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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6-02)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징벌하시는 목적

예레미야 16장 14-21절


‘먹구름 속에서도 태양은 빛난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비행기 타는 것이 일상적인 시대에는 우리가 몸으로 경험한 지식 중에 하납니다. 아무리 날이 어둡고 비바람이 쏟아져도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르면 구름 위에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있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서는 마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진 심판의 날을 의미하는 그런 상징적인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먹구름 위에 찬란한 태양처럼 하나님께서 여전히 은혜와 자비의 빛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습니다.

 

예레미야의 선포는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멸망에 집중하지만, 멸망이 선포의 목적은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심판 이후에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을 내다봅니다. 아울러 민족들이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나아올 밝은 미래도 내다봅니다.

 

새로운 출애굽(14-15)

예레미야서를 읽다 보면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큰지, 예루살렘과 유다를 완전히 버리실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은 오히려 그 백성에게 소망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에게 소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시고 벌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다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1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15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 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14-15)

앞 본문 1-13절까지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에 대한 선포였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변하고 아무런 근거 제시 없이 유다의 회복이 선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회복시키신 후에 출애굽의 하나님이 아니라 출바벨론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1) 두 번째 출애굽(14-15a)

첫 번째 출애굽을 기억에서 사라지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새로운 출애굽이 선포됩니다. 가나안 땅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불순종한 자들을 이방 땅으로 내던지신 여호와께서 이들을 다시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이스라엘은 앞으로는 두 번째 출애굽만 기억하게 됩니다. 구원사의 출발점이자 모형인 첫 번째 출애굽이 두 번째 출애굽에 자리를 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온 세상에 쫓겨난 자들을 여호와께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올라오시는 출 바벨론의 구원사가 여호와 신앙의 근간이 됩니다.

(2) 귀환 약속(15b)

두 가지 점에서 두 번째 출애굽이 첫 번째 출애굽을 능가합니다. 먼저 후자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전자는 ‘북방 땅과 모든 나라’에서 인도해냅니다. 구속사의 공간적 범위가 애굽에서 쫓겨난 이스라엘 자손이 살고 있는 모든 나라로 확장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여호와의 허락 아래 애굽으로 내려가고, 현세대는우상숭배와 불순종의 죄 때문에 여호와의 징계를 받아 이방 나라들로 쫓겨납니다. 출애굽이 약속의 이행이라면, 출바벨론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은총에 속합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유다의 자손들과 주전 722년에 멸망 당하고 사로잡혀간 북왕국의 자손들을 포함합니다. 마찬가지로 ‘북방 땅’도 바벨론은 물론 앗수르까지 포함합니다.

 

누구도 피하지 못할 심판(16-18)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겼던 자들이 아무런 고통이나 어려움 없이 평안히 회복될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대가를 배로 치러야만 회복이 가능합니다. 죄로부터 회복되기를 원한다면, 죄의 대가를 배로 치르겠다는 각오를 함께 다지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에야 진정한 회복이 가능합니다.

16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 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17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 18내가 우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16-18)

예레미야는 다시 유다가 대적에 의해 유린당한ㄹ 것을 예언합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낚고, 사냥꾼이 동물을 잡듯이 유다는 바벨론에게 유린당할 것입니다. 이는 바벨론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다 백성의 행위가 악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꼐서 그렇게 하도록 허용하셨기 일어나는 일입니다.

(1) 비유적 심판 선언(16)

주제가 다시 심판으로 바뀝니다. 어부와 포수의 비유를 사용해 심판이 얼마나 철저하게 집행될지를 극적으로 기술합니다(16). 여호와께서 먼저 어부가 낚시로 고기를 잡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 올리십니다. 설혹 그들 가운데 일부가 어부의 낚시를 벗어날지라도 살아난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다시 많은 포수를 보내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바위틈’을 샅샅이 뒤져 숨은 자들을 찾아내 사냥하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눈을 피해 몸을 감출 수 있는 안전한 은신처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부와 포수의 비유가 하나의 심판을 말하는지 또는 두 개의 심판을 말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둘 다 역사적 해석이 가능합니다. 후자의 입장에 따르면 어부의 비유는 주전 597년의 제1차 바벨론 침공이고, 포수의 비유는 주전 587년의 제2차 바벨론 침공이 됩니다. 전자의 입장은 심판의 혹독함과 철저성을 보여주려고 두 비유를 보충적으로 사용했다고 봅니다. 이 경우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는 주전 587년의 재앙과 관련된 비유가 됩니다. 완전한 멸망과 멸망 이후의 회복을 내다보는 문맥은 후자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도 여호와의 심판에서 벗어나 목숨을 구하지 못합니다. 모두 여호와께서 보내신 어부와 포수(바벨론)에 의해 죽거나 사로잡힙니다.

(2) 심판의 이유(17-1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파국적 심판에 넘기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17). 여호와께서 두 눈으로 이들의 모든 길과 죄악을 직접 보셨기에 그분의 눈을 피해 숨을 곳은 없습니다. 그분이 보낸 심판을 피해 살아남을 길은 없습니다. 넓은 문맥에서 보면, 17절은 백성의 질문(10)에 대한 비판적 답변이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백성의 행위와 죄악을 직접 살펴보시고 어부와 포수를 보내시는데, 백성은 자신들의 죄악이 무엇이기에 ‘이 모든 큰 재앙’을 선포하시냐고 묻습니다. 이들이 여호와께 범한 죄를 인정하든 안하든, 그분이 모든 것을 보셨기에 재앙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거나 달리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직접 보신 이들의 죄악은 11절의 경우처럼 우상숭배였습니다. 이들은 우상들로 여호와의 기업을 가득 채워 그분의 땅을 더럽혔습니다(18). 가나안은 여호와의 땅이기에 부정한 것을 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여호와만 섬겨야 했습니다. 우상을 좋아하는 자들은 여호와의 기업에서 떠나 우상들에게 속한 땅으로 가야 합니다(13). ‘가증한 것’과 동의적 표현으로 사용된 ‘미운 물건의 시체’는 우상의 본질을 신랄하게 폭로합니다(18). 우상을 가리키는 ‘미운 물건’(혐오스러운 것들)에 ‘시체’를 덧붙여 한정했습니다. 우상은 시체처럼 생명이 없는 죽은 존재입니다. 시체에 불과한 우상을 섬기는 자는 시체가 될 뿐입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자들이 매장되지 못한 시체가 되어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됩니다(4).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아마도 죗값을 반드시 묻겠다는 여호와의 심판 의지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현재 문맥에서는 16절을 배경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먼저 어부를 보내 잡아 올리시고, 뒤이어 사냥꾼을 보내 남은 자들은 잡아내십니다.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죄악’을 낱낱이 보신 분께서 “그들의 악과 죄”를 갑절로 갚으십니다.

 

민족들의 깨달음(19-2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온 세상의 소망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는 이런 역설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함께하신다면 우리의 인생에도 전화위복의 역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는 역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오직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노라고 고백하는 거룩한 주의 제자들 되시길 바랍니다.

19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20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21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19-21)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임이시며, 요새시며, 환난 날의 피난처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나아와 자기 조상들이 계승해 준 우상들이 거짓되고 무익함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 참된 신이심을 인정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1) 예레미야의 찬양(19a)

예레미야의 시선이 하나님 백성의 절망적 현재에서 민족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긍정적 미래로 옮겨집니다. 민족들이 어떤 계기로 여호와를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되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이 단락은 ‘여호와로 시작해서 여호와’로 끝납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전체를 감싸면서 이방 신들을 헛것으로 만듭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 날의 피난처’라 부르며 신뢰를 고백합니다(19). 여호와는 고난을 당할 때 힘을 주셔서 승리하게 하시는 분이고, 적이 공격할 때 요새가 되셔서 보호해주시는 분이고, 환난을 당했을 때 피난처가 되셔서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2) 민족들의 고백(19b-20)

19b-20절은 예레미야가 인용하는 민족들의 고백입니다. 예레미야는 아마도 이상 가운데 민족들이 땅 끝에서 여호와를 찾아오는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이들은 자기네 조상들이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을 물려주었다고 고백합니다. 조상대대로 숭배해왔던 신들이 거짓 환상이나 심어주는 쓸모없는 헛것임을, 곧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신으로 만들어 섬겨온 것임을 깨닫습니다. 사람이 만들어낸 신은 신일 수 없습니다. 사람을 만드신 분만이 신으로 섬김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만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민족들의 힘과 요새와 피난처가 되십니다.

(3) 여호와의 응답(21)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21). 여호와께서 당신 능력과 권세를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민족들에게도 계시하셔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당신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이번에’는 약속의 성취를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알다’는 인식을 넘어 관계성의 인정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여호와를 인정하고 섬기다’를 의미합니다. 아마도 민족들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귀환에서 여호와의 손(권세)과 능력을 보고 여호와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그분의 땅에서 우상을 섬기다가 우상의 땅인 이방 땅으로 쫓겨나고, 우상을 숭배하던 민족들은 자기네가 섬기는 우상의 실체를 깨닫고 여호와께 나아옵니다.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으로 부르는(10) 이스라엘은 그분을 버리고, 사람이 만든 것을 신으로 섬기던 민족들은 여호와의 능력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힘과 보장과 피난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명예와 위신이 땅에 떨어지더라도 자기 백성을 바벨론에 넘겨주셨습니다. 하지만 환란 날이 오면,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눈으로 확인하고 허탄한 신들의 믿었던 죄를 회개하며 주께 나올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심이 이곳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끊어내기 위해 이같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심판 중에도 주님께로 돌아와 우리의 힘과 보장과 비난처가 되신 주님을 바라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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