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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7-02)

 


아덴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한 바울

사도행전 17장 16-34절


 

수많은 우상을 섬기고 허탄한 논쟁과 사변에 심취해 있는 이들에게 바울은 분노합니다. 아무런 자유와 생명도 주지 못하면서 인간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성의 심장이라는 아테네에 예수님과 부활을 전하여 생명을 위한 참 메시지를 던집니다.

 

 

  • ‘아레오바고의 설교’(행 17:22-31)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타문화권 선교에 있어서 어떻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좋은 모델입니다. 아덴 사람들이 자랑하던 철학을 통해 복음을 변증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설교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을 넘나들면서 그들로 하여금 영적인 무지함을 스스로 깨닫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헬라적인 개념을 사용하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복음을 전달했습니다.

 

아덴에서 복음 전하는 바울(16-2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최고의 지식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지식을 사랑하고 높은 지식을 자랑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와 주관자이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공부하고 지식들을 활용해야 할까요?

 

16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17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18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9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16-21)

 

베뢰아를 떠난 바울 일행은 아덴(아테네)로 이동합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아서 그곳 성도들을 보살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혼자서 아덴에 도착해서 아덴을 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전도를 하기 전에 전도 대상들과 풍속 그리고 종교 등을 살폈습니다. 당시에 아덴은 학문적으로 매우 발달한 지식이 있었지만, 영적인 상태는 바울을 분노케 합니다. 아덴 도시 전체가 우상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아덴을 철학의 본고장이며, 민주주의의 시장이라고 칭송하였지만, 복음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 숭배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참담한 아덴의 영적 상황에 대한 바울의 분노는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이어졌습니다(17). 바울은 여기서도 회당에 먼저 들어가 유대인들을 만나 설득하였습니다. 회당과 장터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서 날마다 변론하였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회당과 달리 광장에서는 ‘날마다’ 만났습니다. 그가 얼마나 선교에 전념하였는지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변론하다’는 데살로니가, 고린도, 에베소, 드로아 등을 선교하는 장면에서도 나오는 단어입니다(행 17:2,17; 18:4,19; 19:8). 이것은 구약을 근거로 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바울의 논쟁 대상은 주로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이었습니다(18). 두 학파는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철학 사조로 알려졌는데, 바울은 그들의 자연관, 우주관, 신관 등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지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가?’하고 바울에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말쟁이’는 새가 모이를 주워 먹듯이 이야깃거리를 모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말들을 떠들어대는 웅변가를 가리킵니다. 또 그들은 바울이 외국의 신들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호기심 많은 그들은 바울과 논쟁한 후 그에게서 더 자세한 것을 듣기 위해 아레오바고로 데려갑니다(19-20). 이곳은 법정이 아니라 다양한 민간 활동이 멸쳐진 공의회 같은 곳이었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겠느나?’ ‘알고자 하노라’ 같은 표현을 통해 강압적인 분위기보다 예의를 갖춰 바울을 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새로운 교리, 즉 새로운 종교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의 이야기를 ‘이상한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20, 참조 행 2:12), 이는 아테비인들의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을 다소 긍정적으로 누가가 묘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테네인들의 호기심은 이어지는 21절에서도 확인되고, 그 호기심 때문에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가 전개될 수 있었습니다. 21절에는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바울의 설교에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탐닉하고 있었다고 누가는 평가합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22-31)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구원에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의 학문이나 지혜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음을 줄 알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세상을 하나님께 인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2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22-31)

 

바울의 설교는 다섯 부분으로 나뉩니다. 서언(22-23), 제사가 필요 없는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24-25), 사람들에게 계시 되신 하나님 (26-27), 우상숭배 금지(28-29). 종결부(30-31)가 그러합니다. 아레오라고 설교는 철학적이고 논리적이면서 감동적입니다. 아덴 사람들의 호기심에 대해 답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먼저 아덴 사람들이 가진 종교심을 칭찬합니다. 앞에서(16)는 그들의 종교성에 분노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청중의 호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수사법적인 전략일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아테네에서 볼 수 있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을 설교 전개의 실마리로 삼습니다. 이제 바울은 이방인들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그 대상을 선포하여 알리려 합니다. 바울이 알게 하리라'(23)라고 한 단어는 직역하면 선포하다'(카탕겔로)의 뜻입니다. 이는 그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바울의 설교는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만물의 근원한 관심이 가득한 아덴 사람들에게 그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선언합니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26). 바울은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주관하심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셋째, 하나님과 사람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충분한 기회가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울은 축구합니다. 모든 것을 만드는 신의 개념은 앞서 사도행전 4:24에 등장한 바 있습니다. ‘만드시는 분’이라는 개념도 사도행전 14:25에 나옵니다. 24절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는 사도행전 7:48에 제시된 스데반 설교를 연상시킵니다. 여기서 바울이 묘사한 하나님은 만유와 만인의 하나님이지만, 유대인과 같은 특정 민족의 하나님으로 강조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하나님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만유, 만인과 같이 ‘모든’이라는 헬라어 표현이 이 단락의 24, 25, 26, 30, 31절에서 나옵니다. 루스드라 설교(행 14:6-23)와 달리 이 설교에서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적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설교를 좀 더 객관화하고 보편적인 입장에서 이해시키려는 시도입니다. 이어서 25절에서는 하나님의 자기완결성과 완전함을 강조합니다. 26절에서 바울은 인간이 사는 시간적 연대와 공간적 영역을 결정한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밝힙니다. 바울은 이런 창조의 목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려는 데 있다고 선포합니다(27). 뒤집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주전 6세기 시인 에피메니데스의 시구를 인용하여.우리는 신의 소생으로서 그 신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이 설교의 결론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29) 바울은 이 구절에 자신이 섬기는 참 하나님을 그들이 바르게 인식하고 믿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습니다. 그들은 이 ‘하나님’을 ‘신’이라는 말로 들었겠지만, 바울은 여호와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30-31절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과거 무지의 시대에 하나님은 지나치셨지만, 오늘은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며, 내일은 심판하실 것입니다. 심판의 확실한 근거로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덴 사람들의 반응(32-34)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알려주시고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것으로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찾고 있고, 알고 있습니까?

 

32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32-34)

 

이 단락은 바울의 설교에 대한 아덴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부활에 대한 바울의 언급이 아덴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바울은 그들에게 조롱을 당하였습니다(32).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바울을 따라가 회심의 은혜에 동참하게 됩니다(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가운데 아레오바고의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인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디오누시오는 후일 최초의 아덴 감독이 되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 행했던 바울의 설교는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복음적인 설교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청중의 욕구를 잘 분석했습니다. 그 시대의 종교적인 면과 문화적인 면을 통합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청중과의 접촉점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그들을 초대하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전도자들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할 뿐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을 더러운 존재로 여겼습니다. 만약 바울이 일반적인 유대인처럼 행동했다면 복음을 전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그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며 실라와 디모데가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상을 숭배하는 저들에게까지 에수님의 부활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일상의 삶 가운데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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