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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7-02)


주님의 날을 구별하는 자의 복

예레미야 17장 12-18절


혹시 의지했던 사람과 가까웠던 사람에게 마음에 상처받아서 실망한 적은 없으십니까? 특별히 흠모했던 사람, 귀하게 생각했던 사람으로 상처 받았을 때, 그 후유증은 훨씬 더 심각하고 우리의 마음에 오랫동안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상황이라면, 예레미야가 비슷한 상황에서 기도했던 골방에 찾아갈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역시 자신의 민족을 가장 의지하고 함께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할 동료들에게 어려움과 핍박을 당합니다. 그와 같은 어려운 상황 중에 무엇보다 하나님 한 분께로 나아가 기도하는 자리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도의 골방에 들어가서 예레미야처럼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본문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훈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안식일을 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다윗의 위를 지켜 주시고, 예루살렘 성이 영영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예루살렘을 불사르겠다고 하십니다. 선지자는 유다의 회복 여부가 안식일 준수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면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예배가 회복되지만 그러지 않으면 불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 여호와(12-13)

생명과 복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배신하여 버리고 떠난 자들은 멸망과 수치와 죽음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온갖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심판받게 된 것이 필연적 결과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칭송한 것입니다.
12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3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12-13)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화로우신 보좌시며, 시작부터 높이 계신 우리의 성소요, 이스라엘의 소망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사랑받은 백성임을 확신하는 찬양이며, 하나님을 모시고 그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고백입니다.
(1) 여호와의 왕권(12)
현재의 문맥에서 이 두 절은 앞 앞 단락과 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백을 이어주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전자와 관련해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고백하는 자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고, 여호와를 버리는 자는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습니다. 또 ‘우리’의 찬양에 의해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고백이 공동체의 고백으로 읽힐 수 있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로부터 구원과 의로움을 찾으면서 고난을 극복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은 구원의 소망이신 여호와로부터 생수의 근원을 찾아 자신들의 수치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영화로우신 보좌여 시작부터 높이 제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부르며 그분의 왕권을 찬양합니다(12). 예루살렘의 성전 신학에 따르면, 성전은 여호와계서 현존하시는 곳입니다. 성전 지성소의 벽과 중앙으로 펼쳐진 두 그룹의 날개(왕상 6:27)는 여호와의 보좌를 상징합니다. 왕이신 여호와께서 두 그룹의 날개에 않아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그분의 왕권은 처음부터 드높았습니다. 누구의 도전도 허락하지 않는 흔들림 없는 왕권이었습니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히 계셨나이다”(시 93:2). 영원부터 영원까지 왕이신 여호와가 바로 이스라엘이 소망을 두어야 할 분입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우상이나(2) 사람에게(5) 있지 않고, 예루살렘 성소에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여호와에게만 있습니다.
(2) 주를 버리는 자의 수치(13)
여호와를 영원하신 왕으로 찬양하는 자들에게는 소망이 있지만, 그분을 버리는 자는 수치를 당합니다(13).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떠나서는 수치와 멸망과 재앙만 있을 뿐입니다.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는 ‘죽을 운명이 되다’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병행하는 ‘수치를 당할 짓이라’와 관련해 덧없음과 허무함의 비유적 표현으로 읽는 것이 더 좋습니다. 땅바닥에 글자가 바람이 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들의 운명도 그러할 것입니다. 또 넓은 문맥에서 보자면, ‘흙에 기록하다’는 1절의 ‘마음 판에 새기다’에 연결되기도 합니다. 마음 판에 새겨진 유다의 죄는 어떤 경우에도 지워지지 않고, 흙에 기록된 여호와를 버린 자들의 운명은 바람에 흙먼지가 날려가듯이 자취도 없이 사라집니다.
 

예레미야의 세 번째 고백(14-18)

예레미야의 기도는 단순히 개인적 원한으로 하나님께 원수를 갚아 달라고 간구한 것이 아닙니다. 악인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이르고 의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기를 간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진리와 생명의 길로 행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14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15보라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16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17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18나를 박해하는 자로 치욕을 당하게 하시고 나로 치욕을 당하게 마옵소서 그들은 놀라게 하시고 나는 놀라게 하지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14-18)
완악한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와 그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신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셨을 때 유대인들이 “지금이라도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라고 말하며 조롱하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받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입니다.
(1) 구원 간구(14)
예레미야의 탄식은 찬양이 곁들여진 치유와 구원의 간구로 시작합니다.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14). 여호와 때문에 당하는 부끄러움(15:15)이기에, 여호와만이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또 여호와께서 분노로 채우셔서 생긴 고통과 상처(15:18)이기에, 여호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치료해줄 수 없습니다. 주변에는 대적만 가득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고난과 재앙과 질병에 대한 ‘고침’은 여호와의 ‘구원’을 의미합니다(참조. 출 15:26; 신 32:39) 간구의 동기로 제시된 찬양은 여호와의 구원 능력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찬양을 받으시는 분만이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고, 구원하신 분만이 백성의 찬양을 받으십니다. 여호와의 능력을 인정하는 자만이 그분께 구원을 간구하고, 그분의 구원을 경험한 자만이 그분께 찬양을 돌립니다. 이런 배경에서 기도자들은 여호와의 구원을 찬양할 수 있게 구원해달라고 간구합니다(참조. 시 6:4-5; 22:21-22). 이스라엘의 시편 전통에서 간구와 찬양은 거의 짝을 이루며 나타납니다.
(2) 대적의 말 인용(15)
예레미야가 간구하는 치료와 구원은 물론 개인적인 차원에 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 선포자로서 겪는 고난과 좌전, 곧 적들의 조롱이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입하게 할지어다’ 하며 예레미야를 무시했습니다(15).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영원히 타는 분’을 선포합니다(4). 전통적인 구원신학에 길들어진 자들은 예레미야의 심판 메시지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의 탄식과 간구에 여호와께서 답하지 않으신 이유를 충분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선포한 심판이 이뤄져 유다가 멸망하기까지 예레미야는 계속 무시당하고 조롱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무죄 주장(16)
적들의 조롱에 맞설 수 없는 예레미야는 자신에 대한 판단을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시는’(10) 여호와께 맡깁니다(16).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기에 앞서 먼저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따랐사오며’ 하고 자신의 성실함을 주장합니다. 15절과 함께 읽으면, 예레미야는 자신이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에 적들로부터 조롱을 당한다는 말로 여호와께 책임을 돌립니다. 한편, ‘목자’는 주로 왕과 같은 통치자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예언자에게 적용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목자가 먹잇감을 찾는 들짐승을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것처럼, 예레미야도 적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맡겨진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했음을 주장한 후에 예레미야는 심판 메시지와 관련해서 자신의 활동을 변호합니다.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16).
(4) 신뢰 고백(17)
예레미야가 개인적으로 유다의 멸망을 바라고 심판을 선포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멸망과 유배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전한 것입니다. 아마도 적들은 심판 메시지에 그의 악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고 예레미야를 멸망을 바라는 자로 고발했던 것 같습니다. 누가 의로운지는 ‘재앙의 날’에 분명하게 드러나기에, 예레미야는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하고 호소합니다(17). 여호와께서 예언자에게 두려움이 되신다는 말은 그의 사역이 여호와에 의해 인정받지 못함을, 곧 선포한 대로 이뤄지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재앙의 날’에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피난처로 경험하고, 그의 선포를 부정했던 자들은 여호와를 두려움으로 만나게 됩니다.
(5) 구원 간구(18)
박해하는 자의 멸망이 다른 한편으로는 박해를 당하는 자의 의로움을 확인해주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적들의 멸망을 여호와께 간구합니다(18). ‘재앙의 날’은 예레미야가 치욕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날이자. 그를 박해한 자들이 최종적으로 치욕과 두려움에 떨어지는 날입니다. ‘치욕을 당하다’와 13절의 ‘수치를 당하다’는 같은 동사로, 예레미야를 박해하는 자들이 바로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린 자들임을 보여줍니다. ‘놀라게 하다’와 17절의 ‘두려움’도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단어로,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는 ‘피난처’가 되시고, 그를 박해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되십니다. 적들의 멸망을 간구하는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와 적들의 고발에 맞서 자신을 변호하는 16절의 ‘재앙의 날도 내가 원하지 아니하였음’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현대적 사고에 따른 판단입니다. 박해자들에 대한 복수 요청은 여호와의 공의에 근거한 사법적 호소로, 현재의 문맥에서는 15절의 조롱과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두 절은 동사 ‘임하게 하다’에 의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적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냐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면서 예레미야를 조롱하고, 예레미야는 ‘재앙의 날을 그물에게 임하게’ 해달라고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예언자의 신적 정당성이 부정당하는 곳에서는 선포의 성취를 통해서만 그 정당성이 입증될 수 있습니다. ‘재앙의 날’이 임하느냐 그러지 않느냐에 따라 예레미야가 여호와로부터 보냄을 받은 예언자인지, 그렇지 않은지가 결정됩니다.


예레미야는 어떤 상황에서도 사명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사명 때문에 고난을 당해 힘들다 하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의뢰할 뿐, 사람을 의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불신자들과 신앙에서 떠난 자들, 신앙의 열정을 잃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비록 그 일이 쉽지 않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구한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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