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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0-01)


목이 곧은 자들에게 임하는 재앙

예레미야 19장 14절 – 20장 6절


교회를 섬기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삶이 전혀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것은 직분을 받은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매일매일 삶을 똑같이 반복하며 그런 모습을 보곤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목사님들에게 수십 년 동안 설교를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변하지 않느냐는 갈등을 줍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자기 삶에 들어오게 하려면, 자기 생각, 요구, 가치관 그리고 주장을 말씀 아래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자신을 십자가 아래 부인하지 않고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구입하라고 했던 오지병을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일부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한 예레미야가 성으로 돌아옵니다. 이번에는 모든 백성이 듣도록 성전 뜰에서 동일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토기장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 성을 파괴하실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던 유다 성읍은 몰렉에게 제사 드리던 도벳 땅처럼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의 선포(14-15)

하나님께서 심판을 앞둔 백성에게 선지자를 통해 반복해서 그들의 죄와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이 죄를 깨닫고 거룩한 길로 다시 돌이키기를 바라시는 사랑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비해 엎드려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4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15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읍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들의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하시니라(14-15)

유다 백성이 재앙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는 목을 곧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이 가증한 죄로 언약을 깨뜨릴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 악한 길에서 돌이킬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1) 여호와의 집 뜰(14)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도벳으로 내려가 일부 증인들 앞에서 옹기를 깨뜨립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에 재앙을 선포한 후에 다시 성으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합니다(14). 성전에서 선포하는 말씀(15)은 내용적으로는 도벳에서 선포한 말씀과 동일합니다. 특히 3b절의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의 반복입니다. 여기서도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재앙을 선포합니다. 이 이름은 예루살렘 제의에서 사용하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주장하는 성전 신학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당신을 버리고 예루살렘을 더럽힌 자들에게 심판자가 되십니다.

(2) 재앙의 이유(15)

도벳에서는 함께한 소수의 장로들과 고위 제사장들만 표적 행위와 심판 선언을 보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의 심판 선언을 듣습니다. 선포한 재앙은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숭배와 폭력을 행사한 주민들이 들어야 할 여호와의 말씀입니다(4). 청자의 범위가 넓혀진 것에 상응하여 심판의 범위도 ‘이곳’ 또는 ‘이 성읍’에서 ‘이 성읍과 그 모든 촌락’으로 확대됩니다. 재앙이 예루살렘을 넘어 그 주변 마을들에도 임합니다. 고발의 초점이 예루살렘에 맞춰지지만, ‘여호와를 버림’에 있어 다른 지역도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재앙을 초래하는 죄악으로 앞 단락에서는 구체적으로 도벳의 어린아이 희생 제사(5)와 천체숭배(13)를 언급하는데, 여기서는 포괄적으로 ‘그들이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들지 아니함이라’라고 말합니다. 백성들의 불순종은 의지적이고 노골적이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전혀 무시하고 완악하게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바스홀과 예레미야(20:1-6)

지도자 한 사람이 바르게 행하면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지도자 한 사람의 잘못으로 많은 사람이 불행해질 수도 있습니다. 성전의 총감독 바스홀이 예레미야를 핍박한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와 예루살렘을 향해 무서운 쟁앙을 선고하십니다.

1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은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두었더니 3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에서 풀어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4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5내가 또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넘기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6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포로 되어 옮겨지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도 그와 같으리라 하셨느니라(1-6)

성전의 질서를 관장하던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성전 출입문 가운데 하나인 베냐민의 윗 문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인 성전을 하나님이 손수 파괴한다고 선포하니 아무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고, 사회 혼란만 야기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1) 바스홀 소개(1)

여로보암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유배를 선포하는 아모스를 침묵시키려고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나섰던 것처럼(암 7:10-13), 예레미야가 성전 뜰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포하자 예루살렘 성전의 고위당국자가 공세에 나섭니다. 예레미야의 예언 선포를 들은 임멜의 아들 바스홀이 그를 때리고 체포해서 구금합니다. 제사장 바스홀의 직분을 보여주는 ‘여호와의 성전의 총감독’은 성전과 그 주변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일의 총책임을 맡은 자로, 성전의 최고위층에 속했습니다. 성전 주위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기에 치안 유지가 중요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소란을 피우는 자들을 체포해 벌을 주는 것도 성전의 총감독에게 맡겨진 임무였습니다. 바벨론에서 예언자로 활동한 스마야가 제사장 스바냐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나오는 한 대목도 이를 잘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제사장을 삼아 여호와의 성전 감독자로 세우심은 모든 미친 자와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을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과 목에 씌우는 쇠고랑을 채우게 하심이어늘 이제 네가 어찌하여 너희 중에 선지자 노릇을 하는 아나돗 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29:26-27).

(2) 예레미야의 구금(2)

예루살렘 성전을 대표하는 바스홀의 눈에 예레미야는 성전 주위에서 ‘예언자 행세하는 미친놈’에 불과했습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예레미야에게 모욕적인 징벌이 가해졌습니다. 바스홀은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베냐민 문 위층에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채워두었다.’ ‘베냐민 문’은 성전 북쪽으로 면한 문이었고, ‘위층’은 베냐민 문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대에 위치했기에 붙여진 수식어입니다. ‘목에 씌우는 나무 고랑’으로 번역한 ‘마흐페켓트’가 어떤 형태의 체벌 도구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신체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도록 손이나 발 또는 목에 거는 막대기와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3) 마골밋사빕(3)

예언자를 사칭하는 자로 체포하여 체벌과 모욕을 가한 바스홀에게 예레미야가 예언자의 권위를 과시하며 반격을 가합니다. 아모스가 추방을 명하는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에게 주저 없이 멸망을 선언한 것처럼(암 7:16-17), 다음 날 풀려난 예레미야도 바스홀에게 특별한 심판 선언으로 단호하게 응수합니다.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홀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법이라 하시느니라.” 예레미야는 6:22-26에서 땅 끝 북방에서 내려오는 한 민족에 의해 시온이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을 예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밭에도 나가지 말라 길로도 다니지 말라 원수의 칼이 있고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라”(25). 시온에 선포된 ‘사방의 두려움’이 이제 바스홀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됩니다. 성전의 치안과 질서를 대표하던 바스홀이 이제는 반대로 자신과 유다에 임하게 될 혼란과 두려움의 상징이 됩니다. ‘호루스의 아들’(바스홀)이 ‘사방에 두려움’(마골밋사빕)이 됩니다. 마골밋사빕으로 이름이 바뀐바스홀을 볼 때, 사람들은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적들로 인해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히게 될 유다의 운명을 예감하게 됩니다.

(4) 마골밋사빕의 해석(4-5)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마골밋사빕이 상징하는 바를 바스훌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바스훌이 그의 친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도 두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스훌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든 친구가 원수의 칼에 맞아 쓰러질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주기로 하셨으므로 어느 누구도 재앙을 피하지 못합니다. 모두 침략자의 칼에 엎드러집니다.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간다고 목숨을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자들은 그곳에서 칼에 맞아 죽습니다. 유다는 백성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애써 모은 재물도 모두 빼앗깁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읍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중품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바벨론 침략군의 손에 넘겨주십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재물과 유다 왕들의 보물이 약탈당해 바벨론으로 옮겨집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폐허가 됩니다. ‘바벨론 왕’과 ‘바벨론’은 4절에서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했던 북쪽에서 내려오는 대적의 정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집니다. 이사야 시대에 반역한 이스라엘과 유다를 앗수르의 손에 넘기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바벨론을 불러 당신께 등을 돌린 유다를 혹독하게 심판하십니다.

(5) 바스홀과 동료의 유배(5)

바벨론 침략군에 의해 친구들이 죽임당하는 것을 보는 것은 바스홀에게 닥칠 재앙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바스홀은 자신의 집안 사람들과 함께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거기서 죽고 거기에 묻힙니다.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추방당한 것입니다. 고향에서 조상들과 함께 마지막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더러운 이 방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바스홀의 저주받은 운명은 그의 모든 친구에게로 확대됩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로 유배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너의 거짓 예언을 들은 네 모든 친구들’도 바스홀과 같은 운명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아마도 유다 백성이 평강과 구원을 선포한 거짓 예언자들을 지지하고 후원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러한 심판의 말씀을 선언했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이 죄에서 떠나지 않아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멸망당하리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심히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많은 사람이 거부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에 생명의 길이 있기에 쉬지 말고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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