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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1-01)


시드기야에게 준 훈계와 경고

예레미야 21장 1-14절


이 세상 모든 인생은 종교가 어떠하든, 신앙이 어떠하든 간에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 되면, 누구든지 무엇인가를 향해 무릎 꿇고 기도나 기원하게 됩니다. 인생들의 마음속에 뿌리 깊은 이런 본능, 기도에 대한 본능은 누구나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도나 간구가 반드시 합당한 것도 아니고 또한 응답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참된 기도란 무엇이겠습니까?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포위됐을 때 유다 왕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묻는 이야기는 모든 세 번(21:1-10;37:17-21;38:14-28) 나옵니다.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다르지만, 예언자는 동일하게 멸망의 신탁을 전합니다.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운명은 이제 되돌릴 수 없게 확정됐습니다.

 

예루살렘과 시드기야의 운명(1-10)

재앙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얼굴을 돌리신 상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부재할 때 그 자비의 빛은 사라지고 무질서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배타적 사랑이 거절된 곳에 개인은 사라지고 유기와 방치의 참극이 발생합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긍휼은 여전히 흐르고 있습니까?

1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니라 2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여호와께서 혹시 그의 모든 기적으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니 3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는 시드기야에게 이같이 말하라 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너희가 성 밖에서 바벨론의 왕과 또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과 싸우는 데 쓰는 너희 손의 무기를 내가 뒤로 돌릴 것이요 그것들을 이 성 가운데 모아들이리라 5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6내가 또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성에 있는 것을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후에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전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손과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측은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8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9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나 그의 목숨은 전리품 같이 되리라(1-10)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포위되었습니다. 위급한 상황이 닥치자 비로소 시드기야 왕이 참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바스훌과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대적들이 떠나도록 간구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⑴ 신탁을 묻는 시드기야(1-2)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포위당했을 때(주전 588년 1월에서 587년 7월 사이) 유다 왕 시드기야는 말기야의 아들 바스홀과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 제사장을 예레미야에게 보내 여호와의 신탁을 구합니다(1). 시드기야는 아마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실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놀라운 이적들이나 주전 701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에 의해 포위당했다가 기적적으로 구출 받은 예루살렘의 구원을(참조, 왕하 19:35-36; 사 37:36-37)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2). 왕은 예레미야가 거듭 파산을 선포한 구원사적 전통에 의지하여 위기를 극복해보려 애씁니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순종하기보다는 자신의 바람을 여호와께서 들어주시길 기대합니다. 37:17-21과 38:14-28에서는 시드기야가 사로잡힌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불러 여호와의 의지를 묻습니다.

⑵ 예레미야의 답변(3-7)

시드기야 왕의 막연한 기대가 단호하게 거절됩니다.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예루살렘의 파국적 멸망에 관한 신탁을 주십니다(3-7). 4절의 내용은 얼마간 모호합니다. 전투가 성 밖에 서 벌어지고 있음은 예루살렘이 완전히 포위당하지 않았음을 전제합니다. ‘너희 손의 무기를 내가 뒤로 돌릴 것이요’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성 밖에서 적들과 대치하고 있던 유다 병사들이 무기를 거두어 성안으로 도망하게 하시겠다는 말처럼 보입니다. 이 경우 그것들을 이 성 가운데 모아 들이리라도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이 더 이상 항전할 수 없도록 이들의 무기를 거두어들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셨던 여호와께서 유다의 대적이 되십니다. ‘강한 손과 편 팔’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던 여호와께서 ‘든 손과 강한 팔’로 당신을 배반한 예루살렘을 치십니다(5; 참조, 이사야 5:25; 9:12,17,21; 10:4). ‘든’과 ‘편’은 히브리어로는 동일합니다. 출애굽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위해 개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을 배반한 이스라엘은 출애굽 때 큰 재앙으로 징계를 받았던 애굽과 다름이 없습니다. 독립인칭대명사가 사용된 ‘내가’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에 의해 멸망당할 것을 한층 강조합니다. 같은 의미의 단어를 세 번 반복 사용한 ‘진노와 분노와 대노’는 여호와께서 얼마나 크게 노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격노하신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살아있는 것을 칼로 치시고 전염병으로 죽이실 것입니다(6). 생명이 있는 것들은 하나도 그분의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물었던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의 운명을 따로 언급합니다(7). 성이 함락될 때 왕과 신하들이 재앙을 피해 탈출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어리석은 통치자들에게는 그런 행운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전염병과 칼과 기근을 피했을지라도 살았다고 안심하기에는 이릅니다.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과 예루살렘 성에 남은 자들은 모두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져 잔혹하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참조. 39:4-10; 52:1-16; 열왕기하 25:1-7, 18-21).

⑶ 예레미야에게 주신 신탁(8-10)

여호와의 의지를 묻는 시드기야에게 멸망의 신탁을 내리신 여호와께서 다시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어 백성에게 전하게 하십니다(8-10). 구원신학으로 무장한 정치적 단위로서의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로부터 사회적 단위인 그 구성원들을 구분합니다.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의 멸망은 확정된 운명으로 돌이킬 수 없지만, 그 주민에게는 선택의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습니다(8).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십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에게 넘겨주려는 여호와의 의지에 맞서 성안에 머물기로 작성한 자들은 칼과 기근과전염병으로 다 죽임을 당하겠지만, 그분의 경고에 따라 성을 떠나 포위하고 있는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하는 자들은, 병사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담보로 힘겹게 전리품을 얻어내듯이, 목숨은 구할 수 있습니다(9).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 불태워버리기로(52:13) 하셨기에 성을 떠나지 않는다면 성과 함께 타오르는 불길에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10). 예레미야의 선포에 따르면,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결정에 속하기에 유다와 예루살렘이 그분 판의 도구인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곧 그분의 심판의지에 자신을 내맡기는 순종이 됩니다. 한마디로 바벨론에 항복한 자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자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심판(예루살렘의 함락과 다윗 왕조의 멸망)을 받아들이고 바벨론에 항복하여 개별적으로 목숨을 구하는 것이 새로운 출발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장나지 않고 바벨론 유배민들 가운데 계속될 것을 시사해줍니다(24:1-10)

 

훈계와 경고의 말씀(11-14)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진 곳에서는 문제의 심각성을 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불행도 올 수 없다’는 맹목적인 낙관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상태가 된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노아 시대처럼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영혼의 잠에 빠져 있습니다.

11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12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 때문에 내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14내가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모든 주위를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1-14)

여호와께서 유다 왕실에 말씀하십니다. 남왕국 유다의 말기를 통치했던 왕들은 하나같이 악하고 하나님에 대해 불의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집’을 욕되게 하고 화를 자초한 미련하고도 어리석은 왕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께서 그들의 비참한 운명을 경고하시고 거듭 공의로운 삶을 촉구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 유다 왕들은 그런 하나님의 기대를 철저하게 저버리고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⑴ 왕실에 주는 말씀(11-12)

유다에게 임한 비극은 유다 왕가의 책임이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의 집’(11)과 ‘다윗의 집’(12)을 부르시고 등장시킵니다. 왕을 포함해 왕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이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다윗의 집’은 유다를 통치하는 다윗 왕가를 가리킵니다. 유다의 정치와 사회를 책임진 예루살렘 왕실과 고위관료들은 ‘아침마다 정의롭게 판결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구해 주어야 합니다. 공정한 판결을 통해 약자의 권리가 강자에 의해 유린당하지 않도록 지켜 주어야 합니다. 공정한 재판과 사회적 약자의 보호는 왕권의 의무에 속하는 덕목이자 의로운 통치의 전제조건입니다. 권력과 부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흔들리는 판결은 공동체를 갈등과 분열에 빠뜨립니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밝아오는 아침/새벽은 시편에서 자주 하나님의 보우심이 나타나는 시간으로 언급됩니다(시편 46:6;90:14;143:8). 사무엘하 15:1-6에 의하면 송사가 있는 사람들이 아침 일찍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옵니다. 왕과 그 측근들이 기본적인 의무를 등한시할 때, 이들은 아무도 끌 수 없게 타오르는 여호와의 진노의 물에 떨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불의를 범한 통치자들을 반드시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⑵ 예루살렘에 대한 신탁(13-14)

여호와께서 지정학적 위치를 과신하는 예루살렘에게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골짜기와 평원 바위의 주민아’(13a)는 ‘골짜기에 사는 자야, 평지의 바위야’로 번역한 것이 좋습니다. 방어에 유리한 천혜의 자연환경과 주전 701년 앗수르의 포위 공격에서 기적적으로 구출 받은 역사적 경험은, 교리화한 성전신학과 왕조시의 뒷받침을 받아, 통치자들뿐만 아니라 주민들에게도 예루살렘 성은 난공불락이라는 허영과 교만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안전을 확신하며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오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오!’하며 자만에 빠졌습니다.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나 매가 땅에 있는 먹이에 달려들듯이 그렇게 예루살렘을 침략할 자들은 없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와 달리 바로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을 택하신 여호와께서 이들의 대적이 되어 예루살렘을 공격하시기에 그 지정학적 장점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예루살렘 주민의 자기기만과 교만에 여호와께서 불 심판으로 응답하십니다(14). ‘수풀’은 예루살렘 주변의 수목으로 울창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너희 행위대로’는 원문에 따라 ‘너희 행위의 열매에 따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악행이 재앙을 열매 맺듯이 예루살렘의 교만이 예루살렘을 불바다로 만듭니다. 여호와께서 ‘능히 끝 자가 없는’(12) 전쟁의 불로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을 완전히 폐허로 만드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교만에 빠진 예루살렘 주민의 악한 행실을 징계하시는 여호와의 심판임을 보여줍니다.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작동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돌아서 계신 부재 상태를 경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오시도록 하는 기도와 순종이 요구됩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를 때에도 하나님 앞에 사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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