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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3-02)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사역을 시작

사도행전 13장 13-31절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성공하려고 노력하지만, 성공적인 사람들은 5% 안에 있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넘어지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끝까지 달려간 결과로 성공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사역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여러 가지 난관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돌파하고 일어서는 것이 성공적인 목회를 이룬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구브로 바보에서 성공적으로 사역을 마친 뒤, 바울의 일행은 버가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들어가서 회당에 찾아서 설교할 기회를 얻게 되고,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은 성경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임을 설교합니다.

 

선교사역을 떠난 요한(13-15)

하나님의 사역이라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사역이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비롯하여 숱한 변수를 감수해야 하고, 때로는 절망적인 환경에 직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명확한 확신과 성령의 동행, 투철한 사명이 없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13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14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15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은 후에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 하니(13-15)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에 도착한 바울은, 구브로 ‘바보’Paphos에서 주술적인 악령으로 총독 바기오를 잡고 있던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물리칩니다. 그는 이제부터 선교 현장에서 주도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들은 ‘바보’ 항구에서 배를 타고 서북쪽으로 진행하여, 지금 터키의 남쪽 항구인 안탈리아Antalya인 ‘버가’Perga에 도착합니다.

(1)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요한(13)

버가에 도착한 후,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에 동참했던 마가 요한은, 어떤 이유인지를 모르겠지만, 선교 여행의 중요한 시점에 선교를 포기하고 그것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는 두 선교사에게 적지 않는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바울의 불신은 상당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다시 요한이 바울의 선교여정에 합류하려고 할 때, 바울이 그의 사역에 동참하려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합니다(행 15:37-39). 추측해 보기는, 아마 요한은 선교의 여정에 힘든 것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둔듯합니다.

(2) 계속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14-15)

요한은 떠났지만,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사역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들은 버가에서 출발하여 북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비시디아 안디옥’Pisidian Antioch에 이릅니다. 그 길은 산맥을 통과하는 험준한 길이었습니다. 갑작스런 폭우로 황폐해진 경우가 많았고, 산악지형이기 때문에 로마 군인들도 통제가 안 되어서 강도들이 출몰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비시디아 안디옥’은 해발 1,080m 고지에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 이곳은 로마 지방에 속한 남부의 주요 도시로 로마로부터 지방 자치권과 세금 감면 혜택을 부여받았습니다. 이곳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바울의 선교 전략은 먼저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안식일 예배에 참석했습니다(14).

(3) 설교를 권하는 회당장(15)

바울의 선교 방법은 먼저 회당이 있는 지역을 방문하고, 먼저 회당을 방문하고 그곳 사람들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바울은 그런 방법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선교 전략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는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집회를 참석합니다. 이때 회당장들은 지정된 율법서와 선지서의 낭독이 있은 후, 사람을 보내어 바울과 바나바에게 ‘형제들아 만일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15)고 청합니다. 안디옥 회당장들은 아마도 바울과 그 일행이 어떤 말로 권면할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회당장들은 바울과 그 일행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적대적이거나 공격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야만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회당장들은 바울과 그 일행을 향해 ‘형제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근해졌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 사람의 태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명확한 확신과 성령의 동행, 철저한 사명이 없었으면 복음을 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할 기회를 얻고, 청중의 마음을 열기 위해 전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마음, 신중하며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한 복음(15-31)

복음에는 사람을 전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세상이 복음 사역자들을 가두든 풀어 놓든 상관없이 일하십니다. 제자들은 이런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역했습니다. 우리 또한 제자들처럼 하나님만 의지하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과 일행은 마가 요한이 떠난 후에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6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20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26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31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16-31)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할 기회를 얻었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구약에 익숙한 유대인 청중을 고려해서 족장들부터 세례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소개합니다(17-25). 다음으로 그 나라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명쾌하게 증거 합니다(26-37). 마지막 부분, 설교의 결론이자 적용으로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고하면서 불신앙을 경고합니다(38-41). 먼저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설교의 서론(16)

이 구절은 바울의 영감(靈感)이 서려 있는 설교의 서론입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첫 설교를 시작합니다. 설교할 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미 바울은 회당 안에 있는 청중 분석을 끝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는 두 부류였습니다. 대부분 유대인들이 있었을 테지만, 그중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16,26).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유대교에 호의적이었던 특정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비록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회당 예배에 참석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유대인과 같이 율법의 교훈대로 살아가는 자들이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하나님 경외자들’을 자신의 청중으로 충분히 고려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바울은 청중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손짓함으로써(16) 설교에 집중하라고 환기시키고 모든 회중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첫 설교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자연스럽고 효과적입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운 수사학도 매우 유익하게 쓰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재능과 경험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구속 역사(17-25)

바울의 설교는 출애굽 사건을 설명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거부한 사사 시대 및 다윗과의 약속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시며, 세례 요한에 의해 메시아로 확증되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베드로의 설교(행 2:14-36) 및 스데반의 설교(행 7:1-53)와 비교됩니다. 바울의 설교와 다른 두 설교의 차이점은 매우 뚜렷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강조점을 둡니다.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언급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인도하셨는지를 설명하는 데 많은 관심을 쏟습니다. 이 단락에서 가장 핵심적인 표현은 ‘큰 권능으로’(17)입니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높은 팔로’입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으로부터 다윗 왕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해 오셨는지를 알게 합니다. ‘큰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참으십니다(18). 그리고 대적을 멸하시고(19) 땅과 사사들과 왕을 주십니다(19-21).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십니다(22).

17-22절에서 동사들의 주어는 모두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 배경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자신의 백성을 위해 행하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설명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라고 선포합니다.

(3) 약속에 대한 무지(26-30)

이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알아보기 못했다고 말합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그들을 거침없이 책망합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말씀으로 약속한 구원을 성취하셨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무지와 완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모든 것을 이루셨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의 방해와 훼방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켜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30)라고, 하나님의 최종 승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의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인 승리를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이야기의 정점입니다.

(4) 부름 받은 증인의 사명(31)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먼저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러 날 동안 나타나신 이유가 제자들을 증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부활하신 주님과 베드로의 만남에서 ‘내 양을 먹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은, 바울의 이러한 설명과 부합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역시 그 사명을 위해 부름 받았음을 알립니다.


복음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통해서도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이 누군가에게 흘러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복음 전파에 대한 영적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어도 전하지 못하고, 당황할 수 있습니다. 영적 준비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담대함을 주시고 전할 말을 잘 준비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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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3-01)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세운 안디옥 교회

사도행전 13장 1-12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증거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들은 누구나 복음을 증거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증거하는 삶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 또한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전도 활동을 할 수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사도행전의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됩니다. 복음이 전파된 안디옥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건강한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그들이 처음으로 도착한 선교지는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였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방해하던 바예수는 심판을 받고, 총독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건이 발행합니다.

 

이방인 선교를 준비한 안디옥 교회(1-3)

선교(宣敎)는 사람의 결단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안디옥 교회를 통해 새로운 선교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을 떠나서 복음을 전하는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선교였습니다. 이 선교는 안디옥교회가 계획한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성령이 지시하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1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1-3)

바나바와 바울은 부조를 마치고 시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때, 새로운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세계 선교를 위해 그들을 먼 먼 곳으로 보내실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넘어 일하시고 계획하십니다.

(1) 안디옥교회의 구성원(1)

하나님께서는 먼저 바나바와 바울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불렀고,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섬겼으며,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하는 일도 함께했습니다. 이제 성령님께서 두 사람을 선교사로 세우십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에 일어난 핍박으로 인해 흩어진 성도들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행 11:19-21). 지역적으로 안디옥은 국제적인 도시로서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습니다. 당연히 안디옥 교회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하는 교회였지만, 유대인보다 이방인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 안에 ‘선지자’와 ‘교사’가 존재했다고 언급합니다(1). 그들을 부활하신 주님을 예배하고 금식했다고 소개합니다. 성령의 감동과 지도를 받은 교사들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을 회중에게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를 향한 권면에서도 바울이 선지자의 존재를 언급한 바 있기에(고전 12:28-29; 엡 4:1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누구인가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11:27에서 일단의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왔다고 언급하였습니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고,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궁금합니다. 분명한 것은 안디옥 교회 안에 선지자와 교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과 그들이 함께 예배하고 교회를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사실은 이전에 베드로가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가정에서 복음 전함으로서 이방인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행 10:1-16),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예배하는 교회는 안디옥 교회가 처음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출신과 인종적 배경과 신분이 다른 다양한 일꾼들이 모든 차이를 넘어서 복음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같은 비전을 품고 사역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장차 세계 선교를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교회였습니다(행 11:29-30; 12:25). 이런 의미에서 안디옥 교회는 열린 마음을 가진 교회였고 세상을 품을 만한 교회였습니다.

(2)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세움(2-3)

안디옥에도 믿는 이방인 성도들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에 들렸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관심을 가지고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파송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 받은 바나바와 바울은 1년 동안 안디옥에서 성도들을 교육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한 교회입니다. 성령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2)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을 듣고 바로 순종했습니다. 겨우 1년밖에 안 된 교회가 가장 크게 의지하던 핵심 사역자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은 절대 순종이요 희생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고, 자기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 말씀에 순종하여 바나바와 바울에게 안수하고 그들을 이방인 지역 선교사로 떠나보냈습니다.

 

이방인 지역에서 시작된 복음(4-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라면,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계서 주신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야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4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6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7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4-7)

안디옥 교회는 매우 건강하고 균형 잡힌 선교모델을 보여줍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을 세우시고 보내십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발길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성령께서 보내신 자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1) 구브로에 도착한 바나바와 바울(4-5)

누가는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 사역을 간략하게 기록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구브로로 향합니다. 그들의 첫 목적지가 왜 구브로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바나바의 고향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파송 받은 바나바와 사울은 실루기아를 거쳐 구브로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아우구스투스 이후 상업적인 중심지로 유대인이 많이 모여 살았던 살라미에 도착해 그곳 회당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5). 그들의 선교사역에 요한이 조력자로 동행했습니다(5). 그들은 다른 사역과 달리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 받아 장기적인 이방인 사역을 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13장은 이방인 전도의 분기점이 됩니다.

(2) 구브로에서 바나바와 바울의 사역(6-7)

‘바보’는 구브로 섬의 서쪽 끝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와 사탄의 대리자가 대결을 벌립니다. 바울은 거짓 선지자이자 마술사인 ‘바예수’와 대결한 것은 베드로가 사마리아에서 마술사 시몬과 대결한 사건(8:4-25)과 유사합니다. ‘바예수’는 마술사 ‘엘루마’로도 소개합니다.

 

바예수 엘루마와 영적 전투(8-1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사역을 맡기십니다.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든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역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성령의 인도를 구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8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8-12)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그렇게 만만치 않았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시작된 전도 여행이었지만 고난은 있습니다. 항상 어두움의 세력은 빛을 저항하려 합니다. 그러나 어두움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빛 앞에서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구브로 섬의 ‘바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바울은 엘루마를 향해 선포합니다.

(1) 바예수의 사역 방해(9)

구브로 ‘바보’를 총괄하고 있던 총독 서기오 바울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예수’라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 바예수에게 방해를 받습니다(9).

(2) 영적으로 승리한 바나바와 바울(10-11)

성령에 충만한 바울이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이 사람 배후에 마귀가 있음을 분별하였습니다. 바울은 성령에 의해 그가 앞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자 엘루마는 즉시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10). 바예수는 총독을 인도하던 자에서 인도를 받는 신세가 됩니다(11). 이처럼 복음의 현장에서는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항상 사탄의 방해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바울은 모든 악조건을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3) 서기오 바울의 믿음(12)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에 서기오 바울이 충격을 받습니다. 사탄은 ‘바예수’(구원의 아들)를 통해 예수님의 복음이 총독 바울에게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오랫동안 영적 어두운 소경으로 살았던 총독 바울에게 새로운 빛인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인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본 것입니다. 총독은 지체없이 복음을 받아들입니다(12). 거절과 방해 중에도 성령님께서는 실수 없이 자기 백성을 부르실 것을 믿으면서, 꼭 전해야 할 때 꼭 전해야 할 말씀을 꼭 전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은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선교의 현장에 인도하시는 성령님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순종하는 안디옥 교회가 있었고, 복음을 위해 자신을 바친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신실한 일꾼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복음을 위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신실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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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3-02)


과거를 통해 권고하신 예수님

히브리서 3장 7-19절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능력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인이 되시고, 어느 때는 자신이 주인 될 때가 있습니다. 사단은 ‘너의 삶에 주인이 되면 행복한 것이다.’라고 충동합니다. 스스로 주인되었을 때는 불순종하고, 자신의 주장과 결정 그리고 행동이 옳다고 고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셨을 때, 행복이 시작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때 진정한 행복을 깨닫게 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많은 것을 교훈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강퍅한 마음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하고 불순종했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사건들처럼 강퍅해져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함으로 안식에 들어갑니다. 죄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선진들의 불순종을 통한 권면(7-11)

인생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빨리 가야 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멈추시면 자리에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 느린 것 같아도 바른길을 갈 때, 늦어 보일지라도 마침내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조금 늦어 보이고, 소득이 없어 보지만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큰 영향력 있게 세우실 것입니다.

7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7-11)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사건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지금도 성도들이 실패를 반복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1) 광야 세대의 거역함과 완고함(7-9)

본문에서도 ‘그러므로’라고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이는 저자가 3:6에서 에둘러 주었던 명령인 ‘우리는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해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곧게 잡고 있어야 한다’는 부연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3:1-6 전체를 염두에 두었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언급했던 모세의 신실함에 연결해서 ‘그의 신실함과 대조되는 불신실한’ 광야 시대의 이야기하려는지도 모릅니다. 광야 시대의 이야기를 하려는지도 모릅니다. 광야 시대를 떠올라게 하는 그 많은 성경구절 중에서 설교자는 그들의 불신앙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담긴 시편 95:7b-11을 낭독합니다. 그런데 설교자는 광야 세대 이야기의 원자료라고 할 수 있는 출애굽기나 민수기, 신명기 본문 대신 시편 95편을 사용합니다. 사실 시편 95:7b-11에는 출애굽기 15:23과 17:7, 신명기 16:6, 민수기 14:21-23이 모두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깐 이 시는 모세오경에 대한 인용이고, 일종의 주석이요 해설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성경 내의 성경 해석’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서 저나는 이것을 성령의 말씀이라고 전제합니다(7). 모세오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듯이 몇 백년 후 이스라엘의 정황 속에서 거듭해서 들려진 그 말씀의 해석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7 …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시편 95:1-11)

저자가 낭독하는 성경 본문은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고 7절부터 시작합니다. 7b절의 화자는 시편 95편의 시인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대상은 시편 95편의 독자들입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8절 이하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녹음해 두었다가 트는 것처럼 직접 화법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로 시편의 청중 ‘너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열조’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말라고 하신다. 이어지는 10-11절에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광야 세대의 현장으로 간 것처럼, 하나님이 광야 세대를 향해서(‘이 세대에게’) 하시는 말씀이 들려집니다. 즉, 히브리서의 청중은 시편을 듣고, 시편의 청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은 시편의 청중뿐 아니라 광야 세대를 향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이 히브리서의 청중,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들려집니다. 인용문 속에 인용문을 배치하는 이런 장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생생하게, 진지하게 듣도록 돕습니다.

(2)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자들(10-11)

9절과 10절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합니다. 광야 세대의 완고함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그러므로’를 통해서 이 논리적 관계가 성립한다. 그런데 이 접속사는 인용된 원문인 칠십인역 시편 95편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시편 95편에서는 ‘사십 년 동안’이 열조의 행위에 연결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조 편에서 보면 ‘사십 년’은 반역의 시간이었습니다(히브리서). 하나님 편에서 보면 반역의 세대를 향한 진노와 심판의 시간이었습니다(시 95편).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이 공존했던 시간이 바로 ‘사십 년’이었습니다.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수많은 돌이킴의 기회를 저버린 백성에게 가나안 입성을 불허하신 하나님의 결정은 정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음성(10-11)은 민수기 14장의 상황을 기초로 재구성된 말씀입니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입성을 바로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그들은 도리어 낙담하고 원망했다.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엄중한 맹세의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들은 내 쉼에 들지 못하리라.’ 우리도 시편 95편의 청중과 함께 엎드려서 이 음성을 듣습니다. 자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섭섭함과 안타까움, 절절한 사랑이이 신탁 속에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 기초한 권면(12-19)

하나님께서 속상하신 것은 세상 때문에 속상하신 것이 아니라 믿는 성도들 때문에 속상하십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은 속상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가나안 땅에 들어놓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시련을 주었습니다. 믿음의선택을 해야할 때, 모두가 믿음의 선택을 한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 앞에서 바른 믿음의 선택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 있겠습니까? 본문으로 들어가서 결과를 보겠습니다.

12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12-19)

히브리 기자가 왜 이것을 언급하겠습니까? 초대교회의 성도들 역시 그런 실수를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완고해져서 강퍅해졌습니다. 강퍅케 된 이유는 죄의 유혹입니다. 죄 때문에 강퍅해졌고 실패했습니다.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 성경을 회중의 상황에 적용하기(12-14)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 않기 위해 권면합니다. 믿음이 없이 악심을 품고 있을 때, 안식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악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어지면 불안이 찾아옵니다. 출애굽 세대의 불신앙을 반면교사로 삼고자 하는 의도에 있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시편 95편의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신학적인 메시지의 요체를 시편 95편에서 발견합니다. 먼저 시편 95편을 살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특히 ‘오늘’과 ‘안식’이라는 두 단어가 중요합니다. ‘안식’에 대해서는 4장에서 더 자세히 논의할 것입니다. ‘오늘’은 시편의 원 독자들과 히브리서의 청중을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종말을 동시에 조망하게 해주는 신비로운 단어입니다. 이후 달란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이 시편 당시의 시간에 한정되지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4:7-8). 히브리서의 시간도 ‘오늘’이고, 하나님의 완전한 안식이 도래할 때도 ‘오늘’입니다. 21세기 독자의 입장에서 우리도 여전히 참 안식을 갈망하며 경건과 신앙을 지키려 애쓰는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광야 세대처럼 되지 않기 위한 실제적인 방안이 제시됩니다. ‘오늘’이라 부르는 이 하루 동안 성도들은 서로 권면해야 합니다.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기 위해서, 형제자매를 거울로 삼아 신뢰 위에서 서로를 경고하고 책망하며 격려해야 합니다. 마음의 굳어짐의 원인은 죄입니다. 종류, 경증과 무관하게 죄는 결국, 성도의 마음을 굳게 만듭니다. 거창한 철학이나 교리적 오류에서 불신앙이 생긴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죄와 불신앙의 매키니즘은 일방적이지 않으며, 그 둘 사이에는 나선형 순환 관계가 있습니다. 죄가 불신앙을 조장하고 불신앙은 죄를 묵과하며 확대 재생산합니다.

‘믿지 않음’, ‘하나님에게서 떨어짐’, ‘완고하게 됨’은 모두 같은 상태를 나타내는 다른 표현들입니다. 아마 첫 번째 단어는 ‘불신실함’, 두 번째 단어는 ‘하나님을 저버림 혹은 배반함’이라는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반대로 성도들이 견지해야 할 상태는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음’입니다. ‘완고함’과 ‘견고함’은 어떻게 보면 비슷한 상태를 묘사하는 형용사들입니다. 둘 다 ‘단단하고 굳은 상태’를 표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그 두 단어를 적용하면 정반대 방향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완고해질 것입니까? 견고해질 것입니까?

(2) 성경에 비추어 스스로 성찰하기(15-19)

저자는 15절에서 시편 95:7-8을 한 번 더 인용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청중의 삶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갑니다. 연이은 세 개 수사의문문, 그리고 대답들로 좀 더 과격한 도전을 던집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 질문은 시편 95편이고, 대답은 민수기 14장에 근거해서 주어집니다. 시편 95편을 통해,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단지 역사 속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같은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광야 시대일 수 있겠구나’라는 섬뜩한 착상을 떠올려야 합니다. 시편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성도들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경고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광야에서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깨어서 각성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나는 ‘그들은 믿지 않았다’라고 표현합니다. 초심을 잘 지키려면 다른 이들과 물질 나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긍휼과 자비의 실천은 우리를 정화해 줍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강퍅하면 교만해지고 불순종으로 이어집니다.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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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3-01)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 차이

히브리서 3장 1-6절


등산을 하다 보면 등산로가 있습니다. 정상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그런 경험이 한번 준비되는 길이 아닌 더 빠른 곳으로 가고자 그 길을 벗어나서 한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 힘들었고, 자칫하면 길을 잃어버려서 어려움에 처할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우리에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해 주신, 준비하여 주신 그 길이 있는데 그 길을 벗어나서 나간다면 우리에 인생길도 어려움에 처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천사와 비교를 끝낸 후, 구약 대표자인 모세와 예수님과 비교가 이어집니다. 모세도 하나님께 충성한 것으로 영광을 받을 만하지만, 예수님은 더욱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뛰어난 지도자이며 중보자인 모세와의 비교를 통해 우월하신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영광스런 대제사장(1-2)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생각과 언어가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반대로 마귀에 지배를 받는 사람은 마귀가 좋아하는 생각을 하고, 마귀 편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예수님께서 가득 차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으로 가득찬 사람들에게 다음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개합니다.

1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1-2)

독자들 가운데는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신 사실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단의 강력한 무기인 죽음을 죽음으로 승리하는 것이었습니다.

(1)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1)

먼저 저자는 성도들을 향해 ‘하늘에 속한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2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형제’로 여겨주심이 일어나 중요한 일인지 힘주어 설파했습니다. ‘거룩한 형제’(2:11)로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자비와 임재를 상기시킵니다. 서로에게 형제 되게 하고 그리스도와 형제 되게 하는 속성은 ‘하늘의 부르심’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 ‘하늘로부터의 부르심’입니다. 하지만, 2:10의 ‘영광’, 그리고 후반부의 중심 아이디어인 ‘천상의 성소’(8:5; 9:23)를 염두에 두면, ‘하늘의 부르심’은 곧 ‘하늘로 향해 나아오라는 부르심’이 됩니다. 이제 저자는 앞서 2:17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으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 주제를 계속 이어받아 이제 1절에서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여정에서 그리스도만을 깊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도리의 창시자이기 때문입니다(12:2). 예수 그리스도는 대속의 사역을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사도의 근원이시며,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예수님의 자비하심의 측면은 뒤에 가서 집중적으로 부각 되지만(4:15-5:10), 2절에서는 먼저 그의 신실하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입니다. 부름 받은 존재임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살지 않습니다. 믿는 도리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합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염려와 걱정이 가득하지만, 부름 받은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로 언제나 넘칩니다.

(2) 모세와 예수님의 공통점(2)

저자는 유대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세를 들어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증명합니다. 모세와 예수님을 비교하는 동시에 대조하면서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인 교회와 그 속에 속한 우리의 정체성을 말합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셨습니다. 제사장의 자질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근거를 모세에게서 찾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자기를 세우신 분께 실실하셨습니다. ‘모세가 (신실)한 것과 같이’(2)라는 말씀은 모세 제사장과 예수 제사장 사이에 공통적인 출발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모세를 평가절하해서는 안 됩니다. 저자는 공통점의 기반 위에서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신실함을 갖추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 그의 신실함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습니다. 그 민수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민수기 12:7)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감당한 부분에서 모세와 같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자신의 사역을 잘 감당했습니다. 교회는 오직 신실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 온 집에서 한 것처럼 자신을 세우신 분께 신실하셨습니다.

 

모세와 예수님의 차이점(3-6)

훌륭한 집보다 그런 집을 지은 건축가가 더 귀합니다. 세상은 광대하지만,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럽고 위대하십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는 하나님께 영원히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직 신실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

3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3-6)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2장에서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위대한 존재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 중에서 비교해보면, 구약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인 모세보다 위대한 존재라고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종으로서 신실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의 지위와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1) 차이점⑴(3-4)

3절은 모세와 예수님의 공통점(신실한 제사장)을 기반으로 삼아 둘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소개합니다. 그 차이는 첫째, ‘집 지은 자’와 ‘집’의 차이입니다. 전자는 창조주인 반면에, 후자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모세의 차이점은 이런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신실한 청지기가 맞지만, 그는 단지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 아들이십니다.

저자는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4)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에 관한 독립적인 진술 같지만, 문맥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위를 가지신 분임을 명백하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모세의 영광을 질적인 차원에서 능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집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집을 지은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조자이신 것입니다. ‘집이 어떤 집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집안에 누가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집의 가치는 ‘그 안에 누가 사느냐?’에 따라 가치가 결정되어 집니다. 천국이 좋은 이유는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개념입니다. 천국의 개념은 주님과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누구와 함께 있느냐?’의 개념입니다. 비록 당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지라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그곳이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보다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친히 섬겨 주셨습니다. 그 탁월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도의 인생길을 지도해 주십니다. 주님을 깊이 생각하여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를 멀리서 지켜만 보시지 않고, 친히 우리와 동행해 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모세의 인도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사건을 거울로 삼아 그리스도께 절대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자 중에 불순종하는 자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멋진 집을 보고 칭찬하지만, 그 집을 지어 준 사람이 없다면 그 집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건축가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모든 피조물보다 존귀하신 분입니다. 저 위대한 모세도 피조물일 뿐입니다. 우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창조자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경배만 받고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민수기 12장 7절에서 하나님은 모세에 관해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섬김을 받은 사람들도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의 섬김을 받는 사람들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보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 대제사장의 섬김을 받는 자들입니다.

(2) 차이점⑵(5-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집의 상속자이십니다. 아들로서 집에 대해 신실하셨습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는 그분과 함께 그 집의 상속자가 됩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이 사실을 바꾸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와 예수님의 비슷한 점은 ‘신실함’이지만, 그들의 차이점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집의 ‘아들’이고, 모세는 ‘사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보좌를 물려받을 분입니다.

성경은 이런 확신 위에 견고한 자가 바로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소유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백성을 맡아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받은 백성 받게 살아가야 합니다. 즉 세상이 낙심케 해도 참된 소망을 가지고 이겨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소유한 것에 소망을 둡니다. 그러나 성도는 소유한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자랑해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밧줄이나 쇠줄 등 아무리 튼튼한 줄을 던져 주어도 그가 그 줄을 단단히 잡지 않는다면 급류에서 건짐을 받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견고히 붙잡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는 도리’ 곧 참 고백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며 생명 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이 이 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줄을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져 주시는 줄은 가장 견고한 밧줄입니다.

예수님은 참 고백의 밧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섬기는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을 그 내용으로 합니다.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대제사장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를 줍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깊이 생각하면 유혹과 절망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소망과 확신이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진정한 인도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도우심을 바라며 간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섬긴 모세처럼, 당신을 살리신 예수님처럼 충성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의 소망을 견고히 붙들고 이 땅에서의 시련들을 이겨 내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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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2-02)


우리 형제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2장 11-18절


한 남자가 정원을 살피다가 부지런히 일하는 개미들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큰 비가 곧 올 것 같았고, 개미들이 하던 모든 작업을 휩쓸어가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 남자는 개미들에게 위험을 알리고 싶었지만, 개미의 언어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개미들이 알아듣는 말로 경고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도망쳐! 곧 비가 온다!’라고 소리쳤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개미가 되면 어떨까?’, ‘그럼 개미들이 처한 위험에 대해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깊은 묵상을 통해 이 세상 역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 구원의 창시자로 온전하게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혈과 육을 지니고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은 마귀를 멸하시며, 종노릇하는 모든 사람을 놓아주려 하십니다.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신 그분은 시험과 고난 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시험과 고난을 몸소 받으셨기 때문에 능히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

 

‘형제’라고 부르심(11-13)

지금은 덜하지만, 고아들이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는 사회적인 편견과 냉대입니다. 그들을 위해 누군가가 같은 편이 되어주면 큰 힘이 된다고 합니다. 모든 인류는 고아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본문에서 이러한 연약한 존재인 인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1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12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또 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11-13)

세상의 인간관계는 수준 차이가 조금만 있으면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체가 높은 사람들이 낮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쉽지 않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쉽게 어울리지 못합니다. 세상의 관계는 조금만 차이 나면 극복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보좌에 앉아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낮고 천한 이 세상과 천한 사람에게 오셨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신 이유(10)

10절은 5-9절과 11-18절을 맺어주는 연결 고리와 같아서 양편의 생각을 다 담아냅니다. 이곳에서 두 가지 핵심 주제는 ‘아들이 받으신 고난’과 ‘완전케 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맛보셔야 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 것이 10절의 주요 내용입니다.

먼저, 고난에 대한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죽음의 고난’은 ‘잠깐 천사보다 낮아지심’(9)의 연장 선상에 있습니다. 성육신이 그리스도의 본질을 단지 암묵적으로 내비쳤다면 고난은 뚜렷하게 드러냈습니다. ‘고난’은 세 가지 각도에서 조명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습니다. 죽음을 소멸의 한 양상으로 파악하고 신성의 대척점(對蹠點)에 놓았던 헬레니즘의 세계관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영광을 품고 있고 고난이 존귀를 잉태한다는 역설은 성경에서 중심사상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기충족적이지 않고 대리적(代理的)이며 대속적(代贖的)이었습니다. ‘모든 일들을 위해’ 그분은 죽음을 맛보셨습니다(9).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끄심’(10)도 고난의 결과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분은 ‘우리를 위할’뿐 아니라 ‘우리에 앞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먼저 통과하신 고난과 영광의 전 과정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범이자 선례가 됩니다(히브리서 6:20 참조). 고난을 피해야 할 어떤 것, 혹은 하나님의 저주의 결과가 아니라 신앙 여정에 통합된 한 부분이라고 이해함으로써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오히려 고난을 자처하는 신실함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고난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온전케 되심’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서에서 15번 정도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칠십인역의 용례를 염두에 두면서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고난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를 대속하신 제사장과 같은 사역을 ‘완전하게’ 수행하셨습니다. 여기서 ‘완전함’은 그의 ‘직분에 꼭 들어맞는’, ‘적합한’, 그리고 ‘자격과 능력을 충족시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한편, ‘거룩하게 하시는 분’ 예수님과 ‘거룩하게 된’ 우리는 한 부모를 모신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형제’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과 관계를 회복시키길 원하셨습니다.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 세상에 아들이 오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렸던 창조의 영광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구원이 창시자’(10)로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녀들은 구원의 영광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구속의 은혜를 베푸셨고, 그리스도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2) 그리스도와 성도가 한 근원에서 남(11-13)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 두 번째 의미는, 성도의 거룩함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결과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과 거룩하게 함을 입은 우리가 다 한 근원이신 아버지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성도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거룩해지려고 한다면 사람은 율법 속에서 헤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님이 은혜로 거룩하게 하셨다는 복음의 말씀을 믿는 성도를 형제와 교회,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구원하신 분과 구원받은 이들’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성경이 말하는 바를 대언하겠다는 저자의 설교 철학이 12-13절에서 다시 한번 확인됩니다. 여기 인용된 시편 22:22과 이사야 8:17b-18은 11절의 선언에 대한 권위 있는 역할을 합니다.

22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편 22:22)

17…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18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이사야 8:17b-18)

성자들은 ‘형제’라고 기꺼이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저자는 시편과 이사야에서 듣습니다. 사실 우리는 부끄러운 존재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형제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오셔서 “형제(兄弟)”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 주시고 사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장점을 좋아하지만, 약점은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부족한 것과 연약한 것, 그리고 모자란 것까지도 모두 아시면서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병든 것, 연약한 것을 덮어주시고 안아주십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사랑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절망하거나 낙담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으로 보이게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사람이 가진 모든 연약함을 몸소 다 경험하셨습니다. 먹지 않으면 배고프시고, 매를 맞으면 아프시고, 일하시면 피곤하신 우리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결코, 슈퍼스타가 아니셨습니다. 일반적인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아낌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보상과 대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인 헌신과 희생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사랑하면서도 보상과 대가를 요구하면서, 사랑하면서도 섭섭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형제라고 불렀다면, 자동적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 우리를 향해 ‘사랑하는 형제들아!’라고 부르지 않고,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높여주신 것입니다. 그만큼 아낌없이 사랑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연약한 우리를 형제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이 사람이 나의 형제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우리는 그분 곁에 서기가 한없이 부끄러운 존재이지만, 그분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시고 변화된 새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영원한 자유가 되어 주심(14-18)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계 4대 성인 중 한 명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으로 오실 수 있는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는 그의 죽음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승리와 해방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효력은 천사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 강조합니다.

14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14-15)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문으로 입적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이루기 위해 대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지불 되었습니다. 이제 영적 자부심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14-15)

사람들은 많은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그중에 하나는 죽음입니다.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 속에서, 평생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갑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약점을 노립니다. 가장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그것을 시험의 도구로 삼아 마치 그것을 줄 수 있는 권한이 자기에게만 있는 것처럼 속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생명조차 빼앗은 것같이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고난으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거짓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것처럼 보인 사단을 멸하시러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참 생명은 하나님의 권한 안에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죽음의 종으로 지배하던 사단의 권세는 무너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서 함께 한 자들은 사단이 절대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사단의 권세를 멸하는 무기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부활 앞에서 마르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25-26)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장 큰 목적은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입니다. 우리가 죄 씻음 받고, 마귀로부터 자유케 되고, 죄의 종노릇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구원의 중점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친히 시험도 받으시고 고난도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통해 죽음으로부터 승리하고 구원의 통로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사망을 이기고 마귀 권세를 이긴 자입니다. 이런 승리의 삶을 나눠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는 사람들은 사단이 절대로 손댈 수 없습니다.

(2)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신 예수(16-18)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는 승리와 해방의 효력이 천사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천사들은 죽음과는 상관없는 존재들입니다. 대속의 은혜는 일생을 죽음에 매여 종노릇하던 인간들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친히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소망하고 진정 굳게 붙들어야 할 분은 바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시요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시요, 고난 중에 우리를 도우실 분도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흔들리는 믿음과 가치관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셨습니다. 때로는 쓰러질지라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죄를 씻으셨습니다.

시험 받고 어려움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이 땅에 오셔서 육신으로 호흡하셨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겪으셨던 예수님의 말씀은 고난 중에 있는 성도의 삶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습니다. 고난 당하셨지만, 죄에 패하지 않으셨던 주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생명의 길을 발견합니다. 시험과 고난 당하신 주님은 시험받는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죽음의 권세 아래에서 평생 종노릇하는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 속에 있을 때 능히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고 도우실 수 있는 것은 친히 인간이 되셨을 때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이루신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부족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통로를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한 구원의 통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시한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며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피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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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2-01)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

히브리서 2장 1-9절


오늘날은 나르시시즘(자기애)의 광풍이 몰아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자신에 대한 관심사 외에는 그 어떤 이야기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극도의 불안이 엄습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시대의 특징은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합니다. 점점 자기만의 성을 쌓아가다가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위기의 시간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장엄한 시와 찬미로 그리스도의 뛰어나심을 선포한 후 설교자는 청중, 즉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지를 점검합니다.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묵상에 멈추지 않고 성도 자신들의 상태를 돌아보도록 도전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시편 구절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그것의 효과를 설명합니다.

 

구원을 등한히 여지지 말라(1-4)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유념하여 듣지 않으면, 정처 없이 떠다니는 배처럼 잘못된 말씀의 물살에 휩쓸려 명망으로 떠내려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성경이 진리임을 알고 고백한다고 해도 말씀을 기억하며 살고 헌신하지 않는다면, 자신과는 아주 상관없는 진리가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흔들릴 수 있는 성도들을 향해 지금까지 주신 말씀을 잘 붙들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1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2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3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1-4)

구원의 확신은 주관적 감정이나 생각이 아니라 사도들과 하나님의 신실하고 변함없는 사람들이 전한 말씀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저자는 천사 숭배 문제를 일단락하면서 유대인 개종자들에게 더 이상 영적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 줍니다. 즉 믿음에서 벗어나며 영적으로 방황하게 됩니다.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더욱 유념할 것을 권면합니다.

(1) 현재의 위험(1-3a)

먼저, 한 가지 살펴야 할 것은 ‘그러므로’입니다. 신약, 특히 바울 서신과 일반서신을 읽을 때, 예사로이 지나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과 관계를 표현하는 접속사이므로, 직전 단락의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야 필요성이 있습니다. 1장에서 강조된 주제는 천사보다 뛰어난 그리스도의 지위와 능력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러므로’는 ‘아들은 천사보다 우월하시며 그 아들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므로’에 대한 줄임말입니다. 이제 2장에 들어서 천사들은 구약 율법을 전해준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 사실은 히브리서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실입니다.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우월성으로부터, 율법보다 뛰어나고 엄중한 복음의 우월성이 자연스럽게 도출되기 때문입니다.

1절은 히브리서 저자가 1장 내내 아껴 두었다가 비로소 내뱉은 간절한 주장이자 메시지입니다. 이제껏 한 번도 사용하지 않던 ‘…하도록 합시다’라는 당부와 권고의 말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서 히브리서의 장르에 관해 설명했다시피 이 책의 장르 자체가 ‘권면의 말’(13:22)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글을 쓰는 궁극적인 목적은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2:1-4은 바로 그 목적을 이루는 첫 번째 지점입니다. 이 단락을 필두로 앞으로 네 번이나 더(3:7-4:13; 6:4-8; 10:26-31; 12:25-29) 이른바 ‘경고 단락’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구원을 ‘유념해야’하고 ‘등한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 표현들이 구체적인 자세 혹은 행동을 지시합니다. 전자는 주의를 기울여 듣는 행동을 가리키기도 하고(사도행전 8:6,10), 들은 것에 따라 살아가는 실천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신명기 32:46). 후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태도, 나태함, 그리고 무엇보다 복음에 합당한 책임과 부담을 회피하는 행동(action) 또는 무행동(non-action)을 가리킵니다.

(2) 과거의 확증(3b-4)

저자가 1-3a절에서 현재 신자들이 노출된 위험을 경고했다면, 3b-4절에서 복음의 작동 방식을 한 번 더 확인합니다. 복음이 ‘이같이 큰 구원’인 이유는 그것이 전달되는 과정에 다음 세 가지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① 처음에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② 그것을 ‘들은 이들’이 우리에게 확증하였습니다. ③ 하나님께서 표적, 기사, 그리고 성령의 은사로 함께 증언하셨습니다. 이 중 마지막 세 번째 것은 히브리서의 저자와 독자들이 복음의 현재적이고 역동적인 체험을 공유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성령의 은사와 역사는 예수님의 사역, 그리고 사도행전과 바울이 개척한 몇몇 교회에 한정된 일시적인 현상으로 치부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를 받아 읽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활동이 복음의 신앙을 구성하는 불가분리적 요소였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러합니다. 복음은 명제나 교리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고 활동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어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성령께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 증언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해 준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들면 영적 표류를 이겨 낼 수 있습니다. 복잡한 시대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고 가까이하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경주에서 확실하게 승리하는 길입니다.

 

참 사람 예수의 신분(5-9)

예수님과 함께하는 부활을 소망합니까? 주님이 부활하셔서 만물의 통치자가 되신 것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성도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도 죄에 대해 죽었고, 그분이 부활하실 때 우리도 부활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만왕의 왕이 되셔서 온 세상을 통치하실 마지막 날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온 세상을 통히하게 될 것입니다.

5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6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7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8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9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5-9)

여기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청중의 관심을 그의 중심 사상, 즉 미래에 나타날 그리스도의 운명으로 돌립니다. 이제 그분의 성육신을 통해 그 운명을 함께 나눌 이들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관성이 전면에 부상하게 됩니다.

다시 천사가 거론되지만 여기서는 지위나 능력 면에서의 대비보다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 즉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예견한 예언의 말씀으로 인용된 것은 시편 8편입니다. 이 시편은 원 문맥에서 메시아적 예언이 아니라 인생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하지만 시편 8:6의 원래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사람’과 ‘인자’는 분명 인류 전체를 가리킵니다. 인간 존재는 만물의 영장으로 세움 받아 존귀와 영광을 누리지만, 천사에 비하면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닌, 그래서 ‘조금’ 못한 존재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메시아적으로 해석합니다. 그의 해석은 원래 문맥과 긴밀히 잇닿아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비추어주는 새로운 차원이 더해집니다. 한편으로, 예수님께서 참 사람으로 오셔서 성육신하신 동안, 특히 육체적 고통과 죽음을 맛본 상황에서는 천사보다 조금 못한 상태에 계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분이 죽음의 고난 이후 부활 승천하셨을 때 영광과 존귀를 입으셨으므로 성육신의 기간은 잠시 동안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와 독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관점에서 예수께서는 이미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움’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면 만물은 그 발아래 복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두 사건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존재합니다. 계획의 첫 부분은 이루어졌지만, 나머지 부분, 즉 승귀하신 예수님께 대한 만물의 복종은 ‘아직 보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바울 사도의 인식과도 일치합니다. 아직 성취되지 않았지만, 그 성취가 확실한 장래의 모습에 대해서 바울도 여러번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과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롬 8:18-21),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함”(엡 1:10),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함”(빌 2:10), 그리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됨”(골1.20)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 예수를 본다’고 말합니다. 정말입니까? 그(와 그의 독자들)는 환상을 보았던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읽고, 듣고, 그래서 이해하고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보는’ 경험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내 일부 전통은 신앙에 있어서 봄의 차원을 지나치게 경계하고 의심하지만, 이천 년 기독교 역사 동안 문자를 읽어서 이해함으로 믿고 신앙을 배워간 사람들은 극소수였습니다. 교회 건축을 통해서 예배당에 그려진 스테인드글라스와 그림, 조각을 통해서 먼저 믿은 그리스도인들의 표정과 행동을 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보다 신비적이고 내밀한 체험을 가진 신앙인들의 이야기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시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은 주관적이고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보는 것’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우리가 낙담할 필요가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첫째 것의 성취를 이미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성취된 것을 보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이 완성되고야 말 것이라는 확신을 얻습니다. 이것은 신약성경 전반에서 볼 수 있는 ‘이미 그러나 아직’ 종말론과 일맥상통합니다.

9절 후반부에서 저자는 복음과 구원에 관해서 이제껏 강조하지 않았던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요점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조금’ 혹은 ‘잠시 동안’못하게 되셔서 죽음을 맛보신 사건은 예수님 자신의 영광과 존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 온 신학적 묵상이 여기서 모든 사람들에게로 옮겨집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애초에 시편 8편을 인용할 때부터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구속 사역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는 방식임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고 돌보십니까?’라는 시인의 물음은 참 사람,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온전하게 대답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변함없으신 분입니다. 낮아져 죽음의 고난을 맛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부활 승천하사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겸손하게 낮아지시고 죽음의 고난을 경험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는 마땅한 경배를 드리며 복종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인 개종자들의 혼란과 표류를 막기 위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굳게 붙들라고 권면했습니다. 믿음의 근거도 예수 그리스도시며, 구원의 근거도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푯대요 목자시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 안에 거하는 자는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흔들림 없는 성도들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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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1-02)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히브리서 1장 5-14절


한국교회는 공동체들이 침체 되었거나 침체 되어 가고 신앙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만큼 영적인 상황은 어려워질 것입니다. 보이는 상황이나 현상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생각으로 인도하시는지 근원적인 원인을 찾아 상류로 올라가거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선언으로 히브리서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길고도 리드미컬한 문장에 이어 일곱 개의 성경 주절이 낭독됩니다. 장엄한 어조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천사 보다 뛰어나신다고 선언합니다. 정교하게 조율된 이 단란의 열쇠를 맡은 ‘말씀하심’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 말씀을 전달하시는 아들 사이의 관계는 신비롭고 독특합니다.

 

유일무이한 아들의 지위(5)

예수님의 이름이 가진 능력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구원 사역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믿고 순종할 때 그 이름의 능력이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하며, 하나님의 저녀와 백성이 되는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5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5)

앞(1:4)에서 소개된 ‘천사보다 뛰어나신 아들’에 주제를 입증하기 위해, 저자는 일곱 개의 구약 인용구를 특이한 방식으로 연속적으로 나열합니다. 일곱 개의 인용구 중 다섯 깨는 시편에서, 두 개는 사무엘하와 신명기에서 각각 하나씩 온 것입니다. 그중 다섯 개는 아들에 관한 일용이고, 한 개는 아들과 천사의 관계, 그리고 한 개는 천사에 관한 인용입니다.

구약 성경을 인용한 첫 두 구절인 시편 2:7과 사무엘하 7:14의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합니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공식적이며 전형적으로 메시아의 탄생을 의미하는 구절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언제 천사 중 누구에게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느냐?”(5a)라는 수사적 질문으로 도입됩니다. 이 질문은 ‘그렇지 않다’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합니다. 곧 두 인용구는 아들에게만 적용될 뿐 천사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첫째 인용구는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 너를 낳았도다”라고 합니다. 이는 시편 2편 7절에서 왔습니다.

7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편 2:7)

이 말씀에 나오는 ‘아들’은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 중 누구에게도 ‘아들’이라고 지칭하지 않으셨습니다. 시편 2편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그분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장면을 묘사한 대관식 시편입니다. 그 중에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을 예언합니다. ‘너를 낳았도다’라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윗을 통해 이 땅에 보내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인용구인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에게 아들이 될 것이다”는 사무엘하 7장 14절에서 왔습니다.

14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사무엘하 7:11-17)

위 말씀은 선지자 나단의 예언 가운데 주어진 신탁입니다. 역사적으로 이 예언은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에게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에서는 그 온전한 성취가 솔로몬이 내다보았던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선언합니다(참조 요 7:42; 행 13:23). 이 전달된 메시지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재차 확증합니다. 나단은 다윗 가문의 왕위는 영원할 것이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었으며 신적 권위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통치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곳에서 ‘아들’은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바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구절을 인용해서 한 문장으로 통합되면서 그 적용 대상이 다윗 왕조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전환됩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천사가 아무리 뛰어나고 위대하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천사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향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되고, 너는 내 아들이라”라고 이 말씀을 한 적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보다 더 뛰어난 존재는 없습니다. 천사는 다만 하나님의 피조물뿐이며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재물이 귀한들 어찌 자녀들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천사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리스도보다 더하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의 소유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이 소유한 왕권과 창조의 능력(6-12)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합니다. 사람의 마음도 기분과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그 어느 것 하나 신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주님은 창세 전부터 지금까지 동일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한결같으시기에 죄악 가득한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도 그분은 모든 약속을 신실하게 다 이루셨습니다.

6또 그가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7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8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9주께서 의를 사랑하시고 불법을 미워하셨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주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주께 부어 주를 동류들보다 뛰어나게 하셨도다 하였고 10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은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6-12)

히브리서 기자는 어떤 천사에게도 하나님께서 아들이라는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심판을 하실 분이십니다. 이제 천사와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천사에 대한 소개(6-7)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실 때까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온 세상과 만물을 의와 공평으로 다스리십니다.

6절에 인용된 칠십인역 신명기 32:43, 시편 104:4 그리고 시편 44:7a절은 ‘A는 B에게 경배하라-A는 유한하다-B는 무한하다’의 논리 구조로 만듭니다. 즉, 뒤의 두 시편이 맨 앞에 신명기 말씀의 이유와 근거를 대는 형국입니다.

43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신명기 32:43)

4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편 104:4)

7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시편 44:7)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신적인 권위가 있지만, 천사들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거룩한 존재이긴 하지만 신적인 권위는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영원하신 아들께 경배함이 마땅합니다. 또한,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104편 4절을 인용하지만, 히브리어 본문이 아니라 칠십인역 본문을 따르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역을 하실 때 천사를 도구의 역할로 쓰십니다.

(2)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8-9)

천사의 존재와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상속자이시고, 만유를 유업으로 받아 통치하고 주관하십니다. 이어지는 8-9절에는 칠십인역 시편 44:7-8이 인용되었습니다.

7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8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시편 44:7-8)

하나님께 만유의 통치자로 기름 부음을 받은 아들은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이십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섬기는 종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업을 잇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만유의 통치권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들과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3) 창조이신 그리스도(10-12)

당시 사람들은 천사를 숭배했지만, 천사와 그리스도는 비교도 안 됩니다. 또한, 10-12절에서도 있습니다. 피조물들은 옷처럼 낡고 변하지만, 그리스도는 그 시대가 다함이 없습니다. 천사들도 피조물의 존재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 102:25-27을 인용해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창조 사역을 감당하셨음을 언급합니다. 예수님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요한복음 1:3).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만들어진 천지 만물은 장차 사라질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영원히 존재하십니다.

천사는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실 사람보다 먼저 변하고 타락한 존재가 천사였습니다. 천사 루시퍼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납니다. 그가 바로 사탄이 되었습니다. 타락한 그 천사가 하와를 유혹해서 자기처럼 타락시켰습니다. 천사는 이런 존재입니다. 피조물이기에 낡고 변하고 타락하고 멸망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하나님 우편으로 승귀하신 아들(13-14)

천사는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은 모든 원수가 다 진멸될 때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시며, 천사에게 경배를 받으셔야 마땅하신 분입니다.

13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14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13-14)

이제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위를 확정합니다. 5절의 질문 형식으로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드러냅니다. 시편 110:1을 인용하여 스스로 답합니다.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시편 110:1)

앞서 지적했듯이, 마지막 인용구(13)는 첫째 인용구와 유사한 도입구로 시작하여 일곱 개 인용구 모두를 묶는 틀을 형성합니다. 마지막 인용구(13)는 시편 110:1을 인용한 것입니다. 제왕시로서 이스라엘 왕을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에 비추어 칭송하는 이 시편은 초대교회에서 메시아적 시편으로 널리 사용되며(행 2:34; 고전 15:25), 예수님 자신도 그런 이해를 공유하십니다(막 12:35-37; 14:62).

본 절에서 이 시편의 인용은 3b절에서 이미 소개된 기독론적 진리(‘높은 곳에 계신 존귀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다’)에 대해 구약적 근거를 제공해 줍니다. 3b 절에서처럼 여기서도 아들이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는 것은 승귀 사건과 일치됩니다. 아들은 인류를 위한 구원자로서 사역을 마친 후 아직 미래로 남아 있는 원수들에 대한 최종적 승리 때까지 하나님 오른쪽에 앉아서 기다리십니다(참조 10:12-13; 행 2:33-36; 5:31; 고전 15:25).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게 하신 이는 천상천하에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온 우주의 지배자로서 행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립니다. 이 특권과 권세는 결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는 특별한 것입니다. 천사는 이 아들의 사역을 위하여 존재하며 아들의 명령에 따라 심부름을 하는 존재합니다. 결국, 천사는 아들에게 종속되며 의존하며 복종하는 신분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모든 천사들’이란 한 천사도 예외 없음을 가리킵니다. 모든 천사는 그리스도가 부리는 ‘영’일 뿐입니다. 또한 ‘구원 얻을 상속자’는 바로 성도들입니다. 아버지의 상속을 받을 상속자들입니다. 구원을 승계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종들인데, 구체적으로 어떤 사역을 감당하냐면 구원 얻을 상속자 곧 성도들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보냄을 받은 종들입니다. 이것이 천사의 위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영인 천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고 섬기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이 천사들의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위상과 천사의 위상은 비교될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높이 받든 천사보다 훨씬 큰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구원의 진리는 천사들도 모르는 놀라운 보화입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들로 명령에 따라 심부름을 하면서 그 내용을 알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숨겨져 있는 보화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진리 즉 복음입니다. 천사는 이 진리를 모릅니다. 그러나 왕이신 아들 그리스도는 피조물인 천사보다 더 높으시고 탁월하시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죄로 인하여 파괴된 자연계와 영적 세계 모두를 회복하시고 그 세계를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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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1-01)


아들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

히브리서 1장 1-5절


어떤 성도가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까?’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상담자에게 먼저 신앙의 표준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표준을 너무 지나치게 강요하는 경우를 봅니다. 마치 공장에서 벽돌을 찍어내듯이 모두가 일률적이어야 된다고 강조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방법은 개인의 특성과 성품 그리고 성장 배경에 따라 다릅니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살펴보고 개인의 특성에 따라 알맞게 성장할 방법을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건강한 신앙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옛적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 믿음의 조상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지금도 전달하고 계십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세계가 그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창조되었습니다. 그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 광채를 볼 수 있고, 영광의 본체입니다. 어떠한 핍박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예수만 바라보고 믿고 나갈 때, 천성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 방법(1-2)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의 영이 어두워졌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어두워진 세상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선포하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1-2)

히브리서를 기록한 배경은 당시에 개종한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때문에 매우 극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계속되는 핍박 가운데, 점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정말일까?’라고 회의하면서, 배교(背敎)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 방황하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 기록한 말씀이 본 ‘히브리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항상 교제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길 원하십니다. 잃어버린 에덴동산이 회복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모든 인간은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아니 가까이 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자기 뜻을 다양한 방법으로 전달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전달하는 방법은 같은 방법이 아니라 시대와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전달하셨겠습니까? 사람들은 죄로 인해 영적인 감각이 마비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18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이사야 44:18)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전해도 알아듣질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messenger)들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사람들은 반응이 싸늘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최종적으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최종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최고봉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마지막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완벽하게 통합하시고 완전히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계속적으로 계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할 때,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2)는 말씀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느라”는 선언을 기초로 합니다.

또 사도 요한은 소개하였습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함께 계셨습니다. 만유의 상속자이시며 중보자이십니다. 즉 만유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만유를 통치하시고 계십니다. 결국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만물의 주인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만유의 주인이 세상에 오셨을 때, 대대적으로 환영해야 했습니다. 수많은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겸손히 낮고 천한 베들레헴 마구간에 인간의 옷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30여년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만유를 통치하신 주인이심을 예수님께서 부활과 승천하심을 통해 밝히 들어났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너무 핍박이 심하니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이런 핍박을 계속 받아야 하나?’라는 점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방황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어야 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모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지 살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방황하는 성도들에게 구약성경을 기초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에게 시대마다 수 없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셨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시고 계십니다. 생활 속에서, 말씀 속에서 기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계셨습니다. 각 사람의 수준에 따라 알아듣도록 합당하게 계시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갖은 어려움에도 흔들릴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어떤 고난에도 굳건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세상에 세상의 메신저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3)

많은 사람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위대한 성인 중 한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신 사실을 이해할 수 없고, 짧은 생각으로 그럴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3)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무엇이라고 말 할지라도, 성경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진 광체이며,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심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런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대답하셨습니다. 밤에 찾아왔던 나다나엘도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8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한 것에 대한 증거로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임하셔서 모든 구속사역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것은 골고다 언덕 위에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하시면, 구원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에 대해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셨습니다.

17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요한계시록 11:17)

예수님께서는 우주 만물의 창조자이실 뿐 아니라 말씀으로 통치하시고 계심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말씀으로 병자를 일으키고, 말씀으로 귀신을 내쫓아 내셨습니다. 또한 지금도 그 능력의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말씀으로 모든 것을 성취하신 예수님, 그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 삶에 있는 고통과 문제 그리고 혼란도, 말씀으로 새롭게 하시며 치료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하실 것입니다.

말씀으로 만물을 붙으시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십자가 위에서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구원의 길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물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십니다. 죄를 정결케 하시는 사역을 통해서 타락한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십니다. 당신에게는 이러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풍성합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4-5)

이 세상에 어떤 것도 하나님을 대리하거나 대언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탁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4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5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4-5)

히브리서 기자가 다른 존재들이나 인물들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피조물과 비교하는 것이 예수님을 격하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탁월함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느 누구와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차원이 다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천사들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유대주의자들이 천사를 숭배했기 때문에 부득불 천사와의 비교를 통해 예수님의 탁월성을 입증합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는 탁월한 모습을 두 가지로 보여주십니다. 첫째로, 천사가 갖지 못한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가지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4).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존귀하신 분인지는 그분의 이름을 통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곧 하나님이십니다. 만물과의 관계에서 불 때,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요 상속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 하나님께서 ‘낳으신’ 아들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하지만 고대 아리우스(Arius) 이단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님께서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피조물이고 하나님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은 예수님께 주어졌습니다. 그 이름은 ‘천사’,‘사자’가 아니라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막 1:11)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이었지만, 천사들은 예수님을 섬기는 존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을 통해 주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5). 히브리서 안에 구약 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가 구약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구원의 사역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들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ㅁ두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재해석된 성경의 말씀을 보게 만들어주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5절부터 구약 말씀들을 인용합니다. 첫째가 시편 2편 7절 말씀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는 인용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신임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은 하나님부터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이면서, 하나님과의 영원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성경 전체는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는 분으로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세상 어떤 것들과 그분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부 하나님과 영광과 권능에 있어서 동등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성인 중 한 분으로 존경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참 하나님으로 믿고 경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 만물을 통치하시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당신의 구세주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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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01) 

 


히브리서 개론

-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


히브리서는 요한계시록과 함께 신약 중에 어려운 책 중의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의 삶과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내용이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전이나 성막에서 제사를 지내본 적이 없는데, 히브리서에는 구약이 제사제도, 제사장 그리고 성막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를 연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진수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상관관계를 히브리서만큼 잘 보여주는 책도 드물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의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율법과 제사 제도보다 우월하신 분이 그리스도요, 그것들을 완성하신 분도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역사적 상황과 기록 목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묵상하면 할수록 성도들에게 주시는 유익이 매력적인 성경이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1. 기록자

(1) 역사적으로 히브리서의 기자가 누구인지 논란이 많습니다. 본문에서 저자는 자신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사도 바울이 기록했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었지만, 누가 히브리서를 기록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2) 교회 역사에서는 바울의 저작 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히브리서의 기자로 바울 외에 바나바, 아볼로, 브리스길라, 실라, 디모데, 빌립 등 많은 사람을 거론하기도 합니다.

 

2. 수신자

(1) 히브리서의 독자와 관련해서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2) 전통적으로 히브리서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썼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다른 주장은 1836년에 처음으로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독자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하지만 두 견해 중에서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 ① 외적 증거 : 히브리서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록한 근거로, 고대 사본에서 발견되는 히브리서의 제목을 ‘히브리인들에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② 내적 증거 : 또 다른 증거로 히브리서에는 구약 제사와 율법에 관한 많은 인용과 암시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자들이 제사와 율법에 대해 그만큼 친숙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3. 기록 시기

(1) 대체로 히브리서는 주후 60-100년 사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주 드물게 주후 5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장은 받아들이기 여렸습니다.

(2) 기록 연대를 좁히려는 할 때 관건이 되는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주후 70년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제사 제도를 설명하면서 현재시제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지 않은 70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현재시제의 사용은 성전 파괴와는 무관합니다.

(3) 히브리서 기록은 주후 70년 이전설과 이후설이 팽팽하게 맞서기에, 기록 연대를 넓게 주후 60-100년 사이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4. 기록 목적

(1) 외부로부터 핍박 : 히브리서 10:32-34에는 독자들이 핍박 가운데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비방과 환난을 받으면서 투옥에, 재산을 빼앗기기도, 더 나가서 순교까지 했습니다. 저자는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이 당한 고난을 설명합니다. 당시 고난 겪는 독자들에게 믿음을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선진들이 당했던 것과 다름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2) 나태함으로 인한 영적 미성숙 : 독자들이 외부의 도전으로 오랜 시간에 걸친 고난으로 독자들을 피곤하고 지치게 했을 것입니다. 더 나가서 신앙의 나태함을 넘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교한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게으르고 나태함에 빠지는 것은 영적인 성숙을 방해하는 것이 됩니다. 저자는 나태함으로 인한 영적 미성숙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3) 적극적인 배교의 가능성 : 영적인 미성숙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때로는 배교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영적 미성숙에 대해 경고하면서(5:11-6:12) 그 가운데 배교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6:4-6). 이것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으면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후퇴하는 것이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배교의 행위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경고하는 것입니다.

 

5. 기록 형식

전통적으로 히브리서는 서신(書信)으로 이해됐습니다. 그러나 1797년에 히브리서가 설교라는 주장이 제기된 이래로 많은 사람이 그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특히 히브리서 1322절은 히브리서를 권면의 말이라고 지칭하는데, 이것은 당시 설교 형식의 글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설교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인사말이 생략된 것으로 보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6. 히브리서의 구조

1:1-4 서론 :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

1:5-3:6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천사의 비교

       1:5-14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

       2:1-3:6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3:7-5:10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3:7-4:16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

5:1-10 그리스도와 아론의 제사장직 비교

5:11-6:20 배우고 진보하라는 경고와 격려

7:1-10:39 더 나은 제사장이 드린 더 나은 제사

      7:1-28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사장

       8:1-13 새 언약의 중보자

9:1-10 옛 제사제도의 한계

9:11-28 그리스도의 제사

10:1-18 세 언약이 주는 유익

10:19-39 권면과 경고

11:1-40 믿음

12:1-13:25 소망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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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2-02)


교만한 인생을 심판하신 하나님

사도행전 12장 18-25절


강한 자를 무너뜨리는 건 더 강한 자가 아닌, 강한 자 속에 숨어있는 약한 본성일 때가 많습니다. 자신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덫은 자기 안에 있습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하하던 혜롯에게서 왕복을 벗긴 건 교만이 있습니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면 언제든 최약자로 전략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천사의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탈옥한 사실을 모르고 있던 군인들은 헤롯 아그립바왕에 의해 사형에 처하게 됩니다.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실망한 아그립바는 가이사라로 내려가 연회를 베풉니다. 그의 연설을 듣던 백성은 그에게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아부를 합니다. 헤롯은 그 말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가로챈 헤롯에게 즉각적으로 심판의 손을 드십니다.

 

파수꾼을 사형시킨 아그립바(18-19)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 사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성장시켜려 하지만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을 제거하려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항상 자신을 성찰하고 변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으로 변화되어갈 것입니다.

18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19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18-19)

새로운 아침이 밝았습니다. 간밤에 마가라는 요한의 집이 베드로의 출현으로 소동이 일어났지만, 감옥에서는 베드로의 탈출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것을 헤롯의 간부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날이 밝자 그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그들 사이에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를 지켰던 경비병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인 후, 그의 탈출이 어떤 음모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그들에게 사형을 집행하도록 명령을 내립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죄수의 탈출을 허용한 경비병은 탈옥수가 받아야 했던 동일한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아그립바 왕이 이 로마법을 반드시 그대로 따라야 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그립바 왕은 그들에게 사형 명령을 내린 후, 이제 절기가 다 끝나면서 행정 수도 가이사랴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큰 절기인 유월절과 무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보냈습니다. 로마의 총독과 함께 예루살렘의 치안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올라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려가는 길은 베드로를 놓친 아쉬운 마음을 안고 갔을 것입니다. 그는 야고보를 죽일 수 있었고 베드로를 투옥시킬 수 있었겠지만, 동시에 베드로를 감옥 안에 계속 둘 수 없었습니다. 죽일 수도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 힘없는 자기 부하들이나 죽여서 화풀이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거나 뜻 밖에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며,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헤롯이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유대’는 좁은 의미에서 유대인의 땅을 의미합니다. 반면 가이사랴는 정치적으로는 유대 지방에 속해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유대인의 땅이 아닙니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이 도시를 설립한 때로부터 시작해 대체적으로 이방인들이 거주하던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아그립바 왕이 유대에서 가이사랴로 내려갔다고 언급한 것은 다음 이어지는 장면이 그곳에서 일어난 일임을 말하기 위한 서술적 장치입니다.

 

교만한 아그립바를 심판하심(20-23)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책임져 주십니다. 반대로 자기 주제도 모르고 교만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다면 한 나라의 왕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20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21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20-23)

헤롯 아그립바 왕이 가이사랴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내용을 다룹니다. 그러나 누가는 왜 그런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그 경위를 먼저 설명합니다.

⑴ 주변 나라를 통한 왕권의 위세(20-21)

헤롯 왕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주변 나라들을 제사하면서 성경은 말해줍니다. 본문에서는 대표적으로 두로와 시돈을 나타납니다. 두로와 시돈은 해변에 위치했기 때문에 식량의 많은 부분을 갈릴리와의 무역을 통해 조달해왔습니다. 그래서 헤롯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필요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때로부터 대략 천 년 전 히람과 솔로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열왕기상 5:9-12).

무슨 영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 헤롯 아그립바 왕이 분노하고, 그 지역들과 외교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아그립바 왕의 이러한 이상 기류를 감지하고 그들은 화친 정책을 펼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에 이 두 도시의 외교관들은 헤롯 아그립바 왕의 침소를 맡은 고관인 블라스도를 매수해서 왕의 마음을 살려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왕의 침소를 맡은 신하’는 일반적으로 왕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⑵ 사람들의 경배를 통한 위세(22)

두로와 시돈은 헤롯 왕의 마음을 달려고 시도하다가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가이사랴 지역에 축제가 있었습니다. 이 축제가 가이사랴 설립 기념일에 열렸는지 황제의 생일인 44년 8월 1일에 열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전자의 경우라면 베드로의 탈옥 사건은 거의 1년 전 유월절 때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날 헤롯 왕은 어의(御衣)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들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헤롯 왕의 연설을 들은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아부합니다. 이것은 헤롯 왕이 기대하던 이상의 반응이었습니다. 헤롯은 항상 정통성이 없는 왕이라는 핸드캡(handicap) 때문에 좌불안석이었습니다. 언제 유대인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릴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을 길들이기 위해서 때로는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애를 쓰다가도 또 때로는 모질게 대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왕권을 잘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런 배경 속에서 백성들이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하니 흥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도 받아서는 안 되는 찬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침상을 맡은 신하 블라스도가 꾸민 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외교적인 사안을 상소하기 위해서는 헤롯의 기분이 좋을 때에 내놓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돈으로 사람을 매수해서 그처럼 환소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도 거짓 증인들을 고용하여 재판정에서 ‘바나바를 살리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게 만들었었습니다.

⑶ 교만한 자에게 내린 심판(23)

이러한 꼼수는 사단의 패배와 교회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헤롯 왕은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자기 몫으로 돌렸습니다. 그 결과 우상숭배자들에게 임하는 결과가 똑같이 임했습니다.

본문에는 ‘주의 천사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라는 표현합니다. 헤롯 왕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신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벌레에게 먹히고 맙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자 누가는 혜롯의 죽음이 벌레가 아니라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사자가 심판을 집행합니다. 천사가 실제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바는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는 신성모독적인 행동을 할 경우,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그를 엄벌하신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헤롯의 손에서 베드로를 구원하셨는데, 이번에는 그분이 헤롯을 심판하셨습니다.

이 기록된 내용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도 기록된 사건입니다. 요세푸스는 동일하게 아그립바 왕이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신과 같다는 칭송을 받았지만, 그 신성모독적인 아부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점을 지적합니다. 당시 정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와 관련된 요세푸스의 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헤롯은 가이사의 안녕을 위한 축제라고 생각하며 그를 기념해 연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많은 지역 관리들과 다른 고위 인사들도 참석했다. 연회 둘째 날 아그립바는 완전히 은으로 만든 예복을 입고 동이 틀 무렵 연회장에 들어섰다. 그때 그의 은색 옷은 태양의 첫 빛줄기에 비쳐 아름답게 빛났고 그 빛의 찬란함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두려움과 떨림을 안겨주었다. 이에 거기 모인 사람들은 그에게 아부하며 그를 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외쳤다. ‘지금까지 우리는 당신을 인간으로서 존경했지만, 이제부터 당신은 인간 이상임을 고백합니다.’ 그는 그들을 질책하지 않았고, 그들의 불경한 아부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눈을 들어 자기 머리 위에 있는 밧줄에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는 부엉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을 보는 순간, 그는 즉시 이것이 악의 메신저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갑자기 강한 슬픔이 그의 마음을 찔렀다. 이와 동시에 심한 통증이 그의 내장을 사로잡았고, 그 통증의 강도는 빠르게 올라갔다 … 그는 황급히 왕궁으로 옮겨졌으며…배의 통증이 5일간 지속된 후 그는 그의 생애 쉰네 번째 되는 해, 왕위에 오른 지 7년째 되는 해에 사망하고 말았다.”(요세푸스,「유대고대사』19:343-350)

누가의 기록과 요세푸스의 기록은 서로 독립된 기록이지만, 그 핵심 내용은 일치합니다. 단지 새로운 내용이 있다면 두로와 시돈 사람들과의 외교 관계에 관한 내용일 것입니다.

학자들은 아그립바 왕의 사인(死因)에 관해 여러 가지로 추측합니다. ‘벌레에게 먹혀’라는 표현은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복막염이나 장폐색, 혹은 비소 중독 등으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누가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와 같은 표현은 고대에 여러 저자들이 악독한 독재자들을 포함해 불행한 최후를 맞아 마땅하다고 생각되는 자들의 죽음을 가리킬 때 종종 했던 표현입니다(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17:168-170에 기록된 헤롯 대왕의 죽음 묘사를 참조하라). 헤롯 아그립바 왕이 죽은 후 유대는 다시 로마 총독부의 관할로 넘어가게 됩니다. 사도행전에는 아그립바 왕의 세 자녀인 헤롯 아그립바 2세와 그의 누이동생 버니게(행 25:13), 막내 딸 드루실라(행 24:24)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견주다가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인정하여 영광스러운 인생이 될 것인지 선택하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함(24-25)

사단은 사람들을 미혹시켜 하나님께 도전하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역사적으로 조상 아담과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지만 그는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발악해서 하나님을 도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만을 증거 하는 역할만합니다. 그리고 누가 역사의 진정한 주인인지 증명해주고 맙니다.

24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25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24-25)

사도행전 12장은 헤롯 왕이 야고보를 죽이고 수제자 베드로를 시작했지만, 마지막은 말씀이 더 해졌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본문은 궁극적으로 승리자라는 것을 아래 같이 표현합니다.

⑴ 여전히 부흥하는 초대교회(24)

본문에서는 헤롯의 핍박을 받은 후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라’(24)라고 소개합니다. 인간의 능력은 헤롯 왕의 죽음과 함께 힘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쇠하지 않고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가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고 어려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즉 사도 야고보가 아그립바 왕에 순교를 당하고 사도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굳건하게 세워져 나갔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환난의 상황 속에서 더욱 흥왕하여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사도행전 이야기의 큰 단락이 마무리될 때마다 초대교회의 부흥을 간략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라고 요약해왔습니다(사도행전 6:7; 12:24; 19:20).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지속적으로 흥왕했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초대교회가 단순히 수적인 부흥을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초대교회가 고난과 박해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습니다. 양적이고 비본질적인 성장 그 자체만으로 교회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시도에서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⑵ 계속 되는 하나님의 사역(25)

사도 야고보의 순교는 하나님의 무능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입증한 사건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 모든 일을 예루살렘에서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흉년으로 고통 겪고 있었지만, 설상가상으로 박해까지 만났지만,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말씀이 더 흥왕해졌습니다. 사도행전 11:30에서 안디옥 교회의 구제 헌금을 들고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바나바와 사울은 헌금 전달을 마치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에서 돌아올 때 그들은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온다. 이 표현은 12절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마가는 골로새서 4장 10절에서 바나바의 사촌으로 언급되는 마가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의 친척 관계는 왜 바나바와 사울을 따라 안디옥에 오게 되었으며, 나중에 그들과 함께 1차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당신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을 신뢰하십니까? 벌레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 때문에 벌레에 죽은 헤롯처럼 인물이 되지 않도록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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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2-01)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과 탈옥

사도행전 12장 1-17절


베스트셀러 책으로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란 책이 있었습니다. 내용은 성공한 한 사람이 하와이로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합니다. 꿈꾸는 만큼 이루어진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생은 꿈꾸는 데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책을 읽고 긍정의 힘을 얻을 수 있었지만, 상상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야고보와 베드로를 통해서 역사하심을 볼 때, 사람의 계획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끌어 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 헤롯 아그립바 왕은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베드로까지 공개 처형할 방도를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주의 사자’를 통해 극적으로 베드로를 탈출시킵니다. 이 일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했던 성도들마저 믿기 어려울 정도의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야고보의 순교함(1-2)

지금까지 우리는 예배당 안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부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부흥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정립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반대로 많은 성도들이 흩어져서, 곳곳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끼리만 예배드리는 것을 부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흩어져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을 증거하는 것을 부흥이라고 합니다.

1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2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1-2)

초대교회는 엄청난 부흥을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 위에 엄청난 핍박을 주십니다. 교회는 어려움 가운데 처하고 성도들은 핍박 때문에 세계로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흩어진 곳에서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흩어진 곳에서 목숨만 부지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도 복음을 더 힘차게 증거 했습니다.

본문에는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1)라고 초대교회에 검은 구름이 몰려옵니다. 그 시기는 ‘그때에’라고, 바나바와 사울이 후원금을 자기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시점을 의미합니다(행 11:30). 이 시점은 유대 절기로 말하면, 유월절 전후 기간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유월절 직전에 순교를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헤롯은 베드로를 죽이려고 체포했을 때는 이미 유월절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초대교회를 박해하는 데는 ‘헤롯’이란 인물이 계속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도 헤롯 왕이고, 본문에도 헤롯 왕이 나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헤롯 가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탄생 시에는 ‘헤롯 대왕’이며, 본문에 나타난 헤롯 왕은 그의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하지만, 헤롯 아그립바 1세라고 소개하지 않고, ‘헤롯’으로만 소개하는 것은 헤롯 가문이 여전히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있음을 전달하려는 의도입니다.

헤롯 가문의 출신지는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대인의 종교를 지키는 척했고, 유대인들이 미워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핍박해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던 것입니다.

헤롯 또한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교회를 핍박했던 것입니다(1). 그 결과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2)라고, 야고보 사도의 순교에 대한 소식을 전합니다. 열두 사도 중에서 첫 순교자가 나온 것입니다. 헤룻의 정치적인 야심 때문에 초대교회 중요한 지도자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요, 중요한 순간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챙기셨던 바로 그 사도입니다. 이 사건은 헤롯 아그립바 왕이 죽은 해로 알려진 주후 44년에 일어난 일입니다(12:23). 그는 야고보를 살해한 것도 이와 같은 정치적인 계산에서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야고보를 살해한 후, 유대인들에게 호감을 받은 헤롯 아그립바는 이제 더 초대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베드로까지 죽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베드로의 투옥와 탈옥(3-17)

세상은 자신의 능력 아래 멍에와 모든 것을 결박시키고 구속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꽁꽁 결박하고 구속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씀 한마디로 그 수많은 멍에와 결박을 썩은 새끼줄처럼 결박을 푸십니다. 사람들에 의해서 감옥에 갇힌 베드로는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자유의 몸이 됩니다.

3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4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5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6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7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천사가 이르되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이르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9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가 하는 것이 생시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10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 나와서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11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12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13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15그들이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여자 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말이라 하니 그들이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그들이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17베드로가 그들에게 손짓하여 조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3-17)

사도행전 5장에서 사도들이 옥에 갇혔다가 주의 사자가 밤에 기적적으로 옥문을 열어 풀려났던 일을 소개할 때와는 달리 누가는 이번 베드로의 구출 과정을 아주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놀랍게 베드로를 구출해내셨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1) 베드로의 투옥(3-5)

헤롯에 의해 야고보가 순교를 당하자 유대인들은 기뻐했습니다(3).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헤롯은 매우 격양됩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유대인들의 반응 때문입니다. 헤롯도 야고보의 죽음을 기뻐한 것을 보고, 유대인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하여 이제 베드로로 잡으려고 합니다(3).

헤롯은 더 나가서 베드로를 잡아 투옥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즉시 처형했지만, 베드로는 바로 처형하지 못한 것은 무교절 절기 때문입니다. 투옥된 때 7일 동안 진행되는 무교절이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사실 7일간의 무교절은 유월절 바로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보통 이 두 절기를 거의 하나의 명절로 간주하곤 했습니다. 무교절 기간에는 죄수를 사형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 이 상황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붙잡으려 했던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유월절 이전에 해치우려 했고 베드로는 무교절이 끝난 후에 공개 처형하려 했습니다.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죄수의 탈옥을 경계해 '군인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철통 경비를 세운 것은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매우 높은 진술이다(4). 이는 야간 경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는 당시 로마 군대가 야간 보초 시간을 사등분해서 돌아가며 보초를 서게 했음을 말해줍니다.

베드로는 유월절 기간에는 죽일 수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기간, 즉 명절에 돌아가심으로 인해 기독교가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유월절에 잘못 죽이게 되면, 그 전처를 밟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를 즉시 죽이지 않고 잠시 살려준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갇혀 있는 시간에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5).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 성도들의 간절함을 표합니다(눅 22:44).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강청하는 기도(눅 11장)와 포기하지 않는 기도(눅 18장)처럼 간청했던 것입니다.

(2)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탈옥함(6-11)

베드로가 임시로 갇힌 곳은 성전의 북서쪽 구석에 위치한 안토니아 요새로 추정됩니다. 이곳에 예루살렘에 주둔하는 로마 군대가 머물러 있던 곳입니다. 이 요새 지하에는 많은 감옥이 있었습니다. 아마 베드로도 이 감옥 중 한 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6절에 보면, 두 명의 군인이 베드로의 양 옆에서 지키고 다른 두 명의 군인이 옥문을 지킨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철통 경비에 대한 누가의 자세한 묘사는 베드로의 출옥이 얼마나 기적적인 사건이었는지를 극대화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수일간 투옥 되어 있는 동안 예루살렘 교회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놀랍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야고보처럼 순교의 제물이 될 텐데, 베드로는 어쩌면 그렇게 태평하게 자고 있습니다(6).

바로 이 순간 베드로를 구출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저자는 베드로의 구출 작전을 주목을 끌기 위해 ‘보라’(7)라는 구절을 사용합니다. ‘보라’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모두 34회 등장하는데, 독자들의 주목과 관심을 끌기 위한 표현입니다. 독자들에게 이제 곧 일어날 일을 주목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자 캄캄한 지하 감옥에 빛이 비쳤습니다(7). 이때 베드로를 감시하던 군사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침묵합니다. 그를 감시하던 군사들이 베드로의 행방이 대해 큰 소동이 있었다는 18절의 기록을 보아 이들은 갑작스럽게 잠에 빠져 있다가 날이 샌 후에야 비로소 깬 것으로 보입니다.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에게 ‘옆구리를 쳐 깨워’라는 표현합니다. 미루어 보건대, 베드로는 이튿날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걱정하기는커녕 천하태평하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천사의 지시를 따르면서도 지금 일어나는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주의 천사를 통해 옥에서 구출 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행 5:18-20). 하지만 너무나 놀라운 시간에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기에 자신도 쉽게 믿기 어려웠습니다. 천사가 자신을 구출하는 것을 환상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9). 그가 시내로 통하는 철문 앞에 도착하자 놀랍게도 문은 자동문처럼 저절로 열렸습니다(10). 베드로가 옥에서 완전히 벗어나 시내의 거리 하나를 지나자 천사가 즉시 떠나갔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실제 상황임을 깨닫고, 베드로는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11)라고 고백합니다.

(3) 베드로가 탈옥 사실을 알림(12-17)

기적적으로 옥에서 탈출한 베드로는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는 마리아의 집으로 갑니다(12). 누가는 이 집 주인의 이름을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로 소개합니다(12). 학자들은 이 사건을 비롯해 초대교회의 여러 이야기들의 출처가 바로 이 장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1장에 나오는 다락방도 이 마가의 어머니 집의 다락방일 것이라 추론합니다. 마가는 곧이어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전달하고 안디옥으로 향할 때 그를 데리고 오는 장에서 다시 등장합니다(25). 이 집은 아주 큰 대문과 작은 정원과 같은 앞뜰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마리아의 집에 도착하니, 꽤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탈출하여 대문을 두드렸습니다. 마리아의 집에 문지기 역할을 했던 로데라는 여자 아이가 영접하려 나갔다가 그의 음성을 알아차렸습니다(13). 로데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문도 열주지 않고 집안 성도들에게 달려가서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고 외쳤습니다(13). 이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네가 미쳤다’고 성도들은 베드로의 탈옥을 믿지 못했습니다. 아마 베드로의 구출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데는 정말 베드로가 대문 밖에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15). 오히려 그들은 베드로가 맞다고 주장하는 로데의 말을 부정하면서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베드로의 천사일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사람마다 각자의 수호천사가 하늘에 존재한다고 믿었던 민속 신앙을 반영합니다(참조. 마 18:10). 당시 유대인은 수호천사들이 각기 보호하는 사람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일부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즉시 그 사람의 수호천사가 나타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베드로의 수호천사가 그의 곁에 있지 않고 문을 두드리고 있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집안에서 이렇게 실랑이가 일어날 때 베드로는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16). 로데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했는데, 그녀의 말이 사실로 드러난 것입니다.

집안에 들어온 베드로는 손짓하여 놀란 사람들을 조용하게 한 후,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옥에서 건져 내셨는지 상세하게 설명했고, 베드로는 이 사실을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알려 주라고 하면서 다른 장소로 급히 피신했습니다(17). 여기서 나오는 ‘야고보’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를 말합니다. 그는 베드로, 요한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3대 기둥 가운데 하나였습니다(갈 2:1-10). 예수의 부활에 관한 목격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고전 15:7). 그는 이른 시기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되었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베드로를 대신해 수장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경건한 삶으로 인해 심지어 믿지 않는 유대인에게도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의장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행 15장). 그는 사도행전 12장 이후부터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지도자로 등장합니다.

베드로의 구출 사건은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교회에 관한 마지막 기록을 장식합니다. 모여서 기도하던 성도들은 베드로의 구출 사건을 야고보와 형제, 즉 장로들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에게도 전함으로 과연 주님께서 주권적인 섭리에 따라 그의 교회와 종들을 보호하셨음을 확인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순교를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 할 일이 많은 베드로를 살려 주심으로 교회에 큰 위로와 안위를 허락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유일하게 남았던 베드로가 다른 곳으로 갔다는 언급은 사도행전 후반부의 기록이 더 이상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합니다. 이제 13장부터 저자는 안디옥 교회와 바울을 중심으로 초대교회 선교 사역 이야기를 전개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는 위기와 어려움에 노출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오더라도 복음의 길 위에 서 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길을 여시고 새 길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막연한 믿음이 아닌 믿음의 좌표가 분명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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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3-01)


우리의 참된 목자

예레미야 231-8


 

어떤 목자를 만나냐에 따라 양의 생명과 행복은 달려 있습니다. 악한 목자를 만나면 양은 불행해지고, 선한 목자를 만나면 행복하고 평안해집니다. 이처럼 한 나라의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좋은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리면 백성들이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하지만 악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매우 힘들어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장 선한 목자입니다.

 

22장에서는 유다 왕들의 실패와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양 무리를 돌아보지 않는 다윗 왕조가 멸망하고 백성들은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졌지만, 그것이 여호와의 계획이 최종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친히 세우신 한 의로운 가지를 등장시키십니다. 하지만 선지자와 제사장의 악행은 성전에서도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패역한 목자들에 심판 선언(1-2)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숨까지 희생하고 헌신하실 수 있는 참된 목자는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그분으로 인해 저주와 심판의 위기에 놓여 있던 백성은 꼴이 풍성한 목장에서 번성하고 창대하게 되어 온 땅에 가득할 것입니다. 누구나 목자를 필요로 합니다. 의롭고 올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할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이 목자를 따를 때 비로소 안전하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하고 따를 때 우리 삶에 참된 만족이 찾아옵니다.

1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2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 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4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 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4)

하나님꼐서는 유다 백성을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내 목장의 양 떼라고 부르시는 백성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야 합니다.

목자의 심판(1-2)

예레미야의 경고는 당시의 목자인 왕들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왕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왕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 떼인 이스라엘 백성을 말씀으로 돌보고 가르쳐야 했지만, 오히려 고통을 주고 흩어지게 했습니다(1-2). 악한 목자로 인해 양 떼가 고통을 받은 것입니다.

양 떼의 구원(3)

패역한 목자 대신에 친히 하나님께서 양 떼를 모으실 것입니다. 이 백성들을 위해 패역한 목자를 폐하시고, 선한 목자인 새 지도자를 세우실 것입니다. 흩어진 양 떼를 다시 모아 그들을 돌보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다시 번성할 것입니다. 또한 양 무리의 안전과 평안은 하나님이 세우실 목자들을 통해 기대할 수 있게 됩니다.

새 목자들(4)

선한 목자는 악한 목자와는 달리 양 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돌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선상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15:11-15)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서 다시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참다운 목자들을 세워 이 회복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하나님은 자기 양 떼를 사랑하는 목자장이십니다. 양 떼를 볼보지 않는 악한 목자를 폐하시고 선한 목자를 세우십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당신은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가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할 구원자(5-6)

우리는 리더십의 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제왕적이고 탐욕적인 지도자들은 퇴출되고, 섬기는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들이 세워집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거대한 파도처럼 삯꾼을 쓸어갑니다.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은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진정한 섬김을 보이는 리더십입니다.

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5-6)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양 떼를 다스릴 영원한 침목자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완전하신 참목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불성실한 목자들처럼 불완전하지도 실패하지도 않으십니다.

정의와 공의의 통치(5)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의로운 가지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를 통한 회복의 날이 임하면 슬기로운 통치 가운데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며, 나아가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이 왕이 오면 유다와 이스라엘이 회복되며 사람들은 이 왕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왕이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를 세상에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이 왕은 이전의 불의한 왕들을 대체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대변합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열방으로 흩어진 그의 백성을 다시 모으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유다의 구원(6)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약속하심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집안에서 의로운 가지(메시아)를 일으켜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나라를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의로운 가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새로운 출애굽(7-8)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의 결박에서 풀어 주십니다.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좌절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붙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비록 벌을 받아 뿔뿔이 흩어질 것이지만, 다시 모아들이고 회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7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지니하고 8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아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7-8)

새로운 출애굽을 선포하는 이 단락은 주제에 있어 3절에 연결됩니다.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8)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3)은 히브리어로는 동일합니다.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의 귀향을 두 번째 출애굽으로 선포합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한 출애굽 사건이 미래에 있을 해방 사건의 모형이 됩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을 내쫓으셨던 하나님께서 이들을 다시 가나안으로 불러 모으십니다. 이 새로운 출애굽은 과거 출애굽의 반복이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회복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더는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맹세하지 않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맹세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사의 핵심에 속했던 출애굽 사건이 미래에 있을 새로운 출애굽 사건에 의해 대체됩니다. 새로운 출애굽은 그 범위에서 첫 번째 출애굽을 압도합니다. 애굽에 한정된 구원사의 범위가 바벨론을 포함한 모든 나라로 확장됩니다. 여호와께서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유배살이 하는 이스라엘을 다시 가나안으로 데리고 올라와 고향에 살게 하십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과 유다의 멸망과 유배는 출애굽 사건으로 시작된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파탄에 직면했음을 함축하기에(16:10-13) 출애굽 사건에 상응하는 새로운 구원행위가 요청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듯이, 앞으로 있을 바벨론으로부터의 해방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이스라엘의 미래 역사가 출 바벨론으로 시작됩니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놓인 유다 백성에게 소망의 메시지가 선포되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통해 백성을 죄에서 자유케 하고 온전히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선하고 의로운 목자이신 주님을 따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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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2-03)


이스라엘의 불행한 미래

예레미야 22장 20-30절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을 일컬어서 ‘습관(習慣)’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순종하는 습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주 좋은 습관입니다. 그렇기에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 불순종을 반복하면 그것도 불순종의 습관이 됩니다.

 

유다 왕 여호야긴의 운명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요시야의 아들 살룸(여호아하스)은 애굽에 포로로 끌려가 거기서 죽을 것이며, 탐심을 품고 압제와 강포를 일삼던 여호야김도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져 짐승같이 매장될 것입니다.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유다의 왕들이 포로 신세로 이방 땅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예루살렘의 운명(20-23)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는 심판 밖에 없습니다. 불순종이 습관이 된 예루살렘은 바벨론으로 잡혀가 수치와 욕을 당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통치자인 고니야(여호야긴) 왕 역시 불행한 미래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요시야의 큰 아들이었습니다.

20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라 21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22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켜질 것이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 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 때문에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23레바논에 살면서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이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20-23)

과거에 유다 왕 여호야하스(살룸)이 애굽으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다윗의 위를 계승한 유다 왕들이 폴 신세로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선지자는 예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들에 대한 메시지 중간에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가혹한 심판을 받아서 예루살렘을 향한 통곡이 있을 것을 예언합니다.

⑴ 탄식(20)

하나님께서 청자인 예루살렘에게 ‘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 주변에 높은 산들인 레바론(북쪽)과 바산(동쪽)과 아바림(남쪽)에 올라가서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높여 탄식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탄식하게 된 이유가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은 우상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정치·군사적 동맹국들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에게 협조를 맹약했던 주변 나라들이 바벨론에 모두 멸망하고 예루살렘은 고립무원의 절망적 처지에 놓입니다. 유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떨어졌지만, 어디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습니다.

‘레바논’은 팔레스틴 북쪽 산악 지대로 그 정상은 해발 3000미터가 넘었습니다. 요단 동편의 아르묵 강 상부와 중부의 해발 500-600미터에 위치한 지역으로 그 초지의 비옥함(아모스 4:1; 예레미야 50:19)과 상수리나무(이사야 2:13)로 유명했습니다. ‘아바림’은 사해와 요단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 모압 북쪽의 산악지대를 가리킵니다.

⑵ 책망(21)

하나님께서 유다를 향해 어조(語調)가 탄식에서 책망으로 바뀌면서 재앙이 닥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위기가 어느 날 갑자기 예루살렘에 닥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안할 때에’ 곧 아직 위기가 닥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셨지만, 예루살렘은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길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의존하기보다는 현실에 속하는 정치·군사적 동맹을 더 신뢰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불순종은 예레미야 시대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어려서부터’, 곧 하나님과 처음 관계를 맺은 직후부터 완강하게 그분 음성에 귀를 닫습니다(2:2; 3:24). 한마디로 예루살렘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불순종과 반역으로 점철된 길이었습니다(에스겔 16장; 23장).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아예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이 잘못된 습관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불복종이 초래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⑶ 위협(22)

하나님께서는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켜질 것이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 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 때문에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고 위협하셨습니다. 사나운 바람이 짚과 먼지를 단번에 날려버리듯이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심판의 바람이 예루살렘의 목자들인 지도자들을 모두 쫓아낼 적입니다.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켜질 것이요는 문자적으로 옮기면 네 목자들을 모두 바람이 (목장으로 데려가) 먹이리라입니다. 목자가 양 떼를 풀밭으로 내몰듯이 (심판의) 바람이 (궁궐에서 사치를 즐기며 권력을 휘두르던) 목자들을 (삶에 적대적인 거친) 들판으로 내몹니다. 네 목자들은 왕과 통치 계급에 속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너를 사랑하는 자들도 문맥에 의하면, 20절의 경우와 달리, 유다의 동맹국들보다는 예루살렘의 지배계급과 귀족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모두 심판의 바람에 내쫓겨 적들에 사로잡혀 유배를 떠납니다그 때에, 예루살렘은 자신이 저지른 온갖 죄악으로 인해 땅바닥에 떨어져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외간 남자에게 강제로 능욕 당하는 여자에 비유됩니다. 불순종의 필연적 결과로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당합니다.

⑷ 탄식(23)

하나님께서는 ‘레바논에 살면서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이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이렇게 탄식하십니다. 20절에서 예루살렘에게 높은 곳에 올라 큰 소리로 탄식하라고 명령하셨던 하나님께서 23절에서는 예루살렘이 겪게 될 고난을 탄식하십니다. 전자의 경우와 달리 여기의 레바논은 예루살렘의 비유적 표현입니다. ‘레바논에 살면서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건축한 집에 사는 자들로, 좁게는 왕궁에 사는 자들을 가리키지만 왕궁이 도성을 대표하기에 예루살렘 전체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임할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이라고 재앙의 극심함을 보여주는 비유적 표상입니다. 해산의 고통은 성경에서 가장 극심한 고통을 가리킬 때 사용한 말입니다. 진통 중인 여자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은 파국적인 재난에 직면해 신음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방어도 못한 채 멸망에 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릇된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경고를 하신 후에 심판하십니다. 유다 백성들도 곧바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전에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들어야 할 하나님의 경고가 있다면 그 경고를 듣고 순종해 가야 합니다.

 

고니야(여호야긴)에 대한 말씀(24-30)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하나님과 특별한 사이라 할지라도 버림받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헛된 신학을 만든 신학 안에 갇혀서 헛된 소망을 같지 말고, 하나님을 바르게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음 세상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25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26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27그들이 그들의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28이 사람 고니야는 천하고 깨진 그릇이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의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29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3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24-30)

이제 선지자는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에 대해서도 예언합니다. 이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멸망과 이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⑴ 여호와의 심판선언(24-27)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25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인장 반지’의 비유를 통해 여호와께서는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호야긴)의 유배가 반듯이 필연임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야긴이 하나님 오른손에 낀 ‘인장 반지’라 할지라도 그를 손가락에서 빼내어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다(24-25).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니야에게 내린 재앙의 예언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보여줍니다. 왕을 버리시기로 한 하나님의 결정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습니다. ‘인장’은 소유주의 현존과 문서의 권위를 확인하고 보장해 주는 도장입니다.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할 소중한 물건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인장은 목걸이처럼 줄 매달아 목에 걸거나(창세기 38:18) 팔찌처럼 손목에 두르거나(아가서 8:6), 또는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기도 했습니다. 본문은 후자의 인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는 여호와와 고니야의 특별한 개인적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13:11), 인장이 소유주의 가장 가깝고도 가장 귀한 사적 용품인 것처럼 고니야도 전적으로 여호와께 속한, 그리고 그분의 권위를 대표하는 유다의 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점적이고도 남다른 사적 관계가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 왕조를 특별히 선택하셨지만, 그 선택이 다윗 왕조에 주어진 영원한 면죄부는 아닙니다. 바벨론의 예루살렘 고니야의 항복과 유배는 불순종한 다윗 왕조를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에 속합니다. 주년 598∼7년 겨울에 예루살렘으로 원정을 떠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1월 중순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3월 중순에 유다 왕 고니야는 저항을 포기하고 성문을 일고 항복합니다.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바벨론 군대에 항복하는 것으로 고니 야의 고난이 끝나는 것은 아니 있습니다. 항복은 재앙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고니야와 그의 어머니 하무달은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비극적 삶을 마감해야 합니다(26,27). 열왕기하 24:12-16에 의하면 고니아와 그의 어머니와 신하들을 포함해 적어도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로잡혀 끌려갔습니다(52:28). 유배민은 가나아으로 돌아갈 날을 간절히 기다리겠지만,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합니다(29:14). 조상들과 함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방 땅에서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 땅이 아닌 이방 땅에서의 죽음은 그 뿌리로부터 완전히 잘려지는 저주받은 죽음입니다(창세기 49:29; 50:25). 26-27절은 유배당한 여호야긴을 여전히 유다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하고 그가 다시 돌아와서 유다를 재건해 주기를 기대하는 자들에게 헛된 소망을 버리라는 경고의 말씀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⑵ 예언자의 탄식(28-30)

예언자는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하고 깨진 그릇이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의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라고 탄식합니다. 여기서 고니야를 삼인칭으로 언급하며, 그의 소망 없는 운명에 관해 말하는 28-30절에서는 화자가 여호와에서 예언자로 바뀝니다. 의문문으로 된 28절은 아마도 고니야에게 소망을 두며 그를 기다리는 자들의 탄식을 인용한 말인 것 같습니다. 이들은 여호야긴이 깨어져 조각난 항아리처럼,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그릇처럼 이방 땅에 내버려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여호야긴의 유배를 기점으로 연대를 정하는 에스겔서의 예가 보여주듯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다윗의 보좌에 앉혀진 시드기야를 인정하지 않고 유배당한 여호야긴을 여호야김의 적법한 후계자로 간주하며 그의 귀환을 소망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고니야에게 소망을 두는 자들에게 예언자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도록 충고합니다. 고니야는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30a; 역대상 3:17-18)입니다. 고니야는 실패한 왕으로 이미 그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그에게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미래가 없습니다. 그의 후손 가운데서 다윗의 보좌에 앉아 유다를 통치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자식이 없겠고’와 ‘그의 자손 중’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서로 충돌합니다. 역대상 3:17-18에 의하면 고니야에게는 적어도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기에, 후자를 배경으로 전자를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유다 왕 고니야에게 아들이 있지만, 그의 아들 가운데 누구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지 못하기에 아들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남 유다는 외형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통해 불순종의 저주와 심판으로부터 피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피상적인 신앙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변화와 성숙을 향한 자기 훈련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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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2-02)

 


유다 악한 왕들의 결말

예레미야 22장 10-19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며, 그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다스릴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 감당하기를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나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악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좋은 영적 습관을 지니도록 노력합시다.

 

정의와 공의에 근거해 유다의 왕권을 포괄적으로 고발하고(21:11-22:9), 뒤이어 시선을 유다 왕 살룸과 여호야김과 고니야의 개별적 운명으로 돌립니다(22:10-30). 특히 여호야김의 불의한 통치를 그의 아버지 요시야의 의로운 통치와 대비하여 고발합니다.

 

살룸 왕에 대한 말씀(10-12)

축복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한 통치자를 세워 주셔서 형통함의 복이 임하게 하시고, 멸망의 시대에는 악한 통치자가 세워져 심판을 부르게 하십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축복의 시대를 만들어 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는 슬픔과 비극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왕들이 통치하는 나라에 심판과 멸망이 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10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 11여호와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 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가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2잡혀 간 곳에서 그가 거기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10-12)

이방 세력을 견제하고 다윗 왕조의 회복을 기대했던 요시야 왕이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주전 609년). 죽은 왕을 위해 애가를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의 전통이지만, 하나님은 요시야 왕을 위해 울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대신 애굽에 포로로 끌려가 결코 돌아오지 못할 살룸(여호아하스) 왕을 위해 슬피 울라고 하셨습니다.

(1) 예언자의 애도 명령(10)

주전 7세기 말엽 고대 근동의 정치지형도가 급격하게 요동쳤습니다. 주전 612년 바벨론이 메대와 연합하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하고, 주전 610년 앗수르의 마지막 왕 앗수르-우발리트 2세를 하란에서 쫓아냅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애굽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그 와중에 유다의 개혁 군주 요시야가 희생당합니다. 주전 609년 애굽 왕 느고는 바벨론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유브라데로 올라가고, 유다 왕 요시야는 므깃도로 내려갑니다. 요시야 왕이 어떤 이유나 목적에서 므깃도로 내려갔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다수의 주장에 따르면 애굽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역대하 35:20-24은 므깃도에서 애굽과 유다 사이에 전쟁이 있었음을 전제하고, 열왕기하 23:29은 바로가 요시야 개인을 사로잡아 죽인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요시야가 애굽의 느고에 의하여 므깃도에서 죽자 ‘백성들’(암하아레츠)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추대합니다. 두 살 위인 엘리아김 대신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가 후계자로 지명된 이유나 배경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시도는 가나안과 시리아의 통치권을 주장하는 애굽 왕 느고의 간섭으로 수포가 됩니다. 스물세 살에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의 통치(609년)는 삼 개월 만에 끝납니다. 애굽의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자신의 사령부가 있던 오론테스 강가의 립나(리블라)로 불러 감금하고 유다에는 막중한 배상금을 부과합니다. 여호아하스는 후에 포로의 몸으로 애굽으로 끌려가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습니다. 느고는 여호아하스의 자리에 그의 형 엘리아김을 앉히고, 그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꿉니다.

(2) 여호와의 말씀(11-12)

다윗 왕에 필적할 만한 평가를 받는 유다의 마지막 개혁 군주 요시야의 죽음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큰 슬픔에 빠뜨렸습니다(참조, 대하 35:24-25). 사람들은 울면서 요시야의 비극적 운명을 애통해하지만, 이는 재앙의 시작에 불과할 뿐입니다. 더 큰 상실과 슬픔이 유다의 몫으로 마련돼 있었습니다. 불행한 죽음이지만 고향땅에 묻힐 수 있었던 요시야의 운명이 살았지만 애굽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어 이방 땅에 묻히게 될 살룸(여호아하스)의 운명보다는 더 낫습니다. 이방왕에 의해 폐위되어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 땅에서 삶을 마감해야 하는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2)은 가까운 미래에 유다가 경험하게 될 비극의 전조에 해당합니다. 유다는 자신의 왕마저 지킬 수 없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살룸에 대한 말씀은 그의 귀환을 고대하던 자들에게 헛된 꿈을 버리라고 주는 권면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에 의해 왕위에 오른 여호야김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 특히 ‘땅의 백성’은 유배당한 왕이 돌아와서 요시야 왕의 질서를 다시 회복해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살룸이 이방 땅에서 죽을 것을 선언하면서 헛된 소망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합니다.

 

여호야김의 운명(13-19)

자신이 누릴 복에만 관심이 있고,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은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집중할 때 참된 영광과 형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호야김은 유다가 애굽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쳐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 영광을 누리려 했습니다.

13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4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15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6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18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19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13-19)

예레미야는 살룸 왕의 후계자인 여호야김 왕의 죄악에 대해 고발합니다. 여호야김 왕은 백성을 착취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궁전을 지었습니다. 이방 왕들과 마찬가지로 왕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탐심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그는 탐욕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가난한 자를 압제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은 목자와 같이 백성을 섬세하게 돌보는 왕입니다.

(1) 고발의 말씀(13-17)

자신의 왕궁을 증축하고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불의를 일삼는 여호야김 왕(주전 608-598년)에 대해 예레미야는 화를 선언합니다. 바로 느고의 선택에 따라 다윗의 왕위에 오른 여호야김은 애굽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을 뿐만 아니라(왕하 23:35) 자기가 살 왕궁을 확장하고 치장하기 위해 노동력을 부당하게 착취했습니다(13-14). 그는 품삯을 지급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노역장으로 끌어냈습니다(참조. 신 24:14-15). 좋은 나무로 크고 넓은 집과 누각을 짓고 화려하고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그 자체로는 특별히 책망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아무런 품삯도 주지 않고 사적인 일에 백성들을 임의로 부려 먹는 왕권의 남용입니다. 절대 권력을 주장하는 주변 나라들의 전제군주들처럼 유다의 왕이 제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백성을 종처럼 부렸습니다. 13절의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는 문자적으로 옮기면 ‘정의가 아닌 것으로 제 집을, 공의가 아닌 것으로 누각을 세우는’이 됩니다. 정의와 공의(참조. 22:3; 23:5)로 집을 세워야 할 왕이 솔선하여 불의와 부정으로 왕궁을 웅장하고도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한마디로, 여호야김은 정의 대신 ‘정의가 아닌 것’으로, 공의 대신 ‘공의가 아닌 것’으로 통치했습니다. 건축 사업에 강제 동원된 일꾼들을 지칭하는 ‘자기의 이웃’도 주목할 만합니다. 예언자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유다의 왕과 백성은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야 함에도 여호야김은 사유물처럼 백성을 착취했습니다. 백성은 왕의 이웃이지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는 그의 종이 아닙니다. 다락방에 낸 ‘창문’은 아마도 신하들의 알현을 받기 위해 뚫어놓은 창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15-17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여호야김(정의가 아닌 것과 공의가 아닌 것으로 통치한 왕)을 그의 아버지 요시야(정의와 공의로 통치한 왕)와 대비하여 엄중하게 책망하십니다.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억눌린)자들의 법적 권리를 보호해주며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산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값비싼 레바논 백향목으로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어 자신의 왕권을 과시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로운 통치를 본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통치자의 권위와 권력을 건축물의 웅장함과 화려함에서 찾았습니다. 15b절은 ‘네 아버지는 먹고 마시면서도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았느냐? 그때 그에게(모든 일이) 잘 되었느니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요시야는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면서도 왕으로서 누릴 것을 모두 누렸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며 의롭게 통치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일에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앎’은 인식행위에 속하거나 제의 규정의 준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사회·경제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것이 바로 여호와를 아는 자의 삶입니다(참조. 22:3). 요시야 왕은 여호와를 아는 삶을 살았기에 그분으로부터 축복을 받아서 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16). 아버지는 여호와를 아는 통치자의 삶이 어떠한 삶인지를 본보기로 보여주었지만, 아들은 제 마음의 결정에 따라 제 눈에 좋을 대로 행동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정의와 공의를 존중하는 대신에 폭력적이며 탐욕적인 공권력을 무기로 부정한 이익을 추구하며 비판자들을 억눌렀습니다(17; 참조. 왕하 24:4).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라도 짓밟거나 목숨을 빼앗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참조. 26:23).

(2) 심판 선언(18-19)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18-19절은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무시하고 제 이익을 위해 왕권을 사유화한 여호야김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심판의 내용이 두 가지로 언급됩니다. 첫째, 누구도 불의한 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곡하지 않을 것입니다(18). 다시금 아버지와 대비됩니다. 의로운 통치자 요시야가 죽었을 때는 많은 사람이 슬퍼하며 그를 위해 애도했지만(10), 그 아들의 죽음은 아무도 슬퍼하며 통곡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야김은 왕의 죽음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 영광’은 왕을 가리키는 존칭으로 ‘폐하’로 옮길 수 있습니다. 둘째, 여호야김에게는 왕에 합당한 장례가 없을 것입니다(19; 참조. 36:30). 그의 시신은 가족 묘지에 안장되지 못하고 나귀와 같은 짐승들의 주검처럼 예루살렘 성문 밖에 아무렇게나 버려질 것입니다.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는 모순어법(서로 모순되는 단어나 어구를 나열한 표현법)에 속합니다. 죽은 나귀는 내다 버리지 매장하지 않습니다. 여호야김의 주검은 나귀의 주검처럼 들판에 버려져 들짐승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세계는 정상적인 장례 절차에 따라 묘지에 묻히지 못한 죽음을 저주받은 자의 치욕적인 죽음으로 간주했습니다. 사적 이익을 위해 불의와 불법과 폭력으로 백성을 억압한 여호야김에게는 지하 세계에서의 영원한 안식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들을 세우시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10절에 죽은 자는 유다 왕 요시야로서 그는 선정(善政)을 베풀다가 애굽왕 느그 왕의 무기 또 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잡혀간 자는 요시야에 이어 살룸을 말하는데, 그는 왕에 오른지 3개월도 못 되어 애굽 왕 바로 느고에 의해 애굽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선정을 베풀다 죽은 요시야만을 그리워하며 애통하지 말고 악정을 하다가 잡혀간 요아스를 위하여 슬피울라고 하십니다. 이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의 문제를 어디 있는지를 깨달아 알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아름답게 살았어도 현재 제악된 생황을 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련제 하나님 앞에서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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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1-01)


시드기야에게 준 훈계와 경고

예레미야 21장 1-14절


이 세상 모든 인생은 종교가 어떠하든, 신앙이 어떠하든 간에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 되면, 누구든지 무엇인가를 향해 무릎 꿇고 기도나 기원하게 됩니다. 인생들의 마음속에 뿌리 깊은 이런 본능, 기도에 대한 본능은 누구나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도나 간구가 반드시 합당한 것도 아니고 또한 응답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참된 기도란 무엇이겠습니까?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포위됐을 때 유다 왕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묻는 이야기는 모든 세 번(21:1-10;37:17-21;38:14-28) 나옵니다.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다르지만, 예언자는 동일하게 멸망의 신탁을 전합니다.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운명은 이제 되돌릴 수 없게 확정됐습니다.

 

예루살렘과 시드기야의 운명(1-10)

재앙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얼굴을 돌리신 상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부재할 때 그 자비의 빛은 사라지고 무질서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배타적 사랑이 거절된 곳에 개인은 사라지고 유기와 방치의 참극이 발생합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긍휼은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까?

1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니라 2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 3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는 시드기야에게 이같이 말하라 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너희가 성 밖에서 바벨론의 왕과 또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과 싸우는 데 쓰는 너희 손의 무기를 내가 뒤로 돌릴 것이요 그것들을 이 성 가운데 모아들이리라 5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6내가 또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성에 있는 것을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후에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8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9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1-10)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포위되었습니다. 위급한 상황이 닥치자 비로소 시드기야 왕이 참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바스훌과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대적들이 떠나도록 간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⑴ 신탁을 묻는 시드기야(1-2)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포위당했을 때(주전 588년 1월에서 587년 7월 사이) 유다 왕 시드기야는 말기야의 아들 바스홀과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 제사장을 예레미야에게 보내 여호와의 신탁을 구합니다(1). 시드기야는 아마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실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라운 이적들이나 주전 701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에 의해 포위당했다가 기적적으로 구출 받은 예루살렘의 구원을(참조, 왕하 19:35-36; 사 37:36-37)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2). 왕은 예레미야가 거듭 파산을 선포한 구원사적 전통에 의지하여 위기를 극복해보려 애씁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의 바람을 여호와께서 들어주시길 기대합니다. 37:17-21과 38:14-28에서는 시드기야가 사로잡힌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불러 여호와의 의지를 묻습니다.

⑵ 예레미야의 답변(3-7)

시드기야 왕의 막연한 기대가 단호하게 거절됩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예루살렘의 파국적 멸망에 관한 신탁을 주십니다(3-7). 4절의 내용은 얼마간 모호합니다. 전투가 성 밖에 서 벌어지고 있음은 예루살렘이 완전히 포위당하지 않았음을 전제합니다. ‘너희 손의 무기를 내가 뒤로 돌릴 것이요’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성 밖에서 적들과 대치하고 있던 유다 병사들이 무기를 거두어 성안으로 도망하게 하시겠다는 말처럼 보입니다. 이 경우 그것들을 이 성 가운데 모아 들이리라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이 더 이상 항전할 수 없도록 이들의 무기를 거두어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셨던 여호와께서 유다의 대적이 되십니다. ‘강한 손과 편 팔’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던 여호와께서 ‘든 손과 강한 팔’로 당신을 배반한 예루살렘을 치십니다(5; 참조, 이사야 5:25; 9:12,17,21; 10:4). ‘든’과 ‘편’은 히브리어로는 동일합니다. 출애굽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위해 개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을 배반한 이스라엘은 출애굽 때 큰 재앙으로 징계를 받았던 애굽과 다름이 없습니다. 독립인칭대명사가 사용된 ‘내가’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에 의해 멸망당할 것을 한층 강조합니다. 같은 의미의 단어를 세 번 반복 사용한 ‘진노와 분노와 대노’는 여호와께서 얼마나 크게 노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격노하신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살아있는 것을 칼로 치시고 전염병으로 죽이실 것입니다(6). 생명이 있는 것들은 하나도 그분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물었던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의 운명을 따로 언급합니다(7). 성이 함락될 때 왕과 신하들이 재앙을 피해 탈출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어리석은 통치자들에게는 그런 행운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전염병과 칼과 기근을 피했을지라도 살았다고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예루살렘 성에 남은 자들은 모두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져 잔혹하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참조. 39:4-10; 52:1-16; 열왕기하 25:1-7, 18-21).

⑶ 예레미야에게 주신 신탁(8-10)

여호와의 의지를 묻는 시드기야에게 멸망의 신탁을 내리신 여호와께서 다시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어 백성에게 전하게 하십니다(8-10). 구원신학으로 무장한 정치적 단위로서의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로부터 사회적 단위인 그 구성원들을 구분합니다.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멸망은 확정된 운명으로 돌이킬 수 없지만, 그 주민에게는 선택의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습니다(8).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에게 넘겨주려는 여호와의 의지에 맞서 성안에 머물기로 작성한 자들은 칼과 기근과전염병으로 다 죽임을 당하겠지만, 그분의 경고에 따라 성을 떠나 포위하고 있는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하는 자들은, 병사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담보로 힘겹게 전리품을 얻어내듯이, 목숨은 구할 수 있습니다(9).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 불태워버리기로(52:13) 하셨기에 성을 떠나지 않는다면 성과 함께 타오르는 불길에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10). 예레미야의 선포에 따르면,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결정에 속하기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분 판의 도구인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곧 그분의 심판의지에 자신을 내맡기는 순종이 됩니다. 한마디로 바벨론에 항복한 자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자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심판(예루살렘의 함락과 다윗 왕조의 멸망)을 받아들이고 바벨론에 항복하여 개별적으로 목숨을 구하는 것이 새로운 출발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장나지 않고 바벨론 유배민들 가운데 계속될 것을 시사해줍니다(24:1-10)

 

훈계와 경고의 말씀(11-14)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진 곳에서는 문제의 심각성을 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불행도 올 수 없다’는 맹목적인 낙관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상태가 된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노아 시대처럼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영혼의 잠에 빠져 있습니다.

11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1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14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1-14)

여호와께서 유다 왕실에 말씀하십니다. 남왕국 유다의 말기를 통치했던 왕들은 하나같이 악하고 하나님에 대해 불의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을 욕되게 하고 화를 자초한 미련하고도 어리석은 왕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그들의 비참한 운명을 경고하시고 거듭 공의로운 삶을 촉구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 유다 왕들은 그런 하나님의 기대를 철저하게 저버리고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⑴ 왕실에 주는 말씀(11-12)

유다에게 임한 비극은 유다 왕가의 책임이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의 집’(11)과 ‘다윗의 집’(12)을 부르시고 등장시킵니다. 왕을 포함해 왕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이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다윗의 집’은 유다를 통치하는 다윗 왕가를 가리킵니다. 유다의 정치와 사회를 책임진 예루살렘 왕실과 고위관료들은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구해 주어야 합니다. 공정한 판결을 통해 약자의 권리가 강자에 의해 유린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어야 합니다. 공정한 재판과 사회적 약자의 보호는 왕권의 의무에 속하는 덕목이자 의로운 통치의 전제조건입니다. 권력과 부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흔들리는 판결은 공동체를 갈등과 분열에 빠뜨립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밝아오는 아침/새벽은 시편에서 자주 하나님의 보우심이 나타나는 시간으로 언급됩니다(시편 46:6;90:14;143:8). 사무엘하 15:1-6에 의하면 송사가 있는 사람들이 아침 일찍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옵니다. 왕과 그 측근들이 기본적인 의무를 등한시할 때, 이들은 아무도 끌 수 없게 타오르는 여호와의 진노의 물에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불의를 범한 통치자들을 반드시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⑵ 예루살렘에 대한 신탁(13-14)

여호와께서 지정학적 위치를 과신하는 예루살렘에게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아’(13a)는 ‘골짜기에 사는 자야, 평지의 바위야’로 번역한 것이 좋습니다. 방어에 유리한 천혜의 자연환경과 주전 701년 앗수르의 포위 공격에서 기적적으로 구출 받은 역사적 경험은, 교리화한 성전신학과 왕조시의 뒷받침을 받아, 통치자들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도 예루살렘 성은 난공불락이라는 허영과 교만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며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오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오!’하며 자만에 빠졌습니다.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나 매가 땅에 있는 먹이에 달려들듯이 그렇게 예루살렘을 침략할 자들은 없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와 달리 바로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을 택하신 여호와께서 이들의 대적이 되어 예루살렘을 공격하시기에 그 지정학적 장점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루살렘 주민의 자기기만과 교만에 여호와께서 불 심판으로 응답하십니다(14). ‘수풀’은 예루살렘 주변의 수목으로 울창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너희 행위대로’는 원문에 따라 ‘너희 행위의 열매에 따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악행이 재앙을 열매 맺듯이 예루살렘의 교만이 예루살렘을 불바다로 만듭니다. 여호와께서 ‘능히 끝 자가 없는’(12) 전쟁의 불로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을 완전히 폐허로 만드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교만에 빠진 예루살렘 주민의 악한 행실을 징계하시는 여호와의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작동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돌아서 계신 부재 상태를 경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오시도록 하는 기도와 순종이 요구됩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를 때에도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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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0-02)

 


모욕과 조롱을 이기는 힘

예레미야 20장 7-18절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하던 똑같은 감동을 통해 모든 말씀을 풀어 주시고, 말씀대로 살아갈 끈기와 믿음도 주시길 빕니다. 선지자가 가는 길은 평탄하지 않습니다. 수도 없이 탄식과 고통의 신음 소리를 바랄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게 하는 힘이 넘칠지도 뒤에서 나오겠습니까? 예레미야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선포하다가 조롱거리가 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께서 다시 자신을 회복해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강압적 간섭에 항의하지만, 그분께 대한 신뢰를 잃지는 않았습니다.

 

예레미야의 탄식(7-13)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하게 살려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조롱을 당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의뢰하고 찬양하겠노라 선언하며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7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11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2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13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7-13)

예레미야는 선지자인 자신이 성전 총감독에 의해 나무 고랑을 찼다는 것 때문에 큰 굴욕을 누꼈을 것입니다, 그가 전한 말씀이 회개가 아닌 저항을 일으켰고, 그 말씀 때문에 굴욕을 당한 일은 예레미야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마음의 상처를 탄식으로 쏟아 냅니다.

(1) 여호와께 항의하는 예언자(7a)

예레미야가 여호와께 격렬하게 따집니다. 여호와께서 꾀셨기에 그 꼬임에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합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너무 강하셨기에 자신이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여호와의 강압적 처사에 불만을 토로합니다.

(2) 조롱거리가 된 예언자(7b-8)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유다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고발하고 멸망의 심판을 선포한 예레미야에게 돌아온 것은 조롱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고 그를 조롱하며 거절하였습니다. 예레미야의 탄식에는 자신을 예언자로 불러 말씀을 선포하도록 보내셨던 여호와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향한 예레미야의 원망은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긴급한 개입을 촉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한 예레미야에게 가해진 치욕과 모욕은 그를 보내신 분에게 가해진 치욕과 모욕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어떤 식으로든지 응답하셔야만 했습니다.

(3) 예언자의 내적 갈등(9)

심판을 결정하신 여호와와 반역의 길로 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이에서 예레미야에게는 절망적 현실을 도피하거나 우회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선포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있는 그 무엇이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시는 예언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도 보지만, 뼛속 깊이 새겨진 여호와의 말씀이 그의 심장 속에서 불이 되어 타오르며 그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예언자적 사명을 포기해보려고 했지만, 강하신 분께서 강제하시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타오르는 불을 억누를 힘도 없고, 온종일 자신을 향해 던져지는 치욕과 비웃음을 이겨낼 힘도 없습니다.

(4) 역경 묘사(10)

예레미야는 자신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놓였는가를 여호와께 호소합니다. 폭력과 멸망(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에게 사람들이 똑같이 폭력과 멸망으로 응수합니다. 이들은 예레미야를 보며 저기 ‘마골밋사빕’'이 지나간다고 수군대며 조롱합니다. 바스홀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한 예레미야가 바로 ‘사방의두려움’이라며 그의 심판 예언을 조롱합니다. 이들의 적대 행위는 조롱과 비웃음에 머물지 않고 예레미야를 고발하려는 음모로 발전합니다. 이들은 서로를 격려해가며 예레미야를 법정에 세울 고소거리를 찾습니다. ‘혹시’는 이들이 아직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음을 시사합니다. 이들은 예레미야가 실족하기만을 기다립니다. 상황이 더욱더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예레미야의 친한 친구들마저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입니다(참조, 11:20-23; 12:6). ‘내 친한 벗’은 문자적으로는 ‘내 화평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화평(샬롬)은 겉모습에 불과했습니다. 친구라는 자들이 속으로는 예레미야가 낙담하고 실의에 빠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우리 원수를 갚자’는 예레미야가 선포한 재앙과 관련된 말입니다. 구속사의 정통 신학에 깊이 빠진 자들에게 예레미야의 심판 선언은 자신들을 향한 적대감의 표출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가 속으로 멸망을 바랐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재앙을 선포했다고 분노하면서, 그에게 보복할 기회만을 노립니다. 그러나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는 7절의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와 대조적으로 짝을 이루며 박해자들의 시도가 실패로 끝날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의 꾐에 넘어간 자는 사람의 꾐에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기신 자를 사람이 이길 수는 없습니다.

(5) 신뢰 고백(11)

예레미야는 홀로 남겨졌으나,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힘센 용사처럼 자신과 함께하심을 확신합니다(참조, 1:8,19). 용감히 적진을 내달리는 용사처럼 여호와께서 박해하는 자들을 무찔러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넘어질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이기어 원수를 갚으려는 자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영원히 잊히지 않는 큰 치욕을 당합니다.

(6) 보복 간구(12)

왜냐하면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셔서 예레미야의 사정(송사)을 판결해주시고 보복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참조, 11:20). 보복 요청은 감정적 한풀이가 아니라 왜곡된 법질서를 바로잡아달라는 사법적 호소에 속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7) 찬양으로 초대(13)

그는 청자 ‘너희’에게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신’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권면합니다. 아직 고난 중에 있지만, 그는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악한 자들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을 미리 경험하고 이를 공동체와 함께 나눕니다. 예레미야 개인의 탄식과 구원이 공동체가 경험해야 할 탄식과 구원으로 그 지평이 넓어집니다.

 

절망하는 예레미야(14-18)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는 불경건한 세상 속에서 이런 고통과 굴욕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르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세상에서 고통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해야 할 고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감당해야 할 고통입니다. 사명자는 그 고통을 피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김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갈 수 있습니다.

14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16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17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18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14-18)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욥은 자기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굴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였던 예레미야도 욥과 마찬가지로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고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생일 저주(14)

모든 것이 충격적입니다. 욥기 3:1-12에서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있지만, 예언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합니다. 예언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출생의 기쁜 소식을 자기 아버지에게 전한 사람을 저주할 수 있습니까? 소명 체험을 한 자가 어떻게 자신은 세상에 태어나지말았어야 하는 존재라고 하면서 절망할 수 있습니까? 공동체를 자신의 구원 경험에 동참하도록 초대한 자가 어떻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수 있습니까? 독자는 본문에서 예언자적 소명과 사명의 희미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곧 절망의 심연에 빠져 삶을 포기한 한 인간을 만납니다. 본문은 짙은 어둠에 사로잡혀 절망하는한 인간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가 처절한 절망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에게 여호와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충격과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2) 소식 전달자 저주(15-16)

넓은 문맥에서 보면 14-18절은 특히 18절에 의해 예레미야의 소명 기사(1:5-10)에 연결됩니다. 1:5에서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라고 말씀하셨다.

(3) 저주의 이유(17)

그러나 지금 예레미야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셨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여호와를 절망적으로 원망합니다(17). 이는 출생을 중심으로 여호와의 부르심과 예언자의 실존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탄식(18)

특이하게도 예레미야의 탄식은 20장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21장 이후의 예레미야는 다시는 탄식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까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예언자의 직분을 감당합니다. 탄식과 관련한 예레미야서의 이런 구조가 그저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삶의전환점을 20:14-18에서, 특히 17-18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절망의 심연에서 사람들로부터 저주받은 자로, 곧 ‘고생과 슬픔’을 보며 사는 것이 출생 전에 자신을 예언자로 성별하신 여호와의 의도임을 극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삶에 놓인 고난의 깊이와 신비를 헤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듯합니다. 이제 그는 21장 이후에서 사람들의 조롱과 치욕과 박해를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주신 몫으로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나무 고랑을 찬 것에 굴욕을 느꼈습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다시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극한 갈등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며 원수에게 복수하시며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말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더욱 신뢰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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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0-01)


목이 곧은 자들에게 임하는 재앙

예레미야 19장 14절 – 20장 6절


교회를 섬기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삶이 전혀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것은 직분을 받은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매일매일 삶을 똑같이 반복하며 그런 모습을 보곤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목사님들에게 수십 년 동안 설교를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변하지 않느냐는 갈등을 줍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자기 삶에 들어오게 하려면, 자기 생각, 요구, 가치관 그리고 주장을 말씀 아래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자신을 십자가 아래 부인하지 않고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구입하라고 했던 오지병을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일부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한 예레미야가 성으로 돌아옵니다. 이번에는 모든 백성이 듣도록 성전 뜰에서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토기장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실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유다 성읍은 몰렉에게 제사 드리던 도벳 땅처럼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의 선포(14-15)

하나님께서 심판을 앞둔 백성에게 선지자를 통해 반복해서 그들의 죄와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죄를 깨닫고 거룩한 길로 다시 돌이키기를 바라시는 사랑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비해 엎드려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4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15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14-15)

유다 백성이 재앙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는 목을 곧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이 가증한 죄로 언약을 깨뜨릴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 악한 길에서 돌이킬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1) 여호와의 집 뜰(14)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도벳으로 내려가 일부 증인들 앞에서 옹기를 깨뜨립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재앙을 선포한 후에 다시 성으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14). 성전에서 선포하는 말씀(15)은 내용적으로는 도벳에서 선포한 말씀과 동일합니다. 특히 3b절의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의 반복입니다. 여기서도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재앙을 선포합니다. 이 이름은 예루살렘 제의에서 사용하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주장하는 성전 신학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예루살렘을 더럽힌 자들에게 심판자가 되십니다.

(2) 재앙의 이유(15)

도벳에서는 함께한 소수의 장로들과 고위 제사장들만 표적 행위와 심판 선언을 보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의 심판 선언을 듣습니다. 선포한 재앙은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숭배와 폭력을 행사한 주민들이 들어야 할 여호와의 말씀입니다(4). 청자의 범위가 넓혀진 것에 상응하여 심판의 범위도 ‘이곳’ 또는 ‘이 성읍’에서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으로 확대됩니다. 재앙이 예루살렘을 넘어 그 주변 마을들에도 임합니다. 고발의 초점이 예루살렘에 맞춰지지만, ‘여호와를 버림’에 있어 다른 지역도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재앙을 초래하는 죄악으로 앞 단락에서는 구체적으로 도벳의 어린아이 희생 제사(5)와 천체숭배(13)를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포괄적으로 ‘그들이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들지 아니함이라’라고 말합니다. 백성들의 불순종은 의지적이고 노골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전혀 무시하고 완악하게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바스홀과 예레미야(20:1-6)

지도자 한 사람이 바르게 행하면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으로 많은 사람이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성전의 총감독 바스홀이 예레미야를 핍박한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와 예루살렘을 향해 무서운 쟁앙을 선고하십니다.

1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3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4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5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6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1-6)

성전의 질서를 관장하던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성전 출입문 가운데 하나인 베냐민의 윗 문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인 성전을 하나님이 손수 파괴한다고 선포하니 아무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고, 사회 혼란만 야기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1) 바스홀 소개(1)

여로보암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유배를 선포하는 아모스를 침묵시키려고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나섰던 것처럼(암 7:10-13), 예레미야가 성전 뜰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자 예루살렘 성전의 고위당국자가 공세에 나섭니다. 예레미야의 예언 선포를 들은 임멜의 아들 바스홀이 그를 때리고 체포해서 구금합니다. 제사장 바스홀의 직분을 보여주는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은 성전과 그 주변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일의 총책임을 맡은 자로, 성전의 최고위층에 속했습니다. 성전 주위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기에 치안 유지가 중요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소란을 피우는 자들을 체포해 벌을 주는 것도 성전의 총감독에게 맡겨진 임무였습니다. 바벨론에서 예언자로 활동한 스마야가 제사장 스바냐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나오는 한 대목도 이를 잘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제사장을 삼아 여호와의 성전 감독자로 세우심은 모든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을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과 목에 씌우는 쇠고랑을 채우게 하심이어늘 이제 네가 어찌하여 너희 중에 선지자 노릇을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29:26-27).

(2) 예레미야의 구금(2)

예루살렘 성전을 대표하는 바스홀의 눈에 예레미야는 성전 주위에서 ‘예언자 행세하는 미친놈’에 불과했습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예레미야에게 모욕적인 징벌이 가해졌습니다. 바스홀은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두었다.’ ‘베냐민 문’은 성전 북쪽으로 면한 문이었고, ‘위층’은 베냐민 문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대에 위치했기에 붙여진 수식어입니다.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번역한 ‘마흐페켓트’가 어떤 형태의 체벌 도구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신체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도록 손이나 발 또는 목에 거는 막대기와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3) 마골밋사빕(3)

예언자를 사칭하는 자로 체포하여 체벌과 모욕을 가한 바스홀에게 예레미야가 예언자의 권위를 과시하며 반격을 가합니다. 아모스가 추방을 명하는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에게 주저 없이 멸망을 선언한 것처럼(암 7:16-17), 다음 날 풀려난 예레미야도 바스홀에게 특별한 심판 선언으로 단호하게 응수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홀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법이라 하시느니라.” 예레미야는 6:22-26에서 땅 끝 북방에서 내려오는 한 민족에 의해 시온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을 예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밭에도 나가지 말라 길로도 다니지 말라 원수의 칼이 있고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라”(25). 시온에 선포된 ‘사방의 두려움’이 이제 바스홀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됩니다. 성전의 치안과 질서를 대표하던 바스홀이 이제는 반대로 자신과 유다에 임하게 될 혼란과 두려움의 상징이 됩니다. ‘호루스의 아들’(바스홀)이 ‘사방에 두려움’(마골밋사빕)이 됩니다. 마골밋사빕으로 이름이 바뀐바스홀을 볼 때, 사람들은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들로 인해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될 유다의 운명을 예감하게 됩니다.

(4) 마골밋사빕의 해석(4-5)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마골밋사빕이 상징하는 바를 바스훌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바스훌이 그의 친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도 두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스훌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든 친구가 원수의 칼에 맞아 쓰러질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주기로 하셨으므로 어느 누구도 재앙을 피하지 못합니다. 모두 침략자의 칼에 엎드러집니다.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간다고 목숨을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자들은 그곳에서 칼에 맞아 죽습니다. 유다는 백성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애써 모은 재물도 모두 빼앗깁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바벨론 침략군의 손에 넘겨주십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재물과 유다 왕들의 보물이 약탈당해 바벨론으로 옮겨집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폐허가 됩니다. ‘바벨론 왕’과 ‘바벨론’은 4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했던 북쪽에서 내려오는 대적의 정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이사야 시대에 반역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앗수르의 손에 넘기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바벨론을 불러 당신께 등을 돌린 유다를 혹독하게 심판하십니다.

(5) 바스홀과 동료의 유배(5)

바벨론 침략군에 의해 친구들이 죽임당하는 것을 보는 것은 바스홀에게 닥칠 재앙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바스홀은 자신의 집안 사람들과 함께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거기서 죽고 거기에 묻힙니다.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추방당한 것입니다. 고향에서 조상들과 함께 마지막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더러운 이 방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바스홀의 저주받은 운명은 그의 모든 친구에게로 확대됩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유배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들’도 바스홀과 같은 운명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마도 유다 백성이 평강과 구원을 선포한 거짓 예언자들을 지지하고 후원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러한 심판의 말씀을 선언했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이 죄에서 떠나지 않아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멸망당하리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심히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많은 사람이 거부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에 생명의 길이 있기에 쉬지 말고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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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9-01)


깨어진 항아리가 주는 교훈

예레미야 19장 1-13절


우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을 한두 번 정도는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의미는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엄청난 일을 만났을 때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불순종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경고의 매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매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때려지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오랫동안 하나님께서는 수없이 경고하시고 혼내시고 기다리시다가, 결국 영원히 버려지지 않도록 그들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사랑의 매를 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예루살렘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항아리를 사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의 장소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에게 항아리를 깨트려 보여주시면서 예루살렘의 운명을 선명하게 제시합니다.

 

여호와의 실행명령(1-2)

쏟아진 물을 담을 수 없는 것처럼 깨진 옹기를 다시 붙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깨진 옹기 비유를 사용해 유다 백성이 돌이킬 수 없는 패역한 지경에 이르러 재앙이 반드시 임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목을 곧게 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재앙의 심각성을 깨달아 하나님 앞에 겸손한 지혜를 지닌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1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2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에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1-2)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목을 곧게 하고 예언의 말씀을 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다양한 방법으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는 예레미야에게 명하셔서 유다 백성 앞에서 옹기를 깨뜨리며 심판을 선고하게 하십니다. 최후통첩과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패역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호소를 들을 수 있습니다.

(1) 옹기 구매(1)

여호와의 명령이 예레미야에게 주어집니다. ‘토기장이의 옹기를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과 하시드 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라.’ 여호와께서 가지고 갈 물건과 동행자들과 목적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옹기’는 진흙을 구워 만든 액체를 담는 병이나 항아리로, 충격이 가해지면 쉽게 조각조각 깨졌습니다. ‘백성의 어른들’은 사회적·정치적 권위를 인정받은 공동체의 어른을, ‘제사장의 어른’은 높은 지위에 속한 제사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종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예레미야와 함께합니다.

(2) 선포 장소(2)

‘하시드 문’은 ‘질그릇 조각 문’으로, 토기장이들이 파손된 토기를 내다 버리던 곳이 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물을 구하기 쉬운 곳에 토기 공장이 모여 있었기에 기드론 골짜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심판 선고와 그 근거(3-9)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무섭게 벌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유 없이 벌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렇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를 잘 알려 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저지른 악한 죄가 무서운 재앙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 심판 받을 만한 행동을 하고 있진 않습니까?

3말하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 4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 곳을 불결하게 하며 이 곳에서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 곳에 채웠음이며 5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6그러므로 보라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죽임의 골짜기라 부르는 날이 이를 것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7내가 이 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무너뜨려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8이 성읍으로 놀람과 조롱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으로 말미암아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조롱할 것이며 9그들이 그들의 원수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빠질 때에 내가 그들이 그들의 아들의 살, 딸의 살을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살을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3-9)

하나님께서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곳에서 유다 백성이 바알을 숭배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고, 산당을 건축했을 뿐만 아니라 아들들을 바알에게 불살라 번제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낱낱이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못 보시는 것처럼 행할 때가 많습니다.

(1) 재앙 선포(3)

옹기의 표적 행위가 일시적으로 중단되고, 심판의 말씀이 선포됩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징벌하시기로 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결정을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전합니다. 청자로 예레미야와 함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는 자들이 아니라 왕실에 속한 자들과 예루살렘 주민이 등장합니다. 소수 사람이 목격하는 표적 행위(10)와 달리 여호와의 결정은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메시지는 청자의 심적 반응 묘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재앙의 혹독함과 철저함을 말합니다.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그것을 듣는 모든 자의 귀가 떨리니”(3). 엄청난 재앙이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멍멍해집니다.

(2) 재앙 선포의 이유(4-5)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재앙을 내리실 때는 물론 이유가 있었습니다(4-5).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숭배와 폭력으로 예루살렘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불결하게 하며’는 ‘낯설게 하며’의 뜻으로, 곧 여호와께서 택하신 예루살렘이 그분께 낯선 곳이 됐습니다. ‘자기와 자기 조상들과 유다 왕들이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워’ 예루살렘을 여호와의 눈에 이방 도성으로 만들었습니다. 우상숭배와 사회적 폭력은 배교의 두 모습입니다. 여호와를 버린 자들에게 그분 말씀에 순종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라”(7:6-7). 이러한 여호와의 권면은 예루살렘에서는 낯선 말이 됐습니다. 우상숭배의 한 예로 어린아이 희생 제사를 고발합니다(참조, 왕하 16:3; 21:6; 23:10). 이는 특별한 경우에 행해지던 예외적 제사였지만, 그 가증스러움 때문에 여기에 언급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바알의 산당을 세우고 제 자식을 불살라 바알에게 번제물로 바쳤습니다. 뒤따르는 ‘이는 내가 명령하거나 말하거나 뜻한바가 아니니라’는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께 드려졌음을 시사합니다(참조. 7:31). 아마도 우상 숭배자들은 바알과 여호와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바알을 숭배하듯이 여호와를 섬겼던 것 같습니다. 에스겔 23:39 왕정 시대 말기의 예루살렘 사람들이 종교 혼합주의에 얼마나 깊이 빠져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이 자녀를죽여 그 우상에게 드린 그 날에 내 성소에 들어와서 더럽혔으되 그들이 내 성전 가운데에서 그렇게 행하였느니라.”

(3) 심판 선포(6-9)

우상숭배에 빠져 제 자식을 번제물로 드리기까지 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처참한 죽음의 심판을 선포하십니다(6-9: 7:32-34).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가 ‘죽임의 골짜기’로 바뀔 것입니다. 축복을 기대하며 제 자식을 제물로 드리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가 멸망과 죽음의 상징이 됩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도벳에서 가증한 짓을 즐긴 결과로 모두 죽임을 당합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예루살렘을 대적의 칼에 넘겨주실 것입니다. 왕궁의 통치자들이 이방 민족의 침략을 대비하여 병력을 강화하고 주변 나라들과 동맹을 맺으며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들의 대적이 되셨기에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파멸과 죽음은 전면적이고 치명적이어서 유다와 예루살렘에게는 최소한의 미래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시체가 매장되지 못하고 들판에 버려져 들짐승의 밥이 됩니다. 폐허가 된 예루살렘은 놀람과 ‘웃음거리’(휘파람)가 됩니다. 주변을 지나는 자들은 모두 처참하게 두들겨 맞은 예루살렘을 보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그들을 조롱하기도 합니다. 9절은 시간을 되돌려 포위당한 예루살렘 성의 절망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먹을 것이 바닥나자 굶주림에 눈먼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습니다(참조, 레 26:27-31; 왕하 6:24-31; 겔 5:8-10). 현재의 문맥에서는 5절과 연결됩니다. 제 아들들을 바알에게 불살라 번제물로 드렸기에, 적들이 성을 포위했을 때 예루살렘 사람들은 굶주림에 사로잡혀 제 아들의 살과 딸의 살과 이웃의 살을 먹어야 합니다.

 

표적 행위와 그 해석(10-13)

하나님께서 심판을 앞둔 유다 백성에게 선지자를 통해 반복해서 그들의 죄와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죄를 깨닫고 거룩한 길로 다시 돌이키기를 바라시는 사랑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비해 엎드려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0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리고 11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 12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이 곳과 그 가운데 주민에게 이같이 행하여 이 성읍으로 도벳 같게 할 것이라 13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10-13)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조롱거리가 되게 하리라고 선포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한 예루살렘을 보면서 놀라고 조롱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살면 결국에는 조롱거리로 전략할 수밖에 없습니다.

(1) 옹기를 깨뜨림(10)

10절은 1-2a절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에게 두 번째 명령이 주어집니다.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옹기를 깨뜨려라.’ 첫 번째 명령의 경우에서처럼 여기서도 명령의 이행에 관해서는 달리 보고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명령에 따라 함께 간 사람들 앞에서 옹기를 깨뜨렸음을 전제합니다. 뒤이어 여호와께서 표적 행위를 해석해주시며, 함께 간 자들에게 말하게 하십니다. 현재의 문맥에 따르면 해석의 말씀뿐만 아니라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선포했던 말씀도 예레미야와 동행한 자들에게만 알려집니다. 따라서 성으로 돌아온 예레미야는 성전 뜰에서 이를 다시 ‘모든 백성’에게 선포합니다(14-15).

(2) 완전한 멸망(11-13)

표적 행위의 해석은 분명하면서도 엄중합니다.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라”(11a).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바닥에 떨어져 부서진 옹기처럼 부수실 것입니다. 조각난 옹기의 수리가 불가능하다면, 여호와께서 부수시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의 회복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합니다.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이 도벳의 모티브를 활용해 비유적으로 기술됩니다(11b-13). 예루살렘 주민들이 제 자식들을 불살라 번제물로 바쳤던 도벳이 매장지가 됩니다. 묘지가 부족해 제의 장소인 도벳에도 매장해야 할 만큼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됩니다. 매장지로 바뀌는 도벳은 우상이 생명 없는 시체에 불과함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생명이 없는 우상을 섬긴 대가로 그들은 생명을 잃습니다. 여호와의 심판은 물론 도벳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이 시체로 더럽혀져 공동묘지가 된 도벳처럼 됩니다. 13절은 예루살렘이 도벳처럼 되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성 밖 도벳에서는 제 자식을 번제물로 불살라 드렸고, 성안에서는 하늘의 만상에 향을 사르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었습니다. 성 밖이나 안이나 온통 우상들로 가득했습니다. 천체 숭배의 주체로 나오는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은 숭배의 장소와 관련한 표현입니다(참조․ 32:29; 습 1:5). 천체 숭배는 주로 밤에 평평하게 만든 지붕 위에서 거행됐습니다. ‘하늘의 만상’은 의미론적으로 ‘만군의 여호와’에 연결됩니다. ‘만군’과 ‘만상’은 각각 ‘군대’를 의미하는 ‘차바’의 명사 복수와 단수 형태에 해당합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섬겨야 할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왕들이 황당하게도 여호와께서 당신의 군대로 창조한 별들을 섬겼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이 죄에서 떠나서 않아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멸망당하리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심히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많은 사람이 거부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에 생명의 길이 있기에 쉬지 말고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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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8-02)

 

 


예레미야 암살 음모와 심판 호소

예레미야 18장 13-23절


사람들은 배은망덕한 자를 동물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비난합니다. 동물도 주인을 알아보며 배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을 배신한다는 것은 세상에서도 손가락질받는 패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바로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본문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분노를 막기 위해 유다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경고를 유다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엄중한 경고를 무시하고 완악하게 행동하는 이스라엘의 형태에 여호와께서 절망하십니다. 여호와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잊고 우상숭배에 빠져 명망의 길만 찾아갑니다. 이제 유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유다 배반과 그 결과(13-17)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다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떠나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며 죄를 짓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것을 너무 쉽게 ‘그럴 수도 있지’라면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13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지 여러 나라 가운데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14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15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들의 길 곧 그 옛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하게 하여 16그들의 땅으로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 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리라 17내가 그들을 그들의 원수 앞에서 흩어 버리기를 동풍으로 함 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13-17)

하나님께서는 레바논 산의 자연현상을 들어 유다 백성들이 저지른 짓이 자연의 이치에도 맞지 않으며, 다른 나라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끔찍한 죄악임을 고발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헛된 우상에게 분향했으며, 넓고 좋은 길을 버리고 샛길로 갔습니다. 그러한 일들에 고발합니다.

(1) 고발(13-15a)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일을 이스라엘은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행했습니다. 악함에 있어 이스라엘에 비교하면 다른 민족들이 초라하게 비칠 정도였습니다. 여호와마저 이스라엘의 ‘심히 가증한 일’에 놀라십니다(13). ‘이러한 일’은 여호와를 잊고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것을(15a)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행태가 얼마나 황당한지를 창조 질서에 속하는 주변 자연현상과의 비교를 통해 고발합니다(14). 레바논 높은 산들의 정상을 덮고 있는 눈이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마를 수 있겠습니까? 레바논의 만년설이 녹아 사라져버리거나 요단강에 물을 공급하는 헤르몬산의 수원이 고갈되는 일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습니다. 자연도 창조주께서 정한 질서에 순응하여 사는데 이스라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백성이라면 그분께 속해 그분을 섬기는 것이 마땅함에도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잊고 우상에게 분향했습니다(15a). 레바논의 만년설도 정상을 떠나면 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요단강도 헤르몬 산의 수원을 벗어나면 마를 수밖에 없음을 알고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생수의 근원’ 되시는 여호와를 버리고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2:13)에 불과한 우상을 따랐습니다. ‘허무한 것’은 원래 ‘아무것도 아닌 것’, ‘실체가 없는 것’, ‘재앙’을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섬기는 자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2) 우상숭배의 결과(15b-16)

눈이 레바논 정상을 떠나면 녹아 사라지는 것처럼. 요단강이 헤르몬 산의 수원을 떠나면 마르는 것처럼, 여호와를 잊고 헛것을 숭배한 이스라엘도 멸망과 죽임을 당합니다. 이스라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버리고 멸망으로 이끄는 길을 선택했습니다(15b). 원래 ‘좁은 길’을 의미하는 ‘곁길’은 배반한 이스라엘의 삶의 태도와 자세를 가리킵니다. 닦지 아니한 길은 어디로 났는지도 모르는 위험스러운 길을 가리킵니다. ‘옛길’에서 순종의 광야 시대를 보기도 하지만(참조, 6:16), 병행하는 ‘그들의 길’은 이스라엘이 예전부터 걸어왔던 길, 곧 여호와께 등을 보인 반역의 길로 이해하게 해줍니다. 이스라엘은 조상 때부터 우상을 숭배하며 악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실족시킨 우상숭배가 더 나아가 이스라엘 땅을 폐허로 만듭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가나안이 귀신과 들짐승이나 사는 황무지로 변해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되고,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의 머리를 흔들게 된다’(16). 휘파람을 불고 머리를 흔드는 행위는 일종의 제의적인 방어 의식입니다. 폐허로 남겨진 지역에는 귀신들이 살았기에 그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은 이들의 갑작스런 공격을 피하기 위해 휘파람을 불고 불길한 세력의 영향력을 떨쳐버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3) 심판의 선고(17)

우상숭배의 결과를 기술한 다음에 여호와께서 직접 재앙을 선포하십니다(17). 요단 동편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건조한 ‘동풍’이 흙먼지를 흩날려버리듯이 여호와께서 직접 이스라엘을 그들의 적들 앞에서 흩뜨려버리십니다. 이스라엘이 곁길로 가면서 여호와께 등을 보인 것처럼 ‘재난의 날’에 여호와께서도 이스라엘에게 등을 보이시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십니다.

 

예레미야의 네 번째 고백(18-23)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올바른 말을 전하면 귀를 막습니다. 그리고 ‘너 말고도 말씀을 전할 자는 얼마든지 있다’는 태도를 취합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악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정확히 그러한 심판 받을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얼마나 배은망덕한지를 고발합니다.

18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 하나이다 19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20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유익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21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죽음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22주께서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뜨리려고 올무를 놓았음이니이다 23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옵시며 그들의 죄를 주의 목전에서 지우지 마시고 그들을 주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께서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하니라(18-23)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서 유다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비난하며 죽이려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입니다. 이에 분노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들을 벌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1) 탄식의 배경(18)

네 번째 고백은 적들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책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18). 적들은 이스라엘의 신학적 전통에 의지하여 예레미야에 맞서고,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밉니다. ‘꾀’와 11절의 ‘계책’과 12절의 ‘계획’은 모두 명사 ‘마하샤바’의 번역입니다. 자신의 계획대로 살아가는(12) 자들이 여호와의 계획을 선포하는(11) 예언자를 제거할 계획을 꾸밉니다(18). ‘혀로 그를 치고’는 아마도 말로 싸우자는 말 같은데 구체적인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그의 어떤 말에도 주의하지 말자’는 사회적 고립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하고 그를 하나님의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2) 결백 주장(19-20)

적들에 에워싸여 고립된 예레미야는 공의로우신 재판관 여호와를 찾아갑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적들의 고발을 듣고 판단해주시길 간구합니다(19). ‘돌아보사’와 18절의 ‘주의하지’는 ‘귀를 기울여 듣다’를 의미하는 동사 ‘카샵’의 다른 번역입니다. 예레미야의 적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자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를 조롱하며 그의 말을 무시하려 합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적들에 맞서 여호와께서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호소합니다.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자들이 곧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임을 시사합니다. 예레미야는 먼저 적들의 배은망덕을 고발합니다(20a). 저들은 선을 악으로 갚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냥꾼이 구덩이를 파놓고 짐승이 빠지길 기다리듯이 저들은 예레미야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적들은 또한 여호와를 증인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20b). 예레미야가 자신들의 멸망을 바란다는 저들의 주장이 거짓임은 누구보다도 여호와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에 심판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분노를 돌리기 위해 중보의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참조. 7:16; 11:14; 14:11; 15:1).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자들은 아마도 그의 심판 선언이 재앙을 바라는 그의 악한 마음을 반영한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설혹 여호와께서 심판을 결정하셨을지라도 이를 연기시키거나 취소시키기 위해 노력했어야 하는데, 속으로 멸망을 원했기에 그렇게 하지 않다고 예레미야를 고발했던 것 같습니다.

(3) 복수 간구(21-23)

자신의 무죄를 변호한 후에 예레미야는 적들에게 철저하게 보복해주시길 간구합니다.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 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넘기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죽음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주께서 군대로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21-22a). 예레미야는 선을 악으로 갚는 자들과 그의 가족이 모두 기근과 칼과 죽음(전염병)에 넘겨지기를 간구합니다. 또한 남자들은 모두 죽고 여자들만 살아남기를, 곧 대적의 완전한 멸망을 간구합니다. 피상적으로 보면 사적 복수의 간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레미야가 선포한 심판 메시지의 반복입니다. 다시 말해, 예레미야는 자신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한 심판이 그대로 이뤄지길 간구한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심판은 일차적으로는 여호와를 배반한 자들을 징계하는 사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한 참된 예언자임을 확인해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사냥꾼의 표상을 사용해 적들의 음모를 고발한(22b) 예레미야는 다시금 최고 재판관이신 여호와께 적들에 대한 보복을 호소합니다(23). 여호와는 적들의 계략을 속속들이 아시기에 박해당하는 자를 구해주시고, 또 박해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적들의 악과 죄를 용서하지 마시고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넘어지게 해달라는 간구도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의의 집행을 요청하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공의는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멸망을 통해 그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주께서 노하시는 때’에 예레미야의 적들은 심판받을 것입니다. 여호와 심판의 성취가 곧 예레미야가 간구하는 보복입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음모에 대하여 하나님께 탄식했습니다. 이제 백성의 중보자였던 예레미야가 백성에 대한 저주를 서슴치 않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자신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그 백성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음을 암시해줍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시도하는 그들에게서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같은 의문에 찬 기도는 유대 백성에 대한 개인적인 보복 감정이 아니라 그 땅에 공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불의가 패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승리하기를 기도하는 자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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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8-01)


주님의 날을 구별하는 자의 복

예레미야 18장 1-12절


실제로 우리 안에는 두 개의 왕국이 끊임없이 싸웁니다. 옛 사람은 끊임없이 내 임의대로 세상이 원하는방법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나라는 여전히 우리 속에서 가장 선하고 아름답고 안전한 길로 이끌어 가려고 하십니다. 이 전쟁 중에 온전한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복종해서 드리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토기장이의 집으로 갑니다.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를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관계에 적용해, 여호와의 절대주권을 특히 심판의 관점에서 선포합니다. 진흙이 토기장이 손에 있듯 이스라엘도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멸망을 예고한 민족일지라도 회개하면 그 뜻을 돌이키십니다. 그러나 유다는 멸망의 예언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토기장이(1-6)

우리의 인생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모든 일에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손에 우리의 인생을 전적으로 맡기고 그분 앞에 겸손히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통해 자신과 백성의 관계를 설명하셨습니다.

1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2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3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1-6)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거기에서 말씀을 들려주리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곧바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유를 묻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1) 여호와의 실행 명령(1-2)

3-4절에서 예언자가 관찰자로 등장하기에 때로는 이상이나 비유로도 이해하지만, 여기서는 변형된 형태의 표적 행위로 간주합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말씀을 기다리도록 명령하십니다(2). 물을 많이 사용하는 토기 공장은 물을 구하기가 비교적 용이 했던 예루살렘 성 남쪽이나 남동쪽의 골짜기에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참조 19:2).

(2) 예언자의 이행(3-4)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간 예레미야는 녹로에서 일하는 토기장이를 지켜본 것입니다(3). 한 손으로는 녹로를 돌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릇의 모양을 빗기에 처음 생각대로 잘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토기장이는 마음에 드는 그릇이 나올 때까지 작업을 되풀이했습니다(4). 관찰의 초점이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 맞춰집니다. 토기장이는 자기 눈에 드는 대로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진흙은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재료로, 토기장이의 생각에 따라 이런저런 그릇으로 만들어집니다.

(3) 여호와의 해석(5-6)

약속된 말씀이 토기장이의 작업을 지켜보는 예언자에게 주어집니다(5). 여호와께서 예레미야가 관찰한 내용을 신학적 비유로 해석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6)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그릇을 만들 듯이 여호와 께서도 이스라엘에게 똑같이 하실 수 있습니다. 만들다가 잘못되면 토기장이가 진흙을 다시 이겨 다른 그릇을 만들듯이 여호와께서도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거나, 더 나아가 버리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분 백성이기는 하지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진흙이 토기장이를 위해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선택이 이스라엘에게 구속사적 권리를 부여해주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백성으로 남을 때만 그분의 선택은 의무와 책임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귀한 베 띠라도 썩어서 쓸 수 없게 되면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참조. 13:1-11).

 

여호와의 주권과 민족들(7-10)

모든 일이 고정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구원을 포함한 모든 것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기로 작정하셨더라도 어느 민족이나 국가든지 악에서 돌이켜 진심으로 회개하면 그 뜻을 돌이키십니다. 그러므로 임박한 심판을 눈앞에 둔 유다 백성이 해야 할 일은 죄에서 돌이켜 철저히 회개하는 것입니다. 진흙은 토기장이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7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7-10)

하나님께서는 엄한 심판자가 아니십니다.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기로 하셨다가도 그들이 악에서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는 재앙을 가두시는 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궁극적으로 당신께 돌아와 참 생명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1) 회개한 민족의 구원(7-8)

심판에 초점을 맞춰 이스라엘에 적용했던 여호와의 절대주권이 내용적으로는 구원과 심판으로, 공간적으로는 민족들에게로 범위를 넓혀 보편적 가르침으로 주어집니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심판을 결정하시는 여호와는 마찬가지로 민족들의 심판과 구원을 결정하시는 분입니다. 여호와는 당신 결정에 따라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기도’ 하시고(7),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고 심기도’ 하십니다(9).

(2) 불순종한 민족의 징계(9-10)

그분의 통치권은 이스라엘의 울타리에 한정하지 않고 온 세상에 미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민족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민족들이 섬기는 우상들은 헛것이기에 이들의 운명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절대주권자로 땅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여호와만이 이들의 멸망과 구원을 결정하십니다. 물론 그분의 의지와 결정은 벗겨낼 수 없는 운명의 굴레는 아닙니다. 그분은 한번 결정이 내려지면 모든 것을 그 결정에 내맡기시고 냉정하게 눈을 감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의지와 구원 의지는 민족들의 반응에도 개방적입니다.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8),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10). 이스라엘의 회개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민족들의 회개에도 마찬가지로 응답하십니다. 이들이 죄에서 떠나 돌이키면 그분은 이들에게 내리기로 결정한 재앙에 대해 마음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의 구원이 무조건적이지 않은 것처럼 민족들의 구원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들이 그분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들에게 베풀고자 하셨던 복에 대해 마음을 바꾸십니다. 여호와는 사람을 권력으로 강제하지 않으시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있도록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의지에 일치하여 자기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십니다. 여호와의 의지와 목소리에 순종하느냐 또는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민족들의 구원과 심판이 결정된다는 본문의 말씀은 이론적·보편적 가르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민족들에게 여호와의 뜻과 결정이 계시된 것을 전제하는 본문에서 민족들의 구원과 심판에 관한 미래적 전망을 읽어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원래적 의도는 아닙니다. 현재 문맥에서 본문은 구속사적 특권을 주장하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구별하셨음이 분명하지만, 선택 신학, 언약 신학, 성전 신학, 또는 다윗 왕조 신학과 같은 신학적 전통이 면죄부처럼 작용해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로지 여호와께 순종하느냐 또는 불순종하느냐가 구원과 심판을 판단하는 결정적 요소입니다. 절대주권자이신 여호와께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은 악을 행하는 이방민족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구원 가능성의 상실(11-12)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릇을 만들듯이 하나님 또한 각 사람에 대해 그분의 선한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토기장이가 그릇이 원하는 모양으로 나오지 않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다른 그릇으로 만들듯이, 하나님 또한 그분의 백성을 향해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시며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사랑과 인내와 자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11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12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11-1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복을 주기로 계획하셨다가도 그들이 죄악의 길로 가면 복을 가두십니다. 복을 주신다 해도 그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할 것을, 오히려 그 복이 저주가 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든 우리에게 복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입니다.

(1) 회개를 요청하시는 여호와(11)

문맥의 순서에 따라 읽으면, 민족들의 구원과 심판에 관한 가르침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적용됩니다. 하나님 백성이 민족들이나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됩니다. 이스라엘이라 해서 다르게 취급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결정적이지, 종교적 전통은 이차적입니다. 여호와는 회개 요청이 이스라엘에 의해 거절될 것을 예레미야에게 미리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거절하는 이스라엘(12)

그러나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12) 하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재앙을 내리며’와 ‘토기장이’는 동사 ‘야차르’의 현재분사로 형태가 똑같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듯이 여호와께서 당신 계책에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릴 재앙을 만드십니다. 물론 그분의 심판은 7-10절이 말하고 있듯이 운명적이지 않습니다. 심판은 불순종에 대한 여호와의 징벌이기에, 이들이 악에서 돌이켜 행실을 바르게 하면 그분은 이들에게 내리기로 한 재앙을 거두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간절하고도 긴급한 회개 요청은 이들의 완악한 마음에 아무런 반향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이들은 여호와의 심판 의지를 단호하게 무시하고 오직 자기 계획을 따릅니다. 이들의 자기파멸적 행태가 구원 가능성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 것입니다. 회개하고 재앙을 피하라는 경고를 거절한 이스라엘에게 멸망 이외에 다른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의 문맥에서 이 단락은 1-6절이 주장하는 여호와의 절대주권에서 그분의 임의성 또는 변덕스러움을 보는 자들에게 주는 답변입니다. 어느 날 여호와께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베푸시던 여호와께서 변덕이 심해 심판자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 번 시도해도 그릇으로 잘 만들어지지 않는 진흙을 토기장이가 내버리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심판 의지를 알려주고 회개를 요청하셨지만, 이스라엘이 끝까지 돌아오길 거절하고 제 길을 갔기 때문에 재앙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떤 경우에도 멸망의 원인을 여호와에게서 찾거나 그 책임을 여호와께 돌릴 수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관자라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토기장이가 흙을 마음대로 다루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만들 듯이, 하나님께서도 온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며 주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주님 앞에 우리의 뜻대로 자기 주장할 것이 아니라 주의 뜻대로 살기로 결단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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