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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6-02)


초대교회 빌립보 교회의 탄생

사도행전 16장 6-18절


일을 해나갈 때 나름대로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때로는 전혀 엉뚱한 결과를 맺은 경우도 있습니다. 정말 당황스럽습니다. 지금 성도들 중에 어떤 분은 하나님과 자신의 뜻 사이에서 방황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빨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런 분들에게 오늘 성경은 분명한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그 일행들을 마게도냐로 이끄십니다. 원래 바울의 목적지와는 달랐지만 바울의 선교팀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게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향했으며, 순종은 곧 열매를 맺습니다. 빌립보에서 두아디라 성 출신의 루디아와 그 가족이 회심합니다. 또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줍니다. 이제 2차 선교 여행이 분격적으ㅗ 시작됩니다.

 

2차 선교 여행의 시작(6-10)

사람은 자신의 이성의 한계에 갇혀 자신이 세운 계획이 최선이며 전부라 착각하여 이를 수행하기 위해 애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세운 계획이 최고가 아님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인도하시는 계획은 우리 자신이 세운 계획보다 완전하고 유익한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심하지 말고 온전히 신뢰합시다.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6-10)

 

성령이 바울의 아시아 전도를 막으셨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시면 항상 승승장구하는 줄로 알았지만 아닙니다. 바울 일행은 북부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거쳐 무시아 맞은편에 있는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일행은 실망하지 않고 순종하며 나갑니다.

 

(1) 성령의 인도하심(6-8)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선교팀을 그들의 계획과는 다르게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과 그 일행은 아시아로 가려는 계획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 계획을 성령이 막으셨기 때문입니다(6).

이런 일은 7절에서도 반복됩니다. 무시아에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계속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2) 환상으로 인도하심(9-10)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른 곳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9절에서야 밝혀집니다. 바울이 환상 중에 도움을 요청하는 마게도냐 사람을 보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게도냐로 가야 했습니다.

이 단락은 성령이 자기 백성과 소통하시는 방식을 두 가지 형태로 보여줍니다. 첫째, ‘인도하심’이다. 누가는 성령이 바울의 계획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관여하셨다고 기록합니다. 6절에서 성령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7절에서 성령(예수의 영)은 바울이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이 바울을 마게도냐로 부르셨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하여는 함구합니다. 다만 성령이 바울의 길을 인도하셨다고 기록할 뿐입니다. 물론 성령의 인도하심이 나타날 때 초자연적 방식을 동반했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9절과 10절에서 ‘환상’이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만 앞선 구절들에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특정한 방식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이 이런 방식의 인도하심에 익숙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누가는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언급이 없는 성령의 인도하심은 사도행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행 4:31: 8:29,39: 10:44: 13:2,4). 누가의 표현과 기록들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은 매우 익숙한 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도하심에 대한 방식보다 중요한 것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이유와 목적에 대한 깨달음과 반응입니다. 바울은 다만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했고 순종했습니다. 10절에 기록된 ‘힘쓰니’와 ‘인정함이러라’는 바울과 그 일행이 그들의 계획과 다른 인도하심에 대하여도 적극적으로 순종했음을 보여줍니다. 순종하지도 않으면서 인도하심을 기대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도하심에 대한 기대는 순종을 전제로 합니다.

 

둘째, ‘환상이다’(9-10). 환상은 신비롭기에 아주 매력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방식입니다. 비록 오늘날의 교회에 익숙하지는 않지만, 9절과 10절에 연속하여 기록된 ‘환상’을 초자연적 계시가 아니라고 부인할 근거는 없습니다. 환상을 언급하는 신약성경의 다른 용례들(행 7:31: 9:10; 10:3,17; 11:5; 16:9; 18:9)과 비교해볼 때, 이 단락에 나오는 ‘환상’이 초자연적 계시인 것은 분명합니다. 환상이란 단어가 이 단락에 두 번씩이나 나타나고 있는 점은 장면의 중요도를 높이는 효과를 갖습니다. 또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가 쓰인 용례를 보면 모두 주요 지도자인 모세, 베드로, 바울에게만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드로아에서의 환상이 갖는 의의와 누가가 부여하는 중요성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열두 번 나오는데, 사도행전에서만 열한 번 사용됩니다. 이런 신적인 개입은 선교 동역자의 행선지 선택과 그들의 향로 결정이 목적 없는 우연이나 자의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즉 바울 일행의 활동은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또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지리의 좌표 설정과 향로 결정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드로아에서의 환상은 오순절 설교에서 인용한 요엘의 예언, 곧 ‘너희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라는 말씀을 성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의한 진로 결정은 누가가 특별히 이 마게도냐 행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것은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갔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시로 보면 여전히 그들은 그레코-로마 세계 안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문화권을 넘는 선교적인 도약을 했다고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 인식일 수 있습니다.

 

빌립보에서의 사역(11-18)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예비하심의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자와 사역을 홀로 두시지 않습니다. 복음 증거에 필요한 만남을 주시고 물질적 지원도 하십니다. 복음 증거자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이긴 싸움을 하는 것임을 기억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승리입니다.

 

11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16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11-18)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에게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여인 루디아를 만나게 하십니다.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어 그 가정을 빌립보 선교의 전진기지로 삼으십니다. 잘 준비된 전도자 바울을 통해 예비된 영혼 루디아를 바꾸셨듯이, 우리가 복음에 대한 확신과 말씀의 능력으로 구비될 때, 준비된 영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1) 루디아의 회심(11-15)

 

11-12절은 바울의 여행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 약 240km의 여행을 거의 이틀 만에 끝냈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오 일 정도 걸렸던 것에 비하면(행 20:6) 빌립보까지의 여행은 아주 빠른 속도로 이루어진 셈입니다. 드디어 바울의 선교팀은 마게도냐 지역의 첫 번째 도시였던 빌립보라는 선교지에 도착합니다. ‘첫 성’은 지리적인 위치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 중요도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마게도냐의 행정 수도는 데살로니가였지만, ‘작은 로마’라고 불렸던 빌립보는 매우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물론 가장 큰 도시는 ‘암피폴리스’(Amphipolis)였습니다. 따라서 여기 ‘첫’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한’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울 일행은 먼저 기도처(프로쉬케)를 찾습니다(13). ‘여자만’ 모인 것을 볼 때 이곳이 회당일 가능성은 낮고 비교적 공식화된 기도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빌립보에는 회당을 세울 수 있는 최소 단위인 유대인 남자열 명이 없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야외나 강가, 바닷가에 기도처를 마련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것이 유대 관습이었습니다(스 8:15; 시 137:1). 이 단락에 나타나는 강가 기도처 또한 회당은 아니지만 회당의 기능을 수행한 유대인의 모임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빌립보는 매우 로마화한 도시였으며, 이것은 복음을 전하기에 녹록치 않은 현실을 반영합니다. 바울은 여건과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13절 ‘모여 앉아 말하다’에서 세 동사는 가르침과 배움, 즉 설교의 상황과 연결됩니다. 이 모임이 정기적인 모임이었을 것이라는 암시를 이 세 개의 동사를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바울의 사역에 루디아의 회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루디아는 이미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인이었습니다(14). 그녀의 이름 ‘루디아’는 아마 자신의 출신지인 두아디라가 속했던 지역 ‘루디아’에서 유래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름이 아니라 ‘루디아 출신의 여인’이란 뜻일 수도 있습니다.

루디아는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관심을 가졌던 이른바 ‘하나님 경외자’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 집에 바울 일행을 유숙시킬 만한 여유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공중 모임’을 하는 것을 보면(행 16:40) 부유한 사업가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울은 루디아를 비롯한 하나님 경외자들을 일차적인 전도의 대상자로 삼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을 때 성령은 루디아의 가족들에게까지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15). 이 여인은 이방(빌립보) 속에서도 이방(두아디라) 출신의 여인입니다. 그런 소외를 이기고 복음이 그녀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2) 귀신 들린 여종을 고침(16-18)

 

16-18절까지는 귀신 들려서 점을 치는 한 여종을 고쳐주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3-15절까지의 루디아 회심 사건과 이 사건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바울 일행은 루디아 집에 들어가서도 안락하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16). 그들은 기도하러 가다가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만났습니다. 이 여종은 점으로 사람들의 미래를 예언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귀신에 의한 역사였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능력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악한 악령의 역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악령의 목적은 사람을 마침내 파멸시키는 것입니다(요 10:10). 이런 귀신들의 역사를 대적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악령이라도 자신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 일행을 따라오며 소리치고, 괴롭히며 선교 사역을 방해했습니다(17). 아마도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면 필시 선교팀이 빌립보를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귀신은 복음을 방해하며, 복음 증거자들을 괴롭힙니다. 그것은 귀신들이 영생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귀신을 꾸짖어 여종에게서 나올 것을 명하였습니다(18b). 예수의 이름에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은 쫓겨납니다(막 16:17). 우리는 당당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약 4:7). 예수의 이름으로 악한 권세들을 이깁시다.

 

이 사건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건설된 로마의 식민지 빌립보에서 일어난 기적입니다. 대표적인 이방 도시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의도치 않았지만 기적이 행해졌고 복음의 능력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바울 일행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이 사건이 빌립보에서의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경외자였던 루디아의 회심에 말씀을 풀어서 해석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면,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 지식과 이해가 없는 도시의 사역에서는 기적이 사용되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우리는 그분의 이끄심을 받아 순종할 뿐입니다. 어떤 상황도 이 하나님 앞에서는 장애물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사정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여 세우신 자라에서 애쓰면서 주님의 인도에 주의를 기울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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