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예레미야(20-02)

 


모욕과 조롱을 이기는 힘

예레미야 20장 7-18절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하던 똑같은 감동을 통해 모든 말씀을 풀어 주시고, 말씀대로 살아갈 끈기와 믿음도 주시길 빕니다. 선지자가 가는 길은 평탄하지 않습니다. 수도 없이 탄식과 고통의 신음 소리를 바랄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게 하는 힘이 넘칠지도 뒤에서 나오겠습니까? 예레미야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선포하다가 조롱거리가 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께서 다시 자신을 회복해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강압적 간섭에 항의하지만, 그분께 대한 신뢰를 잃지는 않았습니다.

 

예레미야의 탄식(7-13)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하게 살려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조롱을 당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을 의뢰하고 찬양하겠노라 선언하며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7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11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12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13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7-13)

예레미야는 선지자인 자신이 성전 총감독에 의해 나무 고랑을 찼다는 것 때문에 큰 굴욕을 누꼈을 것입니다, 그가 전한 말씀이 회개가 아닌 저항을 일으켰고, 그 말씀 때문에 굴욕을 당한 일은 예레미야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겼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마음의 상처를 탄식으로 쏟아 냅니다.

(1) 여호와께 항의하는 예언자(7a)

예레미야가 여호와께 격렬하게 따집니다. 여호와께서 꾀셨기에 그 꼬임에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합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너무 강하셨기에 자신이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여호와의 강압적 처사에 불만을 토로합니다.

(2) 조롱거리가 된 예언자(7b-8)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유다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고발하고 멸망의 심판을 선포한 예레미야에게 돌아온 것은 조롱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고 그를 조롱하며 거절하였습니다. 예레미야의 탄식에는 자신을 예언자로 불러 말씀을 선포하도록 보내셨던 여호와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향한 예레미야의 원망은 다른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긴급한 개입을 촉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한 예레미야에게 가해진 치욕과 모욕은 그를 보내신 분에게 가해진 치욕과 모욕이기도 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어떤 식으로든지 응답하셔야만 했습니다.

(3) 예언자의 내적 갈등(9)

심판을 결정하신 여호와와 반역의 길로 가고 있는 이스라엘 사이에서 예레미야에게는 절망적 현실을 도피하거나 우회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선포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있는 그 무엇이 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시는 예언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도 보지만, 뼛속 깊이 새겨진 여호와의 말씀이 그의 심장 속에서 불이 되어 타오르며 그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예언자적 사명을 포기해보려고 했지만, 강하신 분께서 강제하시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타오르는 불을 억누를 힘도 없고, 온종일 자신을 향해 던져지는 치욕과 비웃음을 이겨낼 힘도 없습니다.

(4) 역경 묘사(10)

예레미야는 자신이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 놓였는가를 여호와께 호소합니다. 폭력과 멸망(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에게 사람들이 똑같이 폭력과 멸망으로 응수합니다. 이들은 예레미야를 보며 저기 ‘마골밋사빕’'이 지나간다고 수군대며 조롱합니다. 바스홀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한 예레미야가 바로 ‘사방의두려움’이라며 그의 심판 예언을 조롱합니다. 이들의 적대 행위는 조롱과 비웃음에 머물지 않고 예레미야를 고발하려는 음모로 발전합니다. 이들은 서로를 격려해가며 예레미야를 법정에 세울 고소거리를 찾습니다. ‘혹시’는 이들이 아직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음을 시사합니다. 이들은 예레미야가 실족하기만을 기다립니다. 상황이 더욱더 절망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예레미야의 친한 친구들마저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입니다(참조, 11:20-23; 12:6). ‘내 친한 벗’은 문자적으로는 ‘내 화평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화평(샬롬)은 겉모습에 불과했습니다. 친구라는 자들이 속으로는 예레미야가 낙담하고 실의에 빠지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우리 원수를 갚자’는 예레미야가 선포한 재앙과 관련된 말입니다. 구속사의 정통 신학에 깊이 빠진 자들에게 예레미야의 심판 선언은 자신들을 향한 적대감의 표출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가 속으로 멸망을 바랐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재앙을 선포했다고 분노하면서, 그에게 보복할 기회만을 노립니다. 그러나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는 7절의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와 대조적으로 짝을 이루며 박해자들의 시도가 실패로 끝날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의 꾐에 넘어간 자는 사람의 꾐에는 넘어가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기신 자를 사람이 이길 수는 없습니다.

(5) 신뢰 고백(11)

예레미야는 홀로 남겨졌으나,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힘센 용사처럼 자신과 함께하심을 확신합니다(참조, 1:8,19). 용감히 적진을 내달리는 용사처럼 여호와께서 박해하는 자들을 무찔러주실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넘어질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이기어 원수를 갚으려는 자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영원히 잊히지 않는 큰 치욕을 당합니다.

(6) 보복 간구(12)

왜냐하면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셔서 예레미야의 사정(송사)을 판결해주시고 보복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참조, 11:20). 보복 요청은 감정적 한풀이가 아니라 왜곡된 법질서를 바로잡아달라는 사법적 호소에 속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해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7) 찬양으로 초대(13)

그는 청자 ‘너희’에게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신’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권면합니다. 아직 고난 중에 있지만, 그는 여호와께서 개입하셔서 악한 자들의 손에서 건져주실 것을 미리 경험하고 이를 공동체와 함께 나눕니다. 예레미야 개인의 탄식과 구원이 공동체가 경험해야 할 탄식과 구원으로 그 지평이 넓어집니다.

 

절망하는 예레미야(14-18)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는 불경건한 세상 속에서 이런 고통과 굴욕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르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세상에서 고통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해야 할 고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감당해야 할 고통입니다. 사명자는 그 고통을 피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김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갈 수 있습니다.

14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나의 아버지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당신이 득남하였다 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16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무너뜨리시고 후회하지 아니하신 성읍 같이 되었더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니 17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신 까닭이로다 18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부끄러움으로 보내는고 하니라(14-18)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욥은 자기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굴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였던 예레미야도 욥과 마찬가지로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고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생일 저주(14)

모든 것이 충격적입니다. 욥기 3:1-12에서 유사한 예를 찾을 수 있지만, 예언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합니다. 예언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출생의 기쁜 소식을 자기 아버지에게 전한 사람을 저주할 수 있습니까? 소명 체험을 한 자가 어떻게 자신은 세상에 태어나지말았어야 하는 존재라고 하면서 절망할 수 있습니까? 공동체를 자신의 구원 경험에 동참하도록 초대한 자가 어떻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수 있습니까? 독자는 본문에서 예언자적 소명과 사명의 희미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곧 절망의 심연에 빠져 삶을 포기한 한 인간을 만납니다. 본문은 짙은 어둠에 사로잡혀 절망하는한 인간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가 처절한 절망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에게 여호와께서 어떻게 응답하셨는지는 달리 언급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충격과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2) 소식 전달자 저주(15-16)

넓은 문맥에서 보면 14-18절은 특히 18절에 의해 예레미야의 소명 기사(1:5-10)에 연결됩니다. 1:5에서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라고 말씀하셨다.

(3) 저주의 이유(17)

그러나 지금 예레미야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머니를 내 무덤이 되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배가 부른 채로 항상 있지 않게 하셨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여호와를 절망적으로 원망합니다(17). 이는 출생을 중심으로 여호와의 부르심과 예언자의 실존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탄식(18)

특이하게도 예레미야의 탄식은 20장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21장 이후의 예레미야는 다시는 탄식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까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예언자의 직분을 감당합니다. 탄식과 관련한 예레미야서의 이런 구조가 그저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삶의전환점을 20:14-18에서, 특히 17-18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절망의 심연에서 사람들로부터 저주받은 자로, 곧 ‘고생과 슬픔’을 보며 사는 것이 출생 전에 자신을 예언자로 성별하신 여호와의 의도임을 극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삶에 놓인 고난의 깊이와 신비를 헤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듯합니다. 이제 그는 21장 이후에서 사람들의 조롱과 치욕과 박해를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주신 몫으로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나무 고랑을 찬 것에 굴욕을 느꼈습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다시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극한 갈등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며 원수에게 복수하시며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말씀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더욱 신뢰하기 바랍니다.


구독과 공감 ♡ 은
저의 성경 연구에 큰 힘이 됩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