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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7-01)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과 저주의 심판

예레미야 17장 1-11절


마음에 품은 생각들이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곳으로 고정하고 나가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부자가 되려고 남을 속였던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우상과 돈에 대한 생각이 더 크고 강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유다의 죄는 그들 마음에 깊이 뿌리박혀 있고 자녀들도 답습합니다. 사람을 의지해 하나님을 저버리는 사람은 저주를 받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결실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지 아니면 사람을 의지하는지에 따라 행한 대로 보응하실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지워질 수 없는 유다의 죄(1-4)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우상숭배가 습관이 되고 문화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태도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만 잘못되고 그들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자녀들에게 유전(遺傳)됩니다. 부모들이 우상을 추구했기 때문에 자녀들이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녀의 삶에 모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 백성의 우상숭배는 자연스럽게 후손의 삶에 깊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1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2그들의 자녀가 높은 메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3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지경의 죄로 인하여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4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대적을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로 맹렬케 하여 영영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니라(1-4)

유다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실 것이며 유다의 거민들은 의인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그들의 마음 판과 제단 뿔에 새겨졌습니다.

(1) 죄의 고발(1-2)

‘유다의 죄’가 어떤 경우에도 지워지지 않게 촉이 금강석으로 된 철필로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깊이 새겨졌습니다(1). 여호와의 말씀이 새겨져야 할 마음에(참조, 신 6:6; 렘 31:33) 죄악이 기록됐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마음은 사고하고 계획하고 판단하는 신체기관입니다. 부패한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죄뿐입니다. 범죄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라 본성에 따른 필연이 됐습니다. 제단 뿔은 특히 속죄제 제물의 피를 바르는 곳으로,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수송아지의 피와 염소의 피를 가져다가 제단 귀퉁이 뿔들에 바르고 또 손가락으로 피를 그 위에 일곱 번 뿌려’ 제단을 성결하게 합니다(레 16:18-19). 제단 뿔이 속죄의 기능을 상실하기에 마음 판에 새긴 유다의 죄를 속할 수 있는 길도 완전히 사라집니다. 제단 뿔에 새겨진 유다의 죄는 다른 한편으로는 제의적 경건에 대한 고발이기도 합니다. 유다는 죄에서 떠나는 대신에 속죄제의 피를 제단 뿔에 발랐습니다. 죄를 지을수록 점점 더 제단 뿔은 짐승의 피로 얼룩졌습니다. 피로 더럽혀진 제단 뿔은 유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마음판에 새겨진 유다의 죄는 풍요 제의의 우상숭배였습니다. 여호와를 기억해야 할 유다 사람들이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기억했습니다(2). 다시 말해 가나안의 풍요 제의에 깊이 연루되었습니다. ‘모든 높은 산 위에서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행을 즐기던 자들이(2:20) 여호와의 성전을 찾아와서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아세라’는 원래 가나안의 최고신 엘(El)의 반려자로 풍요를 주관하는 여신이었지만, 때로는 제단 곁에 세워놓은 나무 기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2) 징벌의 서언(3-4a)

제단 뿔을 짐승의 피로 얼룩지게 만들고 온 땅을 우상의 제단들과 아세라들로 더럽힌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로 징벌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의 모든 재산과 보물을 적군에게 그들의 전리품으로 내어주십니다(3). 풍요를 기원하며 우상을 찾아간 결과, 유다 백성은 여호와께서 주셨던 모든 풍요를 빼앗깁니다. 우상의 제단을 쌓았던 산당들도 침략자들에 의해 짓밟힙니다. 산당의 유린은 우상의 실체가 헛것임을 증언합니다. 유다가 여호와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든 풍요 제의의 우상들은 숭배자들은 물론 자신들도 지키지 못합니다. ‘미운 물건의 시체’인(16:18)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우상처럼 시체가 된다. 침략자들에 의한 약탈과 짓밟힘으로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가 누그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노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로 유다를 남김없이 태워버리십니다.

(3) 징벌의 이유(4b)

유다는 여호와께서 상속 재산으로 준 가나안을 내놓고 알지 못하는 땅으로 가서 자신들을 멸망시킨 원수들을 섬겨야 합니다(4). 여호와께서 주신 자기 땅에서 자유민으로 살던 유다가 이방 땅에서 정복자들의 종이 됩니다. ‘영원히 타는 불’은 여호와의 분노뿐만 아니라 유다가 저지른 죄의 심각성도 함께 보여줍니다. 유다의 죄가 마음 판과 재단 뿔에 촉이 금강석으로 된 철필로 새겨져 영원히 지워지지 않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도 꺼지지 않고 영원히 타는 불로 그들을 징벌하십니다.

 

저주와 축복(5-8)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풍요와 쾌락을 너무나 쉽게 요구하고 섬기는 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른들이 물질과 쾌락을 추구하고 마음 판에 새겨져서 삶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어른들이 추구하게 되니깐 자녀들도 그것을 보고 따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물질, 성공, 부, 명예 그리고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6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5-8)

거짓 선지자들은 유다 백성에게 예루살렘의 성벽과 성전을 믿으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사람을 믿고 육신으로 힘을 삼는 행위와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닌 성전이나 성벽을 믿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결국 그들은 물이 없어 사람이 살지 않는 간고한 땅으로 쫓겨날 것입니다.

(1) 저주받은 삶(5-6)

사람을 의지하는 자의 저주받은 운명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복 받은 삶은 지혜문학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입니다. 인생은 의지하는 대상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인생입니다(5). 자기 능력과 사회·정치적 자산을 의지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게 됩니다(6). ‘사막의 떨기나무’는 척박한 환경에서 겨우 생명을 보존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식물을 상징합니다. 여호와를 떠나 사람을 의지하는 자에게 이 세상은 동식물도 살아가기 힘겨운 광야가 됩니다.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는 형편이 앞으로도 나아질 여지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간조한 곳은 메마른 암석 지대나 용암으로 덮인 벌판을 ‘건전한 땅’은 소금기 있는 땅을 가리킵니다. 돌로 덮인 땅이나 소금 땅에서는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것처럼, 그 마음이 여호와를 떠난 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에 살아야 합니다. 그는 힘겹게 살다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2) 복 받은 삶(7-8)

둘째 부류는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으로,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습니다(7-8). 메마른 땅에서 힘겹게 생명을 유지하는 떨기나무와 달리, 시냇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물을 충분히 공급받기에 무더위와 가뭄이 닥쳐와도 싱싱한 생명력을 잃지 않고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의지하는 사람은 생수의 근원으로부터 생명수를 공급받기에 환난과 재앙이 닥쳐와도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풍요로운 삶을 즐깁니다. 축복과 저주는 우연이나 운명의 산물이 아닙니다. 사람이 누구를 의지하느냐에 따라 그 인생에 저주가 주어질 수도, 축복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행위에 따라 보응하시는 여호와(9-10)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분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꿰뚫어 보시기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정확하게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행동뿐 아니라 마음의 동기도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9-10)

사람은 탁월한 거짓말쟁이입니다. 마음이 너무나 부패해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계산된 행동인 경우도 있습니다.

(1) 누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가?(9)

사람을 의지하는 자가 저주를 받고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가르침이 바르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누가 사람을 의지하고 누가 여호와를 의뢰하는지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다면, 사막의 떨기나무와 물가에 심어진 나무를 구별하는 것도 불가능해집니다. 그런데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없고(9),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누가 사막의 떨기나무이고 누가 물가에 심긴 나무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판단해야 한다면, 의인의 축복과 악인의 저주에 관한 가르침은 더는 유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주체가 여호와시라면 사정은 전혀 달라집니다. 은밀한 곳까지 들여다보시는 분께서 최종 판단자시기 때문에, 곧 의로우신 재판관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이 가르침은 언제나 유효합니다.

(2) 마음을 살피시는 여호와(10)

사람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계신 여호와께서 각 사람이 살아온 길을 빠짐없이 살피시고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갚으십니다(10). 악인의 승리와 번성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합니다. 교활한 자들이 때로는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잘 자랄 때도 있지만, 여호와는 이들의 감춰진 마음을 모두 아십니다.

 

불의한 자들의 일시적 성공(11)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무와 같이 단순하고 무미건조한 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생명수 강가에 뿌리를 박고 있다면, 결국에는 당신의 인생에는 아름다운 결실을 거두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 건조한 기후에 있는 떨기나무 같다면, 반드시 그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그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매우 힘들 수 있습니다. 그 자리가 생명의 자리가 아니라면 지금 그 자리를 떠나시길 바랍니다.

11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11)

다른 새의 알을 훔쳐서 부화시킨다는 속설이 있는 자고새의 비유를 들어 재물을 탐하는 부자의 어리석음을 고발합니다. 부화한 다른 새가 때가 되면 품어준 자고새를 떠나가는 것처럼, 불의한 방법으로 긁어모은 재산도 마찬가지입니다. 탈법과 불법을 마다하지 않고 애써 모아보지만, 그런 재산은 평생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의 중년에’(한창 때) 불법적으로 쌓은 재물은 갑자기 사라져버립니다.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기에, 때가 되면 가짜 주인을 떠나 원 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적한 부자는 그 부를 즐길 수 없고, 결국은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이치를 잘 알기 때문에 결코 ‘불의로 치부하는 자’에 걸려 넘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다 여기고 자신의 영적 상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자신을 속이는 것일지 모릅니다. 매일 하는 묵상과 매주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진실함과는 아무 관계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늘하던 신앙생활, 늘 드리던 예배가 아니라 매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행하겠노라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속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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