이 가이사랴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내용을 다룹니다. 그러나 누가는 왜 그런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먼저 설명합니다.

⑴ 주변 나라를 통한 왕권의 위세(20-21)

헤롯 왕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주변 나라들을 제사하면서 성경은 말해줍니다. 본문에서는 대표적으로 두로와 시돈을 나타납니다. 두로와 시돈은 해변에 위치했기 때문에 식량의 많은 부분을 갈릴리와의 무역을 통해 조달해왔습니다. 그래서 헤롯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필요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때로부터 대략 천 년 전 히람과 솔로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열왕기상 5:9-12).

무슨 영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 헤롯 아그립바 왕이 분노하고, 그 지역들과 외교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이러한 이상 기류를 감지하고 그들은 화친 정책을 펼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에 이 두 도시의 외교관들은 헤롯 아그립바 왕의 침소를 맡은 고관인 블라스도를 매수해서 왕의 마음을 살려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왕의 침소를 맡은 신하’는 일반적으로 왕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⑵ 사람들의 경배를 통한 위세(22)

두로와 시돈은 헤롯 왕의 마음을 달려고 시도하다가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가이사랴 지역에 축제가 있었습니다. 이 축제가 가이사랴 설립 기념일에 열렸는지 황제의 생일인 44년 8월 1일에 열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베드로의 탈옥 사건은 거의 1년 전 유월절 때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날 헤롯 왕은 어의(御衣)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들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헤롯 왕의 연설을 들은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아부합니다. 이것은 헤롯 왕이 기대하던 이상의 반응이었습니다. 헤롯은 항상 정통성이 없는 왕이라는 핸드캡(handicap) 때문에 좌불안석이었습니다. 언제 유대인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릴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을 길들이기 위해서 때로는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도 또 때로는 모질게 대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왕권을 잘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백성들이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하니 흥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도 받아서는 안 되는 찬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침상을 맡은 신하 블라스도가 꾸민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외교적인 사안을 상소하기 위해서는 헤롯의 기분이 좋을 때에 내놓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서 그처럼 환소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도 거짓 증인들을 고용하여 재판정에서 ‘바나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게 만들었었습니다.

⑶ 교만한 자에게 내린 심판(23)

이러한 꼼수는 사단의 패배와 교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헤롯 왕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기 몫으로 돌렸습니다. 그 결과 우상숭배자들에게 임하는 결과가 똑같이 임했습니다.

본문에는 ‘주의 천사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라는 표현합니다. 헤롯 왕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신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벌레에게 먹히고 맙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 누가는 혜롯의 죽음이 벌레가 아니라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사자가 심판을 집행합니다. 천사가 실제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바는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는 신성모독적인 행동을 할 경우,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그를 엄벌하신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헤롯의 손에서 베드로를 구원하셨는데, 이번에는 그분이 헤롯을 심판하셨습니다.

이 기록된 내용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도 기록된 사건입니다. 요세푸스는 동일하게 아그립바 왕이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신과 같다는 칭송을 받았지만, 그 신성모독적인 아부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점을 지적합니다. 당시 정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와 관련된 요세푸스의 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헤롯은 가이사의 안녕을 위한 축제라고 생각하며 그를 기념해 연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많은 지역 관리들과 다른 고위 인사들도 참석했다. 연회 둘째 날 아그립바는 완전히 은으로 만든 예복을 입고 동이 틀 무렵 연회장에 들어섰다. 그때 그의 은색 옷은 태양의 첫 빛줄기에 비쳐 아름답게 빛났고 그 빛의 찬란함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두려움과 떨림을 안겨주었다. 이에 거기 모인 사람들은 그에게 아부하며 그를 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외쳤다. ‘지금까지 우리는 당신을 인간으로서 존경했지만, 이제부터 당신은 인간 이상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들을 질책하지 않았고, 그들의 불경한 아부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눈을 들어 자기 머리 위에 있는 밧줄에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는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는 즉시 이것이 악의 메신저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갑자기 강한 슬픔이 그의 마음을 찔렀다. 이와 동시에 심한 통증이 그의 내장을 사로잡았고, 그 통증의 강도는 빠르게 올라갔다 … 그는 황급히 왕궁으로 옮겨졌으며…배의 통증이 5일간 지속된 후 그는 그의 생애 쉰네 번째 되는 해, 왕위에 오른 지 7년째 되는 해에 사망하고 말았다.”(요세푸스,「유대고대사』19:343-350)

누가의 기록과 요세푸스의 기록은 서로 독립된 기록이지만, 그 핵심 내용은 일치합니다. 단지 새로운 내용이 있다면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의 외교 관계에 관한 내용일 것입니다.

학자들은 아그립바 왕의 사인(死因)에 관해 여러 가지로 추측합니다. ‘벌레에게 먹혀’라는 표현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복막염이나 장폐색, 혹은 비소 중독 등으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누가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와 같은 표현은 고대에 여러 저자들이 악독한 독재자들을 포함해 불행한 최후를 맞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자들의 죽음을 가리킬 때 종종 했던 표현입니다(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17:168-170에 기록된 헤롯 대왕의 죽음 묘사를 참조하라). 헤롯 아그립바 왕이 죽은 후 유대는 다시 로마 총독부의 관할로 넘어가게 됩니다. 사도행전에는 아그립바 왕의 세 자녀인 헤롯 아그립바 2세와 그의 누이동생 버니게(행 25:13), 막내 딸 드루실라(행 24:24)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견주다가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인정하여 영광스러운 인생이 될 것인지 선택하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함(24-25)

사단은 사람들을 미혹시켜 하나님께 도전하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역사적으로 조상 아담과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지만 그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발악해서 하나님을 도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만을 증거 하는 역할만합니다. 그리고 누가 역사의 진정한 주인인지 증명해주고 맙니다.

24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5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24-25)

사도행전 12장은 헤롯 왕이 야고보를 죽이고 수제자 베드로를 시작했지만, 마지막은 말씀이 더 해졌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본문은 궁극적으로 승리자라는 것을 아래 같이 표현합니다.

⑴ 여전히 부흥하는 초대교회(24)

본문에서는 헤롯의 핍박을 받은 후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라’(24)라고 소개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헤롯 왕의 죽음과 함께 힘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쇠하지 않고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가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고 어려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즉 사도 야고보가 아그립바 왕에 순교를 당하고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굳건하게 세워져 나갔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환난의 상황 속에서 더욱 흥왕하여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 이야기의 큰 단락이 마무리될 때마다 초대교회의 부흥을 간략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라고 요약해왔습니다(사도행전 6:7; 12:24; 19:20).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흥왕했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초대교회가 단순히 수적인 부흥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가 고난과 박해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양적이고 비본질적인 성장 그 자체만으로 교회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시도에서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⑵ 계속 되는 하나님의 사역(25)

사도 야고보의 순교는 하나님의 무능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입증한 사건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 모든 일을 예루살렘에서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흉년으로 고통 겪고 있었지만, 설상가상으로 박해까지 만났지만,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말씀이 더 흥왕해졌습니다. 사도행전 11:30에서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바나바와 사울은 헌금 전달을 마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에서 돌아올 때 그들은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온다. 이 표현은 12절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마가는 골로새서 4장 10절에서 바나바의 사촌으로 언급되는 마가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친척 관계는 왜 바나바와 사울을 따라 안디옥에 오게 되었으며, 나중에 그들과 함께 1차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당신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을 신뢰하십니까? 벌레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 때문에 벌레에 죽은 헤롯처럼 인물이 되지 않도록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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