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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0-03)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선 복음

사도행전 10장 34-48절


‘이제 실화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어난 일이 믿지 못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거나 큰 일일 때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하시는 일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이러한 사역에 대해서는 절대로 허구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복음도 성령도 모두 하나같이 실화입니다. 이제 기독교는 이방지역의 역사에까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방인들 앞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그를 경외하며 의롭게 사는 자들을 모두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다고 선언합니다. 예수를 미든 사람들이 모두 죄 사함을 받는다는 복된 소식을 전하자.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합니다. 이에 베드로와 동행한 유대인 성도들은 이 광경에 놀랍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성령 받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34-43)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절할 떼 변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디든지 다니며 전파하셨으며, 그분은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복음을 들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변명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34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34-43)

고넬료의 환대에 대해서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에게 고넬료에게 전해야 할 말을 주셨습니다. 고넬료에게만 특별히 주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한 복음을 주셨습니다. 이 복음은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 각자 다른 복음이 없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에게 전해야할 복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습니다.

⑴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 하나님(34-35)

이방인 고넬료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 앞에 선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대한 발언을 소개할 때 사용하는 어구로, 34-35절에 베드로의 발언은 수백 년 동안 스스럼없이 행해져 왔던 유대인 중심의 사상과 인종 및 종교적 차별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나면서 ‘깨달랐도다’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깨달을 일은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택한 성민인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고 보호하심을 받고 그리고 자신들만이 성령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의 사람들은 ‘이방인’으로 여기며 그들을 깔보고 경멸하며 업신여겨 왔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차별하는 자’라는 의미의 헬라어 ‘프로소포렘프테스’(προσωπολημπτης)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나옵니다. 헬라 문헌을 통틀어 이곳에서 가장 먼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얼굴을 들어 올리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식 표현(나샤 파님)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사람을 편애한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과 초대교회 교부들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차별’ 혹은 ‘편애’라는 ‘프로소포렘프사이’(προσωπολημφια)는 이 단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롬 2:11; 엡 6:9; 골 3:25; 약 2:1; 벧전 1:17).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하려는 의도는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구원에서 배제시키거나 더 엄격한 구원의 조건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공로로만 구원 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의 신학은 깊고 넓고 그리고 멀리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이방인들을 환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는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모두 받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점은 ‘각 나라’와 ‘다’입니다. ‘각 나라’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나라와, ‘다’ 또한 유대인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기대하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분이나 민족의 문제가 아닌 마음이나 가치관의 문제였습니다. 유대인처럼 율법을 준수하도록 요구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자로 영접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거나 의를 행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30-33절에 서술된 고넬료의 ‘간증’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이 욥바에 있을 때 깨닫기 시작했던 의미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그들의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점진적으로 깨달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는 환상을 유대인들의 음식법에 관한 것으로 이해했다가, 나중에는 이방인들과의 교제에 대한 허락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해하기에 이릅니다. 고넬료 집에 모인 무리가 하나님의 복음 듣기를 원한다는 것을 안 베드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전할 때 헬라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베드로가 통역을 사이에 두고 그들에게 아람어로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왜냐하면 본 단락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에는 사도행전 초반에 기록된 베드로의 이전 설교에 비해 아람어식 표현들이 더 자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누가가 베드로의 설교를 창의적으로 구상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전승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심(36-39)

36절은 구약의 두 구절을 암시적으로 인용합니다(시 107:20; 사 52:7). 베드로는 아주 특이하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평화를 주시겠다는 구약의 약속을 예수님을 통해 성취하셨음을 밝히면서 설교를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유에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메시아입니다. 당연이 이제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메시아도 됩니다. 그 분의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관계있던 죄인들을 화해시킨 복음입니다. 그간 원수였던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장벽을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가 되게 하는 평화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시고 평화의 복음을 전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직접 오셔서 행하신 일들로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라고 소개합니다. 38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친히 사용했던 것처럼 이사야 61:1의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지상사역을 묘사하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유에르게테오’에서 ‘후견인’ 혹은 ‘자선가’라는 의미의 명사 ‘유에르게테스’가 유래했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를 비롯해 많은 통치자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유에르게테스’라고 불렀습니다. 누가는 이 동사를 여기에 사용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 통치자들을 비교하며 예수가 진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참된 평화와 구원을 줄 수 있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사도들은 처음부터 예수와 동고동락한 자들로서 예수님께서 행한 모든 사역의 증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른 설교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라는 표현은 신명기 21:23의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를 상기시킵니다. 원래 베드로는 유대인 앞에서 설교할 때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라고 강하게 질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방인들 앞에서 베드로는 이 표현을 질책이 아니라 복음 증거의 구절로 활용합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 3:13에서 이 구절이 예수를 통해 성취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3)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40-42)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모든 사람들이 목격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증인으로 택함 받은 자들만이 목격하게 하시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경험한 예수 부활의 확실함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부활하신 후 예수는 사도들에게 이 부활을 전하라 명령하셨고, 그 부활의 메시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든 사람들의 재판관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포함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라고 진술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께 부여하신 것은 재판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접한 자와 영접지 않는 자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4) 믿는 자는 죄 사람을 받음(43)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한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모두 죄 사함을 받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주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일치합니다(눅 24:47). 여기서 베드로가 구약의 어느 본문을 언급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와 같은 말씀을 우리는 이사야 33:24; 53:4-6,11 그리고 예레미야 31:34; 다니엘 9:24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함(44-48)

얼마나 영광스러운 증거입니까! 복음은 모든 인류, 즉 모든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세상에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도전이 되어 집니다. 우리에게도 간절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그분의 구원에 대해 주리고 목말라할 정도로 하나님을 초청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44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44-48)

이방인 고넬료는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겠습니까? 누가는 기록하지 않지만, 이미 베드로가 증거 하는 복음을 믿고 있었던 것을 설교를 듣고 있을 때, 성령이 임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1) 성령이 임재하심(44-46)

43절에서 베드로가 ‘그를 믿는 자는 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이방인도 포함된다고 생각했습니까? 아마 베드로는 그러한 구분 없이 이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그의 머릿속에 후자의 생각에 대한 확신이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러한 복음 선언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이 구절에서 ‘그를 믿는 자는 다’를 강조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모든 인류에게 구원의 깊이 열려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피려합니다. ‘그를 믿는 자마다 다’라는 어구는 헬라어 문장 맨 뒤에 나오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거기 모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베드로의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복음을 듣는 모든 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성령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기에(참조. 행 11:17-18) 우리가 여기서 유추할 수있는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거기 모인 이방인들은 베드로가 전한 복음의 말씀에 믿음으로 응답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회개와 예수에 대한 믿음을 받으시고 성령의 선물로 인을 치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비로소 역사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곧 만인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온 욥바 출신 유대인들인 베드로의 수행원들은 오순절 예루살렘에 성령이 임한 것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오순절 120명의 제자 모두에게 내리신 것처럼 동일하게 이방인에게도 오신 것입니다.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명백한 증거로 방언과 찬양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순절에도 보았던 증거들입니다. 누가는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랐다’라고 전합니다. 이들은 욥바에서 베드로와 동행한 여섯 명의 신자들입니다(행 11:12). 누가는 이 사건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해 묘사합니다. 성령이 ‘내려오시니’(44), ‘성령을 부어주심’(45), 성령을 ‘받았으니’(47) 등이 그러합니다.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지만 동일한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방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이방인들을 환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마다 방언의 역사가 따라와야 하는 것입니까? 이 사건에서는 방언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중대한 사건이기에, 아마도 가시적인 증거가 더욱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일어나야 하는 필연적이고 규범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오히려 누가는 초대교회의 규범적인 선언을 베드로의 입을 통해 사도행전 2:38에서 분명하게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이는 베드로를 비롯해 동행한 유대인 신자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45). 그들은 성령의 선물이 이방인에게도 부어지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45절에서 주목해야 할 세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1) 그들이 놀랐던 것은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부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에게 성령의 선물이 주어질 것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2) 44절에는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왔다고 하지만, 45절에는 헬라어로 ‘성령의 선물’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의 선물’이란 표현은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유대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행 2:38). 같은 성령의 선물이 말씀을 듣고 있던 이방인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3) 45절의 동사 ‘부어 주다’(에크케오) 역시 유대인 신자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습니다(2:17-18,33). 그러므로 두 표현, ‘성령의 선물’과 ‘부어 주다’는 유대인 신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과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에 차이가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라고 선언한 것입니다(47). 예루살렘에 유대인들과 순례자들을 환대하셨던 성령께서, 사마리아 성도들도 환대하시고, 이제 땅끝까지 환대하시려고 고넬료 가정부터 활짝 문을 여신 것입니다. 유대교가 환대한 것보다 훨씬 더 극진하게 차별 없이 환대하셨습니다.

(2) 베드로가 세례를 베풂(47-48)

이 성령의 역사를 베드로는 보고서는 더 이상 설교를 이어가지 못합니다. 다만 성령께서 이방인들은 자기 백성으로 인정하셨으니, 교회가 이제 한 가족 한 형제로서 인정하자고 제안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합니다. 한 가족이 된 가이사랴 공동체는 이제 베드로를 환대합니다. 베드로에게 설교를 더 듣길 위해서 몇 일을 더 머물기 청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단지 머리로만 알 뿐 체득되지 못할 수 있고, 이기적인 욕망과 하나님의 뜻이 상충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피하거나 거부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뜻을 따라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해 왔다면, 지금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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