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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5-02)

 


새 시대를 여는 공동체의 결정

사도행전 15장 12-21절


 

요즘 네비게이션은 기능과 성능이 좋아서 길을 벗어나면, 바로 검색해서 새로운 길을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업그레이드를 시키지 않으면 오래된 길을 가르쳐준 경우가 있습니다. 새로운 길로 가면 계속해서 끝까지 옛길만을 가르쳐줍니다. 많은 성도들이 오래된 네비게이션처럼 이러한 실수를 범합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옛날 습관에 젖어서 자기 고집대로 잘못된 길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로운 조언을 해주면 싫어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성도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내려놓고, 항상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구하고 날마다 새로운 길을 따라 살아갑니다. 초대교회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해서 복음 사역의 넓은 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바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려야 하느냐는 문제였습니다.

 

 

  • 베드로의 연설 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 앞에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는지를 보고합니다. 교회는 잠잠히 그들의 보고를 들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가 나섰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이 선지자 아모스의 예언과 일치함을 강조합니다. 동시에 이방인들이 최소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불편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이 논쟁을 끝내려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보고(12)

하나님 나라의 역사나 개인의 역사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순간순간마다 동행하고 일하시고 계시다는 임재의식과 동행의식이 꼭 필요합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행할 일에만 집중하고, 사람들의 찬사와 사람의 시선만 집중하면 하나님께서 소외되십니다.

 

12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12)

 

앞에서 바리새파 그리스도인이 주장을 듣고 난 후, 베드로가 반박했습니다. 그에 대한 결론적으로 ‘10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고 책망했습니다.

 

베드로의 연설은 예루살렘 회중을 잠잠하게 만들었습니다. 본문에 청중들이 ‘가만히 있어’라는 의미는 ‘말하기를 멈추다’ 혹은 ‘침묵하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논쟁적인 회중을 침묵하도록 만듭니다. 서로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심각한 논쟁에서 적절한 대응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논쟁 당사자들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후에 회중이 바울과 바나바의 간증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이유는 베드로의 연설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연설에는 성령께서 역사한 일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이어 이제 바나바와 바울은 이 기회를 포착해서, 1차 선교여행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 가운데 성령께서 행하신 일들의 증거를 제시 합니다. 그것이 표적과 기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들로 말미암아’라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행하신 사역을 보고합니다. 이러한 보고까지도 예루살렘 회의 참석자들은 모두 조용히 이 이야기를 경청하였습니다. 아마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 중에는 유대인들이 얼마나 적대적이었으며 교만하고 악했는지에 대해서도 말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의 마음을 여시고 그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셨는지에 대해서도 보고했을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의 간증과 보고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들의 간증은 베드로의 간증과 거의 일치했을 것이며, 베드로가 이미 내린 결론에 대해 보충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3장 이후로 유일하게 바나바의 이름을 바울 앞에 둡니다. 이는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의 위치와 영향력 때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선교의 장벽을 허무는 것은 소통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 선교’를 보고합니다. 그리고 보고를 받은 유대인 성도들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소통하지 않으면 선교의 상승효과를 높일 수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문제일수록 더욱 소상하게 공동체와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공동체와 함께 소통해야 할 선교 사역의 현안들은 무엇입니까?

 

야고보의 연설(13-2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공동체라는 의미는 서로 의견이 달리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근근거로 합의를 이루어가며, 서로 합의되어진 뜻은 서로 수용하고 협력해서 사역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3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14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15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16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19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라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13-21)

 

이 본문은 세 가지 장면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장면은 논쟁에 개인하는 야고보의 출현합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연설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면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준비 합니다. 두 번째 장면은 야고보의 구약 인용이고, 세 번째 장면은 야고보가 첨예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결론을 내리는 부분입니다.

 

⑴ 베드로를 지지하는 야고보(13-14)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가 끝나자 바로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 사도가 등장합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예루살렘 박해가 심해서 사도들까지도 모두 피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며 성도들을 양육하면서 지도자로 부상했을 것입니다. 그는 회의를 결론짓는 듯한 권위 있는 발언을 합니다.

 

야고보가 베드로의 연설 내용만을 언급하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이방인들의 율법 준수와 관련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는 성도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5). 게다가 바울과 바나바는 이 논쟁의 당사자들이었습니다.

 

야고보는 먼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형제 공동체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논쟁의 당사자들을 직접적으로 지지하기보다 예수의 수제자로서 존경받는 베드로의 입장을 회중에게 상기시킵니다. 이는 다른 입장에 있는 성도들을 배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지도자로서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 있음을 알리려는 행동으로 보입니다. 야고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여 매우 지혜롭게 행동합니다.

 

야고보는 고넬료 사건을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이방인은 구원을 받았지만, 초대교회에서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은 공식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자기 백성으로 취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방인 중에서 늘 선택 받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제 이방인이 선택 받았습니다.

 

이방인이 선택 받은 이유는 ‘자기 이름을 위할’이라고 소개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이방인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돌보셨다’는 ‘심방하였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심방하신 사건입니다.

 

야고보가 이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보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야고보는 회중에게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장면을 떠올려보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⑵ 구약을 인용한 야고보(15-18)

 

야고보는 베드로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구약 아모스 9장 11-12절까지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는 최종적인 결정에 앞서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는 ‘엘람머비누’ 방식으로 보입니다.

 

11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12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아모스 9:11-12)

 

야고보는 베드로에게 일어난 사건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약속의 성취임을 강조합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내용들이었습니다. 야고보는 구약을 인용함으로써 베드로의 경험과 자신의 결정이 성경과 일치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야고보의 모습은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속한 지도자의 자격입니다. 지도자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성경을 통해 문제를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⑶ 야고보의 최종 제안(19-21)

 

마지막 부분에서 야고보는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여 결론을 제시합니다. 야고보는 ‘내 의견에는’라고 말했지만, 단순히 자신의 생각만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최종 결정권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의견과 판결 사이에 강한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초대교회 안에서 어떻게 리더십이 작동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서로 상의해서 결정하는 것을 보면, 어느 한 사람의 의견에 따라서 좌지우지 되는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나 베드로의 말이 권위 있게 다가오는 것은 보면, 누구나 인정하는 권위 체계는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리더십이 있어야만 공동체는 건강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야고보의 결론은 베드로와 견해와 같습니다. 야고보의 지혜로운 표현은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19)라는 구절입니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입교 시에 유대인의 전통을 요구하는 것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어느 정도 절충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제시합니다. 또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만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상실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비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준수할 네 가지를 준수하도록 제안 합니다. 그 네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상숭배’와 ‘음행’, ‘목매어 죽인 것’과 ‘피 자체를 멀리할 것’입니다.

 

야고보가 요구한 네 가지의 금지 조항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정결의식과 관련된 정체성의 문제였지만, 이방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야고보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절충점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활짝 열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당연히 지난날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 점을 분명히 했던 것입니다.

 

야고보의 금지 조항 네 가지가 윤리적 삶의 개선과 관계되어 있다는 분석은 야고보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상숭배는 이방 신전에서 이루어졌고 음행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원인이었습니다. 또한 목매어 죽이는 방식의 도축으로 인해 피가 고기 안에 남아있던 당시의 풍습을 생각할 때, 피를 멀리하는 것은 적어도 동물에 대한 윤리적 소비를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야고보의 제안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 ‘우상숭배, 음행, 살해를 삼가고 다른 사람들에게 받기 싫은 대접을 너도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말라.’ 야고보는 할례와 다른 유대교의 의식들을 지키는 대신에 윤리적 명령을 요구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삶의 방식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건들이 자신을 우월하게 만들거나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정죄하는 이유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초대교회가 서로 다른 생각을 모아가는 과정을 보면서, 자신의 교회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다른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말씀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말씀을 통해, 말씀이 다루지 않는 것은 성숙한 회의를 통해, 주님의 뜻이 성취해 가야 합니다. 생각이 달라도 한 형제와 자매로 좋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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