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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7-01)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의 전도 여행

사도행전 17장 1-15절


 

같은 복음을 들어도 사람에 따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다릅니다. 그런 이유는 말씀을 듣는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세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지 실망하지 말고 계속해서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사명 때문입니다.

 

  • 본문은 데살로니가(1-9)와 베뢰아에서의 사역(10-15)으로 다룹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관례대로 회당으로 가서 말씀을 강론하여 많은 회심자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성공적인 사역은 전통 유대인들을 자극하였습니다. 결국, 바울은 베뢰아로 이동해서 사역해야만 했습니다. 베뢰아에서는 데살로니가에서보다 더 성공적이었지만, 데살로니가로부터 온 적대자들로 인해 다시 아덴으로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사역(1-9)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다스리신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따라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울은 회당에서 구약의 말씀을 강론으로,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 의해 고난 겪어 돌아가신 후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예정된 사실임을 증명합니다.

 

1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1-9)

 

본문 1-9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는 바울(1-4)과 그 사건으로 적대적인 유대인들에게 고난 당하는 바울(5-9)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선교 전략에 바울의 전략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1)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1-4)

 

바울과 동료들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 최고 지휘관인 카산더(Cassander)에 의해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 건설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점령하에 있던 이 도시는 로마에 충성한 대가로 자유 도시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체 정부와 법률을 가지도록 인정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자연적인 항구가 있었고, 로마로 통한 에그나티아(Egnatia)가 놓여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출발한 큰 길은 아드리아해에서 중동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무역과 상업 외에도 대도시에 있던 사회의 제반 악들도 번성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제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가지고 데살로니가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제 복음은 데살로니가를 통해 전 세계에 빠르게 퍼질 것입니다. 이때 바울과 동행한 사람은 실라(10)와 디모데(14)였습니다. 저자가 바울과 실라의 투옥 시점부터 주어를 ‘우리’ 대신 ‘그들’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세 사람이 데살로니가로 왔을 때, 저자는 루디아의 가정에서 갓 시작된 빌립보 교회를 보살피기 위해 그곳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중에 바울 일행과 다시 합류합니다(행 20:6). 훗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바울과 드로아에서 다시 만나기까지 빌립보에 머무는데, 이 기간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한 1년 6개월(행 18:11)과 에베소에서 사역한 2년 3개월(행 19:8-10)을 합산해 적어도 3년 9개월 이상이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은 ‘관례대로’ 회당으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누가는 이 단락에서 바울의 선교가 일상적인 방식대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면서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방식과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성경을 강론하는 방식으로복음을 전하기로 합니다.

 

바울의 강론은 두 과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 뜻을 풀어서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3). 이 구절은 누가복음 24:32에서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제자들이 깨닫게 하셨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뜻을 풀다’라는 헬라어는 ‘활짝 열다’의 의미인데, 3절에서 사용된 동사의 형태가 분사이므로 ‘열면서’(opening)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여기서 ‘열다’라는 동작을 단순히 성경을 펼치는 행동으로 제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메시지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설명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즉, 바울의 강론이 성경에 기초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둘째, 성경의 내용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증언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앞에 혹은 옆에 놓다’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앞에 놓으면서’(setting before)를 뜻합니다. 무엇인가를 상대방의 눈앞에 가져다놓고 눈으로 확인하게 하는 행동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강론을 듣는 사람들의 눈앞에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펼쳐놓았습니다. 바울의 강론이 결코 바울 자신의 생각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강론한 성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풀어서 증언하면서 강론했던 복음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과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었던 것들입니다. 그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것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선포합니다(3).

 

개역개정은 바울의 선포를 ‘전하는’(카탕겔로)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선포하다’라는 의미로 빈번하게 사용되었습니다(행 3:24; 4:2; 13:5,38; 15:36; 16:17,21; 17:13,23; 26:23). 이는 바울의 강론이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동시에 강력한 영적 도전이었음을 암시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사역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경건한 헬라인(회당예배에 참석한 이방인들)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에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4). ‘권함을 받고 따른다’는 것은 설득당해 따른다는 뜻으로, 두 단어는 설득과 따름이 대단히 강력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귀부인들은 상류층 여인들로 일정한 권력과 부를 향유한 사람들입니다.

 

(2) 데살로니가에서 당한 어려움(5-9)

 

둘째 부분(5-9)은 바울과 실라에게 찾아온 고난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에게 가장 적대적인 그룹은 동족인 유대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이 바울 일행을 시기했다고 말합니다(5: 행 5:17; 참조. 행 13:45). 그들의 시기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경외자들을 바울 일행에게 빼앗긴 것 때문일 수도 있고, ‘복음을 믿지 않은’ 유대인들이 시기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불량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키게 하고, 기어이 바울을 백성 앞에 세우려고 했지만 실패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야손의 집을 불량배들이 급습하기 전에 바울이 피하여 붙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울과 실라를 찾지 못하자 야손과 그의 형제들에게 위해를 가합니다. 여기서 ‘형제들’의 존재를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야손이 영접하고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한 것으로 보아 그 지역의 유력자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6-7절에는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한 두 가지 이유가 나옵니다. 6절에서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로 규정합니다. 그 구체적인 혐의가 7절에 나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바울이 로마 황제 대신에 예수님을 ‘임금’(바실류스 Basties)이라는 호칭으로 불렀다고 고소합니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7). 야손과 형제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를 영접했기에 같은 혐의를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것과 가이사의 칙령을 어기는 것, 그리고 예수님을 임금이라고 부른 것은 모두 하나의 위반사항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빌립보에서 간수에게 ‘주(퀴리오스) 예수를 믿으라’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이러한 고소는 다른 어떤 것보다 데살로니가행정관들 앞에서는 치명적일 수 있었습니다. 로마에 편재했던 황제숭배 사상은 로마 황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두 번째 고소는 바울과 실라에게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 나라’와 ‘다시 오실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하는 것이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야손과 형제들은 보석금을 내고 풀려납니다. 그들이 결코 바울이 범한 죄와 무관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향해야만 했습니다.

 

베뢰아에서의 사역(10-15)

복음이 세상 권력을 쟁취하려는 운동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틀린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힘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세상 나라와는 달리 사랑과 자기 분인과 은혜의 나라라는 점에서, 세상의 폭압적인 질서를 교란하는 대안적인 세력이며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를 그리스도의 통치 앞에 복종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맞는 말입니다.

 

10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10-15)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간절히 받고 날마다 성경을 통해 확증하고자 상고했습니다. 차분한 묵상이 없는 갈급함이나 열정은 거짓 목자의 노략물이 되기 쉽습니다. 묵상의 자리를 지킨 이들이 말씀 기갈의 시대를 감당할 해갈의 사명자가 될 것입니다.

 

(1) 베뢰아 사람들의 회심(10-12)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서쪽으로 75km 이상 떨어진 베르미우스 산기슭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은 에그아티아 도로를 계속 따라가는 여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으로 맨 먼저 들어갔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반응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는 현저하게 달랐습니다. 바울이 전한 말씀에 대한 반응은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둘째,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셋째,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도행전의 서사에서는 바울이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믿었다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베뢰아의 선교 보고에서만은 그들이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라는 언급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상고했다’는 단어는 '상세히 연구하면서 따져 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강론했던 성경의 구절들이 정말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지 꼼꼼하고 상세하게 연구하고 질문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자발적인 말씀 연구가 신앙 형성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또 진리에 대한 열정이 말씀을 향해 열린 자세를 갖고 생각하는 신앙을 품게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 사람들은 당연히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데살로니가보다 호의적이었던 이유를 11절에서 그들이 ‘더 너그러워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높은 신분의 헬라 여인들과 헬라 남자들이 믿음을 얻습니다(12). 이들이 상류층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은, 그들의 반응이 그것 자체로 기독교 신앙의 평가와 선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초대교회에서 이런 상류층의 회심은 희소했고 이례적이었음을 반증합니다.

 

(2) 베뢰아에서 당한 어려움(13-15)

 

하지만 베뢰아에서의 복된 사역의 열매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는 위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찾아와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서 약 7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꽤 먼 거리임에도 유대인 적대자들은 바울의 일행을 추격하여 위협했습니다. 이미 사도행전 14:19에서도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 유대인들의 집요한 반대와 추적이 루스드라에까지 이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바울은 아덴을 향해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적대자들의 서슬 푸른 위협을 피하는 것도 선교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바울은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한 신학적 주제가 아닙니다. 구원과 신앙의 근본원리이며 토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남의 삶 속에서 왕노릇 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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