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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22-02)

 


유다 악한 왕들의 결말

예레미야 22장 10-19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며, 그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다스릴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 감당하기를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나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악한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좋은 영적 습관을 지니도록 노력합시다.

 

정의와 공의에 근거해 유다의 왕권을 포괄적으로 고발하고(21:11-22:9), 뒤이어 시선을 유다 왕 살룸과 여호야김과 고니야의 개별적 운명으로 돌립니다(22:10-30). 특히 여호야김의 불의한 통치를 그의 아버지 요시야의 의로운 통치와 대비하여 고발합니다.

 

살룸 왕에 대한 말씀(10-12)

축복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선한 통치자를 세워 주셔서 형통함의 복이 임하게 하시고, 멸망의 시대에는 악한 통치자가 세워져 심판을 부르게 하십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축복의 시대를 만들어 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는 슬픔과 비극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왕들이 통치하는 나라에 심판과 멸망이 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10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 11여호와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 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가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2잡혀 간 곳에서 그가 거기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10-12)

이방 세력을 견제하고 다윗 왕조의 회복을 기대했던 요시야 왕이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주전 609년). 죽은 왕을 위해 애가를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의 전통이지만, 하나님은 요시야 왕을 위해 울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대신 애굽에 포로로 끌려가 결코 돌아오지 못할 살룸(여호아하스) 왕을 위해 슬피 울라고 하셨습니다.

(1) 예언자의 애도 명령(10)

주전 7세기 말엽 고대 근동의 정치지형도가 급격하게 요동쳤습니다. 주전 612년 바벨론이 메대와 연합하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하고, 주전 610년 앗수르의 마지막 왕 앗수르-우발리트 2세를 하란에서 쫓아냅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새로운 강자가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애굽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그 와중에 유다의 개혁 군주 요시야가 희생당합니다. 주전 609년 애굽 왕 느고는 바벨론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직접 원정군을 이끌고 유브라데로 올라가고, 유다 왕 요시야는 므깃도로 내려갑니다. 요시야 왕이 어떤 이유나 목적에서 므깃도로 내려갔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다수의 주장에 따르면 애굽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역대하 35:20-24은 므깃도에서 애굽과 유다 사이에 전쟁이 있었음을 전제하고, 열왕기하 23:29은 바로가 요시야 개인을 사로잡아 죽인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요시야가 애굽의 느고에 의하여 므깃도에서 죽자 ‘백성들’(암하아레츠)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추대합니다. 두 살 위인 엘리아김 대신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가 후계자로 지명된 이유나 배경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시도는 가나안과 시리아의 통치권을 주장하는 애굽 왕 느고의 간섭으로 수포가 됩니다. 스물세 살에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의 통치(609년)는 삼 개월 만에 끝납니다. 애굽의 느고는 여호아하스를 자신의 사령부가 있던 오론테스 강가의 립나(리블라)로 불러 감금하고 유다에는 막중한 배상금을 부과합니다. 여호아하스는 후에 포로의 몸으로 애굽으로 끌려가 거기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습니다. 느고는 여호아하스의 자리에 그의 형 엘리아김을 앉히고, 그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꿉니다.

(2) 여호와의 말씀(11-12)

다윗 왕에 필적할 만한 평가를 받는 유다의 마지막 개혁 군주 요시야의 죽음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큰 슬픔에 빠뜨렸습니다(참조, 대하 35:24-25). 사람들은 울면서 요시야의 비극적 운명을 애통해하지만, 이는 재앙의 시작에 불과할 뿐입니다. 더 큰 상실과 슬픔이 유다의 몫으로 마련돼 있었습니다. 불행한 죽음이지만 고향땅에 묻힐 수 있었던 요시야의 운명이 살았지만 애굽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어 이방 땅에 묻히게 될 살룸(여호아하스)의 운명보다는 더 낫습니다. 이방왕에 의해 폐위되어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 땅에서 삶을 마감해야 하는 ‘다윗의 왕위에 앉은 유다 왕’(2)은 가까운 미래에 유다가 경험하게 될 비극의 전조에 해당합니다. 유다는 자신의 왕마저 지킬 수 없는 초라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살룸에 대한 말씀은 그의 귀환을 고대하던 자들에게 헛된 꿈을 버리라고 주는 권면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에 의해 왕위에 오른 여호야김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 특히 ‘땅의 백성’은 유배당한 왕이 돌아와서 요시야 왕의 질서를 다시 회복해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는 살룸이 이방 땅에서 죽을 것을 선언하면서 헛된 소망에서 깨어날 것을 촉구합니다.

 

여호야김의 운명(13-19)

자신이 누릴 복에만 관심이 있고,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은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집중할 때 참된 영광과 형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호야김은 유다가 애굽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쳐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 영광을 누리려 했습니다.

13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4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15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6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18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19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13-19)

예레미야는 살룸 왕의 후계자인 여호야김 왕의 죄악에 대해 고발합니다. 여호야김 왕은 백성을 착취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궁전을 지었습니다. 이방 왕들과 마찬가지로 왕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탐심을 채우고자 했습니다. 그는 탐욕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가난한 자를 압제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은 목자와 같이 백성을 섬세하게 돌보는 왕입니다.

(1) 고발의 말씀(13-17)

자신의 왕궁을 증축하고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 불의를 일삼는 여호야김 왕(주전 608-598년)에 대해 예레미야는 화를 선언합니다. 바로 느고의 선택에 따라 다윗의 왕위에 오른 여호야김은 애굽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였을 뿐만 아니라(왕하 23:35) 자기가 살 왕궁을 확장하고 치장하기 위해 노동력을 부당하게 착취했습니다(13-14). 그는 품삯을 지급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노역장으로 끌어냈습니다(참조. 신 24:14-15). 좋은 나무로 크고 넓은 집과 누각을 짓고 화려하고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그 자체로는 특별히 책망받을 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아무런 품삯도 주지 않고 사적인 일에 백성들을 임의로 부려 먹는 왕권의 남용입니다. 절대 권력을 주장하는 주변 나라들의 전제군주들처럼 유다의 왕이 제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백성을 종처럼 부렸습니다. 13절의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는 문자적으로 옮기면 ‘정의가 아닌 것으로 제 집을, 공의가 아닌 것으로 누각을 세우는’이 됩니다. 정의와 공의(참조. 22:3; 23:5)로 집을 세워야 할 왕이 솔선하여 불의와 부정으로 왕궁을 웅장하고도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한마디로, 여호야김은 정의 대신 ‘정의가 아닌 것’으로, 공의 대신 ‘공의가 아닌 것’으로 통치했습니다. 건축 사업에 강제 동원된 일꾼들을 지칭하는 ‘자기의 이웃’도 주목할 만합니다. 예언자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유다의 왕과 백성은 서로에게 이웃이 되어야 함에도 여호야김은 사유물처럼 백성을 착취했습니다. 백성은 왕의 이웃이지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는 그의 종이 아닙니다. 다락방에 낸 ‘창문’은 아마도 신하들의 알현을 받기 위해 뚫어놓은 창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15-17절에서 여호와께서는 여호야김(정의가 아닌 것과 공의가 아닌 것으로 통치한 왕)을 그의 아버지 요시야(정의와 공의로 통치한 왕)와 대비하여 엄중하게 책망하십니다. 가난한 자들과 궁핍한(억눌린)자들의 법적 권리를 보호해주며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며 산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값비싼 레바논 백향목으로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어 자신의 왕권을 과시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로운 통치를 본받지 않았습니다. 그는 통치자의 권위와 권력을 건축물의 웅장함과 화려함에서 찾았습니다. 15b절은 ‘네 아버지는 먹고 마시면서도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았느냐? 그때 그에게(모든 일이) 잘 되었느니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요시야는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면서도 왕으로서 누릴 것을 모두 누렸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며 의롭게 통치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일에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앎’은 인식행위에 속하거나 제의 규정의 준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사회·경제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해주는 것이 바로 여호와를 아는 자의 삶입니다(참조. 22:3). 요시야 왕은 여호와를 아는 삶을 살았기에 그분으로부터 축복을 받아서 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16). 아버지는 여호와를 아는 통치자의 삶이 어떠한 삶인지를 본보기로 보여주었지만, 아들은 제 마음의 결정에 따라 제 눈에 좋을 대로 행동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정의와 공의를 존중하는 대신에 폭력적이며 탐욕적인 공권력을 무기로 부정한 이익을 추구하며 비판자들을 억눌렀습니다(17; 참조. 왕하 24:4).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라도 짓밟거나 목숨을 빼앗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참조. 26:23).

(2) 심판 선언(18-19)

‘그러므로’로 시작하는 18-19절은 여호와의 정의와 공의를 무시하고 제 이익을 위해 왕권을 사유화한 여호야김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심판의 내용이 두 가지로 언급됩니다. 첫째, 누구도 불의한 왕의 죽음을 슬퍼하며 애곡하지 않을 것입니다(18). 다시금 아버지와 대비됩니다. 의로운 통치자 요시야가 죽었을 때는 많은 사람이 슬퍼하며 그를 위해 애도했지만(10), 그 아들의 죽음은 아무도 슬퍼하며 통곡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야김은 왕의 죽음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 영광’은 왕을 가리키는 존칭으로 ‘폐하’로 옮길 수 있습니다. 둘째, 여호야김에게는 왕에 합당한 장례가 없을 것입니다(19; 참조. 36:30). 그의 시신은 가족 묘지에 안장되지 못하고 나귀와 같은 짐승들의 주검처럼 예루살렘 성문 밖에 아무렇게나 버려질 것입니다.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는 모순어법(서로 모순되는 단어나 어구를 나열한 표현법)에 속합니다. 죽은 나귀는 내다 버리지 매장하지 않습니다. 여호야김의 주검은 나귀의 주검처럼 들판에 버려져 들짐승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세계는 정상적인 장례 절차에 따라 묘지에 묻히지 못한 죽음을 저주받은 자의 치욕적인 죽음으로 간주했습니다. 사적 이익을 위해 불의와 불법과 폭력으로 백성을 억압한 여호야김에게는 지하 세계에서의 영원한 안식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들을 세우시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10절에 죽은 자는 유다 왕 요시야로서 그는 선정(善政)을 베풀다가 애굽왕 느그 왕의 무기 또 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잡혀간 자는 요시야에 이어 살룸을 말하는데, 그는 왕에 오른지 3개월도 못 되어 애굽 왕 바로 느고에 의해 애굽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선정을 베풀다 죽은 요시야만을 그리워하며 애통하지 말고 악정을 하다가 잡혀간 요아스를 위하여 슬피울라고 하십니다. 이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의 문제를 어디 있는지를 깨달아 알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아름답게 살았어도 현재 제악된 생황을 하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련제 하나님 앞에서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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