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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1-01)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포용한 교회

사도행전 11장 1-18절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능력이 나타나서 ‘기적’과 ‘방언’으로 ‘치유’ 등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외적인 증상만 나타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성령에 가장 중요한 사역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사역입니다. 하나님을 찾아오도록 하는 역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회개의 역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능력의 역사 등이 있습니다. 가이사랴의 백부장 고넬료와 그 가족들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들렸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교제하고 돌아온 베드로를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하여 자세히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구원하시기 위한 역사들, 즉 자신이 보았던 환상과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들을 설명합니다. 이 사건은 복음이 유대인의 한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전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할례자들에게 비난을 받는 베드로 (1-3)

사람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습관을 벗어 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가치관이 변해야 합니다(롬 12:2). 자연스럽게 변할 수도 있겠지만, 성령에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방인에 대한 가치관의 혼돈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1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비난하여 3이르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1-3)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네 번째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이 사건은 이방인 복음 전파에 매우 중요한 한 획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들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유대교 종교 풍습에 집착한 할례자들에게 비난을 받고, 베드로는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예루살렘 교회 앞에 설명합니다. 이 장면을 통해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 이야기를 완성해줍니다. 기록자인 누가는 고넬료 사건은 초대교회에 이방인 선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사건이 미친 영향에 대한 내용이 누락된 상태에서 온전한 이야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술해 나간 듯합니다.

(1) 이방인과 교제한 베드로 소식(1)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 방문하고 ‘함께 머물렀다’는 사실이 예루살렘 교회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은 그만큼 큰 이슈를 일으킬 사건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유대 전역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까지 퍼졌습니다. 이 사실은 ‘사도들’과 일반 성도인 ‘형제들’에게 전해졌다는 것과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까지 전해졌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에 대해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이 이제 앞으로 전개될 초대교회의 신학적 논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베드로의 행동을 비난한 유대 성도들(2-3)

이방인들의 기독교로 회심한 소문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이전에 먼저 전해졌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 집에서 함께 교제한 사실은 아직까지 유대교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들에겐 매우 쇼킹한 사건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이러한 일을 했으니, 예루살렘 교회에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과 교제한다고 지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앞서서 비난하는 사람들을 ‘할례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물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아직은 변화의 과도기였기 때문에, 과거에 종교적 전통과 관습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잠재되어 있는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논쟁이 불씨로 남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 중, 특히 ‘할례자들’이라고 지칭한 사람들은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간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더 놀라운 사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고 선언한 베드로의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이방인이 구원받은 역사는 유대인이 생각하지 못한 대단한 사건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런 일들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역이 문제가 아니라 이방인들과 함께한 베드로의 태도를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할례자들’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베드로에게 어떤 자초지정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감정적으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교제한 일들에 대해 비난부터 쏟아 붙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는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점을 비난한 것입니다. 이들의 반응을 전혀 이해 못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대대로 지켜오던 유대인의 종교적인 관습이,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고 이방인들이 회심했다고 하여서 하루아침에 생각이 뒤바뀔 수는 없습니다. 이 사안은 단번에 해결될 성격의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4에서 기록된 바, 베드로 또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다른 유대인들이 온다는 소석에 그 자리에서 도망친 실수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 저변에 깔린 생각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율법을 파괴하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스데반 집사처럼 비난과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두려운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들은 소식은 두 가지였습니다. ‘이방인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과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서 함께 먹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역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란 것을 몰랐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들은 내용에 대한 묘사가 매우 특이합니다. 그들이 들은 소문을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라는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바로 앞 단락에서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자들에게 내려오셨다’(행 10:44).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랐다’(45),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다’(47) 등등으로 다양하게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성령을 묘사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11장에 들어와 그 사건을 한마디로 요약할 때는 성령을 언급하기보다 단순히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라고 기록합니다. 왜 ‘이방인들도 성령 세례를 받았다’라든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까? 누가의 언어 선택을 통해 고넬료 회심 사건의 외형적인 모습에 집중하기보다는 이 사건의 본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누가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여기서 좀 더 자극적이며 선정적인 표현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누가는 꽤나 중립적인 표현들을 선택함으로써, 이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회심했다는 의미를 물론 포함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방인들이 순종하는 삶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말하려 합니다.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14절에서 ‘구원 받을 말씀’이라는 표현과 ‘생명 얻는 회개’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상황을 설명한 베드로(4-18)

모든 세대의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한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믿는 자들은 구별치 말아야 합니다. 즉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발하는 것이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자를 멀리합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인종과 가른 사회계층의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않으려 합니까!

4베드로가 그들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이르되 내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에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어 내 앞에까지 드리워지거늘 6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내가 이르되 주님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하더라 10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마침 세 사람이 내가 유숙한 집 앞에 서 있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4-18)

언제나 교회 안에서는 지도자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해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대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포용하고 문제를 신앙적이면서 이성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베드로도 ‘할례자들’의 비난을 듣고서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비난을 접한 후에 베드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그들에게 이론적이고 순서적으로 설명합니다. 고넬료의 환상 이야기보다 자신이 본 환상부터 시작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차분히 모든 일의 자초지정을 설명했습니다.

(1)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성령(4-10)

베드로는 논쟁하는 자들에게 다가가서 그가 할 수 있는 한 명백하고 솔직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만 나누었습니다. 그가 말한 전체적인 줄거리는 그 체험을 돌이켜 보기에 충분했습니다(행 10:1-48). 먼저 이 일이 일어나게 된 욥바에서의 환상에 대해 자세히 말합니다. 할례자들의 비난으로 인해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과 고넬료가 본 환상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는 성령이 이방인들에게 임한 현상은, 하나님이 이방인들은 그분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신 증거하고 주장합니다. 4-10절까지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미 기술한 내용을 다소 압축적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거기서 생략되었던 한두 가지의 내용이 여기에 추가로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5절과 6절에서는 사도행전 10:11-12에 기록된 내용보다 훨씬 더 생생한 언어로 하늘로부터 내려온 큰 보자기에 들어있던 내용물들이 묘사됩니다. 또 사도행전 10:12에서 세 종류의 짐승들이 등장했다면, 이 단락의 6절에서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서 나열된 젓처럼 네 종류의 짐승들이 등장합니다. 8절에서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을 거부하며 그런 음식은 ‘결코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라고 했던 말도 사도행전 10:14에 기술된 내용보다는 에스겔서 4:14에 나오는 진술에 더 가깝습니다.

(2) 고넬료에게 역사하신 성령(11-17)

세 번의 환상이 나타난 직후 가이사랴에서 세 사람이 도착하고 베드로는 성령으로부터 아무런 차별을 두지 말고 가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욥바에 사는 유대인 신자 여섯 명과 함께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그 사람’은 당연히 고넬료를 가리킵니다. 13절에서는 고넬료가 어떻게 천사를 보게 되었는지가 아주 간략하게 언급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 당시 자기의 말을 듣던 사람들에게 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독자들은 주의 사자가 고넬료에게 약속한 말씀의 내용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입니다. 천사는 이미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할 때 사용되던 ‘구원을 받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이미 구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하나님 경외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었습니다. 15절에서 베드로는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는 어느 정도 설교를 했을 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내용이 서로 모순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에 기록된 베드로의 말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말하려는 바는 자기가 전하려고 한 메시지를 다 전하기도 전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방인들에게 임한 성령이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했다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처음’은 오순절 다락방 사건을 말한다. 즉, 베드로는 여기서 이방인들의 성령 체험을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강림 사건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의 서술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은 이방인들을 위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이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이 예수가 사도행전 1:5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결론을 유추해낼 수 있습니다. 첫째, 이방인들이 성령 받은 사건은 성령 세례이며, 이는 그들이 복음을 믿을 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신 약속의 성취로 일어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동류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방인들이 성령 세례를 받다면(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면 혹은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다면), 그들도 역시 물세레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17)를 ‘우리가 … 믿은 후에’라고 변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비로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3) 베드로의 소명에 대한 반응(18)

베드로의 설명을 들은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인들에게 임한 것을 보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났다고 말합니다(행 1:4-5). 누가 능히 주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할례자들은 동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해 구원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쉽게 판단하기 전에 먼저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볼 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종종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먼저 비난부터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난이 정말 다 맞겠습니까? 사람이 표준이 아니기 때문에 틀릴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신속하게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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