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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5-03)


권위를 존중하는 공동체

사도행전 15장 22-35절


 

예루살렘 교회의 성숙함이 드러나는 본문입니다. 모교회로서 안디옥 교회에 찾아온 교리적인 혼선을 지혜롭게 해결하는데, 회의 결과를 통보하는 장면에서도 성숙함이 묻어납니다. 우리 교회도 이렇게 성숙하고 뭄위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의 제안을 한마음으로 받아들였고, 이 결정을 전달하기 위해 유다와 실라를 선택하여 안디옥으로 보냅니다. 이들은 특사의 자격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 사항이 담긴 편지를 가지고 수리아 지역의 교회들을 방문합니다. 안다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기쁨으로 받아들인다. 복음으로 인한 평안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어려웠던 안디옥 교회는 제자리를 찾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대표자를 보냄(22)

살면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가치관과 인생관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로잡기 위해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선합니다. 그러다 보면 관계는 깨지고 공동체는 혼란 가운데 분열됩니다. 왜 이와 같은 시도가 안 좋은 결과를 낳겠습니까? 사도들은 정죄보다 위로와 격려로 교회를 세워 갔습니다.

 

22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22)

 

예루살렘 교회는 야보고의 제안인 이방인들에 대해 어떠한 유대인들과 구별 없이 받아 들리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안디옥 교회에게 전달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내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도행전 15:4은 바울과 그 일행이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사도행전 15:6은 이방인의 율법 준수와 관련된 문제를 사도와 장로들이 중심이 되어 논의했다고 알려줍니다.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안디옥 교회로 보낼 사람을 선택하고 결정했음에 대해 언급합니다. 종합하면, 누가의 기록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의사결정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려줍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회중과 지도자의 역할이 잘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22절은 예루살렘 교회가 대표단을 선출하는 과정이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세워서 파송했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가 전체 회중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회중의 역할은 어느 정도 제한되고 있었다는 점 또한 흥미롭습니다. 23절에서 안디옥 교회로 편지를 보내는 주체는 사도와 장로로 제한됩니다. 이런 의사결정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서로에 대한 신뢰가 그 바탕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일반 회중이 지도자를 신뢰하지 못하거나 지도자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으면 이러한 결정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반대로 지도자들이 회중을 존중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진행하기 힘든 의사결정 구조입니다. 초대교회는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그 갈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음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여기에 있습니다. 부르심을 따라서 알맞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모일 때 교회는 본연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 안에서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을 택하여 안디옥 교회로 보냅니다. 그곳에서 야고보의 권위를 사칭하는 자들을 상대하려면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도 준비된 지도자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누가는 그들을 일컬어서 정확히 인도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22절에서 갑자기 새롭게 등장한 단어지만,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마무리 짓고 안디옥교회와 그곳의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인도자들 가운데서 사람들을 택하여 파송합니다.

 

이방인들을 향한 편지(23-29)

모세의 율법과 하례 문제를 두고 베드로와 야고보는 인간적, 정치적 판단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성령의 인도하였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찾아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그들이 표준으로 삼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3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24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5-26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며 우리가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노라 27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28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 29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23-29)

 

유대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직까지도 유대교처럼 할례와 율법 준수를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대해 24절이 시사하고 있는 바는 매우 큽니다. 개역개정이 ‘마음을 혼란하게 하다’라고 번역한 구절의 원어적인 의미는 ‘영혼을 약탈하다’입니다. 이는 유대주의자들에 의한 공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의미에서 유대-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열심과 열정을 따라 복음을 이해하고 가르쳤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은 이방-그리스도인들이 영혼을 약탈당하는 것 같은 고통을 겪도록 만들었습니다.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사람들의 영혼에 접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할례를 지키고 유대교 전통을 따르라는 요구가 큰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와 유대주의자들의 논쟁은 얼마 되지 않은 초대교회의 기초를 뒤흔들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24절은 누가가 유대주의자들의 위협에 대해 매우 강경한 어조로 책망하는 장면입니다.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24-26절은 예루살렘 교회의 매우 성숙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첫째, 형제 교회의 어려움이 자신들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된 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보이는 태도는 매우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적어도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대해 어느 정도의 책임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24). 둘째,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후하게 평가함으로써 안디옥 교회를 존중하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생명을 아끼지 않은 사람으로 묘사합니다(26). 셋째, 예루살렘 교회는 ‘만장일치’로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만장일치는 원어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의역에 가깝습니다. ‘마음을 같이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는 유대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소위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중이 야고보의 결정에 동의하고 따르기로 결정한 것은 참으로 성숙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8절은 이런 성숙한 태도의 원인이 ‘성령’이심을 말한다. ‘성령과 우리’라는 표현에 주목해봅시다. 이는 그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성령이 역사하셨음에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물론 사도행전 15:6-21까지 진행된 회의의 진행과정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약간 당혹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성령이 이 모든 과정에 개입하여 함께하셨다고 선언합니다. 초대교회가 직면한 신학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이 있었고, 이에 대한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교회였다는 증거는 안디옥 교회를 배려하는 그들의 마음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28절의 요긴한 것들이라 부득이한 혹은 불가피한이란 의미입니다. 이는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아무 짐도 지우지 않기를 원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안디옥 교회를 최대한 배려하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비록 그늘이 네 가지 금지조항을 정해서 안디옥 교회에 전달했지만, 그것은 형제 된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금지 조항들은 적극적 인 요구사항이라기보다는 이방-그리스도인들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편지를 받은 안디옥 교회(30-35)

잘못 적용된 말씀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아픔이 되기도 하지만, 올바로 선포된 말씀은 교회를 하나 되게 하고 성도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회복시킵니다.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로 어수선해진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의 선한 결정으로 질서를 잡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결정된 결정문을 가지고 이방인 중심인 교회 안디옥교회로 내려가서 위로해 줍니다.

 

30그들이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31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32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33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34(없음) 35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30-35)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바울과 바나바, 유다와 실라는 안디옥에 도착합니다. 먼저 그들은 안디옥에 내려가 안디옥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결정된 내용이 담긴 편지를 읽어 주었습니다. 오늘날처럼 통신이 발달되었다면 즉시 알았겠지만, 그런 상황도 아닌 데, 그 동안 안디옥 그리스도인들은 회의 결과를 얼마나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아마 큰 병인 줄 알고 검진 받고, 담당 의사가 검진 결과를 발표해 주는 날 환자의 긴장보다 더 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회의 결과에 편지가 열릴 때, 그들은 숨이 머질 정도로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유대인과 동등하다는 결과가 읽혀지는 순간, 이 소식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뛸 듯이 기쁜 소식이 이었고,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31). 이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용이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과의 편지는 안디옥을 거쳐 다른 수많은 이방 교회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누가는 예루살렘 교회가 보낸 편지를 안디옥 교회가 읽고 그것을 위로로 받아들였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해석은 몇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교회가 우월적인 위치에서 안디옥 교회를 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둘째, 비록 네 가지 금지 조항들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지 않은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점입니다. 셋째, 이 모든 과정이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32절은 어려움을 겪은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유다와 실라는 ‘여러 말’로 안디옥의 형제들을 권면하고 굳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여러 말’이란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이루신 모든 사역을 의미할 것입니다.

누가는 유다와 실라를 ‘선지자’라고 소개합니다. 그의 부연 설명은 그들의 말이 단지 인간의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마음을 견고하게 만듭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주의자들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했다는 사실은 시사한 바가 큽니다. 그들은 모든 사역을 마치고 파송된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갑니다(33).

 

그리고 안디옥에 남은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서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계속해서 주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합니다(35). 신학적인 걸림돌이 제거된 후 교회가 복음 전파에 힘을 얻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아름다운 교회와 성숙한 사도들로 빚어냅니다. 예루살렘 사도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정직함과 겸손함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녹여주는 결과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뜻을 바르고 정화하게 분별하며, 더욱 더 방황하는 형제들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는 성도로 더욱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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