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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6-03)


빌립보 감옥에서부터 사역한 바울과 실라

사도행전 16장 27-40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임하는지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 안에서는 그분을 믿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 중에 의미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주님께서 당신의 넘치는 위로로 우리를 채워 주심으로써, 고난당하는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한 주님의 통로로 우리를 사용하시려는 주님의 신비로운 인도하심입니다.

 

  •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냄으로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감옥에서 기도와 찬양을 드림으로 지진이 나며 차고가 풀리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이 일들을 통해 간수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습니다. 새로운 아침이 밝았습니다. 바울 일행을 투옥시켰던 판사는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생각하며 바울 일행을 풀어주려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27-34)

복음 전파는 그 누구에게도 정죄 받을 일이 아니며, 그 누구도 복음 전파를 막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복음 전파자를 정죄하지만 그 정죄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 전파로 인한 세상의 정죄에 요동하지 않습니다.

 

27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33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34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27-34)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했는지를 살피지도 않고 자결하기로 작정합니다(12:19). 베드로와 바울은 복음의 증언을 위해서 동일한 경험을 갖습니다. 간수의 행동을 목격한 바울은 큰소리로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28). 이처럼 전도자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바울의 동정심과 폭력에 대한 저항은,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의 오른편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린 것을 보고 예수님이 꾸짖으시고 다시 붙여 주신 모습을 기억나게 합니다(눅 22:49~51).

 

바울과 실라의 소리를 들은 간수는 그제야 횃불을 들고 옥으로 들어가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립니다. 그는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이 주문을 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간수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묻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들은 무리가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2:37)라고 말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간수의 요청에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간단명료하게 답합니다(31). 감옥이라는 최악의 장소에서 복음 메시지를 이렇게 명료하고 간결하게 소개하는 장면은 가히 감동적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직무는 장소나 시간이나 어떤 조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언제나 복음의 메시지를 핵심적으로 선포해야 합니다. 장면이 바뀌어 바울과 실라를 통해 간수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주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복음에 대해 더 소상하게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로마 시민임을 밝힌 바울(35-37)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당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바울과 실라처럼 옥에 갇히기까지 할지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말라야 합니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정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야 합니다.

 

35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36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37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35-37)

 

전날 밤에 이루어진 사건을 뒤로하고 바울과 실라는 다시 옥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두 전도자가 로마제국에 위해를 주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님을 확인시켜 줍니다. 기적이 일어나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오히려 간수를 살렸을 뿐 아니라 그의 가족에게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의 책무를 거뜬히 해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석방된 것은 이 점을 상관들이 확인하고 인정한 셈입니다.

 

다음 날 아침 상관(아마, 치안 판사)들은 법 집행관들을 보내 바울과 실라를 석방하라고 통보했습니다(35). 개역개정 성경에는 상관들이 보낸 사람이 한 명인 것처럼 번역되었지만, 실은 38절에서와 같이 여러 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상관들의 판결에 따라 바울과 실라에게 체벌을 가했던 법 집행관이었을 것입니다(22-23).

 

상관들이 부하들을 보내, 바울과 실라에게 석방하라는 명령을 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간수는 “평안히 가라”라고 말합니다(36). 바울은 예상 밖에 강경한 반응을 보입니다. 이 제안에 수긍하지 않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재판을 받을 때는 잠잠했던 바울이 스스로 로마 시민이라고 당당하게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는 로마 시민이다’(Civis Romanus sum)라고,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고 더욱이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라며 자기의 법적 권리를 주장했습니다(37). 로마 시민으로 특별대우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실라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로마 사람인”이라는 문구입니다. 이를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로마 사람임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이는 점치던 여종의 주인들이 두 선교사에 대해 한 주장과 정반대입니다(20).

당시 상관들은 바울과 실라를 무리의 선동으로 고소가 적법하게 처리되거나 심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불합리한 상태에서 부당하게 매질을 당하고 옥에 갇혔습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로마 시민은 품위를 손상시키는 처벌에서 면제되었고 여러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율리우스법(Lex Julia)은 로마 시민을 처벌할 때 채찍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때로 이 법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로마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심한 체형을 당하기도 해 이 법의 적용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 합니다. 그러므로 고대 기록에 따르면, 사도행전은 1세기 로마 속주의 법적인 상황을 잘 반영합니다. 실제로 바울과 실라가 채찍으로 맞고 감금되고 상관들이 석방시켜 줄 때까지 로마 시민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은 어색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예와 수치라는 도식으로 볼 때,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위해서 속국의 국민으로 취급되는 수치까지도 기꺼이 참았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결단 때문에 신분이 추락하는 수치까지도 감수합니다. 그들은 수치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합니다.

 

여기서 ‘로마 시민권’은 복음의 전달 매체로서, 수치를 명예로 반전시킵니다. 그들의 시민권은 수치를 끝까지 당하고 난 후 결정적인 순간에 복음의 수호자로 우뚝 서게 합니다. 그들의 명예는 이 세상이 제공하는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허락하시는 천상의 명예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고백했습니다(빌 3:20), 그의 복음 증언 과정을 보면 세상의 시민권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복음을 증언하는 것만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빌립보를 떠나달라는 요청(38-39)

복음 전파자는 세상을 해롭게 하는 죄인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쌍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당당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복음 전파가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38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39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38-39)

 

상관들에게 부하들은 바울의 주장을 보고했습니다(38). 즉 바울과 실라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들은 상관들은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에서 떠나기를 요청합니다(39).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전도자이면서 선량한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물론 지난밤 간수의 집에서 이루어진 사건을 묘사한 후, 다음 날 아침 그들을 석방하는 장면은 어색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실라는 이미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상관들이 직접 와서 바울 일행을 호위하며 빌립보에서 떠나게 합니다. 관리들은 군중의 호응을 얻지 못한 이 전도자들을 보호할 책임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로마 시민이라는 바울과 실라의 신분은 ‘우리 로마 사람들’(21)이 받지 못할 풍습을 전한다는 귀신 들린 여종의 주인들의 고발을 일거에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여기서도 분위기 반전과 역전이라는 누가-행전의 핵심 주제가 다시 확인됩니다. 로마 시민 신분을 드러낸 바울 일행을 통해 로마의 고위 계층과 시민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장면이 이제 펼쳐질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를 떠남(40)

복음을 전하는 것은 높임을 받아야 할 영광스러운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들이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아야 할 영광스러운 자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복음이 힘 있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세상 사람들이 전도자를 높이기는커녕 멸시하며 박해할지라고 언젠가는 이 땅에서 전도자를 높이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40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40)

 

바울과 실라는 상관의 정중한 요청을 받고, 옥에서 나와서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 형제들을 만나 위로하고 떠납니다(40). 속주의 치안 담당자들에게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한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 사과를 요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로 빌립보의 그리스도인들이 보호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와 바울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빌립보서는 확인시켜 줍니다. 특히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후원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빌 4:14-16).

바울과 실라는 선교후원자 루디아의 집으로 갑니다(40). 루디아는 그에게 후한 대접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친밀한 관계가 바울과 교회 사이에서 계속 이어졌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만난 형제들을 격려하고 빌립보를 떠납니다. 누가는 뒤에 남았다가 20장의 빌립보 장면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복음 전파는 정죄 받을 일이 아니며, 복음 전파자는 세상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습니다. 세상을 해롭게 한다고 생각해서 핍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음 전파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며, 우리는 복음을 전해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도자를 귀하게 여기며 높여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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