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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7-03)


안식일을 구별하는 자의 복

예레미야 17장 19-27절


신앙생활 중에 이와 같은 궁금함을 가져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왜 다른 종교들은 특정 절기나 자신들이 필요 때만 찾아가는데, 기독교는 매주일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과거에는 샤머니즘적인 불교도 가정이 많습니다. 가정 안에 기도의 제목이 있을 때 절에 찾아가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고 구원받고 난 후에는, 매 주일 그리고 주중에도 예배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런 신앙의 가정이 되었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훈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안식일을 범합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다윗의 위를 지켜 주시고, 예루살렘 성이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예루살렘을 불사르겠다고 하십니다. 선지자는 유다의 회복 여부가 안식일 준수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면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예배가 회복되지만 그러지 않으면 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명령(19-20)

현대 성도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제는 너무나 당연했던 주일예배가 코로나를 통과하면서 조금 힘들면 빠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은 어쩌면 예레미야 당시 유다 백성의 영적 상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기초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신앙의 기초를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9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20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인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19-20)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유다의 왕들과 모든 백성, 예루살렘 모든 주민을 향해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성문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항상 드나드는 곳일 뿐 아니라, 성의 권위를 상징하며 지도자들이 재판이나 주요 사업을 시행하는 곳이었습니다.

(1) 여호와의 명령:문에 서라(19)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선포할 말씀을 주시기 전에 먼저 선포 장소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선포 장소는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7장의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처럼 메시지와 관련해 특별히 의미가 있을 때만 지정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들이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19).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특정 성문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모든 성문을 찾아가서 그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2) 여호와의 명령 : 선포하라(20)

선포 장소가 예루살렘 모든 문으로 확장되면서 선포 대상도 전체로 넓혀집니다.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의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이 다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20).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왕궁의 통치자들부터 유다와 예루살렘의 평민들까지 빠짐없이 다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선포될 말씀이 매우 중요함을,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관련된 말씀임을 시사합니다. ‘왕들’은 원래 보좌에 앉아 통치하는 왕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폭넓게 왕의 집안에 속한 왕족들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예언자의 선포(21-27)

신약 성도들은 구약 시대처럼 율법적으로 안식일 제도를 지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우상을 숭배하여 안식을 얻지 못하는 자들(계 14:11)과 달리 모든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참된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히 4:11).

21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22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어떤 일이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함 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23그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순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아니하면 25다윗의 왕위에 앉아 있는 왕들과 고관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원히 있을 것이며 26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네겝으로부터 와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제물을 여호와의 성전에 가져오려니와 27그러나 만일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되게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하시니라(21-27)

어리석은 사람은 안식일에 일을 안 하는 것과 예루살렘 성문이 불타는 것이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백성이 누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지 못하기에 보이는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1)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21-22)

귀족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듣도록 선포해야 할 메시지는 안식일과 관련한 말씀입니다. 먼저 강한 권면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목숨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너희는 스스로 삼가서도 가능하지만, ‘너희 목숨을 잃지 않으려거든 조심하여라’로 옮기는 것이 좋다). 안식일 규정 위반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엄중한 범죄임을 시사합니다. 뒤이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가르쳐주십니다(21-22a). 첫째, 안식일에는 짐을 지거나 예루살렘 성안으로 그 짐을 들여오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안식일에는 집에서 짐을 내어가지 말아야 한다. 셋째,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이 금지 규정을 준수하면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22b).

(2) 과거 :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음(23)

첫째와 둘째 금지 명령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짐을 나르지 말라는 일반적인 언급보다는 예루살렘의 시장 경제를 전제하고 주어진 금령 같습니다. 아마도 상거래를 목적으로 유다 백성은 안식일에 짐을 예루살렘 성으로 들여오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집에서 거리로 물건들을 가지고 나왔던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 13:15에 의하면, 유다 지방에서 사람들이 안식일에도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으며, 포도주와 포도와 무화과와 그 밖의 온갖 짐을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여와 팔았습니다. 안식일은 여호와께서 조상들에게 명령하셨던 대로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안식일 규정은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으로 나옵니다(출 20:8-10: 신 5:12-14). 물론 조상들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다’(23). 여호와께서 자식을 훈육하듯이 매를 드셨지만 이들은 그분의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3) 조건문: 안식일을 준수하면(24)

현세대는 조상들의 불순종에서 떠나야 합니다. 교훈을 받지 않은 조상들과 달리 안식일 규정을 지켜 예루살렘 성문으로 어떤 짐도 들여오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낸다면, 여호와께서는 축복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조건을 말하는 24절은 21-22절의 요약입니다.

(4) 안식일을 준수한 결과(25-26)

안식일 준수에 따른 축복은 정치적 내용과 종교적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 축복으로는 다윗 왕조와 백성과 예루살렘의 보호에 관한 약속이 주어집니다(25). ‘병거와 말’로는 왕조와 백성과 예루살렘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합니다. 안식일을 준수할 때 다윗 왕조는 정치적 자주권을 지속적으로 보장받고, 백성은 안전과 자유가 확보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이방 민족들의 침략에서 자유로운 영원한 성이 됩니다. 두 번째 축복은 종교적인 것으로 성전 예배의 번창과 풍성함에 관한 것입니다(26). 안식일 준수가 유다의 정치적 독립과 안전을 보장해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예배 중심지로 만들어줍니다. 유다 전역에서 사람들이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제물’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옵니다.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은 예루살렘 주변 지역을, ‘베냐민 땅’은 예루살렘 북쪽으로 에브라임 산지 사이의 지역을 ‘평지’는 유다 산지에서 지중해 해안으로 펼쳐진 구릉 지대를, ‘산지’는 예루살렘 남쪽의 유다 산지를, ‘네겝’은 유다 산지 남쪽의 광야 지역을 가리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 때 왕궁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정치적·종교적 구심점으로 회복하게 됩니다.

(5)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는 결과(27)

안식일에 관한 가르침은 불순종이 초래하게 될 결과를 위협적으로 경고하면서 끝을 맺습니다. 27a절의 조건문은 24절의 조건문을 부정문으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여호와께서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궐들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실 것입니다. 다윗의 보좌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기 때문에 성전 모든 제사도 불가능해집니다. ‘꺼지지 않는 불’의 모티브에 의해 27절은 1-4절의 내용과 연결됩니다. 유다의 마음 판과 제단 뿔이 새겨진 죄가 여호와를 분노하게 해서 ‘영원히 타는 불’을 일으키고, 안식일 규정의 무시가 여호와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불을 놓아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안정과 예배의 회복이 안식일 준수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킬 때 왕이 왕 노릇 할 수 있고, 안식일을 지킬 때 제사와 예물이 하나님께 열납될 것입니다. 즉 하나님만 진정한 왕이시고 구원자이시고 창조주이심이 안식일 준수를 통해서 표현될 때, 모든 질서가 제자리를 찾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전적으로 내 힘과 지혜와 자원으로 해내려는 시도를 멈출 때,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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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열왕기상 서론


 

서론

G. E. Wright는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의 활동 무대’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해 나가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는 인류 역사의 축소판으로, 인류 구원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입니다. 열왕기상은 솔로몬의 왕위 계승(주전 961년경)부터 북왕국 아하시야의 통치 초기(주전 843년)까지 약 120년의 이스라엘 역사를 소개합니다. 이 안에는 다양한 사건 - 솔로몬의 왕위 계승, 성전 건축, 솔로몬의 타락과 나라의 분열, 아합과 이세벨의 바알신 숭배, 엘리야의 등장과 신앙 부흥 – 이 전개되며, 하나님의 약속, 심판, 회복의 드라마를 연출해 나갑니다. 역사의 무대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구원의 드라마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우리는 열왕기상을 통해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우리 인생의 드라마를 연출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합니다.

 

◎ 열왕기상이란?

1. 책의 이름이 ‘열왕기(列王記)’이라고 붙여진 것은 내용 안에 사울을 제외한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왕들의 통치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열왕기상하는 한 책이었으며 사무엘상하로부터 시작된 역사적인 기사의 연속으로 간주되었습니다.

2.  ‘열왕기 상·하’는 ‘사무엘 상·하’ 그리고 ‘역대상·하’처럼 하나의 책으로서 히브리 전통에서는 단순히 ‘열왕기’라고 불립니다. 이 책을 상·하로 나눈 사람들은 구역성경을 번역한 70인경 학자들입니다. 이 역본은 약 6세기 후에 제작되었습니다. 제롬은 이 두 책을 “열왕들의 책”이라 불렀습니다.

3. 본서의 저자는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예레미야입니다. 이 책을 기록하면서 다른 문서들인 ‘솔로몬의 행장’, ‘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 ‘유다 왕 역대지략’ 등을 참고하였습니다. 제목 – 그것이 영어 성경에서 열왕기상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70인역은 이들 두 책을 “왕국 3, 4서”(사무엘상하는 “왕국 1, 2서”)라 했습니다. “열왕기”라는 제목은 제롬의 라틴어 번역 본(벌게이트역)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역본은 70인역 약 6세기 후에 제작되었습니다. 제롬은 이 두 책을 “열왕들의 책”이라 불렀습니다.

 

 저자

열왕기는 이스라엘 왕들에 대한 기록인 만큼, 수백 년간 여러 사람이 기록하고 후대에 전달하여 편집한 책으로서 한 사람의 저자를 지목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탈무드는 대표 저자로서예레미야를 소개합니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이 열왕기에 언급되지 않았음에도 탈무드가 예레미야를 열왕기의 저자로 연결하는 근거는 ① 열왕기의 마지막 부분(왕하 25:27-30)과 예레미야서의 마지막 부분(렘 52:31-34)이 다윗의 자손으로서 살아남은 여호야긴 왕의 석방 사건을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② 예레미야가 유다의 멸망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의 전체왕정사를 가장 잘 알고 다룰 수 있던 사람 중 한 명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록 연대

열왕기상은 '열왕기'의 일부이므로 열왕기 전체의 연대를 살펴보는 편이 적절하겠습니다. 열왕기는 전체 약 400년간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열왕기상이 기록한 이스라엘 역사는 솔로몬의 통치(주전 970년) 즈음부터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죽음과 아하시야의 등극(주전 853년)까지다. 열왕기하는 아합의 죽음 이후(주전 853년)부터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유수(주전 586년)까지며, 마지막 부분에는 여호야긴왕이 바벨론에 잡혀간(주전 597년) 지 37년(주전 561) 만에 옥에서 풀러난 소식을 후기로 담고 있습니다. 열왕기 내에는 그 이후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귀환조서(대하 36:22,23; 스 1:1-4)나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따라서 열왕기의 최종 기록과 편집 연대는 여호와긴의 석방(주전 561년) 이후부터 포로 귀환(주전 538년) 이전 사이로 추정합니다.

◎ 역사적 배경

열왕기 상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의 내부적인 상황과 이스라엘을 위협했던 주변 강대국들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 국내적인 배경

(1) 다윗이 주전 1003년경에 이스라엘 왕국을 통합하자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누렸습니다. 점차 이스라엘은 고대 근동에서 중요한 위치로 부상하게 됩니다.

(2)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은 외교와 무역에 있어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면서, 이스라엘의 황금기를 누리게 됩니다.

(3) 솔로몬의 사후 남북으로 분열되면서 점점 유다와 이스라엘의 힘은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 국제적인 배경

(1) 당시 최대 강국인 애굽(이집트)의 세력이 쇠퇴하고 앗수르가 강성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2) 앗수르는 사르곤 왕 때 주전 722년에 북 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했습니다.

(3) 이때 바벨론이 서서히 등장하여 앗수르를 전명시키고 최대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은 앗수르가 점령하고 있던 북 이스라엘을 자동적으로 지배하였고, 나아가서 주전 586년에 남은 남유다까지 정복하였습니다.

 

◎ 중요한 신앙적 교훈

◇ 이스라엘의 성쇠 즉, 한 나라의 부흥과 발전은 외부적인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주관하신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순종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 참상, 성전파괴, 왕가의 굴욕 그리고 타국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 등 비운의 원인이, 그들 자신의 죄악과 하나님에 대한 배반의 결과였음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의 회복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태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신실하게 지키는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 내용상 구조 ◇

열왕기상 전체의 구조는 내용상 왕국의 분열 과정을 소개하는 12장을 기점으로, 크게 ‘통일 왕국 시대’와 ‘분열 왕국 시대’로 구분합니다.

Ⅰ. 통일 왕국 시대의 역사(열왕기상 1:1-11:43)

1. 솔로몬의 왕위 계승(1:1-2:46)

2. 솔로몬의 통치(3:1-11:43)

     (1) 솔로몬의 지혜(3:1-4:34)

     (2) 성전과 왕궁의 건축(5:1—9:28)

     (3) 솔로몬의 명성(10:1-29)

     (4) 솔로몬의 배교(11:1-11:43)

Ⅱ. 왕국의 분열(열왕기상 12:1-24)

Ⅲ. 분열 왕국 시대의 역사(열왕기상 12:25-22:53)

1. 여로보암의 통치(12:25-2:46)

2. 분열 왕국 초기 남북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14:21-16:28)

     (1) 남유다 왕들의 통치(14:21-15:24)

     (2) 북이스라엘 왕들의 통치(15:25-16:26)

3. 아합의 통치와 예언자의 활약(16:29-22:40)

4. 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의 통치(22: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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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7-02)


주님의 날을 구별하는 자의 복

예레미야 17장 12-18절


혹시 의지했던 사람과 가까웠던 사람에게 마음에 상처받아서 실망한 적은 없으십니까? 특별히 흠모했던 사람, 귀하게 생각했던 사람으로 상처 받았을 때, 그 후유증은 훨씬 더 심각하고 우리의 마음에 오랫동안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상황이라면, 예레미야가 비슷한 상황에서 기도했던 골방에 찾아갈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역시 자신의 민족을 가장 의지하고 함께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할 동료들에게 어려움과 핍박을 당합니다. 그와 같은 어려운 상황 중에 무엇보다 하나님 한 분께로 나아가 기도하는 자리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서 예레미야처럼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본문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훈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안식일을 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다윗의 위를 지켜 주시고, 예루살렘 성이 영영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예루살렘을 불사르겠다고 하십니다. 선지자는 유다의 회복 여부가 안식일 준수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면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예배가 회복되지만 그러지 않으면 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 여호와(12-13)

생명과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배신하여 버리고 떠난 자들은 멸망과 수치와 죽음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온갖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심판받게 된 것이 필연적 결과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칭송한 것입니다.
12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3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12-13)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화로우신 보좌시며, 시작부터 높이 계신 우리의 성소요,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사랑받은 백성임을 확신하는 찬양이며, 하나님을 모시고 그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고백입니다.
(1) 여호와의 왕권(12)
현재의 문맥에서 이 두 절은 앞 앞 단락과 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백을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전자와 관련해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고백하는 자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고, 여호와를 버리는 자는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습니다. 또 ‘우리’의 찬양에 의해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고백이 공동체의 고백으로 읽힐 수 있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로부터 구원과 의로움을 찾으면서 고난을 극복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구원의 소망이신 여호와로부터 생수의 근원을 찾아 자신들의 수치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제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부르며 그분의 왕권을 찬양합니다(12). 예루살렘의 성전 신학에 따르면, 성전은 여호와계서 현존하시는 곳입니다. 성전 지성소의 벽과 중앙으로 펼쳐진 두 그룹의 날개(왕상 6:27)는 여호와의 보좌를 상징합니다. 왕이신 여호와께서 두 그룹의 날개에 않아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분의 왕권은 처음부터 드높았습니다. 누구의 도전도 허락하지 않는 흔들림 없는 왕권이었습니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히 계셨나이다”(시 93:2). 영원부터 영원까지 왕이신 여호와가 바로 이스라엘이 소망을 두어야 할 분입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우상이나(2) 사람에게(5) 있지 않고, 예루살렘 성소에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여호와에게만 있습니다.
(2) 주를 버리는 자의 수치(13)
여호와를 영원하신 왕으로 찬양하는 자들에게는 소망이 있지만, 그분을 버리는 자는 수치를 당합니다(13).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떠나서는 수치와 멸망과 재앙만 있을 뿐입니다.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는 ‘죽을 운명이 되다’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병행하는 ‘수치를 당할 짓이라’와 관련해 덧없음과 허무함의 비유적 표현으로 읽는 것이 더 좋습니다. 땅바닥에 글자가 바람이 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들의 운명도 그러할 것입니다. 또 넓은 문맥에서 보자면, ‘흙에 기록하다’는 1절의 ‘마음 판에 새기다’에 연결되기도 합니다. 마음 판에 새겨진 유다의 죄는 어떤 경우에도 지워지지 않고, 흙에 기록된 여호와를 버린 자들의 운명은 바람에 흙먼지가 날려가듯이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백(14-18)

예레미야의 기도는 단순히 개인적 원한으로 하나님께 원수를 갚아 달라고 간구한 것이 아닙니다. 악인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이르고 의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진리와 생명의 길로 행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14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5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16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17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18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게 마옵소서 그들은 놀라게 하시고 나는 놀라게 하지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14-18)
완악한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와 그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셨을 때 유대인들이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말하며 조롱하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입니다.
(1) 구원 간구(14)
예레미야의 탄식은 찬양이 곁들여진 치유와 구원의 간구로 시작합니다.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4). 여호와 때문에 당하는 부끄러움(15:15)이기에, 여호와만이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또 여호와께서 분노로 채우셔서 생긴 고통과 상처(15:18)이기에, 여호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치료해줄 수 없습니다. 주변에는 대적만 가득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고난과 재앙과 질병에 대한 ‘고침’은 여호와의 ‘구원’을 의미합니다(참조. 출 15:26; 신 32:39) 간구의 동기로 제시된 찬양은 여호와의 구원 능력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찬양을 받으시는 분만이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고, 구원하신 분만이 백성의 찬양을 받으십니다. 여호와의 능력을 인정하는 자만이 그분께 구원을 간구하고, 그분의 구원을 경험한 자만이 그분께 찬양을 돌립니다. 이런 배경에서 기도자들은 여호와의 구원을 찬양할 수 있게 구원해달라고 간구합니다(참조. 시 6:4-5; 22:21-22). 이스라엘의 시편 전통에서 간구와 찬양은 거의 짝을 이루며 나타납니다.
(2) 대적의 말 인용(15)
예레미야가 간구하는 치료와 구원은 물론 개인적인 차원에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 선포자로서 겪는 고난과 좌전, 곧 적들의 조롱이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입하게 할지어다’ 하며 예레미야를 무시했습니다(15).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영원히 타는 분’을 선포합니다(4). 전통적인 구원신학에 길들어진 자들은 예레미야의 심판 메시지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의 탄식과 간구에 여호와께서 답하지 않으신 이유를 충분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선포한 심판이 이뤄져 유다가 멸망하기까지 예레미야는 계속 무시당하고 조롱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무죄 주장(16)
적들의 조롱에 맞설 수 없는 예레미야는 자신에 대한 판단을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시는’(10) 여호와께 맡깁니다(16).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기에 앞서 먼저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하고 자신의 성실함을 주장합니다. 15절과 함께 읽으면, 예레미야는 자신이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에 적들로부터 조롱을 당한다는 말로 여호와께 책임을 돌립니다. 한편, ‘목자’는 주로 왕과 같은 통치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예언자에게 적용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목자가 먹잇감을 찾는 들짐승을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것처럼, 예레미야도 적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맡겨진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했음을 주장한 후에 예레미야는 심판 메시지와 관련해서 자신의 활동을 변호합니다.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16).
(4) 신뢰 고백(17)
예레미야가 개인적으로 유다의 멸망을 바라고 심판을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멸망과 유배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전한 것입니다. 아마도 적들은 심판 메시지에 그의 악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고 예레미야를 멸망을 바라는 자로 고발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 의로운지는 ‘재앙의 날’에 분명하게 드러나기에, 예레미야는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하고 호소합니다(17). 여호와께서 예언자에게 두려움이 되신다는 말은 그의 사역이 여호와에 의해 인정받지 못함을, 곧 선포한 대로 이뤄지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재앙의 날’에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피난처로 경험하고, 그의 선포를 부정했던 자들은 여호와를 두려움으로 만나게 됩니다.
(5) 구원 간구(18)
박해하는 자의 멸망이 다른 한편으로는 박해를 당하는 자의 의로움을 확인해주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적들의 멸망을 여호와께 간구합니다(18). ‘재앙의 날’은 예레미야가 치욕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날이자. 그를 박해한 자들이 최종적으로 치욕과 두려움에 떨어지는 날입니다. ‘치욕을 당하다’와 13절의 ‘수치를 당하다’는 같은 동사로, 예레미야를 박해하는 자들이 바로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린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놀라게 하다’와 17절의 ‘두려움’도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는 ‘피난처’가 되시고, 그를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되십니다. 적들의 멸망을 간구하는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와 적들의 고발에 맞서 자신을 변호하는 16절의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현대적 사고에 따른 판단입니다. 박해자들에 대한 복수 요청은 여호와의 공의에 근거한 사법적 호소로, 현재의 문맥에서는 15절의 조롱과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두 절은 동사 ‘임하게 하다’에 의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적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면서 예레미야를 조롱하고, 예레미야는 ‘재앙의 날을 그물에게 임하게’ 해달라고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예언자의 신적 정당성이 부정당하는 곳에서는 선포의 성취를 통해서만 그 정당성이 입증될 수 있습니다. ‘재앙의 날’이 임하느냐 그러지 않느냐에 따라 예레미야가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언자인지, 그렇지 않은지가 결정됩니다.


예레미야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명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사명 때문에 고난을 당해 힘들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의뢰할 뿐, 사람을 의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불신자들과 신앙에서 떠난 자들, 신앙의 열정을 잃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비록 그 일이 쉽지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구한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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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7-01)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과 저주의 심판

예레미야 17장 1-11절


마음에 품은 생각들이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곳으로 고정하고 나가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부자가 되려고 남을 속였던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우상과 돈에 대한 생각이 더 크고 강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유다의 죄는 그들 마음에 깊이 뿌리박혀 있고 자녀들도 답습합니다. 사람을 의지해 하나님을 저버리는 사람은 저주를 받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결실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아니면 사람을 의지하는지에 따라 행한 대로 보응하실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지워질 수 없는 유다의 죄(1-4)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우상숭배가 습관이 되고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태도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만 잘못되고 그들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자녀들에게 유전(遺傳)됩니다. 부모들이 우상을 추구했기 때문에 자녀들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삶에 모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 백성의 우상숭배는 자연스럽게 후손의 삶에 깊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1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2그들의 자녀가 높은 메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3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지경의 죄로 인하여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4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대적을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로 맹렬케 하여 영영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니라(1-4)

유다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실 것이며 유다의 거민들은 의인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그들의 마음 판과 제단 뿔에 새겨졌습니다.

(1) 죄의 고발(1-2)

‘유다의 죄’가 어떤 경우에도 지워지지 않게 촉이 금강석으로 된 철필로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깊이 새겨졌습니다(1). 여호와의 말씀이 새겨져야 할 마음에(참조, 신 6:6; 렘 31:33) 죄악이 기록됐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마음은 사고하고 계획하고 판단하는 신체기관입니다. 부패한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죄뿐입니다. 범죄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본성에 따른 필연이 됐습니다. 제단 뿔은 특히 속죄제 제물의 피를 바르는 곳으로,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제단을 성결하게 합니다(레 16:18-19). 제단 뿔이 속죄의 기능을 상실하기에 마음 판에 새긴 유다의 죄를 속할 수 있는 길도 완전히 사라집니다. 제단 뿔에 새겨진 유다의 죄는 다른 한편으로는 제의적 경건에 대한 고발이기도 합니다. 유다는 죄에서 떠나는 대신에 속죄제의 피를 제단 뿔에 발랐습니다. 죄를 지을수록 점점 더 제단 뿔은 짐승의 피로 얼룩졌습니다. 피로 더럽혀진 제단 뿔은 유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마음판에 새겨진 유다의 죄는 풍요 제의의 우상숭배였습니다. 여호와를 기억해야 할 유다 사람들이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기억했습니다(2). 다시 말해 가나안의 풍요 제의에 깊이 연루되었습니다.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행을 즐기던 자들이(2:20) 여호와의 성전을 찾아와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아세라’는 원래 가나안의 최고신 엘(El)의 반려자로 풍요를 주관하는 여신이었지만, 때로는 제단 곁에 세워놓은 나무 기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2) 징벌의 서언(3-4a)

제단 뿔을 짐승의 피로 얼룩지게 만들고 온 땅을 우상의 제단들과 아세라들로 더럽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로 징벌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의 모든 재산과 보물을 적군에게 그들의 전리품으로 내어주십니다(3). 풍요를 기원하며 우상을 찾아간 결과, 유다 백성은 여호와께서 주셨던 모든 풍요를 빼앗깁니다. 우상의 제단을 쌓았던 산당들도 침략자들에 의해 짓밟힙니다. 산당의 유린은 우상의 실체가 헛것임을 증언합니다. 유다가 여호와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든 풍요 제의의 우상들은 숭배자들은 물론 자신들도 지키지 못합니다. ‘미운 물건의 시체’인(16:18)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우상처럼 시체가 된다. 침략자들에 의한 약탈과 짓밟힘으로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가 누그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노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로 유다를 남김없이 태워버리십니다.

(3) 징벌의 이유(4b)

유다는 여호와께서 상속 재산으로 준 가나안을 내놓고 알지 못하는 땅으로 가서 자신들을 멸망시킨 원수들을 섬겨야 합니다(4). 여호와께서 주신 자기 땅에서 자유민으로 살던 유다가 이방 땅에서 정복자들의 종이 됩니다. ‘영원히 타는 불’은 여호와의 분노뿐만 아니라 유다가 저지른 죄의 심각성도 함께 보여줍니다. 유다의 죄가 마음 판과 재단 뿔에 촉이 금강석으로 된 철필로 새겨져 영원히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도 꺼지지 않고 영원히 타는 불로 그들을 징벌하십니다.

 

저주와 축복(5-8)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풍요와 쾌락을 너무나 쉽게 요구하고 섬기는 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른들이 물질과 쾌락을 추구하고 마음 판에 새겨져서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어른들이 추구하게 되니깐 자녀들도 그것을 보고 따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물질, 성공, 부, 명예 그리고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5-8)

거짓 선지자들은 유다 백성에게 예루살렘의 성벽과 성전을 믿으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힘을 삼는 행위와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닌 성전이나 성벽을 믿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결국 그들은 물이 없어 사람이 살지 않는 간고한 땅으로 쫓겨날 것입니다.

(1) 저주받은 삶(5-6)

사람을 의지하는 자의 저주받은 운명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복 받은 삶은 지혜문학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입니다. 인생은 의지하는 대상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인생입니다(5). 자기 능력과 사회·정치적 자산을 의지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게 됩니다(6). ‘사막의 떨기나무’는 척박한 환경에서 겨우 생명을 보존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식물을 상징합니다. 여호와를 떠나 사람을 의지하는 자에게 이 세상은 동식물도 살아가기 힘겨운 광야가 됩니다.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는 형편이 앞으로도 나아질 여지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간조한 곳은 메마른 암석 지대나 용암으로 덮인 벌판을 ‘건전한 땅’은 소금기 있는 땅을 가리킵니다. 돌로 덮인 땅이나 소금 땅에서는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것처럼, 그 마음이 여호와를 떠난 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에 살아야 합니다. 그는 힘겹게 살다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2) 복 받은 삶(7-8)

둘째 부류는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으로,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습니다(7-8). 메마른 땅에서 힘겹게 생명을 유지하는 떨기나무와 달리, 시냇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물을 충분히 공급받기에 무더위와 가뭄이 닥쳐와도 싱싱한 생명력을 잃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의지하는 사람은 생수의 근원으로부터 생명수를 공급받기에 환난과 재앙이 닥쳐와도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풍요로운 삶을 즐깁니다. 축복과 저주는 우연이나 운명의 산물이 아닙니다. 사람이 누구를 의지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에 저주가 주어질 수도, 축복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행위에 따라 보응하시는 여호와(9-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분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꿰뚫어 보시기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정확하게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행동뿐 아니라 마음의 동기도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9-10)

사람은 탁월한 거짓말쟁이입니다. 마음이 너무나 부패해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계산된 행동인 경우도 있습니다.

(1) 누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가?(9)

사람을 의지하는 자가 저주를 받고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가르침이 바르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누가 사람을 의지하고 누가 여호와를 의뢰하는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면, 사막의 떨기나무와 물가에 심어진 나무를 구별하는 것도 불가능해집니다. 그런데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없고(9),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누가 사막의 떨기나무이고 누가 물가에 심긴 나무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판단해야 한다면, 의인의 축복과 악인의 저주에 관한 가르침은 더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주체가 여호와시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집니다. 은밀한 곳까지 들여다보시는 분께서 최종 판단자시기 때문에, 곧 의로우신 재판관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은 언제나 유효합니다.

(2) 마음을 살피시는 여호와(10)

사람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계신 여호와께서 각 사람이 살아온 길을 빠짐없이 살피시고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갚으십니다(10). 악인의 승리와 번성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교활한 자들이 때로는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잘 자랄 때도 있지만, 여호와는 이들의 감춰진 마음을 모두 아십니다.

 

불의한 자들의 일시적 성공(11)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무와 같이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생명수 강가에 뿌리를 박고 있다면, 결국에는 당신의 인생에는 아름다운 결실을 거두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 건조한 기후에 있는 떨기나무 같다면, 반드시 그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그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매우 힘들 수 있습니다. 그 자리가 생명의 자리가 아니라면 지금 그 자리를 떠나시길 바랍니다.

11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1)

다른 새의 알을 훔쳐서 부화시킨다는 속설이 있는 자고새의 비유를 들어 재물을 탐하는 부자의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부화한 다른 새가 때가 되면 품어준 자고새를 떠나가는 것처럼, 불의한 방법으로 긁어모은 재산도 마찬가지입니다. 탈법과 불법을 마다하지 않고 애써 모아보지만, 그런 재산은 평생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의 중년에’(한창 때) 불법적으로 쌓은 재물은 갑자기 사라져버립니다.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기에, 때가 되면 가짜 주인을 떠나 원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적한 부자는 그 부를 즐길 수 없고, 결국은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이치를 잘 알기 때문에 결코 ‘불의로 치부하는 자’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 여기고 자신의 영적 상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자신을 속이는 것일지 모릅니다. 매일 하는 묵상과 매주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진실함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늘하던 신앙생활, 늘 드리던 예배가 아니라 매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행하겠노라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속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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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6-02)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징벌하시는 목적

예레미야 16장 14-21절


‘먹구름 속에서도 태양은 빛난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비행기 타는 것이 일상적인 시대에는 우리가 몸으로 경험한 지식 중에 하납니다. 아무리 날이 어둡고 비바람이 쏟아져도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르면 구름 위에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있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는 마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진 심판의 날을 의미하는 그런 상징적인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먹구름 위에 찬란한 태양처럼 하나님께서 여전히 은혜와 자비의 빛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선포는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멸망에 집중하지만, 멸망이 선포의 목적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심판 이후에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을 내다봅니다. 아울러 민족들이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나아올 밝은 미래도 내다봅니다.

 

새로운 출애굽(14-15)

예레미야서를 읽다 보면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예루살렘과 유다를 완전히 버리실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은 오히려 그 백성에게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에게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고 벌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다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15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 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14-15)

앞 본문 1-13절까지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변하고 아무런 근거 제시 없이 유다의 회복이 선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회복시키신 후에 출애굽의 하나님이 아니라 출바벨론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1) 두 번째 출애굽(14-15a)

첫 번째 출애굽을 기억에서 사라지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새로운 출애굽이 선포됩니다. 가나안 땅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불순종한 자들을 이방 땅으로 내던지신 여호와께서 이들을 다시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는 두 번째 출애굽만 기억하게 됩니다. 구원사의 출발점이자 모형인 첫 번째 출애굽이 두 번째 출애굽에 자리를 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온 세상에 쫓겨난 자들을 여호와께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올라오시는 출 바벨론의 구원사가 여호와 신앙의 근간이 됩니다.

(2) 귀환 약속(15b)

두 가지 점에서 두 번째 출애굽이 첫 번째 출애굽을 능가합니다. 먼저 후자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전자는 ‘북방 땅과 모든 나라’에서 인도해냅니다. 구속사의 공간적 범위가 애굽에서 쫓겨난 이스라엘 자손이 살고 있는 모든 나라로 확장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여호와의 허락 아래 애굽으로 내려가고, 현세대는우상숭배와 불순종의 죄 때문에 여호와의 징계를 받아 이방 나라들로 쫓겨납니다. 출애굽이 약속의 이행이라면, 출바벨론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은총에 속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유다의 자손들과 주전 722년에 멸망 당하고 사로잡혀간 북왕국의 자손들을 포함합니다. 마찬가지로 ‘북방 땅’도 바벨론은 물론 앗수르까지 포함합니다.

 

누구도 피하지 못할 심판(16-18)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겼던 자들이 아무런 고통이나 어려움 없이 평안히 회복될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대가를 배로 치러야만 회복이 가능합니다. 죄로부터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죄의 대가를 배로 치르겠다는 각오를 함께 다지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에야 진정한 회복이 가능합니다.

16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 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17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 18내가 우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16-18)

예레미야는 다시 유다가 대적에 의해 유린당한ㄹ 것을 예언합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낚고, 사냥꾼이 동물을 잡듯이 유다는 바벨론에게 유린당할 것입니다. 이는 바벨론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다 백성의 행위가 악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꼐서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셨기 일어나는 일입니다.

(1) 비유적 심판 선언(16)

주제가 다시 심판으로 바뀝니다. 어부와 포수의 비유를 사용해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집행될지를 극적으로 기술합니다(16). 여호와께서 먼저 어부가 낚시로 고기를 잡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 올리십니다. 설혹 그들 가운데 일부가 어부의 낚시를 벗어날지라도 살아난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다시 많은 포수를 보내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틈’을 샅샅이 뒤져 숨은 자들을 찾아내 사냥하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눈을 피해 몸을 감출 수 있는 안전한 은신처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부와 포수의 비유가 하나의 심판을 말하는지 또는 두 개의 심판을 말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둘 다 역사적 해석이 가능합니다. 후자의 입장에 따르면 어부의 비유는 주전 597년의 제1차 바벨론 침공이고, 포수의 비유는 주전 587년의 제2차 바벨론 침공이 됩니다. 전자의 입장은 심판의 혹독함과 철저성을 보여주려고 두 비유를 보충적으로 사용했다고 봅니다. 이 경우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는 주전 587년의 재앙과 관련된 비유가 됩니다. 완전한 멸망과 멸망 이후의 회복을 내다보는 문맥은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여호와의 심판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하지 못합니다. 모두 여호와께서 보내신 어부와 포수(바벨론)에 의해 죽거나 사로잡힙니다.

(2) 심판의 이유(17-1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파국적 심판에 넘기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17). 여호와께서 두 눈으로 이들의 모든 길과 죄악을 직접 보셨기에 그분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은 없습니다. 그분이 보낸 심판을 피해 살아남을 길은 없습니다. 넓은 문맥에서 보면, 17절은 백성의 질문(10)에 대한 비판적 답변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의 행위와 죄악을 직접 살펴보시고 어부와 포수를 보내시는데, 백성은 자신들의 죄악이 무엇이기에 ‘이 모든 큰 재앙’을 선포하시냐고 묻습니다. 이들이 여호와께 범한 죄를 인정하든 안하든, 그분이 모든 것을 보셨기에 재앙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거나 달리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보신 이들의 죄악은 11절의 경우처럼 우상숭배였습니다. 이들은 우상들로 여호와의 기업을 가득 채워 그분의 땅을 더럽혔습니다(18). 가나안은 여호와의 땅이기에 부정한 것을 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여호와만 섬겨야 했습니다. 우상을 좋아하는 자들은 여호와의 기업에서 떠나 우상들에게 속한 땅으로 가야 합니다(13). ‘가증한 것’과 동의적 표현으로 사용된 ‘미운 물건의 시체’는 우상의 본질을 신랄하게 폭로합니다(18). 우상을 가리키는 ‘미운 물건’(혐오스러운 것들)에 ‘시체’를 덧붙여 한정했습니다. 우상은 시체처럼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입니다. 시체에 불과한 우상을 섬기는 자는 시체가 될 뿐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자들이 매장되지 못한 시체가 되어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됩니다(4).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아마도 죗값을 반드시 묻겠다는 여호와의 심판 의지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현재 문맥에서는 16절을 배경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어부를 보내 잡아 올리시고, 뒤이어 사냥꾼을 보내 남은 자들은 잡아내십니다.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죄악’을 낱낱이 보신 분께서 “그들의 악과 죄”를 갑절로 갚으십니다.

 

민족들의 깨달음(19-2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온 세상의 소망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는 이런 역설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신다면 우리의 인생에도 전화위복의 역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는 역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오직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노라고 고백하는 거룩한 주의 제자들 되시길 바랍니다.

19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20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19-21)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임이시며, 요새시며, 환난 날의 피난처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나아와 자기 조상들이 계승해 준 우상들이 거짓되고 무익함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 참된 신이심을 인정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1) 예레미야의 찬양(19a)

예레미야의 시선이 하나님 백성의 절망적 현재에서 민족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긍정적 미래로 옮겨집니다. 민족들이 어떤 계기로 여호와를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되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 단락은 ‘여호와로 시작해서 여호와’로 끝납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전체를 감싸면서 이방 신들을 헛것으로 만듭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 날의 피난처’라 부르며 신뢰를 고백합니다(19). 여호와는 고난을 당할 때 힘을 주셔서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고, 적이 공격할 때 요새가 되셔서 보호해주시는 분이고, 환난을 당했을 때 피난처가 되셔서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2) 민족들의 고백(19b-20)

19b-20절은 예레미야가 인용하는 민족들의 고백입니다. 예레미야는 아마도 이상 가운데 민족들이 땅 끝에서 여호와를 찾아오는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이들은 자기네 조상들이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을 물려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조상대대로 숭배해왔던 신들이 거짓 환상이나 심어주는 쓸모없는 헛것임을, 곧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신으로 만들어 섬겨온 것임을 깨닫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신은 신일 수 없습니다. 사람을 만드신 분만이 신으로 섬김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만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민족들의 힘과 요새와 피난처가 되십니다.

(3) 여호와의 응답(21)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21). 여호와께서 당신 능력과 권세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민족들에게도 계시하셔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당신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이번에’는 약속의 성취를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알다’는 인식을 넘어 관계성의 인정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여호와를 인정하고 섬기다’를 의미합니다. 아마도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귀환에서 여호와의 손(권세)과 능력을 보고 여호와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그분의 땅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우상의 땅인 이방 땅으로 쫓겨나고, 우상을 숭배하던 민족들은 자기네가 섬기는 우상의 실체를 깨닫고 여호와께 나아옵니다.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으로 부르는(10) 이스라엘은 그분을 버리고, 사람이 만든 것을 신으로 섬기던 민족들은 여호와의 능력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힘과 보장과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예와 위신이 땅에 떨어지더라도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 넘겨주셨습니다. 하지만 환란 날이 오면,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눈으로 확인하고 허탄한 신들의 믿었던 죄를 회개하며 주께 나올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심이 이곳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끊어내기 위해 이같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심판 중에도 주님께로 돌아와 우리의 힘과 보장과 비난처가 되신 주님을 바라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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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6-01)


비상식적인 명령으로 심판을 예고하심

예레미야 16장 1-13절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일들의 과정과 결과를 보면서 좋은 교훈을 삼는다는 말을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말로 반면교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을 우린 많이 봐왔습니다. 훌륭한 스승은 자신을 성공시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끝없는 나락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옛 선조들의 삶을 통해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조상들보다 더 악하게 행동하여 하나님의 심판 선고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생활로 유다 백성들에게 닥칠 심판을 보여주셨습니다. 예레미야에게 하신 세 가지 금지 명령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명령이었으며, 예레미야에게는 많은 손해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말 하지 않고 모두 순종했습니다.

 

심판의 표적이 된 예언자의 삶(1-9)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등의 일은 살다 보면 당연히 겪게 마련인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을 통해 경험하는 기쁨, 슬픔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예루살람과 유다 백성에게서 이 당연한 인생사들조차 빼앗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3이 곳에서 낳은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머니와 그들을 낳은 아버지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오니 4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묻어 주지 않아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리라 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6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머리털을 미는 자도 없을 것이며 7그 죽은 자로 말미암아 슬퍼하는 자와 떡을 떼며 위로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그들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상사를 위하여 위로의 잔을 그들에게 마시게 할 자가 없으리라 8너는 잔칫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 9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 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1-9)

여기에 모아진 세 개의 표적 행위는 모두 예레미야의 삶을 심판 메시지로 사용합니다. 여호와께서 2-4절에서는 예레미야에게 혼인하지 말고 독신으로 살 것을 5-7절에서는 조문하러 초상집에 찾아가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8-9절에서는 결혼을 축하하러 잔칫집에 들어가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 고대 세계에서 독신은 비정상이었습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아내를 맞아 자녀를 낳고 가정을 꾸려야 했습니다. 독신자는 후손이 없기에 자신의 죽음과 함께 땅에서 완전히 사라집니다. 장례식과 결혼식은 인간사의 가장 중요한 두 행사였습니다. 집안이 피폐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도 성년이 되면 결혼하고, 사람이 죽으면 장례가 치러집니다.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몰살당하지 않는 한 결혼식과 장례식이 사라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여호와는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비정상적인 예레미야의 삶을 통해 유다에 임할 재앙이 얼마나 참혹하고 파국적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더는 장례식과 결혼식이 없을 정도로 유다가 철저하게 멸망합니다.

(1) 독신 생활(1-4)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이 땅에서’ 결혼하지 말고 독신으로 지낼 것을 명령하십니다(2). 고대 세계에서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습니다. 사회적·경제적 측면에서도 중요했지만, 무엇보다도 집안의 유지에 절대적이었습니다. 아내를 맞아 자녀를 낳는 것은 창조의 질서에 속했습니다(참조. 창 1:27-28), 결혼해야 후손을 통해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내와 자녀가 없는 예레미야의 삶은 미래를 전혀 소망할 수 없는 유다의 파국적 운명의 상징입니다(3-4). 대를 이어갈 핏줄이 없기에 예레미야가 그의 죽음과 함께 완전히 끝장나는 것처럼, 백성을 다 잃은 유다도 멸망의 심판을 이겨내지 못하고 땅에서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치명적인 질병과 전쟁으로 다 죽어갑니다. 부모와 자녀가 모두 ‘독한 병’(문자적으로 질병들의 죽음들)으로 죽지만, 그들을 위해 곡을 해주거나 물어줄 사람이 없어 시체가 거름더미처럼 땅에 내버려집니다. 죽음의 질병을 피한 사람들은 ‘칼과 기근’으로 죽어가지만, 장례를 치를 사람이 없어 시체가 날짐승과 들짐승의 먹이가 됩니다. 예루살과 유다는 회복 불능의 멸망에 떨어집니다.

(2) 초상집 출입 금지(5-7)

여호와의 두 번째 명령도 가히 충격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5). 초상집에 문상 가는 것을 예레미야에게 금하십니다. 이는 사회적·종교적 통념에 반하는 여호와의 명령입니다. 이로써 여호와는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관습마저 지켜질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일어날 것을 보여줍니다.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예외 없이 모두 죽음에 뛰어집니다. 재앙이 전면적이고 죽음이 모든 사람을 덮치기 때문에 이웃의 초상에 눈 돌릴 여유가 없습니다. 집안마다 초상이 나서 이웃의 초상집을 찾아가 위로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초상집은 제의적으로 불결해서 이웃이 음식을 만들어 가져왔는데, 다들 상을 당하기에 음식을 가져다줄 사람이 없습니다. 부모가 죽어도 찾아와서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재앙이 너무 엄청나서 장례와 애도 의식마저 지켜지지 못합니다. 시신이 묻히지도 못합니다. 죽은 자를 위해 곡하지도, 자기 몸을 베거나 머리털을 밀지도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몸에 상처를 내거나 머리를 미는 풍습을 엄격하게 급하였지만(참조, 레 19:27-28; 21:5; 신 14:1), 민간에서는 널리 행해졌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파멸적 재앙이 덮치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서 당신의 평강과 인자와 사랑을 거두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거듭 여호와께 반역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여호와의 인자와 사랑 덕분에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분의 공의 앞에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인자’는 공동체를 향한 여호와의 구속적이고 신실한 사랑을, 일차적으로 ‘자궁’의 의미를 갖는 ‘사랑’은 모성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3) 잔칫집 출입 금지(8-9)

세 번째 표적 행위는 주제에 있어 첫 번째 표적 행위에 연결됩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잔칫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먹거나 마시지 말라”(8)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의 잔칫집은 결혼식과 축하연이 베풀어지는 잔칫집을 가리킵니다. 결혼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지내야 하는 예레미야는 이웃의 결혼 잔치에 함께하는 것도 금지를 당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결혼식이 거행되는 일이 앞으로 없어집니다. 여호와께서 하객들이 즐겁게 떠들며 노는 소리와 기쁨에 들뜬 신랑 신부의 음성을 사라지게 하십니다. 결혼이 없어지기 때문에 후손이 없고, 후손이 없어지기 때문에 대가 끊어집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죽은 자를 애도하는 울음과 신랑 신부를 축하하는 기쁨이 있기 마련인데, 이스라엘에는 초상도 결혼도 완전히 사라집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됩니다.

 

재앙에 관한 질문과 답변(10-13)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선지자들에게 비상식적 삶과 기이한 행동 등을 통해 예언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예레미야의 상식적이지 않은 삶과 행동을 통해 보이신 심판 예언 속에서, 마지막 날에 예비될 심판을 기억하고 그날을 준비하는 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10네가 이 모든 말로 백성에게 말할 때에 그들이 네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큰 재앙을 선포하심은 어찌 됨이며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냐 하거든 11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조상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12너희가 너희 조상들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행하고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13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10-13)

앞의 세 표적 행위에는 심판의 원인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10-13절에 따르면 우상숭배와 불순종이 멸망과 유배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자신들이 심판을 받는 이유를 물을 때 대답할 내용을 예레미야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1)재앙의 원인에 관한 질문(10)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미리 백성의 반응과 그때 그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답변을 알려주십니다. 예레미야의 선포를 들은 자들이 나름대로 먼저 반응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큰 재앙을 선포하심은 어찌 됨이며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냐?”(10). 현재의 문맥에서 이들의 질문은 다른 한 편으로는 죄에 대한 이들의 무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들은 그처럼 엄청난 심판에 떨어져야 할 만큼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범한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2) 재앙의 원인에 관한 답변(11-13)

여호와의 답변은 우상숭배와 불순종이 멸망의 심판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임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너희 조상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 거절하고 나를 버려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 우상숭배와 불순종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여호와를 버리고 그분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조상 때부터 계속된 뿌리 깊은 죄악인데,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시대에 ‘인자와 사랑’을 거두기로(5) 결심하신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너희가 너 조상들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12).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조상들보다 더 악했습니다. 현세대의 죄악은 여호와께서 인내하실 수 있는 한계를 넘었습니다. 이들의 고집스러운 불순종이 여호와로 하여금 더는 은혜를 베푸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13b). 여호와께서 이들을 ‘이 땅에서 쫓아내어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시고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십니다(13a). 우상숭배의 죄를 범한 자들에게 우상숭배의 징벌이 선고됩니다. 이를 다음과 같은 풍자와 조롱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은 내 땅이기에 여기서는 안된다. 너희가 마음껏 우상을 숭배할 수 있도록 도와겠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 땅으로 너희를 내던져줄 테니 거기서 그토록 좋아하는 우상을 실컷 섬기며 살아라.’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경험하는 일들, 가끔은 힘들고 귀찮게 여겨지는 모든 일상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살전 5:18). 살다 보면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슬픔을 경험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감사의 제목입니다. 가족과 직업과 감당해야 할 여러 일이 있음을 감사하고, 하나님을 떠나 이 모든 것을 빼앗기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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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5-02)

 


예레미야의 한탄과 하나님의 응답

예레미야 15장 10-21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한숨, 우리의 고통, 우리의 눈물의 의미를 아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사정과 마음을 나누시길 바랍니다. 예레미야처럼 우시기도 하시고 탄식도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탄식에 응답해주신 것처럼 우리에게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진노를 선포하는 예레미야에게 늘어나는 것은 대적뿐입니다. 점점 악화되어 가는 주변 상황에 예레미야는 지치고 좌절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가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이 자신을 속였으며, 여호와 때문에 수치를 당한다고 호소합니다.

 

예언자의 탄식(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속사정도 알고 계십니다. 혼자 끙끙대지 말고 모든 것을 하시는 하나님께 털어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렇기에 예레미야는 자신이 억울하게 고난당하고 따돌림 받는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었던 것입니다.

10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10)

사람들과 싸우며 살 수밖에 없는 신세를 한탄하며 예레미야가 자신에게 화를 선포합니다. ‘나의 어머니’를 부르며 탄식하지만, 예레미야의 탄식은 실제로는 여호와를 향합니다. 여호와께서 모태에 짓기 전에 예레미야를 아셨고 자궁에서 나오기 전에 그를 성별하셨기에(1:5), 그의 출생은 직접 여호와께로 소급됩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태어나게 하셨기에 그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싸움을 걸지도 않았고 동기를 제공하지도 않았는데 예레미야는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가 됐습니다. 시비꾼이나 쌈꾼으로 낙인찍힌 예레미야는 마치 빌린 돈을 떼어먹은 파렴치한 채무자나 빚을 독촉하는 악한 채권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심판의 메시지가 그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예레미아는 유다가 심판받기를 바라는 자였습니다.

 

여호와의 응답(11-14)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해 낙심에 빠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힘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사역과 봉사의 일이 급해도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의 말씀을 펼치는 알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 맡기신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는 넉넉한 힘을 주실 것입니다.

1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12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3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 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14네 원수와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라(11-14)

하나님께서는 탄식하는 예레미야를 그냥 배버려 두지 않고 말씀을 주십니다. 원수가 재앙과 환난의 때에 예레미야에게 빌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고난의 때에 사람을 보고 문제를 보면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1) 예레미야의 위로(11)

탄식하는 예레미야에게 위로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강하게 하시고 복되게 해주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받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종국에는 원수에 의해서도 인정을 받게 됩니다(11).

(2) 대적의 심판(12-14)

선포한 재앙과 환난이 그 모습을 드러낼 때 원수가 그에게 도움을 간청할 것입니다. 그를 저주하던 자들이 찾아와서 여호와께 기도해주기를 애원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시기에 누구도 그를 대적하지 못합니다. 맨손으로 '철곧 북방의 철과 놋'을 부술 수는 없습니다(12). 예레미야가 선포한 북방에서 내려오는 적의 공격은 유다의 능력과 군사력으로는 결코 막아내지 못합니다. ‘북방의 질’은 후에 바벨론 군대로 나타납니다(참조, 20:4-6). 여호와께서 죄로 뒤덮인 유다를 ‘진노의 맹렬한 불’로 징벌하실 것을 선언하십니다(13-14). 침략자들이 유다를 짓밟으며 ‘모든 재산과 보물’을 마음 약탈하고 사람들을 사로잡아갈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이방 땅으로 끌려간 자들은 거기서 자신들을 멸망시킨 원수를 섬겨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거절하고 그를 박해한 자들의 죄가 유다의 멸망을 초래합니다.

 

예언자의 탄식(15-18)

우리는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 종종 어려움을 당하곤 합니다. 낙심하기도 하고, 죄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당장은 오해와 비난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입니다. 예레미야는 주의 말씀을 자신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영적 고독이 찾아올 때, 낙심하지 않는 방법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곧게 붙드는 것입니다.

15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하건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돌보시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멸망하지 아니하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부끄러움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16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17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18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15-18)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자기를 기억하고 돌봐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의 원수에게 보복하시고 자신을 지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님을 위해 부끄러움 당하는 것을 알아 달라고 간천합니다.

(1) 여호와께 대한 순종(15-17)

첫 번째 탄식에 여호와의 응답이 주어졌음에도 예레미야는 다시 여호와께 탄식합니다. 사람들의 저주와 박해가 갈수록 심해져 가자, 예레미야는 자신이 여호와의 기억과 돌봄에서 제외되지는 않았는지 불안감에 빠집니다. 그래서 다시 여호와께서 기억하시고 찾아 주실 것을, 박해자들에게 보복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15). 그는 박해를 당하는 자신이 하나님 편에 속함을, 곧 자신이 선포한 심판 메시지가 그분께로부터 온 말씀임을 확증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오래 참으심’은 박해당하는 자의 편에서 보면 고난의 연장을 의미하기에 멸망하기 전에 빨리 개입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여기서 ‘주를 위하여’는 ‘주 때문에’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여호와의 일을 하다가 박해와 수치를 당하는 것이기에 그분은 책임지고 구해주셔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이 겪는 수치를 여호와의 책임으로 돌렸을 때는 이유가 없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는 여호와와의 특별한 사적 관계를 주장합니다(16a).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은 소유관계를 보여주는 법적 용어로, 주로 성전이나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고 여기에서만 개인과 관련해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의 박해는 여호와의 소유권을 무시하는 폭력과 다르지 않으므로 그분께서 책임을 지셔야 한다. 다음으로 예레미야는 자신의 철저한 순종을 주장합니다(16b). 여호와로부터 말씀이 게시되면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먹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는 신실함과 복종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정중이 싫어하는 심판의 말씀이 주어졌지만, 이를 받아 그대로 전달했고, 그 결과 수모를 당하게 된 것을 알아주셔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주 때문에 겪는 고난을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심판의 말씀을 선포했기에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17). ‘기뻐하는 자의 모임’은 아마도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진료를 나누는 일상적인 모임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는 예레미야는 사회적 기쁨과 즐거움을 포기해야 했다. 그를 가득 채운 여호와의 분노 때문에 그분의 손에 사로잡혀 혼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분노를 담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먹었기에 예레미야는 그분의 분노로 가득 채워졌고, 분노의 메시지를 선포했기에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박해와 수치를 당했습니다.

(2) 여호와를 향한 비난(18)

예레미야의 고통은 계속되고 상처는 깊어만 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예레미야는 깊은 절망감에 빠지며 여호와께 강한 불만을 터뜨립니다(18). 신뢰가 깊었기에 실망도 컸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는 약속을(1:8) 잊어버리신 것인가?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에 비교하며 아주 신탈하게 비난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여호와께 사기를 당했다고 격렬하게 항의합니다. ‘속이는 시내’는 우기에 만들이 흐르는 시내를, ‘물이 말라서’(신뢰할 수 없는 물)는 고여서 변질된 물을 가리킨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생수의 근원'(2:13)이 아니라, 물이 흐른 흔적만 있는 시내와 도무지 마실 수 없는 오염된 물처럼 느낍니다.

 

여호와의 응답(19-21)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붙들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도의 특권을 잊지 말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문제를 향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향하십니다. 영적 고독을 이기는 자는 눈에 보이는 환경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날마다 눈을 들어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지켜주실 것입니다.

19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20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1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19-21)

주님은 예레미야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들에게 돌아가지 말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보며 낙심했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1) 책망의 말씀(19)

예레미야의 신성모독에 가까운 비난에 여호와께서 단호한 음성으로 회개를 촉구하신다.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내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19). 예레미야의 불만이 불신앙의 경계를 넘었습니다. 여호와의 공의에 회의하는 자는 그분의 예언자가 될 수 없다. 예언자는 그분의 공의를 신뢰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주어진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예언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주신다. 여호와의 입이 되기 위해서는 쓸모없는 말을 버리고 소중한 말을 해야 합니다. ‘헛된 것’은 여호와의 공의에 관한 예레미야의 피상적 이해와 불평불만(18)을, ‘귀한 것’은 예레미야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아먹은 ‘주의 말씀’(16)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19b)는 박해하는 자들과 타협하지 말라는 일반적 가르침인 것 같습니다.

(2) 보호의 약속(20-21)

예언자를 단호하게 책망하시던 여호와께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탄식에 긍정적으로 응답하십니다(20-21; 참조, 1:18-19). ‘견고한 성벽’으로 만들어 백성이 싸움을 걸어도 이기지 못하게 해주시고, 그와 함께하시어 ‘악한 자의 손’과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해주십니다. ‘악한 자’는 공동체에 재앙을 초래하는 자를 ‘무서운 자는 폭력을 주저하지 않는 강포한 자를 가리’킵니다. ‘놋 성벽’은 일차적으로는 난공불락을 상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레미야의 앞길이 지금보다 더 험난할 것을 시사해주기도 합니다. 금속으로 성벽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대적의 공격은 매섭고 치열하며 집요할 것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넘어뜨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악한 세력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공격하겠지만,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를 이들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켜주십니다. 예레미야가 예언자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끝까지 그를 보호해주십니다.


우리가 맡은 사역의 현장에서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대부분 두려워하며 위축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이러한 연약함을 위로하시고, 그에게 담대함을 주시고, 보호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가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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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5-01)


확정된 하나님의 심판

예레미야 15장 1-9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관계가 바르게 형성하도록 여러 모습으로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축복받은 것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기회구나!’라고 깨달아서 그 기회를 알아볼 수 있다면, 그것도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기회를 주십니다. 기회를 주시지 않고 바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를 주실 때, 돌이켜야 하고, 기회를 주실 때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도록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좌절과 절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절입니다. 유다의 패역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은 한계에 이르렀고, 결국 이들을 향해 열방의 손을 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들 모세와 사무엘이 기도한다 해도 받지 않으시고, 짐승으로 유다를 완전히 멸하실 것입니다.

 

간구에 대한 응답(1-4)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베푸시고 불순종하는 자를 심판하시겠다는 경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회개를 기쁘게 받으시는 분입니다. 죄를 자백하면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요일 1:9).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받지 않으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습니까?

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찌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치라 2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찌니라 하셨다 하라 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4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1-4)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악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유다 백성은 여전히 죄악으로 돌이키지 않았고, 하나님의 심판은 확고했습니다. 유다는 더 이상 언약의 땅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1) 여호와의 확정된 심판(1)

관계 단절에 집중한 첫 번째 응답(14:10-12)에 비교해서 살펴보면, 심판의 철저성에 초점을 맞춘 두 번째 응답의 의미가 더 선명해집니다. 중보기도의 금지가 공통적인데, 전자에서는 예레미야에게 중보기도의 금지를 명령하고(11), 후자에서는 대표적인 증보자 모세와 사무엘을 등장시켜 어떤 경우에도 심판 결정이 취소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1a). 전자에서는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중재를 시도해보지만, 후자의 예레미야는 이의 제기 없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2) 전쟁의 심판(2)

두 경우 모두 심판을 집행하는 수단이 전쟁이지만, ‘칼과 기근과 전염병’(12) 또는 ‘칼과 기근’(15,16)의 심판이 ‘죽음(전염병)과 칼과 기근과 포로 됨’의 심판(2)으로 한 단계 더 철저해집니다.

(3) 완전한 멸망(3-4a)

멸망에 관한 언급도 공통적이지만, 전자는 단순히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로 선언하고(12), 후자는 ‘칼과 개와 새와 짐승’을 등장시켜 멸망의 모습을 생생하고도 자극적으로 묘사합니다(3). 마지막으로, 전자에는 고발의 말씀이 나오는데(10). 후자에는 심판의 말씀만 나옵니다. 치료와 평강을 간구한 공동체에게 주어진 여호와의 답변은 엄중한 심판 선고입니다. 완전한 멸망이 여호와께서 확정하신 유다의 운명입니다. 여호와께서 때로는 중재자의 간구를 수용하셔서 결정을 되돌리기도 하셨지만, 이번에는 아닙니다. 모세와 사무엘이 그분 앞에 서서 간청할지라도 그분 마음은 바뀌지 않습니다(1). 모세(참조, 출 32:7-14; 민 14:13-20 신 9:18-29)와 사무엘(참조, 삼상 7:8-9; 12:19-23)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중보자로 여호와의 진노를 진정시켜 재앙을 내리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와 사무엘의 중보기도도 듣지 않으시겠다면,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하고 개입을 호소하지만, 여호와는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라고 하시면서 분명하게 결별을 선언하십니다. 여호와의 마음이 최종적으로 이스라엘을 떠나셨기에,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을 가나안에서 내보내는 역할을 맡기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조상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내보냅니다. ‘쫓아 내보냄’의 심판이 가상적 질문과 답변을 통해 구체적으로 선포됩니다. 사람들이 제기할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말씀하시니라 죽을 자는 죽음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하셨다 하라”(2). 유다는 싸우다가 적의 칼에 맞아 죽고 또 역병과 굶주림으로 죽고, 살아남은 자는 포로로 잡혀갑니다. ‘칼과 기근’으로 ‘큰 파멸과 중한 상처’를 입고 치료를 간구한 자들에게 죽음의 심판이 선포됩니다. 전쟁 끝에 남은 것은 거리와 들판에 버려진 시체뿐입니다. 점령군의 무자비한 칼에 쓰러진 시체를 개들이 질질 끌고 다니고,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이 먹어치웁니다(3). 언약 관계를 주장하며 구원을 간구한 자들에게 마지막 안식처인 무덤마저 허락되지 않습니다. 너무 처참하고 철저한 멸망이기에 멸망을 원했던 이방 민족들조차 소스라치게 놀라 공포에 사로잡힙니다(4). (4) 므낫세의 죄(4b) 유다의 멸망 원인을 므낫세에게서 찾는 4a절은 문맥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 때문에 유다 백성은 참혹한 멸망을 당합니다. 이는 므낫세 한사람에게 멸망의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여호와를 떠나 자기 길을 가며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20절이 보여주듯이 죄에 있어 ‘우리’와 ‘우리 조상’은 차이가 없었습니다. 아마도 므낫세는 ‘우리 조상의 죄악’을 대표하는 인물로 언급된 것 같습니다. 열왕기하 23:26에 의하면,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도 불구하고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그 모든 격노’가 돌이켜지지 않습니다. 므낫세로 대표되는 유다 백성 전체의 악행 때문에 결정된 멸망의 심판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심판 결정은 되돌려지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5-9)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야 합니다. 사람의 자기중심적 이기심에서 나온 거짓 신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를 때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참으시지만 무작정 참으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지칠 정도로 참으셨지만, 끝까지 돌아오지 않자, 더는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고 심판하셨습니다.

5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곡할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뇨 6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 7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8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훼멸할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졸지에 임하게 하였으며 9일곱 자식을 생산한 여인으로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오히려 백주에 그의 해로 떨어져서 그로 수치와 근심을 당케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5-9)

유다 백성이 당해야 할 또 하나의 고통은 외부 세력에서 무차별적으로 당하는 공격입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침략군의 공격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 중에서 과부가 된 사람들이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1) 뜻을 돌이키기에 지치신 여호와(5-6)

2-3절이 선포한 멸망의 심판이 현실이 됩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의 절망적 형편을 탄식하십니다(5). 멸망한 예루살렘에게 동정을 베푸는 자도 없고, 그 슬픔을 함께하며 위로해주는 자도 없습니다. 동맹 관계에 있던 이웃 나라들이 모두 등을 돌렸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예루살렘을 뒤덮을 때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완악함에 대한 여호와의 마지막 답변입니다(6), 여호와께서 불쌍히 여겨 거듭 용서해주셨지만, 예루살렘은 감사하며 그분께로 돌아오기는커녕 멀리 떠나갔습니다. 배은망덕이 예루살렘의 본질이 됐기에 여호와께서 다시 뜻을 돌이킨다는 것이 무의미해졌습니다. ‘강한 손과 편 팔’로 이스라엘의 조상을 바로의 압제에서 구출해내셨던 여호와께서 손을 펴서 당신을 배반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십니다.

(2) 재앙의 묘사(7-9)

7-9절은 예루살렘과 유다를 덮친 파국적 재앙을 비유를 활용해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먼저 7a절은 키질의 비유로 완전한 멸망을 기술합니다. 통풍이 잘되는 곳에서 탈곡한 곡식을 키로 까부르듯이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을 키로 까불러 멸망의 바람에 실어 날려 보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멸하실 수밖에 없었음은 ‘그들이 자기들의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7). 여호와께서 일찍부터 거듭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7:23)라고 말씀하셨지만, 유다 백성은 완강하게 제 길로만 갔습니다. 여기서 ‘자기들의 길’은 제의적 경건. 형식적 순종, 자기중심적 경건, 혼합주의와 같은 온갖 종류의 불순종을 가리킵니다. 8a절은 여호와에 의해 징계 받은 백성을 남편과 자식을 빼앗기고 집안의 대를 잇지 못하게 된 과부에 비교합니다. 과부가 집안을 이어가지 못하고 죽는 것처럼 ‘과부가 내 앞에 바다모래보다 더 많아진’ 유다의 운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수’를 가리키는 ‘바다의 모래’가 창세기 22:17; 32:12을 배경으로 주어진 말씀이라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후손의 약속이 더는 유효하지 않음을 시사합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을 버린 결과로 유다는 생명을 잃고 죽음에 떨어졌습니다. 8b절은 유다를 침략하는 적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줍니다. 유다를 징벌하려고 여호와께서 보낸 ‘파멸시킬 자’는 최정예 부대이기에 밤에 습격하는 도적 떼와 달리 ‘대낮에’ 공격했고, 유다는 이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덮치는 ‘놀람과 두려움’에 싸울 용기를 잃었습니다. 9a절은 여인의 자랑스러운 과거와 비참한 현재를 대비하여 심판의 혹독함을 극적으로 기술합니다. 자식을 일곱이나 낳은 여자가 하루아침에 일곱 아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력이 다해 혼절했습니다. 마치 대낮에 해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부러움의 대상이던 여인이 한순간에 대를 이을 자식을 다 잃고 수치와 멸시에 떨어져 남은 인생을 어둠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여호와의 축복으로 풍족함 가운데 살던 유다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수치와 멸시에 넘겨졌습니다. 9b절은 완전한 멸망을 선포합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았다고 안도한다면, 착각입니다. 여호와께서 남은 자들도 대적의 칼에 붙여 진멸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에게서 모든 연민과 인애를 거두시고 반역의 대가를 엄중하게 물으실 것입니다.


인생의 복과 저주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유다는 언약의 말씀을 버림으로 파멸을 자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복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리기에 말씀을 통해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면 그 풍성한 은혜 아래 머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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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4-02)


끈질긴 선지자의 간구

예레미야 14장 13-22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과 또 예수님의 그 사랑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또 기다리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또 우리를 기다리시고 진리와 함께 십자가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그 은혜를 붙잡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중보하지 말도록 명령받았지만 예레미야는 체념하지 않습니다. 그는 백성이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오도되어 죄를 범했다고 변호해보지만, 여호와는 예레미야의 중재를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구원을 예언한 자나 에언을 받은 자나 모두 칼과 근에 넘겨집니다.

 

거짓 예언에 대한 심판(13-16)

잘못된 길을 전한 사람도 잘못된 길을 따라간 사람도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는 특권도 누리지만 동시에 책임도 무겁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따르는 사람들은 눈과 귀만 즐겁게 하는 지도자를 좇는 우를 범치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예언을 따른 백성도 동일하게 벌할 것을 선포하십니다. 사람들이 거짓에 현혹되는 이유는 자신들 안에 거짓을 받아들일 만큼 죄성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13이에 내가 말하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14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 15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16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당할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들의 아내와 아들과 딸이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13-16)

유다 백성의 불순종과 죄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에게 기근과 전쟁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확실한 평강을 약속하셨다고 거짓으로 예언했습니다.

(1) 예레미야의 질문(13)

여호와께서 당신의 엄중한 심판 의지를 알려주시고 백성을 위하여 중보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 예레미야는 체념하지 않습니다(참조, 18:20). 그는 백성의 무죄를 주장하거나 일방적인 용서를 간청하지 않고, 이들이 그처럼 잘못된 길을 가게 된 배경에 초점을 맞춰 용서를 호소합니다. 백성이 여호와께 죄를 범했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유다 백성이 ‘확실한 평강’을 선포한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오도돼 ‘발을 멈추지’ 못했던 점을 고려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구원 의지를 선포하면서 백성을 선동한 거짓 예언자들과 이들에 동조한 일반 백성을 죄의 경중에 따라 구분해주실 것을 호소합니다.

(2) 여호와의 답변(14-16)

그러나 선포된 멸망의 심판을 되돌려보려는 예레미야의 시도는 여호와의 단호한 심판 의지에 의해 거절됩니다. 여호와는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거짓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이들의 예언을 추종한 자들에게도 ‘칼과 기근’의 심판을 선포하십니다(15-16). 먼저 거짓 예언자들을 당신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한 자들로 정죄하십니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령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점술과 헛된 것과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14), ‘확실한 평강’을 예언한 자들은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거나 말하도록 명령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보냄을 받지 않았기에 이들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이 있을 수 없고, 여호와의 말씀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예언은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 계시나 우상처럼 실체가 없는 헛것에 불과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거짓 예언은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거짓 예언자들은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평강을 주기로 하셨다면, 자신의 행실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고 돌아서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거짓 예언에 길든 백성의 귓가에 예레미야의 심판 예언이 들릴 리 없습니다. 백성은 거짓 예언자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거짓 예언자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결국에는 거짓 예언자들과 이들의 예언을 받은 자들이 한통속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범하였습니다. 구원과 평강의 메시지를 좋아하는 백성은 단순히 거짓 예언자들의 희생물이 아닙니다. 차라리 거짓 예언자들의 온상이라 함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5:30-31에서 여호와는 거짓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의 노골적 결탁을 절망적으로 탄식하셨습니다.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그러므로 반역의 심각함에 비례해 심판 또한 철저하게 집행됩니다. 예루살렘 거리에 시체가 넘쳐도 묻어줄 친인척이 없습니다. 전쟁의 패배가 전면적이고 파멸적이기에 죽은 자들을 위한 장례가 제대로 치러지지 못합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의 악을 심판하시려고 악이 맺은 열매인 ‘재앙’을 그들 위에 부으시기에 멸망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공동체를 대표한 예언자의 탄식(17-18)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따르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보내 말씀을 전하셨지만, 백성들은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듣고 따랐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참된 말씀과 거짓 예언을 분별할 수 있을까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길 힘씁니까?

17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함이라 18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내가 성읍에 들어간즉 기근으로 병든 자며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알지 못하는 땅으로 두루 다니도다(17-18)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시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처녀 딸, 당신의 백성이 큰 파멸과 중한 상처로 망해서 밤낮 그치지 않고 눈물을 흘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들에는 전쟁의 참상이 가득하고, 성읍은 기근의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1) 치명상을 입은 백성(17)

어떻게 해서든 파국을 피해 보려고 여호와의 금지명령에도 불구하고 중재를 시도했던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덮친 칼과 기근의 심판에 할 말을 잃고 밤낮 눈물만 흘립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결정하신 것이기는 하지만, ‘큰 파멸과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하게 된 이스라엘이 그래도 예언자의 마음에는 ‘내 백성’이었습니다.

(2) 절망적 상황(18)

전쟁의 참상은 절망적입니다. 성 밖 들에는 적의 칼에 맞아 죽은 자들의 시체가 나뒹굴고, 양식이 떨어진 성안에는 기근으로 병든 자들뿐입니다. 성 밖이나 안이나 죽음뿐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예언자와 제사장은 알지 못하는 땅으로 끌려갑니다. 구원을 선포한 자들이나 이들의 선포를 따랐던 자들이 모두 멸망을 당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오직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알고 있는 자들에게 전쟁의 패배는 신학적으로 설명이 어려웠습니다. 이들의 구원 신학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패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더 강한 신에게 패배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공동체의 간구(19-22)

환난의 때에 믿음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도입니다.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계속해서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유다의 운명 앞에 눈물 흘리며 탄식했습니다.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로 끌어안고 자백했습니다.

19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 받기를 기다리나 두려움만 보나이다 20여호와여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21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22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는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하니라(19-22)

경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받기를 기다리지만 두려움만 보이는 무서운 심판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완전히 버리셨는지 질문합니다.

(1) 탄식(19)

칼과 기근의 심판에 노출된 ‘우리’ 공동체의 반응은 극심한 가뭄을 겪을 때와 대체로 유사합니다. 치명적 상처를 입은 ’우리‘는 다시금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개입과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직접 도움을 청하기에 앞서 먼저 수사적 의문문을 사용해 간접적으로 여호와의 개입을 촉구합니다(19). 주께서 유다를 완전히 버리셨습니까? 우리는 언약 백성인데, 유다를 완전히 버리실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시는 안 보실 정도로 시온을 그렇게도 싫어하십니까? ‘주의 영광의 보좌’인데, 시온의 ‘중한 상처’에 눈을 완전히 감으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죽도록 치신 분께서 치료해주지 않으십니까? 주의 이름으로 불리는 백성인데, 죽게 내버려 두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평강’을 바라지만 ‘좋은 것’은 없고, ‘치료받기’를 기다리지만 ‘두려움’뿐입니다. ‘우리’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소망’이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이심을 알기에(8) 당신께 구원의 소망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2) 죄의 고백(20)

여호와의 침묵을 탄식한 후, ‘우리’ 공동체는 자신들의 역사를 죄의 역사로 고백합니다.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20). 반역에 있어 지금 세대나 조상들이나 한통속이었습니다.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여호와께 등을 돌렸습니다.

(3) 간구(21)

‘우리’는 다시금 이스라엘의 신학적 전통에 의존해 도움을 간구합니다(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는 7절의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의 반복입니다. 간구할 자격이 없음을 알기에 구원의 동기를 ‘주의 이름을 위하여’에서 찾습니다. ‘주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마옵소서’는 예루살렘 성전 신학을 반영한 간구로, 9절의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와 내용상 유사합니다. 왕이신 여호와는 시온 또는 성전으로부터 당신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주께서 우리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는 그 고발적인 성격에 있어 9절의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와 비슷합니다. 소유 관계나 언약 관계가 쌍무적임에도 ‘우리’는 이를 여호와에게만 적용합니다. 자신들은 언약의 의무를 저버리면서도 여호와는 언약의 의무에 신실하실 것을 주장합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려 하시는데(10), ‘우리’는 여호와께서 언약을 기억하시고 구원해주시길 간구합니다.

(4) 능력의 여호와(22)

‘우리’의 탄식과 간구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으로 끝을 맺습니다(22). 헛것에 불과한 민족들의 우상이나 하나님의 피조물인 하늘은 능히 비를 내릴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만이 땅에 비를 내려 과실에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여호와는 비를 내리게 하시는 분이기에 우리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큰 파멸과 중한 상처로 말미암아 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을 품게 됩니다(17). 비록 지금의 상처가 치명적이기는 하지만, 회복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비를 내리는 창조주의 능력이 치명적인 상처 또한 치료해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앙망하옵는’과 19절의 ‘바라도’, 8절의 ‘소망’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들입니다. ‘우리’ 공동체는'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창조주 여호와께서 치료해주시길 바라며 그분의 개입을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은 일차적으로는 비와 소나기를 가리키지만, 문맥에서는 칼과 기근의 재앙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를 세우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참된 선지자요 중보자로서 유다 백성의 참혹한 상황을 하나님 앞에 아뢰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품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참된 중보자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븐을 알고 믿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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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4-01)


제사조차 거절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14장 1-12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으로 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 없고 또 속일 생각을 하는 것은 참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참된 진정한 예배를 드려야 되고,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유다에 극심한 가뭄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도 짐승도 물을 얻지 못해 생존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께 유다를 버리지 마시길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죄를 말씀하시며, 회개치 않고는 복을 받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선지자는 유다의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을 슬퍼하며 부디 유다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중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축복을 비는 것조차 금하십니다.

 

가뭄을 탄식과 간구(1-9)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면 우리는 큰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고, 악에서 떠나는 것이 명철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죄악의 징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악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1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2○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피곤하여 땅 위에서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로 오르도다 3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얻으려 하였으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들의 머리를 가리며 4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5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6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도다 7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8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나그네 같이 하시나이까 9어찌하여 놀란 자 같으시며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그래도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1-9)

유다에 닥친 가뭄은 우연한 자연재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순종한 백성에게 하나님꼐서 내리신 혹독한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복과 저주를 내리는 주권자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을 피할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리신 재앙을 피하지 못합니다.

(1) 가뭄의 탄식(1-6)

가뭄은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전면적으로 닥칩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물이 없어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부르짖기만 합니다. 유다는 슬피 울고, 그 성문들은 지쳐 땅에 쓰러져 탄식하고, 예루살렘은 절망적으로 부르짖습니다. 유다와 성문들과 예루살렘이 의인화되어 애도 행위의 주체로 등장합니다. ‘성문의 무리’는 문자적으로는 ‘그 성문들’로, 성읍들을 대표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성문 안쪽에 있는 넓은 공간에서 공적 모임을 가졌습니다. ‘부르짖음’은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보다는 절망적 울부짖음을 의미합니다. 3-6절은 가뭄 피해를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가뭄 앞에 예외는 없었습니다. 귀족들은 물을 길어오도록 종들을 성 밖으로 보냈지만, 이들은 빈 물동이를 든 채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정치적-사회적 지위도 가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가나안의 농사는 비에 의존했기에 가뭄은 농부들에게 더욱 치명적이었습니다. 농부들은 불볕더위로 쩍쩍 갈라진 밭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부끄러워하다’는 맡겨진 사명이나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의 반응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참조, 잠 10:5; 12:4; 14:35). 해야 할 일을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인정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기에 부끄러워합니다. 좋은 물을 길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농부는 농사를 짓지 못했기 때문에 부끄러워합니다. ‘머리를 가리다’는 절망감의 표현입니다(참조, 삼하 13:19; 15:30; 에 6:12). 가뭄이 성의 귀족부터 지방의 농부까지 모든 사람을 절망에 빠뜨립니다. 극심한 가뭄은 들짐승에게도 치명적이었습니다. 풀이 말라 굶주림에 노출됩니다.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는 암사슴은 자기가 낳은 새끼를 들판에 내버리고, 가뭄에 비교적 잘 견딘다는 나귀도 풀과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신음합니다.

(2) ‘우리’ 공동체의 간구(7-9)

‘우리’ 공동체는 가뭄을 하나님의 재앙으로 파악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긍정적 개입을 호소합니다. 직면한 가뭄이 자신들의 죄 때문임을 전적으로 인정합니다. 대놓고 죄를 범하였기에 변명의 여지도, 증인을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여호와를 수없이 배반한 삶 자체가 백성의 죄를 고발합니다. ‘타락함’은 ‘배반’, ‘반역’,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개입의 동기와 목적을 오직 하나님에게서 찾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공동체는 간구합니다. 하나님 백성의 고난과 재앙은 이방인들의 눈에는 자기 백성도 지키지 못하는 하나님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곧 이방인들에 의해 그분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사건입니다(참조, 겔 20:9, 14, 22). 역으로, 재앙을 겪고 있는 하나님 백성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이방인들 가운데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에스겔은 바벨론 유배민의 구원을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사건으로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겔 36:22).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까닭은 여호와가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과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소망이시고,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이십니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은 역사와 자연 안에서 여호와를 구원자로 거듭 경험하였습니다. 극심한 가뭄으로 생존의 위기에 처한 공동체는 구원의 하나님에게서 소망을 찾습니다. 여호와께만 소망과 구원이 있기 때문에 그분의 개입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이제 공동체는 여호와를 객과 나그네와 용사에 대비하여 개입을 촉구합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며 구원자이신 여호와께서 마치 남의 땅에 거하는 이방인처럼, 하룻밤 머물기 위해 여인숙에 들른 나그네처럼 그렇게 무관심하실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전사로 용맹스럽게 전쟁터를 누비셨던 분께서 어찌하여 지금은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용사처럼, 구원해줄 힘이 없는 용사처럼 침묵하십니까?”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자 구원자이신 여호와께서 어떻게 그처럼 남이 되셨느냐고, 적들의 위력 앞에 용기를 잃고 두려워 떠는 용사가 되셨느냐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이나 무능력에 대한 탄식은 물론 불신앙의 토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촉구하는 문학적 수단입니다. 당신은 객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그네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형편에 무심한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적을 놀라게 하시며 전쟁터를 누비신 용사가 아니십니까? 크신 능력의 구원자가 아니십니까? 공동체는 다시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무관심하실 수 없음을 신학적 전통에 의존해 호소합니다. 여호와는 잠시 유숙하는 나그네와 달리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입니다. 전자는 이스라엘 가운데 현존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후자는 여호와의 소유에 속하는 이스라엘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

 

간구에 대한 하나님 응답(10-12)

우리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재앙의 때에 구하기도 하시지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저버릴 때에는 재앙을 내리기도 하십니다. 희망이신 하나님을 버린 결과가 재앙입니다. 삶에 변화가 없는 입술만의 고백은 거짓 회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아무리 금식을 하고 많은 제물을 바치고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10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11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12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10-12)

선지자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을 위해 간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것은 유다 백성이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난 중에도 우상 숭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상이 있는 산마다 돌아다니며 종교 행위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1) 백성과 관련한 말씀(10)

‘우리’ 공동체의 간구가 여호와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간구가 거절당한 이유가 개괄적으로 제시됩니다.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들의 기도를 받지 않으십니다. 현재시제로 옮긴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공동체가 행한 죄의 고백과 간구는 피상적이고 위선적인 것으로 진정성이 없습니다. 죄를 인정하지만 죄에서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고, 신학적 전통을 주장하지만 단지 입술의 고백에 불과했습니다(과거시제로 옮길 경우, 공동체는 너무 늦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구원의 문이 모두 닫힌 후의 고백과 간구였기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의 죄를 기억하기로 하셨기에 죗값을 치르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그러진 길’은 아마도 종교적 혼합주의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참조. 2:27). 이들의 경건에는 신실함이 없습니다. 필요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그러나 또다시 바알을 찾아갔습니다.

(2) 예레미야에게 주는 말씀(11-12)

여호와의 심판 의지는 단호했습니다. 여호와는 당신과 이스라엘 사이를 이어주는 모든 통로를 폐쇄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종교적 제도를 무용지물로 만드십니다. 먼저 예언자에게 중보기도의 금지를 명령하십니다(참조․ 7:16; 11:14). 그러나 중보기도를 들어주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을 위해 ‘복’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복’은 원래 ‘좋은 것’으로, 여호와께서 주시는 생명과 축복과 구원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다음으로 종교적 행사가 그 기능을 박탈당합니다. 금식하며 부르짖을지라도 여호와는 듣지 않으십니다. 금식은 전쟁의 위기, 전염병의 창궐 또는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로, 공동체가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긍정적 간섭을 구하려고 행하는 제의적 의식입니다. 예레미야의 중보기도 금지와 더불어 여호와는 제사의 효력을 무효화 하십니다.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여호와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미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언자의 중보와 금식과 제사가 여호와께서 인정하신 것들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에 효력과 목적이 있는 절대적 제도는 아닙니다. 증보와 금식과 제사의 수용 여부는 받으시는 분의 결정에 속합니다. 여호와의 거절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그분의 결정이 최종적임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징벌을 운명으로 받아야 합니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은 재앙 선포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으로, 여호와는 혼합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을 전쟁으로 심판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적의 칼에 맞아 죽고, 칼을 피해 살아남은 자들은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습니다. 누구도 여호와의 심판에서 안전하게 목숨을 구하지 못합니다.


기근으로 고통 받던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도움을 간구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 역시 민족이 받는 고통을 끌어안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어떤한 탄원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시고 징계하시기 전에 죄의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복음을 열심히 전함으로써 멸망으로 치닫는 불신자들을 속히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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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3-03)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예레미야 13장 20-27절


 

우리가 ‘누구를 믿고 누구를 따라 가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 어떤 친구를 사귀고 또 어떤 분과 교제하는가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친구 되시고 목자 되시는 예수님,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따르시고 또 그분을 본받아서 닮아가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기쁨과 온전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와 친구되시길 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와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북방 민족이 공격해 올 때 유다는 출산하는 여인 같은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구스인이 피부를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유다는 선을 행하지 않고 악만 행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유다를 초개같이 흩으실 것입니다.

 

북방에서 오는 적(20-22)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시며 힘이시고 구원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친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랑이었던 아름다운 예루살렘이 수치와 부끄럼을 당하게 됩니다. 이 예루살렘의 평화는 영원할 줄 알았지만,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이름을 둔 하나님의 도시도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20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가 받았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떼는 어디 있느뇨 21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수령으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의 고통에 잡힘이 구로하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22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20-22)

화자와 청자의 차이에 따라 20-22절, 23-24절, 25-27절의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21절에서 ‘여호와’를 삼인칭으로 받는 개역개정의 번역에 따르면 첫째 단락의 화자는 예언자, 둘째와 셋째 단락의 화자는 여호와입니다. 청자에 있어서는 첫째와 셋째 단락이 일치하는데, 여성 단수 ‘너’가 청자로 나옵니다. 둘째 단락은 상대를 이인칭 복수 ‘너희’(23) 또는 삼인칭 복수 ‘그들’(24)로 부릅니다. ‘너’가 예루살렘(27)이기 때문에 ‘너희’는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이 됩니다. 첫째 단락의 ‘너’(예루살렘)와 ‘양 떼’가 셋째 단락(너)과 둘째 단락(너희와 그들)에 분리되어 나옵니다. 물론 예루살렘과 그 주민의 구별은 문학적인 장치로, 실제로는 동일한 대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죄로 인한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주제는 세 단락에서 공통적인데, 이를 기술할 때 사용한 표상과 강조점에 있어서는 일부 차이를 보입니다. 첫째 단락은 적의 침략에 노출된 예루살렘의 절망적 처지(산고를 겪는 여인)에, 둘째 단락은 회개의 불가능함에, 셋째 단락은 우상숭배의 고발에 초점을 맞춥니다. 고발의 내용이 첫째 단락에서는 막연히 ‘네 죄가 크므로’인데(22b), 셋째 단락에서는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25b)라고 좀 더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심판의 묘사에 있어 ‘점령군에 의해 능욕당하는 연인’의 표상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첫째(22b)와 셋째 단락(26)은 일치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능욕을 죄의 결과로 기술하고, 후자는 죄로 인한 여호와의 징벌로 기술합니다. 둘째 단락은 전쟁하고는 상관없는 ‘사막바람에 불려가는 검불’의 표상을 사용해 완전한 멸망을 강조합니다.

(1) 절망적 처지(20-21)

19절에서 유다 남쪽을 향했던 예레미야의 시선이 북쪽으로 옮겨집니다. 예언자는 북방에서 내려오는 적들에 의해 양 떼가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네게 맡겼던 양 떼,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냐’라고 외칩니다(20: 여기서는 누가 예루살렘에게 양 떼를 맡겼는지를 직접 말하고 있지 않지만, 17절의 ‘여호와의 양 떼’는 여호와임을 시사합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맡긴 양 떼가 굶주린 들짐승에게 약탈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택한 예루살렘은 다윗 왕조와 성전이자리 잡은 도성으로, 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중심지였습니다. 백성을 돌보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어야 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예루살렘은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양 떼의 주인보다 그들은 주변의 친구들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의존하여 양 떼를 돌보지 않고, 주변 나라들과의 정치적 동맹에서 살길을 찾았습니다. 예루살렘은 비로소 여호와의 심판을 받은 후에야 자신들의 치명적인 어리석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호와는 예루살렘이 ‘친구 삼았던 자’를 예루살렘 위에 우두머리로 세우실 것입니다(21a). 예루살렘은 정치적 동맹관계의 비정한 모습에 몸부림쳐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산고를 겪는 여인’처럼 고통에 사로잡힐 뿐입니다(21b). 해산의 진통은 피하거나 연기시킬 수 없습니다. 시작되면 아이가 나오기까지는 달리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산모의 진통은 새 생명의 출생을 위한 것이라 해산의 기쁨으로 보상받는다고 하지만, 예루살렘의 진통은 멸망의 출생을 위한 것이라 더욱더 절망적입니다. 그들은 적의 공격을 피할 길이 없고, 막아낼 능력도 없습니다. 마지막 힘이 다해 목숨이 끊어질 날만 기다릴 뿐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하면서 절망해보지만, 운명을 되돌리기에는 모든 것이 늦었습니다.

(2) 그 원인(22)

멸망의 이유를 알지 못해 당황하는 예루살렘에게 예언자가 간결하게 답변해줍니다. “네 죄악이 크므로 네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22b). 저지른 죄가 중하기에 예루살렘이 마치 점령군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듯 무참히 유린당입니다. 범죄의 필연적 결과로 예루살렘은 멸망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자신들의 죽음과 파멸을 초래한 구체적인 ‘죄악’에 관해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27절에 의하면, 그들 가운데 만연한 우상숭배가 그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심판(23-24)

성경에서 징계나 심판을 기록한 부분을 접하게 되면 빨리 지나길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날에 계속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도 달게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으로 나가야 좋은 날을 지속할 수 있습니다.

23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24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리로다(23-24)

악에 익숙한 유다 백성은 결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 가는 검불처럼 흩으십니다. 그냥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1) 불가능한 회개(23)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택하신 도성이 아닙니까? 다윗 왕조와 여호와의 성전이 그 안에 있지 않습니까?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백성이 아닙니까?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어떻게 이방 정복자들에 의해 능욕을 당한단 말입니까? 속담을 인용한 23절은 전통적인 예루살렘의 구원 신학을 따르는 자들의 비판에 대한 답변입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구스 사람이 검은 피부를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또한 표범이 얼룩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 사람들도 악한 습성을 바꿀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북방의 적에게 넘겨 능욕을 당하게 하실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회개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 징계의 심판(24)

마음을 완전히 접으신 여호와께서 이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같이’ 흩으시기로 결정하십니다(24).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보낸 심판의 바람에 휩쓸려 이제 사방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징계(25 2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에 대해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는 정결케 하는 심판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심판을 선언하는 것은 교만의 죄에서 돌이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정결해질 것입니다.

2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26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27내가 너의 간음과 사악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네가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 하시니라(25-27)

유다의 배교는 깊이 습관화되었습니다. 구스인이 자신의 피부를 바꿀 수 없고 표범이 자신의 반점을 바꿀 수 없듯이 유다는 자신의 악습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기보다 악한 육신의 본성대로 사는 데 익숙했습니다.

(1) 여호와를 잊은 예루살렘(25)

앞의 두 단락에서 포괄적으로 제시된 심판의 원인(큰 죄악과 회개의 불가능함)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예루살렘이 여호와를 잊고 ‘거짓’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산고를 겪는 여인’과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의 운명을 예루살렘의 몫으로 정하셨습니다(25). 여호와를 기억해야 할 예루살렘 사람들이 여호와를 잊었습니다. 너무 오래전부터 잊어서 ‘그 날 수는 셀 수’가 없을 지경이 되었습니다(2:32). 여호와를 잊고 사는 것(악)이 이제는 그들의 본능처럼 됐기에,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기억한다는 것(선)은 불가능한 기대처럼 됐습니다.

(2) 수치를 당하는 예루살렘(26-27)

여호와를 신뢰해야 할 예루살렘 사람들이 거짓 우상을 신뢰합니다. 예레미야서에서 ‘거짓’은 다양한 차원에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27a절이 보여 주듯이 ‘우상’을 가리킵니다. 끓어오르는 성욕을 주체할 수 없는 발정기의 들 암나귀처럼(2:24) 예루살렘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우상과 간음을 즐기며 욕정을 발산합니다(27a). 예루살렘의 우상숭배는 일부 사람들의 은밀한 이탈이 아니라,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자행되는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오래전에 여호와를 잊은 예루살렘은 우상들로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우상들과 간음을 즐긴 예루살렘에게 상응하는 심판이 선고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26). 수치를 모르고 음행을 즐긴 예루살렘은 점령군 앞에서 자신들의 수치를 드러내고 능욕을 당합니다. ‘북방에서 오는 자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사건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여호와의 심판으로 이뤄진 신학적 사건입니다. 곧 신명기 8:19의 경고가 현실화된 사건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교만과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진 유다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만간 바벨론에게 망하고 포로 신세가 되어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죄에서 돌이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기억하며 신속히 회개의 자리로 돌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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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3-02)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회개해야 함

예레미야 13장 12-19절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믿었던 사람들로 상처를 받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기뻐하던 일들 때문에 절망적이고 슬프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 많이 사랑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일들도 있습니다. 자신이 의지했던 것들이 상처를 주는 것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즐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죽부대에 포도주로 가득 찰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잔뜩 취한 사람들은 흐느적거리면서 이성을 잃은 것처럼, 유다는 이상을 상실한 채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권하지만, 왕국의 멸망을 돌이킬 수 없어 보입니다. 재앙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유다 왕이 폐위되고 포로로 잡혀갈 때가 올 것입니다.

 

진노의 잔(12-14)

우리가 죄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죄가 타인에게 무자비하고 무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하지만 양심의 문빗장을 걸어 잠그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행동의 결국은 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고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에 유행하던 농담을 사용하여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12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13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14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2-14)

하나님께서는 다른 비유를 통해 백성을 향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가죽 부대’ 이미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재차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말씀을 가볍게 받아들였습니다.

(1) 속담의 인용(12a)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상적인 문답을 통해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포하tlqsl다. 먼저 이들에게 전할 말과 그에 대한 이들의 반응을 예언자에게 알려주tlqsl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가죽부대(항아리)가 포도주로 차리라’라고 전해야 합니다.

(2) 청자의 반응(12b)

그러면 그들이 예언자에게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하고 반문할 것입니다(12). 그들은 황당한 반응을 보이며, 너무도 당연한 예언자의 말에 어이없어합니다. 여호와께서 인용한 속담은 아마도 술자리 농담인 것 같습니다. 포도주가 가득 차기를 기대하던 사람들의 희망을 인용한 듯합니다.

(3) 심판 선언(13-14)

술자리가 벌어지면 배부르다고 술을 마다하는 술꾼은 없습니다. 잔치를 준비하면서 항아리에 술을 가득 채우듯이, 술꾼은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며 제 배를 술로 가득 채웁니다. 나단의 우화에 다윗이 너무 당연하게 반응하면서 자신을 고발하였듯이(참조, 삼하 12:1-6), 누구나 인정하는 속담에 차라리 어이없다는 듯이 답변함으로써 이들도 자신들을 여호와의 심판대 앞에 세웁니다. 술꾼들이 좋아하는 속담에 술꾼들이 사로잡힙니다. 여호와께서 청자의 의표를 찌르시며 심판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술꾼의 볼록한 배가 술로 채워지듯이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의 배도 술로 채워질 것입니다(13). 진노의 술을 마시고 취하는 대상에 예외가 없습니다. 영원한 왕권의 약속을 받은 다윗 왕조, 여호와 종교를 대표하는 제사장과 예언자, 여호와께서 주신 땅에 사는 백성, 그리고 그분께서 택하신 예루살렘 주민이 모두 그분께서 내리시는 진노의 잔을 취하도록 마셔야 합니다. 14a절은 13절의 ‘잔뜩 취함’의 모티브를 받아 심판의 모습을 술자리에서 자주 벌어지는 꼴사나운 행태에 비교합니다. 술자리가 길어지면서 술에 취한 술꾼들이 서로 잔을 부딪치다가 깨뜨리거나 서로 싸웁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 추태를 보이며 다툽니다.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는 유다 내부의 정치적 불화와 다툼을 시사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이미 어둠이 덮치기 시작했는데도 나라와 백성의 안위보다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쌈질을 합니다.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는 당시의 분열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적 이해와 욕심 때문에 인륜에 속하는 부자의 관계마저 무시할 정도로 사회가 타락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내부의 갈등과 분열로 갈가리 찢겨 자멸합니다. 여호와의 진노의 술잔에 잔뜩 취한 자들이 분별력을 상실하고 이기적 욕심에 사로잡힙니다. 예전에는 선포된 심판이 되돌려지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14b),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십니다. 재앙의 때에 살려달라고 울부짖을지라도 그분은 귀를 기울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진노의 술잔을 잔뜩 마시고 취해야 합니다.

 

마지막 경고(15-17)

인간의 감정은 아주 민감한 균형을 요하는 접시저울 같아서, 사랑이 증오로 변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특히나 그 사랑이 정욕에 불과할 경우에는 더더욱 쉽게 변합니다. 추악한 욕망으로 비롯된 죄악은 마침내 실체가 드러나 결국 더 심각한 죄로 번졌습니다.

15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16그가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17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15-17)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불순종은 어느새 생활 습관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런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1) 예언자의 경고(15-16)

여호와의 심판 의지가 너무나도 확고해 바뀔 가능성이 없어졌습니다. 멸망을 피할 길은 없어졌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잔을 마시도록 하는 일만 남겨졌습니다. 모든 것이 이미 끝나버린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유다와 예루살렘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있지만, 그래도 예레미야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멸망 앞에 놓인 자기 민족의 운명에 눈을 감지 않고, 이들에게 절박하게 경고하면서 호소합니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 들어야 할 말은 (문맥에 따르면)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 결정입니다. 여호와의 확고한 심판 의지를 알게 된 예레미야는 이를 단순하게 전달하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교만을 버리도록 호소합니다. 교만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습니다. 9-10절에 따르면 불순종의 완악함과 우상숭배를, 17절과 18-23절에 따르면 예루살렘성의 안전을 자신하는 행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교만의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교만하면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교만을 버려야만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바르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심판은 이미 시작됐기에 머뭇거릴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둠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어두운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어둠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16).

(2) 예언자의 탄식(17)

산에서 밤을 맞은 여행자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때로는 목숨도 잃어버리는 것처럼, ‘여호와의 양 떼’의 처지가 그러합니다. 새벽빛이 곧 동 오리라는 기대는 착각에 불과합니다. 여호와가 ‘너희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언제나 ‘너희’의 구원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가져오시는 것은 어둠입니다. 그분은 지금 빛을 어둠으로 바꾸시고, 암흑으로 만들고 계시입니다. 교만한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구원이 아니라 그분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를 뿐입니다(참조,호 6:5). 현재의 문맥에서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는 교만을 벗어버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심판을 선포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낮은 자세로 그분께 돌아오는 것이 곧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확고한 심판 의지는 다른 한편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범한 죄의 심각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실 이들이 죄에서 돌이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기대였습니다(23). 예레미야도 이들이 듣지 아니할 것을, 따라서 여호와께서 그분의 양 떼를 적에게 포로로 넘겨주시는 심판이 악몽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능성이 없음을 알면서도 예레미야는 절박한 심령으로 ‘여호와의 양 떼’를 덮치는 짙은 어둠을 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교만 때문에 마지막 경고를 듣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눈물과 통곡만 남겨질 뿐입니다(17). 아무도 없는 ‘은밀한 곳에서’ 홀로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아마도 의도적으로사로잡혀 가는 자들을 ‘여호와의 양 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심판이 완고한 불순종의 결과로 주어졌음을 알기에 직접 증보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혀 가는 것이 아니냐고 호소하는 예레미야의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려진 영광의 면류관(18-19)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언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만의 죄에서 그들을 돌이키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았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거절하고 더욱더 깊은 죄악으로 ᄈᆞ져들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후통첩과도 같은 심판의 경고를 내리십니다. 하나님꼐서 경고하신 심판은 두렵기 그지 없는 모습으로 임할 것입니다.

18너는 왕과 왕후에게 전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 19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18-19)

여호와께서 일으키시는 어둠(16)이 눈앞의 현실이 됩니다. 구원의 빛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심판의 어둠이 임합니다. 예루살렘부터 네겝까지 전 지역을 흑암이 덮칩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신 것이기에 누구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왕과 태후는 ‘영광의 면류관’을 벗고 보좌에서 내려오고(18), 네겝의 성읍들은 포위되고, 주민들은 유배를 당합니다(19). 왕과 태후가 적들에 의해 폐위되고, 유다 남부 지역이 침략자들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마지막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은 예루살렘과 유다는 교만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합니다. 여기서 ‘왕후’는 ‘태후’로 옮겨야 합니다. 유다 왕실은 태후에게 특별한 지위를 인정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열왕기상2:19에 의하면 솔로몬은 어머니 밧세바를 위해 오른쪽에 자리를 마련해주고, 15:13에 의하면 아사는 아세라 상을 만든 어머니 마아가를 ‘태후의 위’에서 폐합니다.


죄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모든 수치를 드러내실 것입니다. 발정기의 짐승처럼 우상숭배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유다가 다시 정결케 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렸습니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을 수치 가운데 또는 일밖에 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대신에 거짓 바알을 더 신뢰한 유다에게는 심판만이 합당한 몫이 분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떠난 삶은 우상숭배의 삶이요 하나님을 망각한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사망을 그 몫으로 받은 것입니다. 유다의 분깃이었던 하나님을 유다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비하신 그 분깃이 무엇일지는 그분에 대한 자신의 삶이 결정할 것입니다. 유다의 수치 앞에서 우리 또한 그 수치를 반복하지 않도록 죄에서 돌이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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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3-01)


썩은 배띠와 술로 가득한 가죽 부대

예레미야 13장 1-11절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의 귀가 둔하고, 우리의 눈이 보지 못하고, 또 우리의 마음이 닫쳐서 그것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모습으로 또 여러 모양으로 또 여러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다 백성들이 심판 받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그들에게 상징적인 행위로 문명한 현실임을 가르쳐줍니다. 맞이하게 될 앞날에 대해 예레미야에게 전하십니다. 그들은 썩어서 쓸모없는 띠와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단계의 표적 행위(1-2)

성도는 추악한 욕망과 죄를 분별하고 그것을 멈추게 하는 신앙 양심을 늘 작동시켜야 합니다. 주님을 욕망을 절제하고 죄짓지 않을 기회를 여러 번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망을 버리려 애쓰면서 경건한 삶을 훈련해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며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죄의 유혹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1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 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 하시기로 2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1-2)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예언자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 베띠를 사서 허리에 두릅니다. ‘베띠’는 아마도 허리에 걸치는 아마(亞麻)로 된 짧은 속옷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속옷은 주인의 아낌을 받는 귀한 물건에 속했습니다. 기존의 베 띠가 아니라 새로 산 베 띠이기에 주인에게는 더욱 소중했습니다. ‘물에 적시지 말라’는 명령의 의도는 불분명합니다. 벗지 말고 항상 입고 있으라는 것인데, 그 이유를 달리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베 띠를 가지고 유브라데로 가라는 두 번째 명령이 주어질 때까지 계속 입고 있어야 합니다. 베 띠의 기능과 관련해서는 11절의 해석에 연결됩니다. 베 띠는 허리에 두르는 것이기에 허리를 떠나서는 쓸모가 없습니다. 베 띠가 허리에 속함 같이 이스라엘도 여호와께 속해야 합니다. 허리에 띤 베 띠로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벗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단계의 표적 행위(3-5)

사탄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도록 종용했던 것처럼 사탄의 계략은 이런 욕망을 더욱 충동질합니다. 우리 곁에는 욕망을 부추기는 요나답 같은 친구가 아니라 진실한 조언과 위로를 건네는 요나답 같은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런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3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4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5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3-5)

첫 번째 명령에 이어지는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주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틈에 감추라’고 명령하시자, 예언자는 그분의 명령에 따라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가에 감추었습니다.’ 첫 번째 표적행위를 보고할 때처럼 군더더기 없이 최소한의 것만 보고합니다. ‘사서 네 허리에 띤’은 두 번째 명령이 첫 번째 명령의 연속임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명령형으로 사용한 동사 ‘가다’와 ‘숨기다’를 다시 사용해 여호와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했음을 보여줍니다(‘일어나’는 ‘자, 이제’를 의미하기에 명령의 이행을 보고할 때는 불필요해집니다. ‘유브라데 물가에’는 문자적으로 ‘유브라데에’를 뜻합니다.

 

셋째 단계의 표적행위(6-7)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시지만, 범죄의 결과로 우리는 영적으로 둔감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 충만함을 다시 회복하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심각한 결과를 기억하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 죄의 끔찍한 저주로부터 자신을 지켜 내시기 바랍니다.

6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가져오라 하시기로 7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오니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더라(6-7)

세 번째 표적행위의 보고도 처음 두 표적행위의 보고와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시고 예레미야는 이를 그대로 따릅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시자, 예언자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왔다.’ 처음 두 표적행위의 보고와 유사하게 일정한 틀에 따라 무미건조할 정도로 덤덤하게 여호와의 명령과 예언자의 실행보고를 기술합니다. ‘가서 가져오라’에 ‘가서(파고) 가져온다.’ 여기서도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에 의해 세 번째 명령은 두 번째 명령에 직접 연결됩니다. 명령의 이행과 관련해 첫 번째 실행보고에는 ‘여호와의 말씀대로’(2)가, 두 번째에는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5)가 나오는데 세 번째에는 이와 유사한 언급이 없습니다. 명령의 순종을 더 이상 반복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아마도 보고의 강조점을 순종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세 번째 표적행위에만 나오는 두 가지 언급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 번째 명령에는 ‘여러 날 후에’라는 때에 관한 언급이 나옵니다. 유브라데까지 왕복하려면 여러 달이 걸리기에 논리적으로 보면 이는 불필요한 언급입니다. ‘여러 날 후에는 문자적으로는 '많은 날들이지난 후에 일어났다’로, 단순하게 충분한 시간이 지났음을 보여주려는 것만은 아닙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발생했음을 시사해줍니다. 새로운 것은 보고의 마지막에 나오는 두 번째 차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더라’(7). 띠의 상태에 관한 언급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예외 없이 행위를 보고했는데, 서로 연속된 세 개의 표적행위를 마감하는 자리에 처음으로 상태에 관한 서술이 나옵니다. 관심이 예언자의 순종에서 띠의 상태로 옮겨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개역개정의 번역에는 이 전환이 잘 나타나지 않지만, 7b절은 ‘보라, 그 띠가 썩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됐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표적 행위의 해석(8-11)

우리가 죄를 자복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지만 이것과 함께, 우리가 저지른 죄악에 대한 부정적 영향력은 남는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영향력은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죄악을 멀리하도록 늘 깨어 사시기 바랍니다.

8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9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10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1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8-11)

여호와께서 직접 표적 행위를 해석해주십니다. 여기서 계시 사건의 도입부가 두 번 연속적으로 나옵니다. 8절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는 (문맥에 따라 첨가된 ‘다시’를 제외하고) 3절과 똑같습니다. 또한 9절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도 그 기본 틀에 있어 1절과 같습니다. 이는 명령과 해석이 모두 여호와로부터 나왔음을 강조합니다. 즉 예레미야에게 표적행위를 명령하신 분이 표적 행위를 해석해주신 분입니다. 행위와 결과의 주체는 오직 여호와 한 분뿐입니다. 먼저 썩어서 쓸모없어진 띠를 부패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운명으로 해석해줍니다.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9b). 썩은 띠가 버려지듯이 썩은 유다와 예루살렘도 버려집니다. 교만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속속들이 썩게 만들었습니다. 여호와보다 자신의 능력이나 업적이나 명성에 의존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자기도취와 과신이 교만을 낳고, 교만이 멸망을 초래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모두 교만의 죄에 빠졌지만, 특히 여호와의 성전(종교의 중심)과 다윗의 보좌(정치의 중심)를 자랑하는 예루살렘이 더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동맹정치에 의존하다가 여호와께서 맡긴 양 떼를 멸망에 떨어지게 했습니다(20-21).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이 악한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썩게 만든 교만의 구체적 예를 언급하시고 그들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를 지적하십니다.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절하고 제 완악한 마음에 따라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며 그것들을 섬기고 절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 민족들이 여호와께 ‘나의 모든 악한 이웃’(12:14)인 것처럼, 이제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은 자들로 타락한 하나님 백성도 ‘나의 모든 악한 이웃’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쓸모없는 썩은 띠가 버려지는 것처럼 ‘이 악한 백성’도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11절은 띠의 기능에 초점을 맞춰 이스라엘과 유다의 배반을 고발합니다.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붙어 있듯이 여호와는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유다뿐만 아니라 이미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북이스라엘도 여호와께서 택하신 언약 백성으로 그분께붙어(속해) 있어야 했습니다. 이미 멸망한 이스라엘의 언급은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멸망 당했다면, 불순종한 유다의 운명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당신께 속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백성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책무이자,그들의 정체성이며 의무였습니다. 여호와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 ‘이름과 명예와 영광’을 주어 그들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길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기대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불순종으로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그분의 명성을 더럽히기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중에 있는 교만을 썩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입니다. 그 교만은 하나님말씀을 안 듣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요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 욕망의 소리 곧 다른 신의 소리를 따라 산다는 뜻입니다. 요즘 무엇이 자신의 삶을 지배하는지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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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2-02)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예레미야 12장 7-13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사랑해 주시고, 하나님꼐서 사랑하신 모습으로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를 품어주시기도 하시고 또 격려해 주시기도 하십니다. 또 기쁨을 주시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판을 통해서 시련을 인도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시간이되시길 바랍니다.

 

남 유다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산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함으로 대적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여호와의 칼인 훼멸하는 자들로 인해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어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당신 소유를 포기하시는 하나님(7-13)

하나님께서 자백하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받는다는 생각으로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받을 모든 심판을 홀로 받으신 주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이 피 흘리신 큰 은혜를 기억하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성도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7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나니 8내 소유가 숲속의 사자 같이 되어서 나를 향하여 그 소리를 내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였음이로라 9내 소유가 내게 대하여는 무늬 있는 매가 아니냐 매들이 그것을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너희는 가서 들짐승들을 모아다가 그것을 삼키게 하라 10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 11그들이 이를 황폐하게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폐함은 이를 마음에 두는 자가 없음이로다 12파괴하는 자들이 광야의 모든 벗은 산 위에 이르렀고 여호와의 칼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삼키니 모든 육체가 평안하지 못하도다 13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음이니라(7-13)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앞으로 다가올 심판에 대해 또다시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이방 민족에게 둘러싸여 짓밟히고 황폐해질 것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고집대로 행하는 죄인들을 향한 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은 확고부동했습니다.

(1) 포기와 그 이유(7-8)

언약의 파기를 고발하는(11:1-13) 예레미야를 죽이려 한(11:18-23) 것은 단순히 예레미야 개인에 대한 위해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예언자로 보내신 여호와께 대한 노골적인 반역이었습니다. 숲속의 사자가 포효하며 주변 짐승들을 위협하듯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8). 여호와의 소유인 이스라엘이 마치 원수를 대하듯 하나님께 소리를 지르고 덤볐습니다. 소유주의 권한과 능력을 무시하며 미움을 자초했습니다. 싫어하는 물건이 버려지듯이 미운 짓만 골라 하는 이스라엘도 버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어느 날 갑자기 이스라엘이 미워져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소유권을 전혀 무시했기에, 또 그분께 속하기를 완강하게 거절했기에 여호와는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 소유를 내던져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그 원수의 손에 넘겼다”(7). 그분의 집, 그분의 소유, 그분의 사랑하는 것이지만 그분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어쩌실 수 없었습니다. 반복적으로 사용된 여호와의 일인칭 소유격은 여호와의 실망과 안타까움과 단호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남의 것’도 아닌 ‘내 것’이, ‘내가 애지중지하던 것’이 반역했습니다. 언제나 귀한 존재로 남아있길 기대했는데(참조, 3:19) 결과는 너무나도 참담했습니다. 세 개의 동사 ‘버리다’, ‘내던지다’, ‘넘기다’는 실망하신 여호와의 심판 의지가 얼마나 단호한지를 보여줍니다. ‘내 집’과 ‘내 소유’와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여호와의 집’은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성전이나 가나안 땅을, ‘여호와의 소유’는 주로 가나안 땅을 가리키지만, 8-9절에 묘사된 소유주 여호와께 대드는 소유물의 모습은 셋 다 ‘여호와의 백성’으로 이해할 때 더 잘 어울린다. ‘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문맥에서는 11:15 의 ‘나의 사랑하는 자’에 연결됩니다.

(2) 황무지가 된 땅(9-11a)

소유권의 부정은 보호의 박탈로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스라엘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먹이를 채가려는 맹금을 다른 맹금들이 둘러싸고 공격하는 것처럼, 여호와를 배반한 이스라엘이 주변에서 기회를 노리던 사나운 적들의 희생물이 됐습니다(9). 여호와께서 들짐승을 불러 당신 소유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많은 목자가 ‘그분의 포도원’을 파괴하고, ‘그분의 몫’을 짓밟아 폐허로 만들었다(10). 여호와의 포도원에 비유되는 이스라엘은 이방 왕들에게 유린당해 황무지가 됐습니다. 폐허로 변한 예전의 경작지는 하나님을 향해 통곡할 뿐입니다(11a).

(3) 깨달음의 부재(11b)

상황이 더 절망적인 것은 땅의 황폐함 때문만은 아닙니다. 온 땅이 폐허가 됐는데도 이 일에 마음을 두는 자가 아무도 없다. 적들에 짓밟혀 황폐해진 경작지는 하나님을 우러러 탄식하는데, 포도원과 밭을 경작했던 자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포도원이 어떻게 이처럼 황무지가 됐는지 관심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분노’에 관해 질문하는 자가 없습니다.

(4) 파괴자들의 침략(12)

12절은 10절의 구체적 기술입니다. ‘파괴하는 자들’은 ‘광야의 모든 벗은 산’을 넘어 쳐들어왔습니다. 아마도 요단 동편과 유다 남쪽의 광야로부터 공격해 들어온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칼’은 침략자들이 여호와의 손에 들린 심판의 도구임을, 가나안의 황폐함이 여호와의 심판임을 다시금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5) 소출이 없는 농사(13)

여호와께서 보내신 적들이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휩쓸고 지나가기에 누구도 칼을 피해 안전하게 숨지 못합니다. 경작지가 완전히 황폐해졌기에 밀을 심어도 자라지 못하고 가시나무만 무성할 뿐입니다(13). 땀을 흘리며 수고해도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지혜문학의 전통에 따르면, 농부의 능력은 소출로 결정되기에 소출이 없는 농부는 능력이 없는 농부이고, 능력이 없기에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셨기에 땅은 저주를 받아 수확이 없고, 사람들은 수치를 면치 못합니다.

 

민족들의 심판과 구원(14-17)

누구든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진리의 말씀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길 기대하십니다.

14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에 손을 대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유다 집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 내리라 15내가 그들을 뽑아 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들의 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16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17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17)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은 유다 백성을 심판하기 위해 사용된 이방 민족들에게까지 미칩니다. 징계의 도구였던 이방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이방들을 약속의 땅에서 몰아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 심판과 구원(14-15)

여호와의 시선이 이스라엘에서 그 주변 나라들로 옮겨집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을 도구로 사용해 당신의 소유 이스라엘을 심판하시지만, 민족들도 심판의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이 민족들에게 면죄부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소유 관계(언약)를 부정해 징계를 받지만, 민족들은 여호와께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에 손을 댔기에 자기 땅에서 뽑힘을 당합니다(14). ‘나의 모든 악한 이웃’은 10절에서 여호와의 포도원을 헐고 그분의 몫을 짓밟는 ‘많은 목자’와 12절에서 광야의 헐벗은 모든 산을 넘어오는 ‘파괴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나의’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민족들도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음을 시사합니다. 9-12절에서는 ‘여호와의 칼’로 사용되었던 민족들이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징벌을 받습니다. 민족들이 여호와의 심판의 도구이기는 하지만, 의로운 도구는 아니었습니다. 여호와는 민족들의 야욕을 잠시 이용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제 욕심에 따라 유다 땅을 침략해 들어와 여호와의 포도원을 마음대로 유린했습니다. 유다 백성을 탄압하고 ‘파괴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소유를 침해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들 역시 징벌을 받습니다. 당신의 소유권을 거절한 이스라엘을 폐허로 만드신 분께서 소유권을 침해한 악한 이웃을 그들의 땅에서 뽑아내십니다.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민족들의 경우도 멸망이 여호와의 최종 목표는 아닙니다. 이들에게도 심판 이후에 구원이 주어집니다. “내가 그들을 뽑아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들의 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15). 여호와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각자 제 기업으로 돌아가게 해주십니다. 값없이 베푸시는 여호와의 모성적 사랑이 제 땅에서 뽑혀 남의 땅으로 유배당한 민족들에게 소망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이스라엘이 일찍부터 경험한 여호와의 긍휼을 민족들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기업’은 여호와께서 민족들에게도 땅을 상속재산으로 나눠주셨음을 시사해줍니다(참조, 신 32:8).

(2) 양자택일의 갈림길(16-17)

민족들의 귀향은 여호와께서 계획하신 구원 약속의 일부일 뿐입니다. 제 고향으로 돌아온 민족들에게 여호와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길도 열립니다. 이스라엘은 주변 민족들로부터 바알 숭배를 받아들여 멸망의 길로 나아갔지만, 민족들에게는 거꾸로 이스라엘로부터 여호와 종교를 배워 여호와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됩니다. 민족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살아 있는 여호와라는 내 이름으로 맹세하면’ 그들 역시 여호와의 백성으로 세움을 받습니다(16). ‘내 백성의도’는 여호와께서 알려주셨지만 이스라엘이 따르지 않은 그분의 계명과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계시해주신 계명과 가르침을 배우면 민족들도 여호와의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족들이 ‘내 백성 가운데에’(16), 곧 이스라엘을 통해 구원의 소망을 얻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내 백성 가운데에’는 14절의 ‘그들 가운데서’와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민족들의 길을 배워 우상을 숭배하다가 ‘그들 가운데서’ 뽑혀 유배를 갔습니다. 반대로 민족들은 이스라엘과 접촉하면서 이들로부터 여호와 종교를 배워 ‘내 백성 가운데에’ 세움을 입습니다. 여호와 종교의 문호가 민족들에게 개방되면서 이들의 결단이 중요해졌습니다. 개종의 기회를 잡아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면 그분의 보호와 축복 아래 살고, 주어진 기회를 거절하고 그분께 순종하지 않으면 뿌리째 뽑혀 멸망합니다(17). 여호와 백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요인이 전통과 혈통에서 고백과 순종으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심판받는 영혼들을 보시면서 고통으로 탄식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고통을 이해한다면 우리 가운데 있는 악의 어떠한 모양이라도 버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목적 은 결코 파멸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죄에서 돌이켜 구원의 길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죄인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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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2-01)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고향 아나돗 사람들

예레미야 11장 18절-12장 6절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해 봉사를 할 때, 여러 가지 모양의 고난이 있습니다. 자기가 뜻하지 않는 위기를 당할 때도 있고 또 핍박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교회를 섬길 때도 여러 가지 모양의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어려움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합니까?
 
유다 백성은 여호와의 심판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에게 맞서며,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밉니다. 홀로 남겨진 예언자는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여호와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도움을 간구합니다.
 

첫 번째 예언자의 탄식과 여호와의 응답(18-23)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 때 당장은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들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말씀과 공의대로 살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과 함께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느라 어려움을 당하고 두려움을 느낄 때,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18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19나는 끌려서 도살 당하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열매를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20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21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빼앗으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22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23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18-23)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곧 유다인들의 반발을 일으켰습니다. 고향 아나돗 사람들이 강하게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반발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그들의 멸망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1) 예언자의 탄식(18-19)
예레미야의 탄식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된 것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알려주셔서 예레미야는 ‘그들의 행위’를 알게 됐습니다(18). 알게 된 내용보다 알려주신 주체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행위’는 19절에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 ‘그들’의 정체는 21절에서 여호와의 입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로 인해 남도 아닌 고향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습니다. 여호와께서 알려주셔서 예레미야는 뒤늦게야 자신을 살해하려는 이들의 악한 계획을 알게 됐습니다. 예레미야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여호와는 당신의 예언자를 죽이려는 자들의 행위를 다 보고 계셨습니다. 예레미야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주변에는 도움의 손길이 없었지만, 위에는 그를 지키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1:8)는 약속에 따라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와 함께하셨습니다.
주인의 손에 이끌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의 비유는(19) 예레미야가 고향 사람들의 배반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순한’으로 옮긴 ‘알루프’는 ‘신뢰하는 (사람)’, 또는 ‘잘 길들여진’을 의미합니다(참조, 3:4; 13:21). 제 운명도 모르고 신뢰하는 주인의 손에 이끌려 도살장으로 가는 어린 양처럼, 예레미야는 주변 사람들이 음모를 꾸미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을 신뢰하기까지 했습니다.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들의 음모는 단순한 위협이 아닙니다. 이들은 ‘나무와 열매를 함께’ 잘라버려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고 모의했습니다(19b). 이들은 예레미야의 생명뿐만 아니라 그의 흔적마저 없애버리려 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께서 출생 전부터 예언자로 성별한(1:5) 예레미야를 마치 세상에 없던 존재로 만들려 했습니다.
(2) 예언자의 호소(20)
고향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대적이 되었기 때문에 예레미야에게는 최고 재판관이신 여호와께 호소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도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그는 공의로 판단하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적들에게 복수해주실 것을 간구합니다(20). 그런데 불의한 폭력에 희생당한 자가 여호와께 간구하는 ‘보복’은 단순히 사적인 앙갚음이나 한풀이가 아닙니다. 이는 신적 정의의 실현과 깊이 관련이 있는 법적 용어에 해당합니다. 죄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이 여호와의 공의에 속한다는 측면에서, 불의한 가해자의 징계는 의로운 피해자의 무죄에 대한 반증이 됩니다. 다시 말해, 복수 요청은 무죄 인정을 의미합니다.
(3) 여호와의 답변(21-23)
뒤늦게 여호와의 입을 통해 대적의 정체와 이들이 예언자를 죽이려 한 이유가 알려집니다. 아나돗의 고향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생명을 위협하면서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하고 예언 금지를 명했습니다(21). 문맥에 따르면, 아나돗 사람들은 언약 파기를 주장하는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로 간주하고 신명기 율법(신 13:1-5)에 따라 그를 죽이려 했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언약의 파기나 성전의 멸망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할 수 없는 예언이었던 같습니다(참조, 26:8-9, 11). 그러나 예레미야의 목숨을 노린 아나돗 사람들에게 멸망의 심판이 선포됩니다(22-23). 청년들은 적들의 칼에 맞아 죽고, 아이들은 기근으로 굶주려 죽을 것입니다. 예언자를 죽이려 한 자들뿐만 아니라, 집안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과 어린 아이까지도 모두 멸망에 떨어집니다. 아나돗 사람들은 예외 없이 모두 재앙에 떨어집니다. ‘벌할 해’는 예레미야가 간청한 ‘주의 보복’에 응답하여 여호와께서 당신 공의에 따라 유다를 심판하시는 해입니다.
 

두 번째 예언자의 탄식과 여호와의 응답(12:1-6)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도록 성도들을 강하게 무장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사역을 맡은 일꾼은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하는 일꾼들에게는 세상의 핍박과 유혹이 언제나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충성을 다하는 신실한 일꾼들이 되길 기대하고 격려해 주십니다.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3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 4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5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 6네 형제와 아버지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너는 믿지 말지니라(1-6)
예레미야는 마음속에 품은 의문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와 변론하실 때마다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또다시 하나님께 자기가 품고 있던 의문을 제기합니다.
(1) 예언자의 간구(1-2)
예레미야는 이번에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공의와 경험적 현실 사이의 괴리에 관해 그분의 의견을 묻습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1). 악한 자의 부유함과 평안함이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아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에, 불의한 자의 승리와 의로운 자의 고난은 그의 하나님 이해에 상충됐습니다. 예레미야는 마음은 딴 곳에 두고 오직 입으로만 섬기는 악인의 승리에서 하나님의 연루(連累)를 보았습니다.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습니다”(2a).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에 악인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많은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성공과 번영을 누리는 것이 아니냐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2) 예언자의 간구(3)
예레미야의 이러한 문제 제기는 의인이 복을 받고 악인이 화를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법칙에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의인이 복을 받기에 복을 받은 자는 의인이 되고, 악인이 화를 받기에 화를 당한 자는 악인이 됩니다. 이를 예레미야에게 적용하면, 사역의 결실이 없는 예레미야는 복을 받지 못한 자가 됩니다. 즉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은 거짓 예언자입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거짓 예언자가 된 예레미야는 의로우신 재판관인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열매가 아니라 당신을 향한 마음을 살펴 판단하시는 분임을 알기에 예레미야는 자신의 무죄(하나님에 의한 인정받음)를 확신하고 악인의 징벌을 요청합니다(3).
예레미야의 보복에 대한 간구는 정의 구현의 부정적 표현입니다. 박해하는 자의 멸망은 박해당하는 자의 의로움을 입증해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3절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의 표상과 18절의 동사 ‘구별하다’에 의해 1:5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예언자로 구별됐고, 그를 박해하는 자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할 양으로 구별됐습니다.
(3) 예언자의 탄식(4)
예레미야의 시선이 이번에는 악인들로 인해 신음하는 땅으로 향합니다. 땅이 통곡하고 온 들판의 풀이 메말라버립니다. 또 먹을 것을 찾지 못해 가축과 새는 죽어갑니다(4). 땅이 저주받고 생존 기반은 완전히 파괴됩니다. 악인들은 자신들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았는데도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4)하고 떠듭니다. 이들은 파국적 재앙에 직면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마음은 멀고 입만 가까운 자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습니다.
(4) 여호와의 답변(5-6)
여호와께서 예언자의 탄식에 책망의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5). 걷는 자의 뒤를 따라가기도 어려워한다면 질주하는 말과는 어떻게 겨루어 이길 수 있겠느냐? 안전한 곳에만 있으려 한다면 맹수가 우글거리는 요단의 울창한 숲에서는 어떻게 하려느냐? 지금의 어려움은 사소한 것인데도 이처럼 불평불만을 토로한다면, 앞으로 있을 심각한 위험과 박해는 도대체 어떻게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제기한 당신 공의에 대한 문제에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명령하는 대로 따를 것(참조, 1:7)을 강권하십니다.
주제에 있어 11:21-23에 연결되는 6절은 ‘요단의 울창한 숲’의 구체적인 사례가 됩니다. 예레미야는 집안에서도 버림을 받습니다. 집안의 보호는커녕 핍박당합니다. 고향뿐만 아니라 집안마저도 그의 대적이 됐기에 에레미야는 고아와 같은 신세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를 맞이하는 것은 오직 적들의 폭력과 음모와 박해뿐입니다.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는 것 같습니다. 핏줄을 함께한 집안사람들의 위협이나 감언이설에도 흔들리지 말고, 예레미야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야 합니다.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신 하나님만 그의 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원하는 성도들에게 고난은 늘 찾아옵니다. 우리는 죽음의 위협과 핍박, 악인들의 형통을 보면서 갈등을 겪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해답이 있습니다. 하나님꼐서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지켜 주십니다. 이 약속을 신뢰함으로 모든 상황 속에서 넉넉히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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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1-02)


유다의 반역과 재앙

예레미야 11장 9-17절


반역이란 받은 호의를 배신하고 도리어 악한 음모를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 사이에 반역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부어 주셨지만 그들은 성읍 수만큼의 우상을 만들고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하나님께 반역ㅇ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반역한 유다에게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은 무엇입니까?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언약의 규정을 따르지 않고 우상들을 섬기면서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들은 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주 아래 놓이게 됐습니다.

 

언약의 파기(9-14)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어떤 길에 서 있는지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만약 내 기도가 응답 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행여 돌이켜야 할 죄가 없는지 진지하게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시금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접하고, 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자비로운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9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 10그들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따라 섬겼은즉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깨뜨렸도다 11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12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리라 13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 14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9-14)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순종하기 쉽지 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펴 달라 기도하지도 말고, 도와 달라는 호소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그들을 위한 부르짖음을 들어주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1) 반역의 고발(9-10)

여호와의 시선이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옮겨집니다. 불순종의 완악함에 있어 현세대는 조상들보다 더했습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이 여호와께 ‘반역’을 꾀했습니다. ‘반역’으로 옮긴 ‘계쉐르’는 권력 찬탈을 목적으로 일으키는 정변을 가리킵니다. 언약을 통해 하나님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자기 하나님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은 “내 말 듣기를 거절한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 다른 신들을 쫓아다니며 섬겼습니다(10b). 조약을 체결하고 주군을 섬기던 봉신이 다른 주군을 찾아 말을 갈아타는 것처럼, 여호와의 봉신이던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분의 종주권을 거절하고 다른 신들을 주군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호와만을 섬겨야 할(참조, 츨 20:3, 신 5:7) 그분 백성이 이방 신들의 신하가 됐습니다. 이들의 반역으로 여호와께서 이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이 깨졌습니다(10b), 긴장과 충돌 가운데 겨우 유지되던 언약 관계가 결국은 우상숭배의 암초에 걸려 난파했습니다. ‘자기들의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가서’(10a)가 일반적 언급인지 또는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는 언급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불순종의 반역에 있어 현세대는 조상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는 출애굽부터 계속된 반역으로, 차라리 언약 백성의 본성에 속했습니다. ‘돌아가서’에 주목하는 후자의 입장은 여기서 아버지 요시야의 개혁을 되돌린 여호야김에 대한 고발을 읽어냅니다. 언약을 깨뜨린 주체로 ‘유다 집’과 함께 이미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이스라엘 집’이 나옵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다른 신들을 섬겨 언약을 깨드렸다는 점에서 유다나 이스라엘이나 차이가 없었습니다. 언약의 의무를 준수하지 않아 이스라엘이 멸망했다면, 마찬가지로 언약의 의무를 저버린 유다의 운명도 다를 수 없습니다.

(2) 재앙의 선포(11-12)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주권에 반기를 들고 언약을 깨뜨린 자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십니다.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이다”(11).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그분께서 듣지 않으시기에 치명적입니다. 이스라엘 쪽에서 여호와를 찾을 수 있는 길이 없어졌습니다. 예언자의 중보기도도 금지됐고(14), 제사도 그 기능을 상실했습니다(15).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재앙을 그대로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 여호와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주민’은 ‘다른 신들’을 찾아가 살려달라고 울부짖겠지만, ‘그 신들이 그 고난 가운데에서 절대로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12).

(3) 바알숭배의 고발(13)

재앙이 임했을 때 우상의 실체가 확실히 드러납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이 그처럼 열심히 향을 피우고 섬겼던 이방 신들이 진짜 신이라면, 여호와께서 내리신 재앙 때문에 부르짖는 자들을 구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수치스러운 물건’에 불과한 우상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수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출발한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리고 본질이 ‘수치’인 우상을 섬기다가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우상숭배가 이미 조상의 죄악인데 재앙이 현세대에 임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대로 그 수치스러운 물건의 제단 곧 바알에게 분향하는 제단을 쌓았도다”(13). 유다와 예루살렘이 우상들에게 점령당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우상의 제단뿐입니다.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이방 신’이 되셨습니다. 어느 구석진 곳에 남겨져 온갖 우상들과 동거하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쫓아내고 우상들로 채운 유다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든지 무엇인가 하셔야 했습니다.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는 경고가 더는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언약의 하나님은 반역을 심판하기로 결정하십니다. 숭배자들을 수치에 빠뜨리기에 우상은 ‘수치스러운 물건’이고, ‘수치스러운 물건’이기에 숭배자들에게 수치만 가져다줍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풍요 제의를 주관하는 신의 이름이지만, 여기서처럼 때로는 이스라엘이 섬긴 모든 우상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4) 중보기도의 금지(14)

중보는 예언자의 역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언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선포하는 것이었지만, 예언자는 때로는 백성 편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중보자로 모세(참조. 출 31:11; 34:9; 민 11:2)와 사무엘(참조, 삼상 7:8-10;12:19,23)을 들 수 있습니다(참조. 렘 15:1). 이들은 모두 중보기도를 통해 여호와의 진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드고아 출신으로 북왕국에서 예언 활동을 했던 아모스도 중보기도로 여호와의 심판을 일시적으로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참조. 암 7:2-3, 5-6).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중보기도의 금지를 명령받습니다.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서 듣지 아니하리라”(14). 이미 하나님께서 ‘피할 수 없는’ 재앙을 결정하시고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을 선언하셨기에(11), 예레미야의 중보기도를 들어주실 수 없게 됐습니다. 현세대의 반역과 우상숭배는 그분의 인자와 긍휼과 인애에 호소하기에도 그 한계를 너무 멀리 벗어났습니다. 언약관계를 완전히 짓밟아버린 유다와 예루살렘에게는 오직 멸망의 재앙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피할 수 없는 재앙(15-17)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에서 멀어져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숭배입니다. 이러한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서는 복을 거두십니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재앙이 닥치기 전에 하나님께 돌이키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우상을 모두 내어버리고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15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은 악한 음모를 꾸미더니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려느냐 거룩한 제물 고기로 네 재난을 피할 수 있겠느냐 그 때에 네가 기뻐하겠느냐 16여호와께서는 그의 이름을 일컬어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17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여움을 일으킨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으로 말미암아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셨느니라(15-17)

유다 백성의 반역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감람나무와 같이 심고 가꾸셨습니다. 감람나무는 풍요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말할 수 없이 풍성한 복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경멸하시는 바알을 불러들였습니다.

(1) 제의의 고발(15)

이스라엘이 자랑하고 의지하는 제사와 신학적 전통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앞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백성’으로 택한 자들이 언약을 깨뜨리고, 그분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로 부르시는 자들이 제사를 남용합니다. 이들은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성전을 찾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거룩한 제물 고기’(기름진 짐승과 거룩한 고기)로 재앙을 비켜지나가게 할 수 있다고 믿지만, 이는 그들의 착각일 뿐입니다(15). ‘이 언약의 말’에 순종함이 없이 드려지는 제사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의 행사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으로 남아있을 때, 곧 언약의 규정을 준수할 때만 제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용한 통로가 됩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신학적 전통도 언약을 깨뜨린 자들에게는 과거의 유물일 뿐입니다.

(2) 신학적 특권의 고발(1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좋은 열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로 부르셨던 시절은 지나갔습니다(16). 감람나무가 귀하기는 하지만, ‘좋은 열매’가 아닌 “악한 음모”를 맺는 감람나무는 쓸모없는 나무로 불에 살라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계속 유효하기 위해서는 그 선택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형식화한 제의적 경건은 차라리 재앙을 더할 뿐입니다. ‘큰 소동’은 징계의 심판이 전쟁으로 집행될 것을 시사해줍니다. 제사가 그 효력을 상실하고 아름다운 감람나무가 불쏘시개가 될 때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3) 재앙의 선언(17)

하나님께서 손수 심으신 나무인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이 바알을 숭배하며 그분을 화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17; 참조. 12-13).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하나님께서 심으신 나무라면, 이들은 그분께 뿌리를 내리고 그분 말씀을 섭취해 성장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뿌리를 바알에게로 돌렸습니다. 바알에게 뿌리를 뻗은 나무가 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나무에 불을 붙여 태워버리기로 결정하십니다.


성도들은 침묵하는 우상이 아닌 말씀하시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반역했습니다. 한 분 왕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로 간 것입니다. 조상들이 그렇게 하다가 망한 것을 보고도 똑같이 언약을 파괴했습니다. 그들은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역사와 성경에 오늘 내가 범하는 것과 같은 죄와 그 결과가 셀 수 없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자기 성읍 수만큼 각양각색의 우상을 만들었지만,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부르짖어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자기 욕망의 소리에 자신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 뿐, 그 욕망이 좌절되자 더 이상 들을 소리가 없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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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1-01)


구원과 심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레미야 11장 1-8절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 사람 중에는 부부, 가족, 친구 그리고 연인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특별한 사랑을 나누며, 특별한 관계를 통해 신실한 관계를 세워갑니다. 한쪽에서 신실함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다른 쪽에서 신실함을 같지 않을 때, 상처를 주고받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에 신실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신실하신 분이지만, 사람들은 신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신실함으로 초대하십니다. 하나님과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는 오늘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은 언약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 때문에 유다가 언약을 깨뜨리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반대로 유다가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집니다. 관계가 회복 되어지면 하나님께서 언약을 따라 유다를 지켜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절히, 부지런히 그들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듣지 않고 강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 결국 저주의 심판을 자초합니다.

 

언약의 말씀(1-5)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요,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그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러한 내용을 예레미야에게 언약의 말씀을 전하고 그 말씀을 유다 백성들에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1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 2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말하라 3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4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5내가 또 너희 조상들에게 한 맹세는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 한 언약을 이루리라 한 것인데 오늘이 그것을 증언하느니라 하라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1-5)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땅 구석구석을 다니며 말씀을 전해야 했습니다. 당시 유다 땅은 우상 숭배로 완전히 더럽히져, 사람들은 영적 어둠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타락한 사람들에게 결코 축복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1) 도입부(1-2)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이르시되”(1)는 예레미야서에 네 번 더 등장하는데(7:1;18:1;21:1;30:1), 1-14절의 범위를 넘어 아마도 11장부터 17장까지를 하나의 대 단락으로 묶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 안에 모아진 다양한 말씀을 모두 예레미야가 선포한 여호와의 말씀으로 읽도록 안내해줍니다. 예레미야에게 말씀 선포의 명령이 주어지기 전에 먼저 청자'너희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들어라)”(2a). 처음부터 ‘너희의 들음’을 강조합니다. ‘이 언약의 말(들)’은 세 번 더 나오는데(3,6,8), 그 내용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잘 알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출애굽 때 맺은 언약이기에 본문의 언약은 시내산 언약입니다. ‘말(들)’은 언약을 체결하면서 주어진 율법 또는 규정으로, 특히 십계명으로 집약됐습니다. 이 단락에 모두 아홉 번 사용된 ‘들음’은 청각적 행위를 넘어 실천적 순종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6절은 분명하게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키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 곧 언약 규정을 준수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언약의 말’을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선포해야 합니다(2b). 언약 백성 모두가 듣고 순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2) 언약 이행의 경고(3-5a)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3). 2절의 긍정적인 권면이 부정적인 경고의 말씀으로 뒤바뀝니다. 7-8절은 저주의 선포로 시작하는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불순종은 출애굽 때부터 계속된 악행으로, 지금 유다의 모습도 이전 세대의 악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전 세대가 불순종으로 저주를 받았다면, 여전히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지금 세대도 저주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심판은 필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듣고 실천해야 할 ‘이 언약의 말’은 어느 날 갑자기 일방적으로 이들에게 던져진 짐이 아닙니다(4절은 3절의 ‘이 언약의 말’에 걸리는 관계절이기에 ‘이 언약 대신에’, ‘이 언약의 말’로 첨가해야 한다). ‘이 언약의 말’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내린 명령이었습니다(4a).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하신 분께서 주신 것이 언약의 규정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의 말’은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시는 세상 강자의 짐에 짓눌리지 않고 자유로이 살게 해주신 은혜의 짐입니다. 4절은 여호와의 명령의 구체적 내용입니다.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언약 규정을 준수함으로 출애굽의 구원사를 일상적인 삶에서도 경험하게 됩니다. 애굽을 수식하는 ‘쇠풀무’는 쇠를 녹이는 용광로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혹독하게 당했던 고난의 종살이를 보여주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언약 규정의 준수 안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이번에는 이를 땅의 약속에 연결 시킵니다. “이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겠다고 한 맹세를 지키기 위함인데, 오늘날 (너희가 보는) 대로다”(5a, 사역). 언약 관계가 조상들에게 맹세로 준 땅에 관한 약속의 성취로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맹세는 가나안 점령으로 정점에 도달하기는 하지만. 그 효력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너희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여 언약 규정을 지키면,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조상들에게 맹세한 그분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분의 맹세는 가나안에서의 안정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전제 조건인데, 이 전제 조건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가나안에서 언약 규정을 준수하며 산다면 충족됩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조상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나안에 살고 있음은 하나님께서 당신 약속에 얼마나 신실하신 분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분은 약속을 계속 지켜나가길 원하시기에, 선택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손에 달렸습니다. 이들이 언약 규정을 준수한다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약속은 앞으로도 유효하고, 불순종한다면 그 효력이 끝나버리게 됩니다.

(3) 예레미야의 화답(5b)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중에 뜻밖에도 예레미야가 ‘아멘 여호와여’로 화답합니다(5).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주신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외적 반응은 3절의 저주 선언과 함께 살펴질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저주와 예언자의 응답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신명기 27:14-26의 레위인의 저주 및 이스라엘 백성의 응답과 일치합니다. 모세는 레위인들에게 열두 가지 저주를 선포하도록 명령하고, 각각의 저주 선언에 백성이 아멘으로 화답하도록 가르칩니다. 여기서는 예레미야가 백성을 대신하여 ‘아멘 여호와여’라고 화답하면서, 불순종한 자들에게 언약 파기의 저주가 임할 것을 인정합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전한 저주의 말씀이 예레미야 시대에 현재화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언약의 말’을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전하게 하셨다는 점에서 예레미야는 또 모세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에게 율법(언약 규정)을 전달한 모세의 후계자가 됩니다.

 

언약에 따른 저주(6-8)

교회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봉사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 매일 말씀에 순종함으로 거룩한 살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모든 종교 행위를 무가치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순종할 때 선한 열매와 복된 은혜의 선물을 넘치게 주실 것입니다.

6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말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선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지키라 7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 하였으나 8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 하라(6-8)

형식상 3b-5절이 ‘이 언약의 말’을 선포하는 여호와와 듣고 화답하는 예레미야 사이의 개인적인 대화라면, 6-8절은 예레미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 언약 준수의 요청(6)

여호와께서 다시금 예레미야에게 선포를 명령하시는 6절은 2절을 대체적으로 만복하고 있습니다. 선포의 청자(‘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대신 장소(‘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가 나오고, 동사 ‘듣고’에 하나가 더 첨가되어 ‘듣고 지키라’로 확대되면서, 말씀에 대한 순종적 실천이 더욱 강조됩니다.

(2) 조상들의 불순종(7-8a)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출애굽 세대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세대도 포함하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언약 규정의 준수도 모든 세대의 의무에 속했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쌍무적 조건적 언약이었기에 언약 규정의 준수를 통해서 그 효력을 지속시켜나갈 수 있었습니다. 언약의 한 당사자인 이스라엘이 언약 규정을 무시한다면 언약관계는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와 달리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언약에 전혀 신실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간절히 경계하며 끊임없이 경계하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각각 그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였다.”(7-8a)

(3) 불순종에 따른 주저(8b)

거듭 예언자들을 보내 경고하고 위협하며 순종을 요청했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듣지 않았습니다. 조상들은 여호와의 경고를 무시하고 완강하게 제 악한 생각을 따랐습니다. 불순종의 완악함은 일시적 이탈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 때부터 오늘까지 계속된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당신 목소리에 순종하게 해보려는 여호와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가능성으로 선포된 “이 언약의 말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3)가 필연이 됐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행하라 명령하였어도 그들이 행하지 아니한 이 언약의 모든 규정대로 그들에게 이루게 하였느니라”(8), 집행된 저주의 내용에 관해서는 본문이 침묵하기에 알 수 없고, 분명한 것은 언약 규정의 불순종이 저주를 초래했다는 점입니다(불순종에 따른 저주의 구체적 내용은 신명기 28:15-68에 나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규정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들의 악한 욕망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은 인간의 타락한 욕망의 노예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표준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절대적 표준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매일 말씀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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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0-02)


피할 수 없는 예루살렘의 멸망

예레미야 10장 17-25절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가장 잘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면 기복신앙을 갖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 수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많은 부분에서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고 그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확정됐습니다. 여호와께서 극적으로 구해주시리라 기대한다면, 이는 착각일 뿐입니다. 그분께서 멸망과 유배를 결정하셨기에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유다는 이제 필요한 물품을 미리 싸놓고 유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피할 수 없는 멸망(17-22)

우리는 형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자기 인생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다가 우상을 숭배한 이유도 형통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한 형통이란 다산과 풍요였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헛되고 무가치한 우상을 좇으면 유다의 같이 패망합니다. 반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누립니다. 인생의 참된 복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전하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17에워싸인 가운데에 앉은 자여 네 짐 꾸러미를 이 땅에서 꾸리라 18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19슬프다 내 상처여 내가 중상을 당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라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로다 20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내 장막을 세울 자와 내 휘장을 칠 자가 다시 없도다 21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 22들을지어다 북방에서부터 크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니 유다 성읍들을 황폐하게 하여 승냥이의 거처가 되게 하리로다(17-22)

예레미야는 적군에게 포위되어 성안에 갇힌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 땅을 심판하실 것을 선포하십니다. 그들은 이제 짐을 꾸리고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심판에 대해 괴로워하시며 통곡하십니다.

(1) 심판 선고(17-18)

처음 두 절은 포위당한 예루살렘(과 유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역사적 배경으로는 주전 597년의 제1차 유배, 또는 주전 587년의 제2차 유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에워싸인 가운데에 앉은 자’, 곧 예루살렘이 적들의 포위 공격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항복을 하건 함락당하건 적들에 사로잡히는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유배를 대비하여 짊을 꾸려놓으면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17). 주전 701년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포위됐다가 극적으로 구원을 받은 놀라운 일(참조, 사 36-37장)을 다시 기대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을 대적에게 넘겨주기로 하신 여호와의 이번 결정은 변경될 수 없습니다. “내가 이 땅에 사는 자를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18). 용사나 목자가 적이나 짐승을 향해 물매로 돌을 던지듯이 여호와께서 주민들을 단호하게 내던지십니다. 먼 이방 땅으로 쫓겨나는 유례없이 혹독한 재앙입니다. 여호와로부터 오는 괴로움이기에 이를 피할길도 없고, 그분께 도움을 간구할 수도 없습니다(18b).

(2) 일인칭 탄식(19-20)

다음 두 절은 이미 포위가 끝나고 유배지로 쫓겨나는 장면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앞에서 선포한 위협이 현실화됐습니다. 예루살렘을 대변하는 ‘나’가 장막의 표상을 사용해 처참한 현실을 탄식합니다. “나의 상처로 내게 화가 미쳤구나! 나의 부상이 심하다”(19).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는데 고통을 호소할 데도, 도움을 요청할 데도 없습니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19b), 그래도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 예루살렘의 처지는 사납게 휘몰아치는 폭풍우나 적들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줄이 끊어지고 휘장이 찢겨, 완전히 훼손된 장막보다 더 참담합니다. 파괴된 장막은 수선하거나 새것으로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모두 떠나버리고 아무도 없는 예루살렘은 재건이 불가능합니다(20). 장막의 비유는 아마도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을 ‘한 가족’으로 보여주기 위해 선택된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은 전쟁으로 폐허가 됐을 뿐만 아니라, 그 주민도 모두 떠나거나 사로잡혀 갔습니다. 회복을 소망해볼 만한 싹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가 입은 중상은 치료할 수 없는, 자신에게 화를 선포하며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치명적 부상입니다.

(3) 재난의 원인(21)

이번에는 목자와 양의 표상을 사용해 멸망의 심판이 임하게 된 원인을 알려줍니다. “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21). 목자와 양 떼를 구분해서 양 떼가 흩어진 책임을 목자에게 묻습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이 여호와의 의지를 묻지 않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따라 유다 백성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위정자들의 어리석음과 불순종이 백성을 사방으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그렇다고 백성을 통치자에 의해 오도된 희생양으로 몰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의 언약 파기를 고발하는 11장이 잘 보여주듯이 ‘여호와를 찾지 않음’에 있어서는 백성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여기서는 ‘여호와의 양 떼’(13:17)를 돌봐야 할 통치자들의 책임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4) 신판 선고(22)

심판의 선고(17-18)와 탄식(19-20)과 심판의 원인(21) 다음에 다시 한 번 심판을 선고하는 말이 나옵니다. 17절의 예루살렘은 적들에 포위당했고, 20절의 예루살렘은 이미 함락당해 그 주민들이 유배를 떠났습니다. 22절의 적들은 아직 ‘북방에서부터’ 내려오고 있는 중입니다. 전쟁의 진행 순서에 따르면 22절이 먼저 와야 합니다. 아마도 17-21절이 예루살렘에만 관심을 두기에 ‘유다 성읍들의 황폐함’을 언급하는 22절을 보층한 것 같습니다. 적들이 북쪽에서 내려오는데,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이 땅을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말발굽 소리와 함성을 뒤로하며 거침없이 진격해 옵니다. 이들의 원정 목적은 하나입니다. 유다의 성읍들을 황폐하게 해서 승냥이(자칼)의 소굴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찢기고 무너진 장막처럼 되듯이 유다 성읍들도 사람이 살 수 없는 폐허가 됩니다.

 

간구의 기도(23-25)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받은 예레미야는 비참한 현실에 처한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그들의 죄악에 대해 애통하며, 유다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기도자로 부르셨습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성해야 합니다.

23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24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25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하니라(23-25)

유다가 실패한 원인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국가 지도자들도 하나님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 중에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공동체에 심각한 위기가 임박했다는 증거입니다.

(1) 하나님의 공정 간구(23-24)

19-20절의 경우처럼 ‘나’가 다시 화자로 등장하지만, 동일한 ‘나’는 아닙니다. 전자의 ‘나’는 예루살렘이고, 후자의 ‘나’는 예언자입니다. 물론 본문은 예언자의 사적 기도가 아닙니다. 심판을 당한 이스라엘 백성이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예언자는 이 기도를 통해 멸망의 시대를 사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는 먼저 지혜 문학의 가르침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23; 참조. 잠 16:9; 20:24). 이스라엘은 사람이 자기 길의 주인이 아님을, 길을 걷는 자가 자기 발걸음을 정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기지만, 이를 온전히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때도 있지만, 제 운명을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여호와만을 유일한 결정권자로 인정해야 합니다. 여호와를 찾지 않은 어리석음(21)은 자신을 최고 결정권자로 간주한 유다 백성의 교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계획을 신뢰하였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스스로의 능력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그 교만의 대가로 멸망의 늪에 빠졌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과거의 잘못을 뼈저리게 깨닫고 여호와께로 돌아와, 다시 그분께 자신의 운명을 내맡겨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내버리고 겸허하게 여호와께로 돌아와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을 결정하시고 이를 그대로 실행하신 분께서 앞으로의 운명도 결정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은 멸망과 유배를 하나님의 공의로운 징계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미래를 철저하게 그분께 의탁해야 합니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24). 적어도 일부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멸망과 유배를 하나님의 무능력과 패배로 돌렸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파국의 원인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과거의 극복 없이는 새로운 시작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완전히 소멸할 수밖에 없기에 ‘너그러이’(공의로) 채찍질해주시길 간구해야 합니다. ‘공의로운 징계’의 구체적 의미는 불분명하지만, ‘진노’와 공의를 구별해서 전자는 완전한 멸망과 관련해, 후자는 징계(훈계)와 관련해 사용합니다. 아마도 ‘진노’는 심판받은 자들에게 지속해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부정적 작용력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2) 민족들이 멸망 간구(25)

하나님의 심판으로 초라해진 야곱은 주변 민족들의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탐욕스런 민족들이 약탈하거나 침략해 들어오지만, 야곱에게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땅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한 야곱에게는 여호와의 개입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25). 자신과 관련해서는 ‘너그러운/공정한’ 징계를 호소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민족들에게 당신의 분노를 쏟으시길 간구합니다. 다른 단어이기는 하지만 ‘분노’는 24절의 ‘진노’와 내용상 유사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야곱은 민족들의 우상을 헛것으로 선포하는 단락(1-16)의 마지막 절인 16절에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분깃’이시고,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이기에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려는 민족들은 여호와의 소유를 탐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야곱의 몫’에 대한 보복을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을 슬퍼하고 아파해야 합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참상을 자기 일로 슬퍼하고 아파합니다. 유다의 고통은 곧 예레미야의 고통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백성의 비극 앞에 그는 중상을 입은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의 경험은 백성들이 겪을 고통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낍니까! 특별히 죄로 인해 심판 아래 있는 이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에 대한 마음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공감하는 것을 ‘통감’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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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0-01)


헛된 우상과 하나님

예레미야 10장 1-16절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동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미치며 살지만, 후자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유다 백성은 이방인의 풍습에 물들었습니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가나안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수동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능동적으로 살아가면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만든 우상은 나무에 불과하며, 화를 내리거나 복을 주지 못하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십니다.
 

도입부(1)

우상은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죽은 재료로 만들어서 하나같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 나무토막에 불과한 우상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상의 외관도 결국 사람들의 손재주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값비싸게 만들어도 기술자들의 작품일 뿐입니다.
1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1)
“이스라엘 집이여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긴 도입부로 시작합니다. 이처럼 길고 장엄한 문구가 사용된 것은 드뭅니다. 명령혀 이후에는 ‘말씀’을 어근으로 하는 단어가 두 차례나 나옴으로써, 이스라엘이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어야 하며, 그 말씀은 ‘여호와’로부터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예언자가 선포하는 말씀은 여호와가 예언자의 ‘입에 둔’ 것입니다(1:9). 이것은 예레미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여호와의 진정한 메시지가 무엇인가에 대해 적지 않은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23:11).
 

우상 비판과 여호와 찬양(2-11)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우리 마음을 현혹하는 우상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혜, 돈, 명예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화려한 우상처럼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우상이 아무리 화려하고 진귀한 모습이더라도 그것은 생명이 없기에 결코 우리를 도울 수 없습니다. 모든 우상은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2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길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3여러 나라의 풍습은 헛된 것이니 삼림에서 벤 나무요 기술공의 두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4그들이 은과 금으로 그것에 꾸미고 못과 장도리로 그것을 든든히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나니 5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6여호와여 주와 같은 이 없나이다 주는 크시니 주의 이름이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크시니이다 7이방 사람들의 왕이시여 주를 경외하지 아니할 자가 누구리이까 이는 주께 당연한 일이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들의 지혜로운 자들 가운데 주와 같은 이가 없음이니이다 8그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니 우상의 가르침은 나무뿐이라 9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과 우바스에서 가져온 금으로 꾸미되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었나니 이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이거니와 10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 11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에서 망하리라 하라(2-11)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이방의 미신적인 생활 방식을 본받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들이 의지하는 우상은 사람이 숲에서 벤 나무며 기술자가 만들어 놓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아무리 화려하고 진귀한 모습이더라도 그것은 생명이 없기에 결코 우리를 도울 수 없습니다. 모든 우상은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1) 우상 비판(2-5)
우상 논쟁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할 청자인 ‘이스라엘 집’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모두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여호와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는 민족들의 종교적 풍습은 헛것이기에, 이스라엘은 이를 배우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고대인들에게 별의 운행은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하늘의 별이 민족의 역사와 인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특히 일식과 월식과 혜성의 등장은 혼란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천체가 신들의 세계에 속했기에 별의 운행을 잘 관찰하면 신들의 의지와 결정을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해와 달과 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참조, 창 1:14-17) 원칙상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일월성신숭배는 바벨론에서 유래하였다). 별자리와 그 움직임은 창조주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놓으신 것이기에 ‘징조’가 될 수 없고,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민족들의 천체 숭배가 헛것이듯이 이들의 우상숭배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상은 숲에서 베어낸 나무를 도끼로 다듬고 그 위에 금과 은으로 덧씌운 기술자의 작품입니다. 우상은 새를 쫓기 위해 오이밭에 세워놓은 허수아비처럼 말도 못하고 걸을 줄도 모릅니다. 움직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옮겨주어야 합니다. 사람에 의존하는 우상은 해를 끼치거나 유익을 가져다줄 수 없기에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2) 여호와 같은 이 없다(6-7)
6절의 처음과 7절의 마지막에 놓인 ‘주와 같은 이 없나이다’는 여호와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강조합니다. 여호와는 장인의 작품에 불과한 우상들과는 차원을 전혀 다릅니다. 처음부터 ‘권능으로’ 당신의 왕권을 주장하신 여호와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민족들의 왕으로, 유일한 경외의 대상이십니다(7a). 그분은 지혜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나 비교를 허락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방 사람들의 왕’은 여기에만 나오는 표현으로 여호와의 이러한 우주적이고 전능한 왕권을 함축합니다.
(3) 우상 비판(8-9)
8-9절은 주제에 있어 다시 36-5절로 돌아갑니다. 민족들이 섬기는 우상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8). 이들이 화려하게 걸치고 있는 것들은 모두 사람이 만들어 입혀준 것들입니다. 장인과 대장장이는 다시스에서 가져온 은박(두드려 늘인 은)과 우바스에서 수입한 금을 사용하여 우상을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기술자들은 왕이나 제사장들이 걸치는 푸른 자줏빛과 붉은 자줏빛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힙니다(9).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치장한 나무 조각인 우상이 줄 수 있는 가르침이 딱 하나 있는데, 우상은 나무라는 사실입니다(8b). 우상은 자신의 기원과 본질이 나무임을 알려줄 뿐입니다.
(4) 여호와는 참 신이다(10)
우상들이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라면,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다”(10a). 우상은 ‘헛된 것’이지만, 여호와는 사람들이 신뢰할 수 있는 ‘참 하나님’이십니다. 우상은 장인들에게 의존하는 죽은 나무토막이지만, 여호와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만물이 그분께 의존하여 생존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청색 자색 옷’을 입혀줘 왕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여호와는 ‘영원한 왕’으로 처음부터 변함없이 모든 민족을 통치하셨습니다. 우상은 흔들리지 않게 ‘못과 장도리로’ 고정시켜 주어야 하지만, 여호와는 진노로 땅을 뒤흔드십니다. 실로 여호와와 같은 존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방 사람들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당신을 경외하지 않고 ‘무지하고 어리석은’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들을 진노로 징계하실 것입니다. 땅을 뒤흔드는 그분의 분노를 견뎌낼 민족은 없습니다. ‘삼림에서 베나무’를 신으로 섬기는 민족들은 멸망에 떨어져 수시를 당할 뿐입니다(15).
(5) 우상 비판(11)
여호와의 영원한 왕권 선언에 뒤이어 갑자기 아랍어도 된 선포 명령이 나옵니다.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에서 망하리라”(11) 명령을 받는 ‘너희’와 말씀을 듣는 ‘그들’이 누구인지는 모호하게 나오지만, 아마도 예언자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영원한 왕권을 그분의 진노 아래 놓인 민족들에게 선포하도록 사명을 위임하는 것 같습니다. 헬라어로 대체되기 전까지 아람어는 고대 근동의 국제 통용어였기 때문에 민족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담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였습니다. 모든 생물의 생존 공간인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만이 그 가운데 사는 자들로부터 경배를 받을 수 있다. 민족들이 신으로 숭배하는 우상들은 장인의 작품으로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차라리 우상들이 자신들을 만든 장인들을 숭배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실 때 숭배자들뿐만 아니라 우상들도 여호와께서 지으신 세계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12-16)

우리는 형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자기 인생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복과 저주를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버리고 헛되고 무가치한 우상을 좇으면 유다와 같이 패망할 것입니다. 유다가 우상을 숭배한 이유도 형통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한 형통이란 다산과 풍요였습니다,
12여호와께서 그의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의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의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 13그가 목소리를 내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14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15그것들은 헛 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나 16야곱의 분깃은 이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12-16)
유다는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허무하고 무가치한 우상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통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1) 창조주 여호와(12-13)
창조주만이 피조물로부터 경배를 받을 수 있기에 여호와의 창조 능력과 우상의 무능력을 대비합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땅을’ 만드셨고,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명철로 하늘을’ 펼치셨습니다(12). 땅과 하늘과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여호와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분의 권능과 명철과 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창조와 지혜의 결합은 바벨론의 지혜에 대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민족들의 지혜자들(7)이 참된 지혜와 명철을 소유한 자들이라면 땅과 세계와 하늘에서 여호와의 권능과 지혜와 명철을 볼 수 있었어야 했습니다. 우상들처럼 이들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생존 공간을 마련해주신 여호와는 더 나아가 당신께서 창조하신 생물이 그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도록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13). 그분이 우레와 같은 음성으로 명령하시면 하늘이 창문을 열고 물을 쏟습니다. 그분은 땅 끝에서 비구름을 피어오르게 하시고 번개를 만들어 비를 내리시며, 당신의 곳간에서 바람을 내보내십니다. 창조주 여호와께서 땅의 풍요를 주관하십니다.
(2) 우상 비판(14-15)
그러나 민족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다 수치를 당합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을 섬기는 자들은 ‘어리석고 무식하기에’ 창조 세계 안에서 활동하시는 창조주 여호와의 능력과 지혜를 보지 못합니다(14a). 이제 특이하게도 우상을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하는 은장이들에게 심판이 선포됩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14b). 우상은 사람에 의해 신의 자리에 앉혀진 거짓 존재, 곧 그 안에 생명이 없는 나무토막으로 숭배자들에게 수치만 줄 뿐입니다.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지만, 권능과 지혜가 없기에 결국은 조롱거리가 될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우상을 만든 자들을 징벌하실 때 우상도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15).
(3) 야곱의 분깃 여호와(16)
‘야곱의 분깃’이신 여호와는 우상들과는 전혀 다르시기 때문에, 야곱의 운명 또한 다른 민족들의 운명과 달라집니다.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16). 여호와가 야곱의 몫이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소유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들이 아니라 여호와가 자신들의 몫임을, 또 우상들에게 넘겨질 수 없는 여호와의 개인적 소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독점적 관계에 있고 언제나 만군의 여호와가 그분의 이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기업의 지파’로 삼으시고 ‘야곱의 분깃’이 되신 만군의 여호와를 경배하며 그분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우상과 하나님은 비교될 수 없습니다. 우상이 아무리 아름답고 정교해도 그것은 사람이 만든 한낱 나무와 돌, 금속의 변형일 뿐입니다. 감사의 대상일뿐 경외와 경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며 열방의 왕들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영원한 왕이십니다. 어떤 열강도 그분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교회와 나라의 앞날을 눈에 보이는 권력과 열강에 맡겨서는 안 됩니다. 외모와 의상과 액세서리나 학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 것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우리는 단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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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09-03)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유다의 자랑

예레미야 9장 17-26절


우리 인생은 가면서 두 가지 길에서 선택해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하거나 우상을 섬기거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거나 불순종의 길을 가거나, 아니면 슬픈 노래를 부르며 살거나 기쁜 찬송을 부르며 살거나, 둘 중에 한 가지 길을 우리는 다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어떤 길을 가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곡하는 부녀를 불러 ㄷ그들을 위해 애곡하게 하라 하십니다. 사람은 지혜·용맹·부가 아닌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사랑·정의·공의를 행하심을 깨닫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할례 받지 못한 이방 민족과 마음에 할례 받지 못한 이스라엘을 모두 벌하실 것입니다.

 

시온의 죽음을 슬퍼하는 애가(17-22)

우리를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리 부인해도 역시 지혜와 물질 그리고 종교 행위를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또한 그것들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인생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께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17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해 보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18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19이는 시온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게 부끄러움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거처를 헐었음이로다 함이로다 20부녀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 귀에 그 입의 말씀을 받으라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 21무릇 사망이 우리 창문을 통하여 넘어 들어오며 우리 궁실에 들어오며 밖에서는 자녀들을 거리에서는 청년들을 멸절하려 하느니라 22너는 이같이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버려져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되리라 하셨느니라(17-26)

사람의 헛된 것들을 붙든 유다는 애곡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우상을 따르며 자신들의 욕망을 좇아 쉽게 타락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붙들며 자랑하지 않고, 사람의 헛된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1) 곡꾼의 소집(17)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주민에게 ‘곡하는 부녀’, 곧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라고 명령하십니다(17). 장례예식의 전문가라는 점에서 당시 사회에서 곡꾼은 지혜자로 간주되었습니다. 또한 초상집에서 상주를 대신하여 하는 자가 곡꾼이기에, 여호와의 명령은 누군가가 죽었음을 전제합니다.

(2) 곡꾼 소집 목적(18)

곡의 대상을 언급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곡꾼을 불러오게 한 목적을 알려주십니다.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18). 곡을 하거나 애기를 불러 초상을 당한 사람들의 애통함을 더 크게 해주는 것이 곡꾼의 주된 역할이었습니다. 애곡은 상복 기간 중에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에 속했습니다(참조, 창 23:2; 삼상 25:1; 28:3; 삼하 1:11-12, 17-18; 3:31; 11:26). 창세기 50:10에 의하면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했습니다. ‘우리’는 애가의 대상이자(‘우리를 두고 애곡하여’) 동시에 눈물을 흘리는 상주입니다. 곡꾼을 불러 애곡하게 하는 사연이 구체적으로 알려집니다(18),

(3) 애곡의 이유(19)

멸망한 시온을 위한 애곡이었습니다. 시온이 황폐해지고 큰 수치를 당했습니다. 시온이 점령군에 의해 짓밟혔기에 주민들은 제 땅을 떠나야합니다. 시온이 폐허가 되고 주민들이 유배를 당하는 원인은 달리 언급되지 않습니다. 13-14절에 의하면 언약을 깨뜨리고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4) 애가를 가르침(20)

20절에서는 화자와 청자가 예언자와 ‘부녀들’로 바뀝니다. 예언자가 여자 곡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 기존의 곡꾼 만으로 감당하기에는 죽음의 재앙이 너무나도 전면적이고 엄청났습니다. 곡꾼은 제 딸들은 물론, 이웃의 부녀들에게도 애가와 장송곡을 가르쳐 이들을 장례 의식에 동원해야 했습니다.

(5) 애가를 가르침(21)

죽음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집 안이나 집 밖이나 온통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습니다. 죽음이 창문을 넘어 궁궐에까지 들어오고, 거리와 광장에서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덮칩니다(21). 시온의 주민들이 모두 죽음에 삼킴을 당합니다. 어린아이들과 청년들마저 희생당하기에 후일을 기대해볼 여지조차 완전히 사라집니다(참조. 10:20).

(6) 들판의 시체(22)

22절에서는 다시 화자와 청자가 바뀌어 여호와께서 예언자에게 말씀을 주신다. “사람의 시체가 분토 같이 들에 떨어질 것이며 추수하는 자의 뒤에 버려져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이 되리라.” 들판의 오물이 그대로 버려지는 것처럼 시체가 매장되지 못하고 거리에 나뒹굽니다. 추수꾼이 단으로 묶어 밭에 세워둔 곡식단의 비유도 의미하는 바는 동일합니다. 옮기기 좋게 묶어 놓은 곡식단이 거둬들일 사람이 없어 밭에 쓰러져 썩는 것처럼 시체들이 거리에 그대로 방치됩니다. 오물의 비유가 편만한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면, 곡식단의 비유는 남은 자가 없는 멸망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이들과 청년들마저 죽음에 넘겨졌기에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어 시체가 거리와 광장과 들판에서 그대로 썩어갑니다.

 

참된 자랑(23-24)

사람들은 저마다 가진 것들을 자랑합니다. 그 자랑의 뿌리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신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은 언약 백성다운 바른 자랑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실패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경외하는 것을 자랑합시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세속적 조건이 아닌,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은혜입니다.

23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23-24)

지혜문학의 전통적 가르침에 따르면, 지혜자의 지혜와 용사의 용맹과 부자의 부함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에 속합니다. 예를 들면,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에 힘입어 백성을 통치했고(참조, 왕상 3:4-15),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 이름’에 의지해 용감하게 블레셋의 골리앗과 싸웠고(참조, 삼상 17장), ‘지팡이만 가지고 요단을 건넜던’(창 32:10)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수많은 양과 소와 낙타를 거느리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참조. 창 30-31장).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지혜자는 그의 지혜를, 용사는 그의 용맹을,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고 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전통적인 가르침에 맞서 예언자는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주장합니다(23). 이는 지혜문학의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지혜와 용맹과 부함’에서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려는 위험, 곧 인간의 교만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용맹과 부합’을 주셨다고 말하면서도 이를 자신의 능력과 업적으로 자랑스러워하다가 하나님을 떠납니다. 사람이 참으로 자랑해야 하는 것은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입니다(24). ‘여호와를 앎’은 그분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따르는 역동적 앎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아는 자’는 역사와 삶 속에 계시된 그분의 활동을 인정하고, 그분께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임을 깨닫고 기뻐합니다. 지혜자나 용사나 부자가 아니라, 여호와가 땅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는 주체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자의 지혜와 용사의 용맹과 부자의 부함이여호와께서 땅에서 행하시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대신할 수 없다. 참된 자랑을 아는 자는 여호와께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서 행하시도록 비워놓고 기다립니다. 앞에 나오는 시온의 멸망을 선포하는 17-22절과 함께 보자면, 23-24절은 이스라엘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혜자의 지혜와 용사의 용맹과 부자의 부함’이 이스라엘로 애가를 부르게 했음을 깨닫고, 여호와께서 땅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실천해주시길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마음의 할례(25-26)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를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따라야 할 가치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깨닫고 기뻐하며 그것을 자랑과 공의를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2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26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25-26)

언약 백성의 표지인 할례(참조, 창 17장)가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심판의 날은 포피에만 할례 받은 자들이 징벌을 받는 날입니다. “보라, 날들이 오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 포피에(만) 할례 받은 자들을 내가 모두 벌하리라”(25). 할례의 풍습을 알고 있는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 및 광야에 살면서 살짝을 깎은 자들’이 모두 심판에 떨어집니다(26). 애굽은 유다 남쪽에, 에돔과 암몬과 모압은 요단 동편에 있는 나라들이고, ‘살짝을 깎은 자들’은 ‘관자놀이의 머리를 민자들’로 이스라엘 북동쪽의 사막에 사는 아랍 족속들을 가리킵니다. 민족들의 순서가 어떤 기준에 따른 것인지는 전혀 불분명합니다(46장 이하에 나오는 민족들의 신탁에서는 애굽-[블레셋]-모압-암몬-에돔의 순서로 나온다). 특이하게도 애굽이 먼저 나오고 유다가 그 뒤를 따릅니다. 할례와 관련해 유다에게 남다른 특권이나 지위도 허락되지 않고, 주변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됩니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언약의 표지인 할례는 유다에게 어떤 혜택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언약의 표지인 할례가 여호와의 심판으로부터 유다를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민족들의 할례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몸의 할례는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는, 즉 민족들도 잘 알고 있는 포피를 잘라내는 풍습일 뿐입니다.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26b). 여기서 ‘모든 민족’은 앞에 열거된 다섯 민족들로, 이들이 받지 못한 할례는 마음의 할례를 가리킵니다. 민족들이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해서 심판에 떨어지듯, 이스라엘도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해 심판에 떨어집니다. 다시 말해, 몸에 할례를 받은 유다가 여호와의 징벌을 면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몸의 할례를 아는 다른 민족들도 징벌을 면할 수 있습니다. 포피를 자르는 할례에서 구원사적 기능을 완전히 박탈해 버립니다. 구원사적으로 유효한 할례는 오직 마음의 할례뿐입니다(참조. 신 10:16; 30:6).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중요한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와 부,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서 더욱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꼐서는 이러한 삶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사랑과 공의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시게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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